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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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8
제22과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고전 13:1-13
읽을말씀 : 고전 13:1-13 | 외울말씀 : 고전 13:1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주님을 본받을 수 있도록 영적인 사랑의 특성들에 대해 살펴본다.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에는 부모 자녀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형제, 이웃, 친구간의 사랑 등이 있는데, 그 사랑의 농도는 모두 다릅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부모의 사랑이 고귀하다고 하지만 이것을 영적인 사랑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를 위해서만 희생하려 하거나, 자녀가 자꾸 부모의 속을 썩이면 희생하던 마음도 차츰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헤어지자고 서슴없이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처럼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변질되는 사랑이 육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사랑은 자신을 희생해 줄 수 있는 사랑이요 결코 변치 않고 썩어지지 아니하며 영생에 이르는 사랑입니다.
2. 영적인 사랑의 속성
1) 오래 참습니다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게 오는 시련들과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 즉 내 개인에 대한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고 어렵게 만들어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사랑의 오래 참음입니다(마 5:44).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며 온갖 희생을 다하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사랑과 오래 참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랑이요 오래 참음입니다.
2) 온유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하여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떠한 사람과도 거침돌이 되지 않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 정죄치 않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며 감싸 줄 수 있는 덕이 있습니다. 이러한 덕을 지닌 온유한 사람이 바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이상이나 꿈 가운데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는 친히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3)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는 시기 질투보다 더 심한 악의 모습입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높아지거나 부유해지고, 사랑받을 때 시기 질투가 나오며 더 발전하면 투기가 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자, 동생을 시기하여 투기하기까지 하니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창 4:3-12). 흔히 부와 명예, 지식, 애정 등에 대하여 투기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헛된 것을 위해 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서로서로 도와주는 가운데 선의의 경쟁을 해 나가야 합니다.
4)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이란 자신의 일이나 물건을 드러내어 칭찬하거나 높여 떠벌리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드러내어 내세우고 뽐내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더니 이러한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살았더니 이러한 축복을 받았다.' 전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고, 은혜를 끼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5)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잘난 체하며 겸손하지 않고 뽐내어 방자한 것을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기적이고 무엇이든지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며 남을 통용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으니 마음을 높은 데 두지 않고 항상 낮은 데 두어 형제를 섬기며 겸손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6)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거나 예의에 벗어난 것을 말하는데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예의를 지키고,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졸고 있는 것, 딴 생각하거나 옆 사람과 대화하는 것, 슬리퍼를 신거나 모자를 쓰고 예배드리는 것, 무성의한 옷차림으로 예배드리는 것도 무례한 경우입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을 흔든다든지 성전 안에서 돈 버는 이야기 등 세상 말을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것이니 진리 안에서 대화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나 자녀, 부모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으며 존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없다는 뜻이니 우리는 하나님 앞과 부모, 형제, 자녀, 이웃에게도 항상 예의 바르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유익이란 이익 또는 이로움을 말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해서 일용할 양식이나 진리의 말씀, 기도, 충성하는 것까지도 구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리에 합당한 개인적인 유익은 얼마든지 구해도 되는데 상대방을 해롭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유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보다 상대방을 더욱 귀히 여기고 위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매사에 나부터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과 목자, 교회의 일, 형제, 남편, 아내부터 생각하고 자신은 마지막에 두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8) 성내지 아니합니다
대부분 피해를 입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분노합니다. 분노하면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할 수 없으며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내는 것을 신속히 벗어 버리되 아직 남아 있다면 성내기 전에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분이 다 가라앉은 후에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때가 많지요. 또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화낼 수 없는 것입니다.
9)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한다면 어려운 일을 당하여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남이 나쁘게 되는 것을 생각지 않으며 언제나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것은 악한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다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것은 모두가 죄요 불법이며 원수 마귀가 좋아하는 악의 모양이므로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생각지도 말고 마음에 두지도 말며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10)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불의는 하나님과 원수이며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의로 부를 축적하거나 권력을 획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불의를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요한복음 14: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셨듯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더 나아가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것, 교회가 부흥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요. 또한 누군가 불의를 행할 때 동조하지 않고 애통하며 기도해 주는 것은 물론, 오직 진리만 듣고 진리를 좇아 행하며 진리로만 기뻐하게 됩니다.
11)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사랑에 대한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사랑장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지요. 투기할 것도 투기하지 않고, 세상 것을 자랑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을 버리고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참을 때 영적인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람으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 66권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며, 주님의 부활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아름다운 천국이 있기에 믿음 가운데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바라봄으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이지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결정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도 사랑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도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주님을 본받을 수 있도록 영적인 사랑의 특성들에 대해 살펴본다.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에는 부모 자녀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형제, 이웃, 친구간의 사랑 등이 있는데, 그 사랑의 농도는 모두 다릅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부모의 사랑이 고귀하다고 하지만 이것을 영적인 사랑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를 위해서만 희생하려 하거나, 자녀가 자꾸 부모의 속을 썩이면 희생하던 마음도 차츰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헤어지자고 서슴없이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처럼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변질되는 사랑이 육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사랑은 자신을 희생해 줄 수 있는 사랑이요 결코 변치 않고 썩어지지 아니하며 영생에 이르는 사랑입니다.
2. 영적인 사랑의 속성
1) 오래 참습니다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게 오는 시련들과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 즉 내 개인에 대한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고 어렵게 만들어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사랑의 오래 참음입니다(마 5:44).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며 온갖 희생을 다하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사랑과 오래 참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랑이요 오래 참음입니다.
2) 온유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하여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떠한 사람과도 거침돌이 되지 않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 정죄치 않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며 감싸 줄 수 있는 덕이 있습니다. 이러한 덕을 지닌 온유한 사람이 바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이상이나 꿈 가운데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는 친히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3)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는 시기 질투보다 더 심한 악의 모습입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높아지거나 부유해지고, 사랑받을 때 시기 질투가 나오며 더 발전하면 투기가 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자, 동생을 시기하여 투기하기까지 하니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창 4:3-12). 흔히 부와 명예, 지식, 애정 등에 대하여 투기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헛된 것을 위해 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서로서로 도와주는 가운데 선의의 경쟁을 해 나가야 합니다.
4)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이란 자신의 일이나 물건을 드러내어 칭찬하거나 높여 떠벌리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드러내어 내세우고 뽐내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더니 이러한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살았더니 이러한 축복을 받았다.' 전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고, 은혜를 끼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5)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잘난 체하며 겸손하지 않고 뽐내어 방자한 것을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기적이고 무엇이든지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며 남을 통용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으니 마음을 높은 데 두지 않고 항상 낮은 데 두어 형제를 섬기며 겸손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6)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거나 예의에 벗어난 것을 말하는데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예의를 지키고,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졸고 있는 것, 딴 생각하거나 옆 사람과 대화하는 것, 슬리퍼를 신거나 모자를 쓰고 예배드리는 것, 무성의한 옷차림으로 예배드리는 것도 무례한 경우입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을 흔든다든지 성전 안에서 돈 버는 이야기 등 세상 말을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것이니 진리 안에서 대화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나 자녀, 부모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으며 존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없다는 뜻이니 우리는 하나님 앞과 부모, 형제, 자녀, 이웃에게도 항상 예의 바르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유익이란 이익 또는 이로움을 말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해서 일용할 양식이나 진리의 말씀, 기도, 충성하는 것까지도 구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리에 합당한 개인적인 유익은 얼마든지 구해도 되는데 상대방을 해롭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유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보다 상대방을 더욱 귀히 여기고 위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매사에 나부터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과 목자, 교회의 일, 형제, 남편, 아내부터 생각하고 자신은 마지막에 두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8) 성내지 아니합니다
대부분 피해를 입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분노합니다. 분노하면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할 수 없으며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내는 것을 신속히 벗어 버리되 아직 남아 있다면 성내기 전에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분이 다 가라앉은 후에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때가 많지요. 또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화낼 수 없는 것입니다.
9)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한다면 어려운 일을 당하여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남이 나쁘게 되는 것을 생각지 않으며 언제나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것은 악한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다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것은 모두가 죄요 불법이며 원수 마귀가 좋아하는 악의 모양이므로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생각지도 말고 마음에 두지도 말며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10)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불의는 하나님과 원수이며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의로 부를 축적하거나 권력을 획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불의를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요한복음 14: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셨듯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더 나아가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것, 교회가 부흥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요. 또한 누군가 불의를 행할 때 동조하지 않고 애통하며 기도해 주는 것은 물론, 오직 진리만 듣고 진리를 좇아 행하며 진리로만 기뻐하게 됩니다.
