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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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1
제35과권능 위에 권능을
요 14:12
읽을말씀 : 요 14:12 | 외울말씀 : 요 14:12
교육목표 : 마음의 성결을 이루며 신속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권능의 차원에 들어감으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음이 성결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 있는데, 바로 권능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권능은 언제나 그 열매가 선이고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오늘은 권능과 권능 위에 권능이란 무엇이며, 그에 따르는 역사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는 차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요 14:21). 구체적으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 맞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그 자녀를 사랑해 주시고 그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시지요.
기도에 응답을 받는 것만 보아도 똑같은 것을 구하는데도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 한 번 구해도 즉시 응답이 오고 어떤 사람은 일 주일을, 또 어떤 사람은 금식까지 하면서 구해야 비로소 응답받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정도와 믿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동시에 응답의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3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한일서 3:21-2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책망할 것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함께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한다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히 11:6). 그런데 우리가 진정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기 원한다면 완전한 영의 믿음, 즉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완전한 영의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불 같은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지요(막 9:29).
2. 권능의 정의와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거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믿음의 힘입니다. 또한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있고 영광스러운 힘이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성결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모든 악과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면 영적인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므로 권세와 능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면 능력, 권세, 권능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유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들이 돈을 벌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세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들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요구할 수 있고, 아들 입장에서는 순종해서 드려야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도 가지고 있다면 이 아버지에게는 권세 있는 능력, 곧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권능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입는 것이기 때문에 기사와 표적과 희한한 능, 기이한 일이 따르게 되는데 각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표적(表蹟)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것은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며, 굽었던 허리가 펴지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에 속하지요.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여 병과 약한 것이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한 것이란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부모나 자신의 실수로 신체의 어떤 기관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 행함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불의 역사로 아픈 부위나 질병의 균을 태워 병을 낫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병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적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2) 희한한 능(能)과 기이한 일
성경상에서 들 수 있는 희한한 능의 예로는 사도행전 19:11-12에 기록된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그림자만 스쳐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5:15-16).
또한 기이한 일에 대한 예로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열 재앙과 예수님께서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던 사람을 치료하신 것(눅 5:17-26)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만이 아니라 해도 희한하고 기이한 일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기사(奇事)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들로 주로 기상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움직인다든가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하지요.
성경상에 사무엘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고(삼상 12:18),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매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권능 위에 권능이란?
권능 위에 권능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대기업의 회장으로, 우리들을 그의 자녀들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회장의 자녀 중에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는 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아들은 능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들게 일을 잘 처리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계열사들을 하나씩 물려 주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그룹의 경영권 자체를 물려 주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와 그 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에는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아버지의 결재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경영권을 가졌으니 임의대로 일을 추진해 갈 수 있지요.
이처럼 권능 위에 권능 차원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권능 위에 권능 차원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고유한 신성(神性) 자체를 자녀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들을 믿을 수 있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4. 권능 위에 권능을 받을 때 따르는 하나님의 역사
첫째로,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입니다.
요한복음 5:20-21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 아무나 살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합당한 사람을 살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인이라는 성에서는 이미 죽어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에 실려 나가는 어느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록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외에도 구약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린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받아서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에서 그만한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시기만 했던 것과는 다르게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가 하면 죽은 아이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리는 등 특이한 행동을 취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여러 번 그렇게 하신 것과는 달리 그들이 죽은 사람을 살린 기록은 한 번씩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의 원하는 사람들을 항상 살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푸는 권능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던 것처럼,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푸는 권능을 받으면 말씀 자체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없던 뼈나 신체의 기관이 생겨나거나 짧았던 신체의 부분이 늘어나는 등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경우이지요.
한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예수님 앞에서 담대하게 믿음의 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던 것을 볼 수 있지요(마 8:8-13). 예수님께서 입술로 내신 말씀이 공간을 초월하여 그대로 역사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습니다(막 4:39). 이처럼 말씀 자체가 생명력 있게 역사되는 것은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풀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권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푸는 권능 위에도 그 이상의 권능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권능의 역사는 무한하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권능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마음의 성결을 이루며 신속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권능의 차원에 들어감으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음이 성결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 있는데, 바로 권능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권능은 언제나 그 열매가 선이고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오늘은 권능과 권능 위에 권능이란 무엇이며, 그에 따르는 역사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는 차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요 14:21). 구체적으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 맞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그 자녀를 사랑해 주시고 그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시지요.
기도에 응답을 받는 것만 보아도 똑같은 것을 구하는데도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 한 번 구해도 즉시 응답이 오고 어떤 사람은 일 주일을, 또 어떤 사람은 금식까지 하면서 구해야 비로소 응답받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정도와 믿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동시에 응답의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3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한일서 3:21-2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책망할 것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함께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한다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히 11:6). 그런데 우리가 진정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기 원한다면 완전한 영의 믿음, 즉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완전한 영의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불 같은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지요(막 9:29).
2. 권능의 정의와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거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믿음의 힘입니다. 또한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있고 영광스러운 힘이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성결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모든 악과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면 영적인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므로 권세와 능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면 능력, 권세, 권능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유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들이 돈을 벌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세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들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요구할 수 있고, 아들 입장에서는 순종해서 드려야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도 가지고 있다면 이 아버지에게는 권세 있는 능력, 곧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권능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입는 것이기 때문에 기사와 표적과 희한한 능, 기이한 일이 따르게 되는데 각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표적(表蹟)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것은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며, 굽었던 허리가 펴지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에 속하지요.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여 병과 약한 것이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한 것이란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부모나 자신의 실수로 신체의 어떤 기관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 행함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불의 역사로 아픈 부위나 질병의 균을 태워 병을 낫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병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적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2) 희한한 능(能)과 기이한 일
성경상에서 들 수 있는 희한한 능의 예로는 사도행전 19:11-12에 기록된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그림자만 스쳐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5:15-16).
또한 기이한 일에 대한 예로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열 재앙과 예수님께서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던 사람을 치료하신 것(눅 5:17-26)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만이 아니라 해도 희한하고 기이한 일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기사(奇事)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들로 주로 기상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움직인다든가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하지요.
성경상에 사무엘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고(삼상 12:18),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매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권능 위에 권능이란?
권능 위에 권능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대기업의 회장으로, 우리들을 그의 자녀들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회장의 자녀 중에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는 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아들은 능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들게 일을 잘 처리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계열사들을 하나씩 물려 주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그룹의 경영권 자체를 물려 주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와 그 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에는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아버지의 결재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경영권을 가졌으니 임의대로 일을 추진해 갈 수 있지요.
이처럼 권능 위에 권능 차원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권능 위에 권능 차원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고유한 신성(神性) 자체를 자녀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들을 믿을 수 있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4. 권능 위에 권능을 받을 때 따르는 하나님의 역사
첫째로,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입니다.
요한복음 5:20-21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 아무나 살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합당한 사람을 살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인이라는 성에서는 이미 죽어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에 실려 나가는 어느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록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외에도 구약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린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받아서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에서 그만한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시기만 했던 것과는 다르게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가 하면 죽은 아이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리는 등 특이한 행동을 취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여러 번 그렇게 하신 것과는 달리 그들이 죽은 사람을 살린 기록은 한 번씩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의 원하는 사람들을 항상 살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푸는 권능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던 것처럼,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푸는 권능을 받으면 말씀 자체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없던 뼈나 신체의 기관이 생겨나거나 짧았던 신체의 부분이 늘어나는 등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경우이지요.
