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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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3
제25과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마 18:21-22
읽을말씀 : 마 18:21-22 | 외울말씀 : 마 18:22
교육목표 :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모든 사람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감동을 줄 수 있는 복된 자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용을 베푼다고 하지만 상대의 잘못을 두세 번 정도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한계를 두지 않으십니다.
혹여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므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무한대의 용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쭙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크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 즉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490번만 용서해 주셨다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면 모든 죄를 사함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며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창세기 18-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심히 중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멸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살려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고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살피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청하였지요. 여러 차례의 간청을 통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가득 찬 나머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살피러 온 하나님의 사자들까지 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7-8에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했습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용서를 거듭한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악의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멸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이와는 달리,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고 즉시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례가 나옵니다. 니느웨 성의 경우, 그들의 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즉시 멸하시지 않고 요나 선지자를 보내 회개할 것을 경고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니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용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33:14-15에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끝까지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니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받았습니다. 시편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하신 대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무한한 용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으로 하나요, 능력으로 하나이시며, 마음으로 하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용서하시되 완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을지라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셨습니다(눅 23:34). 여기서 "저희"란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희롱하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할 온 인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빛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랑의 간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60에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 행해 나가려고 하면 어두움을 주관하는 원수 마귀는 이를 싫어하여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며 핍박합니다. 또한 전도하다 보면 오히려 조롱하며 훼방을 놓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영안을 열어 주셔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우리와 같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는 사랑의 간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5:16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 곧 사함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6:4-6에도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0:26-27에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게 선을 베풀고 잘 해 주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축복해 줌으로 그들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용서의 사랑을 베풀며 모든 사람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모든 사람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감동을 줄 수 있는 복된 자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용을 베푼다고 하지만 상대의 잘못을 두세 번 정도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한계를 두지 않으십니다.
혹여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므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무한대의 용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쭙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크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 즉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490번만 용서해 주셨다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면 모든 죄를 사함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며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창세기 18-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심히 중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멸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살려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고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살피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청하였지요. 여러 차례의 간청을 통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가득 찬 나머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살피러 온 하나님의 사자들까지 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7-8에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했습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용서를 거듭한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악의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멸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이와는 달리,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고 즉시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례가 나옵니다. 니느웨 성의 경우, 그들의 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즉시 멸하시지 않고 요나 선지자를 보내 회개할 것을 경고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니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용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33:14-15에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끝까지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니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받았습니다. 시편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하신 대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무한한 용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으로 하나요, 능력으로 하나이시며, 마음으로 하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용서하시되 완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을지라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셨습니다(눅 23:34). 여기서 "저희"란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희롱하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할 온 인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빛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랑의 간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60에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 행해 나가려고 하면 어두움을 주관하는 원수 마귀는 이를 싫어하여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며 핍박합니다. 또한 전도하다 보면 오히려 조롱하며 훼방을 놓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영안을 열어 주셔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우리와 같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는 사랑의 간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5:16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 곧 사함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6:4-6에도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0:26-27에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게 선을 베풀고 잘 해 주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축복해 줌으로 그들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용서의 사랑을 베풀며 모든 사람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06-06-16
제24과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7
읽을말씀 : 고전 13:7 | 외울말씀 : 고전 13:7
교육목표 :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일반적으로 오래 참음이라 하면 많은 시간을 지루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영적인 오래 참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대를 생각하므로 수년을 분초와 같이 보냈다"는 고백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리움이 컸던 만큼, 기다림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 또한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향하신 사랑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며(벧후 3:8) 오래 참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여러 부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표현이 있는데 똑같이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진정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 맞춰 주지 않으면 이내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상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일 때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었으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지요.
