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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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제47과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눅 22:39~44
읽을말씀 : 눅 22:39~44 | 외울말씀 : 눅 22:44
교육목표 :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통해 올바른 기도 자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모습
오늘은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신 기도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기도의 자세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 7:7)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혹은 해결받아야 할 문제가 있을 때라야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선지자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으며(단 6:10),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행 3:1).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하게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중심이 바로 서게 되고 상대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라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으며 솔로몬 왕도(왕상 8:54), 사도 바울도(행 20:36),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행 7:60)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육의 부모나 이 세상의 권세있는 자 앞에 무엇을 구할 때에도 행여 실수하지 않을까 삼가는데 하물며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어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자세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기도할 때에는 당연히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도 보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잘못 구한 것이 되므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2-3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신 것이니 혹여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잘못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4)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4에 보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하여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밤이면 기온이 낮아 땀이 날 수 없는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힘쓰고 애써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셨는가를 마음에 양식삼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
1) 중심을 바쳐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에는 야곱이 얍복 강을 앞에 두고 외삼촌 라반과의 약속으로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형 에서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한 야곱은 이제까지 자신을 의지하였던 교만과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고 환도뼈가 부러지는 절박한 기도를 함으로써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를 잡으러 온 형 에서와 화목하게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불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렸던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한 중심의 기도를 함으로써 3년 반 동안 타는 가뭄 끝에 큰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왕상 18:41-45). 이처럼 간절한 중심의 기도라야 하나님을 감동시켜 즉시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2)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내 생각이 끊기므로 잡념이나 피곤, 졸음이 틈탈 수 없어 중심을 바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살려냈고(왕상 17:17-24), 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도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살아났으며(욘 2:2),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시며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8:1-8).
이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므로 땀 흘려 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인데 시끄럽게 부르짖어 구해야 주시는가? 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는데 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음으로 외부와 차단되듯 우리의 모든 생각과 잡념, 세상 근심 걱정도 끊어 버리고 마음의 중심을 모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골방에 들어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밤에 철야하셨고(눅 6:12) 다니엘 선지자는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으며(단 6:10) 베드로도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행 10:9). 이처럼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해야 공중 권세 잡은 원수 마귀의 진을 뚫고 하늘 보좌로 상달되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3)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음을 열면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되는데 이때에는 겨자씨만한 적은 믿음입니다. 차츰 주일성수와 기도를 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고 힘쓰게 되면 믿음이 자라게 되지만 믿음의 반석에 서기 전까지는 시험 환난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낙심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반석에 서게 되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도하게 되지요.
이렇게 기도를 점점 쌓아가다 보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받아 죄를 싸워 버림으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게 되고 주님의 뜻을 밝히 알아 그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되니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습니다.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기 스스로 갖는 "육적인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갖는 믿음은 행함과 일치되지 않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믿음으로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기도해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믿어지는 산 믿음을 주십니다. 내가 가진 육적인 믿음을 하나님께 내보이면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영적인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즉시 응답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는 말씀처럼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함으로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4) 사랑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기에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고 하늘나라에 상급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결코 기도하는 것이 피곤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리 없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에 서서 그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똑같이 여기고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한다면 나의 집을 세우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한다면 환자의 입장이 되어 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양 사랑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기도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에 비추어 자신의 기도 자세와 마음 중심을 점검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통해 올바른 기도 자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모습
오늘은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신 기도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기도의 자세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 7:7)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혹은 해결받아야 할 문제가 있을 때라야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선지자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으며(단 6:10),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행 3:1).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하게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중심이 바로 서게 되고 상대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라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으며 솔로몬 왕도(왕상 8:54), 사도 바울도(행 20:36),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행 7:60)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육의 부모나 이 세상의 권세있는 자 앞에 무엇을 구할 때에도 행여 실수하지 않을까 삼가는데 하물며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어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자세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기도할 때에는 당연히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도 보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잘못 구한 것이 되므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2-3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신 것이니 혹여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잘못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4)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4에 보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하여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밤이면 기온이 낮아 땀이 날 수 없는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힘쓰고 애써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셨는가를 마음에 양식삼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
1) 중심을 바쳐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에는 야곱이 얍복 강을 앞에 두고 외삼촌 라반과의 약속으로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형 에서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한 야곱은 이제까지 자신을 의지하였던 교만과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고 환도뼈가 부러지는 절박한 기도를 함으로써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를 잡으러 온 형 에서와 화목하게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불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렸던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한 중심의 기도를 함으로써 3년 반 동안 타는 가뭄 끝에 큰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왕상 18:41-45). 이처럼 간절한 중심의 기도라야 하나님을 감동시켜 즉시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2)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내 생각이 끊기므로 잡념이나 피곤, 졸음이 틈탈 수 없어 중심을 바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살려냈고(왕상 17:17-24), 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도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살아났으며(욘 2:2),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시며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8:1-8).
이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므로 땀 흘려 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인데 시끄럽게 부르짖어 구해야 주시는가? 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는데 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음으로 외부와 차단되듯 우리의 모든 생각과 잡념, 세상 근심 걱정도 끊어 버리고 마음의 중심을 모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골방에 들어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밤에 철야하셨고(눅 6:12) 다니엘 선지자는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으며(단 6:10) 베드로도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행 10:9). 이처럼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해야 공중 권세 잡은 원수 마귀의 진을 뚫고 하늘 보좌로 상달되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3)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음을 열면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되는데 이때에는 겨자씨만한 적은 믿음입니다. 차츰 주일성수와 기도를 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고 힘쓰게 되면 믿음이 자라게 되지만 믿음의 반석에 서기 전까지는 시험 환난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낙심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반석에 서게 되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도하게 되지요.
이렇게 기도를 점점 쌓아가다 보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받아 죄를 싸워 버림으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게 되고 주님의 뜻을 밝히 알아 그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되니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습니다.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기 스스로 갖는 "육적인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갖는 믿음은 행함과 일치되지 않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믿음으로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기도해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믿어지는 산 믿음을 주십니다. 내가 가진 육적인 믿음을 하나님께 내보이면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영적인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즉시 응답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는 말씀처럼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함으로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4) 사랑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기에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고 하늘나라에 상급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결코 기도하는 것이 피곤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리 없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에 서서 그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똑같이 여기고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한다면 나의 집을 세우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한다면 환자의 입장이 되어 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양 사랑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기도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에 비추어 자신의 기도 자세와 마음 중심을 점검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2008-11-14
제46과추수감사제
출 23:14~17
읽을말씀 : 출 23:14~17 | 외울말씀 : 출 23:16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2008-11-07
제45과사람의 본분을 찾자
전 12:13-14
읽을말씀 : 전 12:13-14 | 외울말씀 : 전 12:13
교육목표 :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아 어떻게 해야 사람의 본분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본다.
1. 사람의 본분이란?
요즈음 신문을 보노라면 참으로 불법이 성하여지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고 정욕을 좇아 살아감으로 짐승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지요.
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살아 계셔서 모든 행위를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4-16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의 본분을 행하며 빛된 생활을 하여, 사랑이 식어지고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으셨기 때문에 거룩하고 온전하였습니다. 거짓이 없이 깨끗하고 온유하였으며 진실함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만물의 영장이었습니다(창 1:27-28).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람답게 살던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자 죄가 들어왔고, 죄의 삯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창 2:17, 롬 6:23). 여기서 사망이란 사람의 주인된 영이 죽게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죽은 영을 살려 주시고 사람의 본분을 찾게 해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모든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죽은 영이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사람의 본분을 행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분이란 무엇일까요? 전도서 12:13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전 12:14)이심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해 아래서 정욕을 좇아 행하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요,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무익한 것임을 깨달아(전 2:11)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성경 66권 말씀대로 살아가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면
1) 하나님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밝히 안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어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여러 가지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밝히 안다면 사람의 본분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밝히 알지 못하면 큰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없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적으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셔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인형과 같이 예쁘기만 하거나 로봇과 같이 순종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좇아 순종하는 하나님의 참자녀를 원하셨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창 1:26-2:17).