한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예수님 앞에서 담대하게 믿음의 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던 것을 볼 수 있지요(마 8:8-13). 예수님께서 입술로 내신 말씀이 공간을 초월하여 그대로 역사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습니다(막 4:39). 이처럼 말씀 자체가 생명력 있게 역사되는 것은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풀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권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베푸는 권능 위에도 그 이상의 권능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권능의 역사는 무한하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권능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8-25
제34과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잠 17:3
읽을말씀 : 잠 17:3 | 외울말씀 : 잠 17:3
교육목표 : 연단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 승리하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장차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거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연단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5:3-4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하고 있지요.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중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면서 신앙 안에서 받는 연단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연단을 잘 받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단을 받는 이유
온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도 온전하고 거룩하기 원하시므로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자녀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며 믿음이 장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연단으로 믿음이 장성해지면 영혼이 잘된 만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므로 참으로 연단은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단을 받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
야고보서 1:13을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시험 주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시험 환난을 주어 고통을 당하게 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마 7:11). 그러면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난을 당하는 것일까요?
야고보서 1:14,15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자기 욕심 때문에 사단에게 미혹을 받아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욕심을 내다가 진리를 떠나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여 남을 속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이러한 것은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욕심을 발동하도록 한 것이며,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가 들어오게 되고 죄가 장성하여서 결국은 사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4절 이하를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않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꾸지람을 내리시고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찍질하셔도 낙심하거나 넘어지지 말아야 하며, 왜 하나님께서 내게 꾸지람을 하시는지, 왜 징계를 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가 잘못을 범하고 곁길로 나갈 때 그대로 방치하지 아니하고 매를 들어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아 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범할 때 책망하시며 사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채찍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징계를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깨우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처음에는 마음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심으로 마음에 곤고함을 느끼게 하시다가,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만큼 더 무거운 징계로 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9-11을 보면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우리를 참예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징계를 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징계를 가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뱀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를 말하며, 흙이란 흙으로 지어진 육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 안에 살지 못하는 만큼 원수 마귀가 시험과 환난과 질병을 가져다 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시험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요, 징계를 가하심으로 진리 안에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악의 모습을 빼내어 온전케 만드시기 위해 연단을 가하시는데 연단을 통해 악을 버리고 나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믿음의 선진들처럼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내 잘못으로 인해 연단을 받았을지라도 결국 연단은 축복이요,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경우
만일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여 판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법시험에 응시해야 합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그 시험에 합격해서 인정을 받아야 판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있는데, 이러한 간구에 응답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연단을 받아서 믿음이 성장했으므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축복을 주시고자 할 때 과연 그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인가에 대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시험에 통과하면 간구하고 소원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심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내가 잘못해서 받는 연단이 아니라, 축복을 받기 위한 시험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3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응답을 주시기 위해서 테스트하시는 경우는 시험에 들도록 놔두시지 않고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기도한 것에 대해서 내게 자격이 없으면 못 받는 것뿐이지 그것으로 인해 환난이 임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되었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면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6,7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연단을 통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요셉
우리는 성경에서 불같은 연단을 통하여 정금 같은 믿음으로 나왔던 많은 선진들을 만나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장차 자신이 매우 존귀케 되는 꿈을 꾸게 됩니다. 요셉은 그 꿈을 소중히 여겼고 하나님께서 정녕 이루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실현되기는커녕 오히려 이방인에게 팔려가서 가장 비천한 노예의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노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집주인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요셉의 주인은 당시 강대국이던 애굽의 시위대장이었고, 요셉은 그 집의 모든 제반 사항을 맡은 가정 총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 했습니다(창 39:2,3).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예비하신 축복은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비하신 축복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연단은 집주인의 아내를 통한 시험이었고, 요셉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정직히 행했는데도 뜻하지 않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노예에서 죄수라는 더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도 요셉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성실히 행하여 감옥에서도 인정을 받아 다른 죄수들까지 관리하며 제반 사항을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런 연단의 과정을 잘 밟아 나가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나이 서른에 일약 애굽의 전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13년 전에 요셉에게 주셨던 그 꿈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받아 온 연단의 길들은 갈수록 더 낮아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그것이 머리되고 높아지는 길이었고 축복된 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결케 되기를 원하시므로 마음속에 모든 찌끼와 오물까지라도 발견하여 내어 버릴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어떠한 시험이나 연단도 기쁨과 감사로 승리하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장차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연단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 승리하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장차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거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연단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5:3-4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하고 있지요.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중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면서 신앙 안에서 받는 연단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연단을 잘 받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단을 받는 이유
온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도 온전하고 거룩하기 원하시므로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자녀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며 믿음이 장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연단으로 믿음이 장성해지면 영혼이 잘된 만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므로 참으로 연단은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단을 받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
야고보서 1:13을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시험 주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시험 환난을 주어 고통을 당하게 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마 7:11). 그러면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난을 당하는 것일까요?
야고보서 1:14,15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자기 욕심 때문에 사단에게 미혹을 받아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욕심을 내다가 진리를 떠나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여 남을 속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이러한 것은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욕심을 발동하도록 한 것이며,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가 들어오게 되고 죄가 장성하여서 결국은 사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4절 이하를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않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꾸지람을 내리시고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찍질하셔도 낙심하거나 넘어지지 말아야 하며, 왜 하나님께서 내게 꾸지람을 하시는지, 왜 징계를 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가 잘못을 범하고 곁길로 나갈 때 그대로 방치하지 아니하고 매를 들어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아 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범할 때 책망하시며 사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채찍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징계를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깨우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처음에는 마음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심으로 마음에 곤고함을 느끼게 하시다가,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만큼 더 무거운 징계로 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9-11을 보면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우리를 참예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징계를 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징계를 가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뱀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를 말하며, 흙이란 흙으로 지어진 육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 안에 살지 못하는 만큼 원수 마귀가 시험과 환난과 질병을 가져다 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시험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요, 징계를 가하심으로 진리 안에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악의 모습을 빼내어 온전케 만드시기 위해 연단을 가하시는데 연단을 통해 악을 버리고 나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믿음의 선진들처럼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내 잘못으로 인해 연단을 받았을지라도 결국 연단은 축복이요,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경우
만일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여 판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법시험에 응시해야 합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그 시험에 합격해서 인정을 받아야 판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있는데, 이러한 간구에 응답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연단을 받아서 믿음이 성장했으므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축복을 주시고자 할 때 과연 그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인가에 대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시험에 통과하면 간구하고 소원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심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내가 잘못해서 받는 연단이 아니라, 축복을 받기 위한 시험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3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응답을 주시기 위해서 테스트하시는 경우는 시험에 들도록 놔두시지 않고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기도한 것에 대해서 내게 자격이 없으면 못 받는 것뿐이지 그것으로 인해 환난이 임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되었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면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6,7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연단을 통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요셉