심지어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안겨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도 상대가 변심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육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범주에 결코 들어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의 정의는 고린도전서 13:4-7에 잘 나와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사랑의 정의에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는가를 정확히 측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이룬 정도에 따라 1%에서 100%까지 나눌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제 깨달아 행하기 시작한 것을 1%라 하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이른 것은 10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계명을 다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100%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20% 지키면 20%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사랑이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룬 만큼 주어지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100%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하여 10%만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룬 만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는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10% 이루었다면 10%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겠지만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우리 곧 피조물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과 영적인 참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참음이란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참음은 악 속에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 같은 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참을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도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없애고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가 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런 종류의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3. 모세를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하셨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도자로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술과 철학, 건축과 문학 등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행 7:22), 이는 한 민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역량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 동족애에서 비롯된 의분으로 애굽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남방 미디안으로 피하여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화려한 궁중생활에 비하면 너무나 비천한 생활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종살이하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부르시지 않고 그 후 많은 연단의 세월이 흐른 뒤 평범한 목동으로 있을 때 부르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에도 그가 가진 외적인 조건들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쓰셨다면 모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뜻대로 이루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40년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모세가 자기 의와 모든 교만을 깨뜨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지켜보며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말과 행사가 능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겸비한 마음으로 지극히 낮아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장정만도 60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을 친히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등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출 15:22-26)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것을(출 16:2-3) 보면서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모세가 40일 동안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증거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노하여 손에 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승한 사랑을 이룬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께 받은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금식하게 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실 수 있는 온전한 차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더욱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에 이처럼 인내하시며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오래 참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고린도전서 13:7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소망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4 전반절에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해,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오래 참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하지 못한 것, 투기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육적인 사랑을 놓고 보아도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존중해 주려 할 것입니다. 설령 의심할 만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우선은 선으로 바라보며 믿어 주려 하는데, 이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공을 빌어 주고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방도 더욱 힘을 얻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깃들어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일반적으로 오래 참음이라 하면 많은 시간을 지루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영적인 오래 참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대를 생각하므로 수년을 분초와 같이 보냈다"는 고백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리움이 컸던 만큼, 기다림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 또한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향하신 사랑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며(벧후 3:8) 오래 참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여러 부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표현이 있는데 똑같이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진정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 맞춰 주지 않으면 이내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상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일 때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었으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지요.
심지어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안겨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도 상대가 변심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육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범주에 결코 들어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의 정의는 고린도전서 13:4-7에 잘 나와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사랑의 정의에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는가를 정확히 측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이룬 정도에 따라 1%에서 100%까지 나눌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제 깨달아 행하기 시작한 것을 1%라 하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이른 것은 10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계명을 다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100%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20% 지키면 20%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사랑이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룬 만큼 주어지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100%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하여 10%만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룬 만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는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10% 이루었다면 10%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겠지만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우리 곧 피조물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과 영적인 참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참음이란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참음은 악 속에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 같은 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참을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도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없애고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가 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런 종류의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3. 모세를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하셨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도자로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술과 철학, 건축과 문학 등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행 7:22), 이는 한 민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역량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 동족애에서 비롯된 의분으로 애굽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남방 미디안으로 피하여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화려한 궁중생활에 비하면 너무나 비천한 생활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종살이하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부르시지 않고 그 후 많은 연단의 세월이 흐른 뒤 평범한 목동으로 있을 때 부르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에도 그가 가진 외적인 조건들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쓰셨다면 모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뜻대로 이루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40년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모세가 자기 의와 모든 교만을 깨뜨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지켜보며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말과 행사가 능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겸비한 마음으로 지극히 낮아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장정만도 60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을 친히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등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출 15:22-26)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것을(출 16:2-3) 보면서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모세가 40일 동안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증거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노하여 손에 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승한 사랑을 이룬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께 받은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금식하게 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실 수 있는 온전한 차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더욱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에 이처럼 인내하시며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오래 참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고린도전서 13:7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소망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4 전반절에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해,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오래 참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하지 못한 것, 투기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육적인 사랑을 놓고 보아도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존중해 주려 할 것입니다. 설령 의심할 만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우선은 선으로 바라보며 믿어 주려 하는데, 이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공을 빌어 주고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방도 더욱 힘을 얻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깃들어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09
제23과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2)
요일 4:9-10
읽을말씀 : 요일 4:9-10 | 외울말씀 : 요일 4:9-10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죄인 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셨지요.