세월이 지난 후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창 3:1-13). 우리는 불순종하여 멸망의 길을 가게 된 아담을 통하여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 동산에 두셔야 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고 계시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부모의 기를 받아 여러 가지 악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자라나면서 비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므로 점점 더 악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면 차츰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시험과 환난이 찾아와도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먹으나 입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하나님의 참자녀를 원하셨기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그러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2) 자기 자신을 개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밝히 알고 인생의 목표를 깨달았다면 자기 자신을 열심히 개간하여야 사람의 본분을 지킬 수 있습니다. 농부가 많은 열매를 거두려면 묵은 밭을 열심히 개간하여 돌은 골라내고 흙을 부수어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어 주는 작업이 있어야 사람의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개조시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결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러운 마음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고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의 마음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꿔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고, 고린도전서 6:9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셨으니 아무리 교회에 다니는 자라 할지라도 마음밭을 개간하여 거룩한 삶을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요일 1:5-8).
또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명령하셨으니(벧전 1:16, 살전 5:22, 마 23:26) 열심히 죄를 벗어 버리고 성령의 9가지 열매(갈 5:22-23), 사랑장(고전 13장), 팔복(마 5:1-12)이 임하도록 자신의 마음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빌 2:5-8, 벧후 1:4)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함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위치가 있으며 그 위치에 따른 삶이 있으므로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야 하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인정받도록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각각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지요.
이와 같이 육적으로 맡겨진 사명 외에 영적으로 맡겨진 일도 충실히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이기를 힘쓰며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기뻐하며 감사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구역장, 인도자, 기관장 등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아무리 작은 일이 맡겨졌다 할지라도 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을 찾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을 밝히 알아야 하고, 둘째로 자기 자신의 마음밭을 개간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셋째로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의 본분을 지켜 행함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영혼 구원에 힘쓰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아 어떻게 해야 사람의 본분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본다.
1. 사람의 본분이란?
요즈음 신문을 보노라면 참으로 불법이 성하여지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고 정욕을 좇아 살아감으로 짐승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지요.
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살아 계셔서 모든 행위를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4-16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의 본분을 행하며 빛된 생활을 하여, 사랑이 식어지고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으셨기 때문에 거룩하고 온전하였습니다. 거짓이 없이 깨끗하고 온유하였으며 진실함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만물의 영장이었습니다(창 1:27-28).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람답게 살던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자 죄가 들어왔고, 죄의 삯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창 2:17, 롬 6:23). 여기서 사망이란 사람의 주인된 영이 죽게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죽은 영을 살려 주시고 사람의 본분을 찾게 해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모든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죽은 영이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사람의 본분을 행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분이란 무엇일까요? 전도서 12:13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전 12:14)이심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해 아래서 정욕을 좇아 행하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요,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무익한 것임을 깨달아(전 2:11)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성경 66권 말씀대로 살아가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면
1) 하나님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밝히 안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어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여러 가지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밝히 안다면 사람의 본분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밝히 알지 못하면 큰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없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적으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셔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인형과 같이 예쁘기만 하거나 로봇과 같이 순종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좇아 순종하는 하나님의 참자녀를 원하셨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창 1:26-2:17).
세월이 지난 후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창 3:1-13). 우리는 불순종하여 멸망의 길을 가게 된 아담을 통하여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 동산에 두셔야 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고 계시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부모의 기를 받아 여러 가지 악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자라나면서 비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므로 점점 더 악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면 차츰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시험과 환난이 찾아와도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먹으나 입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하나님의 참자녀를 원하셨기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그러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2) 자기 자신을 개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밝히 알고 인생의 목표를 깨달았다면 자기 자신을 열심히 개간하여야 사람의 본분을 지킬 수 있습니다. 농부가 많은 열매를 거두려면 묵은 밭을 열심히 개간하여 돌은 골라내고 흙을 부수어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어 주는 작업이 있어야 사람의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개조시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결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러운 마음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고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의 마음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꿔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고, 고린도전서 6:9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셨으니 아무리 교회에 다니는 자라 할지라도 마음밭을 개간하여 거룩한 삶을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요일 1:5-8).
또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명령하셨으니(벧전 1:16, 살전 5:22, 마 23:26) 열심히 죄를 벗어 버리고 성령의 9가지 열매(갈 5:22-23), 사랑장(고전 13장), 팔복(마 5:1-12)이 임하도록 자신의 마음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빌 2:5-8, 벧후 1:4)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함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위치가 있으며 그 위치에 따른 삶이 있으므로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야 하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인정받도록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각각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지요.
이와 같이 육적으로 맡겨진 사명 외에 영적으로 맡겨진 일도 충실히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이기를 힘쓰며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기뻐하며 감사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구역장, 인도자, 기관장 등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아무리 작은 일이 맡겨졌다 할지라도 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을 찾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을 밝히 알아야 하고, 둘째로 자기 자신의 마음밭을 개간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셋째로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의 본분을 지켜 행함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영혼 구원에 힘쓰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08-10-31
제44과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0~12
읽을말씀 : 계 22:10~12 | 외울말씀 : 계 22:12
교육목표 :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물질의 축복,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임하는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도 구원받을 수 있는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구원의 도리를 알고 행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요?
1)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0:9, 10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마음에 믿어져야 재림도 믿어지고(행 1:11) 천국도 믿어지며(요 14:1~3) 구원의 확신이 오게 됩니다.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며,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2) 행함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며(약 2: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 있으면 입술로 시인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친 만큼 말씀대로 살아가는 행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행함 있는 믿음을 내보인만큼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성령으로 마음 안에 인쳐 주십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받고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로워져야 구원에 이르며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 충성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6:4~6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고 타락한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으리라 생각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의를 이루어 온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야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물질의 축복은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영권을 인정하여 주일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영적 축복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물권을 인정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물질로 심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23:23에는 '의와 인과 신을 갖추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고, 말라기 3:9~12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둘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면 오히려 물질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십일조를 드린 성도들에게 축복을 주시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심겨져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처럼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물질의 축복이 임하게 하시고 시험 환난을 막아 주셔서 물질이 낭비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뿐 아니라 감사예물이나 절기예물도 기뻐 받으시고 넘치는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고후 9:6~8, 갈 6:7~9). 열왕기상 17:8~16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는 오랜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선지자 엘리야에게 대접하여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통에 밀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를 대접한 것에도 이렇게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행한 대로 갚아 주시지 않겠으며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믿음이 있다면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은 물론, 각종 예물을 열심히 심어서 마음껏 물질의 축복을 받아 나갈 수 있습니다.
3. 하늘나라의 상급은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행함은 믿음에 따라 각기 다른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느냐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상을 받으면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므로 자신에게 영광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집니다. 하물며 선과 의와 사랑만 있는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는다면 얼마나 빛나고 값지겠습니까. 더구나 성결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되지요.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고 성결을 이루며 하늘나라에 상급을 많이 쌓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 돌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영혼 구원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앞에 힘껏 감사예물과 건축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만난 간증과 변화된 거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이웃에게 칭송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고 밤낮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죽도록 충성했고, 모세 선지자 또한 애굽 왕자의 직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히 11:24-25). 이들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있었기에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충성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으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그러니 우리도 천국 소망 가운데 온전히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충성하고 헌신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상급을 많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혹자는 '영혼 구원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이라면 주의 종들은 온전히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으니 상급이 참으로 많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영혼 구원에 힘쓰되 세상에서 녹을 받고 일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녹을 받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상급이 되지 않습니다.
