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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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2
제19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요한일서 4:7~8
읽을말씀 : 요한일서 4:7~8 | 외울말씀 : 이사야 49:15 | 참고말씀 :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계신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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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38~5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계신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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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38~5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17-05-05
제18과지혜롭게 살자
약 3:17~18
읽을말씀 : 약 3:17~18 | 외울말씀 : 눅 6:45 ㅣ 잠 3:14~18, 11:30
교육목표 : 마음에 성결을 이루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받아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나가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일을 피해 갈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잘 극복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일을 해도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를 얻으면 부족할 것이 없고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1. 지혜의 귀중성
사전에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셔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기억 장치에 아무런 지식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빨며 울지요. 그러다가 자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며 지식을 쌓아갑니다.
이러한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지혜롭다, 그렇지 못하다 말합니다. 지혜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나아가 나라에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의 정도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한 나라가 흥하거나 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잠 3:14~18).
2.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
지혜는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한 지혜는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지혜를 쓰면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가정이 흥하며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줍니다. 반대로 악한 지혜를 쓰면 당장에는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전투에서 죽은 뒤 당장 다윗이 나라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위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을 따르는 유다 지파는 그들과 7년 반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바로 그 적장인 아브넬이 항복하려고 다윗에게 왔을 때 그를 융숭히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윗의 군장 요압이 사사로운 복수심에 불타 암살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진심으로 애통해하였습니다. 또 다윗에게 큰 상을 얻을까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암살한 사람들을 오히려 사형시켰습니다. 그것은 임금을 배신한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이 자진해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반면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악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좇아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간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막힌 지혜를 말해 줍니다. 이때 후새라는 사람이 다윗의 밀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먼저 압살롬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고는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을 깨뜨리고 다윗 일행의 생명을 구합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하 17장 14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하였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자 자결하고 맙니다. 즉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압살롬이 다윗에게 패할 것이고, 자신 역시 다윗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한 지혜는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리석게도 이스라엘 온 회중의 건의를 무시해 버립니다. 회중이 요청한 것은 솔로몬 왕 때 여러 가지 공사로 백성의 부담이 컸으니 그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좀 가볍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을 모셨던 노인들은 전후 사정과 백성의 마음을 잘 아는 고로 백성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건의하였지요.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들의 말만 듣고서 포학한 말로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지혜가 나왔고, 왕도 악하니 그들의 악한 말이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의 마음이 왕에게서 돌아서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지혜가 얼마나 좋은지 기생 라합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을 향해 갑니다. 그 과정에 여호수아가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에 보내지요(수 2장). 여리고 성에 사는 라합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신 것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신 사건 등을 듣고 그들의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집에 숨겨 주었고, 왕이 그들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자 지혜로운 말로 따돌려 위험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라합을 축복하여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그녀와 함께한 일가친척까지 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선의 지혜를 좇으면 실패를 면하며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선한 지혜를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선한 마음에서는 선한 생각이 나오고 진리의 방법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지혜를 동원합니다. 하지만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지혜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악의 모양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었을 때에 선한 지혜가 나오지요. 물론 성결하다고 무조건 지혜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성결한 마음이 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합니다.
가령, 어떤 심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시다. 만일 마음에 악이 있다면 감정이 앞서 책망부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버린 선한 마음이라면 미운 감정이 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한 당사자보다 더 애통해하며 그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 원합니다.
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려운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악을 발동하지 않도록 선의 지혜를 베풀지요. 그가 선에 감동되어 더 이상 악을 발전시키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가 선 가운데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결한 마음이 되면 성결한 방법론이 나오고 그에 필요한 지혜가 옵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 속에서 행하시므로 우리가 죄악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성령의 음성, 인도와 주관을 받게 해 주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으니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지혜를 배워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진들이 겪었던 각 사건에 대한 선의 지혜를 배워 잘 양식을 삼으면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성령께서 떠올려 주심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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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 )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2. 아히도벨, 르호보암, 요압은 어떠한 인물인지 말해 보세요.
3. 누가복음 6:45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8~3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후새’는 누구일까요?
다윗의 친구이자 모사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 그에게 거짓 투항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물리쳐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압살롬의 모사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을 정도로 정확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군사 12,000명을 뽑아 다윗의 뒤를 바로 추격하여 그가 곤하고 약할 때 엄습하자고 한다. 반면 후새는 이미 다윗이 동굴 속에 숨었을 것이니 백성을 모아 직접 싸움터로 가자고 한다.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보다 후새의 모략을 택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의 군대를 격파하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 장군에 의해 죽게 된다.
교육목표 : 마음에 성결을 이루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받아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나가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일을 피해 갈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잘 극복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일을 해도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를 얻으면 부족할 것이 없고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1. 지혜의 귀중성
사전에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셔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기억 장치에 아무런 지식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빨며 울지요. 그러다가 자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며 지식을 쌓아갑니다.
이러한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지혜롭다, 그렇지 못하다 말합니다. 지혜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나아가 나라에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의 정도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한 나라가 흥하거나 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잠 3:14~18).
2.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
지혜는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한 지혜는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지혜를 쓰면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가정이 흥하며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줍니다. 반대로 악한 지혜를 쓰면 당장에는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전투에서 죽은 뒤 당장 다윗이 나라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위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을 따르는 유다 지파는 그들과 7년 반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바로 그 적장인 아브넬이 항복하려고 다윗에게 왔을 때 그를 융숭히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윗의 군장 요압이 사사로운 복수심에 불타 암살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진심으로 애통해하였습니다. 또 다윗에게 큰 상을 얻을까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암살한 사람들을 오히려 사형시켰습니다. 그것은 임금을 배신한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이 자진해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반면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악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좇아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간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막힌 지혜를 말해 줍니다. 이때 후새라는 사람이 다윗의 밀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먼저 압살롬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고는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을 깨뜨리고 다윗 일행의 생명을 구합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하 17장 14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하였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자 자결하고 맙니다. 즉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압살롬이 다윗에게 패할 것이고, 자신 역시 다윗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한 지혜는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리석게도 이스라엘 온 회중의 건의를 무시해 버립니다. 회중이 요청한 것은 솔로몬 왕 때 여러 가지 공사로 백성의 부담이 컸으니 그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좀 가볍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을 모셨던 노인들은 전후 사정과 백성의 마음을 잘 아는 고로 백성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건의하였지요.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들의 말만 듣고서 포학한 말로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지혜가 나왔고, 왕도 악하니 그들의 악한 말이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의 마음이 왕에게서 돌아서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지혜가 얼마나 좋은지 기생 라합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을 향해 갑니다. 그 과정에 여호수아가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에 보내지요(수 2장). 여리고 성에 사는 라합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신 것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신 사건 등을 듣고 그들의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집에 숨겨 주었고, 왕이 그들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자 지혜로운 말로 따돌려 위험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라합을 축복하여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그녀와 함께한 일가친척까지 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선의 지혜를 좇으면 실패를 면하며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선한 지혜를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선한 마음에서는 선한 생각이 나오고 진리의 방법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지혜를 동원합니다. 하지만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지혜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악의 모양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었을 때에 선한 지혜가 나오지요. 물론 성결하다고 무조건 지혜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성결한 마음이 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합니다.
가령, 어떤 심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시다. 만일 마음에 악이 있다면 감정이 앞서 책망부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버린 선한 마음이라면 미운 감정이 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한 당사자보다 더 애통해하며 그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 원합니다.
