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501 PAGE : 31/106
2019-05-24
제21과기뻐 춤추며 노래하며
마가복음 7:31~37
읽을말씀 : 마가복음 7:31~37 | 외울말씀 : 에베소서 4:13 ㅣ 참고 말씀: 히브리서 13:8
교육목표 : 자신을 돌아보아 빛 가운데 행함으로 건강은 물론 범사에 형통함을 받아 기뻐 춤추며 노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막 7장).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어눌하다는 것은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떠듬떠듬하는 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어렸을 때 말을 조금 배우다가 청력을 잃어 말이 어눌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했습니다(막 7:33~35).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자, 그대로 귀가 열려 듣고 혀가 풀려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명하기 전에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력을 잃은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상태였지요. 이런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어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 본체로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구하면 성경상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히 13:8).
2. 오늘날도 나타나는 청각장애 치료 사례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난청이 치료되는 것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듣게 된 것을 지금까지 무수히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55년 만에 또는 57년 만에 들리지 않던 귀가 열려 듣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2000년 9월, 일본 나고야 신유대성회 때는 13명의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귀가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국내의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알려져 2001년 제9회 2주연속 특별부흥성회 시에는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치료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02년 7월, 중미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때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이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전 총책임자로 성회를 적극 도왔던 분의 어린 딸이 들리지 않던 귀를 치료받고 너무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당시 여덟 살 난 마들린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귀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회 소식을 알게 된 아이가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지요. 아이는 당회장님의 전체를 위한 환자기도를 받은 후 들리지 않던 귀가 들렸다고 합니다. 치료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성회를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하니 하나님께서 이처럼 축복하신 것입니다.
2002년 10월에 개최된 인도 연합대성회 때도 수많은 치료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 제니퍼라는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긴 했지만 워낙 청력이 약해 제대로 듣지 못했지요. 제니퍼의 어머니는 날마다 딸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인도 연합대성회 소식을 듣고 참석하였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잘 듣지 못하는 딸을 위해 최대한 스피커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스피커에서 멀리 떨어진 뒤쪽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니퍼가 단에서 환자를 위한 기도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보청기를 빼더니 몸짓으로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제니퍼가 기도받기 이전 병원 자료를 보면 보청기 없이는 양쪽 귀 모두 소리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00% 청력 소실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기도받은 이후의 청력 검사 결과는 30~50% 청력이 되살아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명이나 난청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치료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1)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가질 수 있는데(롬 10:17) 귀머거리 된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어 주심으로 그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당사자가 믿음을 소유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와 달리 문명이 발달하여 청각장애자도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습니다. 수화나 비디오, 점자책 등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매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록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었다 빼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물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담은 행함으로서 곧 죄 사함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지요.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맑은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씻어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물 대신, 침으로써 죄 사함의 의미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먼저 자신을 진실하게 돌아보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회개해야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설령 형제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똑같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요.
셋째, 욕심을 가지고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욕심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응답받을 수 없지요.
넷째,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으니 의심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선한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우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행함 곧 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심으면 강건한 축복을 받고 물질을 심으면 물질 축복을 받는 것을 깨달아 자신이 심지도 않고 거두려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했으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회개하고 빛 가운데 행함으로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81~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농아와 난청
일반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서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농아라고 한다.
농아가 되는 원인은 유전적인 것과 어머니가 풍진을 앓거나 약을 잘못 복용하여 생기는 선천적인 경우가 있다. 또 3~4세 때 뇌막염 등의 병을 앓아서 후천적으로 농아가 된 경우도 있다.
난청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막이 찢어진 것이 원인이라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청신경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보청기도 소용이 없다.
소음이 심한 데서 오래 일하거나 청력이 쇠퇴하여 난청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외에 귀신 들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도 문제되지 않는다.
교육목표 : 자신을 돌아보아 빛 가운데 행함으로 건강은 물론 범사에 형통함을 받아 기뻐 춤추며 노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막 7장).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어눌하다는 것은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떠듬떠듬하는 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어렸을 때 말을 조금 배우다가 청력을 잃어 말이 어눌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했습니다(막 7:33~35).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자, 그대로 귀가 열려 듣고 혀가 풀려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명하기 전에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력을 잃은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상태였지요. 이런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어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 본체로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구하면 성경상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히 13:8).
2. 오늘날도 나타나는 청각장애 치료 사례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난청이 치료되는 것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듣게 된 것을 지금까지 무수히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55년 만에 또는 57년 만에 들리지 않던 귀가 열려 듣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2000년 9월, 일본 나고야 신유대성회 때는 13명의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귀가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국내의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알려져 2001년 제9회 2주연속 특별부흥성회 시에는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치료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02년 7월, 중미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때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이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전 총책임자로 성회를 적극 도왔던 분의 어린 딸이 들리지 않던 귀를 치료받고 너무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당시 여덟 살 난 마들린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귀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회 소식을 알게 된 아이가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지요. 아이는 당회장님의 전체를 위한 환자기도를 받은 후 들리지 않던 귀가 들렸다고 합니다. 치료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성회를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하니 하나님께서 이처럼 축복하신 것입니다.
2002년 10월에 개최된 인도 연합대성회 때도 수많은 치료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 제니퍼라는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긴 했지만 워낙 청력이 약해 제대로 듣지 못했지요. 제니퍼의 어머니는 날마다 딸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인도 연합대성회 소식을 듣고 참석하였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잘 듣지 못하는 딸을 위해 최대한 스피커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스피커에서 멀리 떨어진 뒤쪽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니퍼가 단에서 환자를 위한 기도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보청기를 빼더니 몸짓으로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제니퍼가 기도받기 이전 병원 자료를 보면 보청기 없이는 양쪽 귀 모두 소리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00% 청력 소실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기도받은 이후의 청력 검사 결과는 30~50% 청력이 되살아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명이나 난청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치료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1)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가질 수 있는데(롬 10:17) 귀머거리 된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어 주심으로 그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당사자가 믿음을 소유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와 달리 문명이 발달하여 청각장애자도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습니다. 수화나 비디오, 점자책 등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매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록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었다 빼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물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담은 행함으로서 곧 죄 사함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지요.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맑은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씻어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물 대신, 침으로써 죄 사함의 의미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먼저 자신을 진실하게 돌아보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회개해야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설령 형제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똑같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요.
셋째, 욕심을 가지고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욕심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응답받을 수 없지요.
넷째,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으니 의심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선한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우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행함 곧 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심으면 강건한 축복을 받고 물질을 심으면 물질 축복을 받는 것을 깨달아 자신이 심지도 않고 거두려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했으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회개하고 빛 가운데 행함으로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81~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농아와 난청
일반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서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농아라고 한다.
농아가 되는 원인은 유전적인 것과 어머니가 풍진을 앓거나 약을 잘못 복용하여 생기는 선천적인 경우가 있다. 또 3~4세 때 뇌막염 등의 병을 앓아서 후천적으로 농아가 된 경우도 있다.
난청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막이 찢어진 것이 원인이라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청신경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보청기도 소용이 없다.
소음이 심한 데서 오래 일하거나 청력이 쇠퇴하여 난청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외에 귀신 들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도 문제되지 않는다.
2019-05-17
제20과일어나 뛰고 걸으며
마가복음 2:3~12
읽을말씀 : 마가복음 2:3~12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4:12 l 참고 말씀: 출애굽기 15:26
교육목표 :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움으로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와 친구들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이 심해 남의 도움이 없이는 일어날 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분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며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도 그분을 만나 치료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소식을 듣고 친구들에게 자신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요. 친구들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은 했지만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인파를 뚫고 예수님 앞까지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다면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통 가옥은 집 옆으로 계단이 있어 지붕에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은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덮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붕을 벗겨낼 수 있었지요.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중풍병자는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행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겸비함으로 자신을 낮출 때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만일 중풍병자가 집 안에 누워서 “주여, 제가 움직일 수가 없어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는 거 아시지요? 그러니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다면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요행을 바라거나 안일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믿음의 행함을 내보였지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 역시 믿음이 있었기에 중풍병자를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어 가면서까지 도와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아야
우리가 응답받고 문제 해결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고자 할 때 말로만 ‘아멘 믿습니다.’ 고백한다고 집이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파고 기초석을 놓듯이, 응답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받침대를 보시고 영적인 믿음을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단순히 예수님 앞에 나간 것만이 아닙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겸비한 자세와 적극적인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때 “여기 중환자가 있으니 길 좀 비켜 주세요.”라고 얼마나 외쳤겠습니까.
