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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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3
제47과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3)
계 3:7~13
읽을말씀 : 계 3:7~13 | 외울말씀 : 계 3:11 ㅣ 참고 말씀:히 10:37, 약 5: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재림의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임을 알려 준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첫 번째 기준은 '성도들을 구원받게 하는 교회'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며 그 구원이 계속 유지되도록 합니다. 두 번째 기준은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서 성결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교회'라 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죄성까지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장성한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인도해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세 번째 기준은 무엇일까요?
1. 재림의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
사도행전 1장 11절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십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버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열심히 신부단장에 힘쓴 성도들을 아름다운 천국에 들이시기 위해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여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십니다. 그 후에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성도들과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며 마음껏 주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성도들은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기록된 서신서들을 보면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재림의 주님을 기다린다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 성경은 서기 100년 전에 기록되었는데도 '재림의 주님을 준비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에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말씀했고,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는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오늘날은 초대교회가 세워진 후 약 2천 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말하면 세상 사람은 물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시한부 종말론'을 거론하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시한부종말론'과 '종말론'은 엄연히 다르지요. 시한부 종말론은 "주님이 언제 오신다더라." 하며 때를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집착된 신앙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몇 년, 몇 월, 며칠에 오신다고 하면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건전한 종말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언제 오신다" 정해 놓고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이 언제 내 영혼을 불러 가시든지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건전한 '종말론'이 이 마지막 때에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공부하라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그런데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수능 시험도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시험과 상관없이 공부가 좋아서 하는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리 많지 않지요. 시험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하기 싫은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시험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하듯이 우리 신앙생활도 종말론이 있기 때문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할 중에 하나는 성도들이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지만 깨어 있어 그때를 준비하도록 종말론을 선포하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2.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주님이 언제 오시든 상관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성도들의 신앙은 어떠할까요? 우리 교회는 당회장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자세히 증거해 주심으로 경각심을 가지고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척 때부터 마지막 때에 대해 많은 예언을 하셨는데, 그중 유럽연합(EU)에 대해 살펴보지요. 마지막 때가 되면 유럽연합의 화폐가 통합되고 국경의 의미가 없어지며, 헌법이 단일화되고 한 대통령을 뽑을 것이며, 세계를 지배할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이 초대 대통령을 선출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혹 어떤 분은 "요즘 유럽연합을 보니까 하나가 안 되던데요?"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개국이 넘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하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순풍에 돛 단 듯이 유럽연합(EU)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온건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그러나 7년 환난에 대한 성경 말씀을 보면 유럽연합은 온건파가 아니라 강경파가 득세하지요. 즉 강력한 독재정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쿠데타는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사회 통합이 안 될 때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일어나지요.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이 통합해야 하는데 자꾸 걸림돌이 생깁니다. 그러니 점점 강경파가 득세하여 나중에 강력한 독재정부가 등장하게 되고, 마침내 7년 환난을 지배하는 정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가 안 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예언하신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 마지막 때 하나하나 성취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가 확연히 보이는데도 어떤 사람은 그 징조가 더 가까이 다가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고 합니다. 가나안성전에 들어가서, 대성전이 보이면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요. 그 사람이 정말로 그때가 가까우면 잘할까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벼락공부도 웬만큼 공부를 한 사람이 합니다.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벼락치기도 못하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져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지금도 하지 않는 기도를 막상 그때 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히려 마음만 조급해지고 더 안 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 처녀 모두 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알고 신랑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름 준비는 다섯 사람밖에 하지 않았지요. 다른 다섯 사람이 신랑 오신다고 하니까 순간에 기름이 준비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름을 준비해 왔을 때는 이미 혼인 잔치의 문은 닫히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내세를 준비하고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삶을 살자고 하니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고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는 본연의 사명을 게을리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3. 건전한 종말론으로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
가령, 결혼을 앞둔 신부가 집과 가재도구를 구입해 놓고 매일 그곳에 가서 쓸고 닦고 깨끗이 청소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은 매우 지저분합니다. 부모님이 "시집가기 전에 방 청소도 하고 요리도 좀 배우라."고 하는데도 "그때 가서 하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 없이 예비 신랑이 신부의 집을 찾아왔는데, 엉망진창인 광경을 목도하고 말지요. 그때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규모 없이 아무렇게나 산다면 예비 신부와 다를 바 없지요. '현재가 바로 나의 미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에 '미래는 미래에 가서 준비하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루, 이틀 … 계속 노력하며 시간을 투자할 때 그것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학생들이 "시험이 닥치면 그때 공부하죠."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영어 단어 하나 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노력하다 보면 마침내 암기한 단어가 두 개, 열 개, 백 개가 되어 영어를 잘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기도도 "가나안성전에 들어가서 잘하면 되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중심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는 훈련을 쌓아야 하지요.
사단이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가 "내일부터 잘할게요."라고 합니다. 건전한 종말론을 가지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온 집에 충성하며 오늘도 열심히 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야고보서 5:8 ② 계시록 3:11 ③ 히브리서 10:37 ④ 마태복음 5:39
2. 시한부 종말론과 성경상에 나타난 건전한 종말론의 차이점을 말해 보시오.
3.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유럽연합(EU)'이란?
