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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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9
제2과창조주 하나님
창 1:1
읽을말씀 : 창 1:1 | 외울말씀 : 창 2:7 l 참고 말씀: 롬 1:20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운다면, 진리를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우주 만물을 돌아보면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됩니다.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이나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어느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은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텔레비전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화면에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매우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오장육부와 뼈와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하여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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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창조주 하나님에 관련된 것을 모두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② 사람이나 짐승, 새, 물고기가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은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③ 진화론은 학교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참된 진리이다.
④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우주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 질서정연하게 운행된다.
2. 창세기 1장을 읽고 천지 만물이 창조된 순서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2과‘사람을 경작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운다면, 진리를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우주 만물을 돌아보면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됩니다.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이나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어느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은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텔레비전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화면에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매우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오장육부와 뼈와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하여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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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창조주 하나님에 관련된 것을 모두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② 사람이나 짐승, 새, 물고기가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은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③ 진화론은 학교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참된 진리이다.
④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우주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 질서정연하게 운행된다.
2. 창세기 1장을 읽고 천지 만물이 창조된 순서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2과‘사람을 경작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15-01-02
제1과새롭게 하소서
눅 5:38
읽을말씀 : 눅 5:38 | 외울말씀 : 엡 5:9 ㅣ 참고 말씀:롬 12:3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성결을 사모하며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새롭게 마음을 결단합니다. 특히 성결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되리라” 고백하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 읽고 성구를 외우며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물론,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연초에 결심하고 고백한 것을 변개치 않으며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사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이려 합니다. 즉 진실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을 속였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욕심이 틈타자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놓았지요.
그때 베드로가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남편 아나니아의 혼이 떠나 죽고 말았습니다. 세 시간쯤 후에 그 영문을 모르고 들어온 아내 삽비라도 남편과 똑같이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속임으로 혼이 떠나 죽고 맙니다. 결국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의 종을 속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사모하는 척하고,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외식하지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자신까지 속이게 됩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는 일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자기 공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누가 지켜볼 때는 성실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불성실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요. 에베소서 5장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충성함으로 진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 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희생할 때가 많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많은 것을 주고 희생했다고 하더라도 먼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일은 하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무뚝뚝하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다음에 일을 부탁하기가 어렵고 망설여지니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섬기며 일한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무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자신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김의 기준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간에 얼마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가령, 교회 안에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 등의 공용 장소가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무리 화장실이 지저분해도 ‘내 업무가 아니니까’ 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나의 일처럼 깨끗이 청소합니다. 같은 부서 안에서도 누가 아침에 일찍 와서 책상을 닦아 주는지, 쓰레기통을 비우며 청소를 도와주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지 낱낱이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 업무도 아닌데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나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들은 업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직분이 낮은 사람들이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일했다면 비록 행함으로는 섬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해서 결과만 내면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행할 때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는 만큼 자기의 업무만 하면 되지만, 교회에서는 보직에 해당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자신의 업무입니다. 겨우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씀이를 넓혀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하지요.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섬기고 높은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대하든지 행위적으로만 섬길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으로 섬길 때 큰 자가 되어 이 땅에서도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대로만 행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쉼 없이 노력해 가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다소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듬어 일꾼으로 쓰시지요.
가령, 사람들이 처음 사명을 받았을 때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반드시 성결되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고 행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덮어 놓고 절제하므로 크게 악을 행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은 없습니다. 본인이 할 일은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 생각하지요.
혹여 나는 이러한 모습은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거나 마지못해 앉아 있는지 하나하나 돌아보아야 하지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이 정체되어 성령의 충만함이 식어지고, 자칫 구원받기 힘든 육체의 일까지 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제단에서 겨우 구원의 문제에 연연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지요.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열심히 충성 봉사합니다. 예배나 기도에 늦지 않기 위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사모함으로 단숨에 달려오지요. 생명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게 들으며 하나라도 깨우치고 변화되기 위해 금식하며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멈춰 있으니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죽은 믿음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진실한 행함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누가복음 5장 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고 계시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묵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진실한 마음과 행함으로 섬길 뿐 아니라 서로 화평하며 질서를 좇아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 )해야 합니다.
2) ( )이 있어야 합니다.
3) ( )이 있어야 합니다.
2.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진실, 섬김, 행함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몇 점을 주실 수 있을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1과‘창조주 하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부부이며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대교회 신자이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이들은 땅을 팔아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라고 속여 사도들 앞에 내놓는다. 결국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로 혼이 떠나 죽게 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성결을 사모하며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새롭게 마음을 결단합니다. 특히 성결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되리라” 고백하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 읽고 성구를 외우며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물론,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연초에 결심하고 고백한 것을 변개치 않으며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사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이려 합니다. 즉 진실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을 속였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욕심이 틈타자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놓았지요.
그때 베드로가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남편 아나니아의 혼이 떠나 죽고 말았습니다. 세 시간쯤 후에 그 영문을 모르고 들어온 아내 삽비라도 남편과 똑같이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속임으로 혼이 떠나 죽고 맙니다. 결국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의 종을 속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사모하는 척하고,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외식하지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자신까지 속이게 됩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는 일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자기 공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누가 지켜볼 때는 성실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불성실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요. 에베소서 5장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충성함으로 진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 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희생할 때가 많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많은 것을 주고 희생했다고 하더라도 먼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일은 하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무뚝뚝하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다음에 일을 부탁하기가 어렵고 망설여지니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섬기며 일한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무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자신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김의 기준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간에 얼마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가령, 교회 안에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 등의 공용 장소가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무리 화장실이 지저분해도 ‘내 업무가 아니니까’ 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나의 일처럼 깨끗이 청소합니다. 같은 부서 안에서도 누가 아침에 일찍 와서 책상을 닦아 주는지, 쓰레기통을 비우며 청소를 도와주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지 낱낱이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 업무도 아닌데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나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들은 업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직분이 낮은 사람들이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일했다면 비록 행함으로는 섬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해서 결과만 내면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행할 때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는 만큼 자기의 업무만 하면 되지만, 교회에서는 보직에 해당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자신의 업무입니다. 겨우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씀이를 넓혀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하지요.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섬기고 높은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대하든지 행위적으로만 섬길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으로 섬길 때 큰 자가 되어 이 땅에서도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대로만 행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쉼 없이 노력해 가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다소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듬어 일꾼으로 쓰시지요.
가령, 사람들이 처음 사명을 받았을 때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반드시 성결되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고 행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덮어 놓고 절제하므로 크게 악을 행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은 없습니다. 본인이 할 일은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 생각하지요.
혹여 나는 이러한 모습은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거나 마지못해 앉아 있는지 하나하나 돌아보아야 하지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이 정체되어 성령의 충만함이 식어지고, 자칫 구원받기 힘든 육체의 일까지 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제단에서 겨우 구원의 문제에 연연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지요.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열심히 충성 봉사합니다. 예배나 기도에 늦지 않기 위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사모함으로 단숨에 달려오지요. 생명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게 들으며 하나라도 깨우치고 변화되기 위해 금식하며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멈춰 있으니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죽은 믿음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진실한 행함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누가복음 5장 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고 계시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묵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진실한 마음과 행함으로 섬길 뿐 아니라 서로 화평하며 질서를 좇아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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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 )해야 합니다.