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려운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악을 발동하지 않도록 선의 지혜를 베풀지요. 그가 선에 감동되어 더 이상 악을 발전시키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가 선 가운데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결한 마음이 되면 성결한 방법론이 나오고 그에 필요한 지혜가 옵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 속에서 행하시므로 우리가 죄악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성령의 음성, 인도와 주관을 받게 해 주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으니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지혜를 배워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진들이 겪었던 각 사건에 대한 선의 지혜를 배워 잘 양식을 삼으면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성령께서 떠올려 주심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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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 )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2. 아히도벨, 르호보암, 요압은 어떠한 인물인지 말해 보세요.
3. 누가복음 6:45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8~3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후새’는 누구일까요?
다윗의 친구이자 모사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 그에게 거짓 투항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물리쳐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압살롬의 모사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을 정도로 정확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군사 12,000명을 뽑아 다윗의 뒤를 바로 추격하여 그가 곤하고 약할 때 엄습하자고 한다. 반면 후새는 이미 다윗이 동굴 속에 숨었을 것이니 백성을 모아 직접 싸움터로 가자고 한다.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보다 후새의 모략을 택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의 군대를 격파하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 장군에 의해 죽게 된다.
2017-04-28
제17과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창 31:7~13
읽을말씀 : 창 31:7~13 | 외울말씀 : 히 11:1 | 참고 말씀: 창 27:27~29, 30:43
교육목표 :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삶에 형통함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인류의 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행하면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며 축복을 내려 주시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불행했던 사람도 행복해지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도 명쾌하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삶을 통해 그 축복의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1.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은 야곱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로,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들로 다니며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성품으로 집안일을 도우니 자연히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지요. 야곱은 지혜로운 반면 간교한 성품이 있었고, 꿈과 야심이 있어서 형이 가진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와서 몹시 배고파할 때 팥죽 한 그릇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합니다. 이에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야곱한테 팔아버리지요.
세월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자 죽기 전에 장자 에서를 불러 축복해 주고자 합니다. 이삭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면 축복해 주겠다고 하지요.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 축복을 받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별미를 만들어 주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이삭은 변장한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창 27:27~29).
그런데 야곱이 축복 기도를 받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이삭은 이미 별미를 먹고 야곱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니 더 이상 축복해 줄 것이 없다고 하지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방성대곡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격분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합니다. 이 일로 야곱은 부모 곁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하게 됩니다.
2. 라헬을 얻고자 7년간 봉사한 야곱
처음 라반의 집에 올 때만 해도 야곱은 얼마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게으르고 자기만 생각했다면 대충 시간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외삼촌의 일을 도왔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 레아는 안력이 부족한 반면, 둘째 딸 라헬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라반에게 7년간 봉사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단지 외삼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수준이었다면 이때부터는 계약에 의해 삯을 받고 일하는 품꾼과 같은 위치가 되었지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라온 야곱으로서는 품꾼 취급을 받는다는 자체가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깨뜨려 나가는 연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이라는 세월을 기꺼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한 번 품은 사랑의 마음이 변치 않았고 목표한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내는 좋은 중심을 가졌습니다. 간교한 속성이 있음에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쓰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침내 약속한 7년이 채워지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혼 첫날밤에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여보낸 사람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하며 7일을 더 채우면 라헬도 아내로 줄 테니 7년을 더 봉사하라고 하지요. 야곱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지만 또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서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부당한 약속이라도 지켰습니다. 그리고 라반으로 인해 자신의 간교한 속성을 돌아보며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지요. ‘예전에 내가 장자권을 얻고자 형과 아버지를 속였더니 이제는 내가 외삼촌으로부터 철저하게 속임을 당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바라봄의 법칙으로 거부가 된 야곱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봉사의 대가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제안을 합니다.
즉 외삼촌의 양 떼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 그리고 염소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품삯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쾌히 승낙하지요.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 얼룩덜룩하게 만든 후 실한 가축들이 와서 물을 먹으며 교미하는 장소에 놔두었습니다. 가축들이 교미하는 순간에 그 무늬를 보게 했지요. 그리고 약한 가축들이 오면 가지를 치워 버렸습니다. 얼룩덜룩한 가지를 바라보며 물을 마신 튼실한 가축들은 교미하여 아롱지거나 점이 있거나 검은 새끼를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한 가축들은 다 야곱의 것이 되고, 약한 것들은 라반의 것이 되었지요.
야곱은 가축들에게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해 막대한 부를 쌓아갔습니다. 14년간 봉사하면서 어떻게 해야 양이 새끼를 잘 낳고 어떻게 해야 잘 자라는지 완전히 터득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법칙 또한 터득하여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창 30:43).
4.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거부가 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합니다. 야곱은 본격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어느 날 야곱은 외삼촌 몰래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떠납니다. 삼 일 후 라반이 알고 황급히 쫓아오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현몽하여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에 라반은 돌무더기를 쌓고 그것을 경계로 하여 서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돌아가지요.
한편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형 에서가 4백 명을 이끌고 옵니다. 외삼촌 라반과 약조했으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형 에서 앞에 나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지요. 야곱은 어찌하든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예물을 보냅니다. 어느 정도 예물이면 형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를 계산하며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자 했지요. 그러나 자신의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그제야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내려 놓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의뢰하게 되지요.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뼈가 위골되도록 밤새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립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가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끝까지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기적인 생각과 지혜와 틀 그리고 자기적인 방법과 이론 등이 철저히 깨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빌어 주었던 장자의 축복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니 비로소 장자의 축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형 에서의 마음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형의 환대를 받으며 고향에 돌아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지혜, 이론 등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면 야곱처럼 많은 고생을 하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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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야곱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2.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3.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야곱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 했을 때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207~2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라봄의 법칙’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품은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은 많은 분야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어떤 인물을 존경하며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는 누구를 바라보며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자녀들의 신앙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부모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장성한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온전한 신앙의 대상은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육목표 :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삶에 형통함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인류의 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행하면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며 축복을 내려 주시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불행했던 사람도 행복해지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도 명쾌하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삶을 통해 그 축복의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1.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은 야곱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로,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들로 다니며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성품으로 집안일을 도우니 자연히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지요. 야곱은 지혜로운 반면 간교한 성품이 있었고, 꿈과 야심이 있어서 형이 가진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와서 몹시 배고파할 때 팥죽 한 그릇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합니다. 이에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야곱한테 팔아버리지요.
세월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자 죽기 전에 장자 에서를 불러 축복해 주고자 합니다. 이삭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면 축복해 주겠다고 하지요.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 축복을 받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별미를 만들어 주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이삭은 변장한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창 27:27~29).
그런데 야곱이 축복 기도를 받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이삭은 이미 별미를 먹고 야곱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니 더 이상 축복해 줄 것이 없다고 하지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방성대곡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격분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합니다. 이 일로 야곱은 부모 곁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하게 됩니다.
