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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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제17과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요 3:3-5, 행 2:38
읽을말씀 : 요 3:3-5, 행 2:38 | 외울말씀 : 요 3:5
교육목표 :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하여 참된 구원에 이르게 한다.
1.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며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전통)을 중히 여기며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과 내세와 부활, 천사와 종말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거룩한 체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여 마치 회칠한 무덤 같기에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마 23:25-36). 아무리 사람이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거기에다 회칠을 한다 해도 그 속에는 부패한 더러운 것이 가득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외식주의자들을 향해 엄히 책망하시며 회개하고 돌이키라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며,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마 12:24).
니고데모는 이들과는 달리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좇았고, 당시 예수님을 두둔할 수 없는 위치였지만 예수님 편에 서서 변론하였습니다(요 7:51). 이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가 사람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무지하여 진리를 밝히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 알려 주셨고,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지냈습니다(요 19:39-42).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인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영적 대화
요한복음 3:2에 니고데모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훌륭한 선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고 육적으로 예수님을 안 것이지 영적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니고데모에게 영의 차원에서 볼 수 있도록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알려 줍니다.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한 니고데모는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뿐이었지요. 이처럼 우리가 지식이 많거나 부유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거나 교회 오래 다녔다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요.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말씀하지요.
사람이 바람 부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그 바람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며 바람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육으로 볼 수 없는 바람과 같이 영의 세계의 일들도 육적인 한계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요.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육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생령으로 지음 받았지만 범죄하여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생령이 아닌 육의 사람이 되었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씀처럼 육의 사람이 된 아담의 후손들도 영이 죽은 육의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류가 영이 죽은 육의 사람으로서 천국에 갈 수 없고 지옥 곧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알려 주셨지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여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십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뱀처럼 나무에 달리실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됨을 알려 주십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물은 더러움을 씻어 주는 정화 작용을 합니다. 영적으로 영생수는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뜻하므로(요 4:14)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2:1-1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청함을 받았을 때 포도주가 모자라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로 먹게 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혼인을 축복하셨다는 육적인 의미를 나타내려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섭리를 명확히 알려 주기 위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요 1:14)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피 흘리신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주를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 11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에야 온전히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물은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과 십자가의 섭리들을 믿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으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알려주시고(요 16:8) 진리의 말씀 안에 살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마음 안에 내주하시며 죄를 버리며 날마다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나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거듭남을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의 임하심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구름이 움직이고 사람을 시원케 하며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사람도 성령을 받아 거듭나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기쁨이 충만해져 인생의 목표가 바뀌는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임하심을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이처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수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여 아름다운 영광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하여 참된 구원에 이르게 한다.
1.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며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전통)을 중히 여기며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과 내세와 부활, 천사와 종말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거룩한 체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여 마치 회칠한 무덤 같기에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마 23:25-36). 아무리 사람이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거기에다 회칠을 한다 해도 그 속에는 부패한 더러운 것이 가득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외식주의자들을 향해 엄히 책망하시며 회개하고 돌이키라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며,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마 12:24).
니고데모는 이들과는 달리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좇았고, 당시 예수님을 두둔할 수 없는 위치였지만 예수님 편에 서서 변론하였습니다(요 7:51). 이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가 사람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무지하여 진리를 밝히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 알려 주셨고,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지냈습니다(요 19:39-42).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인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영적 대화
요한복음 3:2에 니고데모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훌륭한 선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고 육적으로 예수님을 안 것이지 영적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니고데모에게 영의 차원에서 볼 수 있도록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알려 줍니다.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한 니고데모는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뿐이었지요. 이처럼 우리가 지식이 많거나 부유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거나 교회 오래 다녔다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요.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말씀하지요.
사람이 바람 부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그 바람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며 바람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육으로 볼 수 없는 바람과 같이 영의 세계의 일들도 육적인 한계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요.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육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생령으로 지음 받았지만 범죄하여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생령이 아닌 육의 사람이 되었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씀처럼 육의 사람이 된 아담의 후손들도 영이 죽은 육의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류가 영이 죽은 육의 사람으로서 천국에 갈 수 없고 지옥 곧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알려 주셨지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여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십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뱀처럼 나무에 달리실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됨을 알려 주십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물은 더러움을 씻어 주는 정화 작용을 합니다. 영적으로 영생수는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뜻하므로(요 4:14)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2:1-1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청함을 받았을 때 포도주가 모자라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로 먹게 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혼인을 축복하셨다는 육적인 의미를 나타내려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섭리를 명확히 알려 주기 위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요 1:14)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피 흘리신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주를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 11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에야 온전히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물은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과 십자가의 섭리들을 믿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으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알려주시고(요 16:8) 진리의 말씀 안에 살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마음 안에 내주하시며 죄를 버리며 날마다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나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거듭남을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의 임하심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구름이 움직이고 사람을 시원케 하며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사람도 성령을 받아 거듭나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기쁨이 충만해져 인생의 목표가 바뀌는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임하심을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이처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수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여 아름다운 영광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4-18
제16과가상 칠언(3)
요 19:30, 누 23:46
읽을말씀 : 요 19:30, 누 23:46 | 외울말씀 : 요 19:30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가상 칠언 중 제6, 7언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한다.
1. 제6언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을 보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는데 이는 가상칠언 중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요 1:14). 그래서 오직 율법을 좇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마 9:35).
또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는데, 이는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모든 인류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간 구원의 섭리를 다 이루신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고백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고백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며 구원의 섭리를 다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뜻을 좇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대로 살았다 해도 도중에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면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상칠언 중 제6언의 영적인 의미를 마음에 양식 삼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여 "다 이루었다" 고백할 수 있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2.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제7언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입니다(눅 23:44-46). 그러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 품에 부탁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영, 혼, 육이 있어서(살전 5:23)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영과 혼은 육을 떠나 하나님의 품이나 음부로 가게 되고 육은 장사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로 가게 되므로(눅 16:19-31) 육신을 입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입니다.