오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구원의 도를 완성하셨는지 공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선을 베풀며 온갖 고난과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첫 표적으로 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 인근 지역을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친다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수한 권능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도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갖 악한 말로 비방하고 배척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2:22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싫어하던 바리새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비난했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하시며(마 12:25-27)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과 사랑 속에서 상대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자 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흠을 잡고자 시험하고 악한 궤계를 써서 잡고자 하였습니다.
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시기 하루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셨습니다(요 13:4-5). 이것은 예수님 스스로를 낮추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깨끗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겸손해야 할 것과 서로 섬겨야 할 것을 마음에 명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예언하시고 떡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막 14:30). 이는 베드로를 책망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는 하지만 후일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이 말씀을 기억할 때에 '과연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셨구나.' 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요 14:1)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말씀하셨는데 이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몸은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성령으로는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김과 같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환난을 이기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앞으로 자신이 당할 고통을 이기시기 위해 땅에 엎드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가복음 14:36을 보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당시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의 공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앞에 닥쳐온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죄는 조금도 없으신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감당하셔야 하는 고통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히 외면당하셔야 하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뇌의 표현으로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기 원하시는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누가복음 22:44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들을 위해 생명 다한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참으시고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을 행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사랑을 무엇으로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4.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마침내 골고다 처형장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피조물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은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요, 손과 발에 못박히심은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서 9:22 말씀대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으므로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달려 죽어야 하는 나무 십자가에 대신 달려 피를 다 쏟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급소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더구나 못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아래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사막지대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을 받으셔야 했지요. 게다가 피 냄새를 맡은 벌레 떼까지 몰려와 피를 빨고, 십자가 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온갖 조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고 계셨는데, 정오 12시가 되자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느끼시고 지켜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이 하늘도 빛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러더니 운명 직전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는데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지요(막 15:34). 이는 탄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구원의 길로 나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28에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는 앞으로 세상에 살아갈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그들에게 왜 자신이 피 흘려 죽으셔야 했는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자녀들 걱정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오직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또한 요한복음 19:30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눅 23:46).
이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다 헐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이루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주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죄인 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셨지요.
오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구원의 도를 완성하셨는지 공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선을 베풀며 온갖 고난과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첫 표적으로 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 인근 지역을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친다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수한 권능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도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갖 악한 말로 비방하고 배척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2:22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싫어하던 바리새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비난했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하시며(마 12:25-27)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과 사랑 속에서 상대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자 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흠을 잡고자 시험하고 악한 궤계를 써서 잡고자 하였습니다.
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시기 하루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셨습니다(요 13:4-5). 이것은 예수님 스스로를 낮추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깨끗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겸손해야 할 것과 서로 섬겨야 할 것을 마음에 명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예언하시고 떡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막 14:30). 이는 베드로를 책망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는 하지만 후일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이 말씀을 기억할 때에 '과연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셨구나.' 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요 14:1)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말씀하셨는데 이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몸은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성령으로는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김과 같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환난을 이기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앞으로 자신이 당할 고통을 이기시기 위해 땅에 엎드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가복음 14:36을 보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당시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의 공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앞에 닥쳐온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죄는 조금도 없으신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감당하셔야 하는 고통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히 외면당하셔야 하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뇌의 표현으로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기 원하시는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누가복음 22:44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들을 위해 생명 다한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참으시고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을 행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사랑을 무엇으로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4.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마침내 골고다 처형장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피조물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은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요, 손과 발에 못박히심은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서 9:22 말씀대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으므로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달려 죽어야 하는 나무 십자가에 대신 달려 피를 다 쏟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급소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더구나 못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아래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사막지대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을 받으셔야 했지요. 게다가 피 냄새를 맡은 벌레 떼까지 몰려와 피를 빨고, 십자가 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온갖 조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고 계셨는데, 정오 12시가 되자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느끼시고 지켜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이 하늘도 빛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러더니 운명 직전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는데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지요(막 15:34). 이는 탄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구원의 길로 나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28에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는 앞으로 세상에 살아갈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그들에게 왜 자신이 피 흘려 죽으셔야 했는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자녀들 걱정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오직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또한 요한복음 19:30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눅 23:46).
