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501 PAGE : 30/106
2019-08-02
제31과믿음
히브리서 10:22
읽을말씀 : 히브리서 10:22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0:22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오십 퍼센트밖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정말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는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이지요.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줍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지요.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의 경우,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습니다.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다. 또 ( )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43~15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오십 퍼센트밖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정말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는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이지요.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줍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지요.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의 경우,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습니다.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다. 또 ( )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43~15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2019-07-26
제30과순종
빌립보서 2:8
읽을말씀 : 빌립보서 2:8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5:22 ㅣ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19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순종을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지요.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지요(고전 2:7).
예수님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한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히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과부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하여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뤄 주셨습니다. 불과 30살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우리가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시는 당회장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철저한 ( )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 )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 )의 종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21~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순종을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지요.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지요(고전 2:7).
예수님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한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히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과부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하여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뤄 주셨습니다. 불과 30살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우리가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시는 당회장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철저한 ( )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 )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 )의 종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21~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2019-07-19
제29과공의
시편 37:6
읽을말씀 : 시편 37:6 | 외울말씀 : 시편 37:6 ㅣ 참고 말씀: 갈라디아서 6:7
교육목표 :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법칙을 깨달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알고 행할 때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공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말이 있는데 진리 안에서는 공의의 법칙들이 더욱 확실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의의 법칙도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든가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등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만 깨닫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찾아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관자인데도 스스로 공의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든 법칙이니까 나는 안 지켜도 괜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공의에 맞게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을 다 멸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을 계획하면서 공의의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단지 “주여, 믿습니다.” 하며 대충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공의의 양면성
사람들은 흔히 공의는 무섭고 두려우며 징계와 형벌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악에는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따르지만 반면 공의는 응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지만, 빛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열쇠와 같습니다. 칼을 강도가 들었을 때에는 흉기가 되지만, 어머니가 들었을 때에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인 것과 같습니다.
공의의 양면성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됨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빗나가서 잘못했을 때 무조건 체벌한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용서만 해 준다면 자녀를 잘못되게 만듭니다. 공의에 따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무한대 용서의 사랑을 말씀하지요.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시며 참사랑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공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공의가 온전케 되며 공의를 궁구하면 할수록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4. 수준이 다른 공의 차원
공의는 각각의 하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공의의 차원도 더 깊고 넓어지지요. 또한 공의의 차원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랑과 공의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사랑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공의의 차원도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원리가 적용되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며, 용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공의라도 적용되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이 매우 낮은 차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공의를 적용시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낮은 차원의 공의의 법칙을 적용하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는 공의의 차원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얼마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영으로 일구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차원 역시 다릅니다.
5. 공의의 기본 법칙은 믿음과 순종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선과 겸비함 등 많은 응답의 법칙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법칙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응답받는 것이 바로 공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이러한 공의의 법칙대로 행했지요.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위해 지배국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겸비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의 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오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만 나가면 어떤 병도 깨끗이 치료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서운케 하거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하지요.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며, 혈기, 짜증, 감정, 시기, 질투, 다툼, 거짓 등 온갖 악을 품고 행한 것을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기도받을 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대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종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심는 등 응답받기 위해 순종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즉 교만, 자존심, 틀, 생각, 이론, 세상의 자랑,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 등을 다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하나님 공의의 법칙을 하나하나 깨달아 행함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과 그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 )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된다. ( )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 )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9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늘들’
첫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육의 공간이다.
둘째 하늘 - 빛의 영역인 에덴과 어둠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셋째 하늘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있는 곳이다.
넷째 하늘 - 근본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교육목표 :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법칙을 깨달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알고 행할 때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공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말이 있는데 진리 안에서는 공의의 법칙들이 더욱 확실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의의 법칙도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든가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등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만 깨닫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찾아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관자인데도 스스로 공의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든 법칙이니까 나는 안 지켜도 괜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공의에 맞게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을 다 멸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을 계획하면서 공의의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단지 “주여, 믿습니다.” 하며 대충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공의의 양면성
사람들은 흔히 공의는 무섭고 두려우며 징계와 형벌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악에는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따르지만 반면 공의는 응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지만, 빛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열쇠와 같습니다. 칼을 강도가 들었을 때에는 흉기가 되지만, 어머니가 들었을 때에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인 것과 같습니다.
공의의 양면성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됨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빗나가서 잘못했을 때 무조건 체벌한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용서만 해 준다면 자녀를 잘못되게 만듭니다. 공의에 따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무한대 용서의 사랑을 말씀하지요.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시며 참사랑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공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공의가 온전케 되며 공의를 궁구하면 할수록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4. 수준이 다른 공의 차원
공의는 각각의 하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공의의 차원도 더 깊고 넓어지지요. 또한 공의의 차원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랑과 공의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사랑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공의의 차원도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원리가 적용되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며, 용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공의라도 적용되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이 매우 낮은 차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공의를 적용시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낮은 차원의 공의의 법칙을 적용하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는 공의의 차원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얼마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영으로 일구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차원 역시 다릅니다.