그런데도 되지 않자 ‘안 되겠다. 다음에 기도받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한 최후 방법으로 지붕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 광경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가 치료만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지요. 치료만 된다면 집은 얼마든지 더 좋게 수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행함은 겸비하게 낮아졌을 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아팠을 때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아파서 교회에 못 나갑니다.’ 하지는 않았는지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다 인정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치료와 응답이 임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우선 죄 사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이 세상에 있는 질병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의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켜 행하면 어떤 질병도 틈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셨지요. 이처럼 질병은 죄로 인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먼저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간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요. 죄를 짓던 사람이 이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미워하던 사람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바로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극과 플러스극이 만날 때 불꽃이 튀고 전깃불이 들어오듯이, 우리 믿음의 받침대 위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주실 때라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나 걷게 된 중풍병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자 서기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뻐하기는커녕 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진 율법의 틀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우쳐 준 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나갑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보장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보장하신다는 증거이지요. 그가 치료되었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셨지요. 장애로 그동안 불행하게 살아왔다 해도 더는 불행하게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시험 환난에 놓여 있기를 원치 않으시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기 원하시며, 장래에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처럼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준비하여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 )를 세우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59~17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가버나움은 성경에 ‘본 동네’라고도 불렸다(마 9:1, 막 2:1).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이곳을 근거지로 사역하셨으며 이곳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근무하던 백부장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즉시 고쳐 주셨다. 또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베푸셨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개치 않으므로 소돔 땅이 이곳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는 심판을 받았다.
교육목표 :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움으로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와 친구들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이 심해 남의 도움이 없이는 일어날 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분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며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도 그분을 만나 치료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소식을 듣고 친구들에게 자신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요. 친구들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은 했지만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인파를 뚫고 예수님 앞까지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다면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통 가옥은 집 옆으로 계단이 있어 지붕에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은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덮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붕을 벗겨낼 수 있었지요.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중풍병자는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행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겸비함으로 자신을 낮출 때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만일 중풍병자가 집 안에 누워서 “주여, 제가 움직일 수가 없어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는 거 아시지요? 그러니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다면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요행을 바라거나 안일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믿음의 행함을 내보였지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 역시 믿음이 있었기에 중풍병자를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어 가면서까지 도와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아야
우리가 응답받고 문제 해결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고자 할 때 말로만 ‘아멘 믿습니다.’ 고백한다고 집이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파고 기초석을 놓듯이, 응답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받침대를 보시고 영적인 믿음을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단순히 예수님 앞에 나간 것만이 아닙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겸비한 자세와 적극적인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때 “여기 중환자가 있으니 길 좀 비켜 주세요.”라고 얼마나 외쳤겠습니까.
그런데도 되지 않자 ‘안 되겠다. 다음에 기도받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한 최후 방법으로 지붕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 광경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가 치료만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지요. 치료만 된다면 집은 얼마든지 더 좋게 수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행함은 겸비하게 낮아졌을 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아팠을 때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아파서 교회에 못 나갑니다.’ 하지는 않았는지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다 인정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치료와 응답이 임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우선 죄 사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이 세상에 있는 질병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의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켜 행하면 어떤 질병도 틈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셨지요. 이처럼 질병은 죄로 인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먼저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간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요. 죄를 짓던 사람이 이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미워하던 사람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바로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극과 플러스극이 만날 때 불꽃이 튀고 전깃불이 들어오듯이, 우리 믿음의 받침대 위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주실 때라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나 걷게 된 중풍병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자 서기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뻐하기는커녕 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진 율법의 틀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우쳐 준 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나갑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보장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보장하신다는 증거이지요. 그가 치료되었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셨지요. 장애로 그동안 불행하게 살아왔다 해도 더는 불행하게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시험 환난에 놓여 있기를 원치 않으시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기 원하시며, 장래에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처럼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준비하여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 )를 세우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59~17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가버나움은 성경에 ‘본 동네’라고도 불렸다(마 9:1, 막 2:1).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이곳을 근거지로 사역하셨으며 이곳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근무하던 백부장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즉시 고쳐 주셨다. 또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베푸셨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개치 않으므로 소돔 땅이 이곳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는 심판을 받았다.
2019-05-10
제19과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요한복음 9:32~33
읽을말씀 : 요한복음 9:32~33 | 외울말씀 : 요한복음 9:31 ㅣ 참고 말씀: 시편 66:18
교육목표 :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시지요. 그런 다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그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소경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만나 주시고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지요. 진흙을 눈에 바르고 물로 씻으면 보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네가 나를 놀리냐?”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이렇게 순종했을 때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던 눈이 밝아져 세상을 또렷이 보게 되었지요.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혹여 하나님 말씀이 내 상식과 경험에 맞지 않는다 해도 소경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은혜가 임하며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치료받은 후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거짓이 없고 선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리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강한 틀 때문에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참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발라 치료해 주셨다고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힐문합니다. 그러자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자신의 눈을 고쳐 줄 수 있는 분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됐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유대인들에게 출교(회당에서 쫓아낸다는 뜻. 당시 유대공동체 최고 형벌) 당할까봐 무서워 직접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다시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신 대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시 66:18). 더구나 죄인에게 권능을 주셔서 영광 받으실 분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말하였지요.
요한복음 9장 31~33절에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보통 사람 같으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시시비비하며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율법을 어긴 악행이라며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지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소경을 눈 뜨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시 146:8) 했고,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틀과 악함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인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사람은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선한 양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깨우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믿고 인정할 때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은혜를 받은 후 새로운 삶을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치료받고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큰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플 때는 “치료해 주시면 주만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해놓고 막상 치료받아 건강을 회복하면 자기 유익을 좇아 은혜를 저버립니다. 비록 질병의 문제는 해결받았어도 구원의 길에서 떠나 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소경 되었던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구원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요 9:35~36).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하시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절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마음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질병을 치료해 주고 축복을 주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진정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어둠의 일을 벗고 날마다 빛 가운데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하신 대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리 중한 질병이나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중심의 고백과 함께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질병의 치료는 물론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불통을 형통으로 바꿔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소경 된 자처럼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역사를 인정하며 사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얼마나 잘 준비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8편 25~26절에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하셨으니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함으로 권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시지요. 그런 다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그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소경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만나 주시고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지요. 진흙을 눈에 바르고 물로 씻으면 보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네가 나를 놀리냐?”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이렇게 순종했을 때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던 눈이 밝아져 세상을 또렷이 보게 되었지요.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혹여 하나님 말씀이 내 상식과 경험에 맞지 않는다 해도 소경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은혜가 임하며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치료받은 후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거짓이 없고 선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리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강한 틀 때문에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참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발라 치료해 주셨다고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힐문합니다. 그러자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자신의 눈을 고쳐 줄 수 있는 분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됐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유대인들에게 출교(회당에서 쫓아낸다는 뜻. 당시 유대공동체 최고 형벌) 당할까봐 무서워 직접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다시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신 대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시 66:18). 더구나 죄인에게 권능을 주셔서 영광 받으실 분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말하였지요.