영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주인으로서 진리로 무장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생령으로 지음 받은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되며,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영이 자라나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혼이란 무엇일까요?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마치 백지 상태와 같으나 점점 성장하면서 환경과 조건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우며 느끼는 것들이 뇌세포의 기억장치에 지식으로 쌓이고 이런 것들을 통해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모든 기억장치와 지식, 생각 등을 포함한 것이 혼입니다.
또한 육은 영과 혼이 거하는 장막으로서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을 말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사람과 같이 영과 혼, 육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영과 혼은 엄격히 구분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만 받으시고 혼을 받지 않으신다면 하늘나라에 갔을 때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의 눈물, 슬픔, 고통을 모르게 되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마음 중심에서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영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소관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 소유요 하나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만 응답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도 결론 "이 비밀이 크도다"
여러 시간에 걸쳐 십자가의 도를 배움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사람이 어떻게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예비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 믿음을 소유하여 온전한 구원과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베소서 5:31-32을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교회란 성령 받은 하나님 자녀들을 뜻하므로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요한복음 8:44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말씀한 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에 속한 자로서 어둠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 가운데로 나오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서 떠나 하나님 자녀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가 됩니다. 신랑, 신부가 부모를 떠나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가 세상을 떠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니 얼마나 큰 비밀입니까?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신랑, 신부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후사를 낳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한 몸을 이루면 믿음의 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의 아들만 되어도 큰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되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 곧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얼마나 큰 권세를 누리며 살겠는지요.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큰 비밀인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유업을 이어 받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6-7을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 아들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며 하나님 자녀된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비밀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천국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회개하여 구원받은 한 편 강도가 들어간 낙원(눅 23:43), 가장 영화로운 처소인 새예루살렘(계 21-22장) 등 여러 처소로 구분하시고 이 땅에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지금까지 가상칠언과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으니 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 아들로서 유업을 이어받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가상 칠언 중 제6, 7언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한다.
1. 제6언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을 보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는데 이는 가상칠언 중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요 1:14). 그래서 오직 율법을 좇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마 9:35).
또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는데, 이는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모든 인류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간 구원의 섭리를 다 이루신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고백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고백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며 구원의 섭리를 다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뜻을 좇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대로 살았다 해도 도중에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면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상칠언 중 제6언의 영적인 의미를 마음에 양식 삼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여 "다 이루었다" 고백할 수 있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2.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제7언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입니다(눅 23:44-46). 그러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 품에 부탁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영, 혼, 육이 있어서(살전 5:23)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영과 혼은 육을 떠나 하나님의 품이나 음부로 가게 되고 육은 장사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로 가게 되므로(눅 16:19-31) 육신을 입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입니다.
영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주인으로서 진리로 무장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생령으로 지음 받은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되며,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영이 자라나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혼이란 무엇일까요?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마치 백지 상태와 같으나 점점 성장하면서 환경과 조건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우며 느끼는 것들이 뇌세포의 기억장치에 지식으로 쌓이고 이런 것들을 통해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모든 기억장치와 지식, 생각 등을 포함한 것이 혼입니다.
또한 육은 영과 혼이 거하는 장막으로서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을 말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사람과 같이 영과 혼, 육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영과 혼은 엄격히 구분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만 받으시고 혼을 받지 않으신다면 하늘나라에 갔을 때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의 눈물, 슬픔, 고통을 모르게 되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마음 중심에서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영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소관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 소유요 하나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만 응답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도 결론 "이 비밀이 크도다"
여러 시간에 걸쳐 십자가의 도를 배움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사람이 어떻게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예비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 믿음을 소유하여 온전한 구원과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베소서 5:31-32을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교회란 성령 받은 하나님 자녀들을 뜻하므로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요한복음 8:44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말씀한 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에 속한 자로서 어둠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 가운데로 나오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서 떠나 하나님 자녀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가 됩니다. 신랑, 신부가 부모를 떠나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가 세상을 떠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니 얼마나 큰 비밀입니까?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신랑, 신부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후사를 낳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한 몸을 이루면 믿음의 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의 아들만 되어도 큰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되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 곧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얼마나 큰 권세를 누리며 살겠는지요.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큰 비밀인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유업을 이어 받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6-7을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 아들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며 하나님 자녀된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비밀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천국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회개하여 구원받은 한 편 강도가 들어간 낙원(눅 23:43), 가장 영화로운 처소인 새예루살렘(계 21-22장) 등 여러 처소로 구분하시고 이 땅에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지금까지 가상칠언과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으니 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 아들로서 유업을 이어받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4-11
제15과가상 칠언(2)
요 19:26-28, 마 27:46
읽을말씀 : 요 19:26-28, 마 27:46 | 외울말씀 : 마 27:46
교육목표 : 가상 칠언 중 제3, 4, 5언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 남기신 일곱 마디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서 오늘은 제3, 4, 5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3언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모친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가상칠언 중 제3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육적으로는 자신이 잉태하여 낳은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고 있으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함이요,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요, 모친이라는 사실을 온 인류에게 공포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라 부르지 아니하고 여자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니(빌 2:6) 어머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동정녀 마리아는 단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몸을 빌려 준 것뿐이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낳았을 뿐입니다(마 1:18).