2) ( )이 있어야 합니다.
3) ( )이 있어야 합니다.
2.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진실, 섬김, 행함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몇 점을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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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1과‘창조주 하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부부이며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대교회 신자이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이들은 땅을 팔아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라고 속여 사도들 앞에 내놓는다. 결국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로 혼이 떠나 죽게 된다.
2014-12-26
제52과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삿 11:30~35
읽을말씀 : 삿 11:30~35 | 외울말씀 : 신 23:21 ㅣ 참고 말씀:민 30:2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 서원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킴으로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내일 3시에 만납시다.”라고 약속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음 날 대통령에게 “급한 볼일이 있으니 10분만 늦게 가겠습니다.”라고 한다든가,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분이 과연 계실까요?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바꾸거나 어기는 일은 심히 무례하고 악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입다를 통해 약속을 지키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입다의 서원과 전쟁에서의 승리
입다는 이스라엘 길르앗 지방의 큰 용사로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본부인을 통해 태어난 아들들이 입다를 미워하여 상속권을 주지 않으려고 그를 내쫓아 버리지요. 돕 땅으로 도망간 입다는 그곳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어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비롯해 온갖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 18년간이나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 의해 학대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신 우상을 숭배하니 지켜 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히 곤고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삿 10:10).
그러한 상황에 암몬 자손이 쳐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은 싸우기 위해 미스바에 모여 진을 쳤지만 군대를 통솔할 장수가 없었습니다. 고심하던 길르앗 장로들은 결국 돕에 거하는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지요. 이에 입다는 자기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 추종 세력을 이끌고 돌아옵니다.
입다는 먼저 암몬 왕과 협상을 해 보지만 암몬 왕은 듣지 않습니다. 결국 전쟁에 출전하게 된 입다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을 하지요(삿 11:30~31). 입다의 간절한 서원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입다가 승리하여 집에 이르렀을 때 처음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랑스런 무남독녀였습니다. 아버지의 승전이 너무 기뻐 춤추며 영접하였지요. 만일 여러분이 멀리 출장을 다녀오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사사기 11장 35절을 보면 입다는 옷을 찢으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라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합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무남독녀라 해도 한 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며 순종하지요.
2. 사랑스런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입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하게 하셨을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그런 서원을 하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는데 입다가 급박한 상황에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조급하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번제를 드리는 것이 오늘날의 예배처럼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처럼, 구약의 사람들은 가장 귀한 것을 번제로 드려 향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렸지요.
그러면 왜 입다는 자신을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고 했을까요? 처음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출 23:19). 입다는 급하고 간절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받기 위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맞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미리 수양을 준비해 두셔서 이삭이 죽지 않도록 해 주셨는데, 왜 입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진실한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을 삼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러면 입다의 딸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맞는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기에 기쁨으로 순교하였지요.
아브라함이나 입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불 속으로 뛰어들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자녀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 귀히 여겼기에 하나밖에 없는 자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3. 올바른 서원과 이행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잠 18:21). 꼭 서원이 아니어도 함부로 말을 내지 말고,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신명기 23장 2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씀하시며 서원 이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요.
민수기 30장 2절에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번제 즉 짐승처럼 잡아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가른 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렸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믿음의 형제나 세상 사람과의 약속, 혹은 자신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과 간사함이 없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서원과 약속을 지켰을 때 따르는 축복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설령 서원한 것이 지키기 어렵더라도 마음에 결심하고 신속히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지요. 그런데 서원한 것을 더디 행하면 그만큼 축복도 더딥니다. 만일 서원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담이 되어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예 서원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까요? 아니지요.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했습니다. 믿음이 없어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성껏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넘치게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도로, 봉사로, 물질로 심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핑계 대지 않고 서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마음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민 23:19),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음에 결심한 바,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길르앗의 아들로, 암몬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돌라 ② 야일 ③ 입다 ④ 기드온
2.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반갑게 맞이해 준 사람은 누구였나요? ( )
3. 왜 입다는 자신을 처음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고 했을까요?
( )
4.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
②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한다.
③ 하나님 앞에 서원이나 약속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④ 서원한 것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해 주신다.
● 금주 과제
한 해 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있는지 점검해 보고 신속히 지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암몬 왕과 협상하는 입다’ (사사기 11장)
암몬과의 전쟁을 앞둔 입다는 먼저 암몬 왕과 외교적인 협상을 한다. 암몬 왕은 전에 빼앗긴 땅을 돌려 달라고 했고 입다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을 침략한 적도 없고, 아모리 왕 시혼과도 전쟁을 원치 않았으나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때 취한 시혼 왕의 땅은 이스라엘 것이지 암몬 족속의 것이 아니며, 그 일은 오래되었는데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 서원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킴으로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내일 3시에 만납시다.”라고 약속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음 날 대통령에게 “급한 볼일이 있으니 10분만 늦게 가겠습니다.”라고 한다든가,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분이 과연 계실까요?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바꾸거나 어기는 일은 심히 무례하고 악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입다를 통해 약속을 지키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입다의 서원과 전쟁에서의 승리
입다는 이스라엘 길르앗 지방의 큰 용사로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본부인을 통해 태어난 아들들이 입다를 미워하여 상속권을 주지 않으려고 그를 내쫓아 버리지요. 돕 땅으로 도망간 입다는 그곳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어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비롯해 온갖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 18년간이나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 의해 학대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신 우상을 숭배하니 지켜 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히 곤고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삿 10:10).
그러한 상황에 암몬 자손이 쳐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은 싸우기 위해 미스바에 모여 진을 쳤지만 군대를 통솔할 장수가 없었습니다. 고심하던 길르앗 장로들은 결국 돕에 거하는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지요. 이에 입다는 자기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 추종 세력을 이끌고 돌아옵니다.
입다는 먼저 암몬 왕과 협상을 해 보지만 암몬 왕은 듣지 않습니다. 결국 전쟁에 출전하게 된 입다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을 하지요(삿 11:30~31). 입다의 간절한 서원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입다가 승리하여 집에 이르렀을 때 처음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랑스런 무남독녀였습니다. 아버지의 승전이 너무 기뻐 춤추며 영접하였지요. 만일 여러분이 멀리 출장을 다녀오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사사기 11장 35절을 보면 입다는 옷을 찢으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라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합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무남독녀라 해도 한 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며 순종하지요.
2. 사랑스런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입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하게 하셨을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그런 서원을 하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는데 입다가 급박한 상황에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조급하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번제를 드리는 것이 오늘날의 예배처럼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처럼, 구약의 사람들은 가장 귀한 것을 번제로 드려 향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렸지요.
그러면 왜 입다는 자신을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고 했을까요? 처음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출 23:19). 입다는 급하고 간절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받기 위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맞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미리 수양을 준비해 두셔서 이삭이 죽지 않도록 해 주셨는데, 왜 입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진실한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을 삼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러면 입다의 딸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맞는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기에 기쁨으로 순교하였지요.
아브라함이나 입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불 속으로 뛰어들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자녀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 귀히 여겼기에 하나밖에 없는 자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3. 올바른 서원과 이행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잠 18:21). 꼭 서원이 아니어도 함부로 말을 내지 말고,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신명기 23장 2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씀하시며 서원 이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요.