요한복음 9장 31~33절에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보통 사람 같으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시시비비하며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율법을 어긴 악행이라며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지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소경을 눈 뜨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시 146:8) 했고,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틀과 악함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인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사람은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선한 양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깨우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믿고 인정할 때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은혜를 받은 후 새로운 삶을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치료받고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큰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플 때는 “치료해 주시면 주만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해놓고 막상 치료받아 건강을 회복하면 자기 유익을 좇아 은혜를 저버립니다. 비록 질병의 문제는 해결받았어도 구원의 길에서 떠나 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소경 되었던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구원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요 9:35~36).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하시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절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마음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질병을 치료해 주고 축복을 주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진정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어둠의 일을 벗고 날마다 빛 가운데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하신 대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리 중한 질병이나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중심의 고백과 함께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질병의 치료는 물론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불통을 형통으로 바꿔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소경 된 자처럼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역사를 인정하며 사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얼마나 잘 준비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8편 25~26절에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하셨으니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함으로 권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2019-05-03
제18과빛의 권능
요한일서 1:5
읽을말씀 : 요한일서 1:5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4:12 ㅣ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13장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밝히 알아서 권능을 사모하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 어떠한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빛 자체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갔지요. 예수님이 명하시면 온갖 질병이 떠나고 연약한 것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나 신약 시대의 사도들, 스데반이나 빌립 집사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빛 가운데 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성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1.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권능
오늘날도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주어 영광의 도구로 사용할 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능을 받아 기사와 표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권능을 행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시 62:11).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일까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입혀 주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말씀한 대로 권능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함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죽어 퇴화되거나 마비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유의 은사와 동일하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 나오는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의 은사는 주로 균에 의해 생긴 질병들의 균을 태워 치료합니다. 따라서 신체가 퇴화되었거나 신경 세포가 손상되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권능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믿음으로 기도할 때라야 치료할 수 있지요. 또한 권능은 일단 주어지면 항상 나타나는 것이지만 신유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2.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 4단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면 예수님 당시와 같이 권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능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얼마나 영으로 일구었느냐에 따라 더 높은 권능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권능은 단계별로 영적인 빛이 다르며, 4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붉은빛의 권능입니다.
성령의 불은 온갖 병균이나 바이러스, 세균 등에 의해 생긴 갖가지 질병들을 태워서 치료합니다. 암, 폐병, 당뇨병, 백혈병, 신장병, 관절염, 심장병,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질병들이 권능의 1단계에서 모두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 말기나 폐병 말기 같은 경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 선을 넘어 버리면 권능의 1단계에서는 치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의 조직이 망가지고 기능을 상실한 경우는 창조의 역사로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므로 더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해도 환자가 얼마나 믿음을 내보이고 주변의 가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라고 해서 성령의 불로 태우는 역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이 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이상의 역사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히 권능이 임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2단계는 푸른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신 대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레이저광선과 같은 권능의 빛들이 쏟아지면서 단계별로 치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능의 2단계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통해서는 주로 귀신 들린 사람, 사단의 역사를 받는 사람에게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둠의 세력으로 인한 자폐증, 정신이상, 노이로제, 신경쇠약 등 각종 신경성 질병도 치료되지요. 간혹 표적이 따르기도 하는데 이는 질병이나 약한 것이 귀신이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비롯된 경우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뜻 가운데 다시 불러오거나 반대로 산 사람의 영혼을 거둘 때도 권능의 2단계에서 나타납니다.
권능의 3단계는 흰빛(무색)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입니다.
권능의 3단계에서는 흰색 또는 무색의 빛으로 역사되며 모든 종류의 표적과 함께 창조의 역사가 따릅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등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나면서부터 기형이나 불구가 된 신체나 완전히 퇴화된 부분이 온전케 되는 것, 그리고 부스러진 뼈가 붙어서 정상이 되거나 없던 뼈가 생겨나고 끊어진 힘줄이 붙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4단계는 황금빛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입니다.
권능의 4단계는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기에 천기를 움직이는 기사가 나타납니다. 무생물도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단계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케 되었습니다(마 8장). 또한 권능의 4단계는 시공을 초월하는 역사가 따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기를 간청하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과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지요(막 7장).
이처럼 질병이 치료되고 어둠의 세력이 떠날 뿐 아니라, 표적이 나타나고 만물이 순종하는 등 권능의 1, 2, 3, 4단계에 속한 모든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3. 빛의 권능을 받아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면
먼저, 성결을 이루는 것은 물론, 최고의 선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 속으로는 불편하고 싫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선이 아닙니다.
설령 악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요동이나 불편함이 없이 참고 인내한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가장 초보적인 선의 단계에 불과하지요. 참된 선은 나를 힘들게 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말과 행함이 따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는 최고의 선은 원수를 위해서라도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을 지니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그들까지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나 사도 바울도 자신을 해하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자 했습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에 대해서도 끝까지 참아 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형제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쉽게 짜증 내거나 판단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으니 소망 가운데 모든 시련을 이기며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사랑 등 진리를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 주고자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빛 가운데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권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 )의 권능이다.
2. 권능의 2단계는 ( )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난다.
3. 권능의 3단계는 ( )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이다.
4. 권능의 4단계는 ( )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이다.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21~13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권능을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능치못할 일이 없는 믿음의 힘이다.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 있고 영광스러운 힘을 나타낸다.
영의 세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다. 따라서 권세란 성결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의 악과 비진리를 온전히 버린 성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권세를 받을 수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밝히 알아서 권능을 사모하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 어떠한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빛 자체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갔지요. 예수님이 명하시면 온갖 질병이 떠나고 연약한 것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나 신약 시대의 사도들, 스데반이나 빌립 집사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빛 가운데 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성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1.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권능
오늘날도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주어 영광의 도구로 사용할 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능을 받아 기사와 표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권능을 행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시 62:11).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일까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입혀 주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말씀한 대로 권능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함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죽어 퇴화되거나 마비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유의 은사와 동일하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 나오는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의 은사는 주로 균에 의해 생긴 질병들의 균을 태워 치료합니다. 따라서 신체가 퇴화되었거나 신경 세포가 손상되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권능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믿음으로 기도할 때라야 치료할 수 있지요. 또한 권능은 일단 주어지면 항상 나타나는 것이지만 신유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2.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 4단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면 예수님 당시와 같이 권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능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얼마나 영으로 일구었느냐에 따라 더 높은 권능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권능은 단계별로 영적인 빛이 다르며, 4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붉은빛의 권능입니다.
성령의 불은 온갖 병균이나 바이러스, 세균 등에 의해 생긴 갖가지 질병들을 태워서 치료합니다. 암, 폐병, 당뇨병, 백혈병, 신장병, 관절염, 심장병,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질병들이 권능의 1단계에서 모두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 말기나 폐병 말기 같은 경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 선을 넘어 버리면 권능의 1단계에서는 치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의 조직이 망가지고 기능을 상실한 경우는 창조의 역사로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므로 더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해도 환자가 얼마나 믿음을 내보이고 주변의 가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라고 해서 성령의 불로 태우는 역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이 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이상의 역사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히 권능이 임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2단계는 푸른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신 대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레이저광선과 같은 권능의 빛들이 쏟아지면서 단계별로 치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능의 2단계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통해서는 주로 귀신 들린 사람, 사단의 역사를 받는 사람에게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둠의 세력으로 인한 자폐증, 정신이상, 노이로제, 신경쇠약 등 각종 신경성 질병도 치료되지요. 간혹 표적이 따르기도 하는데 이는 질병이나 약한 것이 귀신이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비롯된 경우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뜻 가운데 다시 불러오거나 반대로 산 사람의 영혼을 거둘 때도 권능의 2단계에서 나타납니다.
권능의 3단계는 흰빛(무색)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입니다.
권능의 3단계에서는 흰색 또는 무색의 빛으로 역사되며 모든 종류의 표적과 함께 창조의 역사가 따릅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등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나면서부터 기형이나 불구가 된 신체나 완전히 퇴화된 부분이 온전케 되는 것, 그리고 부스러진 뼈가 붙어서 정상이 되거나 없던 뼈가 생겨나고 끊어진 힘줄이 붙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4단계는 황금빛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입니다.
권능의 4단계는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기에 천기를 움직이는 기사가 나타납니다. 무생물도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단계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케 되었습니다(마 8장). 또한 권능의 4단계는 시공을 초월하는 역사가 따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기를 간청하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과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지요(막 7장).
이처럼 질병이 치료되고 어둠의 세력이 떠날 뿐 아니라, 표적이 나타나고 만물이 순종하는 등 권능의 1, 2, 3, 4단계에 속한 모든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3. 빛의 권능을 받아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면
먼저, 성결을 이루는 것은 물론, 최고의 선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 속으로는 불편하고 싫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선이 아닙니다.
