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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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제37과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입 맞추니
눅 7:36~38
읽을말씀 : 눅 7:36~38 | 외울말씀 : 잠 8:17 ㅣ 참고 말씀:눅 17:11~19
교육목표 :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만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당연하게 여기거나 어느 정도 감사해 하다가 “내가 할 바는 다했다.” 하며 멈추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도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사례하지요. 한 문둥병자만 그 마음에 선이 있었기에 은혜를 갚는 도리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갈릴리 호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막달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마을 전체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마리아’라는 여인이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했지요. 이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도 있고,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지요.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대대로 우상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나 그 가정에 임한 저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가족들로부터도 멸시 천대를 받았고 질병으로 더욱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 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며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도 귀하신 예수님 앞으로 감히 갈 수가 없어 예수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며 향유를 그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건강해진 마리아는 남은 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갔지만 마리아는 운명하시기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을 얻었지요. 이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다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뜻입니다.
옥합은 향유를 담은 귀한 그릇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매우 귀한 것으로 옥합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합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온전히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 할지라도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여 온전한 헌신이 나올 수 없지요. 자기의 몸 즉 외식을 깨뜨려 버릴 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옥합이 좋아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곧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몸, 즉 옥합을 깨뜨려 육체의 소욕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여인이 하염없는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도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요? 마리아는 어떤 인간적인 생각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 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처럼 흠과 티가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내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립니다.”라는 증표로서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주위 환경이 아무리 자신을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예수님께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담대하게 행함으로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사랑이 없었다면 이런 행함은 결코 나올 수 없었지요.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비진리를 깨뜨려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었다면, 예수님의 기쁨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청했던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합니다(눅 7:39).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함으로 그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말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 )
2.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3. 옥합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 )
4. 옥합을 깨뜨렸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5.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73~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구분 방법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장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에 나온다.
4. 가족 사항: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이며, 마르다와 자매간이다.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이다.
2. 장소: 갈릴리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누가복음 7장에만 나온다.
4. 가족사항: 가족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났다.
교육목표 :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만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당연하게 여기거나 어느 정도 감사해 하다가 “내가 할 바는 다했다.” 하며 멈추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도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사례하지요. 한 문둥병자만 그 마음에 선이 있었기에 은혜를 갚는 도리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갈릴리 호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막달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마을 전체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마리아’라는 여인이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했지요. 이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도 있고,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지요.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대대로 우상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나 그 가정에 임한 저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가족들로부터도 멸시 천대를 받았고 질병으로 더욱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 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며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도 귀하신 예수님 앞으로 감히 갈 수가 없어 예수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며 향유를 그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건강해진 마리아는 남은 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갔지만 마리아는 운명하시기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을 얻었지요. 이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다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뜻입니다.
옥합은 향유를 담은 귀한 그릇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매우 귀한 것으로 옥합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합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온전히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 할지라도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여 온전한 헌신이 나올 수 없지요. 자기의 몸 즉 외식을 깨뜨려 버릴 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옥합이 좋아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곧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몸, 즉 옥합을 깨뜨려 육체의 소욕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여인이 하염없는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도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요? 마리아는 어떤 인간적인 생각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 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처럼 흠과 티가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내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립니다.”라는 증표로서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주위 환경이 아무리 자신을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예수님께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담대하게 행함으로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사랑이 없었다면 이런 행함은 결코 나올 수 없었지요.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비진리를 깨뜨려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었다면, 예수님의 기쁨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청했던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합니다(눅 7:39).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함으로 그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말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 )
2.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3. 옥합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 )
4. 옥합을 깨뜨렸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5.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73~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구분 방법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장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에 나온다.
4. 가족 사항: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이며, 마르다와 자매간이다.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이다.
2. 장소: 갈릴리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누가복음 7장에만 나온다.
4. 가족사항: 가족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났다.
2014-09-08
제0과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0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_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____ 데살로니가전서 5:18 ___________________ 인도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 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사람들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에 당면하면 힘들어하기도 하고, 짜증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지요. 혹여 사는 것이 지치고 힘이 든다고 생각된다면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입니까? 산소 호흡기 없이 숨 쉴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장밋빛 꿈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여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은 술에 취해 귀가하더니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남편을 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고 서글퍼져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불현듯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범사에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라는 말씀이었지요.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 찾으려고 애쓰니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남편이라도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술에 만취하여 정신이 없어도 신기하게 집을 잘 찾아오니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꼭 주님을 영접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장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는 감사기도였는데 계속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자, 점점 진심에서 감사가 우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회개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 속으로 남편을 무시했던 것, 다른 남편들과 비교했던 것, 잘 섬기지 못했던 것” 등을 회개하였지요. 그러고 나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때 한참을 자던 남편이 눈을 떴는데 아내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여보! 그동안 나같이 부족한 사람하고 살아 줘서 너무나 감사해요. 밖에서 고생하고 온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트집 잡고 힘들게 했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잘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나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여보! 당신이 그렇게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했건만 듣지 않고 당신을 힘들게 했는데 오히려 나 같은 사람과 사는 것에 감사하다고 하니 민망하고 부끄럽구려.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소. 그리고 내가 교회 가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라면 당장 내일부터 가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을 기도해도 꿈쩍 않던 남편이 아내가 중심에서 회개하며 감사했을 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응답을 끌어내리는 통로가 됩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불통하여 괴로운 일 앞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당회장이신 이재록 목사님은 숨조차 쉬기 힘든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7년 동안 온갖 질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전에 가서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단번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으로 부르시고 무수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이 없고 영원토록 행복과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4차원의 영의 세계이므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지요. 더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최고의 선물이니 얼마나 행복과 기쁨, 감사가 넘쳐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삶이 고달파도 죽으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육이 있어서 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즉 주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지요.
우리 조상들도 사후 세계를 믿고 인정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해도, 사후 세계를 알았기에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면 마치 조상의 영혼이 와서 제사상을 받을 것이라 여겼지요. 그러나 죽으면 영혼이 이 땅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며 절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 구세주 되심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믿습니다. 혹여 그동안 진리를 몰라 제사를 드렸다 해도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았으니 천국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응답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풍성한 열매와 우리에게 늘 감사의 조건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향을 올려드리심으로, 항상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0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_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____ 데살로니가전서 5:18 ___________________ 인도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 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사람들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에 당면하면 힘들어하기도 하고, 짜증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지요. 혹여 사는 것이 지치고 힘이 든다고 생각된다면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입니까? 산소 호흡기 없이 숨 쉴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장밋빛 꿈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여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은 술에 취해 귀가하더니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남편을 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고 서글퍼져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불현듯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범사에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라는 말씀이었지요.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 찾으려고 애쓰니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남편이라도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술에 만취하여 정신이 없어도 신기하게 집을 잘 찾아오니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꼭 주님을 영접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장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는 감사기도였는데 계속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자, 점점 진심에서 감사가 우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회개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 속으로 남편을 무시했던 것, 다른 남편들과 비교했던 것, 잘 섬기지 못했던 것” 등을 회개하였지요. 그러고 나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때 한참을 자던 남편이 눈을 떴는데 아내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여보! 그동안 나같이 부족한 사람하고 살아 줘서 너무나 감사해요. 밖에서 고생하고 온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트집 잡고 힘들게 했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잘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나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여보! 당신이 그렇게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했건만 듣지 않고 당신을 힘들게 했는데 오히려 나 같은 사람과 사는 것에 감사하다고 하니 민망하고 부끄럽구려.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소. 그리고 내가 교회 가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라면 당장 내일부터 가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을 기도해도 꿈쩍 않던 남편이 아내가 중심에서 회개하며 감사했을 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응답을 끌어내리는 통로가 됩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불통하여 괴로운 일 앞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당회장이신 이재록 목사님은 숨조차 쉬기 힘든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7년 동안 온갖 질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전에 가서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단번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으로 부르시고 무수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이 없고 영원토록 행복과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4차원의 영의 세계이므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지요. 더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최고의 선물이니 얼마나 행복과 기쁨, 감사가 넘쳐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삶이 고달파도 죽으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육이 있어서 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즉 주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지요.
