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473 PAGE : 65/105
2012-09-28
제39과성령의 열매(6) - 양선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마 5:16 l 참고 말씀:마 12:35
교육목표 : 세상적인 선과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참된 선에 대해 알아보고 양선의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진리대로 행하면 마음과 행실이 선해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5~16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한 대로 범사에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 각자의 양심이 기준이 되는 '선'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지며,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옛날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를 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3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할 뿐이지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마태복음 12장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하신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배웠으면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마침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도 물질과 시간에 손해를 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지요.
선을 추구하며 선을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하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지요.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측면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입니다. 즉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신속히 양선의 마음을 이루어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양선(良善)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양선은 선을 추구하는 마음,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다.
② 진리는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③ 양선은 다른 성령의 열매에 비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행할 수 있는 힘'에 중점을 두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자체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목표 : 세상적인 선과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참된 선에 대해 알아보고 양선의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진리대로 행하면 마음과 행실이 선해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5~16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한 대로 범사에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 각자의 양심이 기준이 되는 '선'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지며,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옛날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를 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3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할 뿐이지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마태복음 12장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하신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배웠으면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마침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도 물질과 시간에 손해를 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지요.
선을 추구하며 선을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하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지요.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측면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입니다. 즉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신속히 양선의 마음을 이루어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양선(良善)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양선은 선을 추구하는 마음,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다.
② 진리는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③ 양선은 다른 성령의 열매에 비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행할 수 있는 힘'에 중점을 두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자체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2012-09-21
제38과성령의 열매(5) - 자비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눅 6:32 ㅣ 참고 말씀:약 2장
교육목표 : 자비의 영적인 의미와 자비의 특징에 대해 밝히 알아보고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어느 날 출장 중인 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아들이 상급생에게 폭행을 당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죽인 상급생이 너무 밉고 원통하여 어떻게 하면 복수할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용서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 자비의 열매란?
자비(慈悲)는 사전에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영적인 의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지 않고 공의로만 심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으로 품어 주시지요. 나아가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은 생명까지 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저 사람만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만큼 자비의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자비와 사랑이 어떻게 다를까요?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강합니다. 자비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큰 허물이 보여도 정죄하기보다 긍휼의 마음이 앞섭니다. 상대를 이해해 주며 어찌하든 그를 살리고자 힘씁니다. 선과 사랑으로 포용하기 때문에 싫거나 걸리거나 밉고 불편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저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내 의분에 못 이겨 쉽게 상대를 책망하거나 지적하지 않습니다. 한마디 지적을 해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일꾼은 자기 의와 틀 속에서 쉽게 지적을 합니다. 그 말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하여도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지적을 받은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카로운 칼에 찔린 것처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을 수 있지요.
어린 소자를 대할 때도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꼭 필요해서 권면을 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누가복음 6장 32절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잘한 일이 있으면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반대로 잘못된 일이 있으면 자신의 허물로 돌립니다.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을 받아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지요. '내가 더 수고했는데 왜 저 사람만 칭찬하시지?' 하며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를 생각하며 더 기뻐하지요.
가령, 부모의 도움으로 자녀가 큰 상을 받았다면 "왜 나에게는 상을 주지 않느냐?"고 불편해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어찌하든 자녀에게 모든 공을 돌리기 원할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진리 안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자비의 마음을 이루어야 많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채워 보세요.
( )는 사전에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 더하여 영적인 의미는 "도저히 ( )할 수 없고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으로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②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다.
③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한다.
④ 무조건 상대를 따끔하게 지적한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스데반' 집사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 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교육목표 : 자비의 영적인 의미와 자비의 특징에 대해 밝히 알아보고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어느 날 출장 중인 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아들이 상급생에게 폭행을 당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죽인 상급생이 너무 밉고 원통하여 어떻게 하면 복수할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용서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 자비의 열매란?
자비(慈悲)는 사전에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영적인 의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지 않고 공의로만 심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으로 품어 주시지요. 나아가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은 생명까지 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저 사람만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만큼 자비의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자비와 사랑이 어떻게 다를까요?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강합니다. 자비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큰 허물이 보여도 정죄하기보다 긍휼의 마음이 앞섭니다. 상대를 이해해 주며 어찌하든 그를 살리고자 힘씁니다. 선과 사랑으로 포용하기 때문에 싫거나 걸리거나 밉고 불편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저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내 의분에 못 이겨 쉽게 상대를 책망하거나 지적하지 않습니다. 한마디 지적을 해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일꾼은 자기 의와 틀 속에서 쉽게 지적을 합니다. 그 말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하여도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지적을 받은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카로운 칼에 찔린 것처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을 수 있지요.
어린 소자를 대할 때도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꼭 필요해서 권면을 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누가복음 6장 32절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잘한 일이 있으면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반대로 잘못된 일이 있으면 자신의 허물로 돌립니다.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을 받아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지요. '내가 더 수고했는데 왜 저 사람만 칭찬하시지?' 하며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를 생각하며 더 기뻐하지요.
가령, 부모의 도움으로 자녀가 큰 상을 받았다면 "왜 나에게는 상을 주지 않느냐?"고 불편해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어찌하든 자녀에게 모든 공을 돌리기 원할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진리 안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자비의 마음을 이루어야 많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채워 보세요.
( )는 사전에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 더하여 영적인 의미는 "도저히 ( )할 수 없고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으로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②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다.
③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한다.
④ 무조건 상대를 따끔하게 지적한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스데반' 집사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 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2012-09-14
제37과성령의 열매(4) - 오래 참음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시 126:5 l 참고 말씀:막11:24, 고전 13:4~7
교육목표 : 세상에서 말하는 오래 참음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오래 참음에 대해 알아보고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게 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월터 미셸 박사가 6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앞에 마시멜로 과자를 놔두고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으면 선물을 준다고 했지요. 그런데 인내하며 과자를 먹지 않은 아이들은 30%에 불과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인이 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15분을 참고 인내한 아이들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반면, 참지 못하고 과자를 먹었던 이들은 비만이나 약물 중독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는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 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결과적으로 더 큰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이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을 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이지요. 즉 자신을 심히 괴롭게 하는 사람이나 닥쳐오는 시련에 대해 오래 참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차원이 더 높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따르는 고난을 모두 참습니다. 애통이 따르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만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철저히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어서도 안 되지요. 죄성을 온전히 뽑을 때까지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이때 열심히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는데 동일한 비진리가 다시 발견되면 실망이 되고 지치기도 하지요.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전과 같은 비진리의 모습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 탓을 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지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편에서는 너무 급한데 바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앞날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나 보다." 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내가 믿고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로 손에 쥐어질 때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으로 오래 참고 기다리심으로 모든 분야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 기록된 고린도전서 13장의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차이를 써 보세요.
--------------------------------------------------------------
--------------------------------------------------------------
2.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
둘째는 ( )에 대한 오래 참음,
셋째는 ( )께 대한 오래 참음이 있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세상에서 말하는 오래 참음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오래 참음에 대해 알아보고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게 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월터 미셸 박사가 6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앞에 마시멜로 과자를 놔두고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으면 선물을 준다고 했지요. 그런데 인내하며 과자를 먹지 않은 아이들은 30%에 불과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인이 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15분을 참고 인내한 아이들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반면, 참지 못하고 과자를 먹었던 이들은 비만이나 약물 중독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는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 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결과적으로 더 큰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이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을 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이지요. 즉 자신을 심히 괴롭게 하는 사람이나 닥쳐오는 시련에 대해 오래 참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차원이 더 높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따르는 고난을 모두 참습니다. 애통이 따르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만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철저히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어서도 안 되지요. 죄성을 온전히 뽑을 때까지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이때 열심히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는데 동일한 비진리가 다시 발견되면 실망이 되고 지치기도 하지요.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전과 같은 비진리의 모습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 탓을 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지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편에서는 너무 급한데 바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앞날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나 보다." 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내가 믿고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로 손에 쥐어질 때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으로 오래 참고 기다리심으로 모든 분야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 기록된 고린도전서 13장의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차이를 써 보세요.