이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다 헐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이루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주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02
제22과성령강림과 초대교회
행 2:1-4, 2:37-47
읽을말씀 : 행 2:1-4, 2:37-47 | 외울말씀 : 행 2:38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이 어떻게 강림하였으며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어떠하였는가를 깨달아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기 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지요(행 1:8).
그래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그래서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교회의 시초이며 이를 초대교회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달리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 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에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이 어떻게 강림하였으며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어떠하였는가를 깨달아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기 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지요(행 1:8).
그래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그래서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교회의 시초이며 이를 초대교회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달리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 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에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2006-05-26
제21과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1)
요일 4:9-10
읽을말씀 : 요일 4:9-10 | 외울말씀 : 요일 4:9-10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므로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라는 고백을 마음 중심에서 드리게 됩니다.
오늘은 죄인된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마음 깊이 느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만세 전에 독생자를 예비하시고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
요한일서 4:9-10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을 말하지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원수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우리를 이 땅에 경작하고 계시는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8).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간교한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그만 영이 죽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하여 불순종했지만, 이 땅에서 온갖 죄악을 경험하면서 경작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오직 행복만 있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러 하나님께 감사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경작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참자녀로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나 만세 전에 예비하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의 주로서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존귀와 위엄을 갖추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일까요?
전도서 3:18에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점점 타락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는가 하면, 심지어 부모와 자녀간에 살인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요.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우리 사람들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까.
3.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가난한 길을 가신 예수님
마태복음 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때로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주무시기도 했고 잡수실 것이 없어 주리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게 하셨고(마 14장)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요 2:1-11) 등 능력이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늘 가난하고 헐벗은 길을 가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땀 흘리지 않아도 마음껏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로 인해 땀 흘려 소산을 먹어야 했고 가난한 길을 가게 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난까지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고후 8:9).
4. 각색 질병을 치료하시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어 주신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피부로 느끼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뚜렷이 확증시켜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이겨 내셨지요. 이는 우리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더욱 긍휼히 여기셔서 언제나 이길 힘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8).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는데, 그 대상은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또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죄인이라 정죄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부나 명예, 권세가 있거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인생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으며(요 5:2-9, 마 9:20-22, 막 10:46-52, 눅 7:11-17), 죄인과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시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마 9:12). 이처럼 죄인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 감복하게 되며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최고의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을 살려 주는 사랑이요,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2:47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셔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 가운데 행하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공의로만 심판하신다면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부족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너는 죄 있다' 하신다면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진리대로 살아가기를 늘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인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요 3:16).
6. 탕자의 비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모두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지요. 아버지가 이같이 행하였던 것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이러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헤매이는 무수한 영혼들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의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시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으시고 다만 기쁨으로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허물이 있어도 덮어 주시고 감싸 주시며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므로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라는 고백을 마음 중심에서 드리게 됩니다.
오늘은 죄인된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마음 깊이 느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만세 전에 독생자를 예비하시고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
요한일서 4:9-10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을 말하지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원수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우리를 이 땅에 경작하고 계시는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8).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간교한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그만 영이 죽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하여 불순종했지만, 이 땅에서 온갖 죄악을 경험하면서 경작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오직 행복만 있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러 하나님께 감사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경작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참자녀로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나 만세 전에 예비하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의 주로서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존귀와 위엄을 갖추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일까요?
전도서 3:18에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점점 타락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는가 하면, 심지어 부모와 자녀간에 살인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요.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우리 사람들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까.
3.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가난한 길을 가신 예수님
마태복음 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때로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주무시기도 했고 잡수실 것이 없어 주리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게 하셨고(마 14장)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요 2:1-11) 등 능력이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늘 가난하고 헐벗은 길을 가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땀 흘리지 않아도 마음껏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로 인해 땀 흘려 소산을 먹어야 했고 가난한 길을 가게 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난까지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고후 8:9).
