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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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1
제44과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5~13
읽을말씀 : 마 8:5~13 | 외울말씀 : 약 2:26 ㅣ 참고 말씀:요 1:47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말과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 가버나움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지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며 체면을 중시했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판단 정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그 앞에 나왔지요.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며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소문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지요. 설령 하나님을 몰라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의 축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 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인품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했을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즉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응답해 주셨지요.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즉 백부장의 마음속에 진실함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지요.
셋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며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가 진리 가운데 살아감으로 마음이 변화되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는 하늘처럼 높으신 분이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며 중심에서 더욱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자신을 종의 위치로까지 낮추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지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십니다.
본 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 돼요.”라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일 때는 속지도 않을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한 말과 행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백부장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 )
2. 백부장은 누구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나요? ( )
3.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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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뭐라고 대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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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49~27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믿음’이란?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다 믿으며, 한 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다. 또한 알고 있는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거를 보이는 믿음을 말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말과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 가버나움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지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며 체면을 중시했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판단 정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그 앞에 나왔지요.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며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소문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지요. 설령 하나님을 몰라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의 축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 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인품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했을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즉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응답해 주셨지요.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즉 백부장의 마음속에 진실함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지요.
셋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며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가 진리 가운데 살아감으로 마음이 변화되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는 하늘처럼 높으신 분이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며 중심에서 더욱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자신을 종의 위치로까지 낮추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지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십니다.
본 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 돼요.”라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일 때는 속지도 않을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한 말과 행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백부장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 )
2. 백부장은 누구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나요? ( )
3.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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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뭐라고 대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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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49~27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믿음’이란?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다 믿으며, 한 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다. 또한 알고 있는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거를 보이는 믿음을 말한다.
2014-10-24
제43과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5:21~28
읽을말씀 : 마 15:21~28 | 외울말씀 : 잠 18:12 l 참고 말씀:막 7:24~30
교육목표 :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겸비한 마음과 믿음의 고백으로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마디 말이 상대에게 감동을 줄 때 그 열매는 상상할 수도 없이 큰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선한 감동의 말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며 행복을 안겨다 주므로, 잔칫집의 흥겨운 음악 소리보다 즐겁다 할 수 있지요. 세상에는 선한 말로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악하고 미련한 말을 내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그 말로 인해 자신도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얼마나 선한 믿음의 고백이 감동을 주며,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머무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지방에도 두루 퍼져 있어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지요.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귀신이 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만나게 된 것이지요.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이 치료받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르는 척 외면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지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나설 수 없는 데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측은했던지 보다 못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청합니다. 제자들까지 나섰으니 예수님께서 “그럼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여인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대답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라고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온 것이지 이방인인 너를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 타교회 다니시는데 불치병에 걸려 치료받고자 “당회장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회장님께서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니니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때 “아이구! 사랑이 많으신 줄 알았는데….” 하며 실망하며 포기해 버리거나, “듣던 소문과는 다르네. 세상에 내 교회, 네 교회 따질 수 있는가? 그래도 찾아온 성의가 있는데 기도해 주셔야지.” 서운해하며 돌아가 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선한 사람은 “당회장님, 저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왔으니 기도해 주시면 나을 줄로 믿습니다.” 하며 끝까지 매달릴 것입니다. 당회장님께서 그렇게 박대하실 리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정말 선한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온 분이라면,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로 감동적인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더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2.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끝까지 겸비하게 믿음을 내보인 여인
예수님께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간청하는 여인에게 응답하셨을까요? 오히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에게 베푸는 것은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는 “여인아, 너는 개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개는 가증한 동물로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했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 7:6) 했지요. 만일 일말의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손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옳습니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부터 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주여 내가 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다시 간청하였습니다. 끝까지 겸비한 자세로 믿음을 내보인 여인의 선한 말은 예수님을 감동시켜 결국 응답을 주시기에 이릅니다. 즉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선은 무엇일까요?
3. 응답받을 수밖에 없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딸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어미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자기가 그 고통을 대신했으면 했지 딸의 고통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소리 질러 소원을 아뢰었지요. 하지만 여인에게 돌아온 것은 응답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이셨고 그다음에는 개 취급을 당하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여인에게 그처럼 매몰차게 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또 여인을 통해 참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개 취급을 받고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는 것은 여인이 그만큼 선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요. 딸이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개 취급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고, 그보다 더 낮아져도 상관이 없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무엇이며 부끄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에서는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서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고 하며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선한 중심에 겸비한 마음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이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애매한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거나 다투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나에게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일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꼭 마음에 새겨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응답받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 )
2.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에 비유를 당하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에 어떠한 선한 고백을 예수님께 했을까요?
( )
3. 성경에 개는 가증한 동물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찾아 써 보세요.
( )
4. 만일 여러분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25~24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에게 먹게 하는 것은 최고의 모욕’
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가 먹도록 방치하는 것을 최고의 모욕과 수치로 여겼다. 북이스라엘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심히 타락하였다. 그 응징으로 이세벨은 창 밖으로 던져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왕상 21:23)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왕하 9:30~37).
