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473 PAGE : 98/105
2006-05-26
제21과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1)
요일 4:9-10
읽을말씀 : 요일 4:9-10 | 외울말씀 : 요일 4:9-10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므로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라는 고백을 마음 중심에서 드리게 됩니다.
오늘은 죄인된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마음 깊이 느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만세 전에 독생자를 예비하시고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
요한일서 4:9-10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을 말하지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원수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우리를 이 땅에 경작하고 계시는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8).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간교한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그만 영이 죽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하여 불순종했지만, 이 땅에서 온갖 죄악을 경험하면서 경작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오직 행복만 있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러 하나님께 감사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경작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참자녀로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나 만세 전에 예비하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의 주로서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존귀와 위엄을 갖추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일까요?
전도서 3:18에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점점 타락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는가 하면, 심지어 부모와 자녀간에 살인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요.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우리 사람들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까.
3.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가난한 길을 가신 예수님
마태복음 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때로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주무시기도 했고 잡수실 것이 없어 주리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게 하셨고(마 14장)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요 2:1-11) 등 능력이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늘 가난하고 헐벗은 길을 가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땀 흘리지 않아도 마음껏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로 인해 땀 흘려 소산을 먹어야 했고 가난한 길을 가게 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난까지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고후 8:9).
4. 각색 질병을 치료하시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어 주신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피부로 느끼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뚜렷이 확증시켜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이겨 내셨지요. 이는 우리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더욱 긍휼히 여기셔서 언제나 이길 힘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8).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는데, 그 대상은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또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죄인이라 정죄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부나 명예, 권세가 있거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인생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으며(요 5:2-9, 마 9:20-22, 막 10:46-52, 눅 7:11-17), 죄인과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시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마 9:12). 이처럼 죄인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 감복하게 되며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최고의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을 살려 주는 사랑이요,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2:47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셔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 가운데 행하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공의로만 심판하신다면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부족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너는 죄 있다' 하신다면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진리대로 살아가기를 늘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인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요 3:16).
6. 탕자의 비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모두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지요. 아버지가 이같이 행하였던 것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이러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헤매이는 무수한 영혼들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의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시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으시고 다만 기쁨으로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허물이 있어도 덮어 주시고 감싸 주시며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므로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라는 고백을 마음 중심에서 드리게 됩니다.
오늘은 죄인된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마음 깊이 느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만세 전에 독생자를 예비하시고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
요한일서 4:9-10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을 말하지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원수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우리를 이 땅에 경작하고 계시는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8).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간교한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그만 영이 죽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하여 불순종했지만, 이 땅에서 온갖 죄악을 경험하면서 경작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오직 행복만 있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러 하나님께 감사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경작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참자녀로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나 만세 전에 예비하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의 주로서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존귀와 위엄을 갖추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일까요?
전도서 3:18에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점점 타락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는가 하면, 심지어 부모와 자녀간에 살인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요.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우리 사람들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우리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까.
3.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가난한 길을 가신 예수님
마태복음 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때로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주무시기도 했고 잡수실 것이 없어 주리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게 하셨고(마 14장)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요 2:1-11) 등 능력이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늘 가난하고 헐벗은 길을 가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땀 흘리지 않아도 마음껏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로 인해 땀 흘려 소산을 먹어야 했고 가난한 길을 가게 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난까지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고후 8:9).
4. 각색 질병을 치료하시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어 주신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피부로 느끼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뚜렷이 확증시켜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이겨 내셨지요. 이는 우리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더욱 긍휼히 여기셔서 언제나 이길 힘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8).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는데, 그 대상은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또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죄인이라 정죄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부나 명예, 권세가 있거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인생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으며(요 5:2-9, 마 9:20-22, 막 10:46-52, 눅 7:11-17), 죄인과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시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마 9:12). 이처럼 죄인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 감복하게 되며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최고의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을 살려 주는 사랑이요,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2:47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셔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 가운데 행하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공의로만 심판하신다면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부족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너는 죄 있다' 하신다면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진리대로 살아가기를 늘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인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요 3:16).