마태복음 12:50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요한을 지칭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며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섬겨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면 믿음이 자랄수록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넘쳐나고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영적인 소속감이 분명해집니다(빌 3:20). 예전에는 핏줄의 형제가 더 사랑스럽고 좋았으나 차츰 믿음의 형제가 사랑스러워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의 형제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제4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을 보면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말씀했습니다. 혹자는 이를 오해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수 마귀를 멸하고 우리 인생을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며 자기를 희생한 분이시니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하나님을 원망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4언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되 피조물의 손에 의해 조롱거리가 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이며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지한 인생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칠 수 있도록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크게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밤새 먹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시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고 온갖 고통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셨으며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으니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처럼 철저하게 버리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버림 받고 인생들을 위해 죽어 가는데도 수많은 인생들이 어둠 가운데서 세상과 짝하여 살며 생명의 길로 나오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제5언 :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29을 보면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69:21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말씀하셨는데 이를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감동함을 받아서, 또한 영안이 열려서 환상 가운데 앞일을 기록하였는데 이 말씀을 기록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수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시므로 실제로 심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가장 혹독한 처형 방법으로서 칼로 목 베임을 당해 짧은 순간에 피 흘리고 죽는 것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요. 이렇듯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과 갈증을 느끼셨으나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육적인 목마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참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피를 흘리므로 목이 마르니 내 목을 축이기 위하여 내 피 값을 찾아 달라 간절히 외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내가 목마르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고 주님의 피 값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 값을 찾을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해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전도받아 구원에 이를 때마다 크게 기뻐하시고 하늘나라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예물로 분야 분야에 하나님의 일이 추진됨으로 인해 많은 영혼이 구원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니 각종 예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면 이 또한 주님의 피 값을 찾는 길이 됩니다. 셋째는, 우리가 불같이 기도함으로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어야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으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피 값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상칠언 제3, 4, 5언의 영적인 의미를 잘 깨닫고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가상 칠언 중 제3, 4, 5언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 남기신 일곱 마디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서 오늘은 제3, 4, 5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3언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모친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가상칠언 중 제3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육적으로는 자신이 잉태하여 낳은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고 있으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함이요,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요, 모친이라는 사실을 온 인류에게 공포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라 부르지 아니하고 여자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니(빌 2:6) 어머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동정녀 마리아는 단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몸을 빌려 준 것뿐이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낳았을 뿐입니다(마 1:18).
마태복음 12:50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요한을 지칭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며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섬겨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면 믿음이 자랄수록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넘쳐나고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영적인 소속감이 분명해집니다(빌 3:20). 예전에는 핏줄의 형제가 더 사랑스럽고 좋았으나 차츰 믿음의 형제가 사랑스러워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의 형제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제4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을 보면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말씀했습니다. 혹자는 이를 오해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수 마귀를 멸하고 우리 인생을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며 자기를 희생한 분이시니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하나님을 원망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4언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되 피조물의 손에 의해 조롱거리가 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이며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지한 인생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칠 수 있도록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크게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밤새 먹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시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고 온갖 고통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셨으며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으니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처럼 철저하게 버리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버림 받고 인생들을 위해 죽어 가는데도 수많은 인생들이 어둠 가운데서 세상과 짝하여 살며 생명의 길로 나오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제5언 :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29을 보면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69:21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말씀하셨는데 이를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감동함을 받아서, 또한 영안이 열려서 환상 가운데 앞일을 기록하였는데 이 말씀을 기록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수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시므로 실제로 심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가장 혹독한 처형 방법으로서 칼로 목 베임을 당해 짧은 순간에 피 흘리고 죽는 것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요. 이렇듯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과 갈증을 느끼셨으나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육적인 목마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참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피를 흘리므로 목이 마르니 내 목을 축이기 위하여 내 피 값을 찾아 달라 간절히 외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내가 목마르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고 주님의 피 값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 값을 찾을 수 있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해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전도받아 구원에 이를 때마다 크게 기뻐하시고 하늘나라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예물로 분야 분야에 하나님의 일이 추진됨으로 인해 많은 영혼이 구원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니 각종 예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면 이 또한 주님의 피 값을 찾는 길이 됩니다. 셋째는, 우리가 불같이 기도함으로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어야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으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피 값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상칠언 제3, 4, 5언의 영적인 의미를 잘 깨닫고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4-04
제14과가상 칠언(1)
눅 23:34-43
읽을말씀 : 눅 23:34-43 | 외울말씀 : 눅 23:43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 곧 가상칠언 중에서 제1, 2언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신앙생활에 적용하게 한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의 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러한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서 오늘은 제1,2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1언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온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아무 죄도 없는 깨끗한 분이셨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친히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때 수많은 백성들은 관원들과 함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며 비웃었고 군병들도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희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며 사랑의 기도를 하셨는데 이것이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으로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희롱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므로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기에 그들을 대신하여 용서해 주시라고 사랑으로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도하면 믿기는커녕 조롱하고 핍박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비웃으며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바로 가상칠언 중 제 1언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핍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기도해 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4을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고, 사도행전 7:54 이하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역시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2언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좌우편에 두 행악자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39-43을 보면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였지요. 그러자 다른 한 편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꾸짖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눅 23:43) 이것이 바로 가상칠언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사함을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가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이 기록된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44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고, 마가복음 15:32에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즉 양 편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말씀입니다(마 5:18). 이는 성경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그 당시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골고다 언덕에는 큰 십자가들이 높이 세워져 있었는데 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계셨고 좌우편에는 두 행악자가 함께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서서 조롱하고 로마 군병들은 흥분한 군중들이 십자가 가까이 밀리지 않도록 경계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욕하고 있었습니다(마 27:38-42).
이렇게 수많은 군중들로 떠들썩할 때 군중들 틈에 끼어 있던 제자 한 사람이 보니 한 편 강도가 무엇이라 욕을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향해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반대편 강도를 꾸짖는 것인데(눅 23:39-40), 몸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서 얼굴만 옆으로 돌려서 말을 하니 십자가 아래 군중들 틈에 끼인 제자는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여겨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군중들이 십자가 밑에 모여 있으며, 또한 십자가가 높고 멀리 있어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정확히 분별하도록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제2언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가게 되며 한 편 강도는 그중에서 낙원에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거할 천국은 무한히 넓고 큰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도 도시와 시골이 있고, 수도와 지방이 있듯이 천국도 가장 변두리 지역인 낙원 외에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기록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 등 각기 다른 처소가 있으며 그중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곳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들이 거하는 천국이지요.
