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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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9
제39과성령의 열매 (6)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6 l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35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성령의 열매인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 조치는 해 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이나 시간에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149~1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성령의 열매인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 조치는 해 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이나 시간에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149~1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2017-09-22
제38과성령의 열매 (5)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누가복음 6:36 l 참고 말씀: 야고보서 2장
교육목표 :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지요.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원수는 더더욱 없지요.
1. 자비의 열매란
사전에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하길 원하십니다(눅 6:36).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상대방을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되면 티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포용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저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님에게는 이런 비진리의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지적을 받고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코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필요해서 권면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받는다 해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사실은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저 사람만 칭찬하시네?” 이런 생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분이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힘을 내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만일 어머니의 도움으로 자녀가 상을 받았다면 기뻐할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자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그와 함께 기뻐할 수 있지요.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이다.
또 사람으로서는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을 말해 보세요.
① 편견이 없다.
② ( )
③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다.
④ ( )
⑤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129~14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 집사는 설교를 통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죄를 지적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교육목표 :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지요.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원수는 더더욱 없지요.
1. 자비의 열매란
사전에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하길 원하십니다(눅 6:36).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상대방을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되면 티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포용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저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님에게는 이런 비진리의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지적을 받고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코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필요해서 권면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받는다 해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사실은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저 사람만 칭찬하시네?” 이런 생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분이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힘을 내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만일 어머니의 도움으로 자녀가 상을 받았다면 기뻐할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자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그와 함께 기뻐할 수 있지요.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이다.
또 사람으로서는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을 말해 보세요.
① 편견이 없다.
② ( )
③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다.
④ ( )
⑤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129~14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 집사는 설교를 통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죄를 지적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2017-09-15
제37과성령의 열매 (4)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시편 126:5 l 참고 말씀: 마가복음 11:24 ; 고린도전서 13:4~7
교육목표 :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음으로 모든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삶 속에서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참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기도 합니다. 또 이에 따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사업 등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과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이렇게 억지로라도 참는 사람을 인내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결과적으로 더 큰 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주 안에서 영적인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을 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위해서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통도 있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요. 그러나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을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철야하는 등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하지요.
예전에 좋아하던 것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몇 번 해 보고 그쳐서도 안 되지요. 성결의 열매를 온전히 거둘 때까지 부단히 수고하고 절제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이때 열심히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는데 동일한 비진리가 다시 발견되면 실망이 되고 지치기도 하지요.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전과 같은 비진리의 모습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죄성이 아직 다 버려지지 않았다 해도 실망하지 말고 온전히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 탓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오래 참으며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지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 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편에서는 너무 급한데 바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내가 믿고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를 얻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음을 믿고 기쁨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눠 보세요.
①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② ( )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③ ( )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111~12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음으로 모든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삶 속에서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참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기도 합니다. 또 이에 따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사업 등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과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이렇게 억지로라도 참는 사람을 인내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결과적으로 더 큰 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주 안에서 영적인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을 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위해서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통도 있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요. 그러나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을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철야하는 등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하지요.
예전에 좋아하던 것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몇 번 해 보고 그쳐서도 안 되지요. 성결의 열매를 온전히 거둘 때까지 부단히 수고하고 절제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이때 열심히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는데 동일한 비진리가 다시 발견되면 실망이 되고 지치기도 하지요.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전과 같은 비진리의 모습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죄성이 아직 다 버려지지 않았다 해도 실망하지 말고 온전히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 탓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오래 참으며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지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 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편에서는 너무 급한데 바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내가 믿고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를 얻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음을 믿고 기쁨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눠 보세요.
①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② ( )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③ ( )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111~12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2017-09-08
제36과성령의 열매 (3)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2:14 ㅣ 참고 말씀: 롬 12:18
교육목표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다수가 찬성하여 결정한 일도 자기 유익과 맞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지요. 또 상대의 단점을 보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전달하여 이간질합니다.
이처럼 화평을 깨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나 어디서든 화평이 깨지면 축복의 통로가 막히고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화평의 열매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했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이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열매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너무나 친밀했던 하나님이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화평을 이루려면 마음의 죄악을 다 벗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다고 봐 주십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 간에 화평을 이룬다고 정작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되지요. 만일 믿음이 없는 가족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한다면 잠시 화평을 이룬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을 이루려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 환경과 맞닥뜨렸을 때 악이 발동하여 마음의 화평이 깨져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평한 것 같아도, 어떤 환경과 조건이 악과 결부되면 이내 화평이 깨지지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택할 때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행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 안에서 잘못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로 인해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란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단단히 굳어진 것입니다.
가령, 연단 받기 전의 욥처럼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어떤 징계가 올까 두려워서 행합니다. 이런 부류는 믿음의 성장이 정체하기도 하고,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요. 결국 자기 의와 틀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대로 행하는데도 부정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자신과의 화평을 깹니다. 진리대로 행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으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낙심하고 자책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돼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아이들은 잘못해도 주눅 들어 숨지 않습니다. 더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들지요. 내가 아직 부족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연단받아 철저히 낮아질 때도 더 높여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행함을 계속 쌓아 가면 자신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영적인 담대함이 오지요.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다음으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화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과 교만, 자존심을 버렸을 것이고, 자기 의와 틀도 깨뜨렸을 것이니, 누구와 걸릴 일도 다툴 일도 없지요. 만약 상대가 악하여 화평을 깨려고 해도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가 따릅니다. 그래서 주변에도 화평을 이뤄 줄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빛의 권세가 따르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히 남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지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자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고 화평함을 좇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의 영적인 뜻을 써 보세요.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과 화평해야 합니다.