우리 조상들도 사후 세계를 믿고 인정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해도, 사후 세계를 알았기에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면 마치 조상의 영혼이 와서 제사상을 받을 것이라 여겼지요. 그러나 죽으면 영혼이 이 땅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며 절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 구세주 되심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믿습니다. 혹여 그동안 진리를 몰라 제사를 드렸다 해도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았으니 천국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응답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풍성한 열매와 우리에게 늘 감사의 조건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향을 올려드리심으로, 항상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4-09-05
제36과하나님의 선하신 뜻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2 ㅣ 참고 말씀:롬 7:21~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함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사전에서 선(善)이란 ‘착하다, 좋다, 또는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에 맞추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기준, 즉 지금까지 자신이 쌓은 지식이나 상식, 이론들로 만들어진 ‘양심’이라는 틀 속에 맞추어 ‘선하다’, ‘선하지 않다’라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1.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란?
로마서 7장 21절을 보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 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진리의 속성이 있는가 하면, 불의와 불법을 행하기 원하는 비진리의 속성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어지는 22~23절에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하며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지요.
먼저 ‘속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합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 받은 생명의 지식이 들어 있으며 ‘선 자체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마음의 법’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입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입니다.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 즉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혼합된 것으로서 나름대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 기준이 되지요. 그런데 양심은 각 사람의 자라온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을 통해 배웠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다른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만일 이때 엄마가 “아이구, 바보야! 왜 너는 맞고 다녀!”라고 야단을 쳤다면 그 아이는 ‘맞고 오면 바보구나. 때려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악한 양심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먼저 진리로 잘 분별해 준 다음 “얘야, 아프겠구나. 그렇지만 네가 참고 용서해 주렴!” 할 것입니다. 이 아이는 ‘누가 나를 때린다고 해서 같이 때리는 것은 악한 것이야. 차라리 내가 맞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야!’ 하며 선한 양심을 만들어가게 되지요. 따라서 양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에는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곧 세상을 좇아 들어온 비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굳어진 것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비진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 말씀한 ‘죄의 법’이 바로 이 마음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에게 악을 품고 심한 욕을 했다거나, 살인이나 도적질을 했다면 이는 악한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에 맞춰야 선과 악을 바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각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배움이 다르고 지식과 교양이 다르니 사람마다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바라보는 각 사람의 생각이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다른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66권입니다.
2.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기 원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셔서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거나 누구는 축복하시고 누구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지요.
예를 들어,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문제는 복음을 듣는 사람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지요.
우리가 믿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날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자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축복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선민이 아니라 이방인인데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며 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3. 응답과 축복의 기준이 되는 선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18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선하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기준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던 다윗 왕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책망하셨습니다(삼하 12:9).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임을 알려 주셨지요. 또한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 기준이 되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 교본만 백 번, 천 번 읽고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이론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았을 때 가능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와 선의 행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쉽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신속히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미움을 버리고자 할 때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상대를 품으면 더 신속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정해 놓으신 선의 기준과 테두리 안에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응답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로마서 7:22~23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해당되는 마음을 ( ) 안에 넣어 보세요.
( )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한다.
( )은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을 말한다. ‘양심’으로 불린다.
( )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다.
2. 다음 ( ) 안을 채워 보세요.
( )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 )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 )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45~7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본성’과 ‘양심’의 차이
‘본성’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근본된 성질을 말한다. 곧 마음 밭의 토질이라 할 수 있다.
‘양심’은 각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갖고 있던 본성에다 이후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가치 판단 기준이다. 다시 말해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함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사전에서 선(善)이란 ‘착하다, 좋다, 또는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에 맞추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기준, 즉 지금까지 자신이 쌓은 지식이나 상식, 이론들로 만들어진 ‘양심’이라는 틀 속에 맞추어 ‘선하다’, ‘선하지 않다’라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1.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란?
로마서 7장 21절을 보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 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진리의 속성이 있는가 하면, 불의와 불법을 행하기 원하는 비진리의 속성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어지는 22~23절에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하며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지요.
먼저 ‘속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합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 받은 생명의 지식이 들어 있으며 ‘선 자체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마음의 법’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입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입니다.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 즉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혼합된 것으로서 나름대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 기준이 되지요. 그런데 양심은 각 사람의 자라온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을 통해 배웠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다른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만일 이때 엄마가 “아이구, 바보야! 왜 너는 맞고 다녀!”라고 야단을 쳤다면 그 아이는 ‘맞고 오면 바보구나. 때려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악한 양심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먼저 진리로 잘 분별해 준 다음 “얘야, 아프겠구나. 그렇지만 네가 참고 용서해 주렴!” 할 것입니다. 이 아이는 ‘누가 나를 때린다고 해서 같이 때리는 것은 악한 것이야. 차라리 내가 맞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야!’ 하며 선한 양심을 만들어가게 되지요. 따라서 양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에는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곧 세상을 좇아 들어온 비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굳어진 것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비진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 말씀한 ‘죄의 법’이 바로 이 마음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에게 악을 품고 심한 욕을 했다거나, 살인이나 도적질을 했다면 이는 악한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에 맞춰야 선과 악을 바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각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배움이 다르고 지식과 교양이 다르니 사람마다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바라보는 각 사람의 생각이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다른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66권입니다.
2.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기 원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셔서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거나 누구는 축복하시고 누구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지요.
예를 들어,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문제는 복음을 듣는 사람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지요.
우리가 믿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날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자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축복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선민이 아니라 이방인인데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며 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3. 응답과 축복의 기준이 되는 선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18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선하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기준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던 다윗 왕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책망하셨습니다(삼하 12:9).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임을 알려 주셨지요. 또한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 기준이 되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 교본만 백 번, 천 번 읽고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이론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았을 때 가능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와 선의 행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쉽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신속히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미움을 버리고자 할 때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상대를 품으면 더 신속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정해 놓으신 선의 기준과 테두리 안에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응답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로마서 7:22~23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해당되는 마음을 ( ) 안에 넣어 보세요.
( )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한다.
( )은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을 말한다. ‘양심’으로 불린다.
( )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다.
2. 다음 ( ) 안을 채워 보세요.