2. 라헬을 얻고자 7년간 봉사한 야곱
처음 라반의 집에 올 때만 해도 야곱은 얼마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게으르고 자기만 생각했다면 대충 시간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외삼촌의 일을 도왔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 레아는 안력이 부족한 반면, 둘째 딸 라헬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라반에게 7년간 봉사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단지 외삼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수준이었다면 이때부터는 계약에 의해 삯을 받고 일하는 품꾼과 같은 위치가 되었지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라온 야곱으로서는 품꾼 취급을 받는다는 자체가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깨뜨려 나가는 연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이라는 세월을 기꺼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한 번 품은 사랑의 마음이 변치 않았고 목표한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내는 좋은 중심을 가졌습니다. 간교한 속성이 있음에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쓰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침내 약속한 7년이 채워지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혼 첫날밤에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여보낸 사람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하며 7일을 더 채우면 라헬도 아내로 줄 테니 7년을 더 봉사하라고 하지요. 야곱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지만 또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서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부당한 약속이라도 지켰습니다. 그리고 라반으로 인해 자신의 간교한 속성을 돌아보며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지요. ‘예전에 내가 장자권을 얻고자 형과 아버지를 속였더니 이제는 내가 외삼촌으로부터 철저하게 속임을 당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바라봄의 법칙으로 거부가 된 야곱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봉사의 대가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제안을 합니다.
즉 외삼촌의 양 떼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 그리고 염소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품삯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쾌히 승낙하지요.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 얼룩덜룩하게 만든 후 실한 가축들이 와서 물을 먹으며 교미하는 장소에 놔두었습니다. 가축들이 교미하는 순간에 그 무늬를 보게 했지요. 그리고 약한 가축들이 오면 가지를 치워 버렸습니다. 얼룩덜룩한 가지를 바라보며 물을 마신 튼실한 가축들은 교미하여 아롱지거나 점이 있거나 검은 새끼를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한 가축들은 다 야곱의 것이 되고, 약한 것들은 라반의 것이 되었지요.
야곱은 가축들에게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해 막대한 부를 쌓아갔습니다. 14년간 봉사하면서 어떻게 해야 양이 새끼를 잘 낳고 어떻게 해야 잘 자라는지 완전히 터득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법칙 또한 터득하여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창 30:43).
4.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거부가 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합니다. 야곱은 본격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어느 날 야곱은 외삼촌 몰래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떠납니다. 삼 일 후 라반이 알고 황급히 쫓아오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현몽하여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에 라반은 돌무더기를 쌓고 그것을 경계로 하여 서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돌아가지요.
한편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형 에서가 4백 명을 이끌고 옵니다. 외삼촌 라반과 약조했으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형 에서 앞에 나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지요. 야곱은 어찌하든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예물을 보냅니다. 어느 정도 예물이면 형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를 계산하며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자 했지요. 그러나 자신의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그제야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내려 놓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의뢰하게 되지요.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뼈가 위골되도록 밤새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립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가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끝까지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기적인 생각과 지혜와 틀 그리고 자기적인 방법과 이론 등이 철저히 깨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빌어 주었던 장자의 축복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니 비로소 장자의 축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형 에서의 마음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형의 환대를 받으며 고향에 돌아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지혜, 이론 등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면 야곱처럼 많은 고생을 하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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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야곱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2.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3.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야곱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 했을 때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207~2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라봄의 법칙’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품은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은 많은 분야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어떤 인물을 존경하며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는 누구를 바라보며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자녀들의 신앙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부모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장성한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온전한 신앙의 대상은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017-04-21
제16과순종의 축복
삼상 15:22~23
읽을말씀 : 삼상 15:22~23 | 외울말씀 : 막 9:23 ㅣ 참고 말씀: 히 11:8
교육목표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순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의 유형을 보면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경우,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 마음으로 깨달아 순종하되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온전히 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바로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과 맞지 않은 일을 시키면 잘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했을 때 의로 여기고 축복을 주시며, 기사와 표적이 따르도록 역사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뒤쫓아오는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성난 백성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도무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했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의 결과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순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우리의 관점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이론에 기준을 두고 그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대로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음을 의미합니다. 생각 속에서 한계를 깨뜨리면 능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하시면서 순종하면 어떠한 축복을 받을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창 12:1~3). 그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히 11:8). 고대 씨족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생명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가 백 세에 낳아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 이삭을 짐승처럼 잡아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창 22:1~2). 이때도 아브라함은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아침 일찍 두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창 22:3).
사실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입니다(창 21:12). 그런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친다면 그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해도 백 세에 얻은 자녀를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며 죽은 자도 능히 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은 일을 지시할 리가 없음을 온전히 믿었기에 생각을 동원하거나 염려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며 멈추게 하지요. 그의 믿음과 순종을 확인하고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예비하였다가 제사드리게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22:16~18).
3.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고통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 모든 일에 순종했기 때문에 받은 축복은 참으로 컸습니다. 왕들이 그를 영접하며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지요.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항상 물이 있었고, 자녀의 복, 건강,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 되었으며 복의 근원이 되는 실로 엄청난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실 정도로 영적인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지요(창 15:13).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얼마나 싫어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정해진 기한까지 오지 않자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자기가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책망하지요.
이때라도 깨닫고 돌이켰으면 좋으련만 사울은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좋은 가축들을 보니 죽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 하셨으니 일단 좋지 않은 가축만 다 죽였고, 좋은 가축은 살려서 끌어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자, 사울은 순종해서 다 죽였고 제사 드리기에 좋은 가축만 하나님을 위해서 가져온 것이라 말합니다. 심지어 백성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핑계를 댔지요(삼상 15:21). 물론 백성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라면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돌이킬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악신이 들려 고통받기도 했고 끝내는 전쟁 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4. 자기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순종
사람들은 간혹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이가 집에 일찍 들어오기 원합니다. 아이가 그 말에 순종하면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부모에게 근심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며 이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과 마음, 계산에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이것은 가능하니까, 저것은 불가능하니까’ 하면서 이유와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순종하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시자 고민하다가 결국 순종하지 못했지요. 그가 비록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 해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순종할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한계선을 넘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유익을 좇아가고 말지요.
그러나 오직 순종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닌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축복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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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순종의 네 가지 유형을 말해 보세요.
2. 순종하면 축복인 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어떠한 믿음으로 순종했을까요? (히브리서 11:19)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97~20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번제’란?
구약 시대 제사법 중 하나로 제물이 되는 짐승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다(레 1:6~9). 희생되는 짐승은 흠이 없는 수컷에만 한하여 주로 소 · 양 · 염소 등을 드렸다. 가난한 이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바치기도 했다(레 5:7).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온전히 거하여 거룩하게 살며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교육목표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순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의 유형을 보면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경우,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 마음으로 깨달아 순종하되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온전히 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바로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과 맞지 않은 일을 시키면 잘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했을 때 의로 여기고 축복을 주시며, 기사와 표적이 따르도록 역사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뒤쫓아오는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성난 백성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도무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했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의 결과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순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우리의 관점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이론에 기준을 두고 그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대로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음을 의미합니다. 생각 속에서 한계를 깨뜨리면 능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하시면서 순종하면 어떠한 축복을 받을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창 12:1~3). 그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히 11:8). 고대 씨족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생명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가 백 세에 낳아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 이삭을 짐승처럼 잡아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창 22:1~2). 이때도 아브라함은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아침 일찍 두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창 22:3).
사실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입니다(창 21:12). 그런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친다면 그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해도 백 세에 얻은 자녀를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며 죽은 자도 능히 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은 일을 지시할 리가 없음을 온전히 믿었기에 생각을 동원하거나 염려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며 멈추게 하지요. 그의 믿음과 순종을 확인하고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예비하였다가 제사드리게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22:16~18).
3.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고통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 모든 일에 순종했기 때문에 받은 축복은 참으로 컸습니다. 왕들이 그를 영접하며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지요.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항상 물이 있었고, 자녀의 복, 건강,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 되었으며 복의 근원이 되는 실로 엄청난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실 정도로 영적인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지요(창 15:13).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얼마나 싫어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정해진 기한까지 오지 않자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자기가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책망하지요.