민수기 30장 2절에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번제 즉 짐승처럼 잡아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가른 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렸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믿음의 형제나 세상 사람과의 약속, 혹은 자신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과 간사함이 없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서원과 약속을 지켰을 때 따르는 축복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설령 서원한 것이 지키기 어렵더라도 마음에 결심하고 신속히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지요. 그런데 서원한 것을 더디 행하면 그만큼 축복도 더딥니다. 만일 서원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담이 되어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예 서원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까요? 아니지요.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했습니다. 믿음이 없어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성껏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넘치게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도로, 봉사로, 물질로 심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핑계 대지 않고 서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마음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민 23:19),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음에 결심한 바,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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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길르앗의 아들로, 암몬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돌라 ② 야일 ③ 입다 ④ 기드온
2.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반갑게 맞이해 준 사람은 누구였나요? ( )
3. 왜 입다는 자신을 처음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고 했을까요?
( )
4.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
②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한다.
③ 하나님 앞에 서원이나 약속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④ 서원한 것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해 주신다.
● 금주 과제
한 해 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있는지 점검해 보고 신속히 지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암몬 왕과 협상하는 입다’ (사사기 11장)
암몬과의 전쟁을 앞둔 입다는 먼저 암몬 왕과 외교적인 협상을 한다. 암몬 왕은 전에 빼앗긴 땅을 돌려 달라고 했고 입다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을 침략한 적도 없고, 아모리 왕 시혼과도 전쟁을 원치 않았으나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때 취한 시혼 왕의 땅은 이스라엘 것이지 암몬 족속의 것이 아니며, 그 일은 오래되었는데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2014-12-19
제51과아버지의 사랑
요일 4:16
읽을말씀 : 요일 4:16 | 외울말씀 : 요일 4:16 l 참고 말씀:벧후 3:8~9, 요 17:24
교육목표 : 성탄절을 앞두고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본다 .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 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나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지요. 성탄절은 이렇게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야 죄와는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진정 성탄의 의미를 깨우쳐 기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탄절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깨우쳐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오래 참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나누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녀를 쉽게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고 생명의 길을 알려 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지요.
영적으로 ‘오래 참는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밀려오는 모든 여파를 감당하며 열매를 낼 때까지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여파를 감당하며 대가를 치르기 위해 큰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스럽게 지으신 이 땅을 심판해야 할 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홍수의 빗줄기만큼이나 하나님의 가슴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셔야 했고, 결국 그들이 멸망하는 것도 보셔야 했습니다.
독생하신 아들이 인생들에게 멸시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도 보셨습니다. 소중하게 창조한 세상이 죄로 물들고 인생들이 악을 발하는 것을 보실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기다리십니다. 처음에 계획하신 경작의 역사를 마칠 때까지 반드시 참 자녀들이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긴 세월을 참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받고 즉시 주님을 믿지 않았다거나 교회에 나와서도 죄를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몇 번 기회를 주시다가 포기하셨다면 여러분은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 구원받을 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참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에 여러분이 지금 있는 것입니다.
2. 버리지 않으시고 변화시켜 주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많은 권능을 보았습니다.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며,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영광을 볼 때는 기뻐하고 찬양했지만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면 원망 불평을 쏟아내며 불순종에 불순종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고자 하셨지만 모세가 생명을 걸고 용서를 받아냈지요.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도 모세가 담대히 용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의로 따지면 멸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도 어찌하든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더 깊은 마음임을 모세는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생명을 담보로 구해서 용서를 얻어냈지요. 모세 입장에서 보면 새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쉬울 수도 있습니다. 오랜 노예 살이 속에서 심히 강퍅해진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새 백성을 이루어 처음부터 율법을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훨씬 순종을 잘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모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네 살쯤 되는 아들이 갑자기 말도 잘 못하고 걸음도 못 걸어서 검사를 해 보니, 완전히 고칠 방법도 없고 성인이 되기 전에 대부분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완치도 안 되고 키워 봤자 고생이니 포기하자. 건강한 다른 자녀를 낳으면 되지.” 할 수 있을까요? 부모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아질 가능성이 티끌만큼만 있어도 집안의 재물을 다 탕진한다 해도 끝까지 아이를 고쳐 주려고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십니다. 노하기도 하고 호되게 책망도 하시지만 버릴 수가 없으셨지요. 어찌하든 살려서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 지난날 여러분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선했다.” 할 수 있습니까? 의와 틀은 얼마나 강했고 불순종은 얼마나 많이 낳았습니까? 주변에서 ‘저분이 언제나 변화될까? 정말 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답답하고 변화가 더딘 분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셨고, 변화될 수 있도록 끝까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사랑 까닭에 새 예루살렘을 바라며 달려갈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영광의 열매를 얻게 하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 사함은 물론 주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되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지요(요 17:24). 물론 낙원만 가도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간발의 차이로 지옥의 불길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가장자리에 있는 낙원이 아니라 천국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아직 죄를 다 버리지 못해서 부끄럽고 민망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로 변화되어 큰 영광을 누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구원받았다 해도 믿음의 분량이 다름을 알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야 함을 배워 알고 있으니 더 큰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회장님께서는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라는 비전을 받은 후 30년이 넘게 성결을 외쳐 왔습니다. 교회적인 연단이 왔을 때 한 주 한 주, 짊어져야 하는 재정의 짐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지요. 일꾼들이 믿음을 내보이지 못할 때도 홀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열매를 보여 주었지요. 그러면서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권능을 보여 주면 우리 성도들도 믿음이 쑥쑥 자라겠지. 조금만 지나면 성결되겠지. 이제 곧 영의 장수들이 나오겠지.” 기대하며 사역해 왔습니다.
그런데 2010년 당회장님 앞에 펼쳐진 것은 30여 년간 그토록 기다렸던 영의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로, 주님의 십자가를 현저히 짓밟았기에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주의 종, 일꾼, 레위족, 성도들의 명단이었습니다. 그때 당회장님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낙심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30여 년 쏟아 부은 사랑에 배신을 당했다 해도, 아무리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영혼들이라도 “그만 포기하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보다 못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구했습니다. 2010년 12월 25일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말할 수 없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히 부끄럽고 민망한 회개의 날이었지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은 부끄럽고 민망한 날이 아니라 영광의 날이었습니다. 회개와 부끄러운 구원을 지나 반석으로, 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당회장님께서 다시 매달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매달려서 마침내 얻은 결과가 오늘의 여러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는데 믿음의 3단계라는 말씀을 들었고 이제는 반석으로, 심지어 영의 열매로까지 나왔지요. 아직 반석에 들어서지 못한 분들도 지금의 영에 대한 사모함을 잃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시면 됩니다.
지난 2010년 12월 25일 이후 목자를 통해 보고 듣고 깨우친 사랑을 여러분이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에 꼭 보답해 드리는 영광의 열매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탄을 맞아 우리가 깨우쳐 봐야 할 세 가지 분야를 써 보세요.
1)
2)
3)
2. 여러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영광의 열매로 나오기까지 오래 참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감사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3. 여러분은 2010년 12월 25일 이후 현재 어떠한 각오와 행함으로 목자님의 희생과 헌신에 보상의 열매로 나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69~3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 선지자의 기도’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 32:31~32)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여 진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찌하든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모세 선지자의 기도이다.