6. 탕자의 비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모두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지요. 아버지가 이같이 행하였던 것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이러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헤매이는 무수한 영혼들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의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시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으시고 다만 기쁨으로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허물이 있어도 덮어 주시고 감싸 주시며 모든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19
제20과하나님의 속성
요일 4:7-8
읽을말씀 : 요일 4:7-8 | 외울말씀 : 요일 4:7-8
교육목표 : 하나님의 근본 속성인 사랑에 대해 밝히 깨우쳐 다 주고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진정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랑에는 시간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과 영원히 변치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참된 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는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오늘날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서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육적인 사랑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과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했으니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출애굽기 15:26에 말씀한 대로 치료하는 여호와를 만나 질병으로부터 지킴을 받을 뿐 아니라 혹여 질병에 걸렸다 해도 깨끗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온전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속성의 근본은 사랑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또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속성의 근본은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사람처럼 육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질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0:5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했는데 이는 한 사람이라도 우상 숭배와 같은 사망의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분이요, 축복받는 길임을 나타내 주시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2-13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축복으로 인도받게 되지만 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질투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시지만 잘못한 것, 즉 죄에 대해서는 그 행위에 따라 때로는 징계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용서하시고 참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이를 통해 자녀들이 바른 진리의 길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인간 경작의 모든 섭리도 사랑에서 시작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첫사람 아담을 지으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달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만 하는 천사와 같은 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곧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경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아름다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으로 아담을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행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고, 미움을 몰랐기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불행이나 죽음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고 또 범죄하는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인간 경작'이라는 숨겨진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경작을 받으며 미움, 슬픔, 고통, 불행 등을 체험해야 참다운 행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 경작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왔으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고, 결국 죄 가운데 빠져 짐승만도 못한 상황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대홍수의 재앙을 통해 모두 죽게 되었지요. 그 안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대홍수의 심판을 통해 후세들에게 큰 교훈과 함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해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를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행함을 보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지요(창 22:12).
이처럼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가 되는 놀라운 축복과 함께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통해 마음껏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부어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먼저 감동을 주어서 상대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아들 이삭 대신 숫양을 예비해 두셨다가 제물로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녀들이 경작을 통해 진리로 나오는 만큼 축복과 응답을 주시고 그 감동함 속에서 하나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받아 구원을 얻고 각종 문제를 해결받는 체험을 하게 되면 "나 같은 죄인도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는구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올리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이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자녀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오늘도 이 땅에서 경작받아 나가는 것이며 날마다 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으니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곳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근본 속성인 사랑에 대해 밝히 깨우쳐 다 주고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진정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랑에는 시간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과 영원히 변치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참된 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는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오늘날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서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육적인 사랑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과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했으니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출애굽기 15:26에 말씀한 대로 치료하는 여호와를 만나 질병으로부터 지킴을 받을 뿐 아니라 혹여 질병에 걸렸다 해도 깨끗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온전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속성의 근본은 사랑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또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속성의 근본은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사람처럼 육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질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0:5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했는데 이는 한 사람이라도 우상 숭배와 같은 사망의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분이요, 축복받는 길임을 나타내 주시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2-13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축복으로 인도받게 되지만 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질투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시지만 잘못한 것, 즉 죄에 대해서는 그 행위에 따라 때로는 징계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용서하시고 참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이를 통해 자녀들이 바른 진리의 길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인간 경작의 모든 섭리도 사랑에서 시작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첫사람 아담을 지으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달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만 하는 천사와 같은 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곧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경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아름다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으로 아담을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행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고, 미움을 몰랐기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불행이나 죽음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고 또 범죄하는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인간 경작'이라는 숨겨진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경작을 받으며 미움, 슬픔, 고통, 불행 등을 체험해야 참다운 행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 경작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왔으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고, 결국 죄 가운데 빠져 짐승만도 못한 상황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대홍수의 재앙을 통해 모두 죽게 되었지요. 그 안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대홍수의 심판을 통해 후세들에게 큰 교훈과 함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해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를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행함을 보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지요(창 22:12).