이때라도 깨닫고 돌이켰으면 좋으련만 사울은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좋은 가축들을 보니 죽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 하셨으니 일단 좋지 않은 가축만 다 죽였고, 좋은 가축은 살려서 끌어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자, 사울은 순종해서 다 죽였고 제사 드리기에 좋은 가축만 하나님을 위해서 가져온 것이라 말합니다. 심지어 백성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핑계를 댔지요(삼상 15:21). 물론 백성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라면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돌이킬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악신이 들려 고통받기도 했고 끝내는 전쟁 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4. 자기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순종
사람들은 간혹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이가 집에 일찍 들어오기 원합니다. 아이가 그 말에 순종하면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부모에게 근심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며 이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과 마음, 계산에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이것은 가능하니까, 저것은 불가능하니까’ 하면서 이유와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순종하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시자 고민하다가 결국 순종하지 못했지요. 그가 비록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 해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순종할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한계선을 넘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유익을 좇아가고 말지요.
그러나 오직 순종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닌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축복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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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순종의 네 가지 유형을 말해 보세요.
2. 순종하면 축복인 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어떠한 믿음으로 순종했을까요? (히브리서 11:19)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97~20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번제’란?
구약 시대 제사법 중 하나로 제물이 되는 짐승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다(레 1:6~9). 희생되는 짐승은 흠이 없는 수컷에만 한하여 주로 소 · 양 · 염소 등을 드렸다. 가난한 이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바치기도 했다(레 5:7).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온전히 거하여 거룩하게 살며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2017-04-14
제15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 14:6
읽을말씀 : 요 14:6 | 외울말씀 : 고전 15:20 l 참고 말씀: 살전 4:16~17
교육목표 :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인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시종 가난한 길을 가셨고, 마침내 채찍에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에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부활과 영생, 천국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부활은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건져 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지만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즉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당할 사망은 육의 사망, 곧 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적인 사망 곧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망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 중에도 수명이 다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를 믿다가 육의 수명이 다해 장사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살아서 주를 맞는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하신 대로, 죽어 장사되었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해 영혼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곧 육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이 그 증거이지요. 예수님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또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기에 사망에 전혀 매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인 아담에게서 난 모든 후손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의 손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생들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실 만큼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두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나눌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시고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이르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루심으로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셨지요.
이러한 참사랑은 약 2천 년이 흐른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고 계신 참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면, 점차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3. 부활은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로는 애매히 핍박을 받고, 생명의 위협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철저히 혼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는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잠시 잠깐 머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죄를 벗으며 성결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충성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혹여 고난과 핍박이 올 때에도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날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기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나며, 더 확고한 믿음과 소망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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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 세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셋째, ( )
2.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은 누구실까요?
3.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여 죽었을 때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 금주 과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묵상하며 한끼 이상 금식과 감사의 기도 드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부활체’란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 영혼이 썩지도 죽지도 않는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부활체”라고 하며, 이 부활체를 입고 7년 혼인 잔치를 한 후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천 년을 보내게 된다. 부활체를 입으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요 20:19). 손으로 만져지기도 하고 숨을 내쉬는가 하면, 음식도 먹고 마실 수 있는데(눅 24:39, 42~43) 섭취한 음식은 즉시 분해되어 호흡과 함께 배출되므로 화장실이 필요없다.
교육목표 :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인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시종 가난한 길을 가셨고, 마침내 채찍에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에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부활과 영생, 천국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부활은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건져 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지만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즉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당할 사망은 육의 사망, 곧 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적인 사망 곧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망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 중에도 수명이 다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를 믿다가 육의 수명이 다해 장사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살아서 주를 맞는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하신 대로, 죽어 장사되었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해 영혼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곧 육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이 그 증거이지요. 예수님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또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기에 사망에 전혀 매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인 아담에게서 난 모든 후손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의 손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생들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실 만큼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두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나눌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시고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이르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루심으로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셨지요.
이러한 참사랑은 약 2천 년이 흐른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고 계신 참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면, 점차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3. 부활은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로는 애매히 핍박을 받고, 생명의 위협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철저히 혼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는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잠시 잠깐 머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죄를 벗으며 성결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충성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혹여 고난과 핍박이 올 때에도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날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기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나며, 더 확고한 믿음과 소망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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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 세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셋째, ( )
2.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은 누구실까요?
3.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여 죽었을 때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 금주 과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묵상하며 한끼 이상 금식과 감사의 기도 드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부활체’란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 영혼이 썩지도 죽지도 않는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부활체”라고 하며, 이 부활체를 입고 7년 혼인 잔치를 한 후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천 년을 보내게 된다. 부활체를 입으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요 20:19). 손으로 만져지기도 하고 숨을 내쉬는가 하면, 음식도 먹고 마실 수 있는데(눅 24:39, 42~43) 섭취한 음식은 즉시 분해되어 호흡과 함께 배출되므로 화장실이 필요없다.
2017-04-07
제14과순전
마 12:18~21
읽을말씀 : 마 12:18~21 | 외울말씀 : 마 12:20 l 참고 말씀: 욥 1:1
교육목표 :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지 않는 순전한 마음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므로 누가 선한지 악한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욥의 중심을 보시고 ‘순전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욥 1:1)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순전의 영적인 의미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입니다. 순전한 사람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말이나 행동에 덕이 있습니다.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나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것을 선으로 수용하지요. 따라서 순전의 영적인 의미는 ‘행함으로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 불릴 정도로 물질과 명예, 자녀와 건강 등 많은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말지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으며 순전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이 악창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자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악의 모습이 있는 욥을 하나님께서는 왜 순전하다 하셨을까요? 당시는 성령이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이므로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행위로 죄를 짓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선행을 많이 쌓았기에 ‘순전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물론 마음 안에 있는 죄성까지 온전히 버리길 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려야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려면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예수님의 순전한 마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면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의 이파리가 상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주변 경관을 해치기 때문에 잘라내거나 가지 자체를 쳐버립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꺾어 버리려고 하지요. 부부간이나 부모 자녀 간 또는 이웃 사이나 직장 동료 간, 교회 안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원수를 맺으며 각박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이라 할지라도 꺾지 않고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악으로 나온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도 버리지 않고 진리로 깨우쳐 주시며 변화되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병들고 불쌍한 영혼들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구원하려 하셨지요.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도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리고자 합니다.
둘째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려내고자 하셨습니다.
심지는 양초나 등잔, 석유 난로에 실이나 헝겊을 꽂아 불을 붙이는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간다면 불이 곧 꺼진다는 신호이지만 아직 불씨는 남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려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죄를 범하고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경우라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오래 참음과 양선의 열매와 같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 주고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멀리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요.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악으로 주변 사람을 어렵게 했다가 민망하고 부끄러워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영혼이라도 먼저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뒤처지는 사람 중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더 악을 발하기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을 시기하여 험담하는 이도 있습니다. 바로 꺼져가는 심지가 나쁜 냄새나 그을음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헤아려 품어 줍니다. 그러지 않고 ‘저렇게 악하니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지.’ 하며 품지 않는다면 꺼져가는 심지를 불어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까지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순전한 마음입니다.
셋째로, 다투거나 들레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만나도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며 모함하고 죽이려 하였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셨지요. 오직 선한 지혜로 그들을 일깨워 주고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심문받으실 때도 잠잠하셨지요.