우리는 성경에서 불같은 연단을 통하여 정금 같은 믿음으로 나왔던 많은 선진들을 만나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장차 자신이 매우 존귀케 되는 꿈을 꾸게 됩니다. 요셉은 그 꿈을 소중히 여겼고 하나님께서 정녕 이루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실현되기는커녕 오히려 이방인에게 팔려가서 가장 비천한 노예의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노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집주인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요셉의 주인은 당시 강대국이던 애굽의 시위대장이었고, 요셉은 그 집의 모든 제반 사항을 맡은 가정 총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 했습니다(창 39:2,3).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예비하신 축복은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비하신 축복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연단은 집주인의 아내를 통한 시험이었고, 요셉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정직히 행했는데도 뜻하지 않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노예에서 죄수라는 더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도 요셉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성실히 행하여 감옥에서도 인정을 받아 다른 죄수들까지 관리하며 제반 사항을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런 연단의 과정을 잘 밟아 나가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나이 서른에 일약 애굽의 전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13년 전에 요셉에게 주셨던 그 꿈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받아 온 연단의 길들은 갈수록 더 낮아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그것이 머리되고 높아지는 길이었고 축복된 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결케 되기를 원하시므로 마음속에 모든 찌끼와 오물까지라도 발견하여 내어 버릴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어떠한 시험이나 연단도 기쁨과 감사로 승리하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장차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8-18
제33과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약 2:14-26
읽을말씀 : 약 2:14-26 | 외울말씀 : 약 2:26
교육목표 :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 보임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참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진실하게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사랑은 무엇이며, 믿음과 사랑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이 있는 사랑만이 참사랑
오늘날은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진실하고 변함이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중심의 고백입니다. 만일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 주려고 하므로 자연히 행함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해도 그것이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4:15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교훈하시는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도 단순히 말씀으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큰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응답과 축복, 눈에 보이는 표증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확증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믿음과 사랑의 연관성
야고보서 2:14-17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참믿음에 대한 원리는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3:17-18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연관성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영적인 사랑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4차원, 곧 영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이 믿음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며, 또한 믿음이 있기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진리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점차 성장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도 커지고 하나님의 마음 역시 더욱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알게 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성장에 따른 사랑의 깊이
그런데 처음 믿음을 가졌을 때 느끼던 사랑과 점차 믿음이 성장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는 전혀 모르던 엄청난 사랑을 깨달았기에 그 사랑이 너무도 감사해서 하염없이 울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느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알게 될수록 하나님의 사랑 또한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자녀를 낳아 부모의 마음이 되어 보아야 비로소 자신이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느끼게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도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점차 믿음이 성장하여 장성한 아비의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 2:12-14).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 4:19에 사도 바울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씀한 대로, 성령으로 영을 낳는 해산의 수고를 해 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3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믿음이 성장하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온전한 중심으로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즉 믿음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깨달아 사랑의 마음도 더 커지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온전한 사랑에 더 가까이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4. 믿음의 행함은 곧 사랑의 증거
믿음이란 행함을 통해 비로소 온전케 되기 때문에 믿음의 성장과 함께 커지는 사랑도 결국은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됩니다. 따라서 현재 어떠한 믿음의 행함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척도가 되는 것이며, 믿음의 행함은 곧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야고보서 2:21-22을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행함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는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삼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3에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는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이지요.
5.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때로는 세상에서 잠시 동안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핍박이나 어려움도 불사했던 기억들이 나름대로 있지요. 그런데 만일 이러한 믿음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나타내 보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무런 사랑의 증거나 표현도 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자체가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거할 천국에 아름다운 처소를 예비하시고 우리가 행한 만큼 상급과 빛나는 영광으로 갚아 주시는 그 사랑을 과연 어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이 땅에 사는 동안 순간순간 믿음의 행군을 해 나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도 아무런 축복이 오지 않으며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하다면 '하나님께서 정녕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구원을 주시고 천국을 주신 하나님께 오직 감사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믿음의 행함을 통해 그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입니다(잠 8:1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바로 죄로 인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구원의 역사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치료의 역사로 함께해 주십니다. 또한 가난으로 궁핍한 이에게 풍요로움으로, 마음의 소원이 있는 이에게 응답의 역사로 나타나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계의 비밀한 것까지라도 알려 주시고 성령의 깊은 감동함 가운데 말씀들을 풀어 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사랑을 나타내 주시는데, 거기에는 어떤 형태로든 증거가 함께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증거된 말씀을 통해 날마다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 보임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 보임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참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진실하게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사랑은 무엇이며, 믿음과 사랑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이 있는 사랑만이 참사랑
오늘날은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진실하고 변함이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중심의 고백입니다. 만일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 주려고 하므로 자연히 행함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해도 그것이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4:15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교훈하시는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도 단순히 말씀으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큰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응답과 축복, 눈에 보이는 표증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확증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믿음과 사랑의 연관성
야고보서 2:14-17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참믿음에 대한 원리는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3:17-18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연관성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영적인 사랑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4차원, 곧 영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이 믿음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며, 또한 믿음이 있기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진리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점차 성장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도 커지고 하나님의 마음 역시 더욱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알게 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성장에 따른 사랑의 깊이
그런데 처음 믿음을 가졌을 때 느끼던 사랑과 점차 믿음이 성장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는 전혀 모르던 엄청난 사랑을 깨달았기에 그 사랑이 너무도 감사해서 하염없이 울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느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알게 될수록 하나님의 사랑 또한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자녀를 낳아 부모의 마음이 되어 보아야 비로소 자신이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느끼게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도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점차 믿음이 성장하여 장성한 아비의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 2:12-14).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 4:19에 사도 바울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씀한 대로, 성령으로 영을 낳는 해산의 수고를 해 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3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믿음이 성장하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온전한 중심으로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즉 믿음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깨달아 사랑의 마음도 더 커지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온전한 사랑에 더 가까이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4. 믿음의 행함은 곧 사랑의 증거
믿음이란 행함을 통해 비로소 온전케 되기 때문에 믿음의 성장과 함께 커지는 사랑도 결국은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됩니다. 따라서 현재 어떠한 믿음의 행함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척도가 되는 것이며, 믿음의 행함은 곧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야고보서 2:21-22을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행함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는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삼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3에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는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이지요.
5.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때로는 세상에서 잠시 동안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핍박이나 어려움도 불사했던 기억들이 나름대로 있지요. 그런데 만일 이러한 믿음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나타내 보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무런 사랑의 증거나 표현도 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자체가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거할 천국에 아름다운 처소를 예비하시고 우리가 행한 만큼 상급과 빛나는 영광으로 갚아 주시는 그 사랑을 과연 어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이 땅에 사는 동안 순간순간 믿음의 행군을 해 나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도 아무런 축복이 오지 않으며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하다면 '하나님께서 정녕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구원을 주시고 천국을 주신 하나님께 오직 감사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믿음의 행함을 통해 그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입니다(잠 8:1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바로 죄로 인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구원의 역사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치료의 역사로 함께해 주십니다. 또한 가난으로 궁핍한 이에게 풍요로움으로, 마음의 소원이 있는 이에게 응답의 역사로 나타나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계의 비밀한 것까지라도 알려 주시고 성령의 깊은 감동함 가운데 말씀들을 풀어 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사랑을 나타내 주시는데, 거기에는 어떤 형태로든 증거가 함께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증거된 말씀을 통해 날마다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 보임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8-11
제32과성결을 향하여
요 14:15
읽을말씀 : 요 14:15 | 외울말씀 : 요 14:15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을 이루어 흠이 없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되신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한다.