이처럼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가 되는 놀라운 축복과 함께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통해 마음껏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부어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먼저 감동을 주어서 상대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아들 이삭 대신 숫양을 예비해 두셨다가 제물로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녀들이 경작을 통해 진리로 나오는 만큼 축복과 응답을 주시고 그 감동함 속에서 하나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받아 구원을 얻고 각종 문제를 해결받는 체험을 하게 되면 "나 같은 죄인도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는구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올리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이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자녀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오늘도 이 땅에서 경작받아 나가는 것이며 날마다 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으니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곳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12
제19과선(17) - 엘리야 (3)-
요 3:28-30
읽을말씀 : 요 3:28-30 | 외울말씀 : 요 3:30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세례 요한 처럼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함으로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의 선, 첫 번째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점이요, 두 번째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점이라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냈고 승천한 이후에도 체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승해졌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알게 되자 마음에 주를 사모함이 불붙는 듯하여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고 그 고백대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것이 엘리야의 선, 세 번째 덕목입니다.
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지난 시간에 산 채로 들림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왔는데, 이때 육의 부모의 기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택했다 했지요(눅 1:6).
그런데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아이가 없었고,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였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알려준 말씀이 누가복음 1:13-17에 나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그 후에 정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가브리엘이 일러준 말씀을 명심하여 아이를 잘 양육했겠는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80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빈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하게 주관받게 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21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이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바로 누가복음 2:49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가게 되었지요. 즉 '내가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마음에 주관 받게 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러한 가운데 누가복음 3:15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누가복음 3:16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겠는지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잘 예비하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지요. 이에 대해 요한복음 3:26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서글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28-30을 보면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함께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찾아 볼 수 없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영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이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도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 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고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적인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직분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지요.
이처럼 어떠한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되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사심이 있으므로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사심 없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자신도 더불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마음이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정녕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정녕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시간에 걸쳐 중심의 지극한 선 가운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냈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엘리야의 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삶 속에서 이러한 선의 말씀들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세례 요한 처럼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함으로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의 선, 첫 번째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점이요, 두 번째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점이라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냈고 승천한 이후에도 체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승해졌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알게 되자 마음에 주를 사모함이 불붙는 듯하여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고 그 고백대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것이 엘리야의 선, 세 번째 덕목입니다.
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지난 시간에 산 채로 들림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왔는데, 이때 육의 부모의 기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택했다 했지요(눅 1:6).
그런데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아이가 없었고,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였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알려준 말씀이 누가복음 1:13-17에 나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그 후에 정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가브리엘이 일러준 말씀을 명심하여 아이를 잘 양육했겠는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80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빈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하게 주관받게 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21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이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바로 누가복음 2:49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가게 되었지요. 즉 '내가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마음에 주관 받게 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러한 가운데 누가복음 3:15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누가복음 3:16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겠는지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잘 예비하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지요. 이에 대해 요한복음 3:26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서글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28-30을 보면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함께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찾아 볼 수 없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영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이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도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 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고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적인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직분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지요.
이처럼 어떠한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되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사심이 있으므로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사심 없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자신도 더불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마음이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정녕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정녕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시간에 걸쳐 중심의 지극한 선 가운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냈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엘리야의 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삶 속에서 이러한 선의 말씀들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05
제18과영적인 어린아이
마 18:1-4
읽을말씀 : 마 18:1-4 | 외울말씀 : 마 18:4
교육목표 :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18:1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자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린아이가 낮고 약한 존재이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야 큰자이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유치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선하고 좋은 점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영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며 겸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행하면서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1)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출근하실 때는 인사해라, 동생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등 가르침 받은 대로 익혀 '하라' 하는 일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어떤 것은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하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로 믿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한 천국에서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이 되어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으며 들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퍼지면 울고 기쁘면 웃는 등 어른과 달리 순수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줄을 배웠다 해도 세상을 살면서 악에 물들어 있는 만큼 잘못을 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 안에 들어와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선악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게 되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힘쓰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이루어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선한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만한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혹여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1)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세상의 비진리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갑니다. 교만과 혈기, 판단과 정죄, 욕심과 자존심, 시기와 질투, 미움과 거짓됨, 이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지요.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불같은 기도를 통해 이런 죄악들을 마음에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죄악들을 벗어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2)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5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이는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자기 이론과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책망하였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성령의 주관을 좇아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고 끝까지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불같이 기도하며 날마다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자라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18:1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자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린아이가 낮고 약한 존재이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야 큰자이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유치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선하고 좋은 점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영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며 겸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행하면서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1)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출근하실 때는 인사해라, 동생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등 가르침 받은 대로 익혀 '하라' 하는 일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어떤 것은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하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로 믿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한 천국에서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이 되어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으며 들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퍼지면 울고 기쁘면 웃는 등 어른과 달리 순수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줄을 배웠다 해도 세상을 살면서 악에 물들어 있는 만큼 잘못을 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 안에 들어와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선악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게 되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힘쓰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이루어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선한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만한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혹여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1)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세상의 비진리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갑니다. 