② ( )과 화평을 이뤄야 합니다.
③ ( )과 화평해야 합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91~10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선악과’ 와 ‘생명과일’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일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이 두 나무의 열매는 모양이나 빛깔이 달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크기는 둘 다 메론만 한 크기이다.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모양이며 분홍빛을 띤다.
그리고 생명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홍조를 띤다.
아주 빨갛지 않고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빛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들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명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먹음으로 저주를 받았다.
교육목표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다수가 찬성하여 결정한 일도 자기 유익과 맞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지요. 또 상대의 단점을 보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전달하여 이간질합니다.
이처럼 화평을 깨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나 어디서든 화평이 깨지면 축복의 통로가 막히고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화평의 열매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했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이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열매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너무나 친밀했던 하나님이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화평을 이루려면 마음의 죄악을 다 벗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다고 봐 주십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 간에 화평을 이룬다고 정작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되지요. 만일 믿음이 없는 가족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한다면 잠시 화평을 이룬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을 이루려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 환경과 맞닥뜨렸을 때 악이 발동하여 마음의 화평이 깨져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평한 것 같아도, 어떤 환경과 조건이 악과 결부되면 이내 화평이 깨지지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택할 때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행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 안에서 잘못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로 인해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란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단단히 굳어진 것입니다.
가령, 연단 받기 전의 욥처럼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어떤 징계가 올까 두려워서 행합니다. 이런 부류는 믿음의 성장이 정체하기도 하고,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요. 결국 자기 의와 틀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대로 행하는데도 부정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자신과의 화평을 깹니다. 진리대로 행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으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낙심하고 자책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돼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아이들은 잘못해도 주눅 들어 숨지 않습니다. 더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들지요. 내가 아직 부족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연단받아 철저히 낮아질 때도 더 높여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행함을 계속 쌓아 가면 자신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영적인 담대함이 오지요.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다음으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화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과 교만, 자존심을 버렸을 것이고, 자기 의와 틀도 깨뜨렸을 것이니, 누구와 걸릴 일도 다툴 일도 없지요. 만약 상대가 악하여 화평을 깨려고 해도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가 따릅니다. 그래서 주변에도 화평을 이뤄 줄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빛의 권세가 따르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히 남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지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자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고 화평함을 좇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의 영적인 뜻을 써 보세요.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과 화평해야 합니다.
② ( )과 화평을 이뤄야 합니다.
③ ( )과 화평해야 합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91~10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선악과’ 와 ‘생명과일’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일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이 두 나무의 열매는 모양이나 빛깔이 달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크기는 둘 다 메론만 한 크기이다.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모양이며 분홍빛을 띤다.
그리고 생명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홍조를 띤다.
아주 빨갛지 않고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빛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들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명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먹음으로 저주를 받았다.
2017-09-01
제35과성령의 열매 (2)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살전 5:16 l 참고 말씀: 살전 5:16~18
교육목표 :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를 예방하며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과 성인병까지 예방해 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웃음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항상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과 종국에는 희락이 넘치는 천국으로 인도받을 것을 마음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1.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희락의 열매
‘희락’의 사전적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립니다. 겨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한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희락입니다. 따라서 희락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정작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순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 번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 얼마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 해도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그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찬양이 흘러넘치고 설령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고 구원의 은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곤고해지고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주를 향한 첫사랑이 왜 식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마음에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질’되는 것이지요. 즉 혈기, 미움, 시기, 질투, 판단과 같은 비진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내 근심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들려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빌 4:4).
혹여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3.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육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질투’라는 속성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축복받고 칭찬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열등감에 싸여 낙심이 됩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은 죄성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기뻐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또한 근심 걱정 속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니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지요. 참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마음에 육이 없으면 사업할 때도 성령의 음성을 바로 듣고 나가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하며 축복이 넘칩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심과 조급함이 앞서고 정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통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안에 육을 벗을수록 영적인 기쁨과 감사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실 때라야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이 샘솟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가령,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서로 싸울 때 그 갈등이 계속되면 충만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육을 좇아 자기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꺼림칙하지요.
반면에 마음을 정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내가 손해 본 것처럼 보여도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위로부터 기쁨이 임합니다. 이런 기쁨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지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당장의 불이익 때문에 육체의 소욕대로 좇으면 매번 불편하고 다툼이 생기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중심에서 섬길 때에는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 선으로 이해하면 그만큼 평안해집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성격이나 의견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피하십니까? 아니면 웃으면서 따뜻하게 인사하시는지요? 세상 사람의 입장에서는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섬기는 마음으로 웃어 줍니다. 그러니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하지요. ‘누군가와 성격이 안 맞다.’거나 ‘상대가 싫다.’는 느낌조차 아예 없으면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희락의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얼굴에서는 영적인 빛이 흘러넘치지요.