우리가 믿음이 적을 때는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혈기 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다툼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품지 못한 작은 그릇이고 부딪히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자기적인 의와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악을 빨리 벗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들레지도 않고 모든 행함이 거룩하고 깨끗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에 얼마든지 들레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히 행하시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한 일을 누가 알아주기 원하며 들레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 좋은 일을 드러나도록 역사하십니다.
3. 순전한 사람이 받는 축복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양보하고 섬기며 모든 것을 선으로 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져 그들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 더 좋은 쪽을 택한 롯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구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투거나 들레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지만 손해 보기는커녕 오히려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가는 곳마다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 땅의 모든 복을 누렸으며,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한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는 일도 없이 화평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고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선을 행하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과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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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2.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①
②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한다.
③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83~19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을 말한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면 어떠한 사람도 이해하고 품으며,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용서한다든지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없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된다.
가령,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이다.
나아가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과 애통, 수고도 따르게 된다.
교육목표 :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지 않는 순전한 마음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므로 누가 선한지 악한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욥의 중심을 보시고 ‘순전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욥 1:1)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순전의 영적인 의미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입니다. 순전한 사람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말이나 행동에 덕이 있습니다.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나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것을 선으로 수용하지요. 따라서 순전의 영적인 의미는 ‘행함으로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 불릴 정도로 물질과 명예, 자녀와 건강 등 많은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말지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으며 순전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이 악창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자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악의 모습이 있는 욥을 하나님께서는 왜 순전하다 하셨을까요? 당시는 성령이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이므로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행위로 죄를 짓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선행을 많이 쌓았기에 ‘순전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물론 마음 안에 있는 죄성까지 온전히 버리길 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려야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려면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예수님의 순전한 마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면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의 이파리가 상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주변 경관을 해치기 때문에 잘라내거나 가지 자체를 쳐버립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꺾어 버리려고 하지요. 부부간이나 부모 자녀 간 또는 이웃 사이나 직장 동료 간, 교회 안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원수를 맺으며 각박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이라 할지라도 꺾지 않고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악으로 나온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도 버리지 않고 진리로 깨우쳐 주시며 변화되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병들고 불쌍한 영혼들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구원하려 하셨지요.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도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리고자 합니다.
둘째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려내고자 하셨습니다.
심지는 양초나 등잔, 석유 난로에 실이나 헝겊을 꽂아 불을 붙이는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간다면 불이 곧 꺼진다는 신호이지만 아직 불씨는 남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려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죄를 범하고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경우라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오래 참음과 양선의 열매와 같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 주고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멀리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요.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악으로 주변 사람을 어렵게 했다가 민망하고 부끄러워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영혼이라도 먼저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뒤처지는 사람 중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더 악을 발하기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을 시기하여 험담하는 이도 있습니다. 바로 꺼져가는 심지가 나쁜 냄새나 그을음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헤아려 품어 줍니다. 그러지 않고 ‘저렇게 악하니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지.’ 하며 품지 않는다면 꺼져가는 심지를 불어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까지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순전한 마음입니다.
셋째로, 다투거나 들레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만나도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며 모함하고 죽이려 하였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셨지요. 오직 선한 지혜로 그들을 일깨워 주고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심문받으실 때도 잠잠하셨지요.
우리가 믿음이 적을 때는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혈기 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다툼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품지 못한 작은 그릇이고 부딪히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자기적인 의와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악을 빨리 벗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들레지도 않고 모든 행함이 거룩하고 깨끗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에 얼마든지 들레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히 행하시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한 일을 누가 알아주기 원하며 들레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 좋은 일을 드러나도록 역사하십니다.
3. 순전한 사람이 받는 축복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양보하고 섬기며 모든 것을 선으로 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져 그들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 더 좋은 쪽을 택한 롯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구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투거나 들레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지만 손해 보기는커녕 오히려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가는 곳마다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 땅의 모든 복을 누렸으며,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한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는 일도 없이 화평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고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선을 행하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과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2.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①
②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한다.
③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83~19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을 말한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면 어떠한 사람도 이해하고 품으며,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용서한다든지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없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된다.
가령,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이다.
나아가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과 애통, 수고도 따르게 된다.
2017-03-31
제13과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갈 6:9
읽을말씀 : 갈 6:9 | 외울말씀 : 고전 13:4~7 l 참고 말씀: 룻 1:16~17
교육목표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행하여 룻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영계의 법칙 또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1. 끝까지 선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실 때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충성하며 어떻게 순교할지,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이미 그들의 마음 중심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고백했을 때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마 26장).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그를 버리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알려 주며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셨지요(요 6:64, 70~71). 자기를 팔거나 죽일 자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와 동행하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 마음을 이루지 못하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도 열매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2. 정한 마음을 소유한 룻
룻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하던 때에 모압에 살던 여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자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 결과 주변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흉년이 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지요.
이때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합니다. 그런데 이주한 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지요. 과부가 된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거기 거한 지 10년쯤에 두 아들마저 죽고 맙니다.
온 가족이 기근을 피해 왔건만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고 과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구한 삶입니까. 이를 통해 우리가 깨우칠 점은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영적으로 하나님 품인데 나오미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갔으니 이는 세상을 바라본 것이지요. 그러니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세는 기울고 몹시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그런데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지요. 아무 희망도 없이 과부로 살아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르바는 울며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가라고 강권하자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 1:16~17)라고 단호히 말하지요.
3. 변함없이 선을 행하여 축복을 받은 룻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섬겼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주워 정성껏 시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시어머니의 말씀에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마땅한 도리로 여기고 부지런히 섬겼습니다.
요즘은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하거나 고부간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룻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룻의 효성이 이처럼 지극했기에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 지역의 부유하고 신망을 받는 보아스도 룻에 대해 익히 알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그는 나오미 남편의 친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집안의 기업 무를 사람 중에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기업 무르기 법이 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녀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해 그의 미망인을 죽은 사람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잇게 하는 법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성읍 사람들이 다 아는 정숙한 여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룻에게 기업 무를 사람의 책임을 행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기업 무를 사람으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지만 그는 사랑이 없으므로 거절하였고, 그다음 차례인 보아스는 사랑이 있으므로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의 조부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룻의 마음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온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녀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기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도 인내하며 선을 좇아 나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서 투기라든가 자랑하는 마음, 교만하거나 무례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견뎠습니다. 룻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중심을 보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룻기 말씀을 통해 깨달을 점은 수많은 여인 중에서 룻에 대한 기록이 성경 66권 중 한 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룻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룻은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데도 나오미의 집안에 시집온 후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룻처럼 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면 변함이 없어야 하지요. 룻은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홀로 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젊음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어머니를 붙좇아 끝까지 봉양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정한 마음이지요. 오늘날 이러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 맞지 않아도 함께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룻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면 누가 그 길을 가려 하겠습니까. 룻은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했기에 그 길이 고생임을 알면서도 마땅한 도리로 여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에 달려 있지요. 룻이 대가를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변함없이 선을 행하지요.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여 간구와 기도에 응답받으며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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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이방 여인 룻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이름을 써 보세요. (룻 4:18~22)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 ( ) → 오벳 → 이새 → ( )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73~18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업 무를 자’
기업을 되찾아 주는 사람, 기업을 구속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기업 무르기 법은 이스라엘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한 친척의 기업을 다시 사 주어야 했으며(레 25:25),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민 35:12, 19, 21). 또 친족이 자녀가 없이 죽은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신 25:5~6), 거절할 경우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 했다(신 25:7~10). 기업 무를 자의 자격은 근족이어야 하며(룻 2:20), 기업 무를 능력도 있어야 했다(룻 2:1).
