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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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제11과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 27:29~30
읽을말씀 : 마 27:29~30 | 외울말씀 : 고후 10:5 l 참고 말씀:막 9:45~47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당하며 피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 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달라 입력된 지식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 하고,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지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지요. 따라서 사람의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진리를 좇아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비진리 생각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요일 2:1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적인 생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어떤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여러 상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성결한 사람들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계 2:10).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또한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수많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신 사랑을 믿기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군병 한 사람이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군병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쇠못이 양손과 양발의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악을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막 9:45~47).
오늘날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혈기가 나면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유 없이 살인하고 총을 난사하며 방화를 일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과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히 죄를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진리로 마음을 지키며 늘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만 하셨을까요?
( )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
3. 서로 맞는 것끼리 선을 이어 보세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3천층
영광의 면류관 1천층
생명의 면류관 새 예루살렘
금 면류관 2천층
의의 면류관 낙원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3부 11과‘가상칠언(1)’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을 좇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 교만, 혈기, 게으름, 간음 등 죄의 속성이 있는데,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만나면 육신의 정욕이 나온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이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고 결국 죄를 짓게 된다.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당하며 피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 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달라 입력된 지식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 하고,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지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지요. 따라서 사람의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진리를 좇아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비진리 생각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요일 2:1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적인 생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어떤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여러 상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성결한 사람들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계 2:10).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또한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수많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신 사랑을 믿기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군병 한 사람이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군병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쇠못이 양손과 양발의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악을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막 9:45~47).
오늘날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혈기가 나면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유 없이 살인하고 총을 난사하며 방화를 일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과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히 죄를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진리로 마음을 지키며 늘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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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만 하셨을까요?
( )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
3. 서로 맞는 것끼리 선을 이어 보세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3천층
영광의 면류관 1천층
생명의 면류관 새 예루살렘
금 면류관 2천층
의의 면류관 낙원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3부 11과‘가상칠언(1)’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을 좇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 교만, 혈기, 게으름, 간음 등 죄의 속성이 있는데,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만나면 육신의 정욕이 나온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이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고 결국 죄를 짓게 된다.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한다.
2015-03-13
제10과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사 53:5~6
읽을말씀 : 사 53:5~6 | 외울말씀 : 벧전 2:24 ㅣ 참고 말씀:히 9:2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이나 연약함과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 했을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 즉시 치료되어 중풍병자는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치료받지 못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습니다.
2.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도 틈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사람이 보는 의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어떤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화가 난 부모는 “왜 너는 맨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까지 찾아가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정당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름을 알아 진리대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막상 자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상을 의존합니다. 만일 질병에 걸렸을 때 병원부터 찾는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아사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발에 병이 들자 하나님보다 의원을 의지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죄를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제사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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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시오.
1. “그가 찔림은 우리의 (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 )을 인함이라 그가 (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2.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 )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 )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 )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 )에 달려 피 흘려 주셨다.
3.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10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사 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사는 어머니가 가증한 아세라 우상을 섬기자 황후 자리까지 폐해 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던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뢰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선지자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재위 39년에 발에 중한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을 의뢰하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고 만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이나 연약함과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 했을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 즉시 치료되어 중풍병자는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치료받지 못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습니다.
2.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도 틈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사람이 보는 의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어떤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화가 난 부모는 “왜 너는 맨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까지 찾아가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정당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름을 알아 진리대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막상 자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상을 의존합니다. 만일 질병에 걸렸을 때 병원부터 찾는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아사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발에 병이 들자 하나님보다 의원을 의지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죄를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제사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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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시오.
1. “그가 찔림은 우리의 (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 )을 인함이라 그가 (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2.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 )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 )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 )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 )에 달려 피 흘려 주셨다.
3.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10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사 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사는 어머니가 가증한 아세라 우상을 섬기자 황후 자리까지 폐해 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던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뢰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선지자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재위 39년에 발에 중한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을 의뢰하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고 만다.