EC의 새로운 명칭이며, 27개국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정치·경제 공동체를 말한다.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1993년 11월 1일 발효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라 유럽 12개국이 참가하여 출범한 연합기구이다. 회원국으로는 벨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 불가리아, 루마니아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재림의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임을 알려 준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첫 번째 기준은 '성도들을 구원받게 하는 교회'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며 그 구원이 계속 유지되도록 합니다. 두 번째 기준은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서 성결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교회'라 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죄성까지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장성한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인도해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세 번째 기준은 무엇일까요?
1. 재림의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
사도행전 1장 11절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십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버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열심히 신부단장에 힘쓴 성도들을 아름다운 천국에 들이시기 위해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여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십니다. 그 후에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성도들과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며 마음껏 주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성도들은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기록된 서신서들을 보면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재림의 주님을 기다린다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 성경은 서기 100년 전에 기록되었는데도 '재림의 주님을 준비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에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말씀했고,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는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오늘날은 초대교회가 세워진 후 약 2천 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말하면 세상 사람은 물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시한부 종말론'을 거론하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시한부종말론'과 '종말론'은 엄연히 다르지요. 시한부 종말론은 "주님이 언제 오신다더라." 하며 때를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집착된 신앙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몇 년, 몇 월, 며칠에 오신다고 하면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건전한 종말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언제 오신다" 정해 놓고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이 언제 내 영혼을 불러 가시든지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건전한 '종말론'이 이 마지막 때에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공부하라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그런데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수능 시험도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시험과 상관없이 공부가 좋아서 하는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리 많지 않지요. 시험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하기 싫은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시험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하듯이 우리 신앙생활도 종말론이 있기 때문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할 중에 하나는 성도들이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지만 깨어 있어 그때를 준비하도록 종말론을 선포하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2.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주님이 언제 오시든 상관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성도들의 신앙은 어떠할까요? 우리 교회는 당회장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자세히 증거해 주심으로 경각심을 가지고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척 때부터 마지막 때에 대해 많은 예언을 하셨는데, 그중 유럽연합(EU)에 대해 살펴보지요. 마지막 때가 되면 유럽연합의 화폐가 통합되고 국경의 의미가 없어지며, 헌법이 단일화되고 한 대통령을 뽑을 것이며, 세계를 지배할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이 초대 대통령을 선출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혹 어떤 분은 "요즘 유럽연합을 보니까 하나가 안 되던데요?"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개국이 넘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하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순풍에 돛 단 듯이 유럽연합(EU)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온건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그러나 7년 환난에 대한 성경 말씀을 보면 유럽연합은 온건파가 아니라 강경파가 득세하지요. 즉 강력한 독재정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쿠데타는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사회 통합이 안 될 때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일어나지요.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이 통합해야 하는데 자꾸 걸림돌이 생깁니다. 그러니 점점 강경파가 득세하여 나중에 강력한 독재정부가 등장하게 되고, 마침내 7년 환난을 지배하는 정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가 안 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예언하신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 마지막 때 하나하나 성취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가 확연히 보이는데도 어떤 사람은 그 징조가 더 가까이 다가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고 합니다. 가나안성전에 들어가서, 대성전이 보이면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요. 그 사람이 정말로 그때가 가까우면 잘할까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벼락공부도 웬만큼 공부를 한 사람이 합니다.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벼락치기도 못하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져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지금도 하지 않는 기도를 막상 그때 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히려 마음만 조급해지고 더 안 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 처녀 모두 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알고 신랑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름 준비는 다섯 사람밖에 하지 않았지요. 다른 다섯 사람이 신랑 오신다고 하니까 순간에 기름이 준비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름을 준비해 왔을 때는 이미 혼인 잔치의 문은 닫히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내세를 준비하고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삶을 살자고 하니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고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는 본연의 사명을 게을리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3. 건전한 종말론으로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
가령, 결혼을 앞둔 신부가 집과 가재도구를 구입해 놓고 매일 그곳에 가서 쓸고 닦고 깨끗이 청소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은 매우 지저분합니다. 부모님이 "시집가기 전에 방 청소도 하고 요리도 좀 배우라."고 하는데도 "그때 가서 하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 없이 예비 신랑이 신부의 집을 찾아왔는데, 엉망진창인 광경을 목도하고 말지요. 그때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규모 없이 아무렇게나 산다면 예비 신부와 다를 바 없지요. '현재가 바로 나의 미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에 '미래는 미래에 가서 준비하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루, 이틀 … 계속 노력하며 시간을 투자할 때 그것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학생들이 "시험이 닥치면 그때 공부하죠."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영어 단어 하나 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노력하다 보면 마침내 암기한 단어가 두 개, 열 개, 백 개가 되어 영어를 잘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기도도 "가나안성전에 들어가서 잘하면 되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중심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는 훈련을 쌓아야 하지요.
사단이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가 "내일부터 잘할게요."라고 합니다. 건전한 종말론을 가지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온 집에 충성하며 오늘도 열심히 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야고보서 5:8 ② 계시록 3:11 ③ 히브리서 10:37 ④ 마태복음 5:39
2. 시한부 종말론과 성경상에 나타난 건전한 종말론의 차이점을 말해 보시오.
3.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유럽연합(EU)'이란?