그러면 회개한 한 편 강도는 왜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는 했지만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린 것도 아니요, 사명을 맡아 감당한 것도 아니며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몸이기에 아무런 상급이 없는 낙원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므로 낙원뿐 아니라 어느 곳에든 계셔서 전 세계 곳곳을 감찰하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이요,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강도와 함께 낙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가셨을까요? 마태복음 12:40을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9에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의롭고 사랑이 많으시므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음부에 가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3일간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벧전 3:19).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 메시아를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의롭게 산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낙원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본받아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 곧 가상칠언 중에서 제1, 2언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신앙생활에 적용하게 한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의 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러한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서 오늘은 제1,2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1언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온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아무 죄도 없는 깨끗한 분이셨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친히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때 수많은 백성들은 관원들과 함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며 비웃었고 군병들도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희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며 사랑의 기도를 하셨는데 이것이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으로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희롱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므로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기에 그들을 대신하여 용서해 주시라고 사랑으로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도하면 믿기는커녕 조롱하고 핍박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비웃으며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바로 가상칠언 중 제 1언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핍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기도해 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4을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고, 사도행전 7:54 이하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역시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2언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좌우편에 두 행악자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39-43을 보면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였지요. 그러자 다른 한 편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꾸짖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눅 23:43) 이것이 바로 가상칠언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사함을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가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이 기록된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44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고, 마가복음 15:32에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즉 양 편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말씀입니다(마 5:18). 이는 성경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그 당시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골고다 언덕에는 큰 십자가들이 높이 세워져 있었는데 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계셨고 좌우편에는 두 행악자가 함께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서서 조롱하고 로마 군병들은 흥분한 군중들이 십자가 가까이 밀리지 않도록 경계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욕하고 있었습니다(마 27:38-42).
이렇게 수많은 군중들로 떠들썩할 때 군중들 틈에 끼어 있던 제자 한 사람이 보니 한 편 강도가 무엇이라 욕을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향해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반대편 강도를 꾸짖는 것인데(눅 23:39-40), 몸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서 얼굴만 옆으로 돌려서 말을 하니 십자가 아래 군중들 틈에 끼인 제자는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여겨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군중들이 십자가 밑에 모여 있으며, 또한 십자가가 높고 멀리 있어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정확히 분별하도록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제2언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가게 되며 한 편 강도는 그중에서 낙원에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거할 천국은 무한히 넓고 큰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도 도시와 시골이 있고, 수도와 지방이 있듯이 천국도 가장 변두리 지역인 낙원 외에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기록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 등 각기 다른 처소가 있으며 그중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곳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들이 거하는 천국이지요.
그러면 회개한 한 편 강도는 왜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는 했지만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린 것도 아니요, 사명을 맡아 감당한 것도 아니며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몸이기에 아무런 상급이 없는 낙원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므로 낙원뿐 아니라 어느 곳에든 계셔서 전 세계 곳곳을 감찰하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이요,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강도와 함께 낙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가셨을까요? 마태복음 12:40을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9에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의롭고 사랑이 많으시므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음부에 가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3일간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벧전 3:19).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 메시아를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의롭게 산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낙원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본받아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008-03-28
제13과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박히신 이유
마 27:29-30, 사 53:5-6, 골 3:1-10
읽을말씀 : 마 27:29-30, 사 53:5-6, 골 3:1-10 | 외울말씀 : 고후 10:5
교육목표 :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박혀 피 흘리시며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밝히 깨달아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27-30을 보면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받고 관정 안으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희롱하고자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군병들은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며 예수님께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은 갈대를 빼앗아 가시 면류관을 씌운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유대 사막에서 자라난 가시나무는 우리나라의 가시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억세어 가시가 길고 독하게 생겼습니다. 이런 가시나무를 좌우로 얼기설기 엮되 머리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눌러 씌운 후 억센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으니 예수님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저주받은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며 고통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천국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는데 이 땅에서 얼마나 죄를 싸워 버리고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면류관이 다릅니다. 곧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성도들이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27), 열심히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면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림으로 성결된 성도들이 받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사도 바울처럼 모든 죄악을 버려 성결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받는 의의 면류관(딤후 4:8), 또는 금 면류관(계 4:4)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더욱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며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이왕이면 의의 면류관, 금 면류관을 받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어떤 죄를 대속하셨는가?
성경을 보면 생령인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나아갈 때는 범죄하지 않았으나 생각을 통해 사단이 역사하자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고, 결국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를 심기 때문이며 이것을 행동으로 옮김으로 더욱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마 5:27-28) 마음에 악을 심고 그것을 품으면 악이 되는 것이요,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 행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근원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요, 또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생각을 차단하고 마음에 악을 품지 않으면 행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를 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약 2천 년 전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생각을 통해 오는 모든 죄, 즉 진리에 어긋나는 죄악들을 대속해 주셨으니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결코 생각으로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3. 생각을 통해 오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성경을 보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으로 진리에 위배된 생각을 받아들이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생령인 아담은 물론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도 영이 죽은 혼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이처럼 사단은 사람의 혼을 통해 진리에 위배되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데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생각이란 뇌의 기억장치에 입력된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을 말하는데 혼의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 생각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러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양심이라 하는데 그 양심이 무디어지면 옳지 못한 것을 좇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에서 오는 지혜나 지식이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들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1+4=5라는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진리이므로 버릴 것이 아니지만 어떤 일로 다투거나 상대를 미워한다면 이는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니 신속히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초신자가 주일에는 가게를 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세상에서 배운 지혜와 지식을 깨뜨리지 않으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는 지식과 이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반드시 버려야 할 육신의 생각입니다.