설령 악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요동이나 불편함이 없이 참고 인내한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가장 초보적인 선의 단계에 불과하지요. 참된 선은 나를 힘들게 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말과 행함이 따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는 최고의 선은 원수를 위해서라도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을 지니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그들까지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나 사도 바울도 자신을 해하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자 했습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에 대해서도 끝까지 참아 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형제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쉽게 짜증 내거나 판단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으니 소망 가운데 모든 시련을 이기며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사랑 등 진리를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 주고자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빛 가운데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권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 )의 권능이다.
2. 권능의 2단계는 ( )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난다.
3. 권능의 3단계는 ( )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이다.
4. 권능의 4단계는 ( )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이다.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21~13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권능을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능치못할 일이 없는 믿음의 힘이다.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 있고 영광스러운 힘을 나타낸다.
영의 세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다. 따라서 권세란 성결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의 악과 비진리를 온전히 버린 성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권세를 받을 수 있다.
2019-04-26
제17과빛
요한일서 1:5
읽을말씀 : 요한일서 1:5 | 외울말씀 : 요한일서 1:5 ㅣ 참고 말씀: 요한복음 1:1
교육목표 : 영적인 빛이 무엇인지 알아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한다.
빛에는 참으로 신비한 능력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둠을 밝혀 주고 따뜻하게 해 주며 세균, 곰팡이를 죽이기도 합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빛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만약 세상에 빛이 없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도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빛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육적인 빛도 있지만 영적인 빛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육적인 빛이 여러 가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영적인 빛 안에는 무한한 능력이 담겨 있지요.
캄캄한 방 안에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우리 삶에 영적인 빛이 임하면 영적인 어둠이 물러갑니다. 영적인 어둠이 있으면 질병이나 가족, 사업터, 일터, 사람과의 문제 등으로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빛이 임하여 어둠이 물러가면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이 다 사라지게 되지요.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다 풀어지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1. 영적인 빛과 어둠이란?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셨습니다. 빛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진리이고, 선이며 사랑이지요. 반대로 어둠은 영적으로 비진리, 불의, 불법, 악 등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선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 다 어둠이지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빛과 어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하라”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상대를 섬기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는 것들이지요.
다음은 “지키라”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들이 있지요.
또한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분쟁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자기 유익을 구치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시기 질투하지 말라, 수군거리지 말라”는 말씀들이지요.
마지막으로 “버리라”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는 것들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라’ 하신 것을 하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며,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을 버리는 것이 빛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지 않으며,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버리라’ 하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은 어둠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말씀에 벗어나 어둠 안에 거하는 것이지요.
빛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지만 어둠의 세계는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므로 어둠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지요. 따라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어둠의 세계에서 나와 빛의 세계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할 때의 축복
여러분은 지금 빛과 어둠 중 어느 세계에 속해 계십니까?
만일 시험과 환난이 끊이지 않는다면 ‘내가 어둠 가운데 있지는 않은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법을 어기면 그 대가를 받는 것처럼 영계에서도 어둠에 거하는 것이 곧 죄요, 불법이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즉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 주는 갖가지 시험 환난과 질병과 재앙과 문제들을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무서운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거하면 이때부터는 원수 마귀 사단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바로 빛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거하여 영혼이 잘된 사람에게는 모든 저주가 떠나게 하시고 강건함은 물론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할 때 모든 저주가 떠나고 축복이 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빛이 임해 역사하던 어둠의 세력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고 해서 어둠이 물러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면 어둠의 세력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리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둠을 물리치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해야 하지요. 그럴 때 원수 마귀 사단도 두려워 물러가면서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빛의 권세와 능력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등을 하나 켰을 때와 열 개를 켰을 때의 빛의 밝기는 전혀 다릅니다. 태양 빛이 다르고 달빛이 다르며 별과 별들의 빛도 서로 다르지요. 아무리 많은 별들이 있다 해도 태양 빛 하나만큼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만큼 즉, 빛이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만큼 우리의 빛도 밝아지게 되지요. 빛이 밝을수록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는 권세와 능력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권세와 능력이 큰 사람이 기도할 때는 자신의 문제만 해결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이지요. 또한 어둠이 물러가면서 빛이 임하게 되니 하나님의 축복도 임하는 것입니다.
3. 과연 나는 빛 가운데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말씀대로 산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분명히 그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물론 사귐에도 깊이가 다 다릅니다. 단지 얼굴만 아는 정도에서 시작해서 서로 깊은 비밀까지도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있지요. 우리가 새신자나 어린아이의 신앙의 단계가 아니라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사귐도 더욱 깊은 관계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부모가 무조건 돌봐 주지만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가면 당연히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 자녀 간의 사귐도 더 깊어지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자녀 된 우리 사이에도 세월이 더해질수록 더 깊은 사귐의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생활을 오래했고 직분은 있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어려움과 시험 가운데 있다면, ‘내가 과연 빛 가운데 바르게 살고 있는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설령 어떤 문제는 없다 해도 오랫동안 정체되어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의 음성과 주관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악의 모양을 버렸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여 장성한 아비의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있는 세세한 악의 모양까지도 철저히 발견하여 뽑아 버려야 하겠습니다. 윗사람이 되고 권세가 생길수록 더욱 마음을 낮추며 소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겸손히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설령, 상대가 나에게 악을 행한다 해도 감정을 품지 않고 덕과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하지요. 더구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의 가운데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여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범사에 형통함과 축복을 받고 온전히 성결되어 하나님 마음에 합하면 권능까지 받아 크게 쓰임 받게 되지요.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진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는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빛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2. 영적으로 어둠은 무엇을 말할까요?
3.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95~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1.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2.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3.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4.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교육목표 : 영적인 빛이 무엇인지 알아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한다.
빛에는 참으로 신비한 능력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둠을 밝혀 주고 따뜻하게 해 주며 세균, 곰팡이를 죽이기도 합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빛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만약 세상에 빛이 없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도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빛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육적인 빛도 있지만 영적인 빛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육적인 빛이 여러 가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영적인 빛 안에는 무한한 능력이 담겨 있지요.
캄캄한 방 안에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우리 삶에 영적인 빛이 임하면 영적인 어둠이 물러갑니다. 영적인 어둠이 있으면 질병이나 가족, 사업터, 일터, 사람과의 문제 등으로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빛이 임하여 어둠이 물러가면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이 다 사라지게 되지요.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다 풀어지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1. 영적인 빛과 어둠이란?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셨습니다. 빛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진리이고, 선이며 사랑이지요. 반대로 어둠은 영적으로 비진리, 불의, 불법, 악 등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선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 다 어둠이지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빛과 어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하라”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상대를 섬기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는 것들이지요.
다음은 “지키라”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들이 있지요.
또한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분쟁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자기 유익을 구치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시기 질투하지 말라, 수군거리지 말라”는 말씀들이지요.
마지막으로 “버리라”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는 것들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라’ 하신 것을 하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며,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을 버리는 것이 빛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지 않으며,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버리라’ 하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은 어둠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말씀에 벗어나 어둠 안에 거하는 것이지요.
빛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지만 어둠의 세계는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므로 어둠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지요. 따라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어둠의 세계에서 나와 빛의 세계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할 때의 축복
여러분은 지금 빛과 어둠 중 어느 세계에 속해 계십니까?
만일 시험과 환난이 끊이지 않는다면 ‘내가 어둠 가운데 있지는 않은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법을 어기면 그 대가를 받는 것처럼 영계에서도 어둠에 거하는 것이 곧 죄요, 불법이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즉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 주는 갖가지 시험 환난과 질병과 재앙과 문제들을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무서운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거하면 이때부터는 원수 마귀 사단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바로 빛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거하여 영혼이 잘된 사람에게는 모든 저주가 떠나게 하시고 강건함은 물론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할 때 모든 저주가 떠나고 축복이 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빛이 임해 역사하던 어둠의 세력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고 해서 어둠이 물러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면 어둠의 세력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리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둠을 물리치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해야 하지요. 그럴 때 원수 마귀 사단도 두려워 물러가면서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빛의 권세와 능력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등을 하나 켰을 때와 열 개를 켰을 때의 빛의 밝기는 전혀 다릅니다. 태양 빛이 다르고 달빛이 다르며 별과 별들의 빛도 서로 다르지요. 아무리 많은 별들이 있다 해도 태양 빛 하나만큼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만큼 즉, 빛이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만큼 우리의 빛도 밝아지게 되지요. 빛이 밝을수록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는 권세와 능력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권세와 능력이 큰 사람이 기도할 때는 자신의 문제만 해결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이지요. 또한 어둠이 물러가면서 빛이 임하게 되니 하나님의 축복도 임하는 것입니다.