교육목표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행하여 룻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영계의 법칙 또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1. 끝까지 선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실 때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충성하며 어떻게 순교할지,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이미 그들의 마음 중심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고백했을 때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마 26장).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그를 버리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알려 주며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셨지요(요 6:64, 70~71). 자기를 팔거나 죽일 자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와 동행하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 마음을 이루지 못하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도 열매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2. 정한 마음을 소유한 룻
룻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하던 때에 모압에 살던 여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자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 결과 주변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흉년이 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지요.
이때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합니다. 그런데 이주한 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지요. 과부가 된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거기 거한 지 10년쯤에 두 아들마저 죽고 맙니다.
온 가족이 기근을 피해 왔건만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고 과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구한 삶입니까. 이를 통해 우리가 깨우칠 점은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영적으로 하나님 품인데 나오미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갔으니 이는 세상을 바라본 것이지요. 그러니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세는 기울고 몹시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그런데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지요. 아무 희망도 없이 과부로 살아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르바는 울며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가라고 강권하자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 1:16~17)라고 단호히 말하지요.
3. 변함없이 선을 행하여 축복을 받은 룻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섬겼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주워 정성껏 시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시어머니의 말씀에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마땅한 도리로 여기고 부지런히 섬겼습니다.
요즘은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하거나 고부간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룻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룻의 효성이 이처럼 지극했기에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 지역의 부유하고 신망을 받는 보아스도 룻에 대해 익히 알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그는 나오미 남편의 친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집안의 기업 무를 사람 중에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기업 무르기 법이 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녀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해 그의 미망인을 죽은 사람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잇게 하는 법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성읍 사람들이 다 아는 정숙한 여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룻에게 기업 무를 사람의 책임을 행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기업 무를 사람으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지만 그는 사랑이 없으므로 거절하였고, 그다음 차례인 보아스는 사랑이 있으므로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의 조부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룻의 마음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온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녀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기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도 인내하며 선을 좇아 나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서 투기라든가 자랑하는 마음, 교만하거나 무례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견뎠습니다. 룻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중심을 보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룻기 말씀을 통해 깨달을 점은 수많은 여인 중에서 룻에 대한 기록이 성경 66권 중 한 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룻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룻은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데도 나오미의 집안에 시집온 후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룻처럼 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면 변함이 없어야 하지요. 룻은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홀로 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젊음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어머니를 붙좇아 끝까지 봉양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정한 마음이지요. 오늘날 이러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 맞지 않아도 함께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룻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면 누가 그 길을 가려 하겠습니까. 룻은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했기에 그 길이 고생임을 알면서도 마땅한 도리로 여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에 달려 있지요. 룻이 대가를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변함없이 선을 행하지요.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여 간구와 기도에 응답받으며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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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이방 여인 룻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이름을 써 보세요. (룻 4:18~22)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 ( ) → 오벳 → 이새 → ( )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73~18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업 무를 자’
기업을 되찾아 주는 사람, 기업을 구속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기업 무르기 법은 이스라엘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한 친척의 기업을 다시 사 주어야 했으며(레 25:25),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민 35:12, 19, 21). 또 친족이 자녀가 없이 죽은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신 25:5~6), 거절할 경우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 했다(신 25:7~10). 기업 무를 자의 자격은 근족이어야 하며(룻 2:20), 기업 무를 능력도 있어야 했다(룻 2:1).
2017-03-24
제12과믿음의 행함
수 3:7~13
읽을말씀 : 수 3:7~13 | 외울말씀 : 막 9:23 ㅣ 참고 말씀: 히 11:1
교육목표 :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늘 체험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믿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떤 권세나 명예나 부로도 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요.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믿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또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생활 속에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
믿음은 크게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육적인 믿음은 눈으로 보아 확인이 되고 자신의 상식이나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믿는 믿음입니다. 가령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이미 보아서 아는 사람은 누가 나무로 책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것은 유에서 유의 창조, 즉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육적인 믿음과 반대되는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의 창조, 즉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지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응답과 축복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믿음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즉 각 사람의 그릇에 따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영적인 믿음을 주실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미움, 다툼, 시기, 간음 등 비진리의 마음을 버리고 원수라도 사랑하며 계명을 준행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만일 스스로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응답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주여,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믿습니다.” 할 것이고, 미운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을 징계하여 주옵소서.” 하면 될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응답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믿음을 주시지 않고 진리로 변화된 만큼 마음으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으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비진리의 모든 생각을 말하며, 이 생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 경험, 생각을 옳다 여기지만 그중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잘못 입력된 지식이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켜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자기 지혜를 동원하므로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은 못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입력된 지식 가운데 잘못된 것은 빼내어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무렵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해마다 보리를 거두는 그맘때면 요단강이 범람하여 언덕에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말씀하십니다(수 3:8).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하지요.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진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열두 제사장을 앞세운 행렬이 드디어 요단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선두에 선 제사장들이 거세게 흘러내리는 강물에 발을 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던 강물이 멈추더니 멀리 있는 아담읍 변방에 물이 쌓이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흐르던 강물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수 3:15~17).
이 외에도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니 쓴물이 단물이 되며,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일 등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행했을 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1)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모세가 마음속으로 ‘지팡이 든 손을 내민다고 해서 과연 홍해가 갈라질까?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의심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겠습니까?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었기에 믿음대로 역사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영적인 믿음을 갖기까지에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 명하셨을 때 모세는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출 3~4장). 이에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있는 증거로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가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지요. 또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이 생겼고 다시 품에 넣으니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모세가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열 재앙 등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내 주시니 그의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행군을 할 수 있기까지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믿음으로 행군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체험이 없는 사람은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를 해결받기 위해 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것,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을 계발하는 것, 순종하는 것 등을 구해야 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3)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과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을 응답받기 위해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가령,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손 놓고 마냥 기도와 금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영혼을 갈무리하는 이들이 심방하고 전도하는 등 구체적인 행함이 따라야 하지요. 물질의 축복을 받아 선교하고 구제하기 원한다면 믿음으로 열심히 심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은 물론, 적극적인 믿음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행하면 바라던 것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응답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항상 믿음의 행군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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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2.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하나님 말씀을 듣고 ( )해야 한다.
②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 )해야 한다.
③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 )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59~1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수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이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군대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모세의 수종자로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 중 한 사람으로 악평하는 10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갈렙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임을 확신에 찬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다.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고, 110세에 죽어 자신이 기업으로 받은 땅 딤낫세라에 장사되었다(수 24:29~30).
교육목표 :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늘 체험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믿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떤 권세나 명예나 부로도 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요.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믿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또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생활 속에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
믿음은 크게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육적인 믿음은 눈으로 보아 확인이 되고 자신의 상식이나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믿는 믿음입니다. 가령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이미 보아서 아는 사람은 누가 나무로 책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것은 유에서 유의 창조, 즉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육적인 믿음과 반대되는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의 창조, 즉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지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응답과 축복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믿음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즉 각 사람의 그릇에 따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영적인 믿음을 주실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미움, 다툼, 시기, 간음 등 비진리의 마음을 버리고 원수라도 사랑하며 계명을 준행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만일 스스로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응답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주여,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믿습니다.” 할 것이고, 미운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을 징계하여 주옵소서.” 하면 될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응답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믿음을 주시지 않고 진리로 변화된 만큼 마음으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으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비진리의 모든 생각을 말하며, 이 생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 경험, 생각을 옳다 여기지만 그중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잘못 입력된 지식이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켜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자기 지혜를 동원하므로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은 못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입력된 지식 가운데 잘못된 것은 빼내어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무렵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해마다 보리를 거두는 그맘때면 요단강이 범람하여 언덕에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말씀하십니다(수 3:8).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하지요.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진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열두 제사장을 앞세운 행렬이 드디어 요단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선두에 선 제사장들이 거세게 흘러내리는 강물에 발을 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던 강물이 멈추더니 멀리 있는 아담읍 변방에 물이 쌓이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흐르던 강물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수 3:15~17).