고린도후서 10:3-6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혼적인 생각들은 모두 싸워 버리며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이론일지라도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4. 예수님께서 양 손과 양발에 못박히신 이유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온 진리에 위배된 죄악의 마음은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생각을 통해 마음에 작용하므로 손과 발을 통해 범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43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5:30에도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양 손과 양발에 못박혀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으면 자신의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더 이상 생각은 물론 손이나 발로 죄를 범하는 일이 없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박혀 피 흘리시며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밝히 깨달아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27-30을 보면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받고 관정 안으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희롱하고자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군병들은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며 예수님께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은 갈대를 빼앗아 가시 면류관을 씌운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유대 사막에서 자라난 가시나무는 우리나라의 가시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억세어 가시가 길고 독하게 생겼습니다. 이런 가시나무를 좌우로 얼기설기 엮되 머리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눌러 씌운 후 억센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으니 예수님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저주받은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며 고통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천국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는데 이 땅에서 얼마나 죄를 싸워 버리고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면류관이 다릅니다. 곧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성도들이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27), 열심히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면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림으로 성결된 성도들이 받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사도 바울처럼 모든 죄악을 버려 성결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받는 의의 면류관(딤후 4:8), 또는 금 면류관(계 4:4)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더욱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며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이왕이면 의의 면류관, 금 면류관을 받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어떤 죄를 대속하셨는가?
성경을 보면 생령인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나아갈 때는 범죄하지 않았으나 생각을 통해 사단이 역사하자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고, 결국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를 심기 때문이며 이것을 행동으로 옮김으로 더욱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마 5:27-28) 마음에 악을 심고 그것을 품으면 악이 되는 것이요,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 행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근원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요, 또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생각을 차단하고 마음에 악을 품지 않으면 행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를 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약 2천 년 전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생각을 통해 오는 모든 죄, 즉 진리에 어긋나는 죄악들을 대속해 주셨으니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결코 생각으로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3. 생각을 통해 오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성경을 보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으로 진리에 위배된 생각을 받아들이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생령인 아담은 물론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도 영이 죽은 혼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이처럼 사단은 사람의 혼을 통해 진리에 위배되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데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생각이란 뇌의 기억장치에 입력된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을 말하는데 혼의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 생각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러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양심이라 하는데 그 양심이 무디어지면 옳지 못한 것을 좇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에서 오는 지혜나 지식이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들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1+4=5라는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진리이므로 버릴 것이 아니지만 어떤 일로 다투거나 상대를 미워한다면 이는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니 신속히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초신자가 주일에는 가게를 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세상에서 배운 지혜와 지식을 깨뜨리지 않으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는 지식과 이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반드시 버려야 할 육신의 생각입니다.
고린도후서 10:3-6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혼적인 생각들은 모두 싸워 버리며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이론일지라도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4. 예수님께서 양 손과 양발에 못박히신 이유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온 진리에 위배된 죄악의 마음은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생각을 통해 마음에 작용하므로 손과 발을 통해 범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43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5:30에도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양 손과 양발에 못박혀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으면 자신의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더 이상 생각은 물론 손이나 발로 죄를 범하는 일이 없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3-21
제12과부활의 소망과 확신
요 11:25-26, 고전 15:12-22
읽을말씀 : 요 11:25-26, 고전 15:12-22 | 외울말씀 : 고전 15:20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불로초를 얻으려 했던 중국의 진시황도,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은 죽었다가 다시 사셨고 지금도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죽어도 다시 살아나며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거나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았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며 어떠한 일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나비가 되고, 굼벵이가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됩니다.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사건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 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형체일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지를 암시해 주는 말씀이지요.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참된 부활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공중강림과 성도들의 부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이 지나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신 주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마침내 구름 위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9-11).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에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는데,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 후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주님을 증거하다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들을 위한 사랑과 용서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사도 바울이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 증거하는 일에 드렸던 것도 다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고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죽음도 불사할 수 있었습니다.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면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질까요?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장치가 있어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기억되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가졌으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신뢰를 행함으로 이것을 통해 확신이 와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의 능력을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응답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하며 이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할 때에 이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을 중심에서 온전히 믿어 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불로초를 얻으려 했던 중국의 진시황도,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은 죽었다가 다시 사셨고 지금도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죽어도 다시 살아나며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거나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았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며 어떠한 일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나비가 되고, 굼벵이가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됩니다.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사건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 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형체일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지를 암시해 주는 말씀이지요.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참된 부활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공중강림과 성도들의 부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이 지나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신 주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마침내 구름 위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9-11).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에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는데,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 후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주님을 증거하다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들을 위한 사랑과 용서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사도 바울이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 증거하는 일에 드렸던 것도 다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고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죽음도 불사할 수 있었습니다.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면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질까요?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장치가 있어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기억되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가졌으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신뢰를 행함으로 이것을 통해 확신이 와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의 능력을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응답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하며 이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할 때에 이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을 중심에서 온전히 믿어 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3-14
제11과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막 15:15-20, 레 17:10-11, 히 9:22
읽을말씀 : 막 15:15-20, 레 17:10-11, 히 9:22 | 외울말씀 : 벧전 2:24, 출 15:26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섭리 속에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보혈을 흘리신 이유를 깨닫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어 강건한 삶을 살게 한다.
1. 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로마 군병에게 뺨을 맞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건장하고 잘 훈련된 병사가 예수님의 옷을 벗긴 뒤 뾰쪽한 납덩이가 달린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온몸을 휘감아 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뼈가 드러나고 피가 낭자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사 50:6) 하신 말씀처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죄인 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몸에 채찍을 맞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왜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 했을까요? 그 섭리가 이사야 53:5-6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베드로전서 2:24에도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온몸에 채찍을 맞아 흘리신 피로 인류는 죄와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질병은 죄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8에는 예수님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며 죄 문제부터 해결한 뒤에 일어나 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시고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음을 믿는데도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15:26에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질병을 총칭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죄를 지을 때 질병이 생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고 모든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에는 질병이 틈타면 약이나 병원 등 세상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면 하나님 말씀 안에 살므로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질병이 틈탄다 해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중심으로 회개하면 치료받습니다.