교육목표 : 성탄절을 앞두고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본다 .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 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나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지요. 성탄절은 이렇게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야 죄와는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진정 성탄의 의미를 깨우쳐 기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탄절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깨우쳐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오래 참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나누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녀를 쉽게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고 생명의 길을 알려 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지요.
영적으로 ‘오래 참는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밀려오는 모든 여파를 감당하며 열매를 낼 때까지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여파를 감당하며 대가를 치르기 위해 큰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스럽게 지으신 이 땅을 심판해야 할 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홍수의 빗줄기만큼이나 하나님의 가슴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셔야 했고, 결국 그들이 멸망하는 것도 보셔야 했습니다.
독생하신 아들이 인생들에게 멸시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도 보셨습니다. 소중하게 창조한 세상이 죄로 물들고 인생들이 악을 발하는 것을 보실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기다리십니다. 처음에 계획하신 경작의 역사를 마칠 때까지 반드시 참 자녀들이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긴 세월을 참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받고 즉시 주님을 믿지 않았다거나 교회에 나와서도 죄를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몇 번 기회를 주시다가 포기하셨다면 여러분은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 구원받을 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참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에 여러분이 지금 있는 것입니다.
2. 버리지 않으시고 변화시켜 주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많은 권능을 보았습니다.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며,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영광을 볼 때는 기뻐하고 찬양했지만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면 원망 불평을 쏟아내며 불순종에 불순종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고자 하셨지만 모세가 생명을 걸고 용서를 받아냈지요.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도 모세가 담대히 용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의로 따지면 멸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도 어찌하든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더 깊은 마음임을 모세는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생명을 담보로 구해서 용서를 얻어냈지요. 모세 입장에서 보면 새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쉬울 수도 있습니다. 오랜 노예 살이 속에서 심히 강퍅해진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새 백성을 이루어 처음부터 율법을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훨씬 순종을 잘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모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네 살쯤 되는 아들이 갑자기 말도 잘 못하고 걸음도 못 걸어서 검사를 해 보니, 완전히 고칠 방법도 없고 성인이 되기 전에 대부분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완치도 안 되고 키워 봤자 고생이니 포기하자. 건강한 다른 자녀를 낳으면 되지.” 할 수 있을까요? 부모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아질 가능성이 티끌만큼만 있어도 집안의 재물을 다 탕진한다 해도 끝까지 아이를 고쳐 주려고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십니다. 노하기도 하고 호되게 책망도 하시지만 버릴 수가 없으셨지요. 어찌하든 살려서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 지난날 여러분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선했다.” 할 수 있습니까? 의와 틀은 얼마나 강했고 불순종은 얼마나 많이 낳았습니까? 주변에서 ‘저분이 언제나 변화될까? 정말 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답답하고 변화가 더딘 분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셨고, 변화될 수 있도록 끝까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사랑 까닭에 새 예루살렘을 바라며 달려갈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영광의 열매를 얻게 하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 사함은 물론 주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되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지요(요 17:24). 물론 낙원만 가도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간발의 차이로 지옥의 불길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가장자리에 있는 낙원이 아니라 천국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아직 죄를 다 버리지 못해서 부끄럽고 민망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로 변화되어 큰 영광을 누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구원받았다 해도 믿음의 분량이 다름을 알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야 함을 배워 알고 있으니 더 큰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회장님께서는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라는 비전을 받은 후 30년이 넘게 성결을 외쳐 왔습니다. 교회적인 연단이 왔을 때 한 주 한 주, 짊어져야 하는 재정의 짐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지요. 일꾼들이 믿음을 내보이지 못할 때도 홀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열매를 보여 주었지요. 그러면서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권능을 보여 주면 우리 성도들도 믿음이 쑥쑥 자라겠지. 조금만 지나면 성결되겠지. 이제 곧 영의 장수들이 나오겠지.” 기대하며 사역해 왔습니다.
그런데 2010년 당회장님 앞에 펼쳐진 것은 30여 년간 그토록 기다렸던 영의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로, 주님의 십자가를 현저히 짓밟았기에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주의 종, 일꾼, 레위족, 성도들의 명단이었습니다. 그때 당회장님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낙심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30여 년 쏟아 부은 사랑에 배신을 당했다 해도, 아무리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영혼들이라도 “그만 포기하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보다 못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구했습니다. 2010년 12월 25일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말할 수 없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히 부끄럽고 민망한 회개의 날이었지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은 부끄럽고 민망한 날이 아니라 영광의 날이었습니다. 회개와 부끄러운 구원을 지나 반석으로, 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당회장님께서 다시 매달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매달려서 마침내 얻은 결과가 오늘의 여러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는데 믿음의 3단계라는 말씀을 들었고 이제는 반석으로, 심지어 영의 열매로까지 나왔지요. 아직 반석에 들어서지 못한 분들도 지금의 영에 대한 사모함을 잃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시면 됩니다.
지난 2010년 12월 25일 이후 목자를 통해 보고 듣고 깨우친 사랑을 여러분이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에 꼭 보답해 드리는 영광의 열매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탄을 맞아 우리가 깨우쳐 봐야 할 세 가지 분야를 써 보세요.
1)
2)
3)
2. 여러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영광의 열매로 나오기까지 오래 참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감사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3. 여러분은 2010년 12월 25일 이후 현재 어떠한 각오와 행함으로 목자님의 희생과 헌신에 보상의 열매로 나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69~3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 선지자의 기도’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 32:31~32)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여 진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찌하든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모세 선지자의 기도이다.
2014-12-12
제50과주신 자도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욥 1:18~22
읽을말씀 : 욥 1:18~22 | 외울말씀 : 약 1:13 ㅣ 참고 말씀:욥 42장
교육목표 : 욥처럼 본성 속의 악을 버리고 온전한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육 간에 큰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욥기 1장 1절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어 8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욥인데 왜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험을 받아야 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빈민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적도, 친히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욥이 하나님에 대해 전해만 듣고도 선을 행했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선한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이 행위적으로는 완벽했지만 본성 속의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신 하나님께서는 욥을 연단하여 성결케 하고 온전한 선에 이르는 차원에 이르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사단이 하나님께로 와서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송사합니다. 욥기 1장 10절에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하지요. 사단이 욥을 송사하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물은 다 거둘지라도 몸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송사하므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요, 다만 사람이 죄를 지어 사단이 송사하니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욥
하나님께서 사단의 송사를 허락하시자 욥에게 엄청난 시험들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때 욥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데 이런 시험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했을까요? 만일 욥이 이 정도의 시험에 원망할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험 자체를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욥은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질의 어려움이 왔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또는 질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셨는지요?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온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자 근본의 악이 나오는 욥
욥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지요. 욥이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자신의 몸을 긁고 있으니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조롱합니다.
이때도 욥은 아내에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며 입술로 범죄치 않았지요. 이는 욥이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으면 재앙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 입술을 지키며 감사하였던 욥은 이어지는 시험으로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마침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이는 부모를 원망하는 것과 같지요.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는 감사가 나왔지만,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는 근본의 악이 나왔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친구들과 변론하며 하나님께 원망 불평을 하며, 친구들에 대한 저주들을 쏟아내었습니다.