EC의 새로운 명칭이며, 27개국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정치·경제 공동체를 말한다.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1993년 11월 1일 발효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라 유럽 12개국이 참가하여 출범한 연합기구이다. 회원국으로는 벨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 불가리아, 루마니아이다.
2010-11-26
제47과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
계 3:7~13
읽을말씀 : 계 3:7~13 | 외울말씀 : 엡 4:13 ㅣ 참고 말씀:엡 4:13~15, 시 97:10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곳이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첫째로 '성도들을 구원받게 하는 교회'라고 배웠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영접해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다섯 가지 기준 중 두 번째 기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결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교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 백성이 되어 '저 사람이 또 죄 지어서 사망으로 가지 않을까?' 염려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모가 왜 자녀를 낳겠습니까? 바로 자녀를 낳은 기쁨을 얻을 것을 생각해서이지요.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뒷바라지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경작하면 어떤 고통이 따를 줄 아시지만 그런데도 경작하시는 것은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가 되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말씀합니다. 바로 아는 일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요동합니다. 세상 풍조에, 궤술과 여러 가지 미혹에 빠져들 수가 있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즉 그리스도, 주님의 분량까지 우리의 신앙이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으니까 "이젠 다 됐다."가 아닙니다. 그 이후에 성령을 받으면 시작되는 '죄를 버리는 과정'이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 죄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지어 20년 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사면으로 20년 형은 살지 않았지만 죗값은 대신 치러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나는 살인죄가 없다, 나는 이제 떳떳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있다면 그럴 수가 없지요. '내가 왜 살인을 했던고!'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며 살인했던 마음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에게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며 어떻게든 그 죄를 갚고자 하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 됐다. 마음대로 살자.'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 은혜를 갚는 것인지를 깨닫고, 내 안에 있는 죄성까지도 온전히 뽑아 버려야 하지요.
2. 죄성을 발견하여 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교회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마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그러니 세상과 짝했던 어둠을 벗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구원받은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온전히 뽑혀져 성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 힘으로 버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심으로 죄뿐만 아니라 죄성까지도 버릴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으면 어떤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졌을 때 행함으로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가정, 일터, 사업터, 건강, 자녀 등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죄성을 버리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믿습니다 하면 됩니다. 참고 인내하면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복도 주시고 화도 주십니다."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습니다. 아니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머리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아스피린을 줍니다. 다음 날은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또 아스피린을 줍니다. 그 다음날은 다리가 아파서 갔더니 여전히 아스피린을 줍니다. 이 경우처럼 의사가 원인도 모르고 무조건 아스피린만 주면 되는 것처럼 교회가 무조건 "믿습니다!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아픈지 원인을 알아 거기에 대한 처방을 내려 주어야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냥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 줄 알고, 교회만 다니면 치료받는 줄 알고, 아프면 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고, 본 제단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당회장님께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 주시고 해결받게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 사단한테 시험 환난을 당하지 않고 신속히 성결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죄성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3.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이란?
요즘 현대인들을 보면 웰빙! 웰빙! 하면서 얼마나 음식에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채소도 유기농 채소를 먹고, 과자도 트랜스 지방이 있는지 없는지 꼼꼼히 따집니다. 만약 어느 과자에 몸에 유해한 성분이 첨가되었다고 하면 그 과자는 매장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아직 발현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죄성이 있습니다. "에이, 그거? 아직 뭐 발현된 것도 아닌데?" 하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트랜스 지방을 먹는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몸에 쌓이면 문제가 생기고 죽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사전에 방지하여 건강하게 살려고 하듯이, 죄성도 발현되기 전에 버리면 더 신속히 성결되고 영육 간에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너무너무 싫어하시기 때문에 당회장님께서도 늘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만일 당회장님께서 "여러분 축복 받으세요. 응답받으세요." 하고 늘 듣기에 좋은 말씀만 선포하셨다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했을까요? 어떻게든 죄를 버리려고 했을까요? 육체의 일이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까요? 죄에 대해 지적해 주시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깨우침이 되고 찔림이 되어 어찌하든 버리고자 금식과 기도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때론 마음 졸일 때도 있지만 그 말씀 까닭에 죄를 버리고 성결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7편 10절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나를 사랑하면 '악을 미워하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악이 밉고 악이 너무 싫어서 벗어버리며 변화와 생명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까닭에 그럴까요? 하나님 뜻을 밝히 아시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성결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당회장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을 증거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성을 발견하고 신앙을 자라게 해 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a.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 ) 것과 ( )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 )의 ( )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b.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이 ( )받게 하는 교회이고, 성도들의 ( )이 자라서 ( )된 하나님의 ( )가 되게 하는 곳이다.
2. 아래 성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은 무엇일까요?