--------------------------------------------------------------
--------------------------------------------------------------
2.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
둘째는 ( )에 대한 오래 참음,
셋째는 ( )께 대한 오래 참음이 있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2012-09-07
제36과성령의 열매(3) - 화평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히 12:14 l 참고 말씀:롬 12: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화평과 그 열매를 맺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준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다수가 찬성하여 결정한 일도 자기 유익과 맞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지요. 또 상대의 단점을 보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전달하여 이간질합니다. 이처럼 화평을 깨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나 어디서든 화평이 깨지면 축복의 통로가 막히고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화평의 열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이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열매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너무나 친밀했던 하나님이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화평을 이루려면 마음의 죄악을 다 벗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다고 봐 주십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 간에 화평을 이룬다고 정작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되지요. 만일 믿음이 없는 가족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한다면 잠시 화평을 이룬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을 이루려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 환경과 맞닥뜨렸을 때 악이 발동하여 마음의 화평이 깨져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평한 것 같아도, 어떤 환경과 조건이 악과 결부되면 이내 화평이 깨지지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택할 때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행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 안에서 잘못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로 인해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란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단단히 굳어진 것입니다.
가령, 연단 받기 전의 욥처럼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어떤 징계가 올까 두려워서 행합니다. 이런 부류는 믿음의 성장이 정체하기도 하고,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요. 결국 자기 의와 틀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대로 행하는데도 부정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자신과의 화평을 깹니다. 진리대로 행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으면 자책하지요.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낙심하고 민망해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아이들은 잘못해도 주눅 들어 숨지 않습니다. 더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들지요. 내가 아직 온전치 않아도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연단 받아 철저히 낮아질 때도 더 높여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행함을 계속 쌓아 가면 자신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영적인 담대함이 오기 마련입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면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의와 틀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화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과 교만, 자존심을 버렸을 것이고, 자기 의와 틀도 깨뜨렸을 것이니, 누구와 걸릴 일도 다툴 일도 없지요. 만약 상대가 악하여 화평을 깨려고 해도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가 따릅니다. 그래서 주변에도 화평을 이뤄 줄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빛의 권세가 따르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히 남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지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자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고 화평함을 좇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의 영적인 뜻을 써 보세요.
--------------------------------------------------------------
2. 화평의 열매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
② 믿지 않은 가족들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에 절한다.
③ 자신과 화평을 이뤄야 한다.
④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한다.
3. 화평의 열매를 맺힌 사람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악과' & '생명과일'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일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이 두 나무의 열매는 모양이나 빛깔이 달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크기는 둘 다 메론 만한 크기이다.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모양이며 분홍빛을 띤다. 그리고 생명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홍조를 띤다. 아주 빨갛지 않고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빛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들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명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먹음으로 저주를 받았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화평과 그 열매를 맺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준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다수가 찬성하여 결정한 일도 자기 유익과 맞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지요. 또 상대의 단점을 보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전달하여 이간질합니다. 이처럼 화평을 깨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나 어디서든 화평이 깨지면 축복의 통로가 막히고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화평의 열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이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열매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너무나 친밀했던 하나님이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화평을 이루려면 마음의 죄악을 다 벗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다고 봐 주십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 간에 화평을 이룬다고 정작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되지요. 만일 믿음이 없는 가족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한다면 잠시 화평을 이룬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을 이루려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 환경과 맞닥뜨렸을 때 악이 발동하여 마음의 화평이 깨져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평한 것 같아도, 어떤 환경과 조건이 악과 결부되면 이내 화평이 깨지지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택할 때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행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 안에서 잘못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로 인해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란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단단히 굳어진 것입니다.
가령, 연단 받기 전의 욥처럼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어떤 징계가 올까 두려워서 행합니다. 이런 부류는 믿음의 성장이 정체하기도 하고,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요. 결국 자기 의와 틀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대로 행하는데도 부정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자신과의 화평을 깹니다. 진리대로 행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으면 자책하지요.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낙심하고 민망해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아이들은 잘못해도 주눅 들어 숨지 않습니다. 더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들지요. 내가 아직 온전치 않아도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연단 받아 철저히 낮아질 때도 더 높여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행함을 계속 쌓아 가면 자신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영적인 담대함이 오기 마련입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면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의와 틀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화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과 교만, 자존심을 버렸을 것이고, 자기 의와 틀도 깨뜨렸을 것이니, 누구와 걸릴 일도 다툴 일도 없지요. 만약 상대가 악하여 화평을 깨려고 해도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가 따릅니다. 그래서 주변에도 화평을 이뤄 줄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빛의 권세가 따르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히 남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지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자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고 화평함을 좇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의 영적인 뜻을 써 보세요.
--------------------------------------------------------------
2. 화평의 열매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
② 믿지 않은 가족들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에 절한다.
③ 자신과 화평을 이뤄야 한다.
④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한다.
3. 화평의 열매를 맺힌 사람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악과' & '생명과일'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일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이 두 나무의 열매는 모양이나 빛깔이 달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크기는 둘 다 메론 만한 크기이다.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모양이며 분홍빛을 띤다. 그리고 생명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홍조를 띤다. 아주 빨갛지 않고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빛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들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명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먹음으로 저주를 받았다.
2012-08-31
제35과성령의 열매(2) - 희락
갈 5:22
읽을말씀 : 갈 5:22 | 외울말씀 : 살전 5:16 l 참고 말씀:살전 5:16~18
교육목표 :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희락이 넘치는 삶의 비결을 알려 준다.
인생을 즐겁고 재미나게 사는 것은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웃을 때 몸의 모든 근육이 활발히 움직여지고 엔도르핀을 비롯한 여러 호르몬을 분비해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 주지요. 기뻐하는 것은 비단 육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매우 좋습니다. 항상 기뻐할 때 문제가 쉽게 해결되고 응답 또한 신속히 받을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희락의 열매
'희락'의 사전적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립니다. 겨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희락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작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여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사명도 감당하지만 그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듯이 무덤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나요?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나마 있던 평안함조차 잃어버리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지는 않나요?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순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번 비춰 보십시오.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 얼마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 해도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그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찬양이 흘러넘치고 설령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고 구원의 은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곤고해지고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그러면 주를 향한 첫사랑이 왜 식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마음에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질'되는 것이지요. 즉 혈기, 미움, 시기, 질투, 판단과 같은 비진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내 근심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들려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빌 4:4).
혹여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3.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육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질투'라는 속성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축복받고 칭찬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열등감에 싸여 낙심이 됩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은 죄성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기뻐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또한 근심 걱정 속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니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없지요. 참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마음에 육이 없으면 사업할 때도 성령의 음성을 바로 듣고 나가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하며 축복이 넘칩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심과 조급함이 앞서고 정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통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안에 육을 벗을수록 영적인 기쁨과 감사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실 때라야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이 샘솟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가령,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서로 싸울 때 그 갈등이 계속되면 충만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육을 좇아 자기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꺼림칙하지요.
반면에 마음을 정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내가 손해 본 것처럼 보여도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위로부터 기쁨이 임합니다. 이런 기쁨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지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당장의 불이익 때문에 육체의 소욕대로 좇으면 매번 불편하고 다툼이 생기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중심에서 섬길 때에는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서 선으로 이해해 나가면 그만큼 평안해집니다. 혹여 성격이나 의견이 잘 안 맞는 사람을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피하십니까? 아니면 웃으면서 따뜻하게 인사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섬기는 마음으로 웃어 줍니다. 그러니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하지요. '누군가와 성격이 안 맞다'거나 '상대가 싫다'는 느낌조차 아예 없으면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희락의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얼굴에서는 영적인 빛이 흘러넘치지요.
3)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씨를 심고 가꾸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처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믿음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뻐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해도 일 년 내내 사고나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지요.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축복이 항상 넘쳐납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감사하지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커지고 마침내는 희락의 열매를 온전히 맺히게 되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신속히 희락의 열매를 맺어 항상 기쁨과 감사, 행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육을 벗어 버려야 한다.
②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것은 마땅하다.
③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한다.
④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한다.
2. 희락의 영적인 의미를 써보세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로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
믿음의 1단계나 2단계 초입은 누군가 모함했을 때 당사자를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진다. 믿음의 2단계 중반에서는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믿음의 3단계 믿음의 반석에 서기 전에는 감정이 요동하기도 하며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지만 중심에서는 감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나아가 믿음의 반석에 서면 불평하기보다는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도 이내 바꾼다.
믿음의 4단계는 전혀 요동함이 없고 온전히 기뻐하며 감사한다.
교육목표 :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희락이 넘치는 삶의 비결을 알려 준다.