2015-03-06
제9과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게 하신 섭리
요 19:23~24
읽을말씀 : 요 19:23~24 | 외울말씀 : 마 24:34 ㅣ 참고 말씀:시 22:18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대해 자세히 기록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겉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그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군병들이 각각 한 깃씩 얻은 것처럼 겉옷 조각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을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결국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하였고 백성들은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에게 함락될 때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처럼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고백대로 유대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될 때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한 말이 올무가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도 벌거벗겨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환난이 임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짰다는 말씀의 의미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속옷에 대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에 대해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을 남기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됩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이어 왔습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유대인’이라 부르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냅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의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참으로 변함없는 마음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에 선민으로 택하셨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이스라엘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마지막 때의 섭리를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변함없는 중심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당하였으나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1948년에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한 후 아주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지요.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듯이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한 답변으로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어졌다가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믿는 성도들은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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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9과 ‘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는 어떤 인물일까?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는 화산 대폭발로 폼페이 시 전체가 화산재에 매몰되고, 로마의 대화재와 페스트 만연 등의 불행한 사건 속에서 로마의 재건과 구제사업에 전력했다. 또한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대해 자세히 기록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겉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그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군병들이 각각 한 깃씩 얻은 것처럼 겉옷 조각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을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결국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하였고 백성들은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에게 함락될 때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처럼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고백대로 유대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될 때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한 말이 올무가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도 벌거벗겨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환난이 임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짰다는 말씀의 의미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속옷에 대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에 대해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을 남기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됩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이어 왔습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유대인’이라 부르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냅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의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참으로 변함없는 마음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에 선민으로 택하셨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이스라엘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마지막 때의 섭리를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변함없는 중심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당하였으나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1948년에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한 후 아주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지요.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듯이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한 답변으로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어졌다가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믿는 성도들은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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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9과 ‘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는 어떤 인물일까?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는 화산 대폭발로 폼페이 시 전체가 화산재에 매몰되고, 로마의 대화재와 페스트 만연 등의 불행한 사건 속에서 로마의 재건과 구제사업에 전력했다. 또한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다.
2015-02-27
제8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요 19:32~36
읽을말씀 : 요 19:32~36 | 외울말씀 : 벧후 1:4 ㅣ 참고 말씀:요 1:14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합니다.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군병들은 먼저 강도들이 빨리 숨을 거두도록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요 19:33).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시편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다리뼈가 꺾이지 않도록 친히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민 9:12 \; 출 12:46). 여기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양이 사람에게 젖과 고기는 물론 털과 가죽까지 다 내어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여 화목제물로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 2:6~7). 그리고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고 병든 사람과 연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한 채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온갖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 같은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셨으며, 때로는 슬픔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오직 선과 진리만 행하시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도 점도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마음을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이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과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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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8과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게 하신 섭리’ 읽고 밑줄쳐 오기.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합니다.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군병들은 먼저 강도들이 빨리 숨을 거두도록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요 19:33).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시편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다리뼈가 꺾이지 않도록 친히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민 9:12 \; 출 12:46). 여기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양이 사람에게 젖과 고기는 물론 털과 가죽까지 다 내어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여 화목제물로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 2:6~7). 그리고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고 병든 사람과 연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한 채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온갖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 같은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셨으며, 때로는 슬픔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오직 선과 진리만 행하시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도 점도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마음을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이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과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8과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게 하신 섭리’ 읽고 밑줄쳐 오기.
2015-02-20
제0과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이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15년 영광의 해, 열매를 거두는 축복의 해를 맞아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 안에서 설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 460장 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대표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 에베소서 5:20~21 _____________________ 사회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 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날에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기에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기근과 전쟁, 폭설과 폭우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날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서 아수라장 같은 혼란이 더해만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염려, 걱정,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며 올 한 해 동안도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며 늘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키시며 보호해 주셨기에 설 명절을 맞아 이 시간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고, 물질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을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말씀합니다. 참으로 사건 사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킴 받고 보호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를 몰라 그동안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면,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장차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든 것에 부족됨 없도록 넘치게 채워 주시지요. 그러니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때 더욱 기쁘게 여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롬 8:28).