5. 공의의 기본 법칙은 믿음과 순종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선과 겸비함 등 많은 응답의 법칙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법칙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응답받는 것이 바로 공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이러한 공의의 법칙대로 행했지요.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위해 지배국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겸비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의 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오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만 나가면 어떤 병도 깨끗이 치료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서운케 하거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하지요.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며, 혈기, 짜증, 감정, 시기, 질투, 다툼, 거짓 등 온갖 악을 품고 행한 것을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기도받을 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대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종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심는 등 응답받기 위해 순종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즉 교만, 자존심, 틀, 생각, 이론, 세상의 자랑,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 등을 다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하나님 공의의 법칙을 하나하나 깨달아 행함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과 그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 )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된다. ( )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 )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9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늘들’
첫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육의 공간이다.
둘째 하늘 - 빛의 영역인 에덴과 어둠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셋째 하늘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있는 곳이다.
넷째 하늘 - 근본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2019-07-12
제28과삼위일체 하나님
마태복음 28:19
읽을말씀 : 마태복음 28:1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28:19 ㅣ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3:13
교육목표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역할을 바로 알아 참된 믿음을 갖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세 분의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격인 성부 하나님, 아들의 격인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의 격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이기에 ‘성 삼위일체’라 표현하지요.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에 대한 비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한적인 사고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낳거나 지은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각과 상상을 초월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광대한 공간 안에 홀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셨습니다(요 1:1, 요일 1:5).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가장 먼저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영의 공간과 육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육의 공간을 나누신 것이지요. 그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행 13:33, 히 5:5),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요 15:26, 갈 4:6). 마치 분신을 만들어 내듯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경작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근본 하나이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도, 생각도, 능력도 하나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질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느끼고 원하시는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도 동일하게 느끼고 원하시지요. 역으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기쁨이나 고통을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십니다. 그런데도 역할에 따라 성품이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자 예수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해 신(神)적 위엄과 공의가 두드러집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인성(人性)적인 면이 더 강하므로 자상하고 섬세하며 자비와 긍휼의 측면을 더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성품이 구별될 뿐 아니라 뚜렷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 다음이 성자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은 그 다음이 되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한 사역 또한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감당하심으로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작의 섭리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1) 구원의 길을 여시는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의 역할은 구세주로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려면 첫째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셋째로,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십자가의 도 책자 참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난 것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셨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으셨지요. 이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게 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불순종한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성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
인간 경작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영을 무수히 분리해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본체는 한 곳에 계실지라도 본체와 똑같은 마음과 능력을 가진 영이 무수히 분리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그 영을 분리하시지만 특별히 성령님이 사역을 하시는 데는 영으로 분리하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이처럼 분리되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부지런히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는 애통하시며 회개해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와 함께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과 각종 은사들을 주셔서 능히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3)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신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자가 되시며,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이며 마지막 때의 심판자 역할을 하십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질서 가운데 정확히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분이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피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과 물과 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어 사역해 믿는 자녀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축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역할을 바로 알아 참된 믿음을 갖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세 분의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격인 성부 하나님, 아들의 격인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의 격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이기에 ‘성 삼위일체’라 표현하지요.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에 대한 비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한적인 사고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낳거나 지은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각과 상상을 초월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광대한 공간 안에 홀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셨습니다(요 1:1, 요일 1:5).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가장 먼저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영의 공간과 육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육의 공간을 나누신 것이지요. 그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행 13:33, 히 5:5),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요 15:26, 갈 4:6). 마치 분신을 만들어 내듯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경작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근본 하나이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도, 생각도, 능력도 하나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질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느끼고 원하시는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도 동일하게 느끼고 원하시지요. 역으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기쁨이나 고통을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십니다. 그런데도 역할에 따라 성품이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자 예수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해 신(神)적 위엄과 공의가 두드러집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인성(人性)적인 면이 더 강하므로 자상하고 섬세하며 자비와 긍휼의 측면을 더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성품이 구별될 뿐 아니라 뚜렷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 다음이 성자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은 그 다음이 되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한 사역 또한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감당하심으로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작의 섭리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1) 구원의 길을 여시는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의 역할은 구세주로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려면 첫째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셋째로,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십자가의 도 책자 참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난 것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셨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으셨지요. 이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게 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불순종한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성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
인간 경작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영을 무수히 분리해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본체는 한 곳에 계실지라도 본체와 똑같은 마음과 능력을 가진 영이 무수히 분리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그 영을 분리하시지만 특별히 성령님이 사역을 하시는 데는 영으로 분리하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이처럼 분리되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부지런히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는 애통하시며 회개해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와 함께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과 각종 은사들을 주셔서 능히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3)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신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자가 되시며,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이며 마지막 때의 심판자 역할을 하십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질서 가운데 정확히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분이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피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과 물과 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어 사역해 믿는 자녀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축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2019-07-05
제27과맥추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23:14~18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8 | 외울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ㅣ 참고 말씀: 신명기 16:10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맥추절을 지키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광활하고 메마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누렇게 익은 밀밭을 볼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이러한 훗날의 일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맥추절은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기를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그러면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절기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임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되지요. 또한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마리아에 비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늘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니십니까? 또는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그 은혜를 곧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의 조건으로 여겨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계시는지요?
2)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맥추절을 지키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광활하고 메마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누렇게 익은 밀밭을 볼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이러한 훗날의 일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맥추절은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기를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그러면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절기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임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되지요. 또한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마리아에 비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늘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니십니까? 또는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그 은혜를 곧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의 조건으로 여겨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계시는지요?