주의 종들에게 상급이 되는 것은 맡겨진 일 이상으로 희생하고 봉사하여 많은 일을 감당하며 양 떼를 잘 갈무리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을 때 상급이 되지요. 즉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넘치게 행해야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의 설교라 할지라도 능력이 다르므로 주의 종들은 불같은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아야 하며 그 능력 가운데 일할 때 많은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을 다했다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기본적인 본분이므로 상급이 되지 않지요.
성도의 본분 외에 교사나 부장, 성가대, 기관장, 안내위원, 헌금위원 등 충성하는 것들이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모은 물질로 당연히 드려야 할 십일조, 감사예물 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 드릴 때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하고 교회와 주의 종을 섬기며 각 분야에서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누가 알아주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충성할 때 하늘나라 상급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지켜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에서도 충성 봉사함으로 하늘나라에 상급을 많이 쌓으시길 바랍니다.
교육목표 :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물질의 축복,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임하는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도 구원받을 수 있는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구원의 도리를 알고 행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요?
1)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0:9, 10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마음에 믿어져야 재림도 믿어지고(행 1:11) 천국도 믿어지며(요 14:1~3) 구원의 확신이 오게 됩니다.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며,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2) 행함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며(약 2: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 있으면 입술로 시인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친 만큼 말씀대로 살아가는 행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행함 있는 믿음을 내보인만큼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성령으로 마음 안에 인쳐 주십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받고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로워져야 구원에 이르며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 충성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6:4~6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고 타락한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으리라 생각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의를 이루어 온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야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물질의 축복은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영권을 인정하여 주일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영적 축복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물권을 인정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물질로 심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23:23에는 '의와 인과 신을 갖추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고, 말라기 3:9~12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둘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면 오히려 물질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십일조를 드린 성도들에게 축복을 주시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심겨져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처럼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물질의 축복이 임하게 하시고 시험 환난을 막아 주셔서 물질이 낭비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뿐 아니라 감사예물이나 절기예물도 기뻐 받으시고 넘치는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고후 9:6~8, 갈 6:7~9). 열왕기상 17:8~16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는 오랜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선지자 엘리야에게 대접하여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통에 밀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를 대접한 것에도 이렇게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행한 대로 갚아 주시지 않겠으며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믿음이 있다면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은 물론, 각종 예물을 열심히 심어서 마음껏 물질의 축복을 받아 나갈 수 있습니다.
3. 하늘나라의 상급은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행함은 믿음에 따라 각기 다른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느냐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상을 받으면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므로 자신에게 영광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집니다. 하물며 선과 의와 사랑만 있는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는다면 얼마나 빛나고 값지겠습니까. 더구나 성결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되지요.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고 성결을 이루며 하늘나라에 상급을 많이 쌓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 돌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영혼 구원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앞에 힘껏 감사예물과 건축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만난 간증과 변화된 거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이웃에게 칭송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고 밤낮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죽도록 충성했고, 모세 선지자 또한 애굽 왕자의 직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히 11:24-25). 이들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있었기에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충성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으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그러니 우리도 천국 소망 가운데 온전히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충성하고 헌신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상급을 많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혹자는 '영혼 구원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이라면 주의 종들은 온전히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으니 상급이 참으로 많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영혼 구원에 힘쓰되 세상에서 녹을 받고 일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녹을 받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상급이 되지 않습니다.
주의 종들에게 상급이 되는 것은 맡겨진 일 이상으로 희생하고 봉사하여 많은 일을 감당하며 양 떼를 잘 갈무리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을 때 상급이 되지요. 즉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넘치게 행해야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의 설교라 할지라도 능력이 다르므로 주의 종들은 불같은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아야 하며 그 능력 가운데 일할 때 많은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을 다했다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기본적인 본분이므로 상급이 되지 않지요.
성도의 본분 외에 교사나 부장, 성가대, 기관장, 안내위원, 헌금위원 등 충성하는 것들이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모은 물질로 당연히 드려야 할 십일조, 감사예물 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 드릴 때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하고 교회와 주의 종을 섬기며 각 분야에서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누가 알아주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충성할 때 하늘나라 상급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지켜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에서도 충성 봉사함으로 하늘나라에 상급을 많이 쌓으시길 바랍니다.
2008-10-24
제43과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마 13:31-32, 요일 2:12-14
읽을말씀 : 마 13:31-32, 요일 2:12-14 | 외울말씀 : 마 11:12
교육목표 : 아비의 믿음을 소유하여 가장 좋은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겨자씨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많은 비유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중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는데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알려 주시기 위해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천국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겨자씨는 겨우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은 것만큼 매우 작은 씨로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믿음을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씨를 심지 않고 그대로 두면 말라 생명력을 잃게 되므로 씨를 심고 싹이 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설명하면,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진리의 말씀을 양식 삼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씨를 심고 싹이 나게 되면 나무로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세상을 좇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나무가 되면 그늘이 생기게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쉼을 얻고 둥지를 틀고 깃들이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며 또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고 기도함으로 큰 믿음을 가졌을 때 많은 영혼이 와서 충만함을 얻고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성장하는 것이므로 마태복음 17:20에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이것이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믿음이 되면 산을 명하여 옮기라 하여도 옮길 만큼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졌다면 과연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요? 여호수아도 처음에는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으나 40년간 모세와 함께하며 모세의 믿음을 보고 또 친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성을 돌았고, 순종했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와 달에게 멈추라고 명하였을 때 해와 달이 그 운행을 멈추었으니(수 10:12-13)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이렇게 나무가 성장하듯 믿음도 성장 과정이 있음을 깨달아 큰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후부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천국은 믿음으로 소유하는 것이요, 침노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왜 침노를 당하는 것일까요? 천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공의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믿음으로 소유하게 하시되 이 땅에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즉 이 땅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천국의 처소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했을 뿐 행한 것이 없는 사람과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과는 엄연히 상급이 다르기 때문에 천국의 처소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같은 한국일지라도 서울특별시나 경기도가 다르고 군이나 면이 다르듯이 천국에서도 분명히 처소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한 편 강도가 죽음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들어간 낙원(눅 23:43)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계 21장) 등 거할 곳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6천 리가 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온 집에 충성한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천국은 아무리 외곽 지역이라 할지라도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갈수록 그 아름다움과 행복이 더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기 다른 천국을 소유하게 되므로 보다 좋은 처소를 얻기 위해서는 침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요, 침노하는 사람이 빼앗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어떻게 천국을 침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게 되면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지만 열심히 심고 가꾸면서 더욱 큰 믿음을 소유하여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복종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2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하신 대로 구원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땅 속에 심지 않으면 곧 말라 새가 날아와서 먹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고 가만히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마저도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사모하고 꿀보다 더 달게 여기며(시 19:10) 항상 복종하여 온전히 진리 안에 거해야 행함 있는 믿음이 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원수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해야 합니다. 또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엡 6:10-18). 우리가 얼마나 전신갑주를 취하고 믿음으로 싸워 이겼느냐에 따라 마음의 성결을 이루는 것과 믿음의 분량이 달라지므로 천국에서 거하는 처소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3)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소망이 있어야 천국을 바라보고 진리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이 있어야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으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 사랑이 없으면 새예루살렘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셨으니(고전 13:13) 사랑을 좇아 천국을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사랑을 이루는 정도에 따라 처소도 달라지게 됩니다.