11)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사랑에 대한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사랑장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지요. 투기할 것도 투기하지 않고, 세상 것을 자랑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을 버리고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참을 때 영적인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람으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 66권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며, 주님의 부활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아름다운 천국이 있기에 믿음 가운데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바라봄으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이지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결정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도 사랑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도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07-06-01
제21과복 있는 사람
시 1:1-3
읽을말씀 : 시 1:1-3 | 외울말씀 : 시 1:1-3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리며 만사형통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어떻게 행하여야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한다.
세상에서는 대체로 건강, 재물, 명예, 권세,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자녀가 출세하여 효도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다 누린다 해도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생명을 잃게 되면 다 헛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 불의의 사고나 어떤 재앙으로도 무너지지 않으며, 천국에서도 영원한 상급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야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악인의 꾀는 육신의 생각을 주관하는 사단으로부터 오는데,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으면 생각을 해도 육신의 생각 즉 비진리의 악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악한 생각 속에서 나오는 꾀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악한 일들을 도모하게 되지요.
미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함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갖가지 계교를 세우고, 상대를 짓밟아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꾀로는 결코 참된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만은 악인의 꾀를 좇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만은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으므로 심히 마음이 상하여 모르드개뿐 아니라 그 나라 안에 있는 유대인 전체를 멸하려고 꾀를 짜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계획을 아심으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악한 계략이 밝혀져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갖가지 모략을 세우고 부정과 비리를 행하는 사람들에 관한 일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오직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지혜를 좇아 행할 때라야 복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며, 한 푼이라도 더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심지어 남을 속이더라도 유익을 취하되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주일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온전한 십일조와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또 사업을 할 때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하여 손해를 본다 해도 상대를 속이거나 어떤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함이 때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진리 안에서 행할 때라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들을 행위적으로 어긴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살인하고 도적질할 마음이 있어도 실제 살인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면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악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인이라 하십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도적질, 간음, 판단, 정죄 등이 마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죄악을 품는 것도 죄인인데 행함으로 범죄하는 육체의 일은 하나님 앞에 더욱 중한 죄가 됩니다(갈 5:19-21). 아무리 입술로 '주여 믿습니다.'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고 육체의 일들을 행하면 결국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24-25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이 반드시 드러나며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고 범죄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있는가, 그렇게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결코 힘든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므로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또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능히 피할 길을 주시며 모든 시험 환난, 질병, 재난도 막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범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이 없고 시험 환난을 당할 때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결코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3.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사람이 교만하여 범죄한 이후로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세상에서는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대접받으려 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멸시한다고 느끼면 고통스러워하며, 상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떻게든 섬김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며,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반드시 높임을 받습니다. 이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진리의 법칙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4:11을 보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지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종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를 지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낮은 자가 될 때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며, 또한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라 인정받으니 진정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본문 시편 1:2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합니다.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간다는 뜻입니다. 율법이란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며,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을 포함하여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규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오묘하신 뜻이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각종 예배나 기도회 등 어디든 참석하여 말씀을 듣기 위해 힘써 노력할 것입니다. 예배 때 잡념이나 졸음에 빠지는 일도 없으며,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달아서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명심하고 묵상함으로 마음에 온전히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감정을 품거나 육신의 생각,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말씀을 그대로 행하며 마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 인도를 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며 마음가짐입니다. 또한 본문 시편 1:3에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일수록 더 깊이 더 멀리 뿌리를 내려서 무럭무럭 자라고 더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항상 수분을 흡수할 수 있으므로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냇가는 영적으로 축복의 근원 곧 생수를 마음껏 빨아들여서 늘 푸르를 수 있고 때를 따라 열매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의 품을 말합니다. 정녕 하나님의 품 안에 심겨져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 안에 진리의 말씀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즉 말씀을 깨우쳐서 마음에 양식삼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기 위한 뿌리가 마음 깊숙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묵상하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며 선과 사랑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또한 항상 기뻐하고 깨어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살아가니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 거하여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됨으로 이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릴 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도 풍성한 상급을 받고 존귀히 여김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리며 만사형통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어떻게 행하여야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한다.
세상에서는 대체로 건강, 재물, 명예, 권세,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자녀가 출세하여 효도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다 누린다 해도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생명을 잃게 되면 다 헛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 불의의 사고나 어떤 재앙으로도 무너지지 않으며, 천국에서도 영원한 상급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야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악인의 꾀는 육신의 생각을 주관하는 사단으로부터 오는데,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으면 생각을 해도 육신의 생각 즉 비진리의 악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악한 생각 속에서 나오는 꾀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악한 일들을 도모하게 되지요.
미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함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갖가지 계교를 세우고, 상대를 짓밟아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꾀로는 결코 참된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만은 악인의 꾀를 좇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만은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으므로 심히 마음이 상하여 모르드개뿐 아니라 그 나라 안에 있는 유대인 전체를 멸하려고 꾀를 짜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계획을 아심으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악한 계략이 밝혀져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갖가지 모략을 세우고 부정과 비리를 행하는 사람들에 관한 일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오직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지혜를 좇아 행할 때라야 복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며, 한 푼이라도 더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심지어 남을 속이더라도 유익을 취하되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주일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온전한 십일조와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또 사업을 할 때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하여 손해를 본다 해도 상대를 속이거나 어떤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함이 때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진리 안에서 행할 때라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들을 행위적으로 어긴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살인하고 도적질할 마음이 있어도 실제 살인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면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악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인이라 하십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도적질, 간음, 판단, 정죄 등이 마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죄악을 품는 것도 죄인인데 행함으로 범죄하는 육체의 일은 하나님 앞에 더욱 중한 죄가 됩니다(갈 5:19-21). 아무리 입술로 '주여 믿습니다.'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고 육체의 일들을 행하면 결국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24-25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이 반드시 드러나며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고 범죄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있는가, 그렇게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결코 힘든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므로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또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능히 피할 길을 주시며 모든 시험 환난, 질병, 재난도 막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범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이 없고 시험 환난을 당할 때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결코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3.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사람이 교만하여 범죄한 이후로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세상에서는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대접받으려 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멸시한다고 느끼면 고통스러워하며, 상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떻게든 섬김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며,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반드시 높임을 받습니다. 이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진리의 법칙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4:11을 보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지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종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를 지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낮은 자가 될 때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며, 또한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라 인정받으니 진정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본문 시편 1:2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합니다.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간다는 뜻입니다. 율법이란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며,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을 포함하여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규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오묘하신 뜻이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각종 예배나 기도회 등 어디든 참석하여 말씀을 듣기 위해 힘써 노력할 것입니다. 예배 때 잡념이나 졸음에 빠지는 일도 없으며,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달아서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명심하고 묵상함으로 마음에 온전히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감정을 품거나 육신의 생각,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말씀을 그대로 행하며 마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 인도를 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며 마음가짐입니다. 또한 본문 시편 1:3에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일수록 더 깊이 더 멀리 뿌리를 내려서 무럭무럭 자라고 더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항상 수분을 흡수할 수 있으므로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냇가는 영적으로 축복의 근원 곧 생수를 마음껏 빨아들여서 늘 푸르를 수 있고 때를 따라 열매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의 품을 말합니다. 정녕 하나님의 품 안에 심겨져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 안에 진리의 말씀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즉 말씀을 깨우쳐서 마음에 양식삼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기 위한 뿌리가 마음 깊숙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묵상하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며 선과 사랑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또한 항상 기뻐하고 깨어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살아가니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 거하여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됨으로 이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릴 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도 풍성한 상급을 받고 존귀히 여김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5-25
제20과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자
갈 5:16-26
읽을말씀 : 갈 5:16-26 | 외울말씀 : 갈 5:22-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영의 사람이 되도록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측량하는 데 척도가 되는 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입니다. 그중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사 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사랑과 세상에 속한 육적인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 기록된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참사랑이며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만족을 느끼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보다도 한 차원 높은 사랑으로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온전한 사랑으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면서도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그냥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은 성결되어진 만큼 임하는 것이므로 모세나 사도 바울은 설령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32:32, 롬 9:3).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온전한 사랑을 보이셨던 것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들 역시 생명까지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희 락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살전 5:16).