4. 각색 질병을 치료하시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어 주신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피부로 느끼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뚜렷이 확증시켜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이겨 내셨지요. 이는 우리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더욱 긍휼히 여기셔서 언제나 이길 힘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8).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는데, 그 대상은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또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죄인이라 정죄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부나 명예, 권세가 있거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인생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으며(요 5:2-9, 마 9:20-22, 막 10:46-52, 눅 7:11-17), 죄인과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시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마 9:12). 이처럼 죄인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 감복하게 되며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최고의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을 살려 주는 사랑이요,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2:47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셔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 가운데 행하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공의로만 심판하신다면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부족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너는 죄 있다' 하신다면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진리대로 살아가기를 늘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인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요 3:16).
6. 탕자의 비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모두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지요. 아버지가 이같이 행하였던 것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이러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헤매이는 무수한 영혼들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의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시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으시고 다만 기쁨으로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허물이 있어도 덮어 주시고 감싸 주시며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19
제20과하나님의 속성
요일 4:7-8
읽을말씀 : 요일 4:7-8 | 외울말씀 : 요일 4:7-8
교육목표 : 하나님의 근본 속성인 사랑에 대해 밝히 깨우쳐 다 주고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진정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랑에는 시간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과 영원히 변치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참된 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는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오늘날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서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육적인 사랑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과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했으니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출애굽기 15:26에 말씀한 대로 치료하는 여호와를 만나 질병으로부터 지킴을 받을 뿐 아니라 혹여 질병에 걸렸다 해도 깨끗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온전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속성의 근본은 사랑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또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속성의 근본은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사람처럼 육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질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0:5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했는데 이는 한 사람이라도 우상 숭배와 같은 사망의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분이요, 축복받는 길임을 나타내 주시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2-13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축복으로 인도받게 되지만 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질투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시지만 잘못한 것, 즉 죄에 대해서는 그 행위에 따라 때로는 징계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용서하시고 참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이를 통해 자녀들이 바른 진리의 길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인간 경작의 모든 섭리도 사랑에서 시작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첫사람 아담을 지으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달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만 하는 천사와 같은 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곧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경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아름다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으로 아담을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행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고, 미움을 몰랐기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불행이나 죽음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고 또 범죄하는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인간 경작'이라는 숨겨진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경작을 받으며 미움, 슬픔, 고통, 불행 등을 체험해야 참다운 행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 경작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왔으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고, 결국 죄 가운데 빠져 짐승만도 못한 상황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대홍수의 재앙을 통해 모두 죽게 되었지요. 그 안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대홍수의 심판을 통해 후세들에게 큰 교훈과 함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해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를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행함을 보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지요(창 22:12).
이처럼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가 되는 놀라운 축복과 함께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통해 마음껏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부어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먼저 감동을 주어서 상대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아들 이삭 대신 숫양을 예비해 두셨다가 제물로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녀들이 경작을 통해 진리로 나오는 만큼 축복과 응답을 주시고 그 감동함 속에서 하나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받아 구원을 얻고 각종 문제를 해결받는 체험을 하게 되면 "나 같은 죄인도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는구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올리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이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자녀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오늘도 이 땅에서 경작받아 나가는 것이며 날마다 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으니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곳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근본 속성인 사랑에 대해 밝히 깨우쳐 다 주고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진정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랑에는 시간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과 영원히 변치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참된 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는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오늘날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서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육적인 사랑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과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했으니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출애굽기 15:26에 말씀한 대로 치료하는 여호와를 만나 질병으로부터 지킴을 받을 뿐 아니라 혹여 질병에 걸렸다 해도 깨끗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온전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속성의 근본은 사랑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또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속성의 근본은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사람처럼 육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질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0:5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했는데 이는 한 사람이라도 우상 숭배와 같은 사망의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분이요, 축복받는 길임을 나타내 주시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2-13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축복으로 인도받게 되지만 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질투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시지만 잘못한 것, 즉 죄에 대해서는 그 행위에 따라 때로는 징계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용서하시고 참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이를 통해 자녀들이 바른 진리의 길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인간 경작의 모든 섭리도 사랑에서 시작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첫사람 아담을 지으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달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만 하는 천사와 같은 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곧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경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아름다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으로 아담을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행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고, 미움을 몰랐기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불행이나 죽음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고 또 범죄하는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인간 경작'이라는 숨겨진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경작을 받으며 미움, 슬픔, 고통, 불행 등을 체험해야 참다운 행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 경작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왔으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고, 결국 죄 가운데 빠져 짐승만도 못한 상황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대홍수의 재앙을 통해 모두 죽게 되었지요. 그 안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대홍수의 심판을 통해 후세들에게 큰 교훈과 함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해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를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행함을 보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지요(창 22:12).