4. 믿음의 분량에 따른 천국의 처소
천국을 침노해 나가면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지는 천국의 처소가 달라집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뿐 아니라 구원받은 강도가 들어가는 낙원도 있으므로 크게 5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자녀들의 믿음
요한일서 2:12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이때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낙원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2) 아이들의 믿음
요한일서 2:14을 보면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아이들이 자라나서 부모를 알게 되듯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단계의 믿음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심겨져 이제 겨우 싹이 난 상태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이란 영적으로 젖먹는 신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1천층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3) 청년들의 믿음
요한일서 2:13을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악한 자를 이기며 진리 안에 거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청년들이란 영적으로 밥먹는 신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에게는 2천층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4) 아비들의 믿음
요한일서 2:14을 보면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이 성숙된 단계이므로 아버지에 대하여 알되 태초부터 해서 그 근본을 아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그대로 깨달음이 오고 영감으로 깨우쳐지는 단계의 믿음입니다. 이들은 큰 나무로 성장한 성결된 성도들로서 3천층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요, 더 나아가 온 집에 충성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는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다른 여러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무서워 도망갔지만 성령을 받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장성하여 큰 믿음이 되니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밝히 깨닫고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아비의 믿음을 소유하여 가장 좋은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겨자씨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많은 비유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중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는데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알려 주시기 위해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천국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겨자씨는 겨우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은 것만큼 매우 작은 씨로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믿음을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씨를 심지 않고 그대로 두면 말라 생명력을 잃게 되므로 씨를 심고 싹이 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설명하면,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진리의 말씀을 양식 삼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씨를 심고 싹이 나게 되면 나무로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세상을 좇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나무가 되면 그늘이 생기게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쉼을 얻고 둥지를 틀고 깃들이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며 또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고 기도함으로 큰 믿음을 가졌을 때 많은 영혼이 와서 충만함을 얻고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성장하는 것이므로 마태복음 17:20에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이것이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믿음이 되면 산을 명하여 옮기라 하여도 옮길 만큼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졌다면 과연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요? 여호수아도 처음에는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으나 40년간 모세와 함께하며 모세의 믿음을 보고 또 친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성을 돌았고, 순종했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와 달에게 멈추라고 명하였을 때 해와 달이 그 운행을 멈추었으니(수 10:12-13)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이렇게 나무가 성장하듯 믿음도 성장 과정이 있음을 깨달아 큰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후부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천국은 믿음으로 소유하는 것이요, 침노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왜 침노를 당하는 것일까요? 천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공의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믿음으로 소유하게 하시되 이 땅에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즉 이 땅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천국의 처소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했을 뿐 행한 것이 없는 사람과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과는 엄연히 상급이 다르기 때문에 천국의 처소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같은 한국일지라도 서울특별시나 경기도가 다르고 군이나 면이 다르듯이 천국에서도 분명히 처소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한 편 강도가 죽음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들어간 낙원(눅 23:43)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계 21장) 등 거할 곳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6천 리가 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온 집에 충성한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천국은 아무리 외곽 지역이라 할지라도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갈수록 그 아름다움과 행복이 더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기 다른 천국을 소유하게 되므로 보다 좋은 처소를 얻기 위해서는 침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요, 침노하는 사람이 빼앗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어떻게 천국을 침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게 되면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지만 열심히 심고 가꾸면서 더욱 큰 믿음을 소유하여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복종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2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하신 대로 구원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땅 속에 심지 않으면 곧 말라 새가 날아와서 먹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고 가만히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마저도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사모하고 꿀보다 더 달게 여기며(시 19:10) 항상 복종하여 온전히 진리 안에 거해야 행함 있는 믿음이 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원수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해야 합니다. 또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엡 6:10-18). 우리가 얼마나 전신갑주를 취하고 믿음으로 싸워 이겼느냐에 따라 마음의 성결을 이루는 것과 믿음의 분량이 달라지므로 천국에서 거하는 처소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3)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소망이 있어야 천국을 바라보고 진리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이 있어야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으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 사랑이 없으면 새예루살렘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셨으니(고전 13:13) 사랑을 좇아 천국을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사랑을 이루는 정도에 따라 처소도 달라지게 됩니다.
4. 믿음의 분량에 따른 천국의 처소
천국을 침노해 나가면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지는 천국의 처소가 달라집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뿐 아니라 구원받은 강도가 들어가는 낙원도 있으므로 크게 5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자녀들의 믿음
요한일서 2:12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이때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낙원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2) 아이들의 믿음
요한일서 2:14을 보면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아이들이 자라나서 부모를 알게 되듯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단계의 믿음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심겨져 이제 겨우 싹이 난 상태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이란 영적으로 젖먹는 신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1천층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3) 청년들의 믿음
요한일서 2:13을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악한 자를 이기며 진리 안에 거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청년들이란 영적으로 밥먹는 신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에게는 2천층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4) 아비들의 믿음
요한일서 2:14을 보면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이 성숙된 단계이므로 아버지에 대하여 알되 태초부터 해서 그 근본을 아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그대로 깨달음이 오고 영감으로 깨우쳐지는 단계의 믿음입니다. 이들은 큰 나무로 성장한 성결된 성도들로서 3천층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요, 더 나아가 온 집에 충성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에게는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다른 여러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무서워 도망갔지만 성령을 받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장성하여 큰 믿음이 되니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밝히 깨닫고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008-10-17
제42과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사도 바울
딤후 4:7-8
읽을말씀 : 딤후 4:7-8 | 외울말씀 : 행 20:24
교육목표 :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사도 바울의 출생과 하나님의 부르심
바울은 헬라어로 '작은 자'란 뜻이지만, 사도 바울은 대사도로서 기독교사에 우뚝 솟아난 거봉이 되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당시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율법의 교육을 받았습니다(행 22:3).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그리스도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빌 3:5-6). 당시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로마의 시민권도 갖고 있었습니다(행 22:26-28).
그가 당시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영웅, 곧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철저한 유대교였던 사울은 많은 사람이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 한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라고 추종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지휘하는 관권을 받아 옥에 가두고 죽일 때 찬성표를 던졌습니다(행 26:1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고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울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갈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강한 빛이 비취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셨지요. 사울은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난 후,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지난 날을 회개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사도 바울의 고난과 소망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 곳곳에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선교의 기반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이루기까지 원수 마귀 사단의 많은 방해를 받았으므로 그 길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8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 중에 여러 번 매를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고(고후 11:23
감옥에도 수없이 갇혔습니다. 이러한 연단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더욱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하늘의 소망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2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자칫하면 교만하게 할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연단을 통하여 마음의 할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날마다 죽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행 14:11)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로마서 2:28-29을 보면 마음의 할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란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첫 언약으로 난 지 팔일 된 남자 아이의 성기 끝을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창 17:10). 하나님께서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 곧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진리에 어긋난 비진리를 버리고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며(고전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고 하면서 온전한 구원을 위해 근신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의 형상을 이룬 그는 담대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고백할 정도로 사랑이 넘쳐났고 천국의 소망이 있었기에 어떤 핍박이 닥쳐와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았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행 20:24). 그러므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변치 않고 믿으며 천국 소망 가운데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육목표 :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사도 바울의 출생과 하나님의 부르심
바울은 헬라어로 '작은 자'란 뜻이지만, 사도 바울은 대사도로서 기독교사에 우뚝 솟아난 거봉이 되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당시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율법의 교육을 받았습니다(행 22:3).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그리스도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빌 3:5-6). 당시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로마의 시민권도 갖고 있었습니다(행 22:26-28).
그가 당시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영웅, 곧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철저한 유대교였던 사울은 많은 사람이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 한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라고 추종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지휘하는 관권을 받아 옥에 가두고 죽일 때 찬성표를 던졌습니다(행 26:1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고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울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갈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강한 빛이 비취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셨지요. 사울은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난 후,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지난 날을 회개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사도 바울의 고난과 소망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 곳곳에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선교의 기반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이루기까지 원수 마귀 사단의 많은 방해를 받았으므로 그 길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8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 중에 여러 번 매를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고(고후 11:23
감옥에도 수없이 갇혔습니다. 이러한 연단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더욱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하늘의 소망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2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자칫하면 교만하게 할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연단을 통하여 마음의 할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날마다 죽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행 14:11)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로마서 2:28-29을 보면 마음의 할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란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첫 언약으로 난 지 팔일 된 남자 아이의 성기 끝을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창 17:10). 하나님께서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 곧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진리에 어긋난 비진리를 버리고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며(고전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고 하면서 온전한 구원을 위해 근신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의 형상을 이룬 그는 담대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고백할 정도로 사랑이 넘쳐났고 천국의 소망이 있었기에 어떤 핍박이 닥쳐와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았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행 20:24). 그러므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변치 않고 믿으며 천국 소망 가운데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8-10-10
제41과온 집에 충성한 모세
히 11:23-27, 출 32:31-32
읽을말씀 : 히 11:23-27, 출 32:31-32 | 외울말씀 : 히 11:6
교육목표 : 모세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과 연단에 대해 알아보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게 한다.