2)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2019-06-28
제26과하늘들
느헤미야 9:6
읽을말씀 : 느헤미야 9:6 | 외울말씀 : 느헤미야 9:6 ㅣ 참고 말씀: 시편 68:33
교육목표 : 모든 하늘들을 지으시고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내보임으로 불가능이 없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9장 6절에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했습니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외에도 여러 하늘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과연 몇 개의 하늘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1. 여러 개의 하늘들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두 개의 하늘까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과 천국 곧 영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하늘을 표현할 때 둘뿐 아니라 여러 개의 하늘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시편 68편 33절에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했고, 열왕기상 8장 27절에는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말씀했지요.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2)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는 것은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과 그 이상의 하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데반 집사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함으로써 사람이 영안이 열리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천국이 실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요.
오늘날에는 과학자들도 하늘이 여럿임을 인정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 교수 맥스 테그마크는 ‘평행 우주론’을 통해 우리가 사는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데 각각의 우주가 물리적 성격 즉 시간과 공간적인 특징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했지요. 이는 곧 여러 하늘이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2.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있는 둘째 하늘
여러 하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하늘과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의 하늘이 첫째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합니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빛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어둠의 영역이 공존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에 대해 나오는데 그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둘째 하늘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하늘에 속한 에덴동산의 동편을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에덴동산 동편은 악한 영의 세계와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에덴동산의 경계선이기 때문입니다. 생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과 첫째 하늘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관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첫째 하늘에 속한 지구를 오갈 수 있었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제약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속한 둘째 하늘의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둘째 하늘에도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사는 육의 세상과 같이 제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람이 늙거나 죽는 일이 없고, 사물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며 어찌 보면 정지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공간 역시 에덴동산에서는 제약 없이 무한하게 펼쳐지지요. 만약 첫째 하늘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고 계속 태어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포화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하늘은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인구가 불어나도 좁아지거나 가득 찰 걱정은 없습니다.
3.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말합니다. 주의 계시와 환상을 밝히 받은 사도 바울은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하며 셋째 하늘에 속한 낙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고후 12:2~4).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 사는 수도가 있는가 하면 중소 도시와 시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도 가장자리라 할 수 있는 낙원부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처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주님을 영접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되찾았는지에 따라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은 둘째 하늘보다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곳입니다.
그래서 첫째 하늘에 사는 사람들의 제한적 사고로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의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기 전에는 풍선 자체의 좁은 면적과 부피가 있지만 얼마나 바람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자유자재로 풍선의 면적과 부피가 변합니다.
천국의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집을 짓는다면 일정한 면적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지을 수 있는 공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셋째 하늘의 공간에서는 면적이나 부피, 길이, 높이 등의 개념을 모두 초월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천국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처소인 넷째 하늘
넷째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 분리 이전에 계시던 근본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기만 하셔도 즉시 이루어지는 곳이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집 안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29).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 홀연히 갈릴리 해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식사하기도 하셨지요(요 21:1~14). 이렇게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오백여 명이 보는 가운데 구름 속으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물며 근본 하나님께서 계시던 넷째 하늘의 공간은 어떻겠습니까. 태초에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품고 다스렸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넷째 하늘에 계시면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등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다스리십니다.
5.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광활하고 신비한 모든 하늘에 비하면 작은 점과 같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생 동안 이런저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풍족한 삶을 위해 아등바등 애씁니다.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통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 세상의 삶이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고 어려울 것도 없지만 첫째 하늘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개미로서는 도무지 옮길 수 없는 큰 짐이라도 사람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옮길 수 있고,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물웅덩이도 사람은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지요. 이같이 개미에게 어렵고 불가능한 일도 사람 편에서는 매우 쉬운 것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며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낙심되는 현실에 처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하여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 하늘이 ( )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한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 )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 )의 영역이 공존한다.
2.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 )을 말한다. ( )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을 분리하기 전에 계시던 근본 하늘을 의미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55~7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낙원’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은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곳이지만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낙원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의 1단계로 상급이나 면류관이 없으며 집도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천국집이 없다고 해서 마냥 잔디밭을 거닐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마을 회관 같은 곳이 있어 여러 사람이 함께 쉬며 사용하듯이, 낙원에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있어 그 안에서 모이고 안락하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교육목표 : 모든 하늘들을 지으시고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내보임으로 불가능이 없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9장 6절에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했습니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외에도 여러 하늘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과연 몇 개의 하늘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1. 여러 개의 하늘들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두 개의 하늘까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과 천국 곧 영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하늘을 표현할 때 둘뿐 아니라 여러 개의 하늘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시편 68편 33절에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했고, 열왕기상 8장 27절에는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말씀했지요.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2)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는 것은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과 그 이상의 하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데반 집사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함으로써 사람이 영안이 열리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천국이 실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요.