사랑스러운 자녀가 무서운 병에 걸려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 가고 있다면 부모는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자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을 텐데." 하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도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의 인간 경작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왜 성결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결의 의미와 중요성
성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거룩하고 깨끗함"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의 성결이란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받고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악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주님을 닮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성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성결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레위기 11:45을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4:3 전반절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23에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곧 성결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결은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로마서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고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지요. 그러므로 정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성결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마음의 성결을 이루려면
성결을 이루는 방법은 요한복음 14:15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성결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증거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들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 나갈 것이니 결코 힘들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 판단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등 지키라, 버리라는 말씀들이 있지요. 바로 이와 같은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죄를 싸워 버리고 말씀대로 행하므로 진리가 마음에 임하게 되지요. 이렇게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 나가는 것이 곧 성결을 향해 나가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결되는 만큼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7:21 후반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죄를 버릴수록 그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천국이라 해도 다 같은 천국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악을 버리고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따라 처소와 상급이 달라집니다. 이런 것을 알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뜨거워지므로 더욱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고 성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성결은 성도의 가장 확실한 믿음의 표현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결을 원하시는 이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면서 성결되라고(히 12:4, 살전 5:23)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사랑인지를 알기에 앞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마음부터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아담은 원래 악이 없는 참으로 선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직 진리와 선만 가르침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요. 이처럼 죄가 없는 상태에서 아담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가 들어오자 영계의 법칙에 따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서 6:16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세가 죄를 지은 그때부터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생령이었던 아담이 육으로 돌아가니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점차 죄악으로 물들어 가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우리 인생은 원수 마귀의 주관 아래 이 땅에서 온갖 고통을 겪다가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던 모든 권세를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실 때, 또한 그들이 결국은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을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큰 아픔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원래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권세를 다시 찾고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길이지요. 즉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만큼 곧 힘이 되므로 성결이 곧 유일한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권세를 회복하여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요한일서 5:18을 보면 이러한 사람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말씀하고 있지요. 또한 성결된 만큼 성령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고 육의 한계를 넘어 영계를 뚫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결되는 사람은 그만큼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하나님 보좌가 있는 새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결을 이루라 하심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요,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해 잃어버린 영적인 권세와 능력과 모든 축복을 회복하는 참으로 복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성결로 이끌어 가시는가?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고 흠이 없는 성결된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끌어 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고 율법을 지키게 하심으로 죄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만드셨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친히 보고 따를 수 있는 본을 세워 주심으로 믿는 이들이 더욱 성결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많은 선진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을 들 수 있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친히 말씀을 지켜 행하심으로 범사에 본이 되어 주셨지요.
예를 들어,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고치시고 죄인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를 베푸심으로 그 행함을 좇아 우리도 사랑 가운데 나오게 하셨습니다. 또한 섬기고 낮아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피조물들의 발을 씻기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2-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히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눈물, 슬픔, 고통,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소망이지요. 이와 같이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소망이 있다면 어찌 주님의 온전하심을 닮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온전히 입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그날에 진정 흠이 없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되신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을 이루어 흠이 없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되신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한다.
사랑스러운 자녀가 무서운 병에 걸려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 가고 있다면 부모는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자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을 텐데." 하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도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의 인간 경작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왜 성결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결의 의미와 중요성
성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거룩하고 깨끗함"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의 성결이란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받고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악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주님을 닮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성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성결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레위기 11:45을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4:3 전반절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23에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곧 성결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결은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로마서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고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지요. 그러므로 정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성결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마음의 성결을 이루려면
성결을 이루는 방법은 요한복음 14:15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성결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증거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들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 나갈 것이니 결코 힘들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 판단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등 지키라, 버리라는 말씀들이 있지요. 바로 이와 같은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죄를 싸워 버리고 말씀대로 행하므로 진리가 마음에 임하게 되지요. 이렇게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 나가는 것이 곧 성결을 향해 나가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결되는 만큼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7:21 후반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죄를 버릴수록 그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천국이라 해도 다 같은 천국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악을 버리고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따라 처소와 상급이 달라집니다. 이런 것을 알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뜨거워지므로 더욱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고 성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성결은 성도의 가장 확실한 믿음의 표현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결을 원하시는 이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면서 성결되라고(히 12:4, 살전 5:23)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사랑인지를 알기에 앞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마음부터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아담은 원래 악이 없는 참으로 선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직 진리와 선만 가르침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요. 이처럼 죄가 없는 상태에서 아담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가 들어오자 영계의 법칙에 따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서 6:16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세가 죄를 지은 그때부터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생령이었던 아담이 육으로 돌아가니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점차 죄악으로 물들어 가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우리 인생은 원수 마귀의 주관 아래 이 땅에서 온갖 고통을 겪다가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던 모든 권세를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실 때, 또한 그들이 결국은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을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큰 아픔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원래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권세를 다시 찾고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길이지요. 즉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만큼 곧 힘이 되므로 성결이 곧 유일한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권세를 회복하여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요한일서 5:18을 보면 이러한 사람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말씀하고 있지요. 또한 성결된 만큼 성령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고 육의 한계를 넘어 영계를 뚫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결되는 사람은 그만큼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하나님 보좌가 있는 새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결을 이루라 하심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요,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해 잃어버린 영적인 권세와 능력과 모든 축복을 회복하는 참으로 복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성결로 이끌어 가시는가?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고 흠이 없는 성결된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끌어 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고 율법을 지키게 하심으로 죄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만드셨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친히 보고 따를 수 있는 본을 세워 주심으로 믿는 이들이 더욱 성결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많은 선진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을 들 수 있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친히 말씀을 지켜 행하심으로 범사에 본이 되어 주셨지요.
예를 들어,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고치시고 죄인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를 베푸심으로 그 행함을 좇아 우리도 사랑 가운데 나오게 하셨습니다. 또한 섬기고 낮아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피조물들의 발을 씻기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2-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히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눈물, 슬픔, 고통,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소망이지요. 이와 같이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 소망이 있다면 어찌 주님의 온전하심을 닮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온전히 입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그날에 진정 흠이 없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되신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8-04
제31과눈에 보이는 표증으로
행 2:22
읽을말씀 : 행 2:22 | 외울말씀 : 행 2:22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 으로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받아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시고 많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써 놀라운 표적들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진 바 되도록 증거하는 표증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셨는지와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세우신 표증의 사람들
사도행전 3:22을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곧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악의 담으로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와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온갖 질병과 슬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사람들을 택해서 어떻게든지 다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말라기 등 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비롯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그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초대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때를 좇아 합당한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표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이 행하는 사역
1)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든 얽매이는 것들에서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영혼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며 흉악의 결박에서 풀어 주셨던 것이지요. 예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처럼 질병이나 연약함 속에 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했던 것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증거가 다만 죽은 후에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표증된 사람들을 보내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질병과 연약함과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비록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다 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케 되는 역사를 체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증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마음에도 이 사랑이 임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소유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실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한층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사도 바울 역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 있었음으로 인해 갖가지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런 사도 바울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님처럼 섬기고 붙좇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칩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안에 돌아오고 싶다 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돌아오는 것인지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길을 밝히 알고 가르쳐 줄 수 있지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성경이 밝히 제시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난해구절들과 수많은 비유들, 묵시로 기록된 내용들은 아무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기도와 금식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본을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과 밝은 교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친히 풀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지식으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누가복음 12:42에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말씀했고 갈라디아서 1:11-12을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4) 따르는 기사와 표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온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로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을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들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릇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지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들을 알려 주시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런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고 동시에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각색 질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22).