① 데살로니가전서 5:22 ② 시편 97:10 ③ 로마서 12:9 ④ 잠언 12:20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즉 믿음의 5단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단계를 지나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뜻을 헤아려 행하는 차원이다. 온 영을 이루고 성령의 열매가 온전히 맺히며 권능을 행할 수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곳이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첫째로 '성도들을 구원받게 하는 교회'라고 배웠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영접해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다섯 가지 기준 중 두 번째 기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결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교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 백성이 되어 '저 사람이 또 죄 지어서 사망으로 가지 않을까?' 염려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모가 왜 자녀를 낳겠습니까? 바로 자녀를 낳은 기쁨을 얻을 것을 생각해서이지요.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뒷바라지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경작하면 어떤 고통이 따를 줄 아시지만 그런데도 경작하시는 것은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가 되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말씀합니다. 바로 아는 일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요동합니다. 세상 풍조에, 궤술과 여러 가지 미혹에 빠져들 수가 있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즉 그리스도, 주님의 분량까지 우리의 신앙이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으니까 "이젠 다 됐다."가 아닙니다. 그 이후에 성령을 받으면 시작되는 '죄를 버리는 과정'이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 죄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지어 20년 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사면으로 20년 형은 살지 않았지만 죗값은 대신 치러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나는 살인죄가 없다, 나는 이제 떳떳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있다면 그럴 수가 없지요. '내가 왜 살인을 했던고!'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며 살인했던 마음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에게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며 어떻게든 그 죄를 갚고자 하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 됐다. 마음대로 살자.'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 은혜를 갚는 것인지를 깨닫고, 내 안에 있는 죄성까지도 온전히 뽑아 버려야 하지요.
2. 죄성을 발견하여 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교회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마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그러니 세상과 짝했던 어둠을 벗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구원받은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온전히 뽑혀져 성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 힘으로 버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심으로 죄뿐만 아니라 죄성까지도 버릴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으면 어떤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졌을 때 행함으로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가정, 일터, 사업터, 건강, 자녀 등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죄성을 버리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믿습니다 하면 됩니다. 참고 인내하면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복도 주시고 화도 주십니다."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습니다. 아니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머리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아스피린을 줍니다. 다음 날은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또 아스피린을 줍니다. 그 다음날은 다리가 아파서 갔더니 여전히 아스피린을 줍니다. 이 경우처럼 의사가 원인도 모르고 무조건 아스피린만 주면 되는 것처럼 교회가 무조건 "믿습니다!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아픈지 원인을 알아 거기에 대한 처방을 내려 주어야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냥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 줄 알고, 교회만 다니면 치료받는 줄 알고, 아프면 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고, 본 제단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당회장님께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 주시고 해결받게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 사단한테 시험 환난을 당하지 않고 신속히 성결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죄성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3.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이란?
요즘 현대인들을 보면 웰빙! 웰빙! 하면서 얼마나 음식에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채소도 유기농 채소를 먹고, 과자도 트랜스 지방이 있는지 없는지 꼼꼼히 따집니다. 만약 어느 과자에 몸에 유해한 성분이 첨가되었다고 하면 그 과자는 매장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아직 발현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죄성이 있습니다. "에이, 그거? 아직 뭐 발현된 것도 아닌데?" 하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트랜스 지방을 먹는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몸에 쌓이면 문제가 생기고 죽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사전에 방지하여 건강하게 살려고 하듯이, 죄성도 발현되기 전에 버리면 더 신속히 성결되고 영육 간에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너무너무 싫어하시기 때문에 당회장님께서도 늘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만일 당회장님께서 "여러분 축복 받으세요. 응답받으세요." 하고 늘 듣기에 좋은 말씀만 선포하셨다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했을까요? 어떻게든 죄를 버리려고 했을까요? 육체의 일이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까요? 죄에 대해 지적해 주시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깨우침이 되고 찔림이 되어 어찌하든 버리고자 금식과 기도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때론 마음 졸일 때도 있지만 그 말씀 까닭에 죄를 버리고 성결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7편 10절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나를 사랑하면 '악을 미워하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악이 밉고 악이 너무 싫어서 벗어버리며 변화와 생명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까닭에 그럴까요? 하나님 뜻을 밝히 아시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성결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당회장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을 증거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성을 발견하고 신앙을 자라게 해 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a.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 ) 것과 ( )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 )의 ( )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b.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이 ( )받게 하는 교회이고, 성도들의 ( )이 자라서 ( )된 하나님의 ( )가 되게 하는 곳이다.
2. 아래 성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은 무엇일까요?
① 데살로니가전서 5:22 ② 시편 97:10 ③ 로마서 12:9 ④ 잠언 12:20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즉 믿음의 5단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단계를 지나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뜻을 헤아려 행하는 차원이다. 온 영을 이루고 성령의 열매가 온전히 맺히며 권능을 행할 수 있다.
2010-11-19
제46과추수감사절
출 23:14~17
읽을말씀 : 출 23:14~17 | 외울말씀 : 출 23:16 l 참고 말씀:레 23:42~43, 신 16:13~17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척박한 세상에서 광야생활을 하며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자녀로 진리에 뿌리내리고 해마다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를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절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대대로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였습니다. 이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게 하셨지요.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이 대대로 지켜온 큰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유월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최고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말씀하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날을 기념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지요. 그날이 곧 아빕월(니산월 -4월) 14일입니다(레 23:5). 유월절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교절이란 어떤 절기일까요? 출애굽기 34장 18절에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심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아빕월(니산월-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지켰지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떡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무교병을 먹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교절을 대신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떠한 절기일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는 그 시점이 유월절 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주가 되기 때문에 칠칠절(7x7)이라 하며, 또 날짜로는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대로 하자면 맥추절은 성령강림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지요. 즉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감사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결실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지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거기서 7일간 거했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보면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초막절(수장절)을 드리면서,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광야생활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에서 유래되었지요(위 수장절 내용 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농사를 마친 후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로 초막을 지어 거기서 7일 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농사지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갔지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 경작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지요. 이것이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의 단을 쌓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갔고, 결국 가장 고통스런 상황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제단을 쌓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심으로 미국을 세계적인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차게 여문 곡식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속에 진리를 가득 채워 주셨지요. 사건 사고 많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고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받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수많은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절기로 즐거운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신 16:13~17). 이때 하나님께서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정성된 예물과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드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a. ( )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낸 다음 안식일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다.
b. ( )이란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 한다.
c.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의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한다.