교육목표 :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겸비한 마음과 믿음의 고백으로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마디 말이 상대에게 감동을 줄 때 그 열매는 상상할 수도 없이 큰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선한 감동의 말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며 행복을 안겨다 주므로, 잔칫집의 흥겨운 음악 소리보다 즐겁다 할 수 있지요. 세상에는 선한 말로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악하고 미련한 말을 내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그 말로 인해 자신도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얼마나 선한 믿음의 고백이 감동을 주며,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머무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지방에도 두루 퍼져 있어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지요.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귀신이 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만나게 된 것이지요.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이 치료받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르는 척 외면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지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나설 수 없는 데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측은했던지 보다 못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청합니다. 제자들까지 나섰으니 예수님께서 “그럼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여인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대답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라고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온 것이지 이방인인 너를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 타교회 다니시는데 불치병에 걸려 치료받고자 “당회장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회장님께서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니니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때 “아이구! 사랑이 많으신 줄 알았는데….” 하며 실망하며 포기해 버리거나, “듣던 소문과는 다르네. 세상에 내 교회, 네 교회 따질 수 있는가? 그래도 찾아온 성의가 있는데 기도해 주셔야지.” 서운해하며 돌아가 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선한 사람은 “당회장님, 저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왔으니 기도해 주시면 나을 줄로 믿습니다.” 하며 끝까지 매달릴 것입니다. 당회장님께서 그렇게 박대하실 리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정말 선한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온 분이라면,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로 감동적인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더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2.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끝까지 겸비하게 믿음을 내보인 여인
예수님께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간청하는 여인에게 응답하셨을까요? 오히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에게 베푸는 것은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는 “여인아, 너는 개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개는 가증한 동물로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했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 7:6) 했지요. 만일 일말의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손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옳습니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부터 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주여 내가 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다시 간청하였습니다. 끝까지 겸비한 자세로 믿음을 내보인 여인의 선한 말은 예수님을 감동시켜 결국 응답을 주시기에 이릅니다. 즉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선은 무엇일까요?
3. 응답받을 수밖에 없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딸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어미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자기가 그 고통을 대신했으면 했지 딸의 고통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소리 질러 소원을 아뢰었지요. 하지만 여인에게 돌아온 것은 응답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이셨고 그다음에는 개 취급을 당하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여인에게 그처럼 매몰차게 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또 여인을 통해 참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개 취급을 받고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는 것은 여인이 그만큼 선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요. 딸이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개 취급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고, 그보다 더 낮아져도 상관이 없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무엇이며 부끄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에서는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서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고 하며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선한 중심에 겸비한 마음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이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애매한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거나 다투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나에게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일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꼭 마음에 새겨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응답받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 )
2.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에 비유를 당하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에 어떠한 선한 고백을 예수님께 했을까요?
( )
3. 성경에 개는 가증한 동물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찾아 써 보세요.
( )
4. 만일 여러분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25~24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에게 먹게 하는 것은 최고의 모욕’
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가 먹도록 방치하는 것을 최고의 모욕과 수치로 여겼다. 북이스라엘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심히 타락하였다. 그 응징으로 이세벨은 창 밖으로 던져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왕상 21:23)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왕하 9:30~37).
2014-10-17
제42과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읽을말씀 : 단 3:13~18 | 외울말씀 : 살전 5:16~18 ㅣ 참고 말씀:고후 11:23~27
교육목표 :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요즘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거나,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니 나도 그 대가로 무엇을 해 준다.”는 조건부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이렇게 해 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도 조건 없이 해 주면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부적인 모습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어떤 타협이나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의 세 친구
바벨론은 B.C. 605년 남유다를 침략하여 왕족과 귀족 등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있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남유다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진미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습니다. 다니엘은 감독자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할 테니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보라고 청합니다. 열흘 후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 아름답고 윤택하였기에 채식만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2. “우리 하나님이 능히 건져 내시겠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느 날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모두 절하게 한 것입니다. 만일 신상에 경배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했지요. 그러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절을 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조금도 요동함 없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히 말합니다(단 3:17~18).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것이기에 이런 시험이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행할 바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칠 배나 더한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 나왔지요(단 3:27).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단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3. 조건부적인 신앙을 깨뜨려야
만일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가정, 일터, 사업터의 문제를 해결받기 원한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온전히 말씀대로 행해 왔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행할 바를 하지 않으면서 응답이 더디다고 원망,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냉철히 살펴보아야 하지요.
또한 할 바는 어느 정도 했어도 응답될 때까지 변함없이 행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즉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해 버리고, 원망과 탄식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하지요. 만약 그런 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가 없지요.
더구나 “내가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정말 믿겠다.”라는 조건부적인 신앙이라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조건부적인 거짓된 믿음입니다.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믿고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겠다는 것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조건부적인 신앙과 충성에 응답해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하는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내가 설령 응답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감사하며 믿어드려야 하지요.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며, 이런 선의 마음이 있을 때 그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한 번 주님을 만난 후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순교하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행 20:24).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지요.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변함없는 중심으로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지요.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감당할 때 사람에게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면 이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염려했지요.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행 19:12).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남유다 족속으로 B.C. 605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 아닌 것은?
