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501 PAGE : 37/106
2018-04-13
제15과가상칠언 (3)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0:20 ㅣ 참고 말씀: 마태복음 27:51~53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6,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은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졌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침내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긴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 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약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마치고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리고 완전히 승리하셨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2)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제 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가상칠언 중 제 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기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데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기도를 하신 것은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루셨음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하신 것입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산천초목 모든 것들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는데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 일 만에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함을 증거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우치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2. 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 )라고 부르셨다. 이는 죄를 대속해 주는 ( )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 )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3. 성소 휘장이 위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 )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 )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32~13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이란? 사람의 뇌세포 안에 있는 기억 장치와 그 안에 입력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이란?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6,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은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졌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침내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긴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 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약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마치고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리고 완전히 승리하셨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2)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제 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가상칠언 중 제 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기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데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기도를 하신 것은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루셨음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하신 것입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산천초목 모든 것들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는데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 일 만에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함을 증거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우치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2. 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 )라고 부르셨다. 이는 죄를 대속해 주는 ( )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 )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3. 성소 휘장이 위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 )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 )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32~13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이란? 사람의 뇌세포 안에 있는 기억 장치와 그 안에 입력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이란?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2018-04-06
제14과가상칠언 (2)
요한복음 19:26∼28, 마태복음 27:4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26∼28, 마태복음 27:4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2:50 ㅣ 참고 말씀: 시편 69:21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3~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밝히 깨달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가상칠언 중 3언~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늘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지요.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 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 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예수님은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은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것임을 알리는 절규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지요.
둘째는, 예수님이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며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셨는지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 이는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셨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신 포도주를 드심으로 우리에게는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새 포도주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신약의 사랑의 법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매번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곧 우리를 위해 신 포도주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우리에게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피 값을 찾아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은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3.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4.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20~12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도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3~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밝히 깨달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가상칠언 중 3언~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늘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지요.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 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 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예수님은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은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것임을 알리는 절규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지요.
둘째는, 예수님이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며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셨는지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 이는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셨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신 포도주를 드심으로 우리에게는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새 포도주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신약의 사랑의 법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매번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곧 우리를 위해 신 포도주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우리에게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피 값을 찾아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은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3.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4.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20~12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도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2018-03-30
제13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한복음 11:25~2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25~2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1:25 ㅣ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교육목표 :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을 맞아 부활이 갖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몸의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고,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나온 후에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사망에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임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지상 재림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그 품에 안길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12~1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데 이것을 ‘영적인 부활’이라 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목표 :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을 맞아 부활이 갖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몸의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고,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나온 후에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사망에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임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지상 재림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그 품에 안길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12~1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데 이것을 ‘영적인 부활’이라 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2018-03-23
제12과가상칠언 (1)
누가복음 23:33~43
읽을말씀 : 누가복음 23:33~4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ㅣ 참고 말씀: 마태복음 27:38~4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 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먼저 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흉악한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관원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합니다. 이럴 때에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을 통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용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좌우편에 있던 강도들에 대한 기록이 다르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 하지요. 반면 누가복음 23장에는 ‘한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강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현장감 있게 유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많은 군중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강도 중에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 것이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지요.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한 것인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을 본 사람들 중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전했습니다. 반면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사람들은 한편 강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당시 상황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경 기자들을 통해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 말씀하지 않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반면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낮은 처소로 부끄러운 구원받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이 없는 낙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니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습니다. 그리고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하셨는데 여기서 ‘옥’이란 감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윗음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윗음부에 가셔야 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나옵니다(눅 16:22).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해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사람도 있기에(롬 2:14∼15) 운명하신 후 윗음부에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행 4:12).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기도와 전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1언에서 ‘저희’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2. 구원받은 강도는 왜 가장 낮은 처소인 낙원을 허락받았을까요?
3.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어디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20~22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윗음부’란?
윗음부는 정확히 천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천국에 속한 곳으로, 구약 시대 구원받은 영혼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다. 정확히 말해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이 대기하던 곳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대기 장소가 천국 낙원의 가장자리로 바뀌었다.