이처럼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가 되는 놀라운 축복과 함께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통해 마음껏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부어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먼저 감동을 주어서 상대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아들 이삭 대신 숫양을 예비해 두셨다가 제물로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녀들이 경작을 통해 진리로 나오는 만큼 축복과 응답을 주시고 그 감동함 속에서 하나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받아 구원을 얻고 각종 문제를 해결받는 체험을 하게 되면 "나 같은 죄인도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는구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올리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이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자녀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오늘도 이 땅에서 경작받아 나가는 것이며 날마다 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으니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곳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12
제19과선(17) - 엘리야 (3)-
요 3:28-30
읽을말씀 : 요 3:28-30 | 외울말씀 : 요 3:30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세례 요한 처럼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함으로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의 선, 첫 번째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점이요, 두 번째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점이라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냈고 승천한 이후에도 체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승해졌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알게 되자 마음에 주를 사모함이 불붙는 듯하여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고 그 고백대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것이 엘리야의 선, 세 번째 덕목입니다.
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지난 시간에 산 채로 들림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왔는데, 이때 육의 부모의 기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택했다 했지요(눅 1:6).
그런데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아이가 없었고,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였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알려준 말씀이 누가복음 1:13-17에 나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그 후에 정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가브리엘이 일러준 말씀을 명심하여 아이를 잘 양육했겠는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80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빈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하게 주관받게 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21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이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바로 누가복음 2:49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가게 되었지요. 즉 '내가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마음에 주관 받게 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러한 가운데 누가복음 3:15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누가복음 3:16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겠는지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잘 예비하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지요. 이에 대해 요한복음 3:26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서글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28-30을 보면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함께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찾아 볼 수 없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영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이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도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 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고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적인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직분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지요.
이처럼 어떠한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되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사심이 있으므로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사심 없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자신도 더불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마음이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정녕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정녕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시간에 걸쳐 중심의 지극한 선 가운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냈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엘리야의 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삶 속에서 이러한 선의 말씀들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세례 요한 처럼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함으로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의 선, 첫 번째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점이요, 두 번째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점이라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냈고 승천한 이후에도 체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승해졌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알게 되자 마음에 주를 사모함이 불붙는 듯하여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고 그 고백대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것이 엘리야의 선, 세 번째 덕목입니다.
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지난 시간에 산 채로 들림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왔는데, 이때 육의 부모의 기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택했다 했지요(눅 1:6).
그런데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아이가 없었고,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였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알려준 말씀이 누가복음 1:13-17에 나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그 후에 정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가브리엘이 일러준 말씀을 명심하여 아이를 잘 양육했겠는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80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빈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하게 주관받게 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21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이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바로 누가복음 2:49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가게 되었지요. 즉 '내가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마음에 주관 받게 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러한 가운데 누가복음 3:15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누가복음 3:16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겠는지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잘 예비하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지요. 이에 대해 요한복음 3:26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서글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28-30을 보면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함께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찾아 볼 수 없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영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이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도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 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고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적인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직분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지요.