오늘날에는 과학자들도 하늘이 여럿임을 인정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 교수 맥스 테그마크는 ‘평행 우주론’을 통해 우리가 사는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데 각각의 우주가 물리적 성격 즉 시간과 공간적인 특징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했지요. 이는 곧 여러 하늘이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2.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있는 둘째 하늘
여러 하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하늘과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의 하늘이 첫째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합니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빛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어둠의 영역이 공존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에 대해 나오는데 그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둘째 하늘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하늘에 속한 에덴동산의 동편을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에덴동산 동편은 악한 영의 세계와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에덴동산의 경계선이기 때문입니다. 생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과 첫째 하늘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관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첫째 하늘에 속한 지구를 오갈 수 있었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제약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속한 둘째 하늘의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둘째 하늘에도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사는 육의 세상과 같이 제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람이 늙거나 죽는 일이 없고, 사물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며 어찌 보면 정지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공간 역시 에덴동산에서는 제약 없이 무한하게 펼쳐지지요. 만약 첫째 하늘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고 계속 태어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포화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하늘은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인구가 불어나도 좁아지거나 가득 찰 걱정은 없습니다.
3.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말합니다. 주의 계시와 환상을 밝히 받은 사도 바울은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하며 셋째 하늘에 속한 낙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고후 12:2~4).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 사는 수도가 있는가 하면 중소 도시와 시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도 가장자리라 할 수 있는 낙원부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처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주님을 영접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되찾았는지에 따라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은 둘째 하늘보다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곳입니다.
그래서 첫째 하늘에 사는 사람들의 제한적 사고로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의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기 전에는 풍선 자체의 좁은 면적과 부피가 있지만 얼마나 바람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자유자재로 풍선의 면적과 부피가 변합니다.
천국의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집을 짓는다면 일정한 면적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지을 수 있는 공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셋째 하늘의 공간에서는 면적이나 부피, 길이, 높이 등의 개념을 모두 초월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천국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처소인 넷째 하늘
넷째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 분리 이전에 계시던 근본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기만 하셔도 즉시 이루어지는 곳이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집 안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29).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 홀연히 갈릴리 해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식사하기도 하셨지요(요 21:1~14). 이렇게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오백여 명이 보는 가운데 구름 속으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물며 근본 하나님께서 계시던 넷째 하늘의 공간은 어떻겠습니까. 태초에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품고 다스렸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넷째 하늘에 계시면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등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다스리십니다.
5.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광활하고 신비한 모든 하늘에 비하면 작은 점과 같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생 동안 이런저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풍족한 삶을 위해 아등바등 애씁니다.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통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 세상의 삶이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고 어려울 것도 없지만 첫째 하늘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개미로서는 도무지 옮길 수 없는 큰 짐이라도 사람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옮길 수 있고,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물웅덩이도 사람은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지요. 이같이 개미에게 어렵고 불가능한 일도 사람 편에서는 매우 쉬운 것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며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낙심되는 현실에 처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하여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 하늘이 ( )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한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 )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 )의 영역이 공존한다.
2.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 )을 말한다. ( )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을 분리하기 전에 계시던 근본 하늘을 의미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55~7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낙원’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은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곳이지만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낙원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의 1단계로 상급이나 면류관이 없으며 집도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천국집이 없다고 해서 마냥 잔디밭을 거닐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마을 회관 같은 곳이 있어 여러 사람이 함께 쉬며 사용하듯이, 낙원에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있어 그 안에서 모이고 안락하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2019-06-21
제25과사람의 근본
요한복음 1:1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 | 외울말씀 : 창세기 2:7 ㅣ 참고 말씀: 로마서 1:20
교육목표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깊이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성인이라고 불리는 공자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힘썼습니다.
공자는 인을 정치, 윤리사상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스스로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며 참다운 지식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여 참된 진리에 이르지 못했으며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진리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우칠 때라야 비로소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사람의 근본
세상에서는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라고 하며 갑론을박을 하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해답이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장성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정자와 난자를 주어 잉태하게 하신 것을 보면 무엇이 먼저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사람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되어진 일이지요. 다시 말해, 아담은 어린 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성인으로 지음을 받은 후 생령이 되었고 하나님을 통해 영의 지식들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사람은 진화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 사람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한낱 하등한 생물에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지어졌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위로부터 난 신령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동물들보다 좀 더 진화된 고등동물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화의 증거로 내세우는 화석을 살펴보아도 종과 종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없으니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의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한 예로,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는 눈, 코, 입 등의 구조와 위치가 같습니다. 각종 동물도 무리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사람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한 분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외에도 태양계 안의 모든 것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되는 사실 자체가 창조의 증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진화되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 깨닫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임을 깨달으면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신지 바로 알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그분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분명히 나를 낳아 주신 분인데….’ 하며 혈연으로 이어진 아버지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조상을 찾아 올라가면 첫 사람 아담이 나오지요. 그러니 우리의 참 아버지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임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인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도구로 빌려 드린 것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와 잉태
이처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정자, 여자에게는 난자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생명의 씨를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씨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의 모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부모의 성격이나 외모, 습관 등 모든 기(氣)가 한 군데로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부모를 닮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능력이 있어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면 왜 많은 사람이 잉태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겠습니까? 잉태는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서 인공수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정자와 난자를 창조해서 잉태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교회뿐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성도가 이러한 사실을 체험했지요. 결혼하여 수년이나 십여 년 이상, 또는 20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여 병원에서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소용이 없던 부부들이 기도를 받은 후, 잉태하여 건강한 자녀를 낳은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례로, 수년 전에 일본에 사는 한 부부가 부흥성회에 오셔서 제게 기도를 받은 후 질병을 치료받음은 물론 잉태의 축복까지 받았지요. 그러한 사실이 주변에 전해지면서 일본에 계시는 많은 분이 기도받기 위해 찾아오셨고, 그분들의 믿음대로 잉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 지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3. 불가능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오늘날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잉태뿐만이 아닙니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나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며, 인간의 과학과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불치병, 난치병이 깨끗이 치료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며, 불가능이 없는 권능의 역사를 펼쳐내지요.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만물을 보아도 그 속에서 우리는 만물의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자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또 믿는다면서도 성경 말씀을 백 퍼센트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심으로써 선포되는 말씀이 참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믿고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됩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눈먼 사람이 보며, 지팡이와 목발과 휠체어를 버리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믿고 순종함으로 모든 간구와 소원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 )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 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 ), 여자에게는 ( )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셨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 )를 주셨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33~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하므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깊이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성인이라고 불리는 공자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힘썼습니다.