신약 시대 윗음부는 구원받은 영혼이 낙원의 대기 장소로 들어가기 전 3일간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거치는 곳이며, 임신 6개월 후 태중에서 유산 또는 낙태된 영혼 중에 구원받은 영혼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 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먼저 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흉악한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관원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합니다. 이럴 때에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을 통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용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좌우편에 있던 강도들에 대한 기록이 다르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 하지요. 반면 누가복음 23장에는 ‘한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강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현장감 있게 유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많은 군중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강도 중에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 것이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지요.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한 것인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을 본 사람들 중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전했습니다. 반면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사람들은 한편 강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당시 상황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경 기자들을 통해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 말씀하지 않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반면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낮은 처소로 부끄러운 구원받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이 없는 낙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니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습니다. 그리고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하셨는데 여기서 ‘옥’이란 감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윗음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윗음부에 가셔야 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나옵니다(눅 16:22).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해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사람도 있기에(롬 2:14∼15) 운명하신 후 윗음부에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행 4:12).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기도와 전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1언에서 ‘저희’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2. 구원받은 강도는 왜 가장 낮은 처소인 낙원을 허락받았을까요?
3.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어디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20~22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윗음부’란?
윗음부는 정확히 천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천국에 속한 곳으로, 구약 시대 구원받은 영혼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다. 정확히 말해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이 대기하던 곳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대기 장소가 천국 낙원의 가장자리로 바뀌었다.
신약 시대 윗음부는 구원받은 영혼이 낙원의 대기 장소로 들어가기 전 3일간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거치는 곳이며, 임신 6개월 후 태중에서 유산 또는 낙태된 영혼 중에 구원받은 영혼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다.
2018-03-16
제11과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태복음 27:29~30
읽을말씀 : 마태복음 27:29~30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10:5 l 참고 말씀: 마가복음 9:45~47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선고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당하며 피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 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달라 입력된 지식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 하고,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요. 따라서 사람의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진리를 좇아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비진리 생각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요일 2:1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적인 생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상들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또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또한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수많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신 사랑을 믿기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군병 한 사람이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군병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쇠못이 양손과 양발의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악을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막 9:45~47).
오늘날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혈기가 나면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유 없이 살인하고 총을 난사하며 방화를 일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과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히 죄를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진리로 마음을 지키며 늘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사람의 ( )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이다.
② 우리에게 좋은 ( )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2.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섭리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04~11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을 좇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 교만, 혈기, 게으름, 간음 등 죄의 속성이 있는데,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만나면 육신의 정욕이 나온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이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고 결국 죄를 짓게 된다.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선고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당하며 피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 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달라 입력된 지식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 하고,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요. 따라서 사람의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진리를 좇아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비진리 생각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요일 2:1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적인 생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상들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또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또한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수많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려 주신 사랑을 믿기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군병 한 사람이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군병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쇠못이 양손과 양발의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악을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막 9:45~47).
오늘날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혈기가 나면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유 없이 살인하고 총을 난사하며 방화를 일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과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히 죄를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진리로 마음을 지키며 늘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사람의 ( )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이다.
② 우리에게 좋은 ( )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2.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섭리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04~11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을 좇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 교만, 혈기, 게으름, 간음 등 죄의 속성이 있는데,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만나면 육신의 정욕이 나온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이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고 결국 죄를 짓게 된다.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한다.
2018-03-09
제10과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이사야 53:5~6
읽을말씀 : 이사야 53:5~6 | 외울말씀 : 베드로전서 2:24 ㅣ 참고 말씀: 히브리서 9:2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이나 연약함과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을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 즉시 치료되어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치료받지 못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습니다.
2.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했는데 이는 이미 예수님이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도 틈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사람이 보는 의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맞고 왔습니다. 이때 화를 내며 “왜 너는 맨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 하며,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 찾아가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갚아 줘야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시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름을 알아 진리대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세상을 의존합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병원부터 찾는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지요. 아사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발에 병이 들자 의원을 의지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죄를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제사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는 예수님이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평가 및 적용하기
1. 불손종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 )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 )이 ( )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2.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 )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 )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 )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92~9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아사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사는 어머니가 가증한 아세라 우상을 섬기자 황후 자리까지 폐해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던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뢰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선지자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재위 39년에 발에 중한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을 의뢰하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고 만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이나 연약함과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을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 즉시 치료되어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치료받지 못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습니다.