( )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 )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 )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45~7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본성’과 ‘양심’의 차이
‘본성’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근본된 성질을 말한다. 곧 마음 밭의 토질이라 할 수 있다.
‘양심’은 각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갖고 있던 본성에다 이후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가치 판단 기준이다. 다시 말해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2014-08-29
제35과여호와의 묵시와 정한 때
합 2:2~4
읽을말씀 : 합 2:2~4 | 외울말씀 : 암 3:7 ㅣ 참고 말씀:마 24장
교육목표 : 부활 승천 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운 마지막 때 영적으로 깨어 신부단장에 힘쓰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지요.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 만물이 봄이 되면 깨어납니다. 죽은 것 같았던 씨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요.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 달과 별들도 질서와 조화 속에 운행합니다.
이처럼 우주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박국은 유다 18대 왕 여호야김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호야김은 온갖 악을 행하며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하나님께 회개치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한 상태였고, 남유다도 언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 시국에서도 여호야김은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하여 애굽 왕에게 바치며 바벨론를 견제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여호야김의 악정에 격분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답답하여 하소연하지요(합 1:2~4).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가 무르익어 패역하였음을 다 보고 계셨기에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에게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합 1:5~11).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에 너무 놀랐습니다. 갈대아는 바벨론으로 그들은 사납고 잔인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더구나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박국의 예언대로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유다를 멸망시키지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지 않고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지가 궁금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합니다. 그 내용이 하박국 2장 2~4절에 나오지요. 즉 유다를 심판했던 강대국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 바벨론도 바사에게 멸망함으로 하박국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심판의 때 의인도 멸망당할까요? 아니지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지만 아무리 악한 세상 속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입니다(전 12:14).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죄했을지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회개치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며 관계가 단절되고 맙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집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습니다.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하지요. 너무 급박하자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간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바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이 관영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지요.
3.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 찰 때마다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묵시의 때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현세대는 어떻습니까?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 어디에서도 의인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즉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심판할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성경에는 마지막 때 징조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2~14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했고, 32~34절에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며 무화과 비유가 나오지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하여 백성들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들의 민족과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독립 국가를 세웠지요.
이는 에스겔 38장 8~12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즉 말년에 세계 곳곳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었지요.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국민들까지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1900여 년이 지나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에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친히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함을 깨달아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롯의 아내처럼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신 대로 오늘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는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주님께서 구름 타고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지요.
신랑 되신 주님과 눈물, 슬픔, 고통,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소망한다면 결코 현실을 바라보며 힘들어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조국의 악을 목도하고 슬퍼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어느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여 심판하시겠다고 알려 주셨나요? ( )
2. 무화과나무는 어느 나라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 )
3. 이스라엘은 언제 독립국가를 세웠나요? ( )
4.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 )을 말한다.
( )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 )이 오신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3~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벨론’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를 가리킨다.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포도 농사를 위해 남겨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바벨론 3차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제국들 중에 가장 수명이 짧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70년 만에 멸망하였다.
교육목표 : 부활 승천 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운 마지막 때 영적으로 깨어 신부단장에 힘쓰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지요.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 만물이 봄이 되면 깨어납니다. 죽은 것 같았던 씨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요.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 달과 별들도 질서와 조화 속에 운행합니다.
이처럼 우주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박국은 유다 18대 왕 여호야김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호야김은 온갖 악을 행하며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하나님께 회개치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한 상태였고, 남유다도 언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 시국에서도 여호야김은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하여 애굽 왕에게 바치며 바벨론를 견제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여호야김의 악정에 격분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답답하여 하소연하지요(합 1:2~4).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가 무르익어 패역하였음을 다 보고 계셨기에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에게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합 1:5~11).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에 너무 놀랐습니다. 갈대아는 바벨론으로 그들은 사납고 잔인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더구나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박국의 예언대로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유다를 멸망시키지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지 않고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지가 궁금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합니다. 그 내용이 하박국 2장 2~4절에 나오지요. 즉 유다를 심판했던 강대국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 바벨론도 바사에게 멸망함으로 하박국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심판의 때 의인도 멸망당할까요? 아니지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지만 아무리 악한 세상 속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입니다(전 12:14).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죄했을지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회개치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며 관계가 단절되고 맙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집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습니다.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하지요. 너무 급박하자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간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바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이 관영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지요.
3.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 찰 때마다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묵시의 때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현세대는 어떻습니까?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 어디에서도 의인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즉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심판할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성경에는 마지막 때 징조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2~14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했고, 32~34절에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며 무화과 비유가 나오지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하여 백성들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들의 민족과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독립 국가를 세웠지요.
이는 에스겔 38장 8~12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즉 말년에 세계 곳곳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었지요.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국민들까지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1900여 년이 지나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에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친히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함을 깨달아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롯의 아내처럼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신 대로 오늘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는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주님께서 구름 타고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지요.
신랑 되신 주님과 눈물, 슬픔, 고통,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소망한다면 결코 현실을 바라보며 힘들어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조국의 악을 목도하고 슬퍼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어느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여 심판하시겠다고 알려 주셨나요? ( )
2. 무화과나무는 어느 나라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 )
3. 이스라엘은 언제 독립국가를 세웠나요? ( )
4.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 )을 말한다.
( )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 )이 오신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3~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벨론’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를 가리킨다.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포도 농사를 위해 남겨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바벨론 3차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제국들 중에 가장 수명이 짧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70년 만에 멸망하였다.
2014-08-22
제34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눅 8:43~48
읽을말씀 : 눅 8:43~48 | 외울말씀 : 히 11:6 ㅣ 참고 말씀:룻 1장, 눅 21:1~4
교육목표 :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료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 저녁,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몹시 기뻐 그때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도마는 직접 자신이 주님의 못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 믿겠다고 합니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시지요(요 20:29).
마음이 의로운 사람은 선하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귀감으로 삼습니다. 반면 나쁜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동조하거나 악을 행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것을 교훈 삼아 “나는 그렇게 행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집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치료받은 여인의 믿음
누가복음 8장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나옵니다. 혈루증은 습관성 자궁 출혈로 계속하여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1, 2년도 아니고 12년이나 고통을 받았으니 몸에 기운은 다하고 마음의 상처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구나 혈루증은 부정하게 여기는 병으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절망했을 법도 한데, 여인은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문둥병, 중풍,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케 되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으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마음 중심이 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대로 믿어졌습니다.
여인은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찾아갔지요. 막상 도착해 보니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저렇게 높고 위대하신 분 앞에 내가 감히 입이나 뗄 수 있을까?’ 했지만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가 즉시로 혈루병의 근원이 마르고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할렐루야!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룻과 요셉의 중심
이 여인의 중심이 선하여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나와 치료받았던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의인들의 중심은 남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이나 요셉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룻은 모압 지방의 이방 여인이며, 나오미의 며느리입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기근을 피해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이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집안에 남자들은 다 죽고 과부가 된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유다 땅에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두 며느리를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나오미는 가는 도중에 두 며느리가 타국에서 남편도 없이 살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했습니다. 새 출발 하라는 것이지요. 이에 오르바는 울면서 떠났지만 룻은 죽는 일 외에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룻기 1장 16~17절에 보면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고 고백하지요.