우리 안에 죄와 악과 불법 등의 육이 있기 때문에 슬픔, 눈물, 근심, 걱정과 갖가지 문제들과 고통이 따릅니다. 이 밖에 탐심, 내 유익만을 구하려는 마음, 혈기, 짜증 등도 결국은 자신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러한 육의 모양들을 신속히 벗어 버려야 희락을 되찾을 수 있고, 천국에서도 희락이 있기에 세세토록 기쁨과 감사가 변치 않고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조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으며 작은 문제 하나를 응답받을 때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것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는다면 구원의 기쁨이 항상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3. 화 평
우리에게 선만 있으며 상대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랑이 있다면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므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불화하며 불평과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함이므로(엡 2:14)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죄를 버려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참된 화평을 이루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역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될 때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비진리의 마음들을 다 벗어 내고 성령의 주관을 받아 진리의 마음을 좇아 나갈 때 자기 자신과도 화평함을 이루어 마음이 평안하여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먼저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다음으로 자기 자신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럴 때 온전한 화평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4. 오래 참음
사람들은 참아야 할 일들이 생길 때 부들부들 떨면서 참는가 하면, 울면서 분을 삭이기도 하고,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방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참음은 육적인 참음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영적인 오래 참음으로 선과 진리 가운데 참을 필요조차 없는 참음입니다. 사실 온전한 사랑이 임해 있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품게 되며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용서한다거나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게 됩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으로는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진리로 일구기 위해 오래 참으며 악을 하나하나 버려나가는 것이지요.
또한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으로서 상대방이 내 의견이나 생각, 성격에 맞지 않더라도 항상 선 가운데서 이해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오래 참음이 있는데, 이는 응답받기 위한 오래 참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시므로 반드시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하지요(막 11:24).
5. 자 비
자비란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을 발하는 상대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악한 마음이므로 자비의 열매를 이룬 사람은 이런 상대라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자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했던 것이나,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이지 않은 것은 자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의 마음으로 돌아보며 도와주고 위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상대방을 감쌀 수 있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루는데 이것이 자비의 마음이며 이는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6. 양 선
양선이란 모든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선을 추구하는 진리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빌립보서 2:5에 기록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19-20) 한 것처럼 양선의 마음은 분냄이 없는 마음이요, 거룩한 마음입니다.
양선의 열매를 소유하려면 마음을 집중하여 말뿐만 아니라 모든 것 하나하나를 조심하여 행하는 습관을 들이며 걸음걸이까지도 변화시키면서 육체와 함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럴 때 양순하고 조용하며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7. 충 성
충성이란 맡겨진 일 이상을 해내는 것으로서 온 집에 충성됨을 의미합니다. 각자의 위치 속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므로 아내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남편으로서 행할 바를 행하는 것은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에 대하여 보상받는 대가 이상으로 감당해 내어야 충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0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는데,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나가는 충성과 더불어 주 안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모든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라면 당연히 죄는 싸워 버려야 하기에 죄를 버리는 자체가 상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아버지의 형상을 닮는 만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 곁에 더 가까이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8. 온 유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德)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깃들일 수 있는 포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침돌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고 포용해 주며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5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신 것처럼 온유의 열매를 맺으면 하늘의 땅을 기업으로 받되 크게 받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온유의 열매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마음 속에 있는 거친 것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비진리를 빼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묵상하며 마음을 다하여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마음밭이 개간되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9. 절 제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한 것이 좋은 것이로되 절제의 열매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열매입니다. 절제의 열매가 필요한 것은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하지 않고 절제하면서 성령의 뜻을 좇아서 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절제의 열매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을 조절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열매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처음이 '사랑'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있는 만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이며, 마지막 열매가 '절제'인 것은 절제를 통해 온전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충성의 열매를 온전히 거두기 위해 온 집에 충성하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물론, 자녀, 아내, 남편 등 여러 가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 시간 배분을 잘하여 질서 있게 행해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며 복된 삶을 영위하는 영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영의 사람이 되도록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측량하는 데 척도가 되는 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입니다. 그중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사 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사랑과 세상에 속한 육적인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 기록된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참사랑이며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만족을 느끼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보다도 한 차원 높은 사랑으로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온전한 사랑으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면서도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그냥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은 성결되어진 만큼 임하는 것이므로 모세나 사도 바울은 설령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32:32, 롬 9:3).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온전한 사랑을 보이셨던 것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들 역시 생명까지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희 락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살전 5:16).
우리 안에 죄와 악과 불법 등의 육이 있기 때문에 슬픔, 눈물, 근심, 걱정과 갖가지 문제들과 고통이 따릅니다. 이 밖에 탐심, 내 유익만을 구하려는 마음, 혈기, 짜증 등도 결국은 자신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러한 육의 모양들을 신속히 벗어 버려야 희락을 되찾을 수 있고, 천국에서도 희락이 있기에 세세토록 기쁨과 감사가 변치 않고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조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으며 작은 문제 하나를 응답받을 때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것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는다면 구원의 기쁨이 항상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3. 화 평
우리에게 선만 있으며 상대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랑이 있다면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므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불화하며 불평과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함이므로(엡 2:14)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죄를 버려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참된 화평을 이루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역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될 때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비진리의 마음들을 다 벗어 내고 성령의 주관을 받아 진리의 마음을 좇아 나갈 때 자기 자신과도 화평함을 이루어 마음이 평안하여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먼저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다음으로 자기 자신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럴 때 온전한 화평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4. 오래 참음
사람들은 참아야 할 일들이 생길 때 부들부들 떨면서 참는가 하면, 울면서 분을 삭이기도 하고,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방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참음은 육적인 참음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영적인 오래 참음으로 선과 진리 가운데 참을 필요조차 없는 참음입니다. 사실 온전한 사랑이 임해 있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품게 되며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용서한다거나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게 됩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으로는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진리로 일구기 위해 오래 참으며 악을 하나하나 버려나가는 것이지요.
또한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으로서 상대방이 내 의견이나 생각, 성격에 맞지 않더라도 항상 선 가운데서 이해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오래 참음이 있는데, 이는 응답받기 위한 오래 참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시므로 반드시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하지요(막 11:24).
5. 자 비
자비란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을 발하는 상대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악한 마음이므로 자비의 열매를 이룬 사람은 이런 상대라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자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했던 것이나,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이지 않은 것은 자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의 마음으로 돌아보며 도와주고 위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상대방을 감쌀 수 있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루는데 이것이 자비의 마음이며 이는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6. 양 선
양선이란 모든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선을 추구하는 진리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빌립보서 2:5에 기록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19-20) 한 것처럼 양선의 마음은 분냄이 없는 마음이요, 거룩한 마음입니다.
양선의 열매를 소유하려면 마음을 집중하여 말뿐만 아니라 모든 것 하나하나를 조심하여 행하는 습관을 들이며 걸음걸이까지도 변화시키면서 육체와 함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럴 때 양순하고 조용하며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7. 충 성
충성이란 맡겨진 일 이상을 해내는 것으로서 온 집에 충성됨을 의미합니다. 각자의 위치 속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므로 아내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남편으로서 행할 바를 행하는 것은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에 대하여 보상받는 대가 이상으로 감당해 내어야 충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0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는데,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나가는 충성과 더불어 주 안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모든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라면 당연히 죄는 싸워 버려야 하기에 죄를 버리는 자체가 상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아버지의 형상을 닮는 만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 곁에 더 가까이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8. 온 유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德)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깃들일 수 있는 포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침돌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고 포용해 주며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5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신 것처럼 온유의 열매를 맺으면 하늘의 땅을 기업으로 받되 크게 받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온유의 열매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마음 속에 있는 거친 것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비진리를 빼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묵상하며 마음을 다하여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마음밭이 개간되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9. 절 제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한 것이 좋은 것이로되 절제의 열매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열매입니다. 절제의 열매가 필요한 것은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하지 않고 절제하면서 성령의 뜻을 좇아서 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절제의 열매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을 조절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열매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처음이 '사랑'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있는 만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이며, 마지막 열매가 '절제'인 것은 절제를 통해 온전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충성의 열매를 온전히 거두기 위해 온 집에 충성하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물론, 자녀, 아내, 남편 등 여러 가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 시간 배분을 잘하여 질서 있게 행해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며 복된 삶을 영위하는 영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5-18
제19과응답받는 기도생활의 비결
눅 22:39-46
읽을말씀 : 눅 22:39-46 | 외울말씀 : 약 1:6-8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기도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고 응답받는 기도생활을 하게 한다.
1. 기도는 왜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요 14:13-14) 기도는 응답의 열쇠이며 축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기도는 영적인 호흡으로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해야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영적인 호흡을 하는 것에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며 이것이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통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기도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신앙인의 기본이며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필수요건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도생활의 중요성을 알려 주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고(살전 5:17),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으며(마 26:41), 기도를 쉬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삼상 12:23).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성도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한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므로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2.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본받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선지자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기도했으며(단 6:10),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3:1).
우리도 예수님과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특히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해 드리는 새벽기도나,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지켜 보호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철야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응답으로 역사하시며 능력으로 함께해 주십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창조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불의 응답을 받은 엘리야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왕상 18:42),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행 7:60).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으며(눅 22:41), 솔로몬 왕이나 사도였던 바울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왕상 8:54 ; 행 20:36).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표현임을 깨달아 우리도 기도할 때에 몸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기도라야 중심을 바친 기도가 되므로 쉽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것이 됩니다. 야고보서 4:2-3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셨으니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4)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4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하여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밤이면 기온이 낮아 땀이 날 수 없는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그 밤에 땀이 나고 땀방울이 맺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으므로(창 3:17)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농부가 수고함으로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듯이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땀 흘려 힘쓰고 애써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시며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할까요?