4.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통해 본 사람의 마음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도리어 욥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도 범죄할 뿐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더욱 악을 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욥 4:7). 즉 죄가 있으니 망한 것이고 정직하지 못하니 끊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시험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말지요.
다음으로, 소발은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10) 하였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가 막겠느냐 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단정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가 왔을 때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그냥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행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할 때 지키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욥기 말씀을 오해해서 “시험 환난이 와도 욥처럼 참으면 복이 온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험 환난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자복하여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욥도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닷은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라고 저주합니다(욥 18:10~11).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욥과 계속 변론이 있었고, 욥도 친구들을 무시하고 저주하였지요. 하지만 욥을 위로하러 온 빌닷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큰 악에 속합니다. 전에 욥에게 느꼈던 시기심에서 나온 말이지요.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을 통해 극도의 절망 가운데 나온 말이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감정이 상하거나 혈기를 내는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어 축복받은 욥
그동안 욥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앞에 큰소리치며 원망 불평했던 욥이 막상 하나님을 대하고 나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이었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철저히 돌이키며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합니다(욥 42:2).
이처럼 욥은 연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 되니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이 중심에서 우러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예전보다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축복도 넘치게 주셔서 아들 일곱과 세 딸을 낳았는데 전국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을 정도였지요. 명예, 권세, 자녀, 건강, 물질 등 모든 축복을 넘치게 받은 욥처럼 여러분도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전한 선을 이루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순전하고 정직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② 본성 속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끌기 위해서다.
③ 행위적으로 더 완전해지기 위해서이다.
④ 축복을 받으려면 무조건 연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만 해도 ( )가 나왔지만, ( )까지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 ( )의 악이 나왔습니다.
3. 욥이 시험을 통과한 후 받은 복이 무엇 무엇이 있었는지 써 보세요.
( )
● 금주 과제
가정과 직장에서 성탄 장식을 하며 주님의 사랑 전하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4단계’
♣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은 있지만 악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속으로는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꾹 눌러 참을 뿐이다.
♣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악이 없는 영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다.
♣ 선의 3단계 -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마음에 감정이 없음은 물론 감동적인 선의 말로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차원이다.
♣ 선의 4단계 - 가장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 수 있다.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 죄인된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주님의 선으로, 최고의 선이며 온전한 사랑이다.
교육목표 : 욥처럼 본성 속의 악을 버리고 온전한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육 간에 큰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욥기 1장 1절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어 8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욥인데 왜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험을 받아야 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빈민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적도, 친히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욥이 하나님에 대해 전해만 듣고도 선을 행했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선한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이 행위적으로는 완벽했지만 본성 속의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신 하나님께서는 욥을 연단하여 성결케 하고 온전한 선에 이르는 차원에 이르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사단이 하나님께로 와서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송사합니다. 욥기 1장 10절에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하지요. 사단이 욥을 송사하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물은 다 거둘지라도 몸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송사하므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요, 다만 사람이 죄를 지어 사단이 송사하니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욥
하나님께서 사단의 송사를 허락하시자 욥에게 엄청난 시험들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때 욥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데 이런 시험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했을까요? 만일 욥이 이 정도의 시험에 원망할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험 자체를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욥은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질의 어려움이 왔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또는 질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셨는지요?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온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자 근본의 악이 나오는 욥
욥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지요. 욥이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자신의 몸을 긁고 있으니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조롱합니다.
이때도 욥은 아내에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며 입술로 범죄치 않았지요. 이는 욥이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으면 재앙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 입술을 지키며 감사하였던 욥은 이어지는 시험으로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마침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이는 부모를 원망하는 것과 같지요.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는 감사가 나왔지만,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는 근본의 악이 나왔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친구들과 변론하며 하나님께 원망 불평을 하며, 친구들에 대한 저주들을 쏟아내었습니다.
4.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통해 본 사람의 마음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도리어 욥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도 범죄할 뿐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더욱 악을 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욥 4:7). 즉 죄가 있으니 망한 것이고 정직하지 못하니 끊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시험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말지요.
다음으로, 소발은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10) 하였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가 막겠느냐 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단정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가 왔을 때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그냥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행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할 때 지키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욥기 말씀을 오해해서 “시험 환난이 와도 욥처럼 참으면 복이 온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험 환난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자복하여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욥도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닷은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라고 저주합니다(욥 18:10~11).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욥과 계속 변론이 있었고, 욥도 친구들을 무시하고 저주하였지요. 하지만 욥을 위로하러 온 빌닷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큰 악에 속합니다. 전에 욥에게 느꼈던 시기심에서 나온 말이지요.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을 통해 극도의 절망 가운데 나온 말이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감정이 상하거나 혈기를 내는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어 축복받은 욥
그동안 욥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앞에 큰소리치며 원망 불평했던 욥이 막상 하나님을 대하고 나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이었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철저히 돌이키며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합니다(욥 42:2).
이처럼 욥은 연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 되니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이 중심에서 우러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예전보다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축복도 넘치게 주셔서 아들 일곱과 세 딸을 낳았는데 전국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을 정도였지요. 명예, 권세, 자녀, 건강, 물질 등 모든 축복을 넘치게 받은 욥처럼 여러분도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전한 선을 이루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순전하고 정직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② 본성 속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끌기 위해서다.
③ 행위적으로 더 완전해지기 위해서이다.
④ 축복을 받으려면 무조건 연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만 해도 ( )가 나왔지만, ( )까지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 ( )의 악이 나왔습니다.
3. 욥이 시험을 통과한 후 받은 복이 무엇 무엇이 있었는지 써 보세요.
( )
● 금주 과제
가정과 직장에서 성탄 장식을 하며 주님의 사랑 전하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4단계’
♣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은 있지만 악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속으로는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꾹 눌러 참을 뿐이다.
♣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악이 없는 영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다.
♣ 선의 3단계 -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마음에 감정이 없음은 물론 감동적인 선의 말로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차원이다.
♣ 선의 4단계 - 가장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 수 있다.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 죄인된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주님의 선으로, 최고의 선이며 온전한 사랑이다.
2014-12-05
제49과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1~9
읽을말씀 : 창 39:1~9 | 외울말씀 : 요일 3:21 l 참고 말씀:창 41장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며 정도를 좇아 성실로 식물을 삼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며 살았어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자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기에 범죄하는 자체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정도를 좇으며 결코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1.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의 조상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았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편애하였지요. 유독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히며, 요셉이 다른 형들의 과실을 고하면 그 말을 듣고 형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이복형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점은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보고 야곱에게 알리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는데, 이것이 요셉의 의였다는 것입니다. 형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리는 요셉이 얼마나 밉고 싫었겠습니까. 만일 요셉의 형들이 스스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면 동생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한데 요셉이 그들의 과실을 드러내니 더욱 미웠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형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시기와 미움이 더욱 커졌고, 마침내 요셉을 죽일 궤계를 꾸미게 됩니다. 다행히 맏형 르우벤과 넷째 형 유다의 만류로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고위 관료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하였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악이 없다면 거리낌이 없이 담대할 것이요, 요셉의 형들처럼 시기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습니다. 요셉도 자신이 옳다고 하는 의를 선으로 바꿨다면 형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보디발의 집에서 오직 정도를 걸으며 성실했던 요셉
요셉은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히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고, 그 집을 총괄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되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며 방탕한 삶을 살기도 하고, 삶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주인 보디발의 소유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성껏 관리했고, ‘주인이라면 집을 어떻게 관리하며 일꾼들을 어떻게 다스릴까?’ 하며 늘 주인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처리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창 39:5~6).