2. 여러분은 어떤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둘 때 혹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만 당연히 여기지 않으시는지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복합적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칼빈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척박한 세상에서 광야생활을 하며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자녀로 진리에 뿌리내리고 해마다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를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절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대대로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였습니다. 이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게 하셨지요.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이 대대로 지켜온 큰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유월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최고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말씀하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날을 기념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지요. 그날이 곧 아빕월(니산월 -4월) 14일입니다(레 23:5). 유월절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교절이란 어떤 절기일까요? 출애굽기 34장 18절에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심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아빕월(니산월-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지켰지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떡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무교병을 먹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교절을 대신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떠한 절기일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는 그 시점이 유월절 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주가 되기 때문에 칠칠절(7x7)이라 하며, 또 날짜로는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대로 하자면 맥추절은 성령강림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지요. 즉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감사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결실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지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거기서 7일간 거했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보면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초막절(수장절)을 드리면서,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광야생활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에서 유래되었지요(위 수장절 내용 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농사를 마친 후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로 초막을 지어 거기서 7일 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농사지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갔지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 경작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지요. 이것이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의 단을 쌓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갔고, 결국 가장 고통스런 상황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제단을 쌓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심으로 미국을 세계적인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차게 여문 곡식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속에 진리를 가득 채워 주셨지요. 사건 사고 많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고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받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수많은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절기로 즐거운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신 16:13~17). 이때 하나님께서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정성된 예물과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드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a. ( )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낸 다음 안식일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다.
b. ( )이란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 한다.
c.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의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한다.
2. 여러분은 어떤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둘 때 혹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만 당연히 여기지 않으시는지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복합적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칼빈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2010-11-12
제45과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1)
계 3:7~13
읽을말씀 : 계 3:7~13 | 외울말씀 : 계 3:12 ㅣ 참고 말씀:요 3:5, 6:53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이 죄를 버리고 구원받게 하는 교회임을 알려 준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를 말하는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다섯 시간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들이 구원받게 하는 교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성도들이 모인 곳이므로 주님이 머리가 되셔서 함께하십니다(엡 1:22).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다릅니다. 친교를 위해, 또는 좋은 말씀을 듣고자, 교회에 가면 축복받는다니까 나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경우도 교회에 나오는 목적의 하나가 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교회에서 죄에 대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왜 죄가 무서운 것인지, 왜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지, 죄를 왜 벗어 버려야 하는지를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이지요.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암 환자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겉모습만 한 번 쓱 보고는 "집에 가셨다가 다음 주에 오세요."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갔는데 의사가 대충 보고 또 "다음 주에 오세요." 하고 돌려보내지요. 한 달, 두 달, 1년을 병원만 왔다 갔다 하다가 급기야 생명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암인지도 모른 채 병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이제 자신이 암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면 치료하지 못한 병원에 계속 다닐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죄를 지적하여 벗어 버리게 함으로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하며, 왜 죄를 벗어 버려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암 환자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죽는 게 나을까요?
단지 성도들이 싫어한다고 죄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말기 암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고 집에서 쉬다가 삶을 마감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죄에 대한 지적을 등한히 하고 있으므로 구원의 사명에 소홀하지 않은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죄를 지적하여 구원이 유지되도록 하는 교회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함 받았는데, 또 무엇을 회개하고, 자꾸 죄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간암 수술을 마친 환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이제 수술을 받았으니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제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세요."할까요? 그렇지 않지요. "술 담배는 절대 하지 말고, 몸을 무리하면 안 되며,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등 주의와 충고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데서 그 역할이 끝날 것이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도록 해 줘야 합니다. 즉 병원에서 암 환자를 치료했으면 재발되지 않도록 관리해 주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만, 구원을 유지하는 길에 대해서는 제대로 선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령, 부산을 가기 위해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면 목적지인 부산까지 간 것일까요? 아니지요. 한참 가다 보면 샛길도 있고, 다른 데로 빠지는 길도 있지요. 이처럼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지옥으로 빠지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며, 천국 길로만 곧장 가라고 가르쳐 줘야 하지요. 그런데 주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배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길로 간 뒤에 "나는 왜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까?" 하면 교회가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나아가 요한복음 6장 53절에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과정이 있어야 우리 안에 영생이 유지되어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의 살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는다는 뜻합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양식 삼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말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그것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 명절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표를 예매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다 기차를 탈까요? 기차표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바뀌거나 사정이 있어 못 가는 사람도 있지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티켓을 받았다고 무조건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그 티켓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지요. 교회는 다닌다고 하는데 천국행 티켓이 없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또 티켓을 받았어도 세상으로 향한 사람들은 성령을 소멸한 것이지요.