인생을 즐겁고 재미나게 사는 것은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웃을 때 몸의 모든 근육이 활발히 움직여지고 엔도르핀을 비롯한 여러 호르몬을 분비해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 주지요. 기뻐하는 것은 비단 육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매우 좋습니다. 항상 기뻐할 때 문제가 쉽게 해결되고 응답 또한 신속히 받을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희락의 열매
'희락'의 사전적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립니다. 겨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희락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작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여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사명도 감당하지만 그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듯이 무덤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나요?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나마 있던 평안함조차 잃어버리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지는 않나요?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순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번 비춰 보십시오.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 얼마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 해도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그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찬양이 흘러넘치고 설령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고 구원의 은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곤고해지고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그러면 주를 향한 첫사랑이 왜 식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마음에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질'되는 것이지요. 즉 혈기, 미움, 시기, 질투, 판단과 같은 비진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내 근심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들려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빌 4:4).
혹여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3.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육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질투'라는 속성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축복받고 칭찬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열등감에 싸여 낙심이 됩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은 죄성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기뻐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또한 근심 걱정 속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니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없지요. 참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마음에 육이 없으면 사업할 때도 성령의 음성을 바로 듣고 나가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하며 축복이 넘칩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심과 조급함이 앞서고 정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통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안에 육을 벗을수록 영적인 기쁨과 감사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실 때라야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이 샘솟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가령,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서로 싸울 때 그 갈등이 계속되면 충만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육을 좇아 자기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꺼림칙하지요.
반면에 마음을 정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내가 손해 본 것처럼 보여도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위로부터 기쁨이 임합니다. 이런 기쁨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지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당장의 불이익 때문에 육체의 소욕대로 좇으면 매번 불편하고 다툼이 생기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중심에서 섬길 때에는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서 선으로 이해해 나가면 그만큼 평안해집니다. 혹여 성격이나 의견이 잘 안 맞는 사람을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피하십니까? 아니면 웃으면서 따뜻하게 인사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섬기는 마음으로 웃어 줍니다. 그러니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하지요. '누군가와 성격이 안 맞다'거나 '상대가 싫다'는 느낌조차 아예 없으면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희락의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얼굴에서는 영적인 빛이 흘러넘치지요.
3)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씨를 심고 가꾸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처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믿음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뻐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해도 일 년 내내 사고나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지요.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축복이 항상 넘쳐납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감사하지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커지고 마침내는 희락의 열매를 온전히 맺히게 되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신속히 희락의 열매를 맺어 항상 기쁨과 감사, 행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육을 벗어 버려야 한다.
②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것은 마땅하다.
③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한다.
④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한다.
2. 희락의 영적인 의미를 써보세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로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
믿음의 1단계나 2단계 초입은 누군가 모함했을 때 당사자를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진다. 믿음의 2단계 중반에서는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믿음의 3단계 믿음의 반석에 서기 전에는 감정이 요동하기도 하며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지만 중심에서는 감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나아가 믿음의 반석에 서면 불평하기보다는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도 이내 바꾼다.
믿음의 4단계는 전혀 요동함이 없고 온전히 기뻐하며 감사한다.
2012-08-24
제34과성령의 열매(1) - 사랑
갈 5:22
읽을말씀 : 갈 5:22 | 외울말씀 : 롬 5:8 ㅣ 참고 말씀:롬6:23, 히 9:22
교육목표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마음 안에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때부터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지요.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결혼할 때 사람들은 '영원 불변의 사랑'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반지를 건네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커플도 얼마 못가 남남이 되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영적인 사랑은 결코 변치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섬기며 자기를 희생하므로 갈수록 그 사랑이 승화되지요.
1.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최고의 영적인 사랑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언젠가는 변질되고 말지요.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나오는 사랑이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는데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지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지요. 나를 미워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최고의 사랑을 합니다.
2. 대가를 바라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
진실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세월이 흐르고 내가 원했던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자신의 유익에 따라 쉽게 변하기도 하고 배신합니다.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지요. 내가 준 만큼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다 육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 "당신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서로 내 뜻에 맞춰 주기를 바라고, 안 따라 주면 속상해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도 티격태격 싸우며 거기서 더 금이 가면 결국 이혼까지 이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유익에 맞지 않으면 원수 맺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만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도 드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부모도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만 준다면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또 아무리 의좋던 형제도 돈 문제가 개입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 쉽게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자신이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 원합니다. 설령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는 받지 않고 무조건 줬다 할지라도 마음이 식으면 예전에 주었던 것까지 후회하지요. 이는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
만일 백성 중에 한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의 아들뿐이라면 과연 왕이 살인자를 위해 귀한 아들을 내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 주실 만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아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지요(롬 6:23).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을 받으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지요. 또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욕하며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을 줄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심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주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을 다한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4.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려 성결을 이룬 만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이 없는 마음에서 참된 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항상 평안하게 해 줍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고 기쁨을 주며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지요.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출 32:32). 사도 바울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영혼들을 사랑하시는지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혹여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원수도 아니고, 생명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로 부딪히고 불편해하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은 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무관심하지는 않는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당회장님은 어떻습니까? "만약 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가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참혹하고 무서운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도,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듣고 권능의 역사를 늘 보면서도 사망으로 가는 사람과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시기하여 핍박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전쟁과 기근과 가난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아프리카 오지의 불쌍한 영혼들도 속하지요. 성경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까 의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진액을 쏟아 붓고 계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알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마음 안에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새겨져 있나요? 성령의 열매인 영적인 사랑이 날마다 더하여 사랑의 결정체인 새 예루살렘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과 영원히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의 차이를 써보세요.
--------------------------------------------------------------
2.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은?
① 출애굽기 32:32 ② 로마서 9:3 ③ 로마서 5:8 ④ 사무엘하 13:4
3.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하나인 사랑의 열매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갈라디아서 3:13~14)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2.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3.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교육목표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마음 안에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때부터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지요.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결혼할 때 사람들은 '영원 불변의 사랑'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반지를 건네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커플도 얼마 못가 남남이 되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영적인 사랑은 결코 변치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섬기며 자기를 희생하므로 갈수록 그 사랑이 승화되지요.
1.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최고의 영적인 사랑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언젠가는 변질되고 말지요.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나오는 사랑이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는데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지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지요. 나를 미워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최고의 사랑을 합니다.
2. 대가를 바라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
진실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세월이 흐르고 내가 원했던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자신의 유익에 따라 쉽게 변하기도 하고 배신합니다.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지요. 내가 준 만큼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다 육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 "당신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서로 내 뜻에 맞춰 주기를 바라고, 안 따라 주면 속상해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도 티격태격 싸우며 거기서 더 금이 가면 결국 이혼까지 이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유익에 맞지 않으면 원수 맺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만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도 드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부모도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만 준다면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또 아무리 의좋던 형제도 돈 문제가 개입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 쉽게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자신이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 원합니다. 설령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는 받지 않고 무조건 줬다 할지라도 마음이 식으면 예전에 주었던 것까지 후회하지요. 이는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
만일 백성 중에 한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의 아들뿐이라면 과연 왕이 살인자를 위해 귀한 아들을 내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 주실 만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아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지요(롬 6:23).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을 받으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지요. 또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욕하며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을 줄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심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주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을 다한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4.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려 성결을 이룬 만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이 없는 마음에서 참된 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항상 평안하게 해 줍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고 기쁨을 주며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지요.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출 32:32). 사도 바울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영혼들을 사랑하시는지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혹여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원수도 아니고, 생명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로 부딪히고 불편해하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은 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무관심하지는 않는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당회장님은 어떻습니까? "만약 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가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참혹하고 무서운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도,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듣고 권능의 역사를 늘 보면서도 사망으로 가는 사람과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시기하여 핍박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전쟁과 기근과 가난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아프리카 오지의 불쌍한 영혼들도 속하지요. 성경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까 의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진액을 쏟아 붓고 계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알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마음 안에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새겨져 있나요? 성령의 열매인 영적인 사랑이 날마다 더하여 사랑의 결정체인 새 예루살렘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과 영원히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의 차이를 써보세요.
--------------------------------------------------------------
2.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은?
① 출애굽기 32:32 ② 로마서 9:3 ③ 로마서 5:8 ④ 사무엘하 13:4
3.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하나인 사랑의 열매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갈라디아서 3:13~14)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2.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3.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2012-08-17
제33과믿음의 5단계(2)
민 12:7~8
읽을말씀 : 민 12:7~8 | 외울말씀 : 민 12:7 l 참고 말씀:민 12:3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함을 알려준다.
믿음의 5단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단계를 지나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뜻을 헤아려 그에 맞게 행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니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무수한 기도를 쌓아 기사와 표적을 행할 뿐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을 뿐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민 12:3,7).