3)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씨를 심고 가꾸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처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믿음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뻐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해도 일 년 내내 사고나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지요.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축복이 항상 넘쳐납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감사하지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커지고 마침내는 희락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신속히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어 항상 기쁨과 감사, 행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희락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2.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② 범사에 ( )을 좇아야 합니다.
③ ( )과 ( )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69~8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로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
1단계나 2단계 초입 : 누군가 모함했을 때 당사자를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진다.
2단계 중반 : 악을 버리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3단계 믿음의 반석 이전 : 감정이 요동하기도 하며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지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믿음의 반석 이상 : 불평하기보다는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도 이내 바꾼다.
믿음의 4단계 : 전혀 요동함이 없고 온전히 기뻐하며 감사한다.
교육목표 :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를 예방하며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과 성인병까지 예방해 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웃음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항상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과 종국에는 희락이 넘치는 천국으로 인도받을 것을 마음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1.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희락의 열매
‘희락’의 사전적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립니다. 겨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한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희락입니다. 따라서 희락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정작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순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 번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 얼마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 해도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그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찬양이 흘러넘치고 설령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고 구원의 은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곤고해지고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주를 향한 첫사랑이 왜 식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마음에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질’되는 것이지요. 즉 혈기, 미움, 시기, 질투, 판단과 같은 비진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내 근심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들려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빌 4:4).
혹여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3.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육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질투’라는 속성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축복받고 칭찬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열등감에 싸여 낙심이 됩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은 죄성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기뻐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또한 근심 걱정 속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니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지요. 참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마음에 육이 없으면 사업할 때도 성령의 음성을 바로 듣고 나가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하며 축복이 넘칩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심과 조급함이 앞서고 정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통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안에 육을 벗을수록 영적인 기쁨과 감사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실 때라야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이 샘솟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가령,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서로 싸울 때 그 갈등이 계속되면 충만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육을 좇아 자기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꺼림칙하지요.
반면에 마음을 정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내가 손해 본 것처럼 보여도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위로부터 기쁨이 임합니다. 이런 기쁨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지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당장의 불이익 때문에 육체의 소욕대로 좇으면 매번 불편하고 다툼이 생기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중심에서 섬길 때에는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 선으로 이해하면 그만큼 평안해집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성격이나 의견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피하십니까? 아니면 웃으면서 따뜻하게 인사하시는지요? 세상 사람의 입장에서는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섬기는 마음으로 웃어 줍니다. 그러니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하지요. ‘누군가와 성격이 안 맞다.’거나 ‘상대가 싫다.’는 느낌조차 아예 없으면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희락의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얼굴에서는 영적인 빛이 흘러넘치지요.
3)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씨를 심고 가꾸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처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믿음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뻐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해도 일 년 내내 사고나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지요.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축복이 항상 넘쳐납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감사하지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커지고 마침내는 희락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신속히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어 항상 기쁨과 감사, 행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희락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2.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② 범사에 ( )을 좇아야 합니다.
③ ( )과 ( )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69~8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로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
1단계나 2단계 초입 : 누군가 모함했을 때 당사자를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진다.
2단계 중반 : 악을 버리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3단계 믿음의 반석 이전 : 감정이 요동하기도 하며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지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믿음의 반석 이상 : 불평하기보다는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도 이내 바꾼다.
믿음의 4단계 : 전혀 요동함이 없고 온전히 기뻐하며 감사한다.
2017-08-25
제34과성령의 열매 (1)
갈 5:22
읽을말씀 : 갈 5:22 | 외울말씀 : 롬 5:8 ㅣ 참고 말씀: 롬 6:23; 히브리서 9:22
교육목표 :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어 많은 영혼을 진리로 이끌어 더 좋은 천국에 이르게 한다.
열매는 씨를 심었을 때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우면서 맺는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생명의 씨가 성령으로 인해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생명의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지요. 바로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최고의 영적인 사랑
결혼할 때 사람들은 영원 불변의 사랑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반지를 건네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커플도 얼마 못 가 남남이 되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영적인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상대를 섬기며 자기를 희생하므로 갈수록 그 사랑이 승화되지요.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언젠가는 변질되고 말지요.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는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지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지요. 나를 미워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최고의 사랑을 합니다.
2. 대가를 바라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
진실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사람이 세월이 흐르고 내가 원했던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자신의 유익에 따라 쉽게 변하기도 하고 배신합니다.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지요. 내가 준 만큼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것은 다 육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 “당신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서로 내 뜻에 맞춰 주기를 바라고, 안 따라 주면 속상해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도 티격태격 싸우며 거기서 더 금이 가면 결국 이혼까지 이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유익에 맞지 않으면 원수 맺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만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도 드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부모도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만 준다면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또 아무리 의좋던 형제도 돈 문제가 개입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 쉽게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자신이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 원합니다. 설령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는 받지 않고 무조건 줬다 할지라도 마음이 식으면 예전에 주었던 것을 후회하지요. 이는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
만일 백성 중에 한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의 아들뿐이라면 과연 왕이 살인자를 위해 귀한 아들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아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지요(롬 6:23).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을 받으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신 대로이지요.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또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욕하며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을 줄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주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을 다한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4.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려 성결을 이룬 만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이 없는 마음에서 참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항상 평안하게 해 줍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고 기쁨을 주며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출 32:32). 사도 바울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영혼들을 사랑하시는지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혹여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원수도 아니고, 생명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로 부딪히고 불편해하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을 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무관심하지는 않는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당회장님은 어떻습니까? “만약 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제가 대신 지옥에 가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듣고 권능의 역사를 늘 보면서도 사망으로 가는 사람과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시기하여 핍박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전쟁과 기근과 가난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아프리카 오지의 불쌍한 영혼들도 속하지요.