1. 모세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할 때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은 모두 칠십 명이었습니다(출 1:5). 그런데 이들이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나 매우 강대해지니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은 후 애굽에 새로 즉위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학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지니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하수에 던져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때 레위 족속 중의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한 아이를 낳아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상자 안에 아이를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띄워 두고 이 아이의 누이를 시켜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마침 목욕하러 나온 공주가 이 아이를 발견하여 왕궁으로 데려가 양자로 키웠는데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구하여 젖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다행히 이 아이의 생모가 유모가 되었고, 공주는 이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 하였습니다. 모세(Moses)는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으로 레위 지파에 속하는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이며 미리암과 아론의 아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예지하셨기 때문에 애굽 왕궁에서 최고의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성장하게 했습니다. 또 생모의 젖을 먹으며 자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과 그의 조상에 대해서도 알게 하셨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충분히 갖출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장성한 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고역을 당하며 애굽 사람들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핍박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이 일이 탄로 나자 결국 모세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모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2. 모세의 40년 연단과 하나님의 부르심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미디안 땅에 들어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목동을 하였는데 당시 목동은 애굽 사람들이 가장 천히 여기는 직업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연단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도록 섭리하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간의 연단을 통해 애굽의 왕궁에서 배운 모든 생활 습관과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것들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온순한 양들을 보살피며 양치기의 생활을 하는 동안 불같았던 성격과 혈기를 버리고 양치기에 필요한 인내도 생기면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도 받게 되었습니다(민 12:3).
모세가 마음을 낮은 곳에 두고 양을 섬기는 연단을 통해서 육체의 일들을 버리며 성결해 가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3:1-4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고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출 3:7-10).
그러면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당연히 나무가 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의 불이 사라지지 않은 채 나무도 타지 않는 것은 분명히 기이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타고 있는 불꽃을 통해 변치 않고 썩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영과 육이 다름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알려 주며 살아 계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나타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부터 떨기나무는 저주를 상징하기도 하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은 저주받은 떨기나무를 주관하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 세상의 모든 원수 마귀 사단이 굴복하고 있음을 영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40년간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3.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모세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80세의 나이로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에서 구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출 12:37)이었으니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 등을 합치면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을 출애굽시켜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가나안 땅까지 인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왕의 강퍅함으로 인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영적 믿음이 연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곧잘 모세에게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며 돌로 치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보살피며, 불평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주기도 하셨고,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햇볕을 막아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 지방의 찬 기운을 녹여 주시며, 갖가지 기사와 표적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들어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출 32:9-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삼겠다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 32:11-13)라고 간구하여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게 하였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통해하며 사랑으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모세는 이렇게 백성의 죄악을 슬퍼하며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세를 어찌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4. 온 집에 충성한 모세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인정과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자 하나님의 진노가 즉시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6-8) 말씀하시고 그 들을 떠나시니 곧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여 미리암이 문둥병을 치료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은 모세가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었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모든 고충은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이루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체험하고도 그의 능력을 믿지 못하여 수시로 불평하며 불순종했지만, 모세는 그래도 그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모세가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좇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종으로서 천국에 대해 밝히 알며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도에서 낙담치 않고 끝까지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24-27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과정을 통해 모세를 믿는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계명을 지키며 말씀대로 순종하면 가나안 땅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 또한 많은 것을 체험했어도 불평하거나 불순종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자신을 희생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모세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과 연단에 대해 알아보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게 한다.
1. 모세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할 때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은 모두 칠십 명이었습니다(출 1:5). 그런데 이들이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나 매우 강대해지니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은 후 애굽에 새로 즉위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학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지니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하수에 던져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때 레위 족속 중의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한 아이를 낳아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상자 안에 아이를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띄워 두고 이 아이의 누이를 시켜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마침 목욕하러 나온 공주가 이 아이를 발견하여 왕궁으로 데려가 양자로 키웠는데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구하여 젖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다행히 이 아이의 생모가 유모가 되었고, 공주는 이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 하였습니다. 모세(Moses)는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으로 레위 지파에 속하는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이며 미리암과 아론의 아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예지하셨기 때문에 애굽 왕궁에서 최고의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성장하게 했습니다. 또 생모의 젖을 먹으며 자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과 그의 조상에 대해서도 알게 하셨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충분히 갖출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장성한 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고역을 당하며 애굽 사람들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핍박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이 일이 탄로 나자 결국 모세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모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2. 모세의 40년 연단과 하나님의 부르심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미디안 땅에 들어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목동을 하였는데 당시 목동은 애굽 사람들이 가장 천히 여기는 직업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연단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도록 섭리하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간의 연단을 통해 애굽의 왕궁에서 배운 모든 생활 습관과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것들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온순한 양들을 보살피며 양치기의 생활을 하는 동안 불같았던 성격과 혈기를 버리고 양치기에 필요한 인내도 생기면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도 받게 되었습니다(민 12:3).
모세가 마음을 낮은 곳에 두고 양을 섬기는 연단을 통해서 육체의 일들을 버리며 성결해 가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3:1-4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고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출 3:7-10).
그러면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당연히 나무가 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의 불이 사라지지 않은 채 나무도 타지 않는 것은 분명히 기이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타고 있는 불꽃을 통해 변치 않고 썩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영과 육이 다름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알려 주며 살아 계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나타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부터 떨기나무는 저주를 상징하기도 하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은 저주받은 떨기나무를 주관하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 세상의 모든 원수 마귀 사단이 굴복하고 있음을 영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40년간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3.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모세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80세의 나이로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에서 구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출 12:37)이었으니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 등을 합치면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을 출애굽시켜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가나안 땅까지 인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왕의 강퍅함으로 인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영적 믿음이 연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곧잘 모세에게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며 돌로 치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보살피며, 불평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주기도 하셨고,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햇볕을 막아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 지방의 찬 기운을 녹여 주시며, 갖가지 기사와 표적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들어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출 32:9-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삼겠다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 32:11-13)라고 간구하여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게 하였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통해하며 사랑으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모세는 이렇게 백성의 죄악을 슬퍼하며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세를 어찌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4. 온 집에 충성한 모세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인정과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자 하나님의 진노가 즉시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6-8) 말씀하시고 그 들을 떠나시니 곧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여 미리암이 문둥병을 치료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은 모세가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었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모든 고충은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이루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체험하고도 그의 능력을 믿지 못하여 수시로 불평하며 불순종했지만, 모세는 그래도 그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모세가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좇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종으로서 천국에 대해 밝히 알며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도에서 낙담치 않고 끝까지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24-27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과정을 통해 모세를 믿는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계명을 지키며 말씀대로 순종하면 가나안 땅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 또한 많은 것을 체험했어도 불평하거나 불순종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자신을 희생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8-10-03
제40과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읽을말씀 : 요 21:15~17 | 외울말씀 : 요 21:15
교육목표 :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생명의 양식을 먹이고 사랑과 섬김으로 헌신하는 영의 일꾼이 되게 한다.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시몬에게 질문하신 것이지만 모든 교회의 주의 종과 일꾼들에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말씀하셨으니 시몬은 히브리어로 게바요, 헬라어로는 베드로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6:13~19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니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답변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축복하셨으니 베드로는 영적으로 "반석"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4에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하여 반석이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은 베드로요, 베드로는 반석이며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선 모든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많은 주의 종들과 일꾼들에게 물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처럼 시몬을 부르셨을까요?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중 수제자였으므로 예수님 당시부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종들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담대히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하였지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베드로처럼 담대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혹자는 베드로가 전에 주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고라고 말하지만 사랑의 주님께서는 이미 회개하고 돌이킨 일로 상대의 마음을 찌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12:30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어 참된 주인은 영혼이며 육은 영혼이 거하는 장막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육을 낳아 준 부모보다 영혼을 낳아 준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고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고, 잠언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여 주님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사랑을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부탁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혹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셨으니 어린 양은 초신자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인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양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레위기에는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 곳곳에 나오는데 어린 양은 화목제물로 오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1~11에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어린 양을 취하여 불에 구워 먹으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린 양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51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말씀했고, 요한복음 6:53, 54에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먹는다는 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한다는 것이요,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 부탁하신 것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곳곳에 전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인자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소유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4. 내 양을 치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두 번째로 부탁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도하며 죄를 싸워 버리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꾼이 되는데 이때 주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5:2, 3을 보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양이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고 기도하여 진리 가운데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나 그 외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교회라는 특정한 건물이나 양 떼가 없었으므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양 떼를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를 세워 양 무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면서 정성껏 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목회활동을 하는 주의 종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장로, 집사, 교사 등의 직분을 받아 양 무리를 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함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넘어진 양 떼를 일으켜 주고 치료해 주는 등 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과 의욕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양을 치는 것입니다.