2.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했는데 이는 이미 예수님이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도 틈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사람이 보는 의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맞고 왔습니다. 이때 화를 내며 “왜 너는 맨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 하며,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 찾아가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갚아 줘야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시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름을 알아 진리대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세상을 의존합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병원부터 찾는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지요. 아사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발에 병이 들자 의원을 의지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죄를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제사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는 예수님이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평가 및 적용하기
1. 불손종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 )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 )이 ( )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2.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 )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 )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 )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92~9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아사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사는 어머니가 가증한 아세라 우상을 섬기자 황후 자리까지 폐해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던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뢰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선지자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재위 39년에 발에 중한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을 의뢰하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고 만다.
2018-03-02
제9과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23~24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23~2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24:34 l 참고 말씀: 시편 22:18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대해 자세히 기록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겉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그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군병들이 각각 한 깃씩 얻은 것처럼 겉옷 조각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을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결국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하였고 백성들은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에게 함락될 때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고백대로 유대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올무가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도 벌거벗겨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환난이 임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짰다는 말씀의 의미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속옷에 대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에 대해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을 남기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살펴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 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됩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이어 왔습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유대인’이라 부르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냅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의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에 선민으로 택하시고, 그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마지막 때 섭리를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이스라엘인들의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변함없는 중심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당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난 1948년에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한 후 아주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확증하였지요.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듯이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마 24:32~34).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한 답변으로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어졌다가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기 바랍니다.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의 ( )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한다.
2.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 )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그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 )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한다.
3. 예수님의 ( )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 )임을 나타낸다.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84~9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티투스’는 어떤 인물일까?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는 화산 대폭발로 폼페이 시 전체가 화산재에 매몰되고, 로마의 대화재와 페스트 만연 등의 불행한 사건 속에서 로마의 재건과 구제사업에 전력했다. 또한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대해 자세히 기록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겉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그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군병들이 각각 한 깃씩 얻은 것처럼 겉옷 조각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을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결국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하였고 백성들은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에게 함락될 때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고백대로 유대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올무가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도 벌거벗겨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환난이 임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짰다는 말씀의 의미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속옷에 대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에 대해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을 남기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살펴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 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됩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이어 왔습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유대인’이라 부르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냅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 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의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에 선민으로 택하시고, 그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마지막 때 섭리를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이스라엘인들의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변함없는 중심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서기 70년에 멸망당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난 1948년에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한 후 아주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확증하였지요.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듯이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마 24:32~34).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한 답변으로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어졌다가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기 바랍니다.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의 ( )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한다.
2.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 )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그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 )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한다.
3. 예수님의 ( )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 )임을 나타낸다.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84~9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티투스’는 어떤 인물일까?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는 화산 대폭발로 폼페이 시 전체가 화산재에 매몰되고, 로마의 대화재와 페스트 만연 등의 불행한 사건 속에서 로마의 재건과 구제사업에 전력했다. 또한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2018-02-23
제8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19:32~3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32~36 | 외울말씀 : 베드로후서 1:4 l 참고 말씀: 요한복음 1:14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섭리 중에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방치해 둘 수 없었지요.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군병들은 먼저 강도들이 빨리 숨을 거두도록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9장 33절을 보면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시편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다리뼈가 꺾이지 않도록 친히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민 9:12 ; 출 12:46). 여기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양이 사람에게 젖과 고기는 물론 털과 가죽까지 다 내어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여 화목제물로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4절에는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 2:6~7). 그리고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고 병든 사람과 연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한 채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온갖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 같은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셨으며, 때로는 슬픔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오직 선과 진리만 행하시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 자범죄가 없으므로 흘리신 피와 물은 흠도 점도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마음을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이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과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는 무엇일까요?