1)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집중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듯이(창 32:24-30), 엘리야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3년 반의 가뭄 끝에 큰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했듯이(왕상 18:42) 간절한 중심의 기도라야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중심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충만해지고 세상을 이기게 되고 원수 마귀의 세력이 물러가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더 나아가서 신령한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렘 29:12-13, 33:3).
2)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일을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일의 성취도가 높아지듯이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상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는다면(히 11:6) 기도의 응답을 주실 줄도 분명히 믿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 8:13).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24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약속하셨고, 야고보서 1:6-7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교훈하셨기 때문입니다.
3)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66:18에 다윗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죄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위배하는 것으로서 그 법을 어기려고 하는 마음 자체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간음하고자 하는 마음이 죄입니다. 이 죄를 행하려고 마음에 결정하는 것이 죄악이며 이것을 행함으로 나타내면 허물이 되고 곧 불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악이 행함으로 나타나 허물을 만들고 불의한 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수 있도록 사랑의 징계를 하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원수 마귀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시험 환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악이나 불의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다시금 행함으로 온전히 돌이켜 하나님과의 담을 헐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이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혀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악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무엇이든지 사랑으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자세를 본받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기도를 통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기도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고 응답받는 기도생활을 하게 한다.
1. 기도는 왜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요 14:13-14) 기도는 응답의 열쇠이며 축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기도는 영적인 호흡으로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해야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영적인 호흡을 하는 것에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며 이것이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통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기도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신앙인의 기본이며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필수요건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도생활의 중요성을 알려 주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고(살전 5:17),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으며(마 26:41), 기도를 쉬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삼상 12:23).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성도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한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므로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2.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본받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선지자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기도했으며(단 6:10),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3:1).
우리도 예수님과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특히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해 드리는 새벽기도나,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지켜 보호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철야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응답으로 역사하시며 능력으로 함께해 주십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창조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불의 응답을 받은 엘리야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왕상 18:42),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행 7:60).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으며(눅 22:41), 솔로몬 왕이나 사도였던 바울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왕상 8:54 ; 행 20:36).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표현임을 깨달아 우리도 기도할 때에 몸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기도라야 중심을 바친 기도가 되므로 쉽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것이 됩니다. 야고보서 4:2-3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셨으니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4)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4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하여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밤이면 기온이 낮아 땀이 날 수 없는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그 밤에 땀이 나고 땀방울이 맺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으므로(창 3:17)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농부가 수고함으로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듯이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땀 흘려 힘쓰고 애써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시며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할까요?
1)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집중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듯이(창 32:24-30), 엘리야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3년 반의 가뭄 끝에 큰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했듯이(왕상 18:42) 간절한 중심의 기도라야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중심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충만해지고 세상을 이기게 되고 원수 마귀의 세력이 물러가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더 나아가서 신령한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렘 29:12-13, 33:3).
2)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일을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일의 성취도가 높아지듯이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상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는다면(히 11:6) 기도의 응답을 주실 줄도 분명히 믿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 8:13).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24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약속하셨고, 야고보서 1:6-7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교훈하셨기 때문입니다.
3)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66:18에 다윗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죄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위배하는 것으로서 그 법을 어기려고 하는 마음 자체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간음하고자 하는 마음이 죄입니다. 이 죄를 행하려고 마음에 결정하는 것이 죄악이며 이것을 행함으로 나타내면 허물이 되고 곧 불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악이 행함으로 나타나 허물을 만들고 불의한 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수 있도록 사랑의 징계를 하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원수 마귀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시험 환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악이나 불의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다시금 행함으로 온전히 돌이켜 하나님과의 담을 헐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이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혀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악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무엇이든지 사랑으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자세를 본받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기도를 통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5-11
제18과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예배
요 4:24
읽을말씀 : 요 4:24 | 외울말씀 : 롬 12:1
교육목표 : 예배의 영적인 의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한다.
1. 예배의 의미
예배(禮拜)의 사전적인 의미는 '신(神)에게 경의(敬意)를 나타내며 경배하는 의식'입니다. 곧 하나님께 존경과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의식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온갖 피조물을 경배하며 헛된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나 오늘날이나 동일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셔서 사람에게 주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로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습니다. 창세기 4: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4에 기록된 대로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순종한 아벨의 제사를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낫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3:8-14에는 사울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제사장의 직무를 범하였으므로 버림받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말라기 1:8-10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때에 자신들에게 쓸모없는 최하의 것으로 드렸기에 종교적인 형식과 형태는 갖추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은 예배는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장로들의 유전은 엄격히 지켰으나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습니다(마 15:7-9, 23:13-1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잘못된 형태로 드리는 예배나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자신의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의 원칙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예배를 만들고 자기의 마음에 흡족함을 주는 방법으로 예배하는 이방종교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구하지도 않은 부와 재물과 존영까지 받았습니다(왕상 3:3-15, 대하 1:1-13).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예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이므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0:27에 기록된 대로 삶 속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기록되어 있듯이 구약시대의 제사는 사람들이 고안해 낸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고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단절되었던 교제를 회복시키고자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제도가 바로 구약의 제사이지요.
구약의 제사법을 살펴보면 제사의 종류가 의미에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제사 예물 또한 제사의 종류와 형편에 따라 소, 양, 염소, 비둘기, 밀가루 등으로 일정한 규례가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복잡하고 엄격한 형식과 절차를 좇아야 하는 행위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야 하고 그 피로 속죄제를 드려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능히 깨끗게 할 수 없었으므로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셔서(히 9:28) 복잡하고 엄격한 의식을 좇는 구약의 피의 제사가 필요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께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신약에서의 예배입니다(히 9:11-1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이었던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그 피로 제사를 드렸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인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히 10:11-12) 이로써 우리 죄가 대속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행함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롬 12:1).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구약의 제사가 흠없고 정결한 제물로 드려질 때 하나님께 열납되었듯이 신약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3.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한복음 4:23-24을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과 같은 특정한 장소적인 예배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 중심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며,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배를 드릴 때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5을 보면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했으니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무례히 행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특히 아래와 같은 사항을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하며 이것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므로 시간 안에 도착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둘째로, 예배시간에 말씀 듣기에 전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거룩한 단 위에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세워진 목자는 양 떼들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증거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고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거나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이야기한다거나 가정, 일터, 사업터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 등으로 잡념에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예배시간에 졸거나 잠을 자는 행위도 무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흔드는 것도 무례한 행동입니다. 윗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기도로써 대화하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기도를 끊게 하는 무례한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줄 아는데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무례한 일입니다. 전도받아 이제 교회에 나온 초신자라면 아직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하는 믿음이 어린 상태이므로 하나님께서도 죄 있다고 하시지 않지만, 직분을 가진 사람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무례한 일인 것입니다.
넷째로, 예배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오직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와 찬양을 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시간에 어린아이가 울거나 마구 떠들며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둔다면 예배에 방해가 되므로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성전에서 혈기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친다거나 세상 말을 하는 것도 무례한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에 껌을 씹는다거나 옆 사람과 웃고 떠드는 행위, 예배 도중에 일어나 나가는 행위 등은 하나님 앞에 무례한 일이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도 무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슬리퍼를 신고 오는 경우는 예의에서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됨과 중심이 외모에 표현되기도 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정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나 예물의 많고 적은 가치를 따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이 명하신 대로 각자 처한 형편에서 드리는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정성껏 준비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힘껏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소원에 응답해 주시지만, 무례하게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받지도 않으시고 응답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예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예물이 되도록 힘쓰며,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예배의 영적인 의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한다.
1. 예배의 의미
예배(禮拜)의 사전적인 의미는 '신(神)에게 경의(敬意)를 나타내며 경배하는 의식'입니다. 곧 하나님께 존경과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의식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온갖 피조물을 경배하며 헛된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나 오늘날이나 동일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셔서 사람에게 주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로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습니다. 창세기 4: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4에 기록된 대로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순종한 아벨의 제사를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낫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3:8-14에는 사울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제사장의 직무를 범하였으므로 버림받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말라기 1:8-10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때에 자신들에게 쓸모없는 최하의 것으로 드렸기에 종교적인 형식과 형태는 갖추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은 예배는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장로들의 유전은 엄격히 지켰으나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습니다(마 15:7-9, 23:13-1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잘못된 형태로 드리는 예배나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자신의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의 원칙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예배를 만들고 자기의 마음에 흡족함을 주는 방법으로 예배하는 이방종교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구하지도 않은 부와 재물과 존영까지 받았습니다(왕상 3:3-15, 대하 1:1-13).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예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이므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0:27에 기록된 대로 삶 속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기록되어 있듯이 구약시대의 제사는 사람들이 고안해 낸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고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단절되었던 교제를 회복시키고자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제도가 바로 구약의 제사이지요.