우리는 '구원의 티켓을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구원의 티켓을 잘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우리가 구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도록 누누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3.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는 교회
어느 단체에서 "교회를 선택하시는 첫 번째 기준이 무엇입니까?"라는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대부분 '말씀이 좋은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좋은 교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재밌고 행복한 말씀일까요? 듣기에 편한 말씀일까요? 무엇보다도 죄를 지적하여 구원받게 해 주는 말씀이지요. 먹을 때는 쓰더라도 뱃속에 들어가서는 단 말씀이 증거되어야 말씀이 좋은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증거된 성결의 말씀, 죄에 대한 말씀이 혹여 듣기 힘들다면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해야 하는 말씀이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지금부터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겠습니까?" 하면 환자는 뭐든지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교회도 죄를 버리고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렇게 구원받도록 이끌어 가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후 지금까지 주님께 칭찬만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모델 삼아 이루기 위해 달려 왔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능력 즉 적은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열심히 믿음을 키워 왔듯이, 우리 역시 열심히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에 믿음의 성장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길 능력이 그만큼 적기 때문에 진리를 알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행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믿음이나 행함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오늘날 놀라운 권능을 베풀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만민 위에 뛰어난 제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단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음에 늘 감사드리며,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신앙의 성장을 이룸으로 영으로, 온 영으로 신속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는?
a. 에베소 교회 b. 서머나 교회 c. 버가모 교회 d. 두아디라 교회
e. 사데 교회 f. 빌라델비아 교회 g. 라오디게아 교회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이 구원받게 하는 교회이다.
② 죄를 지적해서 죄를 벗어 버리게 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 알려 주는 게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
③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 후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받는다.
④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 길을 알려 줘야 한다.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로서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믿음을 지켜 말씀대로 행하는 교회를 대표한다. 그래서 모든 축복의 문을 열수 있는 다윗의 열쇠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들을 받았으며 새 예루살렘 성의 기둥이 되는 축복의 언약을 받았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이 죄를 버리고 구원받게 하는 교회임을 알려 준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를 말하는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다섯 시간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들이 구원받게 하는 교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성도들이 모인 곳이므로 주님이 머리가 되셔서 함께하십니다(엡 1:22).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다릅니다. 친교를 위해, 또는 좋은 말씀을 듣고자, 교회에 가면 축복받는다니까 나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경우도 교회에 나오는 목적의 하나가 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교회에서 죄에 대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왜 죄가 무서운 것인지, 왜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지, 죄를 왜 벗어 버려야 하는지를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이지요.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암 환자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겉모습만 한 번 쓱 보고는 "집에 가셨다가 다음 주에 오세요."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갔는데 의사가 대충 보고 또 "다음 주에 오세요." 하고 돌려보내지요. 한 달, 두 달, 1년을 병원만 왔다 갔다 하다가 급기야 생명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암인지도 모른 채 병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이제 자신이 암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면 치료하지 못한 병원에 계속 다닐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죄를 지적하여 벗어 버리게 함으로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하며, 왜 죄를 벗어 버려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암 환자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죽는 게 나을까요?
단지 성도들이 싫어한다고 죄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말기 암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고 집에서 쉬다가 삶을 마감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죄에 대한 지적을 등한히 하고 있으므로 구원의 사명에 소홀하지 않은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죄를 지적하여 구원이 유지되도록 하는 교회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함 받았는데, 또 무엇을 회개하고, 자꾸 죄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간암 수술을 마친 환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이제 수술을 받았으니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제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세요."할까요? 그렇지 않지요. "술 담배는 절대 하지 말고, 몸을 무리하면 안 되며,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등 주의와 충고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데서 그 역할이 끝날 것이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도록 해 줘야 합니다. 즉 병원에서 암 환자를 치료했으면 재발되지 않도록 관리해 주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만, 구원을 유지하는 길에 대해서는 제대로 선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령, 부산을 가기 위해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면 목적지인 부산까지 간 것일까요? 아니지요. 한참 가다 보면 샛길도 있고, 다른 데로 빠지는 길도 있지요. 이처럼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지옥으로 빠지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며, 천국 길로만 곧장 가라고 가르쳐 줘야 하지요. 그런데 주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배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길로 간 뒤에 "나는 왜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까?" 하면 교회가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나아가 요한복음 6장 53절에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과정이 있어야 우리 안에 영생이 유지되어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의 살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는다는 뜻합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양식 삼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말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그것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 명절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표를 예매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다 기차를 탈까요? 기차표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바뀌거나 사정이 있어 못 가는 사람도 있지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티켓을 받았다고 무조건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그 티켓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지요. 교회는 다닌다고 하는데 천국행 티켓이 없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또 티켓을 받았어도 세상으로 향한 사람들은 성령을 소멸한 것이지요.