3. 과연 나는 빛 가운데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말씀대로 산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분명히 그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물론 사귐에도 깊이가 다 다릅니다. 단지 얼굴만 아는 정도에서 시작해서 서로 깊은 비밀까지도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있지요. 우리가 새신자나 어린아이의 신앙의 단계가 아니라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사귐도 더욱 깊은 관계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부모가 무조건 돌봐 주지만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가면 당연히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 자녀 간의 사귐도 더 깊어지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자녀 된 우리 사이에도 세월이 더해질수록 더 깊은 사귐의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생활을 오래했고 직분은 있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어려움과 시험 가운데 있다면, ‘내가 과연 빛 가운데 바르게 살고 있는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설령 어떤 문제는 없다 해도 오랫동안 정체되어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의 음성과 주관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악의 모양을 버렸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여 장성한 아비의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있는 세세한 악의 모양까지도 철저히 발견하여 뽑아 버려야 하겠습니다. 윗사람이 되고 권세가 생길수록 더욱 마음을 낮추며 소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겸손히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설령, 상대가 나에게 악을 행한다 해도 감정을 품지 않고 덕과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하지요. 더구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의 가운데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여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범사에 형통함과 축복을 받고 온전히 성결되어 하나님 마음에 합하면 권능까지 받아 크게 쓰임 받게 되지요.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진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는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빛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2. 영적으로 어둠은 무엇을 말할까요?
3.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95~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1.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2.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3.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4.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2019-04-19
제16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한복음 11:25~2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25~2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1:25 ㅣ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교육목표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부활절은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부활과 영생,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은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큰 소리로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창조주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몸의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 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고,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한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거듭나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으실 이유도, 십자가 처형으로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지만, 온 인류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 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 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지상 재림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답하려면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도록 신부단장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한 끼 이상 금식과 감사 기도드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적인 부활’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목표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부활절은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부활과 영생,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은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큰 소리로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창조주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몸의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 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고,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한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거듭나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으실 이유도, 십자가 처형으로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지만, 온 인류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 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 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지상 재림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답하려면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도록 신부단장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한 끼 이상 금식과 감사 기도드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적인 부활’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2019-04-12
제15과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
디모데후서 2:20~21
읽을말씀 : 디모데후서 2:20~21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2:20~21 ㅣ 참고 말씀: 예레미야 17:9
교육목표 :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받고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릇에 비유한 이유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했습니다.
그릇의 원래 용도는 무엇인가를 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릇으로 비유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담을 수 있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하나님의 권능도 담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그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각양 좋은 은사들과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집에는 그릇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영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은 빛나는 영혼을 발견하면 너무 기뻐하시며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고 더욱 많은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이와 같은 참된 자녀들을 그릇에 비유한다면 바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2.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면
1)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여 성결을 이루어야 합니다
값비싼 금그릇이 보기에는 좋다 해도 만약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이 묻어 있다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로 씻어 모든 더러움을 제거한 후에야 그릇으로서 사용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응답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와 각양의 은사들, 그리고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등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셨는데 이러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한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했고, 마태복음 15장 18~19절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나님 앞에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씻는 것은 바로 영적인 물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지요. 에베소서 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깨끗이 씻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말씀에는 씻는 작용을 하는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행하면 마음에 있는 더러운 죄성들과 악성들이 버려지니 자연히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면 몸의 행실도 거룩해지고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되지요.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혈기 부리던 사람이 혈기 부리지 않는 사람으로, 속이던 사람이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남을 때리던 사람이 때리지 않는 사람으로, 도적질하던 사람이 도적질하지 않고 도리어 값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겨지면 겉도 깨끗한 진리의 행함이 나옵니다.
혹여 ‘어떻게 성경의 그 많은 계명을 다 지켜 행할 수 있을까?’ 하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요일 5:3).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하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지 힘들거나 짜증스럽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지요. 오히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위배했을 때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2) 연단을 잘 받아 영적 빛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반지나 목걸이를 만드는 원석에는 불순물들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전문가의 손에 연마된 후에는 아름답고 찬란한 보석으로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육 간에 축복을 주시기 위해 때때로 연단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무슨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시련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고 큰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이 있어 시험 환난을 당한다면 축복을 위한 연단이 아닙니다. 이때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우쳐 신속히 회개해야 어려움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 해도 때를 좇아 연단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으신 거룩한 빛 자체이시니 사랑하는 자녀들도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의 차원에 이르도록 단련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의 연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고 선과 사랑으로 채우면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빛의 강도가 커짐에 따라 그 권세와 능력도 더 크게 나타나지요.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내쫓지 못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자 즉시 나가고 아이가 온전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은 그들의 영적 빛과 예수님의 영적 빛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밝은 영적 빛의 차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며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연단 가운데서도 믿음과 선, 사랑과 의가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면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귀신도 제어할 수 있고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도 고칠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의 경우를 보면,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오면서 참으로 많은 연단과 고통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특히 목회자로서 죽음과 같은 시련을 겪어야 했지요. 가족처럼 대해 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고 아무 잘못이 없는 데도 큰 죄를 범한 죄인인 양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심히 어렵게 만들고 떠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당회장님은 마음에서 조금도 그들에 대해 싫어버린 바 되지 않았고, 어찌하든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습니다. 일꾼들에게는 악으로 갚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시며, 어떠한 악을 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과 사랑으로만 대하셨습니다.
이러한 당회장님의 믿음과 선과 사랑과 의가 연단을 통해 하나님 앞에, 원수 마귀 앞에 확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더 크고 놀라운 권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세계선교의 문을 활짝 여시고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모인 가운데 집회를 인도하시며, 시공간을 초월한 권능을 베푸셨지요.
영적인 빛으로 둘러싸인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라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성결을 이룸으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 앞에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진리인 하나님 ( )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여 ( )을 이루어야 한다.
② ( )을 잘 받아 영적 ( )을 낼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깨끗이 씻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77~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참마음이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는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이는 곧 온 영을 이루었을 때의 마음이다.
온전한 믿음이란?
참마음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인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즉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참 믿음이다.
교육목표 :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받고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릇에 비유한 이유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했습니다.
그릇의 원래 용도는 무엇인가를 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릇으로 비유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담을 수 있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하나님의 권능도 담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그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각양 좋은 은사들과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집에는 그릇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영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은 빛나는 영혼을 발견하면 너무 기뻐하시며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고 더욱 많은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이와 같은 참된 자녀들을 그릇에 비유한다면 바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2.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면
1)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여 성결을 이루어야 합니다
값비싼 금그릇이 보기에는 좋다 해도 만약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이 묻어 있다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로 씻어 모든 더러움을 제거한 후에야 그릇으로서 사용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응답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와 각양의 은사들, 그리고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등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셨는데 이러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한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했고, 마태복음 15장 18~19절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나님 앞에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씻는 것은 바로 영적인 물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지요. 에베소서 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깨끗이 씻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말씀에는 씻는 작용을 하는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행하면 마음에 있는 더러운 죄성들과 악성들이 버려지니 자연히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면 몸의 행실도 거룩해지고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되지요.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혈기 부리던 사람이 혈기 부리지 않는 사람으로, 속이던 사람이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남을 때리던 사람이 때리지 않는 사람으로, 도적질하던 사람이 도적질하지 않고 도리어 값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겨지면 겉도 깨끗한 진리의 행함이 나옵니다.