간혹 '나는 믿음이 연약하므로 범죄할 때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는 힘들다.'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연약하다, 힘들다." 고백하면 연약하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다, 충만하다."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피곤도 능히 이기며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받아도 여전히 아픈데 어떻게 나았다고 합니까? 그러면 거짓말이 아닌가요?"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4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2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했습니다. 믿음은 이룬 것을 보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랄 때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나을 줄 믿습니다." 해도 치료되지 않는다면 영적인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진실하게 믿는 믿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아프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약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온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 질병을 대속해 주셨음을 분명히 믿고, 진리 가운데 행하면 강건해집니다.
2.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마태복음 8:17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을 대신 져 주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이 때문에 고통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은 본래 연약한 존재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셨는데 육신이 연약하여 잠들지 않았느냐?" 하며 늘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육신이 연약했던 것은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믿음의 고백대로 이루어집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할 때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진리 안에 살 때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료하시며, 능치 못할 일이 없도록 역사해 주십니다(막 9:23). 나아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신 말씀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면 예수님 당시와 같이 권능을 체험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각색 병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22을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군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이나 소를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레위기 17:11에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릴 때 그 피가 죄를 속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늘 짐승을 잡아 제사드려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흠도 티도 없는 보혈, 능력의 피를 흘려 주신 후부터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인류의 모든 죄가 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9-20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죄인된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여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대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와 암송아지 재를 부정한 사람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였지만 이제는 이런 외적인 의식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갖 불법을 행하던 마음을 씻고 정결한 마음과 행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의 피는 흠도 점도 없이 깨끗하여 죄를 온전히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 자녀는 질병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죄 문제뿐 아니라 질병과 연약함까지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해 주셨으니 항상 강건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피 흘려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영육간에 강건한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섭리 속에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보혈을 흘리신 이유를 깨닫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어 강건한 삶을 살게 한다.
1. 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로마 군병에게 뺨을 맞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건장하고 잘 훈련된 병사가 예수님의 옷을 벗긴 뒤 뾰쪽한 납덩이가 달린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온몸을 휘감아 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뼈가 드러나고 피가 낭자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사 50:6) 하신 말씀처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죄인 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몸에 채찍을 맞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왜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 했을까요? 그 섭리가 이사야 53:5-6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베드로전서 2:24에도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온몸에 채찍을 맞아 흘리신 피로 인류는 죄와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질병은 죄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8에는 예수님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며 죄 문제부터 해결한 뒤에 일어나 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시고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음을 믿는데도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15:26에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질병을 총칭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죄를 지을 때 질병이 생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고 모든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에는 질병이 틈타면 약이나 병원 등 세상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면 하나님 말씀 안에 살므로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질병이 틈탄다 해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중심으로 회개하면 치료받습니다.
간혹 '나는 믿음이 연약하므로 범죄할 때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는 힘들다.'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연약하다, 힘들다." 고백하면 연약하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다, 충만하다."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피곤도 능히 이기며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받아도 여전히 아픈데 어떻게 나았다고 합니까? 그러면 거짓말이 아닌가요?"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4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2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했습니다. 믿음은 이룬 것을 보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랄 때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나을 줄 믿습니다." 해도 치료되지 않는다면 영적인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진실하게 믿는 믿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아프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약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온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 질병을 대속해 주셨음을 분명히 믿고, 진리 가운데 행하면 강건해집니다.
2.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마태복음 8:17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을 대신 져 주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이 때문에 고통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은 본래 연약한 존재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셨는데 육신이 연약하여 잠들지 않았느냐?" 하며 늘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육신이 연약했던 것은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믿음의 고백대로 이루어집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할 때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진리 안에 살 때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료하시며, 능치 못할 일이 없도록 역사해 주십니다(막 9:23). 나아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신 말씀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면 예수님 당시와 같이 권능을 체험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각색 병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22을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군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이나 소를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레위기 17:11에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릴 때 그 피가 죄를 속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늘 짐승을 잡아 제사드려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흠도 티도 없는 보혈, 능력의 피를 흘려 주신 후부터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인류의 모든 죄가 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9-20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죄인된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여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대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와 암송아지 재를 부정한 사람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였지만 이제는 이런 외적인 의식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갖 불법을 행하던 마음을 씻고 정결한 마음과 행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의 피는 흠도 점도 없이 깨끗하여 죄를 온전히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 자녀는 질병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죄 문제뿐 아니라 질병과 연약함까지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해 주셨으니 항상 강건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피 흘려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영육간에 강건한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3-07
제10과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게 하신 섭리
요 19:23-24, 시 22:18
읽을말씀 : 요 19:23-24, 시 22:18 | 외울말씀 : 요 19:23
교육목표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되 제비를 뽑게 한 하나님의 섭리와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해 놔주기 원했지만 유대인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였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어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민 히브리와 그 당시 세계 강국인 로마, 세계문화를 지배한 헬라의 언어로 기록한 것은 전 세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한다는 표시입니다.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고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라고 하지만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며 그대로 두었습니다. 시편 22:18을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예언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옷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서기 70년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잘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9:23을 보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겉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습니다. 옷의 형체가 없어지니 누구의 옷인 줄 알 수 없지요.