공자는 인을 정치, 윤리사상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스스로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며 참다운 지식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여 참된 진리에 이르지 못했으며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진리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우칠 때라야 비로소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사람의 근본
세상에서는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라고 하며 갑론을박을 하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해답이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장성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정자와 난자를 주어 잉태하게 하신 것을 보면 무엇이 먼저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사람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되어진 일이지요. 다시 말해, 아담은 어린 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성인으로 지음을 받은 후 생령이 되었고 하나님을 통해 영의 지식들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사람은 진화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 사람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한낱 하등한 생물에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지어졌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위로부터 난 신령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동물들보다 좀 더 진화된 고등동물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화의 증거로 내세우는 화석을 살펴보아도 종과 종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없으니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의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한 예로,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는 눈, 코, 입 등의 구조와 위치가 같습니다. 각종 동물도 무리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사람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한 분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외에도 태양계 안의 모든 것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되는 사실 자체가 창조의 증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진화되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 깨닫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임을 깨달으면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신지 바로 알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그분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분명히 나를 낳아 주신 분인데….’ 하며 혈연으로 이어진 아버지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조상을 찾아 올라가면 첫 사람 아담이 나오지요. 그러니 우리의 참 아버지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임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인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도구로 빌려 드린 것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와 잉태
이처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정자, 여자에게는 난자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생명의 씨를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씨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의 모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부모의 성격이나 외모, 습관 등 모든 기(氣)가 한 군데로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부모를 닮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능력이 있어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면 왜 많은 사람이 잉태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겠습니까? 잉태는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서 인공수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정자와 난자를 창조해서 잉태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교회뿐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성도가 이러한 사실을 체험했지요. 결혼하여 수년이나 십여 년 이상, 또는 20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여 병원에서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소용이 없던 부부들이 기도를 받은 후, 잉태하여 건강한 자녀를 낳은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례로, 수년 전에 일본에 사는 한 부부가 부흥성회에 오셔서 제게 기도를 받은 후 질병을 치료받음은 물론 잉태의 축복까지 받았지요. 그러한 사실이 주변에 전해지면서 일본에 계시는 많은 분이 기도받기 위해 찾아오셨고, 그분들의 믿음대로 잉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 지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3. 불가능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오늘날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잉태뿐만이 아닙니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나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며, 인간의 과학과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불치병, 난치병이 깨끗이 치료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며, 불가능이 없는 권능의 역사를 펼쳐내지요.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만물을 보아도 그 속에서 우리는 만물의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자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또 믿는다면서도 성경 말씀을 백 퍼센트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심으로써 선포되는 말씀이 참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믿고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됩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눈먼 사람이 보며, 지팡이와 목발과 휠체어를 버리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믿고 순종함으로 모든 간구와 소원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 )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 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 ), 여자에게는 ( )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셨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 )를 주셨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33~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하므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19-06-14
제24과하나님의 근본
요한복음 1:1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 | 외울말씀 : 창세기 1:1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1:5
교육목표 :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을 바로 알아 아비의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광활한 우주 공간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참 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헛된 것을 좇아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참된 삶의 목적과 가치를 모르니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치 뿌리 없는 나무같이 사람의 근본에 대해 모른 채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살아가지요.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을 알고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깨우친다면 누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의 본분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영원 전을 의미하며, 우주 모든 공간 속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 계실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주 모든 공간이란 우리가 아는 거대한 우주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외에 이보다 크고 넓은 공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영원 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되는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질적인 형상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우상을 만드는 등 늘 형상화된 신을 찾지요. 하지만 어찌 사람이 만든 우상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인류 역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러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존재하셨을까요?
어떤 이름이나 형상도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빛과 소리로 존재하셨습니다. 바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다스리셨지요.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빛으로 모든 우주 공간을 두르고 그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으셨습니다. 그 소리가 바로 ‘말씀’입니다.
2. 인간 경작을 계획하신 근본 하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자 한 가지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경작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고 번성하게 하셔서 그들 중에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로 나온 영혼들을 아름다운 천국으로 들여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사시려는 계획’입니다.
이처럼 인간 경작의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준비 작업을 하나하나 이루십니다. 첫 번째가 공간을 나누는 것이었지요. 본디 모든 공간이 하나였는데 인간 경작을 위해 필요에 따라 여럿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간을 분리한 뒤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태초에 근본의 빛과 소리로 존재하시던 근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낳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또는 독생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5절에도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말씀했지요.