예수님 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따르는 표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막 16:20).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의 권능은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가 지나갈 때는 병든 사람을 거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힐까 바랐다고 했고(행 5:15),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갈 정도였지요(행 19:12).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표증으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통해 2천 년 전과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의 표증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
마음이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을 대할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주님을 대하듯이 사랑과 섬김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표증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할 때 이런 행함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받으시고 여러 가지 축복들로 함께하시는 기록들이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은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으나 엘리사 선지자를 정성껏 섬김으로 잉태의 축복을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또한 그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을 때 엘리사를 모셔 오니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아이를 살려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물론 모든 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눈에 보이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인 엘리사를 보내신 것이 여인에게는 큰 축복이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전쟁에 승리하고 문둥병을 치료받으며 굶어 죽을 상황에서 음식을 얻게 되고 죽었던 자녀를 다시 찾는 등 하나님께서 보내신 표증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함께함으로 받은 축복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 으로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받아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시고 많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써 놀라운 표적들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진 바 되도록 증거하는 표증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셨는지와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세우신 표증의 사람들
사도행전 3:22을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곧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악의 담으로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와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온갖 질병과 슬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사람들을 택해서 어떻게든지 다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말라기 등 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비롯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그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초대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때를 좇아 합당한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표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이 행하는 사역
1)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든 얽매이는 것들에서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영혼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며 흉악의 결박에서 풀어 주셨던 것이지요. 예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처럼 질병이나 연약함 속에 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했던 것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증거가 다만 죽은 후에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표증된 사람들을 보내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질병과 연약함과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비록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다 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케 되는 역사를 체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증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마음에도 이 사랑이 임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소유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실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한층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사도 바울 역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 있었음으로 인해 갖가지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런 사도 바울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님처럼 섬기고 붙좇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칩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안에 돌아오고 싶다 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돌아오는 것인지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길을 밝히 알고 가르쳐 줄 수 있지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성경이 밝히 제시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난해구절들과 수많은 비유들, 묵시로 기록된 내용들은 아무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기도와 금식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본을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과 밝은 교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친히 풀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지식으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누가복음 12:42에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말씀했고 갈라디아서 1:11-12을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4) 따르는 기사와 표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온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로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을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들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릇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지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들을 알려 주시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런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고 동시에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각색 질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22).
예수님 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따르는 표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막 16:20).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의 권능은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가 지나갈 때는 병든 사람을 거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힐까 바랐다고 했고(행 5:15),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갈 정도였지요(행 19:12).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표증으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통해 2천 년 전과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의 표증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
마음이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을 대할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주님을 대하듯이 사랑과 섬김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표증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할 때 이런 행함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받으시고 여러 가지 축복들로 함께하시는 기록들이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은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으나 엘리사 선지자를 정성껏 섬김으로 잉태의 축복을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또한 그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을 때 엘리사를 모셔 오니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아이를 살려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물론 모든 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눈에 보이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인 엘리사를 보내신 것이 여인에게는 큰 축복이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전쟁에 승리하고 문둥병을 치료받으며 굶어 죽을 상황에서 음식을 얻게 되고 죽었던 자녀를 다시 찾는 등 하나님께서 보내신 표증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함께함으로 받은 축복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27
제30과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시 37:6
읽을말씀 : 시 37:6 | 외울말씀 : 시 37:6
교육목표 :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한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주고 계시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랑과 공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의란 선악간에 공평하게 상벌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또는 속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 곧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우리가 사랑만 알고 공의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공의만 알고 사랑을 알지 못하면 독재가 되니 참으로 가치가 없지요. 공의와 사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며 영적인 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유일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 역사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 법칙들 중에서 우리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내용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 나타나게 되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몇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공의의 기본 원칙을 간단히 말하자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 말과 행동 하나까지도 다 포함되는데 어떠한 것이든 악한 것으로 심으면 악으로 거두고 선한 것으로 심으면 선으로 거두게 된다는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곧 죄를 심으면 사망으로 거둔다는 말씀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따라 죄인에 대해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사망이라는 판결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6: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모든 생각과 마음에 품는 것까지도 다 감찰하시므로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12: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오직 진리의 말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시며 입술에 나오는 모든 말을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는 예외가 없으며 이 땅에서든 아니면 심판날에 가서든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공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혹 여러분 중에 "공의의 하나님은 좀 무섭습니다." 하고 말씀하실 분이 계신지요? 이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보다는 공의에 따른 징계가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찰을 만나도 무서워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에 든든하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혹시 어딘가에 경찰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벌만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을 행한 만큼 반드시 그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지만 반대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한 만큼 반드시 선과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공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며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고 진리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징계나 연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느끼게 되지요. 나를 더 온전케 만들고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과 또한 이러한 공의가 있으므로 어두움에서 떠나 빛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3:12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곧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징계를 통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축복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히 12:8).
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다윗 왕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윗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버리지 못한 죄성이 있어 밧세바라는 여인을 취하고 이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 남편인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징계와 함께 혹독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죽었고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인 다윗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계기로 다윗이 가지고 있던 작은 죄성까지라도 완전히 뽑아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징계와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지요.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합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연단과 그 결과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공의로 심판하시되 결국에는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아버지를 반역하여 죽이고자 했던 압살롬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 안에 살고자 하며 설령 전에는 죄 가운데 있었다 해도 이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는 양약이 되고 축복으로 임하지만, 반대로 죄 가운데 거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의 판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까닭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그 결과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니 누가 선을 행하고자 하겠으며 선을 행한다 해도 무슨 소망이 있겠는지요.
그러나 전도서 12:14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도 믿습니다. 이처럼 반드시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으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선과 진리대로 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공의를 정오의 빛에 비유하신 이유
정오의 빛은 하루 중에 가장 밝히 비추는 빛입니다. 깊은 산 속에 있다 해도,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있다 해도 중천에 떠 있는 태양에서 발하는 정오의 빛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밝히 빛나므로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으며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악에서 떠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긴 것이지요.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거두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볼 때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공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바르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모세라는 한 인물을 택하시고 40년 간의 연단을 통해 그를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장정만 해도 60만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인도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지도자가 있어야 했지요.