구약의 제사법을 살펴보면 제사의 종류가 의미에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제사 예물 또한 제사의 종류와 형편에 따라 소, 양, 염소, 비둘기, 밀가루 등으로 일정한 규례가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복잡하고 엄격한 형식과 절차를 좇아야 하는 행위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야 하고 그 피로 속죄제를 드려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능히 깨끗게 할 수 없었으므로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셔서(히 9:28) 복잡하고 엄격한 의식을 좇는 구약의 피의 제사가 필요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께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신약에서의 예배입니다(히 9:11-1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이었던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그 피로 제사를 드렸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인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히 10:11-12) 이로써 우리 죄가 대속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행함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롬 12:1).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구약의 제사가 흠없고 정결한 제물로 드려질 때 하나님께 열납되었듯이 신약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3.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한복음 4:23-24을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과 같은 특정한 장소적인 예배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 중심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며,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배를 드릴 때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5을 보면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했으니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무례히 행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특히 아래와 같은 사항을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하며 이것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므로 시간 안에 도착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둘째로, 예배시간에 말씀 듣기에 전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거룩한 단 위에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세워진 목자는 양 떼들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증거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고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거나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이야기한다거나 가정, 일터, 사업터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 등으로 잡념에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예배시간에 졸거나 잠을 자는 행위도 무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흔드는 것도 무례한 행동입니다. 윗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기도로써 대화하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기도를 끊게 하는 무례한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줄 아는데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무례한 일입니다. 전도받아 이제 교회에 나온 초신자라면 아직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하는 믿음이 어린 상태이므로 하나님께서도 죄 있다고 하시지 않지만, 직분을 가진 사람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무례한 일인 것입니다.
넷째로, 예배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오직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와 찬양을 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시간에 어린아이가 울거나 마구 떠들며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둔다면 예배에 방해가 되므로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성전에서 혈기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친다거나 세상 말을 하는 것도 무례한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에 껌을 씹는다거나 옆 사람과 웃고 떠드는 행위, 예배 도중에 일어나 나가는 행위 등은 하나님 앞에 무례한 일이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도 무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슬리퍼를 신고 오는 경우는 예의에서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됨과 중심이 외모에 표현되기도 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정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나 예물의 많고 적은 가치를 따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이 명하신 대로 각자 처한 형편에서 드리는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정성껏 준비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힘껏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소원에 응답해 주시지만, 무례하게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받지도 않으시고 응답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예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예물이 되도록 힘쓰며,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5-04
제17과영적인 어린아이
마 18:1-4, 23:12
읽을말씀 : 마 18:1-4, 23:12 | 외울말씀 : 마 18:3
교육목표 :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천국을 소유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소망은 아름다운 천국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가 아이처럼 몸집이 작아지거나, 유치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린아이에게서 본받아야 할 영적인 특징은 무엇일까요?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1)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 군것질을 많이 하면 안 된다." 하고 가르쳐 주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과 이론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생각으로 쉽게 따르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어떤 것은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하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여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 유익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아멘 하고 순종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2)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등 어른과 달리 순수하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두려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어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웠어도 살아가면서 악에 물들어 있는 만큼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 들어와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선악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게 되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을 이루어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선한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3)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교만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옳다, 그르다.' 하며 자기 주장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 말씀하시며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디어지고 높아진 마음을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여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 자라는 동안 세상의 비진리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교만, 혈기, 판단, 정죄, 욕심, 시기, 질투, 미움 등 점점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갑니다.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죄악들을 마음에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모든 죄악들을 벗어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5을 보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자기 이론과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이는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입니다. 이렇게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 말씀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지요. 이 여인은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성령의 주관을 좇아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고 끝까지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같은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는 부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사람, 혹은 지식이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 연륜을 많이 쌓은 사람이 큰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될 때, 또 섬기는 사람이 될 때 큰 자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하나님 앞에 큰 자라 인정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린이 주일을 앞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천국을 소유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소망은 아름다운 천국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가 아이처럼 몸집이 작아지거나, 유치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린아이에게서 본받아야 할 영적인 특징은 무엇일까요?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1)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 군것질을 많이 하면 안 된다." 하고 가르쳐 주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과 이론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생각으로 쉽게 따르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어떤 것은 진리이고, 어떤 것은 비진리라고 하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여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 유익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아멘 하고 순종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2)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등 어른과 달리 순수하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두려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어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웠어도 살아가면서 악에 물들어 있는 만큼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 들어와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선악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게 되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을 이루어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선한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3)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교만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옳다, 그르다.' 하며 자기 주장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 말씀하시며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디어지고 높아진 마음을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여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 자라는 동안 세상의 비진리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교만, 혈기, 판단, 정죄, 욕심, 시기, 질투, 미움 등 점점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갑니다.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죄악들을 마음에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모든 죄악들을 벗어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5을 보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자기 이론과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이는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입니다. 이렇게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 말씀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지요. 이 여인은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성령의 주관을 좇아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길이 기억된 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고 끝까지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므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같은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는 부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사람, 혹은 지식이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 연륜을 많이 쌓은 사람이 큰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될 때, 또 섬기는 사람이 될 때 큰 자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하나님 앞에 큰 자라 인정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4-27
제16과하나님의 자녀된 축복
요 3:16, 요삼 1:2
읽을말씀 : 요 3:16, 요삼 1:2 | 외울말씀 : 빌 3:20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이 땅의 어떠한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이 어떠한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한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누리는 축복으로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1.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하늘나라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이름을 호적에 올리게 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호적에 등록된 사람이어야 한 국가의 어엿한 국민으로 인정을 받고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고(빌 4:3),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게 되며(요 1:12),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빌 3:20), 영생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마지막 심판 날에 죄의 삯으로 영원한 사망인 불못에 던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계 20:15). 성경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됨을 누누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신상을 만들어 우상 숭배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니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하고 간구합니다(출 32:7-32).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세일지라도 하늘나라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면 영원한 사망의 길인 지옥에 가서 고통당할 수밖에 없음을 모세 자신이 잘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그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 중심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과 짝하여 죄악 가운데 살아간다면 성령은 점점 소멸되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게 됩니다.
성령이 완전히 소멸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되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릴 수 없게 되고 죄의 삯인 사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주님이 시인할 것을 약속하셨으니(계 3:5)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깨달아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롬 3:23-24)을 항상 감사하며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늘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며 죄를 싸워 버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좇아 행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분을 찾게 되고 영혼이 잘되어 갑니다. 영혼이 잘되려면 영이 사람의 주인으로서 혼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되면 죄는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하여 힘쓰게 되는데 죄를 버린 만큼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되는 것이요, 영혼이 잘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생령이 되게 하셨으므로(창 2:7) 영이 사람의 주인이었고 영생의 축복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창 2:17) 바로 생령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기고 사람의 혼을 주관하는 사단의 역사를 받아 마음을 죄로 물들게 하고 정욕을 좇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영혼이 잘된 사람입니다. 영은 사람의 주인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혼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혼은 영의 지시에 순종하는 종과 같은 위치에서, 육은 영혼이 거하는 장막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영과 혼, 육이 되기를 원하십니다(살전 5:23). 그래서 이미 죽은 영과 혼, 육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성령이 죽었던 영을 살리므로 산 영과 혼, 육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에는 영, 혼, 영혼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죽은 영이 살아난 사람은 몸의 활동이 정지되었어도 사람의 주인인 영이 살아있으므로 죽었다 하지 않고 잔다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8:52-55을 보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하여 영이 돌아오니 일어났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몸이 활동을 멈추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7:21-22을 보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했지요. 이는 영이 죽고 혼이 사람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혼이 돌아왔을 때 살아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영과 혼을 합하여 영혼으로 기록한 누가복음 23:46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했습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영이 주인으로서 영의 지시에 혼이 순종함으로 영과 혼이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과 혼이 하나 되어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모든 것에 풍성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요한삼서 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주님께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 만사가 형통하도록 간구하시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기도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시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질병에 걸리지 않고 강건하며 물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 땅에서도 모든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지켜 행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7:21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공상 속에 있는 막연한 세계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나라로서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가장 이상적인 나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실재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요 14:2-3).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눈물, 슬픔, 질병, 고통, 죽음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영화를 누리며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태어났던 많은 성인 군자들이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해결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도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해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생령(生靈)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이며(창 2:7),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창 1:28).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누구나 죽음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대가로 인해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끌려가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요, 모든 인류가 참생명을 얻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딤전 2:4). 따라서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만사형통한 축복을 누리며 천국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이 땅의 어떠한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이 어떠한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한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누리는 축복으로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1.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하늘나라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이름을 호적에 올리게 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호적에 등록된 사람이어야 한 국가의 어엿한 국민으로 인정을 받고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고(빌 4:3),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게 되며(요 1:12),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빌 3:20), 영생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마지막 심판 날에 죄의 삯으로 영원한 사망인 불못에 던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계 20:15). 성경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됨을 누누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신상을 만들어 우상 숭배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니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하고 간구합니다(출 32:7-32).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세일지라도 하늘나라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면 영원한 사망의 길인 지옥에 가서 고통당할 수밖에 없음을 모세 자신이 잘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그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 중심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과 짝하여 죄악 가운데 살아간다면 성령은 점점 소멸되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게 됩니다.