우리는 '구원의 티켓을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구원의 티켓을 잘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우리가 구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도록 누누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3.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는 교회
어느 단체에서 "교회를 선택하시는 첫 번째 기준이 무엇입니까?"라는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대부분 '말씀이 좋은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좋은 교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재밌고 행복한 말씀일까요? 듣기에 편한 말씀일까요? 무엇보다도 죄를 지적하여 구원받게 해 주는 말씀이지요. 먹을 때는 쓰더라도 뱃속에 들어가서는 단 말씀이 증거되어야 말씀이 좋은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증거된 성결의 말씀, 죄에 대한 말씀이 혹여 듣기 힘들다면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해야 하는 말씀이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지금부터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겠습니까?" 하면 환자는 뭐든지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교회도 죄를 버리고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렇게 구원받도록 이끌어 가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후 지금까지 주님께 칭찬만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모델 삼아 이루기 위해 달려 왔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능력 즉 적은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열심히 믿음을 키워 왔듯이, 우리 역시 열심히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에 믿음의 성장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길 능력이 그만큼 적기 때문에 진리를 알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행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믿음이나 행함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오늘날 놀라운 권능을 베풀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만민 위에 뛰어난 제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단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음에 늘 감사드리며,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신앙의 성장을 이룸으로 영으로, 온 영으로 신속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는?
a. 에베소 교회 b. 서머나 교회 c. 버가모 교회 d. 두아디라 교회
e. 사데 교회 f. 빌라델비아 교회 g. 라오디게아 교회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성도들이 구원받게 하는 교회이다.
② 죄를 지적해서 죄를 벗어 버리게 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 알려 주는 게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
③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 후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받는다.
④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 길을 알려 줘야 한다.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2010. 6. 13 설교) 듣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로서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믿음을 지켜 말씀대로 행하는 교회를 대표한다. 그래서 모든 축복의 문을 열수 있는 다윗의 열쇠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들을 받았으며 새 예루살렘 성의 기둥이 되는 축복의 언약을 받았다.
2010-11-05
제44과엘리야 선 (善) ③
요 3:28~30
읽을말씀 : 요 3:28~30 | 외울말씀 : 요 3:30 ㅣ 참고 말씀:눅 3:15~16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 세례 요한처럼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본분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善)
누가복음 1장 13~17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일러 줍니다. 즉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지요.
그 후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누가복음 2장 49절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갔지요. 즉 '자신이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게 됩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눅 3:16).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하였겠습니까.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런데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지요(요 3:28~30).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없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 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으며,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즉 각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사심이 있어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세례 요한처럼 소중한 그릇이 되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큰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돼야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세례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③ 요한은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하며, 어떤 사심도, 불의도 없었다.
④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져서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다.
2. 어떤 사명을 맡았을 때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며 충성하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듣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는 동정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으로 그들 부부는 모두 율법을 잘 지킨 선한 사람이었다.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 세례 요한처럼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본분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善)
누가복음 1장 13~17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일러 줍니다. 즉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지요.
그 후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누가복음 2장 49절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갔지요. 즉 '자신이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게 됩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눅 3:16).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하였겠습니까.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런데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지요(요 3:28~30).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없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 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으며,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즉 각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사심이 있어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세례 요한처럼 소중한 그릇이 되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큰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돼야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세례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③ 요한은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하며, 어떤 사심도, 불의도 없었다.
④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져서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다.
2. 어떤 사명을 맡았을 때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며 충성하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듣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는 동정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으로 그들 부부는 모두 율법을 잘 지킨 선한 사람이었다.
2010-10-29
제43과엘리야 선 (善) ②
눅 1:17
읽을말씀 : 눅 1:17 | 외울말씀 : 눅 1:17 ㅣ 참고 말씀:말 4:5~6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그리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구약 시대의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을까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善)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심히도 유약한 성품이었던 자신을 큰 권능으로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져 버립니다. 혹여 내 자신이 그렇지 않는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으로는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닌 엘리야를 보십시오.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아합 왕에게 제안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근본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칠 뿐 아니라, 심히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눈앞에 친히 뵙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하였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셨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이때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태아는 부모의 기(氣)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답변하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가라 하셨을 때에 기꺼이 "아멘" 하며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핑계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힘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심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선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엘리야가 신약 시대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닌 것은?
① 누가복음 1:17 ② 누가복음 3:4
③ 마태복음 17:11~13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영이 아닌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다.
② 엘리야는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하면 5개월째에 영을 보내 주신다.
④ 엘리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7)』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바알신'이란?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섬겼던 남성신으로 주(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그리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구약 시대의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을까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善)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심히도 유약한 성품이었던 자신을 큰 권능으로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져 버립니다. 혹여 내 자신이 그렇지 않는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으로는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닌 엘리야를 보십시오.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아합 왕에게 제안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근본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칠 뿐 아니라, 심히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눈앞에 친히 뵙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하였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셨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이때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태아는 부모의 기(氣)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답변하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가라 하셨을 때에 기꺼이 "아멘" 하며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도 핑계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힘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심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선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엘리야가 신약 시대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닌 것은?
① 누가복음 1:17 ② 누가복음 3:4
③ 마태복음 17:11~13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영이 아닌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다.
② 엘리야는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하면 5개월째에 영을 보내 주신다.
④ 엘리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7)』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바알신'이란?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섬겼던 남성신으로 주(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2010-10-22
제42과엘리야 선 (善) ①
왕하 2:11
읽을말씀 : 왕하 2:11 | 외울말씀 : 왕하 2:11 l 참고 말씀:고후 4:7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善)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런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 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를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 왕 앞에 나가 하나님 뜻을 전하지요. 나아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 비가 내렸습니다(약 5:17~18).