“사랑해야 한다” 하셨으니까 의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루하루 진액을 다하고 계시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새겨져 있는지요?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다면 여러분도 하나님과 영혼들을 중심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2.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사랑의 열매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49~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명의 씨’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었다. ‘생기’란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근본의 빛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자동으로 전달됐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생기를 대부분 거두시고 흔적만 남기셨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의 씨’이다.
생명의 씨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에게 자동으로 전달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잉태된 지 6개월이 된 모든 태아에게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신다.
영 안에 담아 몸의 중심부인 심장의 한 세포 안에 있는 핵에 심어 주시는데 마치 딱딱한 껍질에 싸인 씨앗처럼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씨가 활동을 멈춰 죽은 것 같은 상태를 영이 죽었다고 한다.
주님을 영접해 성령을 받으면 생명의 씨가 활동하면서 죽은 영이 살아나게 된다.
교육목표 :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어 많은 영혼을 진리로 이끌어 더 좋은 천국에 이르게 한다.
열매는 씨를 심었을 때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우면서 맺는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생명의 씨가 성령으로 인해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생명의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지요. 바로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최고의 영적인 사랑
결혼할 때 사람들은 영원 불변의 사랑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반지를 건네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커플도 얼마 못 가 남남이 되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영적인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상대를 섬기며 자기를 희생하므로 갈수록 그 사랑이 승화되지요.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언젠가는 변질되고 말지요.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는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지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지요. 나를 미워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최고의 사랑을 합니다.
2. 대가를 바라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
진실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사람이 세월이 흐르고 내가 원했던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자신의 유익에 따라 쉽게 변하기도 하고 배신합니다.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지요. 내가 준 만큼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것은 다 육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 “당신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서로 내 뜻에 맞춰 주기를 바라고, 안 따라 주면 속상해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도 티격태격 싸우며 거기서 더 금이 가면 결국 이혼까지 이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유익에 맞지 않으면 원수 맺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만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도 드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부모도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만 준다면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또 아무리 의좋던 형제도 돈 문제가 개입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 쉽게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자신이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 원합니다. 설령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는 받지 않고 무조건 줬다 할지라도 마음이 식으면 예전에 주었던 것을 후회하지요. 이는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
만일 백성 중에 한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의 아들뿐이라면 과연 왕이 살인자를 위해 귀한 아들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아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지요(롬 6:23).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을 받으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신 대로이지요.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또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욕하며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을 줄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주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을 다한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4.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려 성결을 이룬 만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이 없는 마음에서 참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항상 평안하게 해 줍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고 기쁨을 주며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출 32:32). 사도 바울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영혼들을 사랑하시는지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혹여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원수도 아니고, 생명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로 부딪히고 불편해하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을 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무관심하지는 않는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당회장님은 어떻습니까? “만약 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제가 대신 지옥에 가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듣고 권능의 역사를 늘 보면서도 사망으로 가는 사람과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시기하여 핍박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전쟁과 기근과 가난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아프리카 오지의 불쌍한 영혼들도 속하지요.
“사랑해야 한다” 하셨으니까 의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루하루 진액을 다하고 계시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새겨져 있는지요?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다면 여러분도 하나님과 영혼들을 중심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2.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사랑의 열매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49~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명의 씨’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었다. ‘생기’란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근본의 빛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자동으로 전달됐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생기를 대부분 거두시고 흔적만 남기셨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의 씨’이다.
생명의 씨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에게 자동으로 전달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잉태된 지 6개월이 된 모든 태아에게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신다.
영 안에 담아 몸의 중심부인 심장의 한 세포 안에 있는 핵에 심어 주시는데 마치 딱딱한 껍질에 싸인 씨앗처럼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씨가 활동을 멈춰 죽은 것 같은 상태를 영이 죽었다고 한다.
주님을 영접해 성령을 받으면 생명의 씨가 활동하면서 죽은 영이 살아나게 된다.
2017-08-18
제33과그리스도의 사랑
엡 5:2
읽을말씀 : 엡 5:2 | 외울말씀 : 엡 5:2 ㅣ 참고 말씀: 마 5:17
교육목표 : 인류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본받게 한다.
사랑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바꿉니다. 배움이 많지 않은 어부, 죄인 취급받던 세리, 가난한 자, 과부 등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았고, 무엇보다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진실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1.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영광스런 분이 죄악에 물들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요 6:51)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몸을 누이며 추위를 견디셨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표적을 신호탄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 받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었으며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어둠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 된 썩은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요(요 11장).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율법 또한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지도 않으셨지요.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밤낮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2.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데 그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라시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친히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고소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대로 처벌하라.”고 하지 않고 몸을 굽힌 채 땅에다 무언가 쓰셨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짓는 공통 죄목들이었습니다. 죄를 나열하신 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뒤 또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쓰십니다.