감사는 어떠한 환경이라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유에서 유의 창조만 믿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영의 눈,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무에서 유가 창조될 것을 믿으니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5장 21절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요, 섬기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자존심과 교만, 스스로 옳다고 하는 생각과 이론을 모두 버려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내게 잘해 주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윗사람이니까.’ 섬기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처럼 마음 중심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윗사람을 섬기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 등 선을 행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자연히 상대를 높이고 섬겨 주며 자신을 낮추는 아름다운 행실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고유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더욱 복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먼저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하신 대로 주 안에서 서로 섬기며 상대를 위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주장, 내 의견, 내 생각만 고집할 때는 서로 불목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본받아 피차 복종한다면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주 안에서 경건하며 화평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만사형통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 30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와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이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15년 영광의 해, 열매를 거두는 축복의 해를 맞아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 안에서 설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 460장 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대표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 에베소서 5:20~21 _____________________ 사회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 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날에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기에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기근과 전쟁, 폭설과 폭우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날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서 아수라장 같은 혼란이 더해만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염려, 걱정,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며 올 한 해 동안도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며 늘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키시며 보호해 주셨기에 설 명절을 맞아 이 시간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고, 물질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을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말씀합니다. 참으로 사건 사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킴 받고 보호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를 몰라 그동안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면,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장차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든 것에 부족됨 없도록 넘치게 채워 주시지요. 그러니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때 더욱 기쁘게 여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롬 8:28).
감사는 어떠한 환경이라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유에서 유의 창조만 믿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영의 눈,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무에서 유가 창조될 것을 믿으니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5장 21절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요, 섬기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자존심과 교만, 스스로 옳다고 하는 생각과 이론을 모두 버려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내게 잘해 주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윗사람이니까.’ 섬기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처럼 마음 중심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윗사람을 섬기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 등 선을 행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자연히 상대를 높이고 섬겨 주며 자신을 낮추는 아름다운 행실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고유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더욱 복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먼저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하신 대로 주 안에서 서로 섬기며 상대를 위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주장, 내 의견, 내 생각만 고집할 때는 서로 불목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본받아 피차 복종한다면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주 안에서 경건하며 화평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만사형통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 30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와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5-02-13
제7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갈 3:13~14
읽을말씀 : 갈 3:13~14 | 외울말씀 : 갈 3:14 l 참고 말씀:사 53:4~6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 이유를 알아본다.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는 저주의 의미가 아닌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놓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육체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피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를 흘려 주심으로 단번에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이처럼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오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여러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그나마 순간에 끝날 수 있지만 십자가 처형은 숨을 거둘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호흡 곤란으로 인한 고통과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달라붙어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였습니다(마 27:39~40).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희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어찌하면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 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7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 이유를 알아본다.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는 저주의 의미가 아닌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놓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육체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피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를 흘려 주심으로 단번에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이처럼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오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여러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그나마 순간에 끝날 수 있지만 십자가 처형은 숨을 거둘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호흡 곤란으로 인한 고통과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달라붙어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였습니다(마 27:39~40).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희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어찌하면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 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7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2015-02-06
제6과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고전 2:6~10
읽을말씀 : 고전 2:6~10 | 외울말씀 : 요 1:12 ㅣ 참고 말씀:창 3:14~15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고자 인간 구원의 섭리를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말씀하셨기에 간교한 뱀을 사주한 원수 마귀 사단은 여자의 후손, 곧 예수님이 태어나 자신을 상하게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간악한 헤롯 왕을 사주하여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자 예수님은 애굽을 떠나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살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30세부터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공생애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니 많은 사람이 믿고 따랐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없애 버려야 자신들이 세세토록 세상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몄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을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비밀한 가운데 철저히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모든 것을 영계의 법칙에 따라 행하시는 분입니다. 나라에도 법이 있듯이 영계에도 법이 있습니다. 그 예로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롬 6:23). 사망은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들을 사주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칙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알았다면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춰진 비밀이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이방 민족과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상종하지 않을뿐더러 사마리아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거쳐 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지역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린 것입니다. 결국 여인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 마음을 두드리실 때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셨는지, 왜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며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인간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일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로 가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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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것이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다.
②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③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줄 알았다.
④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다.
2.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6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한 이유’는?