1.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의 5단계
'충성'의 영적인 의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 그 이상을 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일꾼으로 불러 급료를 주며 일을 맡겼을 때, 그 일만 잘 감당했다 해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지요. 그런데 삯을 받고 일해도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아끼지 않고 넘치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을 때는 충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영적으로 충성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성결되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오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니 충성의 열매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성의 차원을 넘어 온 집에 충성하려면 믿음의 5단계에 들어와 성령의 열매가 100퍼센트 맺혀야 합니다.
충성이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랑이 없이는 희생하고 헌신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절제의 열매가 부족하면 한쪽에서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다른 분야에는 좀 소홀하게 될 수 있지요.
'화평'의 열매가 온전히 맺혀 있지 않으면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딪힘이 생기고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화평이 깨어진 충성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충성을 하면서 온 집에 충성하려면 성령의 열매들이 모두 맺혀 있어야 합니다.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되 모든 분야에서 주어지는 대가 이상으로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사명을 맡게 됩니다. 그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되 한두 가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모든 분야에 마음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바로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명 중에는 중요해 보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명도 있지만 조금은 덜 중요해 보이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람이 보기에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사명을 소중히 여기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합니다.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명을 갖고 있어도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며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모든 과정도, 무수한 영혼들의 삶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마음에 다 담고 주관해 가십니다. 믿음의 5단계인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많은 영혼이나 많은 일을 마음에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 또한 있지요. 그 간절한 사랑으로 마음에 품고 간구하므로 자신이 맡은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분야를 똑같이 마음에 품고 소중하게 여기며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모든 사명에 똑같은 시간을 할애하고 똑같이 긴급하게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급한 것과 나중에 할 것,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 있지요.
그러나 충성의 열매가 온전히 맺힌 사람은 많은 사명 중에 어떤 사명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며, 수많은 양 떼 중에 한 영혼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적게 들이든 많이 들이든, 모든 분야에 정성과 성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2. 온 집에 충성하려면
출애굽 당시, 이백만 가량이나 되는 수많은 백성들을 모세가 일일이 만나고 그들의 문제를 상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모든 백성들을 영으로 품고 있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해 이르시기를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들어간 만큼 영혼들을 품을 수 있고, 사명도 더 많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맡은 양 떼가 오백 명이면 전부를 매주마다 심방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양 떼나 급한 문제가 있는 양 떼는 자주 돌아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심방하는 양 떼도 있지요.
그러나 충성된 마음을 가졌다면 자주 보든, 보지 않든 모든 양 떼를 항상 영으로 품어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예배 한 번 드리지 못한 영혼이라 해도 마음에 늘 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요. 그래서 꼭 필요할 때는 마음에 주관해 주셔서 특별히 기도를 하도록 하시거나 심방하게 하시기도 하며, 단 한 번을 짧게 만난다 해도 좋은 열매로 나오게 되지요.
이는 자신이 게을러 심방하지 않으면서 "그 대신 기도하고 있으니까" 하고 변명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생명 다해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하지만 "제가 직접 돌보지 못한 분야까지도 아버지께서 돌보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절하겠습니까? 그러한 중심의 향을 받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명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모든 분야에 대해 똑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며, 영으로 품어 열매를 내는 것이 바로 온 집에 충성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많은 사명을 맡으면 다 잘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한두 가지만 맡아서 정성을 다한다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자 사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뜨거울 것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열정이 뜨거우니 어찌하든 사명을 사모하게 되지요. 그러니 내가 잘할 수 있는 한두 가지만 감당하겠다는 말 자체가 이미 온 집에 충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한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은 사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충성되이 행하여 열매를 내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열심을 내는데 가정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학교나 직장에서는 불성실하다면 "저 사람은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라고 칭찬할 수 없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마음 자체가 이미 성실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든 곳에서 성실하게 행합니다. 그렇다 해서 꼭 1등을 해야 하고 실적이 제일 좋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성실하게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는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선후를 따질 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먼저이지요. 그렇다 해서 하나님의 일만 열심히 하고 다른 분야에서는 불성실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 일만 열심히 한다면 이는 충성된 마음이기보다는 육적인 충성이거나 일시적인 뜨거움은 아닌지 스스로를 잘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영적인 충성은 두루두루 마음을 쓰기 마련이지요.
자신에게 맡겨 준 모든 분야에 마음을 다해 희생하며 섬겨 나가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와 능력을 주시지요.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악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고 그 악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영으로 온 영으로 신속하게 들어오게 해 주십니다.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주어진 모든 사명을 넘치게 감당함으로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충성'과 '온 집에 충성'의 영적인 의미를 써보세요.
--------------------------------------------------------------
하나님께서 모세 선지자에 대해 말씀하신 민수기 12장 3절과 7절을 써보세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 선지자'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이다. 당시 애굽의 박해로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공주가 발견하고 양자로 삼는다. 40세 때 동족의 고역과 박해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인 후 미디안으로 도망간다. 80세 때 여호와로부터 민족 해방의 사명을 받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함을 알려준다.
믿음의 5단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단계를 지나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뜻을 헤아려 그에 맞게 행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니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무수한 기도를 쌓아 기사와 표적을 행할 뿐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을 뿐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민 12:3,7).
1.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의 5단계
'충성'의 영적인 의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 그 이상을 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일꾼으로 불러 급료를 주며 일을 맡겼을 때, 그 일만 잘 감당했다 해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지요. 그런데 삯을 받고 일해도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아끼지 않고 넘치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을 때는 충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영적으로 충성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성결되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오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니 충성의 열매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성의 차원을 넘어 온 집에 충성하려면 믿음의 5단계에 들어와 성령의 열매가 100퍼센트 맺혀야 합니다.
충성이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랑이 없이는 희생하고 헌신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절제의 열매가 부족하면 한쪽에서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다른 분야에는 좀 소홀하게 될 수 있지요.
'화평'의 열매가 온전히 맺혀 있지 않으면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딪힘이 생기고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화평이 깨어진 충성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충성을 하면서 온 집에 충성하려면 성령의 열매들이 모두 맺혀 있어야 합니다.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되 모든 분야에서 주어지는 대가 이상으로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사명을 맡게 됩니다. 그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되 한두 가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모든 분야에 마음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바로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명 중에는 중요해 보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명도 있지만 조금은 덜 중요해 보이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람이 보기에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사명을 소중히 여기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합니다.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명을 갖고 있어도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며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모든 과정도, 무수한 영혼들의 삶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마음에 다 담고 주관해 가십니다. 믿음의 5단계인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많은 영혼이나 많은 일을 마음에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 또한 있지요. 그 간절한 사랑으로 마음에 품고 간구하므로 자신이 맡은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분야를 똑같이 마음에 품고 소중하게 여기며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모든 사명에 똑같은 시간을 할애하고 똑같이 긴급하게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급한 것과 나중에 할 것,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 있지요.
그러나 충성의 열매가 온전히 맺힌 사람은 많은 사명 중에 어떤 사명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며, 수많은 양 떼 중에 한 영혼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적게 들이든 많이 들이든, 모든 분야에 정성과 성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2. 온 집에 충성하려면
출애굽 당시, 이백만 가량이나 되는 수많은 백성들을 모세가 일일이 만나고 그들의 문제를 상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모든 백성들을 영으로 품고 있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해 이르시기를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들어간 만큼 영혼들을 품을 수 있고, 사명도 더 많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맡은 양 떼가 오백 명이면 전부를 매주마다 심방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양 떼나 급한 문제가 있는 양 떼는 자주 돌아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심방하는 양 떼도 있지요.
그러나 충성된 마음을 가졌다면 자주 보든, 보지 않든 모든 양 떼를 항상 영으로 품어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예배 한 번 드리지 못한 영혼이라 해도 마음에 늘 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요. 그래서 꼭 필요할 때는 마음에 주관해 주셔서 특별히 기도를 하도록 하시거나 심방하게 하시기도 하며, 단 한 번을 짧게 만난다 해도 좋은 열매로 나오게 되지요.