성령이 완전히 소멸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되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릴 수 없게 되고 죄의 삯인 사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주님이 시인할 것을 약속하셨으니(계 3:5)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깨달아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롬 3:23-24)을 항상 감사하며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늘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며 죄를 싸워 버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좇아 행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분을 찾게 되고 영혼이 잘되어 갑니다. 영혼이 잘되려면 영이 사람의 주인으로서 혼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되면 죄는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하여 힘쓰게 되는데 죄를 버린 만큼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되는 것이요, 영혼이 잘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생령이 되게 하셨으므로(창 2:7) 영이 사람의 주인이었고 영생의 축복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창 2:17) 바로 생령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기고 사람의 혼을 주관하는 사단의 역사를 받아 마음을 죄로 물들게 하고 정욕을 좇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영혼이 잘된 사람입니다. 영은 사람의 주인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혼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혼은 영의 지시에 순종하는 종과 같은 위치에서, 육은 영혼이 거하는 장막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영과 혼, 육이 되기를 원하십니다(살전 5:23). 그래서 이미 죽은 영과 혼, 육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성령이 죽었던 영을 살리므로 산 영과 혼, 육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에는 영, 혼, 영혼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죽은 영이 살아난 사람은 몸의 활동이 정지되었어도 사람의 주인인 영이 살아있으므로 죽었다 하지 않고 잔다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8:52-55을 보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하여 영이 돌아오니 일어났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몸이 활동을 멈추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7:21-22을 보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했지요. 이는 영이 죽고 혼이 사람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혼이 돌아왔을 때 살아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영과 혼을 합하여 영혼으로 기록한 누가복음 23:46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했습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영이 주인으로서 영의 지시에 혼이 순종함으로 영과 혼이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과 혼이 하나 되어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모든 것에 풍성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요한삼서 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주님께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 만사가 형통하도록 간구하시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기도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시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질병에 걸리지 않고 강건하며 물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 땅에서도 모든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지켜 행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7:21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공상 속에 있는 막연한 세계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나라로서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가장 이상적인 나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실재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요 14:2-3).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눈물, 슬픔, 질병, 고통, 죽음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영화를 누리며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태어났던 많은 성인 군자들이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해결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도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해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생령(生靈)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이며(창 2:7),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창 1:28).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누구나 죽음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대가로 인해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끌려가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요, 모든 인류가 참생명을 얻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딤전 2:4). 따라서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만사형통한 축복을 누리며 천국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4-20
제15과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려면
롬 10:9-10
읽을말씀 : 롬 10:9-10 | 외울말씀 : 요 1:12
교육목표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축복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소유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신속히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는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하지요. 그리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인간의 시조인 아담의 불순종 이후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롬 3:10-12).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천지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우상을 섬기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롬 1:20-32).
또한 아담의 범죄 이후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성장하면서 진리가 아닌 가르침을 받으며 생활하기에 스스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한 예로, 어린아이는 아무 죄가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엄마의 품에 다른 아이가 안겨 있거나 동생이 자기보다 더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지면 보채며 질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부모로부터 기를 받아 본성 속에 악이 있으므로 조금만 자라도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는 아무리 의롭게 살아온 것 같아도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입니다(롬 3:23-24).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인이 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11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속자이시며 죄로부터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세주가 되심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십니다(고후 1:22).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요 1:12)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2.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고,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답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떠한 뜻일까요?
물이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의미합니다(요 4:14).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인임을 깨달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므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함께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이제까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요일 2:16) 살아왔던 육신의 법과 새롭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고자 하는 성령의 법이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7:22-24).
이는 살아난 영과 이제까지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던 혼의 싸움인데 믿음이 성장하여 영이 성장한 만큼 영의 힘과 혼의 힘이 대등해집니다. 그러므로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서로 이기고자 하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롬 8:26) 결국 영이 승리하여 평안을 얻게 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영과 혼의 싸움에서 영이 승리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쳐야 하며,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6-17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6-7에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악이 버려지고 혼이 영에게 순종하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행함 있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롬 10:17) 들어서 알되 지식으로만 담아 놓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17). 그래서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시며 행함 있는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보고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믿음 곧 육적인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행함이 따르는 만큼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사랑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우리를 힘들게 하고자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요일 5:3).
한 예로,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으므로(살전 5:16-18) 시험 환난이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십니다.
또한 성경에는 '지키라'는 말씀들이 있는데 출애굽기 20:8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일을 기억하여 일하지 않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양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되며 영생과 천국을 얻는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버리라'고 하셨는데, 그 중에 데살로니가전서 5:22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을 총칭한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란 마음에 있는 질투, 미움, 간음 등 아직 행함으로 나타나기 전의 악의 상태를 말하며,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나타낸 상태의 악을 말합니다(갈 5:19-21).
또한 성경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십계명 중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에 행하던 일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인 진리에 위배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데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진리에서 어긋난 일을 행하지 않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며 행함 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점점 믿음이 장성하여져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축복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소유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신속히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는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하지요. 그리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인간의 시조인 아담의 불순종 이후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롬 3:10-12).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천지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우상을 섬기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롬 1:20-32).
또한 아담의 범죄 이후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성장하면서 진리가 아닌 가르침을 받으며 생활하기에 스스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한 예로, 어린아이는 아무 죄가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엄마의 품에 다른 아이가 안겨 있거나 동생이 자기보다 더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지면 보채며 질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부모로부터 기를 받아 본성 속에 악이 있으므로 조금만 자라도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는 아무리 의롭게 살아온 것 같아도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입니다(롬 3:23-24).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인이 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11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속자이시며 죄로부터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세주가 되심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십니다(고후 1:22).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요 1:12)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2.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고, 거듭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답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떠한 뜻일까요?
물이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의미합니다(요 4:14).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인임을 깨달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므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함께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이제까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요일 2:16) 살아왔던 육신의 법과 새롭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고자 하는 성령의 법이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7:22-24).
이는 살아난 영과 이제까지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던 혼의 싸움인데 믿음이 성장하여 영이 성장한 만큼 영의 힘과 혼의 힘이 대등해집니다. 그러므로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서로 이기고자 하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롬 8:26) 결국 영이 승리하여 평안을 얻게 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영과 혼의 싸움에서 영이 승리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쳐야 하며,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6-17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6-7에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악이 버려지고 혼이 영에게 순종하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행함 있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롬 10:17) 들어서 알되 지식으로만 담아 놓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17). 그래서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시며 행함 있는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보고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믿음 곧 육적인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행함이 따르는 만큼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사랑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우리를 힘들게 하고자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요일 5:3).
한 예로,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으므로(살전 5:16-18) 시험 환난이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십니다.
또한 성경에는 '지키라'는 말씀들이 있는데 출애굽기 20:8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일을 기억하여 일하지 않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양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되며 영생과 천국을 얻는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버리라'고 하셨는데, 그 중에 데살로니가전서 5:22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을 총칭한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란 마음에 있는 질투, 미움, 간음 등 아직 행함으로 나타나기 전의 악의 상태를 말하며,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나타낸 상태의 악을 말합니다(갈 5:19-21).
또한 성경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십계명 중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에 행하던 일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인 진리에 위배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데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진리에서 어긋난 일을 행하지 않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며 행함 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점점 믿음이 장성하여져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4-13
제14과교회의 조직과 질서
행 6:1-7
읽을말씀 : 행 6:1-7 | 외울말씀 : 엡 4:11-12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사도와 집사를 세우신 것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도 각 교회에 여러 직분자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교회의 조직과 질서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각자 행할 바를 행하게 한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잘 양육하고 주 안에서 친교를 나누며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연합한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임을 허락하시고 조직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1.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와 일곱 집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생겨난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증가하자, 말씀 선포와 구제를 맡은 사도들의 과중한 직무로 인하여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회의를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2-4) 했지요.