교만과 혈기, 판단과 정죄, 욕심과 자존심, 시기와 질투, 미움과 거짓됨, 이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지요.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불같은 기도를 통해 이런 죄악들을 마음에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죄악들을 벗어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2)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5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이는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자기 이론과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책망하였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성령의 주관을 좇아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고 끝까지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불같이 기도하며 날마다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자라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28
제17과선(16) - 엘리야(2)-
눅 1:17
읽을말씀 : 눅 1:17 | 외울말씀 : 눅 1:17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사랑의 선을 본받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엘리야가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배웠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보임으로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자 불말이 이끄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엘리야의 선, 그리고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던 예수님을 닮은 엘리야의 지극한 선을 통해 깊은 감동과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뤄내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고 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으로 입히시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도 사모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하여 이루어 드렸습니다. 더구나 엘리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할 때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얼마나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육으로는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닌 엘리야가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제안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더 밝히 깨닫게 되었지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깨달아 알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마음 깊이 깨우침으로 심히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눈앞에 친히 뵙게 되었을 때 엘리야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이 땅에 있을 때도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있었지만 천국에 올라가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밝히 깨닫고 확실히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맡으신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바로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철저히 인생들과 같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셔야 하고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고백을 받으시고 그로 하여금 다시 이 땅에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는 큰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다시 와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까지 미리 예언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40:3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또한 말라기 4:5-6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셨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지게 되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 1:6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7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4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답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이나 점도, 티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금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갈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기꺼이 "아멘"으로 받아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주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사하여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물이 끓으면 밖으로 수증기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핑계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성령께서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며 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시대이니 엘리야의 선을 본받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매일, 매 순간마다 사랑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사랑의 선을 본받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엘리야가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배웠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보임으로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자 불말이 이끄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엘리야의 선, 그리고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던 예수님을 닮은 엘리야의 지극한 선을 통해 깊은 감동과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뤄내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고 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으로 입히시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도 사모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하여 이루어 드렸습니다. 더구나 엘리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할 때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얼마나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육으로는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닌 엘리야가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제안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더 밝히 깨닫게 되었지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깨달아 알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마음 깊이 깨우침으로 심히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눈앞에 친히 뵙게 되었을 때 엘리야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이 땅에 있을 때도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있었지만 천국에 올라가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밝히 깨닫고 확실히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맡으신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바로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철저히 인생들과 같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셔야 하고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고백을 받으시고 그로 하여금 다시 이 땅에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는 큰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다시 와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까지 미리 예언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40:3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또한 말라기 4:5-6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셨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지게 되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 1:6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7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4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답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이나 점도, 티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금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갈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기꺼이 "아멘"으로 받아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주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사하여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물이 끓으면 밖으로 수증기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핑계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성령께서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며 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시대이니 엘리야의 선을 본받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매일, 매 순간마다 사랑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21
제16과선(15) - 엘리야(1)-
왕하 2:11
읽을말씀 : 왕하 2:11 | 외울말씀 : 왕하 2:11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방 여인인 왕비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신이 널리 퍼져 우상 숭배가 만연했지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달하는 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첫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가뭄의 저주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왕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서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많은 날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렸으며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후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끝나고 큰 비가 왔습니다(약 5:17-18). 이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기도 하고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영으로 변화된 이후의 영적인 표현이고 아직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의 그는 심히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감을 갖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혹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그러들었지요. 이처럼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기에 엘리야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그를 택하여서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영으로 변화되면 또한 귀히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도 매우 담대하고 똑똑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반드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도, 들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면을 좋게 여기시고 선지자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이 따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이 들 것을 선포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엘리야로 하여금 숨을 곳을 지정해 주셨지요. 그로부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하여 엘리야를 심히도 미워하고 잡고자 하는 때였지요. 만일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요. 더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에게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정녕 부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정녕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지요.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들을 해 나가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는 되어지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 확고히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그의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고 붙잡으니 엘리야는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함이 입혀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지요. 바로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택하여 쓰시고자 할 때 굳이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 나타낼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이미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이미 그릇 안에 담긴 "자기"와 섞여서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많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요. 늘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진실하게 고백했고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육적으로 볼 때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고전 1:27-29).