룻은 아무리 앞날이 고생스럽고 험난하다 해도 홀로 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자녀 된 도리를 다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의 도리를 다한 룻을 축복하여 주셨지요. 곧 베들레헴에 부유한 사람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룻을 통해 우리가 깨우쳐야 할 점은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도리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중심이 의로웠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희생하며 도리를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룻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3년 만에 애굽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이복형들은 요셉이 보복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요셉에게 행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구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이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며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요셉처럼 행할 수 있겠는지요? 요셉은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악하니 요셉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판단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인과 악인의 마음씀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하고 의로웠다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한순간의 실수로 범죄했다 해도 그 아우 앞에 무릎 꿇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운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3. 겸비한 자세로 믿음의 행함을 내보인 혈루증 여인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혈루증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기고 접촉조차 피했기 때문입니다(레 15:25). 그러니 예수님 앞에 나서거나 감히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조차 민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귀하신 그분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겸비한 자세로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 즉시 응답과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일을 하는 데 있어 혹 자기 생각이나 악에 가려 해결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같이 자기를 낮추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배움이 부족하다, 가난하다, 못났다 하는 이유로 담대히 나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다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면 누구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진정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눅 21:1~4). 렙돈은 그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의 동전입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헌금한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지요.
사르밧 과부도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으로 양식을 만들어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물질의 적고 많음이 아니라 마음 중심과 믿음의 행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을 찾으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이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는 만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영적 믿음을 주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역사하시지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혈루증을 치료받았던 여인처럼 겸비한 중심으로 구하여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어떻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 )
2. ( ) 안에 알맞은 주인공을 써 보세요.
①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녀 된 도리를 다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어요. ( )
②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어요. ( )
③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마지막 먹을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드려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1~20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들레헴’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예수님의 탄생지이다.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했다(미 5:2). 그 예언은 메시아가 그곳에서 탄생함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이 미가의 예언을 믿고 있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이기도 하다.
교육목표 :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료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 저녁,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몹시 기뻐 그때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도마는 직접 자신이 주님의 못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 믿겠다고 합니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시지요(요 20:29).
마음이 의로운 사람은 선하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귀감으로 삼습니다. 반면 나쁜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동조하거나 악을 행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것을 교훈 삼아 “나는 그렇게 행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집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치료받은 여인의 믿음
누가복음 8장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나옵니다. 혈루증은 습관성 자궁 출혈로 계속하여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1, 2년도 아니고 12년이나 고통을 받았으니 몸에 기운은 다하고 마음의 상처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구나 혈루증은 부정하게 여기는 병으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절망했을 법도 한데, 여인은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문둥병, 중풍,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케 되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으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마음 중심이 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대로 믿어졌습니다.
여인은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찾아갔지요. 막상 도착해 보니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저렇게 높고 위대하신 분 앞에 내가 감히 입이나 뗄 수 있을까?’ 했지만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가 즉시로 혈루병의 근원이 마르고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할렐루야!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룻과 요셉의 중심
이 여인의 중심이 선하여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나와 치료받았던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의인들의 중심은 남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이나 요셉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룻은 모압 지방의 이방 여인이며, 나오미의 며느리입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기근을 피해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이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집안에 남자들은 다 죽고 과부가 된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유다 땅에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두 며느리를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나오미는 가는 도중에 두 며느리가 타국에서 남편도 없이 살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했습니다. 새 출발 하라는 것이지요. 이에 오르바는 울면서 떠났지만 룻은 죽는 일 외에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룻기 1장 16~17절에 보면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고 고백하지요.
룻은 아무리 앞날이 고생스럽고 험난하다 해도 홀로 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자녀 된 도리를 다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의 도리를 다한 룻을 축복하여 주셨지요. 곧 베들레헴에 부유한 사람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룻을 통해 우리가 깨우쳐야 할 점은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도리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중심이 의로웠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희생하며 도리를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룻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3년 만에 애굽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이복형들은 요셉이 보복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요셉에게 행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구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이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며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요셉처럼 행할 수 있겠는지요? 요셉은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악하니 요셉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판단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인과 악인의 마음씀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하고 의로웠다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한순간의 실수로 범죄했다 해도 그 아우 앞에 무릎 꿇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운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3. 겸비한 자세로 믿음의 행함을 내보인 혈루증 여인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혈루증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기고 접촉조차 피했기 때문입니다(레 15:25). 그러니 예수님 앞에 나서거나 감히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조차 민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귀하신 그분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겸비한 자세로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 즉시 응답과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일을 하는 데 있어 혹 자기 생각이나 악에 가려 해결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같이 자기를 낮추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배움이 부족하다, 가난하다, 못났다 하는 이유로 담대히 나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다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면 누구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진정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눅 21:1~4). 렙돈은 그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의 동전입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헌금한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지요.
사르밧 과부도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으로 양식을 만들어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물질의 적고 많음이 아니라 마음 중심과 믿음의 행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을 찾으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이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는 만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영적 믿음을 주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역사하시지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혈루증을 치료받았던 여인처럼 겸비한 중심으로 구하여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어떻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 )
2. ( ) 안에 알맞은 주인공을 써 보세요.
①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녀 된 도리를 다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어요. ( )
②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어요. ( )
③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마지막 먹을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드려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1~20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들레헴’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예수님의 탄생지이다.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했다(미 5:2). 그 예언은 메시아가 그곳에서 탄생함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이 미가의 예언을 믿고 있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이기도 하다.
2014-08-15
제33과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8
읽을말씀 : 딤후 4:7~8 | 외울말씀 : 딤후 4:7 ㅣ 참고 말씀:히 11:6
교육목표 :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응답받아 축복된 삶을 영위하며 소망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다는 핑계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법을 행하는 비굴한 일은 결코 없어야 하지요. 어찌하든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성령 받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믿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당당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결국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니 생명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수제자가 되었지요.
2. 믿음을 굳게 지킨 선진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데다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대교도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지요.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떠했습니까? 다니엘은 바사 제국 총리가 됐을 때 시기하는 무리의 궤계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그들은 왕에게 한 달 동안 왕 외에 사람이나 신 앞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는 금령을 반포하게 하였지요. 이를 알면서도 다니엘은 습관을 좇아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앞일에 대해 밝히 알려 주시며 높여 주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노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지려 할 때에도 그들은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다니엘 3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풀무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같이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비진리에 동조하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 뜻이 아니면 과감히 끊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설령 핍박을 받는다 해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지요. 만일 주를 위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면 천국에서 세세토록 영광을 누릴 것이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과 달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에게 매수당한 두 거짓 증인이 그 예입니다. 그들의 거짓 모함으로 무죄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킨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행치 않습니다. 어떤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을 하며 믿음을 저버립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은 아람 나라에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남유다 여호사밧 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선지자들에게 들어보자고 제안하지요. 그래서 아합 왕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중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흔들며 승리를 장담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며, 아합 왕은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승리를 호언장담하지요. 아합은 미가야를 투옥시키고 여호사밧 연합군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결과는 시드기야와 사백 인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 왕이 맞아 전사하였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던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거짓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맞을 리가 없음을 증명해 주었지요.