이번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죄를 본 듯이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상세하게 쓰셨지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둘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주여, 없나이다.” 대답하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셨지요. 죄 없으신 예수님도 여인을 정죄치 않으셨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여인뿐 아니라, 그녀를 정죄했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으로 찌르지 않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했지요.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 수 없지만 율법이 있기에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키게 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3.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 섭리를 이루신 사랑
3년간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 자신의 피값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생명을 건 절규였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였습니다(눅 22:42~44).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신 뒤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때리며 처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마 27:28~31). 밤새 희롱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피로 얼룩진 몸으로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이른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다 쏟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기도하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이나 달려 고통당하신 뒤 운명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대속할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직접 죄를 고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었지요.
4. 천국 처소를 예비하며 한 영혼이라도 더 이끄시는 사랑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바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지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 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간절히 기도하시지요(마 26:29). 우리가 인간 경작을 잘 받아 승리하고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도록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경작을 마친 후 백보좌 대심판 때에도 주님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공의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한 일들에 대해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더 좋은 천국의 처소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해 주십니다. 직접 사람들이 겪는 모든 것을 체험하셨기에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대변해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 다한 사랑이셨습니다. 과연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외치심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1. 예수님은 우리 ( )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죄의 삯은 사망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 )을 다 쏟으셨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 )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 )과 ( )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21~4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십자가 형벌’
십자가 형벌은 참으로 잔혹한 사형법 중의 하나이다. 다른 형벌에 비해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손과 발에 못 박힌 채 살이 찢기는 고통뿐 아니라 심한 탈수와 혈액 순환 장애로 장기들이 서서히 기능을 상실하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벌레들에게 시달리는 고통까지 가중된다.
아무 죄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며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셨을까?
피부에 와 닿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지난날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과 경작하시는 의미, 자신을 화목 제물로 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교육목표 : 인류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본받게 한다.
사랑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바꿉니다. 배움이 많지 않은 어부, 죄인 취급받던 세리, 가난한 자, 과부 등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았고, 무엇보다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진실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1.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영광스런 분이 죄악에 물들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요 6:51)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몸을 누이며 추위를 견디셨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표적을 신호탄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 받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었으며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어둠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 된 썩은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요(요 11장).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율법 또한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지도 않으셨지요.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밤낮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2.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데 그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라시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친히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고소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대로 처벌하라.”고 하지 않고 몸을 굽힌 채 땅에다 무언가 쓰셨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짓는 공통 죄목들이었습니다. 죄를 나열하신 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뒤 또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쓰십니다.
이번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죄를 본 듯이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상세하게 쓰셨지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둘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주여, 없나이다.” 대답하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셨지요. 죄 없으신 예수님도 여인을 정죄치 않으셨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여인뿐 아니라, 그녀를 정죄했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으로 찌르지 않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했지요.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 수 없지만 율법이 있기에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키게 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3.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 섭리를 이루신 사랑
3년간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 자신의 피값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생명을 건 절규였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였습니다(눅 22:42~44).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신 뒤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때리며 처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마 27:28~31). 밤새 희롱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피로 얼룩진 몸으로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이른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다 쏟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기도하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이나 달려 고통당하신 뒤 운명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대속할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직접 죄를 고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었지요.
4. 천국 처소를 예비하며 한 영혼이라도 더 이끄시는 사랑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바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지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 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간절히 기도하시지요(마 26:29). 우리가 인간 경작을 잘 받아 승리하고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도록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경작을 마친 후 백보좌 대심판 때에도 주님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공의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한 일들에 대해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더 좋은 천국의 처소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해 주십니다. 직접 사람들이 겪는 모든 것을 체험하셨기에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대변해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 다한 사랑이셨습니다. 과연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외치심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1. 예수님은 우리 ( )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죄의 삯은 사망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 )을 다 쏟으셨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 )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 )과 ( )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다.
* 금주 과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책자 21~4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십자가 형벌’
십자가 형벌은 참으로 잔혹한 사형법 중의 하나이다. 다른 형벌에 비해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손과 발에 못 박힌 채 살이 찢기는 고통뿐 아니라 심한 탈수와 혈액 순환 장애로 장기들이 서서히 기능을 상실하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벌레들에게 시달리는 고통까지 가중된다.
아무 죄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며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셨을까?
피부에 와 닿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지난날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과 경작하시는 의미, 자신을 화목 제물로 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2017-08-11
제32과하나님의 사랑
요일 4:16
읽을말씀 : 요일 4:16 | 외울말씀 : 사 49:15 l 참고 말씀: 롬 8:26~27
교육목표 :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를 온전히 벗어버리고 알곡 성도의 신앙을 소유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을 창조하신 뒤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생령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와라는 사랑스런 배필도 주셨지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홀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셨습니다.