그러자 성도들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택하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일곱 명에게 안수하여 집사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와 성도의 직무가 분담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는 성도에게 직분을 부여하여 특별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어떻게 세우셨을까요? 산에서 밤이 다하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使徒)라 칭하셨습니다(눅 6:12-16).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지요(마 10:1-4).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자살하자(마 27:3-9), 주님의 부활 승천 이후 베드로는 함께 기도에 힘쓰던 120명의 무리에게 가룟 유다 대신 한 사람 더 세울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두 사람을 천거하였고, 그 중에 제비를 뽑아 얻은 사도가 맛디아였습니다(행 1:15-26).
이렇게 세워진 열두 사도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게 되었고, 성도들 중에 세워진 일곱 집사는 공궤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능력 있게 전파하게 되어 성도들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초대교회는 급성장하며 큰 부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행 6:7).
2. 교회의 조직과 여러 가지 직분
하나님께서 교회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로 여러 가지 직분을 세우시는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하게 함이며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엡 4:11-12). 직분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고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지요(엡 4:13-16).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크게 나누어 교역자와 평신도가 있습니다. 교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양을 먹이는 목자로서 목양(牧羊)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기도해야 합니다(딤후 4:2, 행 20:28, 마 28:20).
이런 교역자는 목사와 강도사, 혹은 전도사로 구분되는데 목사는 교단마다 약간 자격이 다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 교육을 받고 안수받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직무에 따라 위임목사, 담임목사, 부목사, 전도 목사, 음악 목사 등의 칭호가 있으며, 강도사나 전도사의 직무를 거친 후 안수받게 됩니다. 강도사나 전도사는 교회마다 역할이 약간 다르나 신학 교육을 받고 교회에 시무하는 교역자로서 목사를 도와 심방과 교육을 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신도 중에서도 직분자를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고 교회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파에 따라 명칭이나 역할이 약간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가 있으며, 평신도 중에서 최고의 직분으로는 장로가 있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직분을 강조하는 것이고, 감독이라는 말은 기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는 감독자로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므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양 무리의 본이 될 만한 사람이며, 목회자를 도와 교회의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디도서 1:5-9을 보면 장로의 자격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으며, 디모데전서 3:1-7에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倍)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하셨지요(딤전 5:17).
이처럼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장로 외에 교회 안에는 집사라는 직분이 있어 장로의 보조자로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3:8-13을 보면 집사의 자격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운 교역자가 있어 교회 전체를 치리하되 기도와 하나님 말씀에 전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성도들 중에서 장로, 집사 등 직분자를 세워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질서
우리의 몸이 팔, 다리, 얼굴 등 여러 지체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에도 여러 가지의 직임이 있습니다(고전 12:5). 직임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모두가 중요하며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사명이지만, 교회 안에 분쟁이 없고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28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 행함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첫째는 사도입니다.
사도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 베드로나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입고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목숨까지라도 희생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고 온전한 순종에 이른 하나님의 종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름받아 나가는 하나님의 종이나 일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친히 연단하시며, 합당한 그릇이 되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직임을 맡은 사람은 마음의 악을 열심히 버리며 마음 밭을 옥토로 변화시켜 나가면서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뿐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 선지자의 대열에 세워 주십니다.
셋째는 교사입니다.
교사란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시켜야 할 사명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주일학교 교사로서 혹은 구역장이나 인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 믿음을 심어 주며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나가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을 때에 기뻐하십니다.
넷째는 능력 행함입니다.
교사 다음이 능력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나타내 주어야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으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능력 행함은 각색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물론, 소아마비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선천적으로 약한 자를 고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섯째는 병 고치는 은사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극히 찾아보기 어렵지만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기도해 줌으로 치료받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교회 안에 당연히 있어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에게 각색 질병으로부터 해방받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서로 돕는 것입니다.
믿음의 한 지체로서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돕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열심히 모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돕되 기도로 도와주고 사랑과 권면으로 도와주며 힘이 없는 이에게 소망을 심어 주는 등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크게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일곱째는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것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믿음의 형제를 다스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재물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덕으로 진리 안에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성령의 열매, 팔복의 열매 등을 맺는 것을 말하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형제를 사랑으로 포용하며 진리 가운데 다스려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각종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영의 기도로서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각종 방언을 함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으며, 기도의 능력이 생겨서 많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영적인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하되 깊은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은 성도로서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조직을 알고 질서를 깨닫게 되면 영적 성장이 올바르게 되어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성도들이 믿음으로 온전하여져서 큰 부흥을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큰 일익을 담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사도와 집사를 세우신 것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도 각 교회에 여러 직분자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교회의 조직과 질서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각자 행할 바를 행하게 한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잘 양육하고 주 안에서 친교를 나누며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연합한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임을 허락하시고 조직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1.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와 일곱 집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생겨난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증가하자, 말씀 선포와 구제를 맡은 사도들의 과중한 직무로 인하여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회의를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2-4) 했지요.
그러자 성도들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택하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일곱 명에게 안수하여 집사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와 성도의 직무가 분담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는 성도에게 직분을 부여하여 특별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어떻게 세우셨을까요? 산에서 밤이 다하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使徒)라 칭하셨습니다(눅 6:12-16).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지요(마 10:1-4).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자살하자(마 27:3-9), 주님의 부활 승천 이후 베드로는 함께 기도에 힘쓰던 120명의 무리에게 가룟 유다 대신 한 사람 더 세울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두 사람을 천거하였고, 그 중에 제비를 뽑아 얻은 사도가 맛디아였습니다(행 1:15-26).
이렇게 세워진 열두 사도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게 되었고, 성도들 중에 세워진 일곱 집사는 공궤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능력 있게 전파하게 되어 성도들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초대교회는 급성장하며 큰 부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행 6:7).
2. 교회의 조직과 여러 가지 직분
하나님께서 교회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로 여러 가지 직분을 세우시는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하게 함이며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엡 4:11-12). 직분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고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지요(엡 4:13-16).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크게 나누어 교역자와 평신도가 있습니다. 교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양을 먹이는 목자로서 목양(牧羊)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기도해야 합니다(딤후 4:2, 행 20:28, 마 28:20).
이런 교역자는 목사와 강도사, 혹은 전도사로 구분되는데 목사는 교단마다 약간 자격이 다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 교육을 받고 안수받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직무에 따라 위임목사, 담임목사, 부목사, 전도 목사, 음악 목사 등의 칭호가 있으며, 강도사나 전도사의 직무를 거친 후 안수받게 됩니다. 강도사나 전도사는 교회마다 역할이 약간 다르나 신학 교육을 받고 교회에 시무하는 교역자로서 목사를 도와 심방과 교육을 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신도 중에서도 직분자를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고 교회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파에 따라 명칭이나 역할이 약간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가 있으며, 평신도 중에서 최고의 직분으로는 장로가 있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직분을 강조하는 것이고, 감독이라는 말은 기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는 감독자로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므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양 무리의 본이 될 만한 사람이며, 목회자를 도와 교회의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디도서 1:5-9을 보면 장로의 자격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으며, 디모데전서 3:1-7에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倍)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하셨지요(딤전 5:17).
이처럼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장로 외에 교회 안에는 집사라는 직분이 있어 장로의 보조자로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3:8-13을 보면 집사의 자격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운 교역자가 있어 교회 전체를 치리하되 기도와 하나님 말씀에 전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성도들 중에서 장로, 집사 등 직분자를 세워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질서
우리의 몸이 팔, 다리, 얼굴 등 여러 지체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에도 여러 가지의 직임이 있습니다(고전 12:5). 직임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모두가 중요하며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사명이지만, 교회 안에 분쟁이 없고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28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 행함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첫째는 사도입니다.
사도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 베드로나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입고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목숨까지라도 희생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고 온전한 순종에 이른 하나님의 종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름받아 나가는 하나님의 종이나 일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친히 연단하시며, 합당한 그릇이 되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직임을 맡은 사람은 마음의 악을 열심히 버리며 마음 밭을 옥토로 변화시켜 나가면서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뿐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 선지자의 대열에 세워 주십니다.
셋째는 교사입니다.
교사란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시켜야 할 사명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주일학교 교사로서 혹은 구역장이나 인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 믿음을 심어 주며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나가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을 때에 기뻐하십니다.
넷째는 능력 행함입니다.
교사 다음이 능력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나타내 주어야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으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능력 행함은 각색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물론, 소아마비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선천적으로 약한 자를 고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섯째는 병 고치는 은사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극히 찾아보기 어렵지만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기도해 줌으로 치료받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교회 안에 당연히 있어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에게 각색 질병으로부터 해방받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서로 돕는 것입니다.