① 다니엘 ② 사드락 ③ 아벳느고 ④ 느부갓네살
2.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명령했던 바벨론 왕은 누구일까요? ( )
3.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을지언정 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을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왜 조건부적인 신앙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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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99~2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교육목표 :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요즘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거나,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니 나도 그 대가로 무엇을 해 준다.”는 조건부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이렇게 해 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도 조건 없이 해 주면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부적인 모습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어떤 타협이나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의 세 친구
바벨론은 B.C. 605년 남유다를 침략하여 왕족과 귀족 등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있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남유다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진미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습니다. 다니엘은 감독자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할 테니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보라고 청합니다. 열흘 후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 아름답고 윤택하였기에 채식만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2. “우리 하나님이 능히 건져 내시겠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느 날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모두 절하게 한 것입니다. 만일 신상에 경배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했지요. 그러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절을 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조금도 요동함 없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히 말합니다(단 3:17~18).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것이기에 이런 시험이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행할 바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칠 배나 더한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 나왔지요(단 3:27).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단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3. 조건부적인 신앙을 깨뜨려야
만일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가정, 일터, 사업터의 문제를 해결받기 원한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온전히 말씀대로 행해 왔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행할 바를 하지 않으면서 응답이 더디다고 원망,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냉철히 살펴보아야 하지요.
또한 할 바는 어느 정도 했어도 응답될 때까지 변함없이 행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즉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해 버리고, 원망과 탄식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하지요. 만약 그런 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가 없지요.
더구나 “내가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정말 믿겠다.”라는 조건부적인 신앙이라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조건부적인 거짓된 믿음입니다.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믿고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겠다는 것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조건부적인 신앙과 충성에 응답해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하는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내가 설령 응답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감사하며 믿어드려야 하지요.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며, 이런 선의 마음이 있을 때 그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한 번 주님을 만난 후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순교하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행 20:24).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지요.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변함없는 중심으로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지요.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감당할 때 사람에게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면 이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염려했지요.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행 19:12).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남유다 족속으로 B.C. 605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 아닌 것은?
① 다니엘 ② 사드락 ③ 아벳느고 ④ 느부갓네살
2.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명령했던 바벨론 왕은 누구일까요? ( )
3.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을지언정 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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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조건부적인 신앙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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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99~2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2014-10-10
제41과범죄치 마옵소서
삼상 19:1~6
읽을말씀 : 삼상 19:1~6 | 외울말씀 : 살전 5:22 ㅣ 참고 말씀:삼상 20장
교육목표 :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상대가 범죄치 않도록 도와주며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게 한다.
악한 아버지 사울 왕으로 인해 아들 요나단은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수시로 간언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요나단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였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백성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할 정도로 사울 왕의 신임을 받았지요(삼상 20:2). 그런데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을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다윗을 그 위험에서 도와주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해 준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입니다. 만일 다윗이 없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 져서 사울 왕의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전쟁에 나가는 곳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였지요.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리가 없지요. 오히려 아버지가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언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9장 4~5절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단호히 직언을 올리지요.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육적으로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되면 요나단이 왕위에 오를 수 없으니 차라리 다윗이 죽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지요. 요나단의 말에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는 것 같았지만 얼마 못 가 또 변개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옆에서 요나단은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막았고, 이에 사울 왕은 노하여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반응을 보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감시하거나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요나단에게 심히 노하며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수치이며, 다윗은 죽어야 할 자라.” 하지요.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고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악을 깨우쳐 주지요. 그러자 사울 왕은 단창을 들어 아들 요나단을 치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지요.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더욱 큰 고통을 받지요.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지요.
사울 왕처럼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또한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 받기도 하고, 머리가 범죄하면 그 피해가 더 심각해질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본이 된 성도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작은 죄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려 묵과해 버리지요. 이는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도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 무조건 덮어 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버릴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이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 때 그 악에 동조하지 않고 간언하였고 마침내는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지요. 요나단이 죽자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우해 주며, 사울 왕의 재산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울 왕의 장남은 누구일까요?
① 기스 ② 말기수아 ③ 미갈 ④ 요나단
2.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보세요.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 )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 )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 )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3.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할 때 요나단이 사울에게 직언한 내용입니다. 사무엘상 19:4~5을 써보세요.
( )
4.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크게 범죄했는데도 말로만 타이르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75~19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 제사장’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이며, 사사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두 아들을 교육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불량자인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는데도 엘리 제사장은 어떤 징계도 가하지 않고 말로써만 타이를 뿐이었다. 이로 인해 가문에 저주가 임해 두 아들이 전투에서 죽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교육목표 :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상대가 범죄치 않도록 도와주며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게 한다.
악한 아버지 사울 왕으로 인해 아들 요나단은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수시로 간언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요나단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였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백성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할 정도로 사울 왕의 신임을 받았지요(삼상 20:2). 그런데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을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다윗을 그 위험에서 도와주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해 준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입니다. 만일 다윗이 없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 져서 사울 왕의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전쟁에 나가는 곳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였지요.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리가 없지요. 오히려 아버지가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언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9장 4~5절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단호히 직언을 올리지요.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육적으로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되면 요나단이 왕위에 오를 수 없으니 차라리 다윗이 죽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지요. 요나단의 말에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는 것 같았지만 얼마 못 가 또 변개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옆에서 요나단은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막았고, 이에 사울 왕은 노하여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반응을 보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감시하거나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요나단에게 심히 노하며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수치이며, 다윗은 죽어야 할 자라.” 하지요.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고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악을 깨우쳐 주지요. 그러자 사울 왕은 단창을 들어 아들 요나단을 치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지요.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더욱 큰 고통을 받지요.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지요.
사울 왕처럼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또한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 받기도 하고, 머리가 범죄하면 그 피해가 더 심각해질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본이 된 성도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작은 죄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려 묵과해 버리지요. 이는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도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 무조건 덮어 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버릴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이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 때 그 악에 동조하지 않고 간언하였고 마침내는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지요. 요나단이 죽자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우해 주며, 사울 왕의 재산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울 왕의 장남은 누구일까요?