5.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시자 시몬 베드로는 근심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을 들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한 것은 어떤 악한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양을 먹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양을 치는 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병들고 상한 양을 치료해 주어 튼튼한 양으로 만들고, 길 잃은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바로 서지 못하고 당을 짓고 시기 질투를 일삼는 등 목자를 시험하는 양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생명의 양식을 먹임으로 순한 양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는 넉넉히 감당할 줄 믿고 불같은 기도를 하며 시험 환난이 와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양 무리를 인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큰 부흥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하고 튼튼한 양으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양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양을 열심히 먹이면 성장하여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니 우리도 더욱 겸손과 섬김으로 양을 먹이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생명의 양식을 먹이고 사랑과 섬김으로 헌신하는 영의 일꾼이 되게 한다.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시몬에게 질문하신 것이지만 모든 교회의 주의 종과 일꾼들에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말씀하셨으니 시몬은 히브리어로 게바요, 헬라어로는 베드로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6:13~19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니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답변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축복하셨으니 베드로는 영적으로 "반석"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4에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하여 반석이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은 베드로요, 베드로는 반석이며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선 모든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많은 주의 종들과 일꾼들에게 물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처럼 시몬을 부르셨을까요?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중 수제자였으므로 예수님 당시부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종들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담대히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하였지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베드로처럼 담대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혹자는 베드로가 전에 주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고라고 말하지만 사랑의 주님께서는 이미 회개하고 돌이킨 일로 상대의 마음을 찌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12:30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어 참된 주인은 영혼이며 육은 영혼이 거하는 장막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육을 낳아 준 부모보다 영혼을 낳아 준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고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고, 잠언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여 주님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사랑을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부탁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혹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셨으니 어린 양은 초신자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인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양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레위기에는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 곳곳에 나오는데 어린 양은 화목제물로 오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1~11에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어린 양을 취하여 불에 구워 먹으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린 양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51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말씀했고, 요한복음 6:53, 54에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먹는다는 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한다는 것이요,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 부탁하신 것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곳곳에 전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인자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소유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4. 내 양을 치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두 번째로 부탁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도하며 죄를 싸워 버리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꾼이 되는데 이때 주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5:2, 3을 보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양이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고 기도하여 진리 가운데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나 그 외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교회라는 특정한 건물이나 양 떼가 없었으므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양 떼를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를 세워 양 무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면서 정성껏 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목회활동을 하는 주의 종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장로, 집사, 교사 등의 직분을 받아 양 무리를 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함으로 영혼을 사랑하며 넘어진 양 떼를 일으켜 주고 치료해 주는 등 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과 의욕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양을 치는 것입니다.
5.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시자 시몬 베드로는 근심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을 들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한 것은 어떤 악한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양을 먹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양을 치는 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병들고 상한 양을 치료해 주어 튼튼한 양으로 만들고, 길 잃은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바로 서지 못하고 당을 짓고 시기 질투를 일삼는 등 목자를 시험하는 양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생명의 양식을 먹임으로 순한 양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는 넉넉히 감당할 줄 믿고 불같은 기도를 하며 시험 환난이 와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양 무리를 인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큰 부흥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하고 튼튼한 양으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양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양을 열심히 먹이면 성장하여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니 우리도 더욱 겸손과 섬김으로 양을 먹이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08-09-26
제39과죽어지는 밀알이 되자
요 12:24~26
읽을말씀 : 요 12:24~26 | 외울말씀 : 요 12:24
교육목표 : 예수님처럼 죽어지는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죽어지는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를 맺는 과정을 살펴보면 씨앗은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어져 모든 부분을 양분으로 내어줍니다. 그래서 비록 자기 형체는 없어진다 할지라도 새 생명체를 탄생시켜 많은 열매를 맺지요. 반면 싹이 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어도 씨앗이 스스로 죽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영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셨을까요?
이사야 53:5~9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피조물에게 수욕을 당하시고 많은 고초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 모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지고 철저히 죽어지실 수 있었던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무수한 영혼을 구원할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던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기쁨을 뜻합니다. 또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 선진들도 이런 하늘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철저히 죽어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철저히 죽어지고 비록 부끄러움을 당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2. 죽어지는 밀알이 되려면
첫째로, 자신에게 있어서 자아가 죽어져야 합니다.
왜 '자기'가 먼저 죽어져야 할까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형제, 학교, 친구, 이웃 등 다양한 환경을 통해 보고 듣고 경험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아 갑니다. 이렇게 쌓은 지식과 교양이 자아를 형성하게 되지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 형성된 것들은 대부분 비진리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두드리게 됩니다. 자신이 마음 문을 여는 만큼 진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게 되며 그때부터 죄와의 싸움이 시작되지요.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의 자아를 형성했던 것은 진리인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거기서부터 부딪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이론보다 하나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며 자기를 부인할 때 자기가 죽어지기 시작하지요. 즉 말씀에 위배되는 내 생각과 이론이 발견되면 그것을 벗고 진리로 변화시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4에 마음의 비진리를 벗는 죄와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지요. 비진리는 대충 회개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땀 흘리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벗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불세례를 내려 죄성을 태우시기도 하고 죄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 있던 죄의 속성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가게 되지요. 이렇게 몸과 결합된 죄성이 태워지는 만큼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밀알이 죽어질 때 그 속의 내용물이 양분으로 공급되고 껍질도 썩어 없어지듯이 자아를 형성하는 내용물이 진리로 바뀌고 자아라는 틀 자체도 없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입력되어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은 다 구습이므로 이것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진리로 채워야지요. 그래서 중심에서 "나는 없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비로소 영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가정에서 죽어져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믿음으로 교회에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 사람이 교회에 나가면서 점차 복음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고, 고린도전서 7:14에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하셨습니다. 아내가 희생하고 잘 섬겨서 남편을 구원시키면 남편도 진리 따라 거룩해지고 남편도 믿지 않은 아내한테 잘하면 진리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족복음화를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키포인트는 처음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가정에서 어떻게 죽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가족복음화를 이루려면 천국 복음과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을 가지고 항상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전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신뢰를 받아야 하지요.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보므로 믿지 않을 때와 다름없이 본은 되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복음을 전한다면 신뢰할 수 없지요. 반면 가족이 보기에도 "교회 다니더니 착해졌다. 부지런해졌다."고 인정한다면 그만큼 전도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가정에서 죽어지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자신의 '구습'을 벗어버릴 때 가족들은 그 변화를 금세 느낍니다(엡 4:22). 구습이란 하나님을 만나기 전 '옛 사람'일 때 자신의 몸에 배인 좋지 않은 습관이지요. 예를 들어, 자라온 환경 속에서 욕이 일상의 말이 되었거나 혈기가 많아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쉽게 손찌검을 합니다. 또 자기 방이 아무리 지저분해도 어머니가 정리할 때까지 둔다든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고 난 후에 이불을 개키지 않고, 옷은 벗은 채로 내버려 두는 것들이지요. 이 외에도 좋지 않은 구습들을 벗어버림으로 가족 안에서 섬기고 죽어진다면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 안에서 죽어져야 합니다.
