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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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제42과엘리야의 선(1)
열왕기하 2:11
읽을말씀 : 열왕기하 2:11 | 외울말씀 : 열왕기하 2:11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4:7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 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지요.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 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나아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렸지요(약 5:17~18).
이 밖에도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그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이지요.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했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 데다 하나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합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 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지요.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 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나아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렸지요(약 5:17~18).
이 밖에도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그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이지요.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했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 데다 하나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합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024-10-11
제41과아브라함의 선(2)
히브리서 11:17~19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17~19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19 | 참고 말씀: 민수기 23:1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창 12:1)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채비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지요.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를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해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기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99세,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여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 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창 12:1)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채비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지요.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를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해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기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99세,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여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 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2024-10-04
제40과아브라함의 선(1)
창세기 13:8~9
읽을말씀 : 창세기 13:8~9 | 외울말씀 : 창세기 13:9 | 참고 말씀: 창세기 14:22~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선이 무엇인지 깨달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며 지극한 선을 느끼며 소유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며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더 이상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말합니다(창 13:8~9).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으니, 그 마음 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어도 아브라함은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김으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고백합니다(창 14:22~23).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0절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고 해도 허물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功)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처럼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훗날까지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돌렸기 때문에 그가 부해졌다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므로 참된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아비멜렉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야 할 그에게 오히려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아비멜렉이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되었지요.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했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 선지자의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담긴 성경 구절을 고르세요.
① 창세기 13:9 ② 출애굽기 32:32 ③ 창세기 12:1 ④ 창세기 22:12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은?
①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다.
② 자신이 취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취했다.
③ 거저 주겠다는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④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늑탈했을 때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분쟁의 소지가 없게 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막벨라’ 굴이란?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 소유의 땅을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막벨라 굴이란 그 땅 안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선이 무엇인지 깨달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며 지극한 선을 느끼며 소유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며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더 이상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말합니다(창 13:8~9).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으니, 그 마음 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어도 아브라함은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김으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고백합니다(창 14:22~23).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0절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고 해도 허물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功)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처럼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훗날까지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돌렸기 때문에 그가 부해졌다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므로 참된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아비멜렉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야 할 그에게 오히려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아비멜렉이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되었지요.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했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 선지자의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담긴 성경 구절을 고르세요.
① 창세기 13:9 ② 출애굽기 32:32 ③ 창세기 12:1 ④ 창세기 22:12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은?
①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다.
② 자신이 취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취했다.
③ 거저 주겠다는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④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늑탈했을 때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분쟁의 소지가 없게 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막벨라’ 굴이란?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 소유의 땅을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막벨라 굴이란 그 땅 안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2024-09-27
제39과모세의 선(2)
민수기 12:3, 7
읽을말씀 : 민수기 12:3, 7 | 외울말씀 : 민수기 12:3 | 참고 말씀: 출애굽기 32:31~32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로 일관하는 선(善)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어떠한 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봐 주며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기만 해도 원망 불평을 쏟아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부르짖던 자신들을 건져 주었는데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러다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하자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모세가 기도하여 마시게 하자 잠잠해졌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니(출 16:3)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 불평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할 기세로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먹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는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그리고 진정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 32:32)라고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백성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자기 생명을 담보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지요.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 구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영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요.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 등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신뢰하시며 큰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놀라운 권능을 나타냈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민망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음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건만 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모세는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늘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여 ‘내가 맡은 사명이 무겁고 너무 힘들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마음 졸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17장 7~8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모세의 선을 닮아 온유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거목이 되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뜨거운 뙤약볕의 광야 ②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것
③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④ 우상
2.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주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찾아 쓰세요. (출애굽기 장 절)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만나’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작고 둥글며 희고, 모양은 깟씨(고수씨-미나릿과에 속하는 고수 나물의 종자) 또는 진주처럼 생겼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꿀이나 기름 섞은 과자 맛이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로 일관하는 선(善)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어떠한 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봐 주며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기만 해도 원망 불평을 쏟아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부르짖던 자신들을 건져 주었는데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러다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하자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모세가 기도하여 마시게 하자 잠잠해졌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니(출 16:3)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 불평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할 기세로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먹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는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그리고 진정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 32:32)라고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백성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자기 생명을 담보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지요.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 구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영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요.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 등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신뢰하시며 큰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놀라운 권능을 나타냈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민망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음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건만 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모세는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늘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여 ‘내가 맡은 사명이 무겁고 너무 힘들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마음 졸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17장 7~8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모세의 선을 닮아 온유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거목이 되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뜨거운 뙤약볕의 광야 ②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것
③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④ 우상
2.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주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찾아 쓰세요. (출애굽기 장 절)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만나’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작고 둥글며 희고, 모양은 깟씨(고수씨-미나릿과에 속하는 고수 나물의 종자) 또는 진주처럼 생겼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꿀이나 기름 섞은 과자 맛이다.