사도 바울의 동역자 데마 역시 믿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재차 투옥되자 바울을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과 함께 고난당하기보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기록합니다(딤후 4:10).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진리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호수아 당시 아간이란 사람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함락 후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 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지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그 행한 일을 고하라고 하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라고 이실직고하지요(수 7:21).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였고, 범죄한 아간은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좌우로 치우치거나 자기의 유익을 좇아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일이 결단코 없어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가운데 행하면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고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자기의 유익을 좇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인물을 써 보세요.
1.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성령을 받은 후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
2. 독실한 유대교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으나 주님을 만난 후 이방인 의 사도로 순교하기까지 복음 전파에 힘썼다.( )
3.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당하는 것이 싫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 )
4.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서 나온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도적질하여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79~1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길르앗 라못’
요단 동편에 위치하며 솔로몬 시대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스라엘로서는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성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아람의 연합군을 두 번이나 물리쳐 주시고 아합 왕에게 아람 왕 벤하닷을 죽일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아합 왕은 벤하닷의 “빼앗은 성읍들은 모두 이스라엘에 돌려주며,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아합의 이름을 딴 거리를 놓겠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살려 보냈다. 3년이 지나도록 성읍들을 돌려주지 않자 아합 왕은 사돈 관계를 맺은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결탁하여 아람과의 전쟁을 일으켰다가 전사하고 만다.
교육목표 :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응답받아 축복된 삶을 영위하며 소망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다는 핑계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법을 행하는 비굴한 일은 결코 없어야 하지요. 어찌하든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성령 받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믿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당당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결국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니 생명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수제자가 되었지요.
2. 믿음을 굳게 지킨 선진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데다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대교도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지요.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떠했습니까? 다니엘은 바사 제국 총리가 됐을 때 시기하는 무리의 궤계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그들은 왕에게 한 달 동안 왕 외에 사람이나 신 앞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는 금령을 반포하게 하였지요. 이를 알면서도 다니엘은 습관을 좇아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앞일에 대해 밝히 알려 주시며 높여 주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노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지려 할 때에도 그들은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다니엘 3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풀무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같이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비진리에 동조하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 뜻이 아니면 과감히 끊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설령 핍박을 받는다 해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지요. 만일 주를 위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면 천국에서 세세토록 영광을 누릴 것이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과 달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에게 매수당한 두 거짓 증인이 그 예입니다. 그들의 거짓 모함으로 무죄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킨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행치 않습니다. 어떤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을 하며 믿음을 저버립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은 아람 나라에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남유다 여호사밧 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선지자들에게 들어보자고 제안하지요. 그래서 아합 왕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중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흔들며 승리를 장담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며, 아합 왕은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승리를 호언장담하지요. 아합은 미가야를 투옥시키고 여호사밧 연합군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결과는 시드기야와 사백 인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 왕이 맞아 전사하였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던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거짓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맞을 리가 없음을 증명해 주었지요.
사도 바울의 동역자 데마 역시 믿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재차 투옥되자 바울을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과 함께 고난당하기보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기록합니다(딤후 4:10).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진리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호수아 당시 아간이란 사람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함락 후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 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지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그 행한 일을 고하라고 하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라고 이실직고하지요(수 7:21).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였고, 범죄한 아간은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좌우로 치우치거나 자기의 유익을 좇아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일이 결단코 없어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가운데 행하면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고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자기의 유익을 좇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인물을 써 보세요.
1.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성령을 받은 후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
2. 독실한 유대교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으나 주님을 만난 후 이방인 의 사도로 순교하기까지 복음 전파에 힘썼다.( )
3.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당하는 것이 싫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 )
4.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서 나온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도적질하여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79~1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길르앗 라못’
요단 동편에 위치하며 솔로몬 시대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스라엘로서는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성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아람의 연합군을 두 번이나 물리쳐 주시고 아합 왕에게 아람 왕 벤하닷을 죽일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아합 왕은 벤하닷의 “빼앗은 성읍들은 모두 이스라엘에 돌려주며,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아합의 이름을 딴 거리를 놓겠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살려 보냈다. 3년이 지나도록 성읍들을 돌려주지 않자 아합 왕은 사돈 관계를 맺은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결탁하여 아람과의 전쟁을 일으켰다가 전사하고 만다.
2014-08-08
제32과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5
읽을말씀 : 막 2:1~5 | 외울말씀 : 출 15:26 ㅣ 참고 말씀:마 8:13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이 너무 심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 대소변마저도 남이 받아 줘야 했습니다. 참으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지요. 이 중풍병자에게 낫는다는 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각색 질병을 치료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등 놀라운 권능을 행하신다는 것이었지요. 그는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치료받을 수 있겠구나!” 과연 중풍병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네 친구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으로 가득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치료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은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그분 앞으로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선뜻 들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해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인해 헤치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사람들에게 “여기 환자가 있으니 좀 비켜 주세요.”라고 부탁도 하고 애원도 해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이들은 너무나 절박했기에 결국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바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끈으로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즉시 치료해 주셨습니다.
2. 믿음을 내보임으로 치료받은 중풍병자
만일 중풍병자가 집 안에 가만히 누워서 “주여, 믿습니다. 제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거 아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제가 여기 누워 있어도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했다면 과연 치료받았을까요? 아니지요.
마가복음 2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희의 믿음 곧 마음으로 믿은 믿음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내보인 것입니다. 믿음을 내보이지 않고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중풍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 불편한 몸을 들것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의 친구들 역시 선하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지붕까지 뜯어가며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내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응답받기 위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 눈에 보이는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있는지요?
집을 건축할 때 입으로만 “집을 짓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백 번, 천 번 외쳐도 지어지지 않습니다. 땅을 파고 기초공사를 해야 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야 합니다. 즉 지식적으로 담아 놓은 하나님 말씀을 눈에 보이도록 직접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그 행함을 보시고 영적 믿음을 주시며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면 그때가 바로 응답의 때입니다. 사람에 따라 오늘 받을 수도, 내일 받을 수도, 한 달 후에 받을 수도, 일 년, 수년 후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항상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3. 죄 사함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
이처럼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셨지요. 즉 치료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지요. 모든 병이 죄로 인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때도 먼저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만 역사가 되지요. 즉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던 길을 백팔십도 돌려 동으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자 그가 일어나 자기 누운 침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 왔을 때는 들것에 실려 왔는데 죄를 용서받고 치료받으니 곧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4.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의인
의인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풍병자가 선하고 친구들에게 잘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네 친구들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아픈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는 것만 봐도 그들이 선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를 통해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의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후덕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다니엘, 요셉, 룻 같은 분들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은혜와 덕을 끼쳤습니까? 욥에게도 많은 친구가 있었지요. 친구들은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같이 염려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만큼 욥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욥기 2장 12~13절에 잘 나와 있지요.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했지요. 욥기 4장부터는 친구들이 욥을 위한다면서 깨우쳐 주려 한 것이 자기 보기에 의였기 때문에 변론이 일어났지만 처음부터 악한 동기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의인에게는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릅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직장이나 사업터에서도 의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때문에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응답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지요.