혹여 ‘어떻게 성경의 그 많은 계명을 다 지켜 행할 수 있을까?’ 하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요일 5:3).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하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지 힘들거나 짜증스럽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지요. 오히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위배했을 때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2) 연단을 잘 받아 영적 빛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반지나 목걸이를 만드는 원석에는 불순물들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전문가의 손에 연마된 후에는 아름답고 찬란한 보석으로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육 간에 축복을 주시기 위해 때때로 연단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무슨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시련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고 큰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이 있어 시험 환난을 당한다면 축복을 위한 연단이 아닙니다. 이때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우쳐 신속히 회개해야 어려움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 해도 때를 좇아 연단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으신 거룩한 빛 자체이시니 사랑하는 자녀들도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의 차원에 이르도록 단련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의 연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고 선과 사랑으로 채우면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빛의 강도가 커짐에 따라 그 권세와 능력도 더 크게 나타나지요.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내쫓지 못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자 즉시 나가고 아이가 온전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은 그들의 영적 빛과 예수님의 영적 빛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밝은 영적 빛의 차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며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연단 가운데서도 믿음과 선, 사랑과 의가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면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귀신도 제어할 수 있고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도 고칠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의 경우를 보면,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오면서 참으로 많은 연단과 고통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특히 목회자로서 죽음과 같은 시련을 겪어야 했지요. 가족처럼 대해 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고 아무 잘못이 없는 데도 큰 죄를 범한 죄인인 양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심히 어렵게 만들고 떠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당회장님은 마음에서 조금도 그들에 대해 싫어버린 바 되지 않았고, 어찌하든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습니다. 일꾼들에게는 악으로 갚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시며, 어떠한 악을 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과 사랑으로만 대하셨습니다.
이러한 당회장님의 믿음과 선과 사랑과 의가 연단을 통해 하나님 앞에, 원수 마귀 앞에 확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더 크고 놀라운 권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세계선교의 문을 활짝 여시고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모인 가운데 집회를 인도하시며, 시공간을 초월한 권능을 베푸셨지요.
영적인 빛으로 둘러싸인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라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성결을 이룸으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 앞에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진리인 하나님 ( )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여 ( )을 이루어야 한다.
② ( )을 잘 받아 영적 ( )을 낼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깨끗이 씻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77~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참마음이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는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이는 곧 온 영을 이루었을 때의 마음이다.
온전한 믿음이란?
참마음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인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즉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참 믿음이다.
2019-04-05
제14과주님을 믿는다는 것
히브리서 12:1~2
읽을말씀 : 히브리서 12:1~2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5:21 ㅣ 참고 말씀: 레위기 25:23~28
교육목표 :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자격 조건과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참된 믿음의 증거를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만세 전에 감추어진 인간 구원의 섭리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좇아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가 들어왔고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 역시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세주의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토지 무르기 법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항상 사랑과 공의 가운데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라 해도 국가의 법을 따르듯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기록된 영계의 법칙에 따라 다스리십니다.
영계의 법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법 곧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용서하는 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원수 마귀에게 넘어간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창 1:28), 그의 불순종으로 그가 가진 모든 권세와 영광이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눅 4:6~7). 이렇게 사망에 이르게 된 모든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아담이 누렸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스라엘 토지 무르기 법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레 25:23~28). 즉 토지는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할지라도 그 근족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게 하는 법이지요. 다시 말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규정하여 그대로 행하면 토지를 되돌려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 법에 의하면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사람이 영영히 팔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물러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천하 만물도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아담에게 넘겨받은 권세를 마귀가 영영히 소유할 수는 없지요. 아담의 죄를 대속할 만한 합당한 자가 나타나면 그 권세를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토지 무르기 법에 따라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어떻게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로, 사람이어야 합니다.
레위기 25장 25절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했습니다. 아담이 넘겨준 권세를 되찾아 오기 위해서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하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했습니다. 즉 사망이 사람인 아담으로 인하여 왔으니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합니다(요 1:14).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려면 죄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예는 구세주의 조건에 합당치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남녀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신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마 1:18). 그러니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죄가 없으십니다.
셋째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그것을 무르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은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빚을 갚아 줄 수 없지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곧 힘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시므로 원죄가 없고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지요. 이처럼 죄가 없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를 굴복시키며 사망까지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넷째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토지 무르기가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위의 세 가지 조건 외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여도 사랑이 없으면 빚더미에 오른 동생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사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셨지요. 이로 인해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리로 변화되는 것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질병, 연약함, 가난 등 온갖 저주에서도 놓인 바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셔서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셨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셔서 우리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손과 발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고 시험 환난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죄를 버리지 않고 진리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락을 즐기는가 하면 아예 지키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알면서도 아까워 일부만 드리거나 아예 드리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니(말 3:8) 어찌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치 않고 혈기를 내며 되갚아 주고자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원망하고 탄식하지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해야지요.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악한 말을 내던 입술이 선한 말을 하는 입술로, 매사에 불평하던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에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심으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인생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 나가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네 가지 자격 조건을 써보세요.
① ( )이어야 한다.
②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③ ( )이 있어야 한다.
④ 사랑이 있어야 한다.
2. 사망에 이르게 된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아 첫 사람 아담이 누렸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57~7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의 중요성’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한다는 믿음의 표현이며,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함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를 내보일 때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며 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해 주실 수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와 주일 성수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며, 구원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분야이다.
교육목표 :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자격 조건과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참된 믿음의 증거를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만세 전에 감추어진 인간 구원의 섭리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좇아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가 들어왔고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 역시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세주의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토지 무르기 법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항상 사랑과 공의 가운데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라 해도 국가의 법을 따르듯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기록된 영계의 법칙에 따라 다스리십니다.
영계의 법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법 곧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용서하는 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원수 마귀에게 넘어간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창 1:28), 그의 불순종으로 그가 가진 모든 권세와 영광이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눅 4:6~7). 이렇게 사망에 이르게 된 모든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아담이 누렸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스라엘 토지 무르기 법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레 25:23~28). 즉 토지는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할지라도 그 근족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게 하는 법이지요. 다시 말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규정하여 그대로 행하면 토지를 되돌려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 법에 의하면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사람이 영영히 팔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물러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천하 만물도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아담에게 넘겨받은 권세를 마귀가 영영히 소유할 수는 없지요. 아담의 죄를 대속할 만한 합당한 자가 나타나면 그 권세를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토지 무르기 법에 따라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어떻게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로, 사람이어야 합니다.
레위기 25장 25절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했습니다. 아담이 넘겨준 권세를 되찾아 오기 위해서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하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했습니다. 즉 사망이 사람인 아담으로 인하여 왔으니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합니다(요 1:14).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려면 죄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예는 구세주의 조건에 합당치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남녀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신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마 1:18). 그러니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죄가 없으십니다.
셋째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그것을 무르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은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빚을 갚아 줄 수 없지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곧 힘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시므로 원죄가 없고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지요. 이처럼 죄가 없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를 굴복시키며 사망까지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넷째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토지 무르기가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위의 세 가지 조건 외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여도 사랑이 없으면 빚더미에 오른 동생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사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셨지요. 이로 인해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리로 변화되는 것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질병, 연약함, 가난 등 온갖 저주에서도 놓인 바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셔서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셨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셔서 우리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손과 발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고 시험 환난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죄를 버리지 않고 진리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락을 즐기는가 하면 아예 지키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알면서도 아까워 일부만 드리거나 아예 드리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니(말 3:8) 어찌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치 않고 혈기를 내며 되갚아 주고자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원망하고 탄식하지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해야지요.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악한 말을 내던 입술이 선한 말을 하는 입술로, 매사에 불평하던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에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심으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인생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 나가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네 가지 자격 조건을 써보세요.
① ( )이어야 한다.
②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③ ( )이 있어야 한다.
④ 사랑이 있어야 한다.
2. 사망에 이르게 된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아 첫 사람 아담이 누렸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57~7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의 중요성’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한다는 믿음의 표현이며,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함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를 내보일 때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며 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해 주실 수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와 주일 성수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며, 구원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분야이다.