2024-09-20
제38과모세의 선(1)
히브리서 11:24~26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24~26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25 | 참고 말씀: 잠언 17:3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해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더욱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심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학대했지요. 그런데도 그들이 더욱 번성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후손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모세를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온 하수로 그 갈대 상자가 떠내려오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발견한 공주가 모세를 불쌍히 여겨 물에서 건져내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 받으면서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진 일들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여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있는 한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편에는 항상 친어머니에게서 들은 하나님과 애굽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말리려 하자,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며 노를 발했지요.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 힘과 지식을 동원해 자기 민족을 도와주고자 했건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나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봐 모르는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대국 왕자로서 누리던 영화도, 기름지고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라져 버렸지요.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지요.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해 자신의 상황에 낙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왕자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점점 광야 생활이 적응되어 가자, 이제는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는 것이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취하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도 심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감도 있고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요, 민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기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됨을 먼저 갖추게 하십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지요.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혹독한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해 절망하지는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큰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혹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어서 계속해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받을 때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 정답을 써넣어 보세요.
① ___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___받는 것을 택했다.
② ___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___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녕 지는 해를 보고도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나이다. 내가 취하고자 하여도 취하여지지 않고 갖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이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허무한 자인데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내 마음속에서 믿나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로’란?
고대 애굽 왕들의 일반적인 호칭이다.
애굽어 ‘프로’의 음역으로 본래 ‘커다란 집’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점차 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추석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해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더욱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심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학대했지요. 그런데도 그들이 더욱 번성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후손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모세를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온 하수로 그 갈대 상자가 떠내려오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발견한 공주가 모세를 불쌍히 여겨 물에서 건져내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 받으면서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진 일들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여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있는 한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편에는 항상 친어머니에게서 들은 하나님과 애굽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말리려 하자,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며 노를 발했지요.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 힘과 지식을 동원해 자기 민족을 도와주고자 했건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나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봐 모르는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대국 왕자로서 누리던 영화도, 기름지고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라져 버렸지요.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지요.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해 자신의 상황에 낙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왕자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점점 광야 생활이 적응되어 가자, 이제는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는 것이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취하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도 심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감도 있고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요, 민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기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됨을 먼저 갖추게 하십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지요.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혹독한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해 절망하지는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큰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혹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어서 계속해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받을 때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 정답을 써넣어 보세요.
① ___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___받는 것을 택했다.
② ___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___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녕 지는 해를 보고도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나이다. 내가 취하고자 하여도 취하여지지 않고 갖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이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허무한 자인데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내 마음속에서 믿나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로’란?
고대 애굽 왕들의 일반적인 호칭이다.
애굽어 ‘프로’의 음역으로 본래 ‘커다란 집’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점차 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추석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4-09-17
제0과추석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민수기 6:24~26
읽을말씀 : 민수기 6:24~26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4-09-13
제37과사도 바울의 선(2)
로마서 9:1~3
읽을말씀 : 로마서 9:1~3 | 외울말씀 : 로마서 9:3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2:1~5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진하게 하나님께 올려졌지요.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권능을 베풀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요,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모진 핍박과 환난을 겪을 때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애통하였지요(빌 3:18).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로마서 9장 1~3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심지어 유대인 중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신약 시대 최고의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게 물려도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크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아지지 않았고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하지요.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셨지요.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해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았습니다. 그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였다가 은혜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지요. 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3. 자신을 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스러운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며, 자신을 들레지 않지요. 또 깊고 비밀스러운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 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는데, 자기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습니다.
혹여 여러분 중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인도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만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는 마음에서 행동하지 않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목자님께 기도 받은 손수건(행 19:11~12)으로 환자가 치료받았을 때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요. 결코 자신의 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쓰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도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도 바울에 관한 설명입니다. 맞는 것에 표시해 보세요.
①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베풀었다( )
②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 )
③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다( )
④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던 현장에 있었다( )
⑤ 바울에 의해 쓰인 바울 서신은 총 14권이다( )
2. 사도 바울의 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맺혀 있는지를 점검해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울 서신’이란?