① 기스 ② 말기수아 ③ 미갈 ④ 요나단
2.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보세요.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 )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 )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 )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3.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할 때 요나단이 사울에게 직언한 내용입니다. 사무엘상 19:4~5을 써보세요.
( )
4.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크게 범죄했는데도 말로만 타이르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75~19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 제사장’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이며, 사사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두 아들을 교육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불량자인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는데도 엘리 제사장은 어떤 징계도 가하지 않고 말로써만 타이를 뿐이었다. 이로 인해 가문에 저주가 임해 두 아들이 전투에서 죽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2014-09-26
제39과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출 20:12 l 참고 말씀:잠 4:2
교육목표 : 자기의 도리를 다하며 변함없이 선을 행함으로 룻처럼 영육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지켜야 할 도리마저 저버리는 일들이 많지요. 어떤 사람들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 귀찮다고 낯선 곳에 버리는가 하면, 홀대하고 때리는 등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마저 식어버린 때에 상대가 가족도 아닌 남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 속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찾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자기 도리를 좇아 행한 이방 여인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심한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지요.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와 룻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납니다. 가는 도중에 나오미는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룻 1:8). 남편도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서인 오르바는 울면서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시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도록 감동적인 고백을 드리지요.
룻기 1장 16~17절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히 고백합니다.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고 당장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합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의 모습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게 유익이 오겠다!” 하며 계산하여 따지지 않고 오직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온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바른 도리를 좇아 변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2.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
오늘날은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하여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을 공경하는 것을 마땅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렸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외에도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는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않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으로 자기 도리를 다하면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 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여 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야 했지요.
그런데도 성도님은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 선한 행함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마음을 주관하여 돌아오게 하셨고, 단칸방에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해 행복하게 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 학교 등 있는 곳을 지켜 주십니다. 즉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않고,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게 되지요.
그러면 룻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고, 이런 행함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것을 변함없는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행함을 통해 나는 얼마나 상대의 유익을 구하였는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그렇지 못했다면 정녕 돌이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도리를 지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라야 룻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선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회개하여 돌이키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 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룻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① 암몬 ② 베들레헴 ③ 모압 ④ 이집트
2.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심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오르바 ② 룻 ③ 에스더 ④ 아비가일
3.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룻은 비록 ( )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 )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 )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 )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4. 만일 여러분이 룻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홀로된 시어머니에게 자녀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21~14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압 족속’
롯의 맏딸과 롯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이다. 모압 족속은 요단강 동편 사해 남동쪽 해안의 고원지대에서 살았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행로 중 하나였는데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압 땅 싯딤에 있을 동안 모압 여인들에 의해 음행의 죄를 짓게 하였다.
교육목표 : 자기의 도리를 다하며 변함없이 선을 행함으로 룻처럼 영육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지켜야 할 도리마저 저버리는 일들이 많지요. 어떤 사람들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 귀찮다고 낯선 곳에 버리는가 하면, 홀대하고 때리는 등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마저 식어버린 때에 상대가 가족도 아닌 남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 속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찾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자기 도리를 좇아 행한 이방 여인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심한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지요.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와 룻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납니다. 가는 도중에 나오미는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룻 1:8). 남편도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서인 오르바는 울면서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시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도록 감동적인 고백을 드리지요.
룻기 1장 16~17절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히 고백합니다.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고 당장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합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의 모습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게 유익이 오겠다!” 하며 계산하여 따지지 않고 오직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온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바른 도리를 좇아 변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2.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
오늘날은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하여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을 공경하는 것을 마땅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렸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외에도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는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않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으로 자기 도리를 다하면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 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여 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야 했지요.
그런데도 성도님은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 선한 행함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마음을 주관하여 돌아오게 하셨고, 단칸방에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해 행복하게 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 학교 등 있는 곳을 지켜 주십니다. 즉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않고,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게 되지요.
그러면 룻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고, 이런 행함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것을 변함없는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행함을 통해 나는 얼마나 상대의 유익을 구하였는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그렇지 못했다면 정녕 돌이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도리를 지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라야 룻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선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회개하여 돌이키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 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룻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① 암몬 ② 베들레헴 ③ 모압 ④ 이집트
2.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심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오르바 ② 룻 ③ 에스더 ④ 아비가일
3.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룻은 비록 ( )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 )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 )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 )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4. 만일 여러분이 룻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홀로된 시어머니에게 자녀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21~14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압 족속’
롯의 맏딸과 롯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이다. 모압 족속은 요단강 동편 사해 남동쪽 해안의 고원지대에서 살았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행로 중 하나였는데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압 땅 싯딤에 있을 동안 모압 여인들에 의해 음행의 죄를 짓게 하였다.
2014-09-19
제38과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4
읽을말씀 : 창 12:1~4 | 외울말씀 : 민 23:19 ㅣ 참고 말씀:말 3:10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복, 장수의 복 등 모든 복을 누렸습니다. 또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셨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소유했기에 이러한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순종
창세기 1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2)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지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았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고요?”라는 어떤 하 소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순종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히 11:17~19).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므로 의심이나 원망, 불평하는 것을 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지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장 10절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그러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여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면 이삭을 하란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를 묻지요.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창 24:7).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종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하게 만났습니다(창 24장).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좇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입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하지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거할 때 소돔과 고모라가 주변 나라와 싸움에서 패하여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때 롯이 사로잡혀 가고 재물까지 노략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해 오지요.