만일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갔을 때 너무도 억울하고 불행한 처지에서 당장 벗어나기 위해 무리한 탈출을 시도했다든가, 혹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더 혹독한 종살이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3. 주인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어느 날 요셉에게 한 차례 시험이 옵니다. 안주인이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을 날마다 유혹하며 동침하자고 청하는 것이었지요.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며 거절합니다(창 39:9).
그런데 어느 날 안주인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하는 바람에 이를 뿌리치느라 겉옷을 두고 도망치듯 나왔지요. 이에 안주인은 앙심을 품고 남편 보디발에게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들어왔다가 자기가 소리 지르자 옷을 버려 두고 도망갔다며 요셉의 옷을 증표로 내놓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사실을 확인도 않고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깊은 감옥에 요셉을 넣어 버렸지요.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와 기구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어도 마음 중심에서 주인을 섬기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선(線)은 결코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심이니 안주인의 불의한 청을 거절하면 어떤 곤란을 당할지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과 주인 앞에,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디발의 가정을 총괄하며 비교적 안정된 자리에 있었던 요셉은 수치스러운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성실함은 감옥을 관리하는 전옥, 즉 오늘날의 교도소장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옥중의 모든 사무와 죄수들을 다 맡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성실할 뿐 아니라 담대히 정도를 지키는 요셉을 기뻐하시며 그의 길을 친히 인도하시고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의 축복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축복하시고자 역사하십니다. 애굽 왕 바로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므로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바로 왕은 번민하여 해석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사 중 누구도 풀지 못하니 더욱 염려가 커져 갔지요.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추천하여 꿈을 풀이합니다. 즉 ‘왕의 꿈에 나온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의 풍년이며, 일곱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일곱 해의 흉년이라’ 하지요. 그런데 ‘흉년이 극심해 전의 풍작을 기억하지 못하며, 동일한 꿈을 겹쳐 꾼 것은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 해석합니다.
이처럼 요셉은 왕의 꿈을 시원하게 해석한 후, 대처 방법까지도 명쾌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에 왕은 요셉을 택하여 애굽 온 땅을 치리하는 총리로 세우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요셉은 하루아침에 애굽의 왕 다음가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말대로 풍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산을 각 성에 거두어들이니 7년의 기근의 때에 이르러 각국에 양식이 떨어졌어도 애굽 왕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각지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마다 왕의 양식을 사려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그중에는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과 가족들까지 애굽에 오게 한 후 부양하였지요.
이처럼 요셉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떠나 타국에 종으로 팔려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형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선한 마음으로 행했던 요셉이었기에 당대에 의인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성실히 살고자 노력하면 스스로 득죄하지 않고, 요셉의 형들처럼 득죄한 사람도 변화시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이끌어 줄까’를 생각합니다. 만일 득죄한 사람이라면 죄의 담을 헐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당회장님께서 죄인이라 할지라도 변화시켜 축복의 반열에 동참시킬 방법을 모색하시니 모난 사람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등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쑥쑥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각종 사고나 어려움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 납니다. 요셉이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한 것처럼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상대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정도를 좇으며, 모든 일에 성실로 식물을 삼아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① 아브라함 ② 이삭 ③ 야곱 ④ 유다
2. 이복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한 까닭이 아닌 것은?
① 아버지 야곱이 요셉만 편애했기 때문이다.
② 자신들의 과실을 요셉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③ 부모와 형제가 요셉에게 엎드려 절한다는 꿈을 듣고 더 미워하였다.
④ 자신들에 비해 싸움을 잘해서 미워했다.
3.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요셉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 )
4.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유혹하며 동침하자고 하였을 때 요셉이 단호하게 뿌리치며 고백한 내용은 성경 어디에 있나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41~3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애굽의 술사나 박사도 풀이 못한 바로 왕의 꿈’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나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 버린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다. 이는 곧 일곱 해의 풍년과 일곱 해의 흉년이 올 것을 의미한다. 요셉이 시원하게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까지 알려 주자 바로 왕은 요셉을 애굽의 왕 다음가는 총리로 세웠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며 정도를 좇아 성실로 식물을 삼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며 살았어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자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기에 범죄하는 자체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정도를 좇으며 결코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1.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의 조상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았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편애하였지요. 유독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히며, 요셉이 다른 형들의 과실을 고하면 그 말을 듣고 형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이복형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점은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보고 야곱에게 알리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는데, 이것이 요셉의 의였다는 것입니다. 형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리는 요셉이 얼마나 밉고 싫었겠습니까. 만일 요셉의 형들이 스스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면 동생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한데 요셉이 그들의 과실을 드러내니 더욱 미웠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형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시기와 미움이 더욱 커졌고, 마침내 요셉을 죽일 궤계를 꾸미게 됩니다. 다행히 맏형 르우벤과 넷째 형 유다의 만류로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고위 관료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하였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악이 없다면 거리낌이 없이 담대할 것이요, 요셉의 형들처럼 시기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습니다. 요셉도 자신이 옳다고 하는 의를 선으로 바꿨다면 형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보디발의 집에서 오직 정도를 걸으며 성실했던 요셉
요셉은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히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고, 그 집을 총괄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되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며 방탕한 삶을 살기도 하고, 삶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주인 보디발의 소유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성껏 관리했고, ‘주인이라면 집을 어떻게 관리하며 일꾼들을 어떻게 다스릴까?’ 하며 늘 주인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처리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창 39:5~6).
만일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갔을 때 너무도 억울하고 불행한 처지에서 당장 벗어나기 위해 무리한 탈출을 시도했다든가, 혹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더 혹독한 종살이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3. 주인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어느 날 요셉에게 한 차례 시험이 옵니다. 안주인이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을 날마다 유혹하며 동침하자고 청하는 것이었지요.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며 거절합니다(창 39:9).
그런데 어느 날 안주인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하는 바람에 이를 뿌리치느라 겉옷을 두고 도망치듯 나왔지요. 이에 안주인은 앙심을 품고 남편 보디발에게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들어왔다가 자기가 소리 지르자 옷을 버려 두고 도망갔다며 요셉의 옷을 증표로 내놓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사실을 확인도 않고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깊은 감옥에 요셉을 넣어 버렸지요.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와 기구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어도 마음 중심에서 주인을 섬기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선(線)은 결코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심이니 안주인의 불의한 청을 거절하면 어떤 곤란을 당할지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과 주인 앞에,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디발의 가정을 총괄하며 비교적 안정된 자리에 있었던 요셉은 수치스러운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성실함은 감옥을 관리하는 전옥, 즉 오늘날의 교도소장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옥중의 모든 사무와 죄수들을 다 맡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성실할 뿐 아니라 담대히 정도를 지키는 요셉을 기뻐하시며 그의 길을 친히 인도하시고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의 축복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축복하시고자 역사하십니다. 애굽 왕 바로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므로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바로 왕은 번민하여 해석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사 중 누구도 풀지 못하니 더욱 염려가 커져 갔지요.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추천하여 꿈을 풀이합니다. 즉 ‘왕의 꿈에 나온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의 풍년이며, 일곱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일곱 해의 흉년이라’ 하지요. 그런데 ‘흉년이 극심해 전의 풍작을 기억하지 못하며, 동일한 꿈을 겹쳐 꾼 것은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 해석합니다.