바울에 의해 쓰인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쓰인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진하게 하나님께 올려졌지요.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권능을 베풀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요,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모진 핍박과 환난을 겪을 때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애통하였지요(빌 3:18).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로마서 9장 1~3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심지어 유대인 중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신약 시대 최고의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게 물려도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크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아지지 않았고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하지요.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셨지요.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해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았습니다. 그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였다가 은혜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지요. 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3. 자신을 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스러운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며, 자신을 들레지 않지요. 또 깊고 비밀스러운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 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는데, 자기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습니다.
혹여 여러분 중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인도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만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는 마음에서 행동하지 않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목자님께 기도 받은 손수건(행 19:11~12)으로 환자가 치료받았을 때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요. 결코 자신의 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쓰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도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도 바울에 관한 설명입니다. 맞는 것에 표시해 보세요.
①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베풀었다( )
②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 )
③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다( )
④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던 현장에 있었다( )
⑤ 바울에 의해 쓰인 바울 서신은 총 14권이다( )
2. 사도 바울의 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맺혀 있는지를 점검해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울 서신’이란?
바울에 의해 쓰인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쓰인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2024-09-06
제36과사도 바울의 선(1)
고린도전서 15:9~10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5:9~10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5:10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1:23~27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감동하게 했던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기 좋아하고, 변론을 즐겨 했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장 3절에 기록된 대로 당대 최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 의에는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하지만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가 다메섹이라는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며 나타나시지요.
이 일이 있고 난 뒤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지요.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잘 나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고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될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슬퍼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뵐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했으나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시며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의 마음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바울은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아니하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회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 힌트 - 다메섹, 주님)
3.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된다면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나요?
4.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다메섹’이란?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회심한 곳으로 고대 수리아(아람)의 성읍이다.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감동하게 했던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기 좋아하고, 변론을 즐겨 했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장 3절에 기록된 대로 당대 최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 의에는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하지만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가 다메섹이라는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며 나타나시지요.
이 일이 있고 난 뒤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지요.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잘 나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고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될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슬퍼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뵐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했으나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시며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의 마음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바울은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아니하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회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 힌트 - 다메섹, 주님)
3.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된다면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나요?
4.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다메섹’이란?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회심한 곳으로 고대 수리아(아람)의 성읍이다.
2024-08-30
제35과나아만의 선(善)
누가복음 4:27
읽을말씀 : 누가복음 4:27 | 외울말씀 : 역대하 20:20 | 참고 말씀: 열왕기하 5장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나 예수님과 함께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요.
누가복음 4장 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했습니다.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선(善)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여자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합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렸고, 그는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이 강퍅했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무시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선(善)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지요.
또한 열왕기하 5장 5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이 없었습니다. 오직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 다해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전하지요.
무척 기분이 상한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합니다. 단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지요.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며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를 권유합니다(왕하 5:13). 여기서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에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입니다. 요단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이지요.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 결과 문둥병을 온전히 치료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지요(왕하 5:14).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선(善)
누가복음 17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단 한 사람만 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치료받고 응답받고 나면 많은 사람이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변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5장 15절에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지요. 치료받은 후 자신과 함께 온 모든 사람을 데리고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즉시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했지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받았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과 짝하며 돈을, 명예를, 권세를 사랑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그중에는 하나님을 아예 떠나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한 것뿐인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러지 않기에 이런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 17~18절에 보면 나아만이 자기를 종으로 낮추어 엘리사에게 겸손히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지요.
림몬의 당, 즉 이방신 앞에서 몸을 굽히는 것도 나아만 장군은 굉장히 하나님 앞에 민망히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방신을 섬기거나 경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해 본의 아니게 몸을 굽힐 수밖에 없는데 이것까지도 용서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나아만 중심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는데도 이방인인 나아만을 택해 영광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누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는, 변개함 없는 중심을 가졌는지를 아시지요. 그래서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큰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변개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한 번 받은바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설령 내가 해를 받을지라도 변개하지 않은 중심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이 신속히 임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아만처럼 선하고 변개함이 없는 곧은 중심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 )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 )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 )하리라 하고”(역대하 20:20)
2. 나아만 장군에 관한 내용입니다. 맞으면 ○를 하세요.
①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
②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 )
③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이다( )
④ 치료받은 후 아람으로 돌아가서 림몬 신을 섬겼다(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림몬’이란?
‘사납게 외친다’, ‘포효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람의 신이다.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나 예수님과 함께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요.
누가복음 4장 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했습니다.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선(善)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여자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합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렸고, 그는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이 강퍅했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무시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선(善)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지요.
또한 열왕기하 5장 5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이 없었습니다. 오직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 다해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전하지요.