둘째, 의인에게는 믿음의 행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친구가 죽어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믿음으로 구제하고 도우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친구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였지요. 자신의 생각이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고 분명히 역사하여 불가능한 것까지라도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고 역사해 주시지요. 그러니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까요?
( )
2. 질병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일까요?
( )
3.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예수께서 저희의 ( )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 )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마가복음 2:5)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65~1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가버나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가버나움을 ‘본 동네’라고 부를 만큼 전도에 집중하셨던 곳이다. 가버나움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로마 군대 백부장이 하인의 중풍을 치료받기도 하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과 귀신 들린 자, 중풍병자 외에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 등에서 많은 권능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마11:20~23) 두로와 시돈, 소돔성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지금의 가버나움은 폐허가 되어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이 너무 심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 대소변마저도 남이 받아 줘야 했습니다. 참으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지요. 이 중풍병자에게 낫는다는 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각색 질병을 치료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등 놀라운 권능을 행하신다는 것이었지요. 그는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치료받을 수 있겠구나!” 과연 중풍병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네 친구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으로 가득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치료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은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그분 앞으로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선뜻 들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해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인해 헤치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사람들에게 “여기 환자가 있으니 좀 비켜 주세요.”라고 부탁도 하고 애원도 해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이들은 너무나 절박했기에 결국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바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끈으로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즉시 치료해 주셨습니다.
2. 믿음을 내보임으로 치료받은 중풍병자
만일 중풍병자가 집 안에 가만히 누워서 “주여, 믿습니다. 제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거 아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제가 여기 누워 있어도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했다면 과연 치료받았을까요? 아니지요.
마가복음 2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희의 믿음 곧 마음으로 믿은 믿음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내보인 것입니다. 믿음을 내보이지 않고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중풍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 불편한 몸을 들것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의 친구들 역시 선하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지붕까지 뜯어가며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내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응답받기 위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 눈에 보이는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있는지요?
집을 건축할 때 입으로만 “집을 짓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백 번, 천 번 외쳐도 지어지지 않습니다. 땅을 파고 기초공사를 해야 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야 합니다. 즉 지식적으로 담아 놓은 하나님 말씀을 눈에 보이도록 직접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그 행함을 보시고 영적 믿음을 주시며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면 그때가 바로 응답의 때입니다. 사람에 따라 오늘 받을 수도, 내일 받을 수도, 한 달 후에 받을 수도, 일 년, 수년 후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항상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3. 죄 사함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
이처럼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셨지요. 즉 치료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지요. 모든 병이 죄로 인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때도 먼저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만 역사가 되지요. 즉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던 길을 백팔십도 돌려 동으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자 그가 일어나 자기 누운 침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 왔을 때는 들것에 실려 왔는데 죄를 용서받고 치료받으니 곧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4.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의인
의인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풍병자가 선하고 친구들에게 잘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네 친구들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아픈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는 것만 봐도 그들이 선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를 통해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의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후덕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다니엘, 요셉, 룻 같은 분들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은혜와 덕을 끼쳤습니까? 욥에게도 많은 친구가 있었지요. 친구들은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같이 염려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만큼 욥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욥기 2장 12~13절에 잘 나와 있지요.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했지요. 욥기 4장부터는 친구들이 욥을 위한다면서 깨우쳐 주려 한 것이 자기 보기에 의였기 때문에 변론이 일어났지만 처음부터 악한 동기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의인에게는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릅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직장이나 사업터에서도 의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때문에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응답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지요.
둘째, 의인에게는 믿음의 행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친구가 죽어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믿음으로 구제하고 도우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친구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였지요. 자신의 생각이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고 분명히 역사하여 불가능한 것까지라도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고 역사해 주시지요. 그러니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까요?
( )
2. 질병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일까요?
( )
3.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예수께서 저희의 ( )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 )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마가복음 2:5)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65~1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가버나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가버나움을 ‘본 동네’라고 부를 만큼 전도에 집중하셨던 곳이다. 가버나움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로마 군대 백부장이 하인의 중풍을 치료받기도 하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과 귀신 들린 자, 중풍병자 외에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 등에서 많은 권능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마11:20~23) 두로와 시돈, 소돔성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지금의 가버나움은 폐허가 되어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2014-08-01
제31과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 11:6
읽을말씀 : 히 11:6 | 외울말씀 : 히 11:6 l 참고 말씀:히 11장
교육목표 : 선진들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무엇이든지 응답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운동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야 땀 흘린 수고에 대한 보람을 얻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훈련을 받으며 고생했는데도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물론 국민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금메달을 따면 국민의 사랑과 대환영을 받으며 나라에서 연금과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운동선수들처럼 힘든 훈련을 받아 금메달을 따야 기뻐하실까요? 아니지요. 바로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보장해 주십니다.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창조주가 되시며 심판자가 되십니다. 학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부귀를 주실 수도 있고, 권세자로 세우거나 폐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8절에는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리한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적군을 물리쳐 승리하였습니다(삿 7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적의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니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해 주셨지요(대하 20:21~28).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는 물론, 사업이 위태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형통케 하며 크게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는데 이때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믿음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을 바로 알아 쉽게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요.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을 믿으니 능히 할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창 4:3~5). 즉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자기 방식대로 육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오늘날 예배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지 찾고 계십니다. 잡념 없이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여 예배드리며, 어린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말씀에 경청하는 자녀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옮기웠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죄가 있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에녹은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녹과 300년간 동행하셨다고 나옵니다. 에녹의 나이 65세부터 동행해 주셨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실 수 있는 온전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빛 자체가 되시기 때문에 악을 벗고 진리 안에 사는 참 자녀를 사랑하시며 그와 동행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악취 나고 더러운 쓰레기는 집에 두지 않고 버려야 하듯이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포하고 패괴한 세대였습니다. 온 세상이 죄로 가득해져 사람들은 정욕과 쾌락을 좇으며 먹고 마시고 취하며 시집가고 장가가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의인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주를 오랜 기간에 걸쳐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하였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지어 홍수 심판에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응답받으려면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나오는 사람 중에는 기도받고 단번에 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년, 2년, 10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로 치료받은 뒤에 변치 않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중심이라면 아직은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없다 해도 치료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믿음이 성장하고 얼마나 정성을 내보여 행하느냐에 따라 치료받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얼마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어려운 일, 즉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귀신이 나가는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행함과 정성과 중심, 그리고 사랑과 헌신과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롭고 선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비진리와 악의 모습을 벗고 진리를 좇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육적인 믿음을 소유하는데 이것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우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배운 것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행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기도하는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쁘시게 하는가에 따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군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지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응답으로 축복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녀가 되어 먹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선진들의 이름을 넣어 보세요.
( )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지만 가인은 육의 제사를 드림으로 받지 않으셨다.