1. 인간을 경작하시며 참 자녀로 이끄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환경 속에서 아담은 무수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참 자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마음껏 사랑을 주셨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죽음과 불행을 겪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몰랐고, 미움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체험이 없으니 진정 마음에서 느끼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령 아담과 하와는 오랜 세월 동안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결국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셨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악과를 먹을 줄 모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경작이라는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경작을 통해 눈물, 슬픔, 고통, 사망 등을 체험함으로 장차 천국에 이르러 자신이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깨달아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에덴동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더는 에덴동산에 살 수 없었습니다. 천하 만물을 호령하던 아담이 권세를 잃으니 이 땅의 동식물까지도 저주를 받기에 이릅니다. 풍요롭고 아름답던 이 땅도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며, 땀 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과 전혀 환경이 다른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그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에덴동산을 떠나 지구에서 살게 될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염려하며 걱정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급속도로 죄로 물들어 하나님과 멀어져 갔습니다(롬 1:21~23).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라며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혹여 세상과 짝하며 잠시 하나님을 멀리한다 해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집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보다 더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지요.
2.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사랑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란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나 자신이 누리는 환경이 얼마나 값지고 좋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는 아들은 철없고 버릇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아들은 유산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아픔은 시작됩니다. “행여 다치지는 않을까? 나쁜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합니다. 습관처럼 먼 데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 생각에 잠도 오지 않습니다.
얼마 후 돈이 떨어진 아들은 사람들의 냉대 속에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주는 이가 없을 만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품이 생각났습니다.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에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춥니다. 못난 아들이라 나무라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특정 시대, 특정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대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기뻐하시고 반갑게 맞아 주시지요.
이처럼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세 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보혈과 생명으로써 죄인들이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다시 찾은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천국을 예비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우리 마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돌이키도록 이끄십니다. 믿음이 적은 이에게 믿음을 더하고, 소망이 없는 이에게는 천국 소망을 더해 주십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섬세하게 양육하듯이 행여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때에 따라 성령의 음성을 들려 주시지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고 천국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깊이 깨우친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강건함의 축복뿐만 아니라 범사에 잘되고 형통한 복을 주십니다. 이는 영계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복과 응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았을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다.”는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노라.” 하는 것이 진정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또 근심 걱정이 없고 질병이나 이별,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가슴 벅차며 감격하였는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 사랑하신 것이 아니지요.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여인이 젖먹이 자녀를 한시도 잊지 못하는, 그 이상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살피시고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줄 아셨는데도 막지 않으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놔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의 극치를 보여 준 사건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94~20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죽옷’에 담긴 영적 의미
1. 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떠나 척박한 지구에서 살아갈 아담과 하와를 매우 안쓰러워하시며 사랑의 표현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앞으로 변질된 땅에서 받게 될 충격과 몸소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떠함을 아셨기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셨던 것이다.
2. 가죽옷은 ‘구원의 끈’을 의미한다.
가죽옷은 하나님과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끈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사랑의 징표요, 구원의 끈인 가죽 옷이 있었기에 이 땅의 삶을 견디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를 온전히 벗어버리고 알곡 성도의 신앙을 소유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을 창조하신 뒤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생령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와라는 사랑스런 배필도 주셨지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홀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셨습니다.
1. 인간을 경작하시며 참 자녀로 이끄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환경 속에서 아담은 무수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참 자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마음껏 사랑을 주셨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죽음과 불행을 겪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몰랐고, 미움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체험이 없으니 진정 마음에서 느끼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령 아담과 하와는 오랜 세월 동안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결국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셨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악과를 먹을 줄 모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경작이라는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경작을 통해 눈물, 슬픔, 고통, 사망 등을 체험함으로 장차 천국에 이르러 자신이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깨달아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에덴동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더는 에덴동산에 살 수 없었습니다. 천하 만물을 호령하던 아담이 권세를 잃으니 이 땅의 동식물까지도 저주를 받기에 이릅니다. 풍요롭고 아름답던 이 땅도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며, 땀 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과 전혀 환경이 다른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그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에덴동산을 떠나 지구에서 살게 될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염려하며 걱정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급속도로 죄로 물들어 하나님과 멀어져 갔습니다(롬 1:21~23).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라며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혹여 세상과 짝하며 잠시 하나님을 멀리한다 해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집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보다 더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지요.
2.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사랑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란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나 자신이 누리는 환경이 얼마나 값지고 좋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는 아들은 철없고 버릇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아들은 유산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아픔은 시작됩니다. “행여 다치지는 않을까? 나쁜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합니다. 습관처럼 먼 데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 생각에 잠도 오지 않습니다.
얼마 후 돈이 떨어진 아들은 사람들의 냉대 속에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주는 이가 없을 만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품이 생각났습니다.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에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춥니다. 못난 아들이라 나무라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특정 시대, 특정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대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기뻐하시고 반갑게 맞아 주시지요.
이처럼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세 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보혈과 생명으로써 죄인들이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다시 찾은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천국을 예비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우리 마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돌이키도록 이끄십니다. 믿음이 적은 이에게 믿음을 더하고, 소망이 없는 이에게는 천국 소망을 더해 주십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섬세하게 양육하듯이 행여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때에 따라 성령의 음성을 들려 주시지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고 천국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깊이 깨우친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강건함의 축복뿐만 아니라 범사에 잘되고 형통한 복을 주십니다. 이는 영계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복과 응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았을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다.”는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노라.” 하는 것이 진정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또 근심 걱정이 없고 질병이나 이별,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가슴 벅차며 감격하였는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 사랑하신 것이 아니지요.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여인이 젖먹이 자녀를 한시도 잊지 못하는, 그 이상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살피시고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줄 아셨는데도 막지 않으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놔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의 극치를 보여 준 사건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94~20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죽옷’에 담긴 영적 의미
1. 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떠나 척박한 지구에서 살아갈 아담과 하와를 매우 안쓰러워하시며 사랑의 표현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앞으로 변질된 땅에서 받게 될 충격과 몸소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떠함을 아셨기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셨던 것이다.