하나님께서는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시지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그가 사랑하는 조카를 구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여러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여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 )
2. 야고보서 2:23을 써 보세요.
( )
3. 유목민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당시 요단 들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여 목축지로서 최상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선뜻 상대에게 최상의 것을 양보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97~12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돔’
가나안의 성읍 중 하나로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 거주한 땅이다(창 10:19, 13:12). 소돔을 다스리던 베라 왕은 조공을 바쳤던 그돌라오멜 왕을 배신하고, 주변 나라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소돔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이 사로잡히고 재산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하나님이 극도로 타락한 소돔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심판을 재고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복, 장수의 복 등 모든 복을 누렸습니다. 또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셨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소유했기에 이러한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순종
창세기 1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2)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지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았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고요?”라는 어떤 하 소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순종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히 11:17~19).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므로 의심이나 원망, 불평하는 것을 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지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장 10절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그러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여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면 이삭을 하란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를 묻지요.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창 24:7).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종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하게 만났습니다(창 24장).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좇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입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하지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거할 때 소돔과 고모라가 주변 나라와 싸움에서 패하여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때 롯이 사로잡혀 가고 재물까지 노략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해 오지요.
하나님께서는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시지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그가 사랑하는 조카를 구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여러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여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 )
2. 야고보서 2:23을 써 보세요.
( )
3. 유목민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당시 요단 들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여 목축지로서 최상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선뜻 상대에게 최상의 것을 양보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97~12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돔’
가나안의 성읍 중 하나로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 거주한 땅이다(창 10:19, 13:12). 소돔을 다스리던 베라 왕은 조공을 바쳤던 그돌라오멜 왕을 배신하고, 주변 나라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소돔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이 사로잡히고 재산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하나님이 극도로 타락한 소돔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심판을 재고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2014-09-12
제37과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입 맞추니
눅 7:36~38
읽을말씀 : 눅 7:36~38 | 외울말씀 : 잠 8:17 ㅣ 참고 말씀:눅 17:11~19
교육목표 :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만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당연하게 여기거나 어느 정도 감사해 하다가 “내가 할 바는 다했다.” 하며 멈추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도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사례하지요. 한 문둥병자만 그 마음에 선이 있었기에 은혜를 갚는 도리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갈릴리 호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막달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마을 전체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마리아’라는 여인이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했지요. 이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도 있고,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지요.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대대로 우상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나 그 가정에 임한 저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가족들로부터도 멸시 천대를 받았고 질병으로 더욱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 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며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도 귀하신 예수님 앞으로 감히 갈 수가 없어 예수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며 향유를 그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건강해진 마리아는 남은 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갔지만 마리아는 운명하시기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을 얻었지요. 이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다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뜻입니다.
옥합은 향유를 담은 귀한 그릇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매우 귀한 것으로 옥합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합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온전히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 할지라도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여 온전한 헌신이 나올 수 없지요. 자기의 몸 즉 외식을 깨뜨려 버릴 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옥합이 좋아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곧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몸, 즉 옥합을 깨뜨려 육체의 소욕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여인이 하염없는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도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요? 마리아는 어떤 인간적인 생각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 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처럼 흠과 티가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내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립니다.”라는 증표로서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주위 환경이 아무리 자신을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예수님께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담대하게 행함으로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사랑이 없었다면 이런 행함은 결코 나올 수 없었지요.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비진리를 깨뜨려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었다면, 예수님의 기쁨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청했던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합니다(눅 7:39).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함으로 그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말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 )
2.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3. 옥합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 )
4. 옥합을 깨뜨렸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5.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73~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구분 방법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장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에 나온다.
4. 가족 사항: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이며, 마르다와 자매간이다.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이다.
2. 장소: 갈릴리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누가복음 7장에만 나온다.
4. 가족사항: 가족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났다.
교육목표 :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만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당연하게 여기거나 어느 정도 감사해 하다가 “내가 할 바는 다했다.” 하며 멈추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도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사례하지요. 한 문둥병자만 그 마음에 선이 있었기에 은혜를 갚는 도리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갈릴리 호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막달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마을 전체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마리아’라는 여인이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했지요. 이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 받는 경우도 있고,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지요.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대대로 우상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나 그 가정에 임한 저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가족들로부터도 멸시 천대를 받았고 질병으로 더욱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 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며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도 귀하신 예수님 앞으로 감히 갈 수가 없어 예수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며 향유를 그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건강해진 마리아는 남은 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갔지만 마리아는 운명하시기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을 얻었지요. 이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다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뜻입니다.
옥합은 향유를 담은 귀한 그릇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매우 귀한 것으로 옥합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합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온전히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 할지라도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여 온전한 헌신이 나올 수 없지요. 자기의 몸 즉 외식을 깨뜨려 버릴 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옥합이 좋아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곧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몸, 즉 옥합을 깨뜨려 육체의 소욕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여인이 하염없는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도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요? 마리아는 어떤 인간적인 생각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 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처럼 흠과 티가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내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립니다.”라는 증표로서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주위 환경이 아무리 자신을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예수님께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담대하게 행함으로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사랑이 없었다면 이런 행함은 결코 나올 수 없었지요.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비진리를 깨뜨려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었다면, 예수님의 기쁨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청했던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합니다(눅 7:39).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함으로 그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말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 )
2.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3. 옥합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 )
4. 옥합을 깨뜨렸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
5.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73~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구분 방법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장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에 나온다.