이처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근본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오셨고 마음도, 능력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는 예수님에 대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셨지요.
3.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을 입고 계신지도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씀이 단지 겉모습만 그대로 본떴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사람의 근본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진리가 충만한 영적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될 때의 형상을 잃고 점점 죄와 악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것을 믿는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4. 참 자녀를 얻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입으신 후, 분리하신 공간 안에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빛과 소리로 계실 때에는 처소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형상을 입은 뒤에는 처소를 비롯하여 수종드는 천군과 천사 등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영의 공간 안에 우선 영의 존재들을 창조하시고, 루시퍼 배반 이후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이 영의 공간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세월을 함께 지낸 뒤 마침내 육의 공간에도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드신 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있는데도 굳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참 자녀’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서 하나님과 참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천군과 천사는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로봇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고 섬기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지요.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해도 자녀보다 로봇을 더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녀가 더 사랑스럽고 좋지요.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면서 온갖 삶을 체험하며 오직 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시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 의지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그러면서도 변함이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에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인간 경작을 계획하시고, 이를 위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을 밝히 깨달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로 신속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란 과연 언제일까요?
2.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될 텐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신 것일까요?
3.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해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근본의 소리’
창조주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소리이다.
시편 68편 33절에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말씀했는데, 주께서 발하시는 이 웅장한 소리가 근본의 소리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자체로서 이 소리가 발하여질 때 천하 모든 우주 만물이 순종하며 발해진 소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자 그 말씀대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는데 이때 발하셨던 하나님의 소리가 창조의 근본의 소리이다.
교육목표 :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을 바로 알아 아비의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광활한 우주 공간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참 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헛된 것을 좇아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참된 삶의 목적과 가치를 모르니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치 뿌리 없는 나무같이 사람의 근본에 대해 모른 채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살아가지요.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을 알고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깨우친다면 누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의 본분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영원 전을 의미하며, 우주 모든 공간 속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 계실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주 모든 공간이란 우리가 아는 거대한 우주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외에 이보다 크고 넓은 공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영원 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되는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질적인 형상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우상을 만드는 등 늘 형상화된 신을 찾지요. 하지만 어찌 사람이 만든 우상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인류 역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러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존재하셨을까요?
어떤 이름이나 형상도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빛과 소리로 존재하셨습니다. 바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다스리셨지요.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빛으로 모든 우주 공간을 두르고 그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으셨습니다. 그 소리가 바로 ‘말씀’입니다.
2. 인간 경작을 계획하신 근본 하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자 한 가지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경작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고 번성하게 하셔서 그들 중에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로 나온 영혼들을 아름다운 천국으로 들여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사시려는 계획’입니다.
이처럼 인간 경작의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준비 작업을 하나하나 이루십니다. 첫 번째가 공간을 나누는 것이었지요. 본디 모든 공간이 하나였는데 인간 경작을 위해 필요에 따라 여럿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간을 분리한 뒤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태초에 근본의 빛과 소리로 존재하시던 근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낳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또는 독생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5절에도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말씀했지요.
이처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근본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오셨고 마음도, 능력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는 예수님에 대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셨지요.
3.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을 입고 계신지도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씀이 단지 겉모습만 그대로 본떴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사람의 근본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진리가 충만한 영적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될 때의 형상을 잃고 점점 죄와 악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것을 믿는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4. 참 자녀를 얻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입으신 후, 분리하신 공간 안에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빛과 소리로 계실 때에는 처소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형상을 입은 뒤에는 처소를 비롯하여 수종드는 천군과 천사 등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영의 공간 안에 우선 영의 존재들을 창조하시고, 루시퍼 배반 이후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이 영의 공간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세월을 함께 지낸 뒤 마침내 육의 공간에도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드신 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있는데도 굳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참 자녀’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서 하나님과 참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천군과 천사는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로봇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고 섬기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지요.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해도 자녀보다 로봇을 더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녀가 더 사랑스럽고 좋지요.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면서 온갖 삶을 체험하며 오직 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시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 의지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그러면서도 변함이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에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인간 경작을 계획하시고, 이를 위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을 밝히 깨달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로 신속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란 과연 언제일까요?
2.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될 텐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신 것일까요?
3.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해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근본의 소리’
창조주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소리이다.
시편 68편 33절에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말씀했는데, 주께서 발하시는 이 웅장한 소리가 근본의 소리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자체로서 이 소리가 발하여질 때 천하 모든 우주 만물이 순종하며 발해진 소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자 그 말씀대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는데 이때 발하셨던 하나님의 소리가 창조의 근본의 소리이다.
2019-06-07
제23과성령이 도우시는 신앙
요한복음 14:1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4:1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6:7 ㅣ 참고 말씀: 사도행전 2:1~4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의지함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1. 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십니다.
이어지는 14장에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접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3절)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자신들과 늘 함께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동고동락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지요.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18절).
‘보혜사’란 한자어로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를 써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돕는 성령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어떻게 도우시는지 그 역할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가르쳐 주셨습니다(26절). 그 당시에는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후 성도들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초대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일꾼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활발하게 전했습니다(행 2장).