여기서 '예수님의 겉옷'은 영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을 뜻하며, '옷을 네 깃으로 나누므로 옷의 형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 곧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라의 존립마저 무너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옷이라는 하나의 완성품이 사방으로 흩어져 한낱 천 조각에 불과하듯이 나라는 없어지고 이스라엘 이름만 남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로마 군병들이 '겉옷을 각각 한 깃씩 취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질 것을 예시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은 점령되어 성전 건물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훼파되고, 무려 약 110만 명이 학살당하고 겨우 9천 명 정도만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 남을 뿐 백성은 나라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2.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로마 군병들은 속옷도 취했는데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고 하였습니다(요 19:24). 시편 22:18에 "내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짰는데 이것을 군병들이 찢지 않고 제비 뽑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을 필두로 하여 그의 열두 아들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 후손으로 이어졌습니다(신 32:9, 창 35:10-11). 예수님의 속옷이 위에서부터 호지 않고 통으로 짜내려 왔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머리인 야곱으로 시작하여 위에서부터 순수하게 내려온 단일민족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아니하고 제비 뽑은 것은 야곱으로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다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마음 중심을 볼 수 있는데, 곧 야곱이 변함없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택하지 않고 야곱을 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변함없는 중심이므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다시 나라를 세웠습니다. 1948년 5월 14일 독립한 이스라엘은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급부상했고, 그들의 뛰어난 민족성은 전 세계가 인정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독립 후 이스라엘을 치는 나라는 망할 것을 예언하는데(겔 38:8 이하), 그대로 이스라엘을 치는 나라들은 망하고 항복한 것을 역사가 증명하지요. 1967년, 이스라엘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6일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스라엘의 유학생들은 전장에 참여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민족성은 특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해 그 보응으로 나라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 찢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호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속옷을 이방인들이 찢지 못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만은 찢을 수 없음을 성경이 예언하며 역사가 그대로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옷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영적인 의미를 통해 인류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참 믿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오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되 제비를 뽑게 한 하나님의 섭리와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해 놔주기 원했지만 유대인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였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어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민 히브리와 그 당시 세계 강국인 로마, 세계문화를 지배한 헬라의 언어로 기록한 것은 전 세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한다는 표시입니다.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고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라고 하지만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며 그대로 두었습니다. 시편 22:18을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예언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옷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서기 70년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잘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9:23을 보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겉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습니다. 옷의 형체가 없어지니 누구의 옷인 줄 알 수 없지요.
여기서 '예수님의 겉옷'은 영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을 뜻하며, '옷을 네 깃으로 나누므로 옷의 형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 곧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라의 존립마저 무너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옷이라는 하나의 완성품이 사방으로 흩어져 한낱 천 조각에 불과하듯이 나라는 없어지고 이스라엘 이름만 남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로마 군병들이 '겉옷을 각각 한 깃씩 취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질 것을 예시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은 점령되어 성전 건물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훼파되고, 무려 약 110만 명이 학살당하고 겨우 9천 명 정도만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 남을 뿐 백성은 나라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2.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로마 군병들은 속옷도 취했는데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고 하였습니다(요 19:24). 시편 22:18에 "내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짰는데 이것을 군병들이 찢지 않고 제비 뽑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을 필두로 하여 그의 열두 아들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 후손으로 이어졌습니다(신 32:9, 창 35:10-11). 예수님의 속옷이 위에서부터 호지 않고 통으로 짜내려 왔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머리인 야곱으로 시작하여 위에서부터 순수하게 내려온 단일민족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아니하고 제비 뽑은 것은 야곱으로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다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마음 중심을 볼 수 있는데, 곧 야곱이 변함없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택하지 않고 야곱을 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변함없는 중심이므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다시 나라를 세웠습니다. 1948년 5월 14일 독립한 이스라엘은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급부상했고, 그들의 뛰어난 민족성은 전 세계가 인정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독립 후 이스라엘을 치는 나라는 망할 것을 예언하는데(겔 38:8 이하), 그대로 이스라엘을 치는 나라들은 망하고 항복한 것을 역사가 증명하지요. 1967년, 이스라엘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6일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스라엘의 유학생들은 전장에 참여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민족성은 특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해 그 보응으로 나라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 찢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호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속옷을 이방인들이 찢지 못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만은 찢을 수 없음을 성경이 예언하며 역사가 그대로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옷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영적인 의미를 통해 인류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참 믿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오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2008-02-29
제9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요 19:32-36
읽을말씀 : 요 19:32-36 | 외울말씀 : 빌 2:5-6
교육목표 :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다리를 꺾이우지 않으신 이유와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이유를 알아보면서 부활과 영생의 믿음을 갖게 한다.
1. 다리를 꺾이우지 않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19:31-33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고 운명하시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군병들이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다른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수기 9:12에 보면 예수님을 어린 양에 비유하여 표현하면서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했고 시편 34:20에는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했으니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2:46에도 어린 양의 살은 먹되 그 뼈를 꺾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은 순종을 잘하고 아직 교미하지 않은 양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살을 제공하고 상대를 해치거나 대항치도 않습니다. 또한 깨끗하고 아름답고 순하므로 사람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온전히 자기를 희생하여 가죽과 고기와 털까지 제공하는 유익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은 아무런 흠과 점이 없는 예수님을 지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흠과 티가 많으므로 어린 양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양이라 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으신 분이며 아무 죄 없이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셔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에 의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아무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 몸의 뼈까지 꺾을 수 없었고 또한 꺾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해 놓은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주님께서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빌 2:6-8).
또한 이 땅에 오셔서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부요함을 주시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을 치료해 주셨지요. 뿐만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루 종일 일하시고 제자들이 쉴 때에도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을 행하셨지만 유대인들로부터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으며 끝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9:33-34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로마 군병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악한지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크신 사랑입니다.
3.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는데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토지 무르기의 법칙 중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하신 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구세주는 사람의 근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셨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배고픔을 느끼기도 하고(눅 4:2) 때를 좇아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마 8:24).