2. 가죽옷은 ‘구원의 끈’을 의미한다.
가죽옷은 하나님과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끈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사랑의 징표요, 구원의 끈인 가죽 옷이 있었기에 이 땅의 삶을 견디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2017-08-04
제31과온전한 사랑
고전 13:8~13
읽을말씀 : 고전 13:8~13 | 외울말씀 : 고전 13:13 l 참고 말씀: 시 103:15
교육목표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대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속한 풀, 꽃, 나무와 같이 육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부와 명예, 권세 등도 모두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죄와 어둠도 없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이나 방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요? 영의 세계인 천국은 온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언한다 해도 장차 천국에서 알고 깨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나라나 민족,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염려가 없고,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 않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배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는 천국 가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은 영에 속한 것이지만 천국 가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폐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서도 폐하지 않으며 마음에 할례하여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만큼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어린아이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과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으레 동전을 집습니다. 오백 원으로 과자를 사 봤지만 지폐로는 안 사 보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고 깨닫는 깊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광채가 얼마나 찬란한지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면 그때는 무한히 넓고 신비로운 영의 세계와 모든 것이 운행되는 원리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나지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믿음의 각 단계를 자녀, 아이, 청년, 아비에 비유해 놓았습니다. 자녀나 아이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후 청년의 믿음이 되고 더 장성하여 아비의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차원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아비의 믿음을 이뤘다 해도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허상이며,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닮은 모형에 불과하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가 어떠한지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삶이 지나면 그때에는 실체인 천국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영의 세계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천국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뚜렷이 알게 되지요.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한 시대는 약 2천 년 전입니다. 당시 거울은 은, 청동, 철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믿음과 소망은 매우 귀한 덕목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또한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도록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좁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힘들다, 괴롭다.” 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행한 만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룬 만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처소가 구분됩니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1천층은 하나님을 믿은 후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천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지요. 3천층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성결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룬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으로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원래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이 임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천국에 갈 수 있고, 소망이 있을 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천국에 가면 왜 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 )만 남기 때문이다.
②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 )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82~1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에 담긴 영적 의미
① 벽옥(영적 믿음) ② 남보석(곧음과 절개) ③ 옥수(결백과 희생적 사랑)
④ 녹보석(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 ⑤ 홍마노(영적 충성)
⑥ 홍보석(열정적 사랑) ⑦ 황옥(자비) ⑧ 녹옥(오래 참음)
⑨ 담황옥(양선) ⑩ 비취옥(절제) ⑪ 청옥(청결함과 거룩함) ⑫ 자정(온유)
교육목표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대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속한 풀, 꽃, 나무와 같이 육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부와 명예, 권세 등도 모두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죄와 어둠도 없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이나 방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요? 영의 세계인 천국은 온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언한다 해도 장차 천국에서 알고 깨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나라나 민족,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염려가 없고,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 않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배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는 천국 가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은 영에 속한 것이지만 천국 가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폐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서도 폐하지 않으며 마음에 할례하여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만큼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어린아이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과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으레 동전을 집습니다. 오백 원으로 과자를 사 봤지만 지폐로는 안 사 보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고 깨닫는 깊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광채가 얼마나 찬란한지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면 그때는 무한히 넓고 신비로운 영의 세계와 모든 것이 운행되는 원리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나지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믿음의 각 단계를 자녀, 아이, 청년, 아비에 비유해 놓았습니다. 자녀나 아이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후 청년의 믿음이 되고 더 장성하여 아비의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차원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아비의 믿음을 이뤘다 해도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허상이며,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닮은 모형에 불과하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가 어떠한지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삶이 지나면 그때에는 실체인 천국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영의 세계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천국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뚜렷이 알게 되지요.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한 시대는 약 2천 년 전입니다. 당시 거울은 은, 청동, 철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믿음과 소망은 매우 귀한 덕목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또한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도록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좁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힘들다, 괴롭다.” 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행한 만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룬 만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처소가 구분됩니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1천층은 하나님을 믿은 후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천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지요. 3천층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성결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룬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으로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원래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이 임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천국에 갈 수 있고, 소망이 있을 때 죄를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천국에 가면 왜 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 )만 남기 때문이다.
②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 )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82~1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에 담긴 영적 의미
① 벽옥(영적 믿음) ② 남보석(곧음과 절개) ③ 옥수(결백과 희생적 사랑)
④ 녹보석(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 ⑤ 홍마노(영적 충성)
⑥ 홍보석(열정적 사랑) ⑦ 황옥(자비) ⑧ 녹옥(오래 참음)
⑨ 담황옥(양선) ⑩ 비취옥(절제) ⑪ 청옥(청결함과 거룩함) ⑫ 자정(온유)
2017-07-28
제30과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고전 13:7
읽을말씀 : 고전 13:7 | 외울말씀 : 벧전 1:7 ㅣ 참고 말씀: 마 5:11~12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딤으로 어떤 연단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는데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마태복음 5장 39절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상대에게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아픔은 어쩔 수 없지요. 이때 억울하게 맞았다고 마음이 쓰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를 화나게 한 것이 민망해서 마음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형제를 보니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요.