그런데 때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과 들레는 마음 등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아 쓰임받는 것처럼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받은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마태복음 7:20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으니 여러분들은 열매로 밝히 분별하셔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 받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육의 찌끼와 혼잡물들도 빼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지요.
더 나아가 자기 의와 틀도 철저히 깨뜨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치 않으므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했지요. 늘 하나님과 교통은 하였으나 성령이 마음에 임하지 않은 구약 시대임에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항상 화평을 이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마음에서 불편함을 품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자신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사해 주셨으며 은혜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은 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과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4:7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항상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방 여인인 왕비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신이 널리 퍼져 우상 숭배가 만연했지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달하는 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첫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가뭄의 저주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왕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서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많은 날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렸으며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후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끝나고 큰 비가 왔습니다(약 5:17-18). 이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기도 하고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영으로 변화된 이후의 영적인 표현이고 아직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의 그는 심히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감을 갖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혹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그러들었지요. 이처럼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기에 엘리야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그를 택하여서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영으로 변화되면 또한 귀히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도 매우 담대하고 똑똑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반드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도, 들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면을 좋게 여기시고 선지자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이 따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이 들 것을 선포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엘리야로 하여금 숨을 곳을 지정해 주셨지요. 그로부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하여 엘리야를 심히도 미워하고 잡고자 하는 때였지요. 만일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요. 더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에게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정녕 부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정녕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지요.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들을 해 나가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는 되어지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 확고히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그의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고 붙잡으니 엘리야는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함이 입혀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지요. 바로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택하여 쓰시고자 할 때 굳이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 나타낼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이미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이미 그릇 안에 담긴 "자기"와 섞여서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많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요. 늘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진실하게 고백했고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육적으로 볼 때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고전 1:27-29).
그런데 때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과 들레는 마음 등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아 쓰임받는 것처럼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받은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마태복음 7:20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으니 여러분들은 열매로 밝히 분별하셔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 받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육의 찌끼와 혼잡물들도 빼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지요.
더 나아가 자기 의와 틀도 철저히 깨뜨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치 않으므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했지요. 늘 하나님과 교통은 하였으나 성령이 마음에 임하지 않은 구약 시대임에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항상 화평을 이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마음에서 불편함을 품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자신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사해 주셨으며 은혜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은 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과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4:7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항상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14
제15과부활의 소망과 확신
요 11:25-26, 고전 15:12-22
읽을말씀 : 요 11:25-26, 고전 15:12-22 | 외울말씀 : 고전 15:20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나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던 경우 또는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라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일도 항상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꿈틀대던 굼벵이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고, 구더기가 변하여 파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장차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심어 주신 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9-11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그 후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친히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결코 평안함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간구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지요(행 7:59-60).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확신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떠한 고통도 괘념하지 않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0:24).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확신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아 느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보임으로 행함을 통해 확신이 와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 믿어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받아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나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던 경우 또는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라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일도 항상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꿈틀대던 굼벵이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고, 구더기가 변하여 파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장차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심어 주신 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9-11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그 후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친히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결코 평안함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간구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지요(행 7:59-60).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확신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떠한 고통도 괘념하지 않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0:24).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확신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아 느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보임으로 행함을 통해 확신이 와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 믿어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받아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07
제14과선 (14) - 아브라함 (2)
히 11:17-19
읽을말씀 : 히 11:17-19 | 외울말씀 : 히 11:1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아브람은 즉시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한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람은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첫 시험이었던 이때부터 백 세에 얻게 하신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서 채비를 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러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어지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5년이 지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래가 참지 못하여 아브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로마서 4:19-21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되므로 인해 낙심하여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아브람은 즉시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한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람은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첫 시험이었던 이때부터 백 세에 얻게 하신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서 채비를 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러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어지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5년이 지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래가 참지 못하여 아브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로마서 4:19-21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되므로 인해 낙심하여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31
제13과선 (13) - 아브라함 (1) -
창 13:8-9
읽을말씀 : 창 13:8-9 | 외울말씀 : 창 13:9