성도는 혈육으로 맺어진 형제보다 더 가까운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함께 할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의 허물을 들추어내며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형제로서의 도리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고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며 좋은 점은 칭찬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7:9에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상대의 허물을 볼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상대를 지적하거나 허물을 전하며 상대 때문에 피해를 입었을 때는 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얼마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는지는 화평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자기 틀을 고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기가 어렵습니다. 틀이라는 것은 딱딱하여 부딪치기 마련이고 부딪치면 소리가 나니 화평이 깨지지요. 가령 누구와는 잘 지내는데 누구와는 불편하다면 진정으로 화평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잘해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러지 못한 사람과도 모두 화평을 이룰 수 있어야지요. 또한 상하 관계 속에서 질서를 따라 순종과 섬김으로 화평을 좇았는지, 소속된 곳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죽어지는 밀알과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화평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화평을 좇는 사람을 통해 열매를 맺으십니다.
넷째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지요(행 1:8). 이처럼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때 하나님 나라가 크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도 많은 사랑의 수고가 따릅니다. 그들에게 착한 행실로 빛을 비춰야 그들이 빛이신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해야 합니다. 전도된 영혼을 갈무리하는 데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가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영혼들이 영적 믿음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그저 가지고만 있다면 열매를 남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주님의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전도와 영혼 갈무리하는 일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지요.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고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원한다면 이후로도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또 영으로 이끌어 들이심으로 하늘의 해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교육목표 : 예수님처럼 죽어지는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죽어지는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를 맺는 과정을 살펴보면 씨앗은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어져 모든 부분을 양분으로 내어줍니다. 그래서 비록 자기 형체는 없어진다 할지라도 새 생명체를 탄생시켜 많은 열매를 맺지요. 반면 싹이 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어도 씨앗이 스스로 죽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영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셨을까요?
이사야 53:5~9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피조물에게 수욕을 당하시고 많은 고초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 모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지고 철저히 죽어지실 수 있었던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무수한 영혼을 구원할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던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기쁨을 뜻합니다. 또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 선진들도 이런 하늘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철저히 죽어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철저히 죽어지고 비록 부끄러움을 당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2. 죽어지는 밀알이 되려면
첫째로, 자신에게 있어서 자아가 죽어져야 합니다.
왜 '자기'가 먼저 죽어져야 할까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형제, 학교, 친구, 이웃 등 다양한 환경을 통해 보고 듣고 경험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아 갑니다. 이렇게 쌓은 지식과 교양이 자아를 형성하게 되지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 형성된 것들은 대부분 비진리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두드리게 됩니다. 자신이 마음 문을 여는 만큼 진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게 되며 그때부터 죄와의 싸움이 시작되지요.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의 자아를 형성했던 것은 진리인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거기서부터 부딪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이론보다 하나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며 자기를 부인할 때 자기가 죽어지기 시작하지요. 즉 말씀에 위배되는 내 생각과 이론이 발견되면 그것을 벗고 진리로 변화시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4에 마음의 비진리를 벗는 죄와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지요. 비진리는 대충 회개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땀 흘리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벗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불세례를 내려 죄성을 태우시기도 하고 죄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 있던 죄의 속성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가게 되지요. 이렇게 몸과 결합된 죄성이 태워지는 만큼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밀알이 죽어질 때 그 속의 내용물이 양분으로 공급되고 껍질도 썩어 없어지듯이 자아를 형성하는 내용물이 진리로 바뀌고 자아라는 틀 자체도 없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입력되어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은 다 구습이므로 이것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진리로 채워야지요. 그래서 중심에서 "나는 없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비로소 영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가정에서 죽어져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믿음으로 교회에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 사람이 교회에 나가면서 점차 복음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고, 고린도전서 7:14에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하셨습니다. 아내가 희생하고 잘 섬겨서 남편을 구원시키면 남편도 진리 따라 거룩해지고 남편도 믿지 않은 아내한테 잘하면 진리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족복음화를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키포인트는 처음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가정에서 어떻게 죽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가족복음화를 이루려면 천국 복음과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을 가지고 항상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전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신뢰를 받아야 하지요.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보므로 믿지 않을 때와 다름없이 본은 되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복음을 전한다면 신뢰할 수 없지요. 반면 가족이 보기에도 "교회 다니더니 착해졌다. 부지런해졌다."고 인정한다면 그만큼 전도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가정에서 죽어지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자신의 '구습'을 벗어버릴 때 가족들은 그 변화를 금세 느낍니다(엡 4:22). 구습이란 하나님을 만나기 전 '옛 사람'일 때 자신의 몸에 배인 좋지 않은 습관이지요. 예를 들어, 자라온 환경 속에서 욕이 일상의 말이 되었거나 혈기가 많아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쉽게 손찌검을 합니다. 또 자기 방이 아무리 지저분해도 어머니가 정리할 때까지 둔다든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고 난 후에 이불을 개키지 않고, 옷은 벗은 채로 내버려 두는 것들이지요. 이 외에도 좋지 않은 구습들을 벗어버림으로 가족 안에서 섬기고 죽어진다면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 안에서 죽어져야 합니다.
성도는 혈육으로 맺어진 형제보다 더 가까운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함께 할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의 허물을 들추어내며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형제로서의 도리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고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며 좋은 점은 칭찬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7:9에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상대의 허물을 볼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상대를 지적하거나 허물을 전하며 상대 때문에 피해를 입었을 때는 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얼마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는지는 화평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자기 틀을 고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기가 어렵습니다. 틀이라는 것은 딱딱하여 부딪치기 마련이고 부딪치면 소리가 나니 화평이 깨지지요. 가령 누구와는 잘 지내는데 누구와는 불편하다면 진정으로 화평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잘해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러지 못한 사람과도 모두 화평을 이룰 수 있어야지요. 또한 상하 관계 속에서 질서를 따라 순종과 섬김으로 화평을 좇았는지, 소속된 곳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죽어지는 밀알과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화평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화평을 좇는 사람을 통해 열매를 맺으십니다.
넷째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지요(행 1:8). 이처럼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때 하나님 나라가 크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도 많은 사랑의 수고가 따릅니다. 그들에게 착한 행실로 빛을 비춰야 그들이 빛이신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해야 합니다. 전도된 영혼을 갈무리하는 데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가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영혼들이 영적 믿음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그저 가지고만 있다면 열매를 남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주님의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전도와 영혼 갈무리하는 일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지요.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고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원한다면 이후로도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또 영으로 이끌어 들이심으로 하늘의 해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2008-09-19
제38과열 므나 비유
눅 19:11~27
읽을말씀 : 눅 19:11~27 | 외울말씀 : 눅 19:26
교육목표 :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적인 장사를 잘하여 성결을 온전히 이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한다.