4. 가족 사항: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이며, 마르다와 자매간이다.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이다.
2. 장소: 갈릴리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누가복음 7장에만 나온다.
4. 가족사항: 가족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났다.
2014-09-08
제0과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0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_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____ 데살로니가전서 5:18 ___________________ 인도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 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사람들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에 당면하면 힘들어하기도 하고, 짜증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지요. 혹여 사는 것이 지치고 힘이 든다고 생각된다면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입니까? 산소 호흡기 없이 숨 쉴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장밋빛 꿈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여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은 술에 취해 귀가하더니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남편을 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고 서글퍼져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불현듯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범사에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라는 말씀이었지요.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 찾으려고 애쓰니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남편이라도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술에 만취하여 정신이 없어도 신기하게 집을 잘 찾아오니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꼭 주님을 영접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장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는 감사기도였는데 계속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자, 점점 진심에서 감사가 우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회개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 속으로 남편을 무시했던 것, 다른 남편들과 비교했던 것, 잘 섬기지 못했던 것” 등을 회개하였지요. 그러고 나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때 한참을 자던 남편이 눈을 떴는데 아내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여보! 그동안 나같이 부족한 사람하고 살아 줘서 너무나 감사해요. 밖에서 고생하고 온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트집 잡고 힘들게 했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잘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나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여보! 당신이 그렇게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했건만 듣지 않고 당신을 힘들게 했는데 오히려 나 같은 사람과 사는 것에 감사하다고 하니 민망하고 부끄럽구려.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소. 그리고 내가 교회 가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라면 당장 내일부터 가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을 기도해도 꿈쩍 않던 남편이 아내가 중심에서 회개하며 감사했을 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응답을 끌어내리는 통로가 됩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불통하여 괴로운 일 앞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당회장이신 이재록 목사님은 숨조차 쉬기 힘든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7년 동안 온갖 질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전에 가서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단번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으로 부르시고 무수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이 없고 영원토록 행복과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4차원의 영의 세계이므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지요. 더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최고의 선물이니 얼마나 행복과 기쁨, 감사가 넘쳐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삶이 고달파도 죽으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육이 있어서 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즉 주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지요.
우리 조상들도 사후 세계를 믿고 인정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해도, 사후 세계를 알았기에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면 마치 조상의 영혼이 와서 제사상을 받을 것이라 여겼지요. 그러나 죽으면 영혼이 이 땅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며 절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 구세주 되심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믿습니다. 혹여 그동안 진리를 몰라 제사를 드렸다 해도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았으니 천국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응답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풍성한 열매와 우리에게 늘 감사의 조건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향을 올려드리심으로, 항상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0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_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____ 데살로니가전서 5:18 ___________________ 인도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 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사람들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에 당면하면 힘들어하기도 하고, 짜증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지요. 혹여 사는 것이 지치고 힘이 든다고 생각된다면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입니까? 산소 호흡기 없이 숨 쉴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장밋빛 꿈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여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은 술에 취해 귀가하더니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남편을 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고 서글퍼져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불현듯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범사에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라는 말씀이었지요.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 찾으려고 애쓰니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남편이라도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술에 만취하여 정신이 없어도 신기하게 집을 잘 찾아오니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꼭 주님을 영접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장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는 감사기도였는데 계속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자, 점점 진심에서 감사가 우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회개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 속으로 남편을 무시했던 것, 다른 남편들과 비교했던 것, 잘 섬기지 못했던 것” 등을 회개하였지요. 그러고 나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때 한참을 자던 남편이 눈을 떴는데 아내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여보! 그동안 나같이 부족한 사람하고 살아 줘서 너무나 감사해요. 밖에서 고생하고 온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트집 잡고 힘들게 했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잘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나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여보! 당신이 그렇게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했건만 듣지 않고 당신을 힘들게 했는데 오히려 나 같은 사람과 사는 것에 감사하다고 하니 민망하고 부끄럽구려.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소. 그리고 내가 교회 가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라면 당장 내일부터 가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을 기도해도 꿈쩍 않던 남편이 아내가 중심에서 회개하며 감사했을 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응답을 끌어내리는 통로가 됩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불통하여 괴로운 일 앞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당회장이신 이재록 목사님은 숨조차 쉬기 힘든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7년 동안 온갖 질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전에 가서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단번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으로 부르시고 무수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이 없고 영원토록 행복과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4차원의 영의 세계이므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지요. 더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최고의 선물이니 얼마나 행복과 기쁨, 감사가 넘쳐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삶이 고달파도 죽으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육이 있어서 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즉 주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지요.
우리 조상들도 사후 세계를 믿고 인정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해도, 사후 세계를 알았기에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면 마치 조상의 영혼이 와서 제사상을 받을 것이라 여겼지요. 그러나 죽으면 영혼이 이 땅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며 절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 구세주 되심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믿습니다. 혹여 그동안 진리를 몰라 제사를 드렸다 해도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았으니 천국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응답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풍성한 열매와 우리에게 늘 감사의 조건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향을 올려드리심으로, 항상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4-09-05
제36과하나님의 선하신 뜻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2 ㅣ 참고 말씀:롬 7:21~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함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사전에서 선(善)이란 ‘착하다, 좋다, 또는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에 맞추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기준, 즉 지금까지 자신이 쌓은 지식이나 상식, 이론들로 만들어진 ‘양심’이라는 틀 속에 맞추어 ‘선하다’, ‘선하지 않다’라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1.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란?