교육목표 :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하였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시며 소유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온전히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모두의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조카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롯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하여 떠났다 해서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기므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그릇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었으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런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과 가족이 전쟁에 연루되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지요.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백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가하지만 사사로운 유익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10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헷 족속이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할 수도 있지요. 이러한 훗날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가운데 나와진 일이지요. 훗날 아브람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람에 돌렸기 때문에 아브람이 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니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 할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우물의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케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에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18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셨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하였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시며 소유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온전히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모두의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조카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롯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하여 떠났다 해서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기므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그릇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었으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런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과 가족이 전쟁에 연루되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지요.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백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가하지만 사사로운 유익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10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헷 족속이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할 수도 있지요. 이러한 훗날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가운데 나와진 일이지요. 훗날 아브람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람에 돌렸기 때문에 아브람이 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니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 할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우물의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케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에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18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셨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24
제12과선 (12) - 모세(2) -
민 12:3, 7
읽을말씀 : 민 12:3, 7 | 외울말씀 : 민 12:3, 7
교육목표 :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영적으로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와 같이 아름다운 선(善)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좋은 그릇들로 나오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던 것과 광야에서 연단을 받을 때 오직 감사로 받았던 선의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과연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나아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또한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줄 수 있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를 감싸주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불편함을 주지도 않으며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러한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므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갖가지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사흘 동안 광야 길을 행하고 나서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들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는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자 이번에는 먹을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했고(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란 곳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다시 마실 물이 없자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을 할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백성들이지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의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찌하든 백성들의 원을 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여 진멸 당할 상황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조금 오랜 날을 산에 올라 있을 때, 백성들은 금세 마음이 방자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그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1-13). 이에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사 화를 내리지 않으셨지요.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이 행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를 범하였지만 그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을 구했지요. 그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틈만 나면 불평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었지만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5을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위해 고용된 일꾼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와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마음에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고자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모세는 늘 백성들로 인해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백성들로 인한 애통과 번민, 염려로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백성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믿고 신뢰하심으로 많은 교통을 이루셨고 또 큰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금식하며 기도하되 모든 힘을 다해 짜내기까지 처절하게 노력하여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풀어 받았고 하나님과 많은 교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입으로 내지 않고 철저히 지켰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으되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출애굽 2세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믿음으로 백성을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많은 권능들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는데, 더 온전히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인 것이지요. 모세는 바로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여러분은 혹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너무도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신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까지 백성들로 인해 한시도 마음 편히 눕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뜨겁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17:7-8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말씀하셨으니 모세의 선을 닮은 거목(巨木)으로 자라나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영적으로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와 같이 아름다운 선(善)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좋은 그릇들로 나오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던 것과 광야에서 연단을 받을 때 오직 감사로 받았던 선의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과연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나아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또한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줄 수 있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를 감싸주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불편함을 주지도 않으며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러한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므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갖가지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사흘 동안 광야 길을 행하고 나서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들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는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자 이번에는 먹을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했고(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란 곳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다시 마실 물이 없자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을 할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백성들이지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의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찌하든 백성들의 원을 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여 진멸 당할 상황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조금 오랜 날을 산에 올라 있을 때, 백성들은 금세 마음이 방자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그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1-13). 이에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사 화를 내리지 않으셨지요.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이 행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를 범하였지만 그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을 구했지요. 그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틈만 나면 불평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었지만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5을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위해 고용된 일꾼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와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마음에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고자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모세는 늘 백성들로 인해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백성들로 인한 애통과 번민, 염려로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백성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믿고 신뢰하심으로 많은 교통을 이루셨고 또 큰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금식하며 기도하되 모든 힘을 다해 짜내기까지 처절하게 노력하여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풀어 받았고 하나님과 많은 교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입으로 내지 않고 철저히 지켰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으되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출애굽 2세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믿음으로 백성을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많은 권능들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는데, 더 온전히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인 것이지요. 모세는 바로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여러분은 혹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너무도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신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까지 백성들로 인해 한시도 마음 편히 눕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뜨겁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17:7-8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말씀하셨으니 모세의 선을 닮은 거목(巨木)으로 자라나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