이는 자신이 게을러 심방하지 않으면서 "그 대신 기도하고 있으니까" 하고 변명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생명 다해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하지만 "제가 직접 돌보지 못한 분야까지도 아버지께서 돌보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절하겠습니까? 그러한 중심의 향을 받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명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모든 분야에 대해 똑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며, 영으로 품어 열매를 내는 것이 바로 온 집에 충성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많은 사명을 맡으면 다 잘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한두 가지만 맡아서 정성을 다한다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자 사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뜨거울 것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열정이 뜨거우니 어찌하든 사명을 사모하게 되지요. 그러니 내가 잘할 수 있는 한두 가지만 감당하겠다는 말 자체가 이미 온 집에 충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한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은 사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충성되이 행하여 열매를 내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열심을 내는데 가정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학교나 직장에서는 불성실하다면 "저 사람은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라고 칭찬할 수 없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마음 자체가 이미 성실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든 곳에서 성실하게 행합니다. 그렇다 해서 꼭 1등을 해야 하고 실적이 제일 좋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성실하게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는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선후를 따질 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먼저이지요. 그렇다 해서 하나님의 일만 열심히 하고 다른 분야에서는 불성실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 일만 열심히 한다면 이는 충성된 마음이기보다는 육적인 충성이거나 일시적인 뜨거움은 아닌지 스스로를 잘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영적인 충성은 두루두루 마음을 쓰기 마련이지요.
자신에게 맡겨 준 모든 분야에 마음을 다해 희생하며 섬겨 나가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와 능력을 주시지요.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악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고 그 악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영으로 온 영으로 신속하게 들어오게 해 주십니다.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주어진 모든 사명을 넘치게 감당함으로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충성'과 '온 집에 충성'의 영적인 의미를 써보세요.
--------------------------------------------------------------
하나님께서 모세 선지자에 대해 말씀하신 민수기 12장 3절과 7절을 써보세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 선지자'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이다. 당시 애굽의 박해로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공주가 발견하고 양자로 삼는다. 40세 때 동족의 고역과 박해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인 후 미디안으로 도망간다. 80세 때 여호와로부터 민족 해방의 사명을 받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이다.
2012-08-10
제32과믿음의 5단계(1)
요일 3:21~22
읽을말씀 : 요일 3:21~22 | 외울말씀 : 히 10:22 ㅣ 참고 말씀:요 4:4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 특징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가 되면 사랑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에 순종하는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요.
믿음의 5단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할 뿐 아니라 '왜 그런 것을 명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서 명하신 것보다 넘치도록 순종합니다. 어느 한순간 행함을 보이거나 가끔 진한 사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분초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지요. 그런 모습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변함없으며 날이 갈수록 승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의 5단계
시편 37편 4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루어집니다.
교회 개척 당시 당회장님께서는 수중에 단돈 7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결국 25평의 건물을 임대하여 개척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창대히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막 9:23).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대로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는 축복이 임하고, 마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대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나타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선진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에녹은 65세에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였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랑을 나누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축복을 받아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며 놀라운 권능의 역사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2. 믿음의 5단계의 특징
1)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온전한 믿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마 22:37~40).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의 5단계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므로 그리스도의 믿음, 완전한 영의 믿음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지요. 이는 순종하는 차원 그 이상으로 자기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히 희생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드렸던 믿음의 선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야고보는 칼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요한은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죽지 않자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찬송을 부르며 사자 밥이 된 사람들, 지하 공동묘지로 알려진 카타콤에서 평생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간 이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도 아끼지 않는 초대교회 순교자들에 의해 세계 선교는 신속히 이뤄졌고, 우리나라도 순교자들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2)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완전한 영의 믿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온 영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품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마음이 진리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온전히 성령의 음성을 들어 하나님 뜻대로만 살아가는 온전한 영의 사람이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마음의 성결을 이루면 영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또한 영의 사람이 계속적으로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무장하면 마음뿐 아니라 생활 속에도 진리가 온전히 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 하고, 완전한 영의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도 하지요.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신 대로 참마음을 지니면 온전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3) 무수한 기도를 쌓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믿음
진리가 마음속에 온전히 임하여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살아가고자 무수한 기도를 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영혼들을 구원하려면 능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로 인해 사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의 5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하면 많은 영혼을 구원하며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이룰까?' 궁구하며 불타는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차원을 넘어 다른 사명까지도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부단히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영혼 구원은 사람의 말이나 지식, 경험이나 명예, 권세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고전 4:20).
따라서 믿음의 5단계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해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기도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무수한 기도를 쌓으면 표적과 기사가 온전히 나타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을 소유한 증거가 됩니다.
요한복음 4장 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며 공생애 동안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많은 영혼들에게 쉽게 믿음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가 이에 속합니다. 가령,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역사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보면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나오지요.
다음으로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으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됩니다. 구름을 움직이고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들이 이에 속합니다(삼상 12:18 ; 왕하 20:11 ; 약 5:17~18).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사람들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시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의 5단계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② 기사와 표적이 따른다.
③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온전히 맺히지는 않았다.
④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다.
2. 믿음의 5단계에서 따르는 5가지의 표적은 무엇일까요? (막 16:17~18)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카타콤'이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비밀 지하 묘지이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죽은 사람을 그곳에 매장하고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소아시아 · 북아프리카 ·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널리 있지만 로마 교외의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 특징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가 되면 사랑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에 순종하는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요.
믿음의 5단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할 뿐 아니라 '왜 그런 것을 명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서 명하신 것보다 넘치도록 순종합니다. 어느 한순간 행함을 보이거나 가끔 진한 사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분초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지요. 그런 모습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변함없으며 날이 갈수록 승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의 5단계
시편 37편 4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루어집니다.
교회 개척 당시 당회장님께서는 수중에 단돈 7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결국 25평의 건물을 임대하여 개척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창대히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막 9:23).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대로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는 축복이 임하고, 마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대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나타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선진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에녹은 65세에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였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랑을 나누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축복을 받아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며 놀라운 권능의 역사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2. 믿음의 5단계의 특징
1)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온전한 믿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마 22:37~40).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의 5단계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므로 그리스도의 믿음, 완전한 영의 믿음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지요. 이는 순종하는 차원 그 이상으로 자기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히 희생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드렸던 믿음의 선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야고보는 칼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요한은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죽지 않자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찬송을 부르며 사자 밥이 된 사람들, 지하 공동묘지로 알려진 카타콤에서 평생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간 이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도 아끼지 않는 초대교회 순교자들에 의해 세계 선교는 신속히 이뤄졌고, 우리나라도 순교자들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2)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완전한 영의 믿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온 영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품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마음이 진리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온전히 성령의 음성을 들어 하나님 뜻대로만 살아가는 온전한 영의 사람이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마음의 성결을 이루면 영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또한 영의 사람이 계속적으로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무장하면 마음뿐 아니라 생활 속에도 진리가 온전히 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 하고, 완전한 영의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도 하지요.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신 대로 참마음을 지니면 온전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3) 무수한 기도를 쌓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믿음
진리가 마음속에 온전히 임하여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살아가고자 무수한 기도를 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영혼들을 구원하려면 능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로 인해 사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의 5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하면 많은 영혼을 구원하며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이룰까?' 궁구하며 불타는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차원을 넘어 다른 사명까지도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부단히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영혼 구원은 사람의 말이나 지식, 경험이나 명예, 권세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고전 4:20).
따라서 믿음의 5단계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해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기도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무수한 기도를 쌓으면 표적과 기사가 온전히 나타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을 소유한 증거가 됩니다.
요한복음 4장 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며 공생애 동안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많은 영혼들에게 쉽게 믿음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가 이에 속합니다. 가령,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역사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보면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나오지요.
다음으로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으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됩니다. 구름을 움직이고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들이 이에 속합니다(삼상 12:18 ; 왕하 20:11 ; 약 5:17~18).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사람들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시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의 5단계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② 기사와 표적이 따른다.
③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온전히 맺히지는 않았다.
④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다.
2. 믿음의 5단계에서 따르는 5가지의 표적은 무엇일까요? (막 16:17~18)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카타콤'이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비밀 지하 묘지이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죽은 사람을 그곳에 매장하고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소아시아 · 북아프리카 ·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널리 있지만 로마 교외의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2012-08-03
제31과영의 사람이 온 영의 사람이 되어 성정대로 쓰임 받기까지
요 4:24
읽을말씀 : 요 4:24 | 외울말씀 : 요 4:24 ㅣ참고 말씀:살전 5:23
교육목표 :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뛰어난 믿음의 선진들처럼 성정대로 쓰임을 받으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알아본다.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일단 그릇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준비된 그릇에 영의 내용물들을 채워나가게 되지요. 이제 겨우 채워나가기 시작한 상태를 '결여'라 하고 그릇의 반쯤 넘어선 상태를 '부족'이라 하며 그릇을 완전히 채우면 이때부터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80%부터 5단계 50% 미만까지는 가득 채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곳곳에 빈 공간이 조금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의 5단계 50%를 넘어야 빈 공간까지도 완전히 채웠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의 그릇에 빈 공간 없이 영의 내용물을 완전히 채웠다 해도 그릇마다 재질이 다르고 크기와 모양이 다르지요.