이처럼 요셉은 왕의 꿈을 시원하게 해석한 후, 대처 방법까지도 명쾌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에 왕은 요셉을 택하여 애굽 온 땅을 치리하는 총리로 세우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요셉은 하루아침에 애굽의 왕 다음가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말대로 풍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산을 각 성에 거두어들이니 7년의 기근의 때에 이르러 각국에 양식이 떨어졌어도 애굽 왕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각지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마다 왕의 양식을 사려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그중에는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과 가족들까지 애굽에 오게 한 후 부양하였지요.
이처럼 요셉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떠나 타국에 종으로 팔려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형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선한 마음으로 행했던 요셉이었기에 당대에 의인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성실히 살고자 노력하면 스스로 득죄하지 않고, 요셉의 형들처럼 득죄한 사람도 변화시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이끌어 줄까’를 생각합니다. 만일 득죄한 사람이라면 죄의 담을 헐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당회장님께서 죄인이라 할지라도 변화시켜 축복의 반열에 동참시킬 방법을 모색하시니 모난 사람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등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쑥쑥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각종 사고나 어려움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 납니다. 요셉이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한 것처럼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상대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정도를 좇으며, 모든 일에 성실로 식물을 삼아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① 아브라함 ② 이삭 ③ 야곱 ④ 유다
2. 이복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한 까닭이 아닌 것은?
① 아버지 야곱이 요셉만 편애했기 때문이다.
② 자신들의 과실을 요셉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③ 부모와 형제가 요셉에게 엎드려 절한다는 꿈을 듣고 더 미워하였다.
④ 자신들에 비해 싸움을 잘해서 미워했다.
3.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요셉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 )
4.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유혹하며 동침하자고 하였을 때 요셉이 단호하게 뿌리치며 고백한 내용은 성경 어디에 있나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41~3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애굽의 술사나 박사도 풀이 못한 바로 왕의 꿈’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나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 버린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다. 이는 곧 일곱 해의 풍년과 일곱 해의 흉년이 올 것을 의미한다. 요셉이 시원하게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까지 알려 주자 바로 왕은 요셉을 애굽의 왕 다음가는 총리로 세웠다.
2014-11-28
제48과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6~42
읽을말씀 : 행 9:36~42 | 외울말씀 : 행 20:35 l 참고 말씀:고전 3:16~17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과 구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비다는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행하였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했지요. 이 사실이 온 욥바에 퍼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1. 많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난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자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었지요.
그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으로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심지어 스데반 집사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출회를 당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을 받거나 열악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했습니다. 도와줄 사람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도르가가 죽자 평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겠지만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를 청하지요.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비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 살아나게 되지요.
2.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도 있지요.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히 봉사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쌓았다고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보답하고자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간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선행을 기뻐하십니다. 학개 1장 8절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성전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세상적인 대화나 분쟁, 다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 중에는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하여 성도들을 수송하는 데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들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3.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었지요. 오늘날처럼 사랑이 식어져 가는 세대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합니다.
먼저, 구제는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에 해야 합니다(갈 6:10).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을 구제하되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하신 대로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데도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구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더 나태하게 만들게 되므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시험 환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돕다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죄를 깨닫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4. 다비다가 선을 행했는데도 병이 찾아온 이유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을까요?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 해도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불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몸을 혹사시킨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과식하거나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생긴 위장병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이런 경우는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가 되지 않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역시 죄가 됩니다. 과식은 음식에 욕심을 내고 절제하지 못한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요, 불규칙적인 식사로 인해 병이 생겼다면 자신의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것이니 이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비다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쓰다가 병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행을 한 다비다였기에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나타내 주신 것이지요.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여러분도 열심히 선행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비다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브리스길라 ② 루디아 ③ 뵈뵈 ④ 도르가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이다.
②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
③ 건강한데도 게을러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구제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환난 당하는 사람을 구제해서는 안 된다.
3. 주변에 베풀 수 있는 선행을 기록한 다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②
③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19~33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요나를 구하려다 큰 손해를 입은 사람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이 멸망할 것을 외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간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적국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대풍을 만난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 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풍랑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된다. 그러자 이내 풍랑이 잠잠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선원들은 긴 시간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과 구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비다는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행하였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했지요. 이 사실이 온 욥바에 퍼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1. 많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난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자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었지요.
그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으로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심지어 스데반 집사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출회를 당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을 받거나 열악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했습니다. 도와줄 사람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도르가가 죽자 평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겠지만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를 청하지요.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비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 살아나게 되지요.
2.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도 있지요.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히 봉사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쌓았다고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보답하고자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간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선행을 기뻐하십니다. 학개 1장 8절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성전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세상적인 대화나 분쟁, 다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 중에는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하여 성도들을 수송하는 데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들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3.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었지요. 오늘날처럼 사랑이 식어져 가는 세대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합니다.
먼저, 구제는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에 해야 합니다(갈 6:10).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을 구제하되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하신 대로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데도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구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더 나태하게 만들게 되므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시험 환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돕다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죄를 깨닫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4. 다비다가 선을 행했는데도 병이 찾아온 이유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을까요?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 해도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불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몸을 혹사시킨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과식하거나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생긴 위장병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이런 경우는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가 되지 않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역시 죄가 됩니다. 과식은 음식에 욕심을 내고 절제하지 못한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요, 불규칙적인 식사로 인해 병이 생겼다면 자신의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것이니 이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비다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쓰다가 병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행을 한 다비다였기에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나타내 주신 것이지요.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여러분도 열심히 선행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비다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브리스길라 ② 루디아 ③ 뵈뵈 ④ 도르가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이다.
②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
③ 건강한데도 게을러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구제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환난 당하는 사람을 구제해서는 안 된다.
3. 주변에 베풀 수 있는 선행을 기록한 다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②
③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19~33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요나를 구하려다 큰 손해를 입은 사람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이 멸망할 것을 외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간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적국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대풍을 만난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 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풍랑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된다. 그러자 이내 풍랑이 잠잠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선원들은 긴 시간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2014-11-21
제47과네 소견에 선한 대로
삼상 24:4
읽을말씀 : 삼상 24:4 | 외울말씀 : 삼상 16:7 ㅣ 참고 말씀:행 13:22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 선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범사에 좇음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에는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면 분명히 선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인 것들도 많지요. 물론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실 정도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지요.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듯 했지만 왕이 된 후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해 주셨지만 사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을 왕으로 지목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처음에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의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왕으로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다윗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하시지요(삼상 16:7).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1)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였지요. 이런 장수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나가지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며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지요.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보실 때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지요.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또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테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갔지요.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오지요. 이때 마음만 먹으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지요.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악한 임금이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 베었는데 이것도 마음에 찔려 사람들에게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하지요.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서 나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며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삼상 24:11)라 하지요.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24장 16절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다시 한 번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을 받아 소리 높여 울며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뿐 또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지요.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어느 때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의 악을 온전히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혹여 여러분 안에도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다가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린다면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지요.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여러분도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범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모든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일까요?