로마서 7장 21절을 보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 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진리의 속성이 있는가 하면, 불의와 불법을 행하기 원하는 비진리의 속성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어지는 22~23절에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하며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지요.
먼저 ‘속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합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 받은 생명의 지식이 들어 있으며 ‘선 자체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마음의 법’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입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입니다.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 즉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혼합된 것으로서 나름대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 기준이 되지요. 그런데 양심은 각 사람의 자라온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을 통해 배웠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다른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만일 이때 엄마가 “아이구, 바보야! 왜 너는 맞고 다녀!”라고 야단을 쳤다면 그 아이는 ‘맞고 오면 바보구나. 때려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악한 양심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먼저 진리로 잘 분별해 준 다음 “얘야, 아프겠구나. 그렇지만 네가 참고 용서해 주렴!” 할 것입니다. 이 아이는 ‘누가 나를 때린다고 해서 같이 때리는 것은 악한 것이야. 차라리 내가 맞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야!’ 하며 선한 양심을 만들어가게 되지요. 따라서 양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에는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곧 세상을 좇아 들어온 비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굳어진 것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비진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 말씀한 ‘죄의 법’이 바로 이 마음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에게 악을 품고 심한 욕을 했다거나, 살인이나 도적질을 했다면 이는 악한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에 맞춰야 선과 악을 바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각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배움이 다르고 지식과 교양이 다르니 사람마다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바라보는 각 사람의 생각이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다른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66권입니다.
2.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기 원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셔서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거나 누구는 축복하시고 누구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지요.
예를 들어,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문제는 복음을 듣는 사람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지요.
우리가 믿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날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자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축복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선민이 아니라 이방인인데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며 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3. 응답과 축복의 기준이 되는 선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18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선하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기준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던 다윗 왕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책망하셨습니다(삼하 12:9).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임을 알려 주셨지요. 또한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 기준이 되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 교본만 백 번, 천 번 읽고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이론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았을 때 가능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와 선의 행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쉽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신속히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미움을 버리고자 할 때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상대를 품으면 더 신속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정해 놓으신 선의 기준과 테두리 안에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응답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로마서 7:22~23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해당되는 마음을 ( ) 안에 넣어 보세요.
( )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한다.
( )은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을 말한다. ‘양심’으로 불린다.
( )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다.
2. 다음 ( ) 안을 채워 보세요.
( )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 )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 )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45~7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본성’과 ‘양심’의 차이
‘본성’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근본된 성질을 말한다. 곧 마음 밭의 토질이라 할 수 있다.
‘양심’은 각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갖고 있던 본성에다 이후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가치 판단 기준이다. 다시 말해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함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사전에서 선(善)이란 ‘착하다, 좋다, 또는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에 맞추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기준, 즉 지금까지 자신이 쌓은 지식이나 상식, 이론들로 만들어진 ‘양심’이라는 틀 속에 맞추어 ‘선하다’, ‘선하지 않다’라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1.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란?
로마서 7장 21절을 보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 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진리의 속성이 있는가 하면, 불의와 불법을 행하기 원하는 비진리의 속성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어지는 22~23절에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하며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지요.
먼저 ‘속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합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 받은 생명의 지식이 들어 있으며 ‘선 자체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마음의 법’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입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입니다.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 즉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혼합된 것으로서 나름대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 기준이 되지요. 그런데 양심은 각 사람의 자라온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을 통해 배웠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다른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만일 이때 엄마가 “아이구, 바보야! 왜 너는 맞고 다녀!”라고 야단을 쳤다면 그 아이는 ‘맞고 오면 바보구나. 때려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악한 양심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먼저 진리로 잘 분별해 준 다음 “얘야, 아프겠구나. 그렇지만 네가 참고 용서해 주렴!” 할 것입니다. 이 아이는 ‘누가 나를 때린다고 해서 같이 때리는 것은 악한 것이야. 차라리 내가 맞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야!’ 하며 선한 양심을 만들어가게 되지요. 따라서 양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에는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곧 세상을 좇아 들어온 비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굳어진 것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비진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 말씀한 ‘죄의 법’이 바로 이 마음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에게 악을 품고 심한 욕을 했다거나, 살인이나 도적질을 했다면 이는 악한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준에 맞춰야 선과 악을 바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각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배움이 다르고 지식과 교양이 다르니 사람마다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바라보는 각 사람의 생각이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다른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66권입니다.
2.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기 원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셔서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거나 누구는 축복하시고 누구는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지요.
예를 들어,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문제는 복음을 듣는 사람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지요.
우리가 믿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날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자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축복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선민이 아니라 이방인인데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며 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3. 응답과 축복의 기준이 되는 선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18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선하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기준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던 다윗 왕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책망하셨습니다(삼하 12:9).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임을 알려 주셨지요. 또한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 기준이 되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 교본만 백 번, 천 번 읽고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이론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았을 때 가능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와 선의 행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쉽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신속히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미움을 버리고자 할 때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상대를 품으면 더 신속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정해 놓으신 선의 기준과 테두리 안에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응답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로마서 7:22~23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해당되는 마음을 ( ) 안에 넣어 보세요.
( )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진리의 마음 즉 하얀 마음을 말한다.
( )은 내 안에 있는 본성에다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마음을 말한다. ‘양심’으로 불린다.
( )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이다.
2. 다음 ( ) 안을 채워 보세요.
( )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 )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 )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45~7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본성’과 ‘양심’의 차이
‘본성’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근본된 성질을 말한다. 곧 마음 밭의 토질이라 할 수 있다.