이 외에도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니 쓴물이 단물이 되며,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일 등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행했을 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1)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모세가 마음속으로 ‘지팡이 든 손을 내민다고 해서 과연 홍해가 갈라질까?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의심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겠습니까?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었기에 믿음대로 역사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영적인 믿음을 갖기까지에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 명하셨을 때 모세는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출 3~4장). 이에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있는 증거로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가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지요. 또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이 생겼고 다시 품에 넣으니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모세가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열 재앙 등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내 주시니 그의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행군을 할 수 있기까지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믿음으로 행군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체험이 없는 사람은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를 해결받기 위해 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것,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을 계발하는 것, 순종하는 것 등을 구해야 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3)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과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을 응답받기 위해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가령,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손 놓고 마냥 기도와 금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영혼을 갈무리하는 이들이 심방하고 전도하는 등 구체적인 행함이 따라야 하지요. 물질의 축복을 받아 선교하고 구제하기 원한다면 믿음으로 열심히 심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은 물론, 적극적인 믿음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행하면 바라던 것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응답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항상 믿음의 행군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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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2.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하나님 말씀을 듣고 ( )해야 한다.
②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 )해야 한다.
③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 )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59~1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수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이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군대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모세의 수종자로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 중 한 사람으로 악평하는 10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갈렙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임을 확신에 찬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다.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고, 110세에 죽어 자신이 기업으로 받은 땅 딤낫세라에 장사되었다(수 24:29~30).
2017-03-17
제11과감정을 제어하라
롬 12:19~21
읽을말씀 : 롬 12:19~21 | 외울말씀 : 롬 12:21 ㅣ 참고 말씀: 시 37:7~9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넉넉히 선으로 악을 이겨 나가게 한다.
간혹 사람들은 감정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므로 서로 상처를 주고, 원수를 갚기 위해 악을 행하기도 하지요. 사소한 감정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길을 내주고 하나님과 죄의 담을 만듭니다. 이처럼 감정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엡 4:26).
1. 감정을 제어하고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기 전에는 부모나 스승 또는 친구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했지요.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니(요 5:27) 오직 우리 주님 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수군거리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셨지요. 그러니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것은 나보다 상대를 더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되면 누구를 얕잡아 볼 수 없고 판단 정죄하거나 수군거리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도 중에는 자기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정죄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말씀합니다.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재판장이 되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요, 큰 죄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심판해서도,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나 형제간에, 혹은 가족 간에, 동료나 이웃 간에 감정 상할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당부하셨지요.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서로 이해하며 포용하려고 노력한다면 다툼, 원망, 불평, 불만,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녹인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2.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인생을 망친 사울 왕
사람이 살다 보면 큰 문제는 물론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만일 감정이 일어날 때 제어하지 않고 감정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 자신이 힘들며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 줍니다.
성경에는 시기라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신하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매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왕인 사울보다 더 칭송하고 사랑했지요.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용모가 준수하고,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한 자신 외에 감히 누가 칭송을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자칫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다윗이 백성의 힘을 등에 업는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질투라는 감정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낳았고 평생 불안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결국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의 뒤를 쫓았던 사울에게 과연 평안이 있었을까요? 나라는 또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 나라까지도 고통받게 됩니다.
3. 감정을 제어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맡길 때 응답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십니다. 구약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악한 하만에 대한 심판이 그 예입니다. 바사 제국의 신하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몹시 노하여 감정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물론 그의 민족까지 말살하려고 흉계를 꾸며 왕의 조서까지 받아냅니다. 이를 안 모르드개와 사촌 누이 에스더는 금식하며 이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였습니다. 유다인으로서 바사국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 탄원하지요. 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워 놓은 나무에 오히려 자신이 달려 죽은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면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겼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쇠사슬에 매인 베드로를 풀어 밖으로 이끄셨습니다. 반면 사도행전 12장 21~23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핍박하고 악을 행한 헤롯을 직접 심판하신 것입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할 때 축복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감정 싸움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지요. 부부간에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생기면 다툼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별거나 이혼까지 갑니다. 형제간에도 감정 대립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원수 맺는 일도 생기지요.
그러나 모든 일에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직 선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상대가 감정이 나서 악을 행해도 선으로 대한다면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화목하니 뼈가 상하는 고통을 받지도 않지요. 상대가 비방하고 악으로 대해도 오히려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해 주므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족이나 이웃 또는 일터 등에서 감정으로 부딪히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고 다만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한 복을 주시고 사랑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감정으로 원수 맺은 것은 없는지, 내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재판장이 되어 남을 판단하거나 형제의 티를 빼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7~9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했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뿐만 아니라, 감정을 제어하고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선을 행하여 범사에 복된 길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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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세상 사람들은 원수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 삶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겼을 때 제어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3.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상대의 티를 보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49~1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들보’란?
건물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가로질러서 얹는 지지대를 말한다.
오늘날 건설 현장에서 들보는 보통 목재, 쇠,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마 7:3~5)하신 말씀은 자신의 커다란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허물이나 잘못만을 책잡고 나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넉넉히 선으로 악을 이겨 나가게 한다.
간혹 사람들은 감정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므로 서로 상처를 주고, 원수를 갚기 위해 악을 행하기도 하지요. 사소한 감정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길을 내주고 하나님과 죄의 담을 만듭니다. 이처럼 감정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엡 4:26).
1. 감정을 제어하고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기 전에는 부모나 스승 또는 친구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했지요.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니(요 5:27) 오직 우리 주님 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수군거리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셨지요. 그러니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것은 나보다 상대를 더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되면 누구를 얕잡아 볼 수 없고 판단 정죄하거나 수군거리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도 중에는 자기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정죄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말씀합니다.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재판장이 되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요, 큰 죄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심판해서도,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나 형제간에, 혹은 가족 간에, 동료나 이웃 간에 감정 상할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당부하셨지요.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서로 이해하며 포용하려고 노력한다면 다툼, 원망, 불평, 불만,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녹인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2.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인생을 망친 사울 왕
사람이 살다 보면 큰 문제는 물론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만일 감정이 일어날 때 제어하지 않고 감정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 자신이 힘들며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 줍니다.
성경에는 시기라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신하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매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왕인 사울보다 더 칭송하고 사랑했지요.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용모가 준수하고,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한 자신 외에 감히 누가 칭송을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자칫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다윗이 백성의 힘을 등에 업는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질투라는 감정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낳았고 평생 불안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결국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의 뒤를 쫓았던 사울에게 과연 평안이 있었을까요? 나라는 또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 나라까지도 고통받게 됩니다.