① 다윗 ② 사울 ③ 솔로몬 ④ 르호보암
2. 사무엘 선지자가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왕으로 주목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했나요?
( )
3. 다윗이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린 블레셋의 장수는 누구일까요?
① 요압 ② 아브넬 ③ 골리앗 ④ 아비새
4. 다윗이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01~31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던 다윗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사울 왕의 추적을 당하고 있는 다윗에게 누군가 동족인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타작마당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다윗은 이때 먼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라고 여쭙는다.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를 구해 준다. 그런데 그일라 백성이 그 은혜를 저버리고 사울 왕에게 다윗을 넘겨주려고 한다. 이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쭙는다. 이처럼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께 여쭙고 그 뜻에 순종하였다.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 선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범사에 좇음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에는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면 분명히 선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인 것들도 많지요. 물론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실 정도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지요.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듯 했지만 왕이 된 후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해 주셨지만 사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을 왕으로 지목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처음에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의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왕으로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다윗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하시지요(삼상 16:7).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1)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였지요. 이런 장수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나가지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며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지요.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보실 때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지요.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또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테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갔지요.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오지요. 이때 마음만 먹으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지요.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악한 임금이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 베었는데 이것도 마음에 찔려 사람들에게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하지요.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서 나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며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삼상 24:11)라 하지요.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24장 16절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다시 한 번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을 받아 소리 높여 울며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뿐 또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지요.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어느 때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의 악을 온전히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혹여 여러분 안에도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다가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린다면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지요.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여러분도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범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모든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일까요?
① 다윗 ② 사울 ③ 솔로몬 ④ 르호보암
2. 사무엘 선지자가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왕으로 주목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했나요?
( )
3. 다윗이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린 블레셋의 장수는 누구일까요?
① 요압 ② 아브넬 ③ 골리앗 ④ 아비새
4. 다윗이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01~31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던 다윗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사울 왕의 추적을 당하고 있는 다윗에게 누군가 동족인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타작마당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다윗은 이때 먼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라고 여쭙는다.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를 구해 준다. 그런데 그일라 백성이 그 은혜를 저버리고 사울 왕에게 다윗을 넘겨주려고 한다. 이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쭙는다. 이처럼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께 여쭙고 그 뜻에 순종하였다.
2014-11-14
제46과추수감사절
출 23:16
읽을말씀 : 출 23:16 | 외울말씀 : 시 17:8 l 참고 말씀:레 23:42~43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축복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였지요.
성경에 보면, 수장절을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미국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풍성한 소산을 주신 것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오늘날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상,하)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많은 성도님이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눈물로 이끄신 사랑하는 나의 목자.
사랑으로 애통함으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분,
내 눈에 눈물이 흘러요.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눈이 부셔요.
그 찬란한 빛 내 마음을 감동시켜요. 감사해요. 나의 아버지.
감사해요. 나의 주님.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가기까지
이끄신 내 목자님 이끄신 내 목자님 감사해요.”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2. 올 한 해 영육 간에 여러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 )
3. 항상 좋은 것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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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 갑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불린 이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축을 통해 젖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산과 나무, 꽃 등에서 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가나안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포도즙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축복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였지요.
성경에 보면, 수장절을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미국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풍성한 소산을 주신 것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오늘날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상,하)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많은 성도님이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눈물로 이끄신 사랑하는 나의 목자.
사랑으로 애통함으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분,
내 눈에 눈물이 흘러요.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눈이 부셔요.
그 찬란한 빛 내 마음을 감동시켜요. 감사해요. 나의 아버지.
감사해요. 나의 주님.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가기까지
이끄신 내 목자님 이끄신 내 목자님 감사해요.”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2. 올 한 해 영육 간에 여러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 )
3. 항상 좋은 것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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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 갑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불린 이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축을 통해 젖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산과 나무, 꽃 등에서 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가나안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포도즙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2014-11-07
제45과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이라
왕상 17:8~14
읽을말씀 : 왕상 17:8~14 | 외울말씀 : 마 10:41 l 참고 말씀:왕상 16:30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날이 갈수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져 갑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 간에 훈훈한 정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하지요.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가 어떤 해를 입어도 상관치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1. 죄로 인해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자 백성들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죄를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나오지요. 이는 아합 왕이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 그리고 국가적으로 왜 시험 환난이 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집안의 가장이나 기업의 머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국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을 내리시기 전,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예언하게 하십니다. 즉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였지요. 비를 내리지 않음으로 아합 왕이 깨닫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섬겼던 풍요와 비의 신인 바알이 헛된 우상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지요.
그런데 아합 왕은 회개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극심한 가뭄으로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보낼 테니 이렇게 공궤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2.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었지요.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 참 신을 가리고자 했지요.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르밧에 이른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합니다. 이때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부탁하지요.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 상해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히 여기며 설명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지요.
즉 엘리야가 여인에게 구한 것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금덩이를 가지고 와도 곡식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 속에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만큼 남은 곡식을 달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즉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3.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아무나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이 선하고 또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에 그 믿음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즉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점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 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 만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만약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받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의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던 왕은 누구일까요?
( )
2. 사르밧 과부는 어떠한 마음을 지녔기에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양식을 선지자에게 공궤할 수 있었을까요?
( )
3.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양식은 무엇이었나요?
( )
4.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는데 왜 유독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던 것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79~3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적인 의미의 우상’과 ‘영적인 의미의 우상’
육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형태가 없는 신을 물질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말한다. 나무, 돌, 쇠붙이, 금, 은 등으로 사람, 짐승, 곤충, 새, 물고기, 해, 달, 별 등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욕심을 좇아 부모나 남편, 아내 혹은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영적인 우상이 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최고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곧 우상이다.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날이 갈수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져 갑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 간에 훈훈한 정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하지요.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가 어떤 해를 입어도 상관치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1. 죄로 인해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자 백성들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죄를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나오지요. 이는 아합 왕이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 그리고 국가적으로 왜 시험 환난이 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집안의 가장이나 기업의 머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국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을 내리시기 전,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예언하게 하십니다. 즉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였지요. 비를 내리지 않음으로 아합 왕이 깨닫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섬겼던 풍요와 비의 신인 바알이 헛된 우상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지요.
그런데 아합 왕은 회개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극심한 가뭄으로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보낼 테니 이렇게 공궤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2.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었지요.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 참 신을 가리고자 했지요.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르밧에 이른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합니다. 이때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부탁하지요.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 상해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히 여기며 설명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지요.
즉 엘리야가 여인에게 구한 것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금덩이를 가지고 와도 곡식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 속에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만큼 남은 곡식을 달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즉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3.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아무나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이 선하고 또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에 그 믿음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즉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점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 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 만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만약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받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의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던 왕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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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르밧 과부는 어떠한 마음을 지녔기에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양식을 선지자에게 공궤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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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양식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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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는데 왜 유독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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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79~3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적인 의미의 우상’과 ‘영적인 의미의 우상’
육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형태가 없는 신을 물질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말한다. 나무, 돌, 쇠붙이, 금, 은 등으로 사람, 짐승, 곤충, 새, 물고기, 해, 달, 별 등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욕심을 좇아 부모나 남편, 아내 혹은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영적인 우상이 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최고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곧 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