‘양심’은 각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갖고 있던 본성에다 이후 새롭게 받아들인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하여 만들어 낸 가치 판단 기준이다. 다시 말해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2014-08-29
제35과여호와의 묵시와 정한 때
합 2:2~4
읽을말씀 : 합 2:2~4 | 외울말씀 : 암 3:7 ㅣ 참고 말씀:마 24장
교육목표 : 부활 승천 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운 마지막 때 영적으로 깨어 신부단장에 힘쓰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지요.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 만물이 봄이 되면 깨어납니다. 죽은 것 같았던 씨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요.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 달과 별들도 질서와 조화 속에 운행합니다.
이처럼 우주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박국은 유다 18대 왕 여호야김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호야김은 온갖 악을 행하며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하나님께 회개치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한 상태였고, 남유다도 언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 시국에서도 여호야김은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하여 애굽 왕에게 바치며 바벨론를 견제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여호야김의 악정에 격분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답답하여 하소연하지요(합 1:2~4).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가 무르익어 패역하였음을 다 보고 계셨기에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에게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합 1:5~11).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에 너무 놀랐습니다. 갈대아는 바벨론으로 그들은 사납고 잔인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더구나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박국의 예언대로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유다를 멸망시키지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지 않고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지가 궁금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합니다. 그 내용이 하박국 2장 2~4절에 나오지요. 즉 유다를 심판했던 강대국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 바벨론도 바사에게 멸망함으로 하박국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심판의 때 의인도 멸망당할까요? 아니지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지만 아무리 악한 세상 속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입니다(전 12:14).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죄했을지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회개치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며 관계가 단절되고 맙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집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습니다.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하지요. 너무 급박하자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간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바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이 관영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지요.
3.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 찰 때마다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묵시의 때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현세대는 어떻습니까?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 어디에서도 의인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즉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심판할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성경에는 마지막 때 징조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2~14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했고, 32~34절에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며 무화과 비유가 나오지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하여 백성들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들의 민족과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독립 국가를 세웠지요.
이는 에스겔 38장 8~12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즉 말년에 세계 곳곳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었지요.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국민들까지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1900여 년이 지나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에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친히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함을 깨달아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롯의 아내처럼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신 대로 오늘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는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주님께서 구름 타고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지요.
신랑 되신 주님과 눈물, 슬픔, 고통,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소망한다면 결코 현실을 바라보며 힘들어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조국의 악을 목도하고 슬퍼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어느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여 심판하시겠다고 알려 주셨나요? ( )
2. 무화과나무는 어느 나라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 )
3. 이스라엘은 언제 독립국가를 세웠나요? ( )
4.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 )을 말한다.
( )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 )이 오신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3~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벨론’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를 가리킨다.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포도 농사를 위해 남겨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바벨론 3차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제국들 중에 가장 수명이 짧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70년 만에 멸망하였다.
교육목표 : 부활 승천 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운 마지막 때 영적으로 깨어 신부단장에 힘쓰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지요.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 만물이 봄이 되면 깨어납니다. 죽은 것 같았던 씨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요.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 달과 별들도 질서와 조화 속에 운행합니다.
이처럼 우주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박국은 유다 18대 왕 여호야김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호야김은 온갖 악을 행하며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하나님께 회개치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한 상태였고, 남유다도 언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 시국에서도 여호야김은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하여 애굽 왕에게 바치며 바벨론를 견제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여호야김의 악정에 격분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답답하여 하소연하지요(합 1:2~4).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가 무르익어 패역하였음을 다 보고 계셨기에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에게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합 1:5~11).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에 너무 놀랐습니다. 갈대아는 바벨론으로 그들은 사납고 잔인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더구나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박국의 예언대로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유다를 멸망시키지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지 않고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지가 궁금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합니다. 그 내용이 하박국 2장 2~4절에 나오지요. 즉 유다를 심판했던 강대국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 바벨론도 바사에게 멸망함으로 하박국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심판의 때 의인도 멸망당할까요? 아니지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지만 아무리 악한 세상 속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입니다(전 12:14).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죄했을지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회개치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며 관계가 단절되고 맙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집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습니다.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하지요. 너무 급박하자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간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바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이 관영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지요.
3.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 찰 때마다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묵시의 때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현세대는 어떻습니까?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 어디에서도 의인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즉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심판할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성경에는 마지막 때 징조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2~14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했고, 32~34절에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며 무화과 비유가 나오지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하여 백성들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들의 민족과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독립 국가를 세웠지요.
이는 에스겔 38장 8~12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즉 말년에 세계 곳곳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었지요.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국민들까지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1900여 년이 지나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에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친히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함을 깨달아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롯의 아내처럼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신 대로 오늘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는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주님께서 구름 타고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지요.
신랑 되신 주님과 눈물, 슬픔, 고통,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소망한다면 결코 현실을 바라보며 힘들어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조국의 악을 목도하고 슬퍼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어느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여 심판하시겠다고 알려 주셨나요? ( )
2. 무화과나무는 어느 나라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 )
3. 이스라엘은 언제 독립국가를 세웠나요? ( )
4.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 )을 말한다.
( )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 일어난 세대, 즉 이스라엘이 독립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 )이 오신다.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3~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벨론’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를 가리킨다.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포도 농사를 위해 남겨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바벨론 3차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제국들 중에 가장 수명이 짧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70년 만에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