( )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 )는 강포하고 패괴한 세대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지어 홍수심판에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
2.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 )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 )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51~1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여호사밧 왕’
유다 4대 왕으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17장). 레위사람, 제사장을 뽑아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공정한 재판을 하게 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들 여호람을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와 정략 결혼을 시켜 훗날 유다가 종교적으로 부패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교육목표 : 선진들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무엇이든지 응답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운동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야 땀 흘린 수고에 대한 보람을 얻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훈련을 받으며 고생했는데도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물론 국민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금메달을 따면 국민의 사랑과 대환영을 받으며 나라에서 연금과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운동선수들처럼 힘든 훈련을 받아 금메달을 따야 기뻐하실까요? 아니지요. 바로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보장해 주십니다.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창조주가 되시며 심판자가 되십니다. 학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부귀를 주실 수도 있고, 권세자로 세우거나 폐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8절에는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리한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적군을 물리쳐 승리하였습니다(삿 7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적의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니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해 주셨지요(대하 20:21~28).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는 물론, 사업이 위태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형통케 하며 크게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는데 이때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믿음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을 바로 알아 쉽게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요.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을 믿으니 능히 할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창 4:3~5). 즉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자기 방식대로 육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오늘날 예배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지 찾고 계십니다. 잡념 없이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여 예배드리며, 어린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말씀에 경청하는 자녀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옮기웠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죄가 있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에녹은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녹과 300년간 동행하셨다고 나옵니다. 에녹의 나이 65세부터 동행해 주셨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실 수 있는 온전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빛 자체가 되시기 때문에 악을 벗고 진리 안에 사는 참 자녀를 사랑하시며 그와 동행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악취 나고 더러운 쓰레기는 집에 두지 않고 버려야 하듯이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포하고 패괴한 세대였습니다. 온 세상이 죄로 가득해져 사람들은 정욕과 쾌락을 좇으며 먹고 마시고 취하며 시집가고 장가가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의인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주를 오랜 기간에 걸쳐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하였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지어 홍수 심판에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응답받으려면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나오는 사람 중에는 기도받고 단번에 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년, 2년, 10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로 치료받은 뒤에 변치 않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중심이라면 아직은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없다 해도 치료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믿음이 성장하고 얼마나 정성을 내보여 행하느냐에 따라 치료받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얼마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어려운 일, 즉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귀신이 나가는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행함과 정성과 중심, 그리고 사랑과 헌신과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롭고 선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비진리와 악의 모습을 벗고 진리를 좇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육적인 믿음을 소유하는데 이것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우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배운 것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행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기도하는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쁘시게 하는가에 따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군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지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응답으로 축복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녀가 되어 먹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선진들의 이름을 넣어 보세요.
( )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지만 가인은 육의 제사를 드림으로 받지 않으셨다.
( )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 )는 강포하고 패괴한 세대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지어 홍수심판에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
2.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 )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 )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51~1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여호사밧 왕’
유다 4대 왕으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17장). 레위사람, 제사장을 뽑아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공정한 재판을 하게 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들 여호람을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와 정략 결혼을 시켜 훗날 유다가 종교적으로 부패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2014-07-25
제30과들풀도 입히시거든
마 6:26~33
읽을말씀 : 마 6:26~33 | 외울말씀 : 마 6:33 ㅣ 참고 말씀:전 1:2~3
교육목표 :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믿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보장을 받게 한다.
세상에서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아 아무 부족한 것 없는 사람도 질병이나 가족 간의 문제 등 이런저런 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사람에게 죽음과 질병, 염려가 오게 된 원인
중국을 통일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진시황도 그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불과 50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고민하며 수고하고 힘써 무언가를 이루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헛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하시지요(마 6:25~27). 만일 염려해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몸과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 재물과 건강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원치 않는 질병이나 각종 문제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저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라고 말씀하셨지요(창 3:17~19). 이로 인해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땀 흘려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진시황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2. 솔로몬 왕의 고백과 사람의 본분
솔로몬 왕은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니 그 부귀영화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금이 넘쳐 나고 은은 돌같이 흔할 정도였습니다.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평지의 뽕나무같이 허다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예물을 가져오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쳤으니 그 권력과 명성이 어마어마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백합화는 자신이 수고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피는데 사람은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하니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말년에 기록한 전도서를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고백하며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의 명예, 권세, 부귀영화 같은 것은 안개처럼 없어질 헛된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은 참으로 복된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라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에 연연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사글세 사는 사람은 전셋집에 살고자 하고, 전셋집에 사는 사람은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힘쓰지요. 또 집을 장만하면 이제는 더 큰 집과 다른 것도 갖고자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힘써 수고하는 동안 세월 또한 많이 흘러가지요. 그러니 탱탱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굵은 주름이 생기고, 머리는 희끗희끗해집니다. 중년에서 황혼에 이르고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한평생 수고하여 잠시 풍족한 삶을 누렸다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합니까.
과연 그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고 영생이 없으니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남을 짓밟아서라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취하고 많은 재물을 모은다 해도 결국은 영원한 사망 곧 지옥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십니다(전 12:14).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 안에 거함으로 영생을 약속받는 삶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3.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려면
들풀도 입히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헛되고 헛된 삶을 살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함으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영혼을 구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영혼 구원이었습니다(행 1:8). 그러니 부모, 형제, 일가친척, 일터, 사업터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나라와 민족,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결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음을 할례하여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결국 영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할 것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진리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어떻게 먹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를 궁구하며 “불편한 마음은 없었는지, 혈기를 부리거나 감정은 갖지 않았는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는지, 나를 드러내거나 나를 주장하지는 않았는지” 등을 살피며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것을 염려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악을 찾아 버리며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자녀를 축복하시며 먹이고 입히고 책임져 주십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먹을 것이 없을 때 까마귀를 통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것을 살피시고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먹고 사는 일로 염려한다면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의인이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너희는 먼저 그의 ( )와 그의 ( )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영혼 구원을 말한다.
②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본 진시황도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하였다.
③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한다는 뜻이다.
④ 수많은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만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3. 전도서를 기록하였으며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 보았지만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일까요?
(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39~1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솔로몬’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받았다.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고,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주변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전을 세우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교육목표 :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믿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보장을 받게 한다.
세상에서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아 아무 부족한 것 없는 사람도 질병이나 가족 간의 문제 등 이런저런 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사람에게 죽음과 질병, 염려가 오게 된 원인
중국을 통일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진시황도 그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불과 50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고민하며 수고하고 힘써 무언가를 이루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헛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하시지요(마 6:25~27). 만일 염려해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몸과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 재물과 건강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원치 않는 질병이나 각종 문제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저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라고 말씀하셨지요(창 3:17~19). 이로 인해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땀 흘려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진시황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2. 솔로몬 왕의 고백과 사람의 본분
솔로몬 왕은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니 그 부귀영화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금이 넘쳐 나고 은은 돌같이 흔할 정도였습니다.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평지의 뽕나무같이 허다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예물을 가져오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쳤으니 그 권력과 명성이 어마어마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백합화는 자신이 수고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피는데 사람은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하니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말년에 기록한 전도서를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고백하며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의 명예, 권세, 부귀영화 같은 것은 안개처럼 없어질 헛된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은 참으로 복된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라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에 연연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사글세 사는 사람은 전셋집에 살고자 하고, 전셋집에 사는 사람은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힘쓰지요. 또 집을 장만하면 이제는 더 큰 집과 다른 것도 갖고자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힘써 수고하는 동안 세월 또한 많이 흘러가지요. 그러니 탱탱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굵은 주름이 생기고, 머리는 희끗희끗해집니다. 중년에서 황혼에 이르고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한평생 수고하여 잠시 풍족한 삶을 누렸다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합니까.