이처럼 어떠한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되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사심이 있으므로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사심 없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자신도 더불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마음이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정녕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정녕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시간에 걸쳐 중심의 지극한 선 가운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냈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엘리야의 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삶 속에서 이러한 선의 말씀들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05
제18과영적인 어린아이
마 18:1-4
읽을말씀 : 마 18:1-4 | 외울말씀 : 마 18:4
교육목표 :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18:1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자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린아이가 낮고 약한 존재이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야 큰자이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유치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선하고 좋은 점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영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며 겸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행하면서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1)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출근하실 때는 인사해라, 동생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등 가르침 받은 대로 익혀 '하라' 하는 일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어떤 것은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하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로 믿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한 천국에서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이 되어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으며 들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퍼지면 울고 기쁘면 웃는 등 어른과 달리 순수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줄을 배웠다 해도 세상을 살면서 악에 물들어 있는 만큼 잘못을 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 안에 들어와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선악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게 되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힘쓰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이루어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선한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만한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혹여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1)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세상의 비진리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갑니다. 교만과 혈기, 판단과 정죄, 욕심과 자존심, 시기와 질투, 미움과 거짓됨, 이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지요.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불같은 기도를 통해 이런 죄악들을 마음에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죄악들을 벗어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2)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5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이는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자기 이론과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책망하였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성령의 주관을 좇아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고 끝까지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불같이 기도하며 날마다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자라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18:1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자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린아이가 낮고 약한 존재이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야 큰자이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유치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선하고 좋은 점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영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며 겸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행하면서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1)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출근하실 때는 인사해라, 동생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등 가르침 받은 대로 익혀 '하라' 하는 일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어떤 것은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하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로 믿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한 천국에서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이 되어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으며 들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퍼지면 울고 기쁘면 웃는 등 어른과 달리 순수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줄을 배웠다 해도 세상을 살면서 악에 물들어 있는 만큼 잘못을 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 안에 들어와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선악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게 되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힘쓰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이루어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선한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만한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혹여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1)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세상의 비진리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갑니다. 교만과 혈기, 판단과 정죄, 욕심과 자존심, 시기와 질투, 미움과 거짓됨, 이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지요.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불같은 기도를 통해 이런 죄악들을 마음에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죄악들을 벗어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2)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5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이는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자기 이론과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책망하였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성령의 주관을 좇아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고 끝까지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불같이 기도하며 날마다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자라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28
제17과선(16) - 엘리야(2)-
눅 1:17
읽을말씀 : 눅 1:17 | 외울말씀 : 눅 1:17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사랑의 선을 본받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엘리야가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배웠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보임으로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자 불말이 이끄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엘리야의 선, 그리고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던 예수님을 닮은 엘리야의 지극한 선을 통해 깊은 감동과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뤄내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고 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으로 입히시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도 사모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하여 이루어 드렸습니다. 더구나 엘리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할 때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얼마나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육으로는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닌 엘리야가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제안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더 밝히 깨닫게 되었지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깨달아 알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마음 깊이 깨우침으로 심히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눈앞에 친히 뵙게 되었을 때 엘리야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이 땅에 있을 때도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있었지만 천국에 올라가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밝히 깨닫고 확실히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맡으신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바로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철저히 인생들과 같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셔야 하고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고백을 받으시고 그로 하여금 다시 이 땅에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는 큰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다시 와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까지 미리 예언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40:3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또한 말라기 4:5-6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셨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지게 되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 1:6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7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4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답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이나 점도, 티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금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갈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기꺼이 "아멘"으로 받아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주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사하여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물이 끓으면 밖으로 수증기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핑계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성령께서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며 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시대이니 엘리야의 선을 본받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매일, 매 순간마다 사랑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사랑의 선을 본받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엘리야가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배웠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보임으로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자 불말이 이끄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엘리야의 선, 그리고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던 예수님을 닮은 엘리야의 지극한 선을 통해 깊은 감동과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뤄내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고 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으로 입히시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도 사모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하여 이루어 드렸습니다. 