참음의 여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줄을 알고도 기도를 쉬지 않았지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리에게 악으로 대항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참으니 상황이 곧바로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를까요? 이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농작물은 비, 바람, 따가운 햇살을 견딤으로 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견디는 시간을 통해 알곡으로 맺혀지지요.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2. 연단은 축복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어찌하든 훼방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조금의 흠과 티만 보여도 송사를 하지요. 예를 들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참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보기 싫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송사하여 연단이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다고 인정받기까지는 크든 작든 연단이라는 테스트가 따르지요.
물론 악이 전혀 없다 해도 연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축복을 주시려는 연단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온전한 선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축복을 주실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과 사랑의 행함으로 응답받을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의 비바람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럴 때 오직 선과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승리하여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매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잘 이기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러면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3.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려면
1) 연단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나를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크고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새기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꼭 좋은 천국으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 결국 온전한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과 같습니다.
때로 자신을 볼 때 ‘어느 세월에 변화될까?’ 할 수도 있지만 연마 끝에 빛나는 보석처럼 연단을 잘 견딤으로 변화되면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연단을 통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좀 더 쉬운 길로 가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연단을 피해 가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만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마주할 때의 힘듦을 인내하며 상대를 진정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연단의 상황들 하나하나가 소망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되고 지름길이 됩니다.
3)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선만 행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시험 환난은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은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곧 시험, 환난은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이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계의 법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은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당장에는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선이 승리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험, 환난, 핍박이 올수록 더욱 선을 행해야 합니다.
만일 가족에게 핍박받을 때 ‘내 남편은, 내 아내는 왜 저렇게 악할까?’라고 생각한다면 연단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주 안에서 섬김으로 가정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는 것이 선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가장 좋은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쳐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여 주시지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을 행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오직 선으로 인내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나에게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는 일마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고, 걸핏하면 불평하고 토라지는 사람도 있지요. 안하무인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참사랑을 이루면 견디기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대로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① 연단 중에도 ( )의 ( )을 굳게 믿어야 한다.
② 연단이 ( )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한다.
③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 )만 행해야 한다.
2.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르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70~17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에는 마음에 이룬 사랑만 가져갈 수 있다!
천국에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이 땅의 아무리 귀한 황금보석, 금, 다이아몬드도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땅에서 가져가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있다.
‘사랑’이다. 눈물, 슬픔, 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이룬 사랑, 천국에 가져가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딤으로 어떤 연단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는데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마태복음 5장 39절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상대에게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아픔은 어쩔 수 없지요. 이때 억울하게 맞았다고 마음이 쓰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를 화나게 한 것이 민망해서 마음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형제를 보니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요.
참음의 여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줄을 알고도 기도를 쉬지 않았지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리에게 악으로 대항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참으니 상황이 곧바로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를까요? 이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농작물은 비, 바람, 따가운 햇살을 견딤으로 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견디는 시간을 통해 알곡으로 맺혀지지요.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2. 연단은 축복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어찌하든 훼방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조금의 흠과 티만 보여도 송사를 하지요. 예를 들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참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보기 싫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송사하여 연단이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다고 인정받기까지는 크든 작든 연단이라는 테스트가 따르지요.
물론 악이 전혀 없다 해도 연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축복을 주시려는 연단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온전한 선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축복을 주실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과 사랑의 행함으로 응답받을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의 비바람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럴 때 오직 선과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승리하여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매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잘 이기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러면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3.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려면
1) 연단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나를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크고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새기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꼭 좋은 천국으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 결국 온전한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과 같습니다.
때로 자신을 볼 때 ‘어느 세월에 변화될까?’ 할 수도 있지만 연마 끝에 빛나는 보석처럼 연단을 잘 견딤으로 변화되면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연단을 통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좀 더 쉬운 길로 가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연단을 피해 가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만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마주할 때의 힘듦을 인내하며 상대를 진정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연단의 상황들 하나하나가 소망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되고 지름길이 됩니다.
3)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선만 행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시험 환난은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은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곧 시험, 환난은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이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계의 법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은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당장에는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선이 승리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험, 환난, 핍박이 올수록 더욱 선을 행해야 합니다.
만일 가족에게 핍박받을 때 ‘내 남편은, 내 아내는 왜 저렇게 악할까?’라고 생각한다면 연단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주 안에서 섬김으로 가정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는 것이 선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가장 좋은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쳐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여 주시지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을 행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오직 선으로 인내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나에게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는 일마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고, 걸핏하면 불평하고 토라지는 사람도 있지요. 안하무인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참사랑을 이루면 견디기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대로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연단 속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① 연단 중에도 ( )의 ( )을 굳게 믿어야 한다.
② 연단이 ( )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한다.
③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 )만 행해야 한다.
2.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연단이 따르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70~17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에는 마음에 이룬 사랑만 가져갈 수 있다!
천국에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이 땅의 아무리 귀한 황금보석, 금, 다이아몬드도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땅에서 가져가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있다.
‘사랑’이다. 눈물, 슬픔, 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이룬 사랑, 천국에 가져가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