이 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그렇다면 엘리야가 어떻게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하나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하나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입니다.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지요.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는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하였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데다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6)』듣거나 읽어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이스라엘에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그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善)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런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 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를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 왕 앞에 나가 하나님 뜻을 전하지요. 나아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 비가 내렸습니다(약 5:17~18).
이 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그렇다면 엘리야가 어떻게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하나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하나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입니다.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지요.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는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하였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데다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6)』듣거나 읽어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이스라엘에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그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010-10-15
제41과아브라함의 선(善) ②
히 11:17~19
읽을말씀 : 히 11:17~19 | 외울말씀 : 히 11:19 ㅣ 참고 말씀:민 23:1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채비를 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러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善)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5년이 지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요.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하여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5)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채비를 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러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善)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5년이 지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요.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하여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5)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2010-10-08
제40과아브라함의 선(善) ①
창 13:8~9
읽을말씀 : 창 13:8~9 | 외울말씀 : 창 13:9 ㅣ 참고 말씀 : 창 14:22~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선이 무엇인지 깨달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며 지극한 선을 느끼며 소유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며 온전히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善)
사람의 마음이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롯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났어도 아브라함은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김으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善)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었으되 하나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런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지요.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백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0절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功)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할 수도 있지요. 이처럼 훗날까지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돌렸기 때문에 그가 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니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야 할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비멜렉이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케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셨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아브라함 선지자의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담겨 있는 성경 구절을 고르시오.
① 창세기 13:9 ② 출애굽기 32:32
③ 창세기 12:1 ④ 창세기 22:12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은?
①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다.
② 자신이 취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취했다.
③ 거저 주겠다는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도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④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늑탈했을 때도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분쟁의 소지가 없게 하였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4)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막벨라 굴이란?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 소유의 땅을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했다. 막벨라 굴이란 그 땅 안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선이 무엇인지 깨달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며 지극한 선을 느끼며 소유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며 온전히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善)
사람의 마음이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롯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났어도 아브라함은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김으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善)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었으되 하나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런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지요.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백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0절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功)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할 수도 있지요. 이처럼 훗날까지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돌렸기 때문에 그가 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니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야 할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비멜렉이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케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셨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아브라함 선지자의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담겨 있는 성경 구절을 고르시오.
① 창세기 13:9 ② 출애굽기 32:32
③ 창세기 12:1 ④ 창세기 22:12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은?
①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다.
② 자신이 취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취했다.
③ 거저 주겠다는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도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④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늑탈했을 때도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분쟁의 소지가 없게 하였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4)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막벨라 굴이란?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 소유의 땅을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했다. 막벨라 굴이란 그 땅 안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2010-10-01
제39과모세의 선(善) ②
민 12:3, 7
읽을말씀 : 민 12:3, 7 | 외울말씀 : 민 12:3 ㅣ 참고 말씀:출 32:31~32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로 일관하는 선(善)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오늘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어떠한 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봐 주며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기만 해도 원망 불평을 쏟아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부르짖던 자신들을 건져 주었는데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그러다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하자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모세가 기도하여 마시게 하자 잠잠해졌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니(출 16:3)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 불평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을 할 기세로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먹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여 진멸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하였는지, 그리고 진정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라고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출 32:32).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백성들이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지요.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영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요.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 등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단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신뢰하시며 큰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놀라운 권능을 나타냈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민망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음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건만 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말씀한 대로 모세는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늘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여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너무 힘이 들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까지 마음 졸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17장 7~8절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모세의 선을 닮아 온유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거목이 되시길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뜨거운 뙤약볕의 광야 ②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것
③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④ 우상
2.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주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찾아 쓰세요.
(출애굽기 장 절)
3. 당회장님의 행함을 통해 자신이 느낀 영혼 사랑을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3)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만나'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작고 둥글며 희고 모양은 깟씨(고수씨-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나물의 종자) 또는 진주처럼 생겼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꿀이나 기름 섞은 과자 맛이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로 일관하는 선(善)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오늘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어떠한 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봐 주며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기만 해도 원망 불평을 쏟아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부르짖던 자신들을 건져 주었는데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그러다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하자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모세가 기도하여 마시게 하자 잠잠해졌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니(출 16:3)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 불평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을 할 기세로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먹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여 진멸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하였는지, 그리고 진정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라고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출 32:32).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백성들이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지요.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영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요.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 등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단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신뢰하시며 큰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놀라운 권능을 나타냈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민망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음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건만 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말씀한 대로 모세는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늘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여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너무 힘이 들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까지 마음 졸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17장 7~8절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모세의 선을 닮아 온유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거목이 되시길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뜨거운 뙤약볕의 광야 ②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것
③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④ 우상
2.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주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찾아 쓰세요.
(출애굽기 장 절)
3. 당회장님의 행함을 통해 자신이 느낀 영혼 사랑을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3)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만나'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작고 둥글며 희고 모양은 깟씨(고수씨-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나물의 종자) 또는 진주처럼 생겼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꿀이나 기름 섞은 과자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