흔히 열 므나 비유를 달란트 비유와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각각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재능을 가지고 얼마나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주님께 인정받는 척도가 달라집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육적인 재능뿐 아니라 영적 달란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지요. 그러면 열 므나 비유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열 므나 비유를 통해 구원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본문 11절에 "저희가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다는 것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의 도를 완성할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적인 권세를 가진 메시아가 되어 줄 것을 기대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께서는 열 므나 비유를 통해 진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눅 19:12)
그러면 열 므나 비유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했습니다. '귀인'이란 귀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십자가를 지기 전으로 구세주로서 왕위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귀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므나'는 은을 계수하는 단위이지만 여기서는 성령을 뜻합니다. 귀인이 먼 나라로 갈 때에 종들에게 므나를 나눠 준 것처럼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얼마 후 성령이 오셨지요. 열 므나를 한 사람이 한 므나씩 똑같이 받았듯이 믿는 사람들은 동일하게 한 성령을 받습니다. 가령 달란트는 영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을 수 있지만 므나는 성령이므로 하나밖에 받을 수 없지요.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천국에 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 가셔서 왕위를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님이 성령을 주신 후에 왕위를 가지러 천국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왕위를 받으신 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지요.
그러면 왜 귀인이 므나를 준 다음에 왕위를 가지러 먼 나라로 갔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왕위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왕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주님은 부활하셔서 왕위를 이미 얻으셨지만 성령받은 하나님 자녀는 이 세상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왕위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 경작을 받으며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해 가는 중이지요. 주님이 공중 강림하시고 우리가 영체로 홀연히 변화될 때 비로소 영혼과 몸까지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령으로 장사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등 육적인 것을 말합니다. 육에 속한 것을 팔아 버리는 만큼 좋은 마음 밭이 되며 무엇을 심든지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또한 영으로 일군 만큼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안에 있는 육을 팔아 영의 좋은 마음이 되는 것이 영적 장사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에 가심으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은 하나님 자녀들이 영적인 장사를 잘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죄성과 육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눅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이 어떻게 장사했는지 묻습니다. 한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기니 잘했다고 칭찬하시며 열 고을 차지하는 권세를 줍니다. 또 다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기니 칭찬은 하시지 않고 다섯 고을만 차지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달란트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주님께서 동일하게 칭찬하였습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최선을 다해 갑절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것과 다섯 므나를 남긴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성령을 받아 육체의 일, 육신의 일을 다 벗고 온전히 성결을 이루었으므로 주님께서 칭찬하시며 열 고을을 주신 것입니다. 열 고을은 땅의 지경으로 온전히 성결을 이룬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3천층을 말합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은 3천층 안 새예루살렘에 들어가지요. 그리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는 것은 그가 50% 이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3단계 즉 2천층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므나를 남긴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주의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나이다" 합니다. 그는 아예 장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이 엄한 사람이라 무서워서 그랬다고 변명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고 책망하시지요. 이런 사람은 성령을 받고도 죄를 싸워 버리지 않고 육체의 일, 육신의 일을 여전히 행하는 악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환난이 오면 하나님이 치셨다고 하지요. 이것이 한 므나를 받았으되 장사는 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주님께서는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시며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한 므나를 받아 열 므나를 만든 사람 즉 성령을 받고 죄를 온전히 버린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며 어찌하면 주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까 하기 때문에 열심 내어 달려가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죄를 지적하는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말씀이 찔림이 되어 반발을 일으킵니다. '또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구나!' 하며 판단하며 불편해지지요. 이렇게 성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기 악 속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가면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히브리서 6장 4~6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하셨지요.
누가복음 19장 27절에는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영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한 대로 영이 죽게 된 것과 같지요. 즉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한 장사를 하지 않으면 받았던 성령까지 빼앗겨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원치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죽임을 당하는데 바로 영적 사망의 형벌을 받아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바로 알아야 될 것은 이들이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원치 않았기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원래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도 구원받게 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들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총을 입은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사하며 열 므나 이상을 남기기까지 성령으로 열심히 장사하시길 바랍니다.
교육목표 :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적인 장사를 잘하여 성결을 온전히 이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한다.
흔히 열 므나 비유를 달란트 비유와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각각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재능을 가지고 얼마나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주님께 인정받는 척도가 달라집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육적인 재능뿐 아니라 영적 달란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지요. 그러면 열 므나 비유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열 므나 비유를 통해 구원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본문 11절에 "저희가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다는 것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의 도를 완성할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적인 권세를 가진 메시아가 되어 줄 것을 기대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께서는 열 므나 비유를 통해 진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눅 19:12)
그러면 열 므나 비유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했습니다. '귀인'이란 귀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십자가를 지기 전으로 구세주로서 왕위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귀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므나'는 은을 계수하는 단위이지만 여기서는 성령을 뜻합니다. 귀인이 먼 나라로 갈 때에 종들에게 므나를 나눠 준 것처럼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얼마 후 성령이 오셨지요. 열 므나를 한 사람이 한 므나씩 똑같이 받았듯이 믿는 사람들은 동일하게 한 성령을 받습니다. 가령 달란트는 영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을 수 있지만 므나는 성령이므로 하나밖에 받을 수 없지요.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천국에 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 가셔서 왕위를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님이 성령을 주신 후에 왕위를 가지러 천국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왕위를 받으신 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지요.
그러면 왜 귀인이 므나를 준 다음에 왕위를 가지러 먼 나라로 갔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왕위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왕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주님은 부활하셔서 왕위를 이미 얻으셨지만 성령받은 하나님 자녀는 이 세상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왕위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 경작을 받으며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해 가는 중이지요. 주님이 공중 강림하시고 우리가 영체로 홀연히 변화될 때 비로소 영혼과 몸까지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령으로 장사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등 육적인 것을 말합니다. 육에 속한 것을 팔아 버리는 만큼 좋은 마음 밭이 되며 무엇을 심든지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또한 영으로 일군 만큼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안에 있는 육을 팔아 영의 좋은 마음이 되는 것이 영적 장사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에 가심으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은 하나님 자녀들이 영적인 장사를 잘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죄성과 육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눅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이 어떻게 장사했는지 묻습니다. 한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기니 잘했다고 칭찬하시며 열 고을 차지하는 권세를 줍니다. 또 다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기니 칭찬은 하시지 않고 다섯 고을만 차지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달란트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주님께서 동일하게 칭찬하였습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최선을 다해 갑절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것과 다섯 므나를 남긴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성령을 받아 육체의 일, 육신의 일을 다 벗고 온전히 성결을 이루었으므로 주님께서 칭찬하시며 열 고을을 주신 것입니다. 열 고을은 땅의 지경으로 온전히 성결을 이룬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3천층을 말합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은 3천층 안 새예루살렘에 들어가지요. 그리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는 것은 그가 50% 이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3단계 즉 2천층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므나를 남긴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주의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나이다" 합니다. 그는 아예 장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이 엄한 사람이라 무서워서 그랬다고 변명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고 책망하시지요. 이런 사람은 성령을 받고도 죄를 싸워 버리지 않고 육체의 일, 육신의 일을 여전히 행하는 악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환난이 오면 하나님이 치셨다고 하지요. 이것이 한 므나를 받았으되 장사는 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주님께서는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시며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한 므나를 받아 열 므나를 만든 사람 즉 성령을 받고 죄를 온전히 버린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며 어찌하면 주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까 하기 때문에 열심 내어 달려가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죄를 지적하는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말씀이 찔림이 되어 반발을 일으킵니다. '또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구나!' 하며 판단하며 불편해지지요. 이렇게 성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기 악 속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가면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히브리서 6장 4~6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하셨지요.
누가복음 19장 27절에는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영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한 대로 영이 죽게 된 것과 같지요. 즉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한 장사를 하지 않으면 받았던 성령까지 빼앗겨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원치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죽임을 당하는데 바로 영적 사망의 형벌을 받아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바로 알아야 될 것은 이들이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원치 않았기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원래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도 구원받게 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들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총을 입은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사하며 열 므나 이상을 남기기까지 성령으로 열심히 장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