2.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1)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달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에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혜사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분명히 살아 계심을 방언 등 각종 은사를 통해 여러 증거로 나타내 보여 주시지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은 권세 있는 말씀으로 단번에 수천 명도 회개시키고, 주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등 성령이 실체로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내 보였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도,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안에 정말 성령이 계시나? 내가 이런 죄를 범했는데 성령이 소멸된 것은 아닌가?’라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강퍅하여 말씀을 의심하고 판단 정죄하는 길가밭의 마음이 아니라면 대부분 성령을 받습니다. 설령 죄를 지었어도 대부분의 죄는 회개하고 다시 말씀 안에 살고자 노력하면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이 쉽게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나를 도와주시는 분임을 믿고 늘 의지해야 하지요. 세상을 좇는 옛사람의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것은 알게 해 주십니다.
2)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선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성경 말씀을 통해 또는 성령의 음성으로 선에 대해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깨우쳐 줘도 ‘나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며 마음 문을 닫아 버리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한 마음을 이룰 수도 없고, 믿음도 성장하지 않으니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지요.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 선, 성령의 열매 등 영의 마음을 이뤄야 할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때 성령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최고의 선과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루는 길을 깨우쳐 주며,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니까? 아니면 ‘저렇게 높은 차원의 선과 믿음의 행함은 아직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하며 단정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항상 믿음의 눈으로 선하게 바라보십니다.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바라봐 주시지요. 그리고 각자 믿음의 단계에서 무엇을 깨우쳐야 하고 행해야 하는지 성령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섬세하게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시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아무리 깨우쳐 주셔도 무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늘 깨우쳐 주심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알려 주시지요. 로마서 5장 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셨지요. 이런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드리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거나 체험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외면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인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서 선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함이지요. 이렇게 계속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무시하면 성령이 주관하시는 선한 생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도 느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도 받을 수가 없지요.
다른 예로, 성령께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이러이러한 죄를 범했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새 예루살렘만 바라보고 달려가면 된다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도 부정적인 생각을 깨뜨리지를 않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 선의 말씀을 들려 주실 때 오직 ‘아멘’ 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하나님의 선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참으로 쉽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늘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를 내보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다 하니까”라고 성령께만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깨닫고 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진정 믿는 사람은 성령의 주관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를 사모합니다. 깨우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복종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주관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나를 도우시는 성령을 믿는 사람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니 할 수 있다.’ 믿고 성령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행함이 쌓이는 만큼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를 받는 것이 점점 쉬워집니다. 그러니 늘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이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어떻게 행했을까?’ 하며 부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주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의지함으로 늘 “신앙생활이 너무나 쉽고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내 안에 계신 ( )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②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 )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③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보혜사란 성도를 보호하고 돕는 ( )을 지칭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선의 단계’
◈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 선의 2단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 선의 3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있는 단계이다.
◈ 선의 4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의지함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1. 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십니다.
이어지는 14장에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접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3절)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자신들과 늘 함께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동고동락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지요.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18절).
‘보혜사’란 한자어로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를 써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돕는 성령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어떻게 도우시는지 그 역할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가르쳐 주셨습니다(26절). 그 당시에는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후 성도들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초대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일꾼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활발하게 전했습니다(행 2장).
2.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1)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달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에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혜사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분명히 살아 계심을 방언 등 각종 은사를 통해 여러 증거로 나타내 보여 주시지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은 권세 있는 말씀으로 단번에 수천 명도 회개시키고, 주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등 성령이 실체로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내 보였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도,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안에 정말 성령이 계시나? 내가 이런 죄를 범했는데 성령이 소멸된 것은 아닌가?’라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강퍅하여 말씀을 의심하고 판단 정죄하는 길가밭의 마음이 아니라면 대부분 성령을 받습니다. 설령 죄를 지었어도 대부분의 죄는 회개하고 다시 말씀 안에 살고자 노력하면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이 쉽게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나를 도와주시는 분임을 믿고 늘 의지해야 하지요. 세상을 좇는 옛사람의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것은 알게 해 주십니다.
2)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선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성경 말씀을 통해 또는 성령의 음성으로 선에 대해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깨우쳐 줘도 ‘나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며 마음 문을 닫아 버리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한 마음을 이룰 수도 없고, 믿음도 성장하지 않으니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지요.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 선, 성령의 열매 등 영의 마음을 이뤄야 할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때 성령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최고의 선과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루는 길을 깨우쳐 주며,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니까? 아니면 ‘저렇게 높은 차원의 선과 믿음의 행함은 아직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하며 단정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항상 믿음의 눈으로 선하게 바라보십니다.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바라봐 주시지요. 그리고 각자 믿음의 단계에서 무엇을 깨우쳐야 하고 행해야 하는지 성령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섬세하게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시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아무리 깨우쳐 주셔도 무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늘 깨우쳐 주심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알려 주시지요. 로마서 5장 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셨지요. 이런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드리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거나 체험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외면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인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서 선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함이지요. 이렇게 계속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무시하면 성령이 주관하시는 선한 생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도 느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도 받을 수가 없지요.