실제로 광야생활 동안에 모세는 수많은 불순종과 원망, 불평을 하며 때로는 대적해 오기도 하는 백성들을 오래 참음과 기다림, 그리고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품어 주고 인도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참으로 자신을 닮은 모세를 보실 때 마음이 너무나 흐뭇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치 않으셨습니다. 백성 중에 고라라는 인물을 비롯하여 한 무리가 반역을 일으키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재앙으로 멸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은 결코 사랑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함으로 공의를 굽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또한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교훈을 삼게 하시고 다시금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사랑으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며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한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주고 계시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랑과 공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의란 선악간에 공평하게 상벌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또는 속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 곧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우리가 사랑만 알고 공의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공의만 알고 사랑을 알지 못하면 독재가 되니 참으로 가치가 없지요. 공의와 사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며 영적인 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유일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 역사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 법칙들 중에서 우리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내용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 나타나게 되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몇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공의의 기본 원칙을 간단히 말하자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 말과 행동 하나까지도 다 포함되는데 어떠한 것이든 악한 것으로 심으면 악으로 거두고 선한 것으로 심으면 선으로 거두게 된다는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곧 죄를 심으면 사망으로 거둔다는 말씀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따라 죄인에 대해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사망이라는 판결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6: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모든 생각과 마음에 품는 것까지도 다 감찰하시므로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12: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오직 진리의 말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시며 입술에 나오는 모든 말을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는 예외가 없으며 이 땅에서든 아니면 심판날에 가서든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공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혹 여러분 중에 "공의의 하나님은 좀 무섭습니다." 하고 말씀하실 분이 계신지요? 이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보다는 공의에 따른 징계가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찰을 만나도 무서워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에 든든하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혹시 어딘가에 경찰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벌만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을 행한 만큼 반드시 그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지만 반대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한 만큼 반드시 선과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공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며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고 진리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징계나 연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느끼게 되지요. 나를 더 온전케 만들고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과 또한 이러한 공의가 있으므로 어두움에서 떠나 빛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3:12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곧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징계를 통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축복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히 12:8).
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다윗 왕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윗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버리지 못한 죄성이 있어 밧세바라는 여인을 취하고 이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 남편인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징계와 함께 혹독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죽었고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인 다윗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계기로 다윗이 가지고 있던 작은 죄성까지라도 완전히 뽑아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징계와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지요.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합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연단과 그 결과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공의로 심판하시되 결국에는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아버지를 반역하여 죽이고자 했던 압살롬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 안에 살고자 하며 설령 전에는 죄 가운데 있었다 해도 이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는 양약이 되고 축복으로 임하지만, 반대로 죄 가운데 거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의 판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까닭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그 결과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니 누가 선을 행하고자 하겠으며 선을 행한다 해도 무슨 소망이 있겠는지요.
그러나 전도서 12:14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도 믿습니다. 이처럼 반드시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으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선과 진리대로 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공의를 정오의 빛에 비유하신 이유
정오의 빛은 하루 중에 가장 밝히 비추는 빛입니다. 깊은 산 속에 있다 해도,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있다 해도 중천에 떠 있는 태양에서 발하는 정오의 빛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밝히 빛나므로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으며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악에서 떠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긴 것이지요.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거두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볼 때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공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바르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모세라는 한 인물을 택하시고 40년 간의 연단을 통해 그를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장정만 해도 60만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인도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지도자가 있어야 했지요.
실제로 광야생활 동안에 모세는 수많은 불순종과 원망, 불평을 하며 때로는 대적해 오기도 하는 백성들을 오래 참음과 기다림, 그리고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품어 주고 인도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참으로 자신을 닮은 모세를 보실 때 마음이 너무나 흐뭇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치 않으셨습니다. 백성 중에 고라라는 인물을 비롯하여 한 무리가 반역을 일으키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재앙으로 멸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은 결코 사랑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함으로 공의를 굽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또한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교훈을 삼게 하시고 다시금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사랑으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며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21
제29과사랑은 율법의 완성
요일 4:9-10
읽을말씀 : 요일 4:9-10 | 외울말씀 : 요일 4:9
교육목표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려면
우리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칠 때 비로소 그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는 분이시니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공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과 공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며 진정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하여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계명들이 많이 있지요. 예를 들면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죄를 버리라, 미워하지 말라' 등의 계명들을 총칭하여 율법이라 합니다.
이러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공의로운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공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즉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사망에 이르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하게 살면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2. 사랑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시며 계명들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비유를 들어 부모는 자녀에게 "손, 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는 길을 건너면 안 된다." 등 여러 가지 규칙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을 부모가 수시로 가르치는 이유는 자녀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킴을 받으며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고자 항상 당부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근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응답과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을 경작하는 기간 동안에는 원수 마귀가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타락해 가도록 유혹합니다(요일 2:16). 이처럼 세상적인 욕심을 좇으며 범죄해 나가는 사람의 앞길에는 고난과 재앙이 임하고 결국에는 사망이 기다릴 뿐입니다(롬 6:21).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만을 주기 원하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만큼 원수 마귀에게 내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만큼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는 등 환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있으면 넘어질 염려가 없듯이 빛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지킴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함께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구원과 축복의 길을 제시하는 율법
하나님 편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에게 영계의 법칙에 따라 항상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실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우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 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만큼 깨끗하고 선한 마음으로 변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자녀로 나오게 되지요.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자신도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 땅에서 경작받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복된 길을 제시하는 사랑의 교과서인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작받는 동안 재앙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시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이르기 원하는 마음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5.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과 한마음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본을 보이셨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여 "너희는 율법을 어겼으니 사망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또한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을 때의 일입니다(요 8장).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 범죄가 드러나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입에서 "돌로 치라"는 한 마디만 떨어지면 빗발치듯 날아드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를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에 부끄러워진 유대인들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6.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범죄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듣고 배워서 알고 그 처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때는 남의 눈을 피해 가며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드러나 고통과 두려움에 처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 여인은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범죄치 않을 것을 마음에 다지고 또 다졌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다시는 율법을 어기고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방법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죄인들을 위해 온몸에 채찍을 맞고 가시관을 쓰시며 손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다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생명을 주신 헌신, 이는 바로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행할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지 않고 율법 그 자체의 잣대로만 엄격하게 측정해서 사람이 범죄하는 대로 외면해 버리셨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겸비한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7. 영의 마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해야
율법의 근본 정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선 자체이신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율법의 외적인 형식에만 치우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아니라 곧장 판단과 정죄가 나왔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 안에 담긴 참된 것을 설명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없이 형제를 정죄하는 율법주의를 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고통스럽게 율법을 지키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3:2-3을 보면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하게 율법의 형식을 준행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형제에게 행한 판단과 정죄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 행악자가 되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죄악을 버림으로 근본 마음 자체를 깨끗하고 변함없는 영의 마음으로 일구어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려면
우리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칠 때 비로소 그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는 분이시니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공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과 공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며 진정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하여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계명들이 많이 있지요. 예를 들면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죄를 버리라, 미워하지 말라' 등의 계명들을 총칭하여 율법이라 합니다.