과연 그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고 영생이 없으니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남을 짓밟아서라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취하고 많은 재물을 모은다 해도 결국은 영원한 사망 곧 지옥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십니다(전 12:14).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 안에 거함으로 영생을 약속받는 삶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3.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려면
들풀도 입히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헛되고 헛된 삶을 살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함으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영혼을 구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영혼 구원이었습니다(행 1:8). 그러니 부모, 형제, 일가친척, 일터, 사업터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나라와 민족,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결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음을 할례하여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결국 영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할 것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진리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어떻게 먹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를 궁구하며 “불편한 마음은 없었는지, 혈기를 부리거나 감정은 갖지 않았는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는지, 나를 드러내거나 나를 주장하지는 않았는지” 등을 살피며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것을 염려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악을 찾아 버리며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자녀를 축복하시며 먹이고 입히고 책임져 주십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먹을 것이 없을 때 까마귀를 통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것을 살피시고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먹고 사는 일로 염려한다면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의인이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너희는 먼저 그의 ( )와 그의 ( )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영혼 구원을 말한다.
②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본 진시황도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하였다.
③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한다는 뜻이다.
④ 수많은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만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3. 전도서를 기록하였으며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 보았지만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일까요?
(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39~1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솔로몬’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받았다.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고,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주변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전을 세우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2014-07-18
제29과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4~28
읽을말씀 : 마 15:24~28 | 외울말씀 : 롬 1:17 ㅣ 참고 말씀:삼상 21장, 왕하 25장
교육목표 : 자존심이 없는 의롭고 겸비한 마음이 되어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자존심이란 ‘자기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자존심을 버리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였기에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다윗
다윗은 블레셋 최고의 용사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어 백전백승하였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그런데 이를 시기한 사울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이 얼마나 두렵고 절박했던지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21장).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국이며 ‘가드’라는 성읍은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자기 나라 최고의 전사를 죽이고 병사들을 수없이 죽인 다윗을 당장에 처치하라고 하지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척하여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아기스 왕은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 이 자를 데려왔느냐?” 하며 쫓아내 버리지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왕이 되어 블레셋을 완전히 굴복시켜 조공을 바치게 했고, 견고한 통일왕국을 이룩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행동하였겠습니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죽을망정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생명을 건져 훗날을 기약했습니다. 이를 통해 과연 자존심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정녕 옳은 것인지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자존심을 내세우다 비참하게 죽은 시드기야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어떠했습니까? 바벨론의 피지배국이었던 유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똑똑한 귀인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평범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유다에 남았습니다. 이때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소환을 당해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리에 동맹관계를 맺고 내통하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기에 이르고야 말지요.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지만 시드기야 왕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선지자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세 번째 침략을 당하고 말지요.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에 무려 1년 7개월간 포위되어 성 안의 보급 물자들이 완전히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와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한밤중에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배반한 시드기야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버리지요.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인지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3. 겸비한 마음으로 응답받은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마 15:21~28).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지요.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큰소리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즉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지요. 여인이 계속하여 소리 지르자 오히려 제자들이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씀드릴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공손히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 취급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운함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구하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자 딸이 그때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를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4. 의로운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은, 오로지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분을 누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여인의 중심이 의롭고 겸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을 때도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순간에 지혜를 짜내 “내가 이렇게 대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과 겸손이 그대로 나왔을 뿐이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며, 마음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육의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영의 마음,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 어떤 문제든 응답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중심이 겸비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고백을 하여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해도 믿음의 행함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됩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에 변함이 없으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셔도 요지부동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 말씀에 겸손히 긍정의 고백을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내보이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권세 등을 얻기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존심을 철저히 버리고 낮아지며 겸비한 자가 되어 수고하며 인내해야 하지요.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판단 정죄하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 등을 온전히 버려야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윗을 시기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도망간 나라는 어디일까요? ( )
2.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블레셋 왕에게 가서 어떠한 행동을 하였나요?
( )
3. 나는 누구일까요? ( )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망당했습니다.”
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 취급하였을 때 여인은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나요?
(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25~13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수로보니게’
팔레스타인 북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이르는 말이다.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수리아의 베니게란 뜻이다(막 7:26).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나안 여자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가나안이 베니게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교육목표 : 자존심이 없는 의롭고 겸비한 마음이 되어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자존심이란 ‘자기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자존심을 버리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였기에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다윗
다윗은 블레셋 최고의 용사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어 백전백승하였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그런데 이를 시기한 사울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이 얼마나 두렵고 절박했던지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21장).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국이며 ‘가드’라는 성읍은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자기 나라 최고의 전사를 죽이고 병사들을 수없이 죽인 다윗을 당장에 처치하라고 하지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척하여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아기스 왕은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 이 자를 데려왔느냐?” 하며 쫓아내 버리지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왕이 되어 블레셋을 완전히 굴복시켜 조공을 바치게 했고, 견고한 통일왕국을 이룩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행동하였겠습니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죽을망정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생명을 건져 훗날을 기약했습니다. 이를 통해 과연 자존심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정녕 옳은 것인지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자존심을 내세우다 비참하게 죽은 시드기야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어떠했습니까? 바벨론의 피지배국이었던 유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똑똑한 귀인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평범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유다에 남았습니다. 이때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소환을 당해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리에 동맹관계를 맺고 내통하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기에 이르고야 말지요.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지만 시드기야 왕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선지자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세 번째 침략을 당하고 말지요.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에 무려 1년 7개월간 포위되어 성 안의 보급 물자들이 완전히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와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한밤중에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배반한 시드기야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버리지요.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인지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3. 겸비한 마음으로 응답받은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마 15:21~28).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지요.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큰소리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즉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지요. 여인이 계속하여 소리 지르자 오히려 제자들이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씀드릴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공손히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 취급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운함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구하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자 딸이 그때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를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4. 의로운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은, 오로지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분을 누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여인의 중심이 의롭고 겸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을 때도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순간에 지혜를 짜내 “내가 이렇게 대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과 겸손이 그대로 나왔을 뿐이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며, 마음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육의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영의 마음,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 어떤 문제든 응답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중심이 겸비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고백을 하여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해도 믿음의 행함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됩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에 변함이 없으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셔도 요지부동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 말씀에 겸손히 긍정의 고백을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내보이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권세 등을 얻기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존심을 철저히 버리고 낮아지며 겸비한 자가 되어 수고하며 인내해야 하지요.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판단 정죄하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 등을 온전히 버려야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윗을 시기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도망간 나라는 어디일까요? ( )
2.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블레셋 왕에게 가서 어떠한 행동을 하였나요?
( )
3. 나는 누구일까요? ( )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망당했습니다.”
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 취급하였을 때 여인은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나요?
( )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25~13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수로보니게’
팔레스타인 북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이르는 말이다.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수리아의 베니게란 뜻이다(막 7:26).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나안 여자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가나안이 베니게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