더구나 엘리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할 때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얼마나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육으로는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닌 엘리야가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제안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더 밝히 깨닫게 되었지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깨달아 알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마음 깊이 깨우침으로 심히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눈앞에 친히 뵙게 되었을 때 엘리야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이 땅에 있을 때도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있었지만 천국에 올라가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밝히 깨닫고 확실히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맡으신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바로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철저히 인생들과 같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셔야 하고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고백을 받으시고 그로 하여금 다시 이 땅에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는 큰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다시 와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까지 미리 예언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40:3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또한 말라기 4:5-6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셨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지게 되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 1:6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7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4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답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이나 점도, 티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금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갈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기꺼이 "아멘"으로 받아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주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사하여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물이 끓으면 밖으로 수증기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핑계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성령께서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며 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시대이니 엘리야의 선을 본받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매일, 매 순간마다 사랑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21
제16과선(15) - 엘리야(1)-
왕하 2:11
읽을말씀 : 왕하 2:11 | 외울말씀 : 왕하 2:11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방 여인인 왕비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신이 널리 퍼져 우상 숭배가 만연했지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달하는 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첫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가뭄의 저주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왕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서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많은 날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렸으며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후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끝나고 큰 비가 왔습니다(약 5:17-18). 이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기도 하고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영으로 변화된 이후의 영적인 표현이고 아직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의 그는 심히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감을 갖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혹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그러들었지요. 이처럼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기에 엘리야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그를 택하여서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영으로 변화되면 또한 귀히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도 매우 담대하고 똑똑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반드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도, 들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면을 좋게 여기시고 선지자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이 따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이 들 것을 선포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엘리야로 하여금 숨을 곳을 지정해 주셨지요. 그로부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하여 엘리야를 심히도 미워하고 잡고자 하는 때였지요. 만일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요. 더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에게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정녕 부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정녕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지요.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들을 해 나가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는 되어지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 확고히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그의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고 붙잡으니 엘리야는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함이 입혀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지요. 바로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택하여 쓰시고자 할 때 굳이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 나타낼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이미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이미 그릇 안에 담긴 "자기"와 섞여서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많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요. 늘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진실하게 고백했고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육적으로 볼 때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고전 1:27-29).
그런데 때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과 들레는 마음 등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아 쓰임받는 것처럼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받은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마태복음 7:20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으니 여러분들은 열매로 밝히 분별하셔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 받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육의 찌끼와 혼잡물들도 빼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지요.
더 나아가 자기 의와 틀도 철저히 깨뜨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치 않으므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했지요. 늘 하나님과 교통은 하였으나 성령이 마음에 임하지 않은 구약 시대임에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항상 화평을 이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마음에서 불편함을 품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자신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사해 주셨으며 은혜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은 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과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4:7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항상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방 여인인 왕비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신이 널리 퍼져 우상 숭배가 만연했지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달하는 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첫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가뭄의 저주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왕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서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많은 날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렸으며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후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끝나고 큰 비가 왔습니다(약 5:17-18). 이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기도 하고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영으로 변화된 이후의 영적인 표현이고 아직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의 그는 심히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감을 갖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혹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그러들었지요. 이처럼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기에 엘리야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그를 택하여서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영으로 변화되면 또한 귀히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도 매우 담대하고 똑똑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반드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도, 들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면을 좋게 여기시고 선지자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이 따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이 들 것을 선포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엘리야로 하여금 숨을 곳을 지정해 주셨지요. 그로부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하여 엘리야를 심히도 미워하고 잡고자 하는 때였지요. 만일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요. 더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에게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정녕 부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정녕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지요.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들을 해 나가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는 되어지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 확고히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그의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고 붙잡으니 엘리야는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함이 입혀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지요. 바로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택하여 쓰시고자 할 때 굳이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 나타낼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이미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이미 그릇 안에 담긴 "자기"와 섞여서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많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요. 늘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진실하게 고백했고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육적으로 볼 때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고전 1:27-29).
그런데 때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과 들레는 마음 등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아 쓰임받는 것처럼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받은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마태복음 7:20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으니 여러분들은 열매로 밝히 분별하셔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 받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육의 찌끼와 혼잡물들도 빼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지요.
더 나아가 자기 의와 틀도 철저히 깨뜨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치 않으므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했지요. 늘 하나님과 교통은 하였으나 성령이 마음에 임하지 않은 구약 시대임에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항상 화평을 이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마음에서 불편함을 품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자신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사해 주셨으며 은혜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은 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과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4:7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항상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