3. 감정을 제어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맡길 때 응답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십니다. 구약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악한 하만에 대한 심판이 그 예입니다. 바사 제국의 신하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몹시 노하여 감정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물론 그의 민족까지 말살하려고 흉계를 꾸며 왕의 조서까지 받아냅니다. 이를 안 모르드개와 사촌 누이 에스더는 금식하며 이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였습니다. 유다인으로서 바사국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 탄원하지요. 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워 놓은 나무에 오히려 자신이 달려 죽은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면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겼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쇠사슬에 매인 베드로를 풀어 밖으로 이끄셨습니다. 반면 사도행전 12장 21~23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핍박하고 악을 행한 헤롯을 직접 심판하신 것입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할 때 축복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감정 싸움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지요. 부부간에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생기면 다툼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별거나 이혼까지 갑니다. 형제간에도 감정 대립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원수 맺는 일도 생기지요.
그러나 모든 일에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직 선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상대가 감정이 나서 악을 행해도 선으로 대한다면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화목하니 뼈가 상하는 고통을 받지도 않지요. 상대가 비방하고 악으로 대해도 오히려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해 주므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족이나 이웃 또는 일터 등에서 감정으로 부딪히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고 다만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한 복을 주시고 사랑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감정으로 원수 맺은 것은 없는지, 내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재판장이 되어 남을 판단하거나 형제의 티를 빼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7~9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했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뿐만 아니라, 감정을 제어하고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선을 행하여 범사에 복된 길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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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세상 사람들은 원수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 삶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겼을 때 제어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3.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상대의 티를 보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49~1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들보’란?
건물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가로질러서 얹는 지지대를 말한다.
오늘날 건설 현장에서 들보는 보통 목재, 쇠,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마 7:3~5)하신 말씀은 자신의 커다란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허물이나 잘못만을 책잡고 나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2017-03-10
제10과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 20:20~23
읽을말씀 : 마 20:20~23 | 외울말씀 : 막 11:24 ㅣ 참고 말씀: 약 1:6~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응답과 축복을 받아 나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여리고 마을에 구걸하는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지요.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인 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믿음의 고백을 듣고자 하심이었지요. 이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응답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고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라고 물으시지요. 그러자 여인은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만한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믿었기에 높은 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의 어떠한 면을 보았기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진실한 행하심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이 베푸신 기사와 표적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요 2장),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고(요 9장), 간질을 하며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막 9장). 또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요 11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도 하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마 14장).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영생, 곧 영원한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천국에 대해 듣고 배웠으며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천국에서 얼마나 큰지도 알았고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받을 줄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가 두 아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도록 요청하면서 약속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답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앉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아버지 뜻대로 행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무엇을 구하든지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의지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갈급하여 나오는가 하면 각종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료받고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를 받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각자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기를 구하는 사람도 있고 “질병을 치료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이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직 왕이 없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약탈당하고 고통받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증거를 구합니다. 즉 “양털 한 뭉치를 땅에다 두겠으니 밤새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위 땅은 말라 있다면 믿을 수 있겠다”라며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과연 자고 일어나 보니 양털만 젖어 있었습니다. 양털에 이슬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그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증거를 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되게 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양털만 말라 있고 주변 땅은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상하게 기드온과 함께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물들어갈 때 엘리야는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수백 명의 이방 선지자와 대결합니다. 이방 선지자들은 자기가 믿는 우상에게, 엘리야는 하나님께 구하여 불로써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확정짓자 했지요.
이방 선지자들이 먼저 시작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놀며 큰소리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불렀습니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며 피가 흐르기까지 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포기하고 물러난 뒤 엘리야가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버렸습니다(왕상 18장).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역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고백만으로도 응답받습니다. 하인의 중풍을 고치러 예수님 앞에 나온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 명하기만 해도 하인이 낫겠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마 8:8). 그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하인이 곧바로 나았습니다.
2. 구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믿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한 사람은 시험 환난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탄식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순탄하게 들여보내셨다면 그들이 원망 불평했을까요?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함께 여인들이 기뻐 춤을 춘 것처럼 기뻐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은 그들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충분한 증거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믿음을 내보일 것을 요구했을 때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아무도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내보여야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마음에 악이 있으면 의심이 생겨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신속히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마음 안에 있던 악이 드러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반대로 의심치 않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난다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니 자연히 응답이 옵니다. 따라서 응답받아야 할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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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신 것에 대해 표징으로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33~1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드온의 3백 용사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방 민족에게 침략을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기드온이라는 한 사람을 세우신다. 적군은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연합하여 13만 5천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3만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 중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라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테스트를 하신다. 곧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할 때,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사람 3백 명만 “여호와의 용사”로 뽑게 하신다.
기드온은 3백 용사와 함께 13만 5천 명의 이방 군대를 멋지게 파했으며 달아나는 패잔병까지 추적하여 진멸시켰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는 40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였다(삿 8:2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응답과 축복을 받아 나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여리고 마을에 구걸하는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지요.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인 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믿음의 고백을 듣고자 하심이었지요. 이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응답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고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라고 물으시지요. 그러자 여인은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만한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믿었기에 높은 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의 어떠한 면을 보았기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진실한 행하심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이 베푸신 기사와 표적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요 2장),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고(요 9장), 간질을 하며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막 9장). 또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요 11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도 하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마 14장).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영생, 곧 영원한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천국에 대해 듣고 배웠으며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천국에서 얼마나 큰지도 알았고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받을 줄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가 두 아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도록 요청하면서 약속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답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앉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아버지 뜻대로 행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무엇을 구하든지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의지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갈급하여 나오는가 하면 각종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료받고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를 받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각자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기를 구하는 사람도 있고 “질병을 치료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이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직 왕이 없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약탈당하고 고통받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증거를 구합니다. 즉 “양털 한 뭉치를 땅에다 두겠으니 밤새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위 땅은 말라 있다면 믿을 수 있겠다”라며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과연 자고 일어나 보니 양털만 젖어 있었습니다. 양털에 이슬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그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증거를 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되게 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양털만 말라 있고 주변 땅은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상하게 기드온과 함께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물들어갈 때 엘리야는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수백 명의 이방 선지자와 대결합니다. 이방 선지자들은 자기가 믿는 우상에게, 엘리야는 하나님께 구하여 불로써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확정짓자 했지요.
이방 선지자들이 먼저 시작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놀며 큰소리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불렀습니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며 피가 흐르기까지 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포기하고 물러난 뒤 엘리야가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버렸습니다(왕상 18장).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역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고백만으로도 응답받습니다. 하인의 중풍을 고치러 예수님 앞에 나온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 명하기만 해도 하인이 낫겠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마 8:8). 그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하인이 곧바로 나았습니다.
2. 구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믿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한 사람은 시험 환난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탄식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순탄하게 들여보내셨다면 그들이 원망 불평했을까요?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함께 여인들이 기뻐 춤을 춘 것처럼 기뻐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은 그들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충분한 증거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믿음을 내보일 것을 요구했을 때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아무도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내보여야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마음에 악이 있으면 의심이 생겨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신속히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마음 안에 있던 악이 드러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반대로 의심치 않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난다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니 자연히 응답이 옵니다. 따라서 응답받아야 할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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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신 것에 대해 표징으로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33~1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드온의 3백 용사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방 민족에게 침략을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기드온이라는 한 사람을 세우신다. 적군은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연합하여 13만 5천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3만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 중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라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테스트를 하신다. 곧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할 때,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사람 3백 명만 “여호와의 용사”로 뽑게 하신다.
기드온은 3백 용사와 함께 13만 5천 명의 이방 군대를 멋지게 파했으며 달아나는 패잔병까지 추적하여 진멸시켰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는 40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였다(삿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