일단 그릇을 영의 내용물로 완전히 채우면 그릇의 재질이나 크기와 모양이 더 이상 '육의 흔적'이라는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그 그릇의 재질과 모양과 크기에 따라 특성에 맞게 활용해 가시지요.
1. 육의 흔적을 변환시키는 과정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접한 육의 지식과 경험, 부모에게 전달받은 성품이나 기질 같은 것들이 흔적처럼 남는데, 이것을 '육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덕과 사랑이 넘치지만 기질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 끊어야 할 때 정확히 끊지 못합니다. 반면 베풀기는 즐겨하는데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사람도 있고, 늘 성실하고 바른 모습이지만 다소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면 이런 성품이나 기질적인 면이 악의 모양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한 영의 마음과는 차이가 나지요. 그래서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오면 이런 육의 흔적 중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영적으로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서 온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육의 흔적의 변환'이라 말합니다.
육의 흔적이 신의 성품 안에 녹아지면서 영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의미로서 인성도 사람의 인성이 아닌 신의 성품에 속한 인성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4단계부터는 육의 흔적을 변환시켜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믿음의 5단계 50%를 넘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2. 육의 흔적 변환 1단계(믿음의 4단계 1-50% 미만)
이 단계에서는 육의 흔적으로 인한 결여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결여'란 아예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크게 세가지 분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의 분야에 결여가 생깁니다. 그래서 영으로 들어와 마음에 악은 없다 해도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나타내야 하는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부모의 용서와 이해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망과 체벌을 받기도 하면서 이것이 부모의 사랑임을 깨달았다면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용서해 주고 품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책망하고 외면하는 것도 사랑임을 마음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이 결여된 사람은 일방적으로 보듬어 주고 용서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하기도 하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질책하고 책망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기도 하지요.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지식으로 쌓아왔다고는 하나 자기 마음에 온전히 영으로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그것이 결여로 자리 잡은 경우입니다. 가령 똑같은 하나님 말씀이라도 영의 깊이가 더할수록 그 말씀을 깨닫고 적용하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영의 지식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깨닫고 이해한 것이 전부라 생각하며 더 깊은 차원은 생각지 못하지요. 예를 들어, 영의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열심히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상대의 어려움을 앞장서서 해결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영혼이 잘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지요.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이 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고, 마음이 전혀 요동하지 않는 차원이므로 선의 2단계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선에 비하면 아직은 소극적인 수준의 선입니다. 비유를 들면, 규정 속도가 60km인 1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빠르게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 법을 지키고 정도를 가면 된다고 생각하여 뒤차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뒤차가 추월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조금만 빨리 달려 주면 될 텐데, 자신은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한계 안에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행한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육의 흔적의 변환 2단계(믿음의 4단계 50-80% 미만)
이 단계는 육의 흔적으로 인해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온전함을 향해 채워 나가는 차원이지요. 다시 말해 온 영의 차원과 비교할 때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온 영의 사람이 되려면 부족한 분야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가령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로 했을 때, 어느 선(線)까지 해야 할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되, 어떤 때는 한계를 그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도가 넘치도록 해 줘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해하고 품는 방법을 택한다 해도 어떤 경우는 선을 그어 상대가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반면에 넘치는 위로와 격려를 통해 상대가 감동함을 입고 변화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지요. 따라서 더 깊이 있고, 섬세한 사랑의 차원을 깨달아 부족한 분야를 채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영의 지식의 결여와 비교하면 그래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있게 깨닫고 헤아리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똑같은 영의 지식이라도 그 말씀을 마음에 얼마나 영으로 이루었느냐에 따라 활용범위와 활용방법이 달라집니다. 한 말씀을 10가지로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다고 할 때, 아직은 5-6가지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차원이지요.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부족입니다. 규정 속도가 60km인 일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빠르게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때는 뒤차의 입장을 생각해서 빨리 달리지만 어떤 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지만 매번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선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선의 4단계가 임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의 3단계만 온전히 임해 있어도 온전한 선에 가깝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4. 육의 흔적의 변환을 통해 활용하는 방법을 깨닫는 단계 (믿음의 4단계 80% - 믿음의 5단계 50% 미만)
이처럼 육의 흔적이 온전히 변환되면 그때부터는 '성정' 즉,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적인 면'이 신의 성품 안에서 아름답게 발휘됩니다. 전에는 이러한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이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함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면, 육의 흔적을 온전히 변환시킨 후부터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 즉, 각 사람의 성정이 그 사람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활용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80%부터 믿음의 5단계 5% 미만은 아직 육의 흔적이 온전히 변환되어서 활용해 나가는 단계는 아닙니다. 어느 때는 육의 흔적이 나올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육의 흔적이 변환되어 나올 때도 있지요. 그래서 스스로 '내가 영인가? 온 영인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4단계 80%부터는 온 영으로 인정해 주시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이끌어 가십니다.
5. 육의 흔적이 온전히 성정대로 쓰임 받는 단계(믿음의 5단계 50% 이상)
각각의 그릇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의 재질과 크기와 모양의 특성이 바로 각 사람의 '성정'에 해당합니다. 성경을 보면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 사도 바울 등은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자기 만이 가진 성정의 특징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의분이 있고 급한 성품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훗날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가장 승하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지요. 그리고 예전의 의분과 급한 성품이 이제는 백성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뜨거운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변화된 후에는 수많은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까지도 그 마음 안에 다 담을 수 있는 큰 자가 되었지요. 백성들을 위한 애끓는 애통과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걸면서까지 백성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의 열정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모세 선지자가 미지근하고 냉랭한 성품이었다면, 백성들을 향한 그런 열정을 가지고 인도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40년 광야생활에 지쳐 버릴 수도 있지요. 이처럼 모세 선지자의 성정이 영적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쓰임 받았기에, 그 큰 사명을 아름답게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뿐 아니라, 신속히 영의 사람이 되어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각자의 성정에 따라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4단계'란?
선의 1단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단계, 사람이 보기에는 선하나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하지 않음
선의 2단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선
선의 3단계: 악으로 나오는 자에게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선
선의 4단계: 악한 자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
교육목표 :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뛰어난 믿음의 선진들처럼 성정대로 쓰임을 받으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알아본다.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일단 그릇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준비된 그릇에 영의 내용물들을 채워나가게 되지요. 이제 겨우 채워나가기 시작한 상태를 '결여'라 하고 그릇의 반쯤 넘어선 상태를 '부족'이라 하며 그릇을 완전히 채우면 이때부터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80%부터 5단계 50% 미만까지는 가득 채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곳곳에 빈 공간이 조금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의 5단계 50%를 넘어야 빈 공간까지도 완전히 채웠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의 그릇에 빈 공간 없이 영의 내용물을 완전히 채웠다 해도 그릇마다 재질이 다르고 크기와 모양이 다르지요.
일단 그릇을 영의 내용물로 완전히 채우면 그릇의 재질이나 크기와 모양이 더 이상 '육의 흔적'이라는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그 그릇의 재질과 모양과 크기에 따라 특성에 맞게 활용해 가시지요.
1. 육의 흔적을 변환시키는 과정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접한 육의 지식과 경험, 부모에게 전달받은 성품이나 기질 같은 것들이 흔적처럼 남는데, 이것을 '육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덕과 사랑이 넘치지만 기질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 끊어야 할 때 정확히 끊지 못합니다. 반면 베풀기는 즐겨하는데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사람도 있고, 늘 성실하고 바른 모습이지만 다소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면 이런 성품이나 기질적인 면이 악의 모양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한 영의 마음과는 차이가 나지요. 그래서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오면 이런 육의 흔적 중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영적으로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서 온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육의 흔적의 변환'이라 말합니다.