둘째로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4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했고 빌립보서 2:5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분이지만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물과 피라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는 분이시니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쏟으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피와 물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부활할 수 있는 피와 물이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사람과는 전혀 다른 능력의 피와 물입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씻음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듣고 행하는 만큼 하나님의 참 자녀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고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은 죄 없는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또한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쏟으신 물과 피 때문에 한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처형당하기 직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10:10).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 신속히 신의 성품에 참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악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더욱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다리를 꺾이우지 않으신 이유와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이유를 알아보면서 부활과 영생의 믿음을 갖게 한다.
1. 다리를 꺾이우지 않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19:31-33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고 운명하시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군병들이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다른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수기 9:12에 보면 예수님을 어린 양에 비유하여 표현하면서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했고 시편 34:20에는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했으니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2:46에도 어린 양의 살은 먹되 그 뼈를 꺾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은 순종을 잘하고 아직 교미하지 않은 양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살을 제공하고 상대를 해치거나 대항치도 않습니다. 또한 깨끗하고 아름답고 순하므로 사람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온전히 자기를 희생하여 가죽과 고기와 털까지 제공하는 유익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은 아무런 흠과 점이 없는 예수님을 지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흠과 티가 많으므로 어린 양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양이라 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으신 분이며 아무 죄 없이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셔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에 의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아무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 몸의 뼈까지 꺾을 수 없었고 또한 꺾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해 놓은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주님께서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빌 2:6-8).
또한 이 땅에 오셔서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부요함을 주시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을 치료해 주셨지요. 뿐만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루 종일 일하시고 제자들이 쉴 때에도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을 행하셨지만 유대인들로부터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으며 끝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9:33-34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로마 군병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악한지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크신 사랑입니다.
3.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는데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토지 무르기의 법칙 중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하신 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구세주는 사람의 근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셨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배고픔을 느끼기도 하고(눅 4:2) 때를 좇아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마 8:24).
둘째로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4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했고 빌립보서 2:5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분이지만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물과 피라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는 분이시니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쏟으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피와 물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부활할 수 있는 피와 물이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사람과는 전혀 다른 능력의 피와 물입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씻음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듣고 행하는 만큼 하나님의 참 자녀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고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은 죄 없는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또한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쏟으신 물과 피 때문에 한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처형당하기 직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10:10).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 신속히 신의 성품에 참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악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더욱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02-22
제8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사 53:4-6, 갈 3:13-14
읽을말씀 : 사 53:4-6, 갈 3:13-14 | 외울말씀 : 사 53:5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십자가의 고난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1. 예수님께서는 왜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가?
요한복음 19:17-18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왜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어 율법의 저주를 받고 사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지요.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이후 아담의 후손은 부모의 기(氣)를 통해 죄성을 이어받아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니게 되었고,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고자 대신하여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며, 결국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롬 5:12-13).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3:14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22:16-18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에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히 11:19)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았으며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혼의 축복뿐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의 복 등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은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복을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셨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요 1:12, 롬 8:16).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며(롬 8:15),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만큼 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아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의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창세기 3:14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흙의 영적인 의미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뱀 곧 사단의 역할은 사람의 생각을 주관하여 악을 행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사단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을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사람을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여러 가지 잔인하고 끔찍한 처형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는 것이 바로 죄인된 모든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1) 양손과 양 발에 못박히는 고통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 발에 큰 못을 박아 수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금방 숨이 끊어지면 차라리 고통을 오래 받지 않지만, 급소를 찌르는 것이 아니므로 오랫 동안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체중으로 인해 몸이 아래로 처지므로 양손과 양 발에 그 고통이 더욱 가중되니 십자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오직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2) 뜨거운 햇볕에 여러 시간 매달려 있어야 하는 고통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사막지대의 햇볕을 받으며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피곤과 갈증과 굶주림 가운데 수 시간 매달려 물과 피를 쏟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3) 온갖 조롱과 말할 수 없는 크나큰 고통
마태복음 27:29-30에 보면 "가시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 의해 온갖 핍박과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온갖 핍박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한 벌레 떼까지 피 냄새를 맡고 와서 상처와 못박힌 곳을 핥는 등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으셨지요.
이사야 53:6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했습니다. 아무 흠도 점도 없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저주받은 사람만이 매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더욱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십자가의 고난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1. 예수님께서는 왜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가?
요한복음 19:17-18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왜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어 율법의 저주를 받고 사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지요.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이후 아담의 후손은 부모의 기(氣)를 통해 죄성을 이어받아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니게 되었고,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고자 대신하여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며, 결국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롬 5:12-13).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3:14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22:16-18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에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히 11:19)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았으며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혼의 축복뿐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의 복 등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은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복을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셨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요 1:12, 롬 8:16).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며(롬 8:15),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만큼 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아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의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창세기 3:14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흙의 영적인 의미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뱀 곧 사단의 역할은 사람의 생각을 주관하여 악을 행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사단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을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사람을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여러 가지 잔인하고 끔찍한 처형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는 것이 바로 죄인된 모든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1) 양손과 양 발에 못박히는 고통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 발에 큰 못을 박아 수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금방 숨이 끊어지면 차라리 고통을 오래 받지 않지만, 급소를 찌르는 것이 아니므로 오랫 동안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체중으로 인해 몸이 아래로 처지므로 양손과 양 발에 그 고통이 더욱 가중되니 십자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오직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2) 뜨거운 햇볕에 여러 시간 매달려 있어야 하는 고통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사막지대의 햇볕을 받으며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피곤과 갈증과 굶주림 가운데 수 시간 매달려 물과 피를 쏟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3) 온갖 조롱과 말할 수 없는 크나큰 고통
마태복음 27:29-30에 보면 "가시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 의해 온갖 핍박과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온갖 핍박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한 벌레 떼까지 피 냄새를 맡고 와서 상처와 못박힌 곳을 핥는 등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으셨지요.
이사야 53:6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했습니다. 아무 흠도 점도 없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저주받은 사람만이 매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더욱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