2019-03-29
제13과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히브리서 11:3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3 | 외울말씀 : 로마서 1:20 ㅣ 참고 말씀: 창세기 1:1
교육목표 :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입니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한정된 사람의 식견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1) 하나님은 성경 66권의 저자가 되십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했습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은 약 1600년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시대마다 합당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함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직접 계시하신 것이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마다 약속하신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만들어진 시점이 있고 역사도 그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도 어떻게 존재하게 되셨는지 시작이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시작이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손으로 조각한 우상과는 달리 영원 전부터 계신 참 신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낳거나 지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완전한 분이 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계획하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요 1:1, 창 1:1).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무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지요. 사람 역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음 받았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이 땅에서 경작받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각 시대마다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했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맨 처음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 풀과 나무, 새와 각종 짐승과 물고기는 물론 사람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까닭은 창조라는 것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경험과 너무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생물체가 저절로 발생하고 진화되어 오늘날과 같이 번성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론과 지식의 틀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지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창조의 증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백인, 흑인, 황인 모든 사람의 눈과 귀는 두 개에, 코 하나에 콧구멍은 두 개이지요. 육지의 짐승, 하늘을 나는 새, 바다의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종(種)들의 구조나 각각의 위치가 약간 다를 수는 있지만 대동소이하지요.
이러한 사실이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습니까? 수많은 동물이 동일한 구조를 가진 것은 이를 설계하고 지은 창조주가 한 분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신이 여럿이라면 각 생물들의 생김새나 구조를 얼마든지 다양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에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밖에도 자연과 우주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창조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신 말씀대로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연 속에 아무리 많은 증거들이 있어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있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권능의 역사들이지요. 즉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기사와 표적들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
성경을 보면 신기하고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수없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태양이 운행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가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도 하고, 먹지 못할 쓴물이 먹을 수 있는 단물로 바뀌며, 반석을 치니 물이 솟아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각종 질병들이 치료되며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사와 표적과 권능의 역사들을 합당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1982년 개척 이후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통해 기사와 표적, 권능의 역사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종 암을 비롯하여 결핵, 당뇨병, 뇌성마비, 디스크, 에이즈, 문둥병, 백혈병 등 불치, 난치병이 믿음으로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온전케 되고, 소아마비, 교통사고나 각종 사고로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도 기도받고 그 자리에서 걷고 뛰었습니다.
또한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기도받은 즉시 화기가 물러가고 흉터 없이 깨끗해졌습니다. 이미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 기도받고 살아나며, 잉태하지 못했던 사람이 기도받고 잉태하여 건강한 아이를 낳은 경우도 무수합니다. 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온전해졌습니다.
이 외에도 비가 멈추고 태풍이 물러가는 등 천기까지도 믿음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항상 체험하고 있습니다. 매년 7, 8월 전국에 태풍이나 장마로 많은 비가 내려도 수련회 장소만은 비가 내리지 않고 맑았지요. 하늘에서 수많은 잠자리가 내려와 모기를 소탕해 주고, 비 온 뒤에나 볼 수 있는 무지개를 맑은 하늘에서 지금도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던 것처럼, 당회장님께서 기도해 주신 권능의 손수건을 통해 수많은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사진이나 이름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도 치료와 응답받는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지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누구나 권능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믿는구나.” 하고 인정해 주셔야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가 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참 믿음의 시작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2.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창조의 증거들은 무엇일까요?
3. 자신이 체험한 기사와 표적, 권능의 역사를 전하고 있나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37~5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으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된다. 구름을 움직이고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를 말한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역사이다.
교육목표 :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입니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한정된 사람의 식견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1) 하나님은 성경 66권의 저자가 되십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했습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은 약 1600년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시대마다 합당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함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직접 계시하신 것이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마다 약속하신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만들어진 시점이 있고 역사도 그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도 어떻게 존재하게 되셨는지 시작이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시작이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손으로 조각한 우상과는 달리 영원 전부터 계신 참 신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낳거나 지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완전한 분이 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계획하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요 1:1, 창 1:1).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무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지요. 사람 역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음 받았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이 땅에서 경작받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각 시대마다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했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맨 처음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 풀과 나무, 새와 각종 짐승과 물고기는 물론 사람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까닭은 창조라는 것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경험과 너무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생물체가 저절로 발생하고 진화되어 오늘날과 같이 번성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론과 지식의 틀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지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창조의 증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백인, 흑인, 황인 모든 사람의 눈과 귀는 두 개에, 코 하나에 콧구멍은 두 개이지요. 육지의 짐승, 하늘을 나는 새, 바다의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종(種)들의 구조나 각각의 위치가 약간 다를 수는 있지만 대동소이하지요.
이러한 사실이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습니까? 수많은 동물이 동일한 구조를 가진 것은 이를 설계하고 지은 창조주가 한 분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신이 여럿이라면 각 생물들의 생김새나 구조를 얼마든지 다양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에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밖에도 자연과 우주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창조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신 말씀대로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연 속에 아무리 많은 증거들이 있어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있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권능의 역사들이지요. 즉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기사와 표적들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
성경을 보면 신기하고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수없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태양이 운행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가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도 하고, 먹지 못할 쓴물이 먹을 수 있는 단물로 바뀌며, 반석을 치니 물이 솟아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각종 질병들이 치료되며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사와 표적과 권능의 역사들을 합당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1982년 개척 이후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통해 기사와 표적, 권능의 역사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종 암을 비롯하여 결핵, 당뇨병, 뇌성마비, 디스크, 에이즈, 문둥병, 백혈병 등 불치, 난치병이 믿음으로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온전케 되고, 소아마비, 교통사고나 각종 사고로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도 기도받고 그 자리에서 걷고 뛰었습니다.
또한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기도받은 즉시 화기가 물러가고 흉터 없이 깨끗해졌습니다. 이미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 기도받고 살아나며, 잉태하지 못했던 사람이 기도받고 잉태하여 건강한 아이를 낳은 경우도 무수합니다. 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온전해졌습니다.
이 외에도 비가 멈추고 태풍이 물러가는 등 천기까지도 믿음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항상 체험하고 있습니다. 매년 7, 8월 전국에 태풍이나 장마로 많은 비가 내려도 수련회 장소만은 비가 내리지 않고 맑았지요. 하늘에서 수많은 잠자리가 내려와 모기를 소탕해 주고, 비 온 뒤에나 볼 수 있는 무지개를 맑은 하늘에서 지금도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던 것처럼, 당회장님께서 기도해 주신 권능의 손수건을 통해 수많은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사진이나 이름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도 치료와 응답받는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지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누구나 권능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믿는구나.” 하고 인정해 주셔야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가 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참 믿음의 시작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2.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창조의 증거들은 무엇일까요?
3. 자신이 체험한 기사와 표적, 권능의 역사를 전하고 있나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37~5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으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된다. 구름을 움직이고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를 말한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역사이다.
2019-03-22
제12과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3)
에베소서 6:10~18
읽을말씀 : 에베소서 6:10~18 | 외울말씀 : 에베소서 6:18 ㅣ 참고 말씀: 히브리서 11:6
교육목표 :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무장한 영적 장수가 되어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한다.
1.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모든 화전을 소멸하라(16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려면 16절에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했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고 그 위에 허리띠와 흉배와 신을 갖추었다 해도 적이 칼이나 창으로 공격할 때 막아낼 방패가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방패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또한 화전이란 화살 끝에 불을 붙인 불화살을 말하는데 일단 불붙은 화살이 몸에 닿게 되면 아무리 갑옷을 입었다 해도 큰 화를 당하지요. 이러한 상황들을 대비하기 위해서 반드시 방패가 있어야 하는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의 불같은 공격을 막아내려면 영적인 방패가 있어야 하지요.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후, 믿음으로써 방패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며, 믿음으로만이 구원받을 수 있고, 믿음이 있을 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히 11:6),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시 37:4).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죽음 앞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을 내보였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사자 굴 속에 들어간다 해도,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들어간다 해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지요. 이들이 가진 믿음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벼랑 끝까지 밀려가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이제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겠지.’ 하는 조건부적인 믿음이 아니었지요.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때쯤 되면 하나님이 구해 주실 거야.’ 하지 않았습니다. 번연히 죽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좇았지요. 이는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서도 변함없는 참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자신에게 맞춰 한계선을 그어 놓고 그 선까지는 믿음을 지키는 것처럼 하다가도 그 한계를 넘는 상황이 발생하면 결국 세상을 의지합니다. 벼랑 끝까지 밀려간 것도 아닌데 이러다가는 정말 떨어지겠다 싶은 상황이 되면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지요.