원래 사마리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B.C. 721년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했다. 지배국 앗수르의 혼합정책에 따라 이방인들이 그 땅에 유입되자 사마리아인들이 그들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게 되었다.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고자 인간 구원의 섭리를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말씀하셨기에 간교한 뱀을 사주한 원수 마귀 사단은 여자의 후손, 곧 예수님이 태어나 자신을 상하게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간악한 헤롯 왕을 사주하여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자 예수님은 애굽을 떠나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살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30세부터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공생애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니 많은 사람이 믿고 따랐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없애 버려야 자신들이 세세토록 세상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몄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을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비밀한 가운데 철저히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모든 것을 영계의 법칙에 따라 행하시는 분입니다. 나라에도 법이 있듯이 영계에도 법이 있습니다. 그 예로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롬 6:23). 사망은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들을 사주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칙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알았다면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춰진 비밀이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이방 민족과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상종하지 않을뿐더러 사마리아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거쳐 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지역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린 것입니다. 결국 여인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 마음을 두드리실 때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셨는지, 왜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며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인간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일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로 가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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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것이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다.
②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③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줄 알았다.
④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다.
2.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부 6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한 이유’는?
원래 사마리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B.C. 721년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했다. 지배국 앗수르의 혼합정책에 따라 이방인들이 그 땅에 유입되자 사마리아인들이 그들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게 되었다.
2015-01-30
제5과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
레 25:23~25
읽을말씀 : 레 25:23~25 | 외울말씀 : 외울 말씀:롬 5:19 ㅣ 참고 말씀:계 5:1~5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계의 법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좇아 비밀한 가운데 만세 전에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近族)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가 하는 과정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리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 후 계약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하고 다른 1부는 인봉하지 않고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고, 근족 중에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자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장 4절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무를 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을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구세주의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으니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땅 아래를 보니 지옥에 속한 것뿐이었기에 애통하였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대속해 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시므로 토지 무를 힘이 있습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동생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했던 나오미의 형편을 알고 가장 가까운 근족에게 기업 무르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합니다. 그 토지를 무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근족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사랑도 있어서 그를 대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인류를 향한 크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하고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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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첫째, ( )이어야 한다.
둘째, ( )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넷째, 목숨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2. 구약 성경에 나오는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 )
3. 아담의 권세가 왜 원수 마귀에게 넘어가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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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5과‘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원죄’란?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부모의 기를 통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한다.
‘자범죄’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한다.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계의 법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좇아 비밀한 가운데 만세 전에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近族)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가 하는 과정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리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 후 계약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하고 다른 1부는 인봉하지 않고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고, 근족 중에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자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장 4절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무를 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을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구세주의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으니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땅 아래를 보니 지옥에 속한 것뿐이었기에 애통하였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대속해 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시므로 토지 무를 힘이 있습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동생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했던 나오미의 형편을 알고 가장 가까운 근족에게 기업 무르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합니다. 그 토지를 무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근족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사랑도 있어서 그를 대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인류를 향한 크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하고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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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첫째, ( )이어야 한다.
둘째, ( )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넷째, 목숨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2. 구약 성경에 나오는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 )
3. 아담의 권세가 왜 원수 마귀에게 넘어가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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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5과‘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원죄’란?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부모의 기를 통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한다.
‘자범죄’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한다.