① 예수님께서 ( )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 )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 )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76~8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섭리 중에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방치해 둘 수 없었지요.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군병들은 먼저 강도들이 빨리 숨을 거두도록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9장 33절을 보면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시편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다리뼈가 꺾이지 않도록 친히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민 9:12 ; 출 12:46). 여기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양이 사람에게 젖과 고기는 물론 털과 가죽까지 다 내어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여 화목제물로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4절에는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 2:6~7). 그리고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고 병든 사람과 연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한 채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온갖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 같은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셨으며, 때로는 슬픔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오직 선과 진리만 행하시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 자범죄가 없으므로 흘리신 피와 물은 흠도 점도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마음을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이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과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는 무엇일까요?
① 예수님께서 ( )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 )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 )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76~8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2018-02-16
제0과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18년, 새해를 맞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주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주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20~21 ------------------- 인도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설 교 ------------------ 선으로 악을 이기자 ----------------- 설교자
2. 설교 예문
옛날에 아주 성격이 고약한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일을 잘해 놔도 칭찬은커녕 “이건 왜 이렇게 못했냐? 저건 왜 이렇게 해 놨냐?” 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며느리는 급기야 시어머니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다 못해 며느리는 동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어르신을 찾아갔습니다.
“어르신! 시어머님이 빨리 죽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어르신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주 어려운데 할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며느리에게 노인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 물었지요. “인절미입니다.”라고 답하자 노인은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인절미를 그날그날 만들어서 어머니께 극진히 대접해 드리게. 단, 조건이 있네. 한 달 동안 절대로 어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던 일은 물론 떡까지 해서 드려야 하니 얼마나 몸이 곤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어머니 마음이 불편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을 실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혹여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는지, 필요한 건 없으신지, 뭘 더 해 드려야 어머니가 편하실는지, 온종일 어머니께 어떻게 하면 더 잘해 드릴까’ 궁리하였지요.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인절미를 정성껏 바치는 며느리의 행함에 마음문이 열리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침이 마르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였지요.
한 달이 끝나갈 무렵 이 방법을 알려 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이제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은 조짐이 좀 보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어르신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면 절대 안 돼요. 저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세상에 저 같은 며느리 없다고 아껴 주세요. 우리 어머니 오래 오래 사셔야 돼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0~21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며느리는 진리를 알아서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처음부터 어찌하든 마음을 담아서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니 중심에서 우러나오게 되었고, 결국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중심에서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먼저 선을 행해 보라고 하면 “왜 맨날 나만 손해 봐야 됩니까? 왜 나만 희생해야 되나요? 왜 나만 져 줘야 됩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나만 져 주는 것 같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기는 비결인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단지 착해서 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변화시키고 살려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 바로 선의 힘입니다. 진정 마음 중심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손해 보고 희생해도 내가 손해 본다, 희생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살리고 더 힘이 되어 줄까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 성격, 내 취향, 내 마음에 맞는 편안한 사람들과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도 함께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 학교, 교회 등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는 내가 싫다고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자주 부딪히고 걸리는 사람을 통과하기 위해, 그 사람의 집안 애경사와 생일을 챙기고, 때때로 선물도 사 주며, 식사도 함께하는 등 마음을 맞추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대에게 무언가 더 주고 섬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선을 행위적으로만 쌓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다시 말해, 내가 선을 행하는 그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 상대를 섬기는 마음,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평안하고 행복을 느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에는 향기가 있어서 아무리 작은 선의 행함이라도 향이 있는 반면, 아무리 깊고 큰 선이라도 그것이 이론에만 머무르면 향이 나지 않습니다. 선은 생각하고 연구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 안에서부터 나오지요. 또한 선은 쌓으면 쌓을수록 더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작은 선이 쌓이다 보면 다음에 더 큰 선이 나오고, 그렇게 쌓이다 보면 더 깊은 선이 나오게 되지요.
그러므로 작은 선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넉넉하고 포근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소원을 막연히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을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 세계가 있음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혹 진리를 몰라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다면,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 오직 우리를 지키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 주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신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만나 주시고, 어떤 사고나 재앙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의지함으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18년, 새해를 맞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주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주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20~21 ------------------- 인도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설 교 ------------------ 선으로 악을 이기자 ----------------- 설교자
2. 설교 예문
옛날에 아주 성격이 고약한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일을 잘해 놔도 칭찬은커녕 “이건 왜 이렇게 못했냐? 저건 왜 이렇게 해 놨냐?” 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며느리는 급기야 시어머니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다 못해 며느리는 동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어르신을 찾아갔습니다.