참 믿음은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떨어져야 한다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벼랑에서 떨어지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참으로 ‘믿음이 있다.’ 인정하시지요. 이 믿음만 가진다면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고 어떤 마귀의 궤계라도 이기지 못할 것이 없지요. 이런 믿음으로 방패를 삼을 때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할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처럼 중요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려면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믿음이란 당장 현실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순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요, 이렇게 순종할 때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여호사밧왕은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이 유다를 공격해 왔을 때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하며, 거룩한 예복을 입힌 성가대를 군대 앞에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케 했습니다(대하 20장).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의 방패가 있었기에 순종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적군 안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살육하여 자멸되도록 역사하셨고, 이 일을 통해 모든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되며, 원수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2.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이어지는 17절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기 위하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투구란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입니다. 머리는 사람의 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으로써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를 삼으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능력을 행하고 많은 하나님의 일들을 했다 해도 구원받지 못하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되지요.
우리가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쓰듯이, 참된 구원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 역시 변함없이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구원에 이르고,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감사와 소망이 있는 사람의 눈은 기쁨으로 빛날 것이고,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가득하며, 입술은 찬양이 넘쳐나고, 그 귀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소식들을 듣기 즐거워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즐겨하며 주를 사랑하여 생명 다해 충성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으로 인해 우리 삶 속에 변화되어지는 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히 4:12) 성령의 검을 삼게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단번에 분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으실 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검처럼 사용하셔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물리치셨습니다(마 4:1~11). 바로 이 말씀의 검만이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리고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믿음의 반석에 서게 되면 원수 마귀의 어떠한 궤계라도 말씀으로 분별하여 결코 흔들리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가지면 그들의 궤계를 물리치며 사단의 진을 분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온전히 양식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든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겉모습만 보고 대화하면 내 생각이나 지식 가운데서 말씀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내 안에 양식이 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함으로 역사되면 상대의 혼 영 및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권세 있는 말씀이 나오지요. 바로 이렇게 할 때 상대의 비진리의 마음을 통해 역사하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영으로 온전히 양식되어 활용된다면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는 무기가 되는 것이지요.
3.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구하라(18절)
18절에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듣고 알았다 해도 이를 취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항상 깨어 구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마지막 단계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전신갑주를 취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지요. 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 해도 잠들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 준비된 상태로 유지해 줍니다. 따라서 영적 장수가 되려면 무시로 성령 안에서 항상 힘써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여 불같이 기도해 나갈 때 하나님 나라는 힘 있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성도가 불같이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 항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세력들과 싸워 이기며, 하나님의 나라에 기둥과 같이 쓰임 받는 영적 장수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원수 마귀 사단의 불같은 공격을 막아내려면 영적인 방패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 )으로써 방패를 삼으라 말씀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 )으로써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를 삼으라 하셨다.
3.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 )으로 성령의 ( )을 삼게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단번에 분쇄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5~3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세 차례 시험이 주는 교훈’(마 4:1~11)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으셨는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세 차례의 시험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대표적인 시험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1.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시험 : 탐심 곧 탐욕에 대한 것이다.
2.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 교만함에 대한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이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 : 세상의 영광에 대한 것이다.
교육목표 :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무장한 영적 장수가 되어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한다.
1.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모든 화전을 소멸하라(16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려면 16절에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했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고 그 위에 허리띠와 흉배와 신을 갖추었다 해도 적이 칼이나 창으로 공격할 때 막아낼 방패가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방패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또한 화전이란 화살 끝에 불을 붙인 불화살을 말하는데 일단 불붙은 화살이 몸에 닿게 되면 아무리 갑옷을 입었다 해도 큰 화를 당하지요. 이러한 상황들을 대비하기 위해서 반드시 방패가 있어야 하는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의 불같은 공격을 막아내려면 영적인 방패가 있어야 하지요.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후, 믿음으로써 방패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며, 믿음으로만이 구원받을 수 있고, 믿음이 있을 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히 11:6),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시 37:4).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죽음 앞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을 내보였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사자 굴 속에 들어간다 해도,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들어간다 해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지요. 이들이 가진 믿음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벼랑 끝까지 밀려가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이제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겠지.’ 하는 조건부적인 믿음이 아니었지요.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때쯤 되면 하나님이 구해 주실 거야.’ 하지 않았습니다. 번연히 죽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좇았지요. 이는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서도 변함없는 참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자신에게 맞춰 한계선을 그어 놓고 그 선까지는 믿음을 지키는 것처럼 하다가도 그 한계를 넘는 상황이 발생하면 결국 세상을 의지합니다. 벼랑 끝까지 밀려간 것도 아닌데 이러다가는 정말 떨어지겠다 싶은 상황이 되면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지요.
참 믿음은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떨어져야 한다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벼랑에서 떨어지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참으로 ‘믿음이 있다.’ 인정하시지요. 이 믿음만 가진다면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고 어떤 마귀의 궤계라도 이기지 못할 것이 없지요. 이런 믿음으로 방패를 삼을 때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할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처럼 중요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려면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믿음이란 당장 현실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순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요, 이렇게 순종할 때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여호사밧왕은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이 유다를 공격해 왔을 때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하며, 거룩한 예복을 입힌 성가대를 군대 앞에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케 했습니다(대하 20장).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의 방패가 있었기에 순종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적군 안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살육하여 자멸되도록 역사하셨고, 이 일을 통해 모든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되며, 원수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2.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이어지는 17절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기 위하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투구란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입니다. 머리는 사람의 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으로써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를 삼으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능력을 행하고 많은 하나님의 일들을 했다 해도 구원받지 못하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되지요.
우리가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쓰듯이, 참된 구원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 역시 변함없이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구원에 이르고,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감사와 소망이 있는 사람의 눈은 기쁨으로 빛날 것이고,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가득하며, 입술은 찬양이 넘쳐나고, 그 귀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소식들을 듣기 즐거워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즐겨하며 주를 사랑하여 생명 다해 충성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으로 인해 우리 삶 속에 변화되어지는 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히 4:12) 성령의 검을 삼게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단번에 분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으실 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검처럼 사용하셔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물리치셨습니다(마 4:1~11). 바로 이 말씀의 검만이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리고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믿음의 반석에 서게 되면 원수 마귀의 어떠한 궤계라도 말씀으로 분별하여 결코 흔들리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가지면 그들의 궤계를 물리치며 사단의 진을 분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온전히 양식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든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겉모습만 보고 대화하면 내 생각이나 지식 가운데서 말씀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내 안에 양식이 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함으로 역사되면 상대의 혼 영 및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권세 있는 말씀이 나오지요. 바로 이렇게 할 때 상대의 비진리의 마음을 통해 역사하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영으로 온전히 양식되어 활용된다면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는 무기가 되는 것이지요.
3.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구하라(18절)
18절에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듣고 알았다 해도 이를 취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항상 깨어 구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마지막 단계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전신갑주를 취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지요. 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 해도 잠들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 준비된 상태로 유지해 줍니다. 따라서 영적 장수가 되려면 무시로 성령 안에서 항상 힘써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여 불같이 기도해 나갈 때 하나님 나라는 힘 있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성도가 불같이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 항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세력들과 싸워 이기며, 하나님의 나라에 기둥과 같이 쓰임 받는 영적 장수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원수 마귀 사단의 불같은 공격을 막아내려면 영적인 방패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 )으로써 방패를 삼으라 말씀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 )으로써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를 삼으라 하셨다.
3.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 )으로 성령의 ( )을 삼게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단번에 분쇄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5~3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세 차례 시험이 주는 교훈’(마 4:1~11)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으셨는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세 차례의 시험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대표적인 시험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1.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시험 : 탐심 곧 탐욕에 대한 것이다.
2.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 교만함에 대한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이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 : 세상의 영광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