2015-01-23
제4과선악과를 두신 이유
창 3:1~7
읽을말씀 : 창 3:1~7 | 외울말씀 : 약 1:15 ㅣ 참고 말씀:창 2:17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들이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섭리를 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생령 아담은 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으로 창조하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5).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었으며 장차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었지요.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2.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아내 하와를 유혹하니 결국 남편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생령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명령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절을 보면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습니다. 이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켜 답변하자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면서 재차 유혹합니다(창 3:4~5). 이처럼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욕심을 불어넣으니 여자는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었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창 3:6).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다가 사단이 뱀을 통하여 유혹하자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성립되었고, 비로소 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나옵니다. 과연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사망이 어떻게 임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후 곧바로 죽지 않고 오랜 세월을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살전 5:23).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또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습니다(창 3:16). 범죄한 아담은 저주받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창 3:17).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요. 그리하여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렇다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은 어떠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벧전 5:8)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더욱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스스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한 후에야 참된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끄신 에덴동산에서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성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어도 막지 않으시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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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아래 보기의 단어를 넣어 초신자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게 된 근원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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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4과‘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자유 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들이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섭리를 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생령 아담은 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으로 창조하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5).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었으며 장차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었지요.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2.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아내 하와를 유혹하니 결국 남편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생령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명령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절을 보면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습니다. 이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켜 답변하자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면서 재차 유혹합니다(창 3:4~5). 이처럼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욕심을 불어넣으니 여자는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었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창 3:6).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다가 사단이 뱀을 통하여 유혹하자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성립되었고, 비로소 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나옵니다. 과연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사망이 어떻게 임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후 곧바로 죽지 않고 오랜 세월을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살전 5:23).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또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습니다(창 3:16). 범죄한 아담은 저주받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창 3:17).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요. 그리하여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렇다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은 어떠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벧전 5:8)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더욱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스스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한 후에야 참된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끄신 에덴동산에서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성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어도 막지 않으시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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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아래 보기의 단어를 넣어 초신자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게 된 근원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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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4과‘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자유 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2015-01-16
제3과사람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창 1:28
읽을말씀 : 창 1:28 | 외울말씀 : 마 3:12 l 참고 말씀:딤전 2:4
교육목표 :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 성도는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시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마 13:34). 그중에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 비유, 포도원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두어 천국으로 들인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요 1:1).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셨습니다(요일 1:5).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갖고 계시기에 모든 것을 홀로 누리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계시던 공간을 오묘하게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지요.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구세주가 되어 주실 성자 예수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다 들어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씨를 심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마음밭을 개간하는 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할 줄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여 경작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한 후 열 달 동안 여러 고통이 따르고, 해산할 때에도 큰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힘써 일하며 밤낮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믿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에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옵니다.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쭉정이는 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시는 것일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자유 의지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쭉정이에 속하며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전 3:18). 하지만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영이 없는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해 버릴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천국에 들이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구별하여 지옥을 두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어 쭉정이를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한 쭉정이와 같은 존재가 알곡 성도와 영원히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베드로, 바울 등과 같은 믿음의 선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주의 종과 일꾼들을 통해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며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인간 경작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때가 이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인간 경작의 역사가 끝나면 천년왕국을 보냅니다.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는 백보좌 대심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말씀한 대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알곡 성도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 심판을 받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천국 처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쭉정이는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알곡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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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보세요.
알곡이란 ( )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한다.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 하지만 ( )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 )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3. 사람의 가치를 잃은 쭉정이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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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3과‘선악과를 두신 이유’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알파와 오메가’란?
문명의 시작과 끝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처음과 나중’이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이다.
‘시작과 끝’이란?
성령님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이다.
교육목표 :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 성도는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시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마 13:34). 그중에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 비유, 포도원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두어 천국으로 들인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요 1:1).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셨습니다(요일 1:5).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갖고 계시기에 모든 것을 홀로 누리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계시던 공간을 오묘하게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지요.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구세주가 되어 주실 성자 예수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다 들어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씨를 심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마음밭을 개간하는 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할 줄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여 경작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한 후 열 달 동안 여러 고통이 따르고, 해산할 때에도 큰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힘써 일하며 밤낮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믿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에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옵니다.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쭉정이는 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시는 것일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자유 의지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쭉정이에 속하며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전 3:18). 하지만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영이 없는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해 버릴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천국에 들이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구별하여 지옥을 두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어 쭉정이를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한 쭉정이와 같은 존재가 알곡 성도와 영원히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베드로, 바울 등과 같은 믿음의 선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주의 종과 일꾼들을 통해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며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인간 경작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때가 이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인간 경작의 역사가 끝나면 천년왕국을 보냅니다.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는 백보좌 대심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말씀한 대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알곡 성도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 심판을 받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천국 처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쭉정이는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알곡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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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보세요.
알곡이란 ( )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한다.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 하지만 ( )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 )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3. 사람의 가치를 잃은 쭉정이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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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부 3과‘선악과를 두신 이유’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알파와 오메가’란?
문명의 시작과 끝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처음과 나중’이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이다.
‘시작과 끝’이란?
성령님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