육의 흔적이 신의 성품 안에 녹아지면서 영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의미로서 인성도 사람의 인성이 아닌 신의 성품에 속한 인성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4단계부터는 육의 흔적을 변환시켜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믿음의 5단계 50%를 넘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2. 육의 흔적 변환 1단계(믿음의 4단계 1-50% 미만)
이 단계에서는 육의 흔적으로 인한 결여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결여'란 아예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크게 세가지 분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의 분야에 결여가 생깁니다. 그래서 영으로 들어와 마음에 악은 없다 해도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나타내야 하는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부모의 용서와 이해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망과 체벌을 받기도 하면서 이것이 부모의 사랑임을 깨달았다면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용서해 주고 품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책망하고 외면하는 것도 사랑임을 마음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이 결여된 사람은 일방적으로 보듬어 주고 용서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하기도 하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질책하고 책망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기도 하지요.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지식으로 쌓아왔다고는 하나 자기 마음에 온전히 영으로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그것이 결여로 자리 잡은 경우입니다. 가령 똑같은 하나님 말씀이라도 영의 깊이가 더할수록 그 말씀을 깨닫고 적용하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영의 지식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깨닫고 이해한 것이 전부라 생각하며 더 깊은 차원은 생각지 못하지요. 예를 들어, 영의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열심히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상대의 어려움을 앞장서서 해결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영혼이 잘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지요.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이 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고, 마음이 전혀 요동하지 않는 차원이므로 선의 2단계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선에 비하면 아직은 소극적인 수준의 선입니다. 비유를 들면, 규정 속도가 60km인 1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빠르게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 법을 지키고 정도를 가면 된다고 생각하여 뒤차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뒤차가 추월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조금만 빨리 달려 주면 될 텐데, 자신은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한계 안에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행한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육의 흔적의 변환 2단계(믿음의 4단계 50-80% 미만)
이 단계는 육의 흔적으로 인해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온전함을 향해 채워 나가는 차원이지요. 다시 말해 온 영의 차원과 비교할 때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온 영의 사람이 되려면 부족한 분야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가령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로 했을 때, 어느 선(線)까지 해야 할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되, 어떤 때는 한계를 그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도가 넘치도록 해 줘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해하고 품는 방법을 택한다 해도 어떤 경우는 선을 그어 상대가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반면에 넘치는 위로와 격려를 통해 상대가 감동함을 입고 변화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지요. 따라서 더 깊이 있고, 섬세한 사랑의 차원을 깨달아 부족한 분야를 채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영의 지식의 결여와 비교하면 그래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있게 깨닫고 헤아리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똑같은 영의 지식이라도 그 말씀을 마음에 얼마나 영으로 이루었느냐에 따라 활용범위와 활용방법이 달라집니다. 한 말씀을 10가지로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다고 할 때, 아직은 5-6가지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차원이지요.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부족입니다. 규정 속도가 60km인 일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빠르게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때는 뒤차의 입장을 생각해서 빨리 달리지만 어떤 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지만 매번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선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선의 4단계가 임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의 3단계만 온전히 임해 있어도 온전한 선에 가깝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4. 육의 흔적의 변환을 통해 활용하는 방법을 깨닫는 단계 (믿음의 4단계 80% - 믿음의 5단계 50% 미만)
이처럼 육의 흔적이 온전히 변환되면 그때부터는 '성정' 즉,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적인 면'이 신의 성품 안에서 아름답게 발휘됩니다. 전에는 이러한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이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함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면, 육의 흔적을 온전히 변환시킨 후부터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 즉, 각 사람의 성정이 그 사람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활용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80%부터 믿음의 5단계 5% 미만은 아직 육의 흔적이 온전히 변환되어서 활용해 나가는 단계는 아닙니다. 어느 때는 육의 흔적이 나올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육의 흔적이 변환되어 나올 때도 있지요. 그래서 스스로 '내가 영인가? 온 영인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4단계 80%부터는 온 영으로 인정해 주시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이끌어 가십니다.
5. 육의 흔적이 온전히 성정대로 쓰임 받는 단계(믿음의 5단계 50% 이상)
각각의 그릇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의 재질과 크기와 모양의 특성이 바로 각 사람의 '성정'에 해당합니다. 성경을 보면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 사도 바울 등은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자기 만이 가진 성정의 특징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의분이 있고 급한 성품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훗날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가장 승하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지요. 그리고 예전의 의분과 급한 성품이 이제는 백성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뜨거운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변화된 후에는 수많은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까지도 그 마음 안에 다 담을 수 있는 큰 자가 되었지요. 백성들을 위한 애끓는 애통과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걸면서까지 백성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의 열정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모세 선지자가 미지근하고 냉랭한 성품이었다면, 백성들을 향한 그런 열정을 가지고 인도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40년 광야생활에 지쳐 버릴 수도 있지요. 이처럼 모세 선지자의 성정이 영적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쓰임 받았기에, 그 큰 사명을 아름답게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뿐 아니라, 신속히 영의 사람이 되어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각자의 성정에 따라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4단계'란?
선의 1단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단계, 사람이 보기에는 선하나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하지 않음
선의 2단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선
선의 3단계: 악으로 나오는 자에게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선
선의 4단계: 악한 자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
2012-07-27
제30과믿음의 4단계(3)
요 4:24
읽을말씀 : 요 4:24 | 외울말씀 : 외울 말씀: 요 4:24 l 참고 말씀:살전 5:23
교육목표 : 믿음의 4단계에서 5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 믿음의 성장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믿음의 4단계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기에 영의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4단계에서 믿음의 5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00으로 나눌 때 1~10% 미만까지는 초입이라고 하고, 10~20% 미만은 정체기, 20~50% 미만은 중엽, 50% 이상은 말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4단계 초입(1~10% 미만)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의 3단계 말엽인지, 아니면 믿음의 4단계로 들어왔는지 정확히 분별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 악은 다 버린 것 같지만 "내가 영으로 들어갔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기에는 뭔가 조금 부끄럽고 민망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볼 때도 악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사람은 확실히 영의 사람이다"라고 인정하기에는 주저할 수 있지요. 이러한 믿음의 4단계 초입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열매가 온전치 못합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불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항상 순종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명심하여 그대로 행하고자 하지요. 그런데도 열매가 온전치 않은 것은 마음에 맺힌 영의 열매가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온유하긴 한데 절제의 열매가 부족하다든가, 충성은 하는데 화평의 열매가 온전치 못하기도 합니다. 육의 사랑은 아니지만 아직 영의 사랑이 온전히 맺힌 것이 아니지요. 이처럼 아직 영의 열매들이 온전히 맺힌 것이 아니므로 실제 보이는 열매 역시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흥의 열매를 못 내기도 하고, 일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지요. 또 더 큰 열매를 낼 수 있음에도 어느 선에서 멈춰 버립니다. 4단계에서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영의 열매가 온전해지면서 눈에 보이는 열매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둘째, 온전한 선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은 악이 없는 마음이기에 악한 의도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지 못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내가 선하다 하지만 온전한 선이 아닌 것,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지 못하고,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하지요.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일이 지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남에게는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함 등 육의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믿음의 4단계 초입은 악의 모양은 다 벗었지만 아직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악은 아니지만 '하나님 보시기의 선'과는 아직 온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온전한 선이 아닌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셋째, 육체의 결여가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 80%에서 99%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육체의 결여 때문에 지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육체의 결여는 3단계 말엽의 결여와는 다릅니다. 악은 다 버렸으되 더 온전한 열매를 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결여를 말하지요.
예를 들면, 성격적인 결여로 인해 나서야 할 때도 잠잠히 있는 경우, 성장과정에서 생긴 결여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불편한 마음이나 감정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먼저 손을 내밀고 위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볼 때나 주위에서 볼 때 아직 '온전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의 4단계 정체기 (10~20% 미만)
믿음의 3단계에서 불같은 기도와 연단의 과정을 겪었다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서 정체기 없이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10~20% 미만에 머물러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영의 정체기'라고 합니다. 또한 더 깊은 영의 차원에 대한 사모함이 부족해서 정체되기도 하지요. 아무리 영의 초입에는 들어왔다 해도 거기서 더 이상 사모함을 갖지 못한 채 영의 세계를 뚫어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영의 정체 현상을 겪게 됩니다.
더 깊은 영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온전히 깨어지고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란,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육에 속한 자기'와는 다릅니다. 영으로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를 이루어 가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또 다른 자기'를 말합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는 않지만 온전한 선의 마음, 온전한 영의 열매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채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같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고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도 없지요. 그래서 불같은 기도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3. 믿음의 4단계 중엽 (20~50% 미만)
이 단계에만 들어와도 성도들의 인정을 받으며 목자와 함께 많은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육의 흔적에 의한 육체의 결여가 조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결여는 어떤 악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기 속에 있는 악까지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조금 남아 있는 결여라는 것은 육의 흔적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 타고난 기 속에서 형성된 각 사람의 '성정'에 관한 분야이지요.