이러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공의로운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공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즉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사망에 이르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하게 살면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2. 사랑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시며 계명들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비유를 들어 부모는 자녀에게 "손, 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는 길을 건너면 안 된다." 등 여러 가지 규칙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을 부모가 수시로 가르치는 이유는 자녀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킴을 받으며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고자 항상 당부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근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응답과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을 경작하는 기간 동안에는 원수 마귀가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타락해 가도록 유혹합니다(요일 2:16). 이처럼 세상적인 욕심을 좇으며 범죄해 나가는 사람의 앞길에는 고난과 재앙이 임하고 결국에는 사망이 기다릴 뿐입니다(롬 6:21).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만을 주기 원하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만큼 원수 마귀에게 내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만큼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는 등 환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있으면 넘어질 염려가 없듯이 빛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지킴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함께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구원과 축복의 길을 제시하는 율법
하나님 편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에게 영계의 법칙에 따라 항상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실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우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 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만큼 깨끗하고 선한 마음으로 변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자녀로 나오게 되지요.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자신도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 땅에서 경작받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복된 길을 제시하는 사랑의 교과서인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작받는 동안 재앙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시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이르기 원하는 마음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5.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과 한마음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본을 보이셨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여 "너희는 율법을 어겼으니 사망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또한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을 때의 일입니다(요 8장).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 범죄가 드러나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입에서 "돌로 치라"는 한 마디만 떨어지면 빗발치듯 날아드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를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에 부끄러워진 유대인들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6.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범죄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듣고 배워서 알고 그 처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때는 남의 눈을 피해 가며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드러나 고통과 두려움에 처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 여인은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범죄치 않을 것을 마음에 다지고 또 다졌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다시는 율법을 어기고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방법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죄인들을 위해 온몸에 채찍을 맞고 가시관을 쓰시며 손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다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생명을 주신 헌신, 이는 바로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행할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지 않고 율법 그 자체의 잣대로만 엄격하게 측정해서 사람이 범죄하는 대로 외면해 버리셨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겸비한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7. 영의 마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해야
율법의 근본 정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선 자체이신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율법의 외적인 형식에만 치우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아니라 곧장 판단과 정죄가 나왔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 안에 담긴 참된 것을 설명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없이 형제를 정죄하는 율법주의를 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고통스럽게 율법을 지키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3:2-3을 보면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하게 율법의 형식을 준행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형제에게 행한 판단과 정죄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 행악자가 되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죄악을 버림으로 근본 마음 자체를 깨끗하고 변함없는 영의 마음으로 일구어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14
제28과사랑은 두려움이 없고
요일 4:18-19
읽을말씀 : 요일 4:18-19 | 외울말씀 : 요일 4:18
교육목표 :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요한일서 4:18을 보면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없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없으므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아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랑의 싹이 돋아나고 더욱 온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두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이유
1) 두려움은 범죄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 역사에 죄가 들어오게 된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로 창설해 주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각종 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은 죄로 인한 수치감으로 자기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죄가 들어오니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전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하나님의 음성이 죄를 짓고 나니 두려움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며 고달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인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만큼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보았습니다. 또 지팡이를 내어미니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역사도 체험했으며, 험난한 광야길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았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광경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들은 다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했지요.
이런 백성들과 달리 모세는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멀리 섰고 모세만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의 사이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믿지는 못했던 반면에 모세는 정녕 마음 중심에서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그만큼 악이 없고 성결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들이 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모세였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3)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 그만큼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예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결케 했으며 잔칫날이면 혹시 그 자녀들이 잔치를 즐기는 중에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3:25을 보면 재앙을 만난 후에 욥이 고백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지요. 곧 축복을 넘치게 받던 중에도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혹 내게 재앙을 주시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기 2:10을 보면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여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욥은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직접 체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며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을 참된 사랑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지요.
예전에는 전해 들은 지식에 의해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는데 이제 직접 만나고 체험하니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으니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모하면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죄가 대속되는 길이 열려 있기에 사랑이 임하는 만큼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이요,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두려움이 조금도 없는 것이지요.
2.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 66권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고자 할 것입니다. 설령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해 주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운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한다는 것은 곤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음성이라도 듣고 싶어 늘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과 함께한다면 하루 종일 걷는다 해도 다리가 아픈지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는 만큼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인 천국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육의 생명이 끝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값지고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요한일서 4:18을 보면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없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없으므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아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랑의 싹이 돋아나고 더욱 온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두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이유
1) 두려움은 범죄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 역사에 죄가 들어오게 된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로 창설해 주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각종 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은 죄로 인한 수치감으로 자기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죄가 들어오니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전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하나님의 음성이 죄를 짓고 나니 두려움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며 고달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인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만큼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보았습니다. 또 지팡이를 내어미니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역사도 체험했으며, 험난한 광야길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았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광경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들은 다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했지요.
이런 백성들과 달리 모세는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멀리 섰고 모세만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의 사이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믿지는 못했던 반면에 모세는 정녕 마음 중심에서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그만큼 악이 없고 성결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들이 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모세였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3)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 그만큼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예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결케 했으며 잔칫날이면 혹시 그 자녀들이 잔치를 즐기는 중에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3:25을 보면 재앙을 만난 후에 욥이 고백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지요. 곧 축복을 넘치게 받던 중에도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혹 내게 재앙을 주시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기 2:10을 보면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여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욥은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직접 체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며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을 참된 사랑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지요.
예전에는 전해 들은 지식에 의해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는데 이제 직접 만나고 체험하니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으니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모하면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죄가 대속되는 길이 열려 있기에 사랑이 임하는 만큼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이요,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두려움이 조금도 없는 것이지요.
2.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 66권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고자 할 것입니다. 설령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해 주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운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한다는 것은 곤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음성이라도 듣고 싶어 늘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과 함께한다면 하루 종일 걷는다 해도 다리가 아픈지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는 만큼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인 천국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육의 생명이 끝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값지고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07
제27과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벧전 4:8
읽을말씀 : 벧전 4:8 | 외울말씀 : 벧전 4:8
교육목표 :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로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함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흔히 '허물'은 그릇된 실수나 잘못을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성질이 행함으로 드러났을 때 허물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 실제로 도둑질을 행했다면 허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준다는 것은 단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오래 참음으로 상대가 어떻게든 잘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며 변화될 모습을 기대하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능히 인내하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한 마음을 가져 모든 사람들에게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베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의 허물을 보았을 때 가만히 끊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성경상의 인물로는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만약 구약의 율법대로 한다면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도록 내놓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마 1:19). 이런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천사를 통해 알려 주셨지요.
만일 여러분이 요셉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골로새서 3:13-14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말씀한 대로 믿음의 형제 사이에는 서로 다투어 허물을 드러냄으로 불의한 자가 되느니 차라리 누명을 쓰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악을 행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받고 사자굴에 던짐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었기에 왕 앞에 가서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고 묵묵히 공의의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나와 이방 나라의 임금과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 할지라도 용서하고 참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사랑과 용서, 인내와 오래 참음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2.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허물을 덮어 준다는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하루는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두 형제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지요(창 9:23). 이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그 허물을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낸 함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잠언 17:9을 보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으며, 설령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마치 그것을 자신의 허물인 것처럼 민망히 여기게 됩니다.
흠과 점과 티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하고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베푸셨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으며 영혼들의 아픈 곳을 싸매 주시고 죄인의 허물을 보면 덮어 주시며 돌이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부모나 형제, 남편이나 아내는 물론이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모든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을 덮어 주라 하니 무조건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옳을까요? 허물은 곧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상대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도 덮어 놓고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상대의 허물의 경중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랑의 권면이나 훈계, 책망 등 알맞은 방법으로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를 다 빼낸 사람만이 남의 티를 지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해도 사랑을 가지고 권면이나 책망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양약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참사랑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야고보서 5:19-20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진리를 떠난 사람을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한다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길이고, 또한 그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 했으니 이같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3. 상대가 진리로 변화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주고 이해해 주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심으로 결국은 생명을 낳으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썩어질 육의 생명이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받을 수 있게 하는 생명이요, 영으로 살리는 생명이지요. 또한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찬란한 빛을 비춰 주는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허물 많던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지요.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답변하셨습니다(요 13:36).