“어르신! 시어머님이 빨리 죽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어르신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주 어려운데 할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며느리에게 노인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 물었지요. “인절미입니다.”라고 답하자 노인은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인절미를 그날그날 만들어서 어머니께 극진히 대접해 드리게. 단, 조건이 있네. 한 달 동안 절대로 어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던 일은 물론 떡까지 해서 드려야 하니 얼마나 몸이 곤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어머니 마음이 불편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을 실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혹여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는지, 필요한 건 없으신지, 뭘 더 해 드려야 어머니가 편하실는지, 온종일 어머니께 어떻게 하면 더 잘해 드릴까’ 궁리하였지요.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인절미를 정성껏 바치는 며느리의 행함에 마음문이 열리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침이 마르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였지요.
한 달이 끝나갈 무렵 이 방법을 알려 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이제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은 조짐이 좀 보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어르신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면 절대 안 돼요. 저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세상에 저 같은 며느리 없다고 아껴 주세요. 우리 어머니 오래 오래 사셔야 돼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0~21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며느리는 진리를 알아서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처음부터 어찌하든 마음을 담아서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니 중심에서 우러나오게 되었고, 결국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중심에서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먼저 선을 행해 보라고 하면 “왜 맨날 나만 손해 봐야 됩니까? 왜 나만 희생해야 되나요? 왜 나만 져 줘야 됩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나만 져 주는 것 같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기는 비결인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단지 착해서 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변화시키고 살려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 바로 선의 힘입니다. 진정 마음 중심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손해 보고 희생해도 내가 손해 본다, 희생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살리고 더 힘이 되어 줄까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 성격, 내 취향, 내 마음에 맞는 편안한 사람들과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도 함께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 학교, 교회 등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는 내가 싫다고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자주 부딪히고 걸리는 사람을 통과하기 위해, 그 사람의 집안 애경사와 생일을 챙기고, 때때로 선물도 사 주며, 식사도 함께하는 등 마음을 맞추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대에게 무언가 더 주고 섬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선을 행위적으로만 쌓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다시 말해, 내가 선을 행하는 그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 상대를 섬기는 마음,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평안하고 행복을 느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에는 향기가 있어서 아무리 작은 선의 행함이라도 향이 있는 반면, 아무리 깊고 큰 선이라도 그것이 이론에만 머무르면 향이 나지 않습니다. 선은 생각하고 연구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 안에서부터 나오지요. 또한 선은 쌓으면 쌓을수록 더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작은 선이 쌓이다 보면 다음에 더 큰 선이 나오고, 그렇게 쌓이다 보면 더 깊은 선이 나오게 되지요.
그러므로 작은 선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넉넉하고 포근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소원을 막연히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을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 세계가 있음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혹 진리를 몰라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다면,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 오직 우리를 지키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 주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신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만나 주시고, 어떤 사고나 재앙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의지함으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8-02-16
제7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갈라디아서 3:13~14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3:13~14 | 외울말씀 : 갈라디아서 3:14 ㅣ 참고 말씀: 이사야 53:4~6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 이유를 알아본다.
나무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는 저주의 의미가 아닌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놓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육체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피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를 흘려 주심으로 단번에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이처럼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이 마음 안에 오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여러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그나마 순간에 끝날 수 있지만 십자가 처형은 숨을 거둘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호흡 곤란으로 인한 고통과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달라붙어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였습니다(마 27:40).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희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까라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68~7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 이유를 알아본다.
나무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는 저주의 의미가 아닌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놓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육체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피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를 흘려 주심으로 단번에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이처럼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이 마음 안에 오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여러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그나마 순간에 끝날 수 있지만 십자가 처형은 숨을 거둘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호흡 곤란으로 인한 고통과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달라붙어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였습니다(마 27:40).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희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까라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68~7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