성정이란 간단히 말해 타고난 본성입니다. 어떤 이는 소극적이고 어떤 이는 적극적이며, 어떤 이는 무디고 어떤 이는 예민합니다. 이처럼 타고난 성정의 차이로 인해 성격이나 행동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믿음의 4단계 50% 미만까지는 이렇게 성정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여를 다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정의 분야로 인한 결여를 어떻게 채워 가실까요? 가령, 성격이 소극적인 사람은 그의 소극적인 면을 섬세함으로 승화시키십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승화시키시지요. 또한 지혜롭고 민첩한 사람은 그 장점을 살리고, 좀 답답하고 무딘 사람도 그 장점을 살리시지요. 그래서 4단계 50% 이상을 넘어가면 이런 결여된 모습도 다 사라집니다.
둘째, 주님의 향이 납니다. 이때부터는 말하는 것, 먹는 것, 수저 드는 것, 신발 신는 것, 들어가는 것 등 모든 것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주님이 저렇게 하셨겠구나."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이 차원에 들어오면 모든 분야에서 영의 열매가 무르익어 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의 향을 내며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셋째,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믿음의 4단계 20%를 넘어가면 영의 사랑이 점점 더 온전해집니다. 여기에 덕까지 겸해지면서 많은 사람을 품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고,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 주니 많은 사람들이 영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런 영의 사랑이 결국 영혼을 변화시키고 많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 되지요. 그래서 믿음의 4단계 20~50% 미만에만 들어와도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4. 믿음의 4단계 말엽 (50% 이상)
믿음의 4단계 50% 이상이 되면 결여된 분야가 전혀 없고 '자기'라는 것도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든지 취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기꺼이 포기합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드릴 수 있음은 물론, 하나님과 100% 신뢰관계를 이루어 신뢰라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물론 모든 면이 온전해지려면 당연히 온 영의 차원(80% 이상)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믿음의 4단계 50%만 넘어도 그만큼 온전함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신속히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을 이루어 영의 사람이 되시기 바라며 믿음의 4단계 100%를 이루어 믿음의 5단계를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의 4단계 초입의 특징을 써 보세요.
---------------------------------------------------------------------------------------
2. 믿음의 4단계에서 정체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
3. 믿음의 4단계 중엽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의 흔적'이란?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성품이나 기질, 지식 등이 흔적처럼 남아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옷을 빨아도 찌든 때는 잘 안 지고 자국이 남듯이 육의 흔적이 바로 이런 자국과 같다.
교육목표 : 믿음의 4단계에서 5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 믿음의 성장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믿음의 4단계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기에 영의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4단계에서 믿음의 5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00으로 나눌 때 1~10% 미만까지는 초입이라고 하고, 10~20% 미만은 정체기, 20~50% 미만은 중엽, 50% 이상은 말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4단계 초입(1~10% 미만)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의 3단계 말엽인지, 아니면 믿음의 4단계로 들어왔는지 정확히 분별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 악은 다 버린 것 같지만 "내가 영으로 들어갔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기에는 뭔가 조금 부끄럽고 민망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볼 때도 악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사람은 확실히 영의 사람이다"라고 인정하기에는 주저할 수 있지요. 이러한 믿음의 4단계 초입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열매가 온전치 못합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불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항상 순종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명심하여 그대로 행하고자 하지요. 그런데도 열매가 온전치 않은 것은 마음에 맺힌 영의 열매가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온유하긴 한데 절제의 열매가 부족하다든가, 충성은 하는데 화평의 열매가 온전치 못하기도 합니다. 육의 사랑은 아니지만 아직 영의 사랑이 온전히 맺힌 것이 아니지요. 이처럼 아직 영의 열매들이 온전히 맺힌 것이 아니므로 실제 보이는 열매 역시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흥의 열매를 못 내기도 하고, 일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지요. 또 더 큰 열매를 낼 수 있음에도 어느 선에서 멈춰 버립니다. 4단계에서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영의 열매가 온전해지면서 눈에 보이는 열매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둘째, 온전한 선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은 악이 없는 마음이기에 악한 의도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지 못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내가 선하다 하지만 온전한 선이 아닌 것,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지 못하고,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하지요.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일이 지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남에게는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함 등 육의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믿음의 4단계 초입은 악의 모양은 다 벗었지만 아직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악은 아니지만 '하나님 보시기의 선'과는 아직 온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온전한 선이 아닌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셋째, 육체의 결여가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 80%에서 99%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육체의 결여 때문에 지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육체의 결여는 3단계 말엽의 결여와는 다릅니다. 악은 다 버렸으되 더 온전한 열매를 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결여를 말하지요.
예를 들면, 성격적인 결여로 인해 나서야 할 때도 잠잠히 있는 경우, 성장과정에서 생긴 결여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불편한 마음이나 감정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먼저 손을 내밀고 위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볼 때나 주위에서 볼 때 아직 '온전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의 4단계 정체기 (10~20% 미만)
믿음의 3단계에서 불같은 기도와 연단의 과정을 겪었다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서 정체기 없이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10~20% 미만에 머물러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영의 정체기'라고 합니다. 또한 더 깊은 영의 차원에 대한 사모함이 부족해서 정체되기도 하지요. 아무리 영의 초입에는 들어왔다 해도 거기서 더 이상 사모함을 갖지 못한 채 영의 세계를 뚫어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영의 정체 현상을 겪게 됩니다.
더 깊은 영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온전히 깨어지고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란,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육에 속한 자기'와는 다릅니다. 영으로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를 이루어 가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또 다른 자기'를 말합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는 않지만 온전한 선의 마음, 온전한 영의 열매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채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같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고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도 없지요. 그래서 불같은 기도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3. 믿음의 4단계 중엽 (20~50% 미만)
이 단계에만 들어와도 성도들의 인정을 받으며 목자와 함께 많은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육의 흔적에 의한 육체의 결여가 조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결여는 어떤 악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기 속에 있는 악까지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조금 남아 있는 결여라는 것은 육의 흔적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 타고난 기 속에서 형성된 각 사람의 '성정'에 관한 분야이지요.
성정이란 간단히 말해 타고난 본성입니다. 어떤 이는 소극적이고 어떤 이는 적극적이며, 어떤 이는 무디고 어떤 이는 예민합니다. 이처럼 타고난 성정의 차이로 인해 성격이나 행동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믿음의 4단계 50% 미만까지는 이렇게 성정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여를 다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정의 분야로 인한 결여를 어떻게 채워 가실까요? 가령, 성격이 소극적인 사람은 그의 소극적인 면을 섬세함으로 승화시키십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승화시키시지요. 또한 지혜롭고 민첩한 사람은 그 장점을 살리고, 좀 답답하고 무딘 사람도 그 장점을 살리시지요. 그래서 4단계 50% 이상을 넘어가면 이런 결여된 모습도 다 사라집니다.
둘째, 주님의 향이 납니다. 이때부터는 말하는 것, 먹는 것, 수저 드는 것, 신발 신는 것, 들어가는 것 등 모든 것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주님이 저렇게 하셨겠구나."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이 차원에 들어오면 모든 분야에서 영의 열매가 무르익어 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의 향을 내며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셋째,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믿음의 4단계 20%를 넘어가면 영의 사랑이 점점 더 온전해집니다. 여기에 덕까지 겸해지면서 많은 사람을 품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고,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 주니 많은 사람들이 영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런 영의 사랑이 결국 영혼을 변화시키고 많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 되지요. 그래서 믿음의 4단계 20~50% 미만에만 들어와도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4. 믿음의 4단계 말엽 (50% 이상)
믿음의 4단계 50% 이상이 되면 결여된 분야가 전혀 없고 '자기'라는 것도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든지 취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기꺼이 포기합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드릴 수 있음은 물론, 하나님과 100% 신뢰관계를 이루어 신뢰라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물론 모든 면이 온전해지려면 당연히 온 영의 차원(80% 이상)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믿음의 4단계 50%만 넘어도 그만큼 온전함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신속히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을 이루어 영의 사람이 되시기 바라며 믿음의 4단계 100%를 이루어 믿음의 5단계를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의 4단계 초입의 특징을 써 보세요.
---------------------------------------------------------------------------------------
2. 믿음의 4단계에서 정체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
3. 믿음의 4단계 중엽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요?
--------------------------------------------------------------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의 흔적'이란?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성품이나 기질, 지식 등이 흔적처럼 남아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옷을 빨아도 찌든 때는 잘 안 지고 자국이 남듯이 육의 흔적이 바로 이런 자국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