무척 기분이 상한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합니다. 단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지요.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며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를 권유합니다(왕하 5:13). 여기서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에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입니다. 요단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이지요.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 결과 문둥병을 온전히 치료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지요(왕하 5:14).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선(善)
누가복음 17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단 한 사람만 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치료받고 응답받고 나면 많은 사람이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변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5장 15절에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지요. 치료받은 후 자신과 함께 온 모든 사람을 데리고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즉시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했지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받았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과 짝하며 돈을, 명예를, 권세를 사랑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그중에는 하나님을 아예 떠나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한 것뿐인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러지 않기에 이런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 17~18절에 보면 나아만이 자기를 종으로 낮추어 엘리사에게 겸손히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지요.
림몬의 당, 즉 이방신 앞에서 몸을 굽히는 것도 나아만 장군은 굉장히 하나님 앞에 민망히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방신을 섬기거나 경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해 본의 아니게 몸을 굽힐 수밖에 없는데 이것까지도 용서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나아만 중심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는데도 이방인인 나아만을 택해 영광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누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는, 변개함 없는 중심을 가졌는지를 아시지요. 그래서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큰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변개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한 번 받은바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설령 내가 해를 받을지라도 변개하지 않은 중심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이 신속히 임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아만처럼 선하고 변개함이 없는 곧은 중심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 )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 )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 )하리라 하고”(역대하 20:20)
2. 나아만 장군에 관한 내용입니다. 맞으면 ○를 하세요.
①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
②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 )
③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이다( )
④ 치료받은 후 아람으로 돌아가서 림몬 신을 섬겼다(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림몬’이란?
‘사납게 외친다’, ‘포효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람의 신이다.
2024-08-23
제34과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2)
다니엘 3:17~18, 6:21~22
읽을말씀 : 다니엘 3:17~18, 6:21~22 | 외울말씀 : 다니엘 3:18 | 참고 말씀: 잠언 17:9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본받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고 인정받았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었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들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든 후 낙성예식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참석하게 했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지요. 왕은 누구든지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풀무 불에 던져질 시험 속에서도 우상 앞에 절대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지요.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지요.
이러한 선한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 부닥쳐도 서운해하거나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 변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 불에 던져 넣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며 변함없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 한 사람으로 마음이 민첩하고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지요.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궁지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하자 율법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지요.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해 30일 동안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악한 무리의 궤계를 왕에게 고하여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않았고 악한 무리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지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전대로 하루 세 번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온전히 믿어드렸지요.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직접 상대에게 말은 하지 않지만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그의 약점이나 단점을 말합니다. 상대를 위해 말했다고 하겠지만 마음이 선하면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악한 무리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에 악한 무리는 즉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그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알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기악을 그치고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 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을 부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속에서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것이었지요.
구구절절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이나 서운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지를 염려했지요. 밤새 자신이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새벽 일찍 달려온 왕에게 다니엘은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며 왕을 먼저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하며 조금도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합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 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니엘 3장 18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하나님께서 ( )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다.
② 생명의 위협이 와도 ( )을 지키기 위해 절대 ( )하지 않았다.
③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 )를 끼치지 않았다.
④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 )해 주었다.
3.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어찌하든 선한 말로 상대가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편인가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풀무’란?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도가니, 쇠로 만들어져서 금속 등을 용해하여 제련하는 용광로를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 있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본받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고 인정받았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었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들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든 후 낙성예식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참석하게 했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지요. 왕은 누구든지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풀무 불에 던져질 시험 속에서도 우상 앞에 절대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지요.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지요.
이러한 선한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 부닥쳐도 서운해하거나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 변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 불에 던져 넣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며 변함없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 한 사람으로 마음이 민첩하고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지요.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궁지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하자 율법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지요.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해 30일 동안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악한 무리의 궤계를 왕에게 고하여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않았고 악한 무리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지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전대로 하루 세 번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온전히 믿어드렸지요.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직접 상대에게 말은 하지 않지만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그의 약점이나 단점을 말합니다. 상대를 위해 말했다고 하겠지만 마음이 선하면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악한 무리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에 악한 무리는 즉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그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알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기악을 그치고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 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을 부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속에서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것이었지요.
구구절절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이나 서운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지를 염려했지요. 밤새 자신이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새벽 일찍 달려온 왕에게 다니엘은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며 왕을 먼저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하며 조금도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합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 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니엘 3장 18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하나님께서 ( )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다.
② 생명의 위협이 와도 ( )을 지키기 위해 절대 ( )하지 않았다.
③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 )를 끼치지 않았다.
④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 )해 주었다.
3.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어찌하든 선한 말로 상대가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편인가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풀무’란?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도가니, 쇠로 만들어져서 금속 등을 용해하여 제련하는 용광로를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