믿음의 한 지체로서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돕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열심히 모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돕되 기도로 도와주고 사랑과 권면으로 도와주며 힘이 없는 이에게 소망을 심어 주는 등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크게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일곱째는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것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믿음의 형제를 다스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재물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덕으로 진리 안에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성령의 열매, 팔복의 열매 등을 맺는 것을 말하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형제를 사랑으로 포용하며 진리 가운데 다스려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각종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영의 기도로서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각종 방언을 함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으며, 기도의 능력이 생겨서 많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영적인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하되 깊은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은 성도로서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조직을 알고 질서를 깨닫게 되면 영적 성장이 올바르게 되어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성도들이 믿음으로 온전하여져서 큰 부흥을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큰 일익을 담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4-06
제13과고난의 주 (고난주간)
요 18:1-11
읽을말씀 : 요 18:1-11 | 외울말씀 : 요일 4:19
교육목표 :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셔야 했던 이유와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야 할지에 대해 깨닫게 한다.
1.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유래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와 잎을 흔들며 "호산나" 하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날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과 말씀의 권세를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 생각하며 소망에 부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다윗의 시대와 같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 주시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가 무르익는 가운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수많은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정녕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 날로부터 한 주간도 지나지 않아 왕의 이름을 높이며 환호하는 소리는 사라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성난 군중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주위에는 왕을 경배하며 찬양하던 백성들이 사라지고 욕하며 조롱하는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소리높여 환호하는 이 날이, 실상은 곧 다가올 참혹한 고난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금요일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간의 첫날로서,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을까요?
2.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셔야 했던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온갖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유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무수한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이지요.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살아가면서도 많은 죄를 짓습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기록된 대로, 영계의 법칙에 의하면 공의에 따라 모든 죄인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심에 있어서 철저한 공의를 좇아 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을 어기지 않고 죄인들을 구원할 방법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누군가 죄 없는 사람이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원죄와 자범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원죄가 없으시지요. 또한 태어나서부터 온전히 율법을 지키시므로 자범죄도 없으셨습니다. 원죄도 자범죄도 없으시므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 주신다면 죄인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 해도 공의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의 생명을 대신 내어줌으로써, 구원의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가 없어서 죄인들을 대속하실 자격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결코 죄인들을 위해 사망의 형벌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아야 하는 사망의 형벌은 결코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아 피를 흘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야 했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며,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야 합니다. 채찍에 맞은 상처와 못박힌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여러 시간 동안 참혹한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러한 사망의 형벌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고, 일평생 가난한 삶을 사심으로 가난을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아 피 흘리며 찢기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셨습니다. 가시관에 찔려 얼굴에 피가 낭자하신 것은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며, 손과 발에 못박히고 피 흘리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범한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하거나 예수님을 믿어드린 것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도 막상 예수님께서 잡혀 고난당하실 때는 대부분 두려워서 숨고 말았지요.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시며 오직 선한 일만 해 주셨는데, 군중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욕하고 침 뱉으며 조롱합니다.
이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세주를 멸시하고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해 오히려 용서를 빌어 주셨고, 이후에라도 믿고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녕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의 상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요 승리와 영광을 얻으시는 길이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여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망의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사망의 형벌을 받으셨다 해도 아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게 되며 부활하신 주님과 믿음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사망 권세에서 풀려나고 장차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 더 이상 두려움과 고통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너머에 있는 구원과 생명을 볼 수 있게 되고, 고난의 대가로 주어지는 천국의 영광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어느 때에 어떻게 잡히시는 줄도 아셨고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참혹한 것도 아셨지요. 만세 전에 감추어진 섭리 가운데 인류 구속을 완성해야 하는 중한 짐을 지셨고 더구나 참혹한 형벌을 감당해야 하기에 이 일을 이루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음에는 잠시도 온전한 쉼이 없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2:42을 보면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셨지요. 이처럼 기도하실 때 차가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11에 보면 마침내 때가 되어 잡히시게 되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하시며 잡으러 온 사람들의 손에 잡혀 가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매순간, 항상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하시며 어떤 고통과 희생이 있더라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뤄 드리기만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들의 마음가짐
요한일서 4:19을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말씀하셨는데, 세상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주님과 같은 사랑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주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대하시는지요.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이나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하며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으신지요? 생명을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닌데, 작은 유혹조차 버리지 못하여 범죄하거나 주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보다 내 가족과 내 소유를 더 귀하게 여기는 분은 없으신지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게 되고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피 값을 찾아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이 불타게 되며 원수를 위해서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오직 긍휼의 기도를 올리며 용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주님께서 가신 길이요,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녕 예수님의 고통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며 날마다 더한 사랑의 고백과 행함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실 때 죄로 물든 영혼들에 대한 긍휼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을 품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걸어가셨습니다. 주신 사명을 이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시고, 지금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며 마음에 위로를 받으셨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에 더욱 깊이 새기며 남은 날 동안 불같은 열정으로 주를 위해 헌신함으로 장차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셔야 했던 이유와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야 할지에 대해 깨닫게 한다.
1.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유래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와 잎을 흔들며 "호산나" 하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날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과 말씀의 권세를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 생각하며 소망에 부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다윗의 시대와 같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 주시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가 무르익는 가운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수많은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정녕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 날로부터 한 주간도 지나지 않아 왕의 이름을 높이며 환호하는 소리는 사라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성난 군중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주위에는 왕을 경배하며 찬양하던 백성들이 사라지고 욕하며 조롱하는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소리높여 환호하는 이 날이, 실상은 곧 다가올 참혹한 고난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금요일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간의 첫날로서,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을까요?
2.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셔야 했던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온갖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유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무수한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이지요.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살아가면서도 많은 죄를 짓습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기록된 대로, 영계의 법칙에 의하면 공의에 따라 모든 죄인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심에 있어서 철저한 공의를 좇아 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을 어기지 않고 죄인들을 구원할 방법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누군가 죄 없는 사람이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원죄와 자범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원죄가 없으시지요. 또한 태어나서부터 온전히 율법을 지키시므로 자범죄도 없으셨습니다. 원죄도 자범죄도 없으시므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 주신다면 죄인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 해도 공의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의 생명을 대신 내어줌으로써, 구원의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가 없어서 죄인들을 대속하실 자격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결코 죄인들을 위해 사망의 형벌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아야 하는 사망의 형벌은 결코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아 피를 흘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야 했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며,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야 합니다. 채찍에 맞은 상처와 못박힌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여러 시간 동안 참혹한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러한 사망의 형벌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고, 일평생 가난한 삶을 사심으로 가난을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아 피 흘리며 찢기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셨습니다. 가시관에 찔려 얼굴에 피가 낭자하신 것은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며, 손과 발에 못박히고 피 흘리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범한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하거나 예수님을 믿어드린 것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도 막상 예수님께서 잡혀 고난당하실 때는 대부분 두려워서 숨고 말았지요.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시며 오직 선한 일만 해 주셨는데, 군중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욕하고 침 뱉으며 조롱합니다.
이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세주를 멸시하고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해 오히려 용서를 빌어 주셨고, 이후에라도 믿고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녕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의 상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요 승리와 영광을 얻으시는 길이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여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망의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사망의 형벌을 받으셨다 해도 아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게 되며 부활하신 주님과 믿음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사망 권세에서 풀려나고 장차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 더 이상 두려움과 고통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너머에 있는 구원과 생명을 볼 수 있게 되고, 고난의 대가로 주어지는 천국의 영광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어느 때에 어떻게 잡히시는 줄도 아셨고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참혹한 것도 아셨지요. 만세 전에 감추어진 섭리 가운데 인류 구속을 완성해야 하는 중한 짐을 지셨고 더구나 참혹한 형벌을 감당해야 하기에 이 일을 이루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음에는 잠시도 온전한 쉼이 없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2:42을 보면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셨지요. 이처럼 기도하실 때 차가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11에 보면 마침내 때가 되어 잡히시게 되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하시며 잡으러 온 사람들의 손에 잡혀 가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매순간, 항상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하시며 어떤 고통과 희생이 있더라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뤄 드리기만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들의 마음가짐
요한일서 4:19을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말씀하셨는데, 세상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주님과 같은 사랑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주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대하시는지요.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이나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하며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으신지요? 생명을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닌데, 작은 유혹조차 버리지 못하여 범죄하거나 주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보다 내 가족과 내 소유를 더 귀하게 여기는 분은 없으신지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게 되고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피 값을 찾아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이 불타게 되며 원수를 위해서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오직 긍휼의 기도를 올리며 용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주님께서 가신 길이요,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녕 예수님의 고통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며 날마다 더한 사랑의 고백과 행함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실 때 죄로 물든 영혼들에 대한 긍휼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을 품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걸어가셨습니다. 주신 사명을 이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시고, 지금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며 마음에 위로를 받으셨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에 더욱 깊이 새기며 남은 날 동안 불같은 열정으로 주를 위해 헌신함으로 장차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