또한 누가복음 22:31-32에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당부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했고(요 13:37), 또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고백했지요(눅 22:33).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과는 달리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요 13:38).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지요.
만일 베드로가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루에도 수천 명을 회개시켜 주께 돌아오게 하고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든 자가 나음을 얻는 그런 권능의 사도로서의 베드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던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때 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떠올렸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셨던 말씀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당부하셨던 말씀,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던 말씀 등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고 자신이 주를 부인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부의 말씀만 해 주신 일들에 대해 떠올렸지요. 베드로는 모든 사실을 깨달은 후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데 대한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더한 죄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베드로를 구해 내셨던 것입니다. 이미 지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은 물론, 더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의 허물을 발견했다면 먼저는 마음에서부터 가만히 끊어 버리되 때로는 지혜롭고 선한 말로 권면이나 책망을 하여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로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함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흔히 '허물'은 그릇된 실수나 잘못을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성질이 행함으로 드러났을 때 허물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 실제로 도둑질을 행했다면 허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준다는 것은 단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오래 참음으로 상대가 어떻게든 잘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며 변화될 모습을 기대하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능히 인내하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한 마음을 가져 모든 사람들에게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베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의 허물을 보았을 때 가만히 끊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성경상의 인물로는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만약 구약의 율법대로 한다면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도록 내놓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마 1:19). 이런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천사를 통해 알려 주셨지요.
만일 여러분이 요셉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골로새서 3:13-14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말씀한 대로 믿음의 형제 사이에는 서로 다투어 허물을 드러냄으로 불의한 자가 되느니 차라리 누명을 쓰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악을 행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받고 사자굴에 던짐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었기에 왕 앞에 가서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고 묵묵히 공의의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나와 이방 나라의 임금과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 할지라도 용서하고 참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사랑과 용서, 인내와 오래 참음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2.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허물을 덮어 준다는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하루는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두 형제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지요(창 9:23). 이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그 허물을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낸 함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잠언 17:9을 보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으며, 설령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마치 그것을 자신의 허물인 것처럼 민망히 여기게 됩니다.
흠과 점과 티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하고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베푸셨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으며 영혼들의 아픈 곳을 싸매 주시고 죄인의 허물을 보면 덮어 주시며 돌이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부모나 형제, 남편이나 아내는 물론이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모든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을 덮어 주라 하니 무조건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옳을까요? 허물은 곧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상대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도 덮어 놓고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상대의 허물의 경중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랑의 권면이나 훈계, 책망 등 알맞은 방법으로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를 다 빼낸 사람만이 남의 티를 지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해도 사랑을 가지고 권면이나 책망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양약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참사랑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야고보서 5:19-20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진리를 떠난 사람을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한다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길이고, 또한 그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 했으니 이같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3. 상대가 진리로 변화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주고 이해해 주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심으로 결국은 생명을 낳으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썩어질 육의 생명이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받을 수 있게 하는 생명이요, 영으로 살리는 생명이지요. 또한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찬란한 빛을 비춰 주는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허물 많던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지요.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답변하셨습니다(요 13:36).
또한 누가복음 22:31-32에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당부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했고(요 13:37), 또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고백했지요(눅 22:33).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과는 달리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요 13:38).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지요.
만일 베드로가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루에도 수천 명을 회개시켜 주께 돌아오게 하고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든 자가 나음을 얻는 그런 권능의 사도로서의 베드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던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때 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떠올렸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셨던 말씀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당부하셨던 말씀,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던 말씀 등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고 자신이 주를 부인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부의 말씀만 해 주신 일들에 대해 떠올렸지요. 베드로는 모든 사실을 깨달은 후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데 대한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더한 죄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베드로를 구해 내셨던 것입니다. 이미 지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은 물론, 더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의 허물을 발견했다면 먼저는 마음에서부터 가만히 끊어 버리되 때로는 지혜롭고 선한 말로 권면이나 책망을 하여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30
제26과맥추절을 지키라
민 23:19
읽을말씀 : 민 23:19 | 외울말씀 : 민 23:19
교육목표 :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열매로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맥추절이 되면 처음 수확한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러면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100%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이지요.
예레미야 32:27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결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리라 약속하셨다면 결코 변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개척 이후, 하나님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씀하시면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장차 세계를 이룰 것"이라 하신 말씀이나 "천하만민이 하나님께 나와 영광돌리는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 말씀하실 때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본교회가 세계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무수한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해 왔고 실제로 세계를 이뤄가는 과정들이 눈앞에 드러나 보이고 있으니 의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개척 당시는 교회 사정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십여 평의 조그만 성전에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겨우 열 세 명이 모인 조그만 개척 교회입니다. 주교사도, 성가대도, 찬양팀도, 봉사대도 없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마음에 새기며 현실과 상관없이 온전히 믿어드릴 때 바로 그 믿음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는 주역들로 쓰임받을 것을 믿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한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 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고,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거나 감정을 품기도 하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충성하는 행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주실 때 정녕 믿는다면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말씀하신 대로 먼저 구해야 합니다. 불같이 중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방법론을 주십니다.
우리는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 행하였습니다. 엄청난 재정과 희생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믿었기에 힘을 다해 이뤄온 것입니다.
만약 "여력이 있으면 준비하겠다" 하고 손을 놓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세계를 이루는 열매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요단 강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믿음으로 강을 밟고 건너는 행함은 사람의 몫인 것처럼,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을 믿었기에 부지런히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왔던 것입니다.
3.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이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 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고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 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야고보서 1:6-7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치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명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 강을 건너며 여리고 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여 그대로 행해 나가심으로 믿음으로 심은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한 축복과 영원한 천국의 상급으로 열매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열매로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맥추절이 되면 처음 수확한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러면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100%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이지요.
예레미야 32:27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결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리라 약속하셨다면 결코 변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개척 이후, 하나님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씀하시면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장차 세계를 이룰 것"이라 하신 말씀이나 "천하만민이 하나님께 나와 영광돌리는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 말씀하실 때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본교회가 세계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무수한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해 왔고 실제로 세계를 이뤄가는 과정들이 눈앞에 드러나 보이고 있으니 의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개척 당시는 교회 사정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십여 평의 조그만 성전에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겨우 열 세 명이 모인 조그만 개척 교회입니다. 주교사도, 성가대도, 찬양팀도, 봉사대도 없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마음에 새기며 현실과 상관없이 온전히 믿어드릴 때 바로 그 믿음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는 주역들로 쓰임받을 것을 믿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한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 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고,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거나 감정을 품기도 하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충성하는 행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주실 때 정녕 믿는다면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말씀하신 대로 먼저 구해야 합니다. 불같이 중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방법론을 주십니다.
우리는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 행하였습니다. 엄청난 재정과 희생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믿었기에 힘을 다해 이뤄온 것입니다.
만약 "여력이 있으면 준비하겠다" 하고 손을 놓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세계를 이루는 열매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요단 강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믿음으로 강을 밟고 건너는 행함은 사람의 몫인 것처럼,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을 믿었기에 부지런히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왔던 것입니다.
3.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이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 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고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 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야고보서 1:6-7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치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명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 강을 건너며 여리고 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여 그대로 행해 나가심으로 믿음으로 심은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한 축복과 영원한 천국의 상급으로 열매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