다른 예로, 성령께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이러이러한 죄를 범했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새 예루살렘만 바라보고 달려가면 된다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도 부정적인 생각을 깨뜨리지를 않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 선의 말씀을 들려 주실 때 오직 ‘아멘’ 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하나님의 선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참으로 쉽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늘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를 내보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다 하니까”라고 성령께만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깨닫고 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진정 믿는 사람은 성령의 주관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를 사모합니다. 깨우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복종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주관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나를 도우시는 성령을 믿는 사람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니 할 수 있다.’ 믿고 성령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행함이 쌓이는 만큼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를 받는 것이 점점 쉬워집니다. 그러니 늘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이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어떻게 행했을까?’ 하며 부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주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의지함으로 늘 “신앙생활이 너무나 쉽고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내 안에 계신 ( )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②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 )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③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보혜사란 성도를 보호하고 돕는 ( )을 지칭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선의 단계’
◈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 선의 2단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 선의 3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있는 단계이다.
◈ 선의 4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2019-05-31
제22과하나님의 섭리는 변함이 없나니
신명기 26:16~19
읽을말씀 : 신명기 26:16~19 | 외울말씀 : 신명기 26:16 ㅣ 참고 말씀: 요한복음 4:48
교육목표 :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기름 준비를 잘함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한다.
베드로후서 3장 3~4절에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신 말씀대로 오늘날은 마지막 때를 알려 줘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태양은 뜨고 지며,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며, 문명은 날로 발달하여 계속 이어질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는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는 때가 오듯이 인류 역사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이 세상 모든 것도 종말을 맞습니다.
1.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개척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죽음이나 대통령 선거 결과 등 국내외 정세에 관한 것도 많이 알려 주셨지요. 이런 내용들을 주보에 약자로 내기도 했고 널리 알릴 수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라도 전달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북한이나 미국, 중국과 러시아 등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세계 정세의 흐름에 대해 주신 내용들을 설교하였지요. 예언한 내용들은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나타날 일들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 중에서 마지막 때에 관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북 관계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 당시부터 북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북한 선교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83년도에는 마지막 때 남북 간 정상급 회담이 열리게 될 것과 그 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북한이 외부 세계에 대해 문을 열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문을 닫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잠시 북한의 문이 열릴 때 그곳에 들어가 선교할 것을 알려 주시며 그 후 남북 간에 어떤 표현이 나오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2000년에는 남북 정상 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정세를 살펴볼 때 북한이 국제적인 압박에 못 이겨 개방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지요.
2) 세계 선교의 사명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 명이 모이는 해외 성회를 예비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CNN을 통해 보도된 우간다 연합대성회를 시작으로 중동 선교의 문을 연 파키스탄 연합대성회, 에이즈 등 수많은 질병들이 치료된 케냐 연합대성회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필리핀 연합대성회와 중남미에 성령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세계 최대 힌두교 국가에서 연인원 3백만 명 이상이 참석한 인도 연합대성회를 통해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두바이 선교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중동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지요. 그 후에도 러시아, 독일, 페루, 콩고민주공화국, 미국 뉴욕, 이스라엘, 에스토니아 해외 성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치료받고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들어가 선교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2007년 7월 선교를 시작하여 2009년 9월까지 3년 동안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결실은 기독교 단체인 크리스털 포럼이 결성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부부 세미나, 청소년 캠프, 찬양 페스티벌 등 활발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의 근원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복음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마지막 때에 성령의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 권능을 펼치시며 복음이 전파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마지막 때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될 것입니다.
3) 대성전 건축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섭리를 알려 주시면서, 주님이 오시기 전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대성전 건축 사명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행위적으로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어도 행위적으로만 범죄하지 않으면 되었지요. 구약 시대 성전 역시 백성이 율법 가운데서 행위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행위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성전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건축한 참된 의미의 성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이 훼파되도록 허락하셨고 새롭고 참된 의미의 영적 성전을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심령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참 자녀들이라야 대성전을 건축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녀들의 손으로 이뤄진 대성전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나온 인간 경작 과정을 회상하시며, 모든 눈물과 희생과 인내의 열매로 얻으신 참 자녀들을 떠올리며 위로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들을 얻은 위로의 상징이라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대성전을 이루게 하시는 이유는 마지막 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전은 지름이 600미터에 높이가 70미터의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재료로 이루어지며 구조와 장식, 문양 하나하나에 천국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담기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권능을 나타내도록 건축됩니다. 대성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느끼며 믿지 않는 사람조차 그 영광이 어떠한지 인정하며 감동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성전 건축은 마지막 때 무수한 영혼이 구원받을 방주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와 같이 죄악이 두루 퍼진 마지막 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나오게 하시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많은 하나님의 증거들을 보여 주고 영계의 비밀에 대해 가르치며, 또한 하나님 뜻은 거룩한 참 자녀를 얻는 데 있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성전은 복음 전파의 마무리 작업을 위한 중추기지가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대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권능을 사모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도울 수 있도록 주관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 교회가 마지막 때 섭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부흥과 권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험한 산을 넘듯, 거친 풍파를 지나듯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고 견고한 믿음으로 연단을 통과한 성도들을 모아 세계를 이룰 그릇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믿음이 일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하지요.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의 담을 헐고 변질되지 않는 뜨거운 신앙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를 굳게 다지고 변함없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귀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영적 능력과 권세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모델로 어느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2.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대성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
우리가 이 땅에서 짓게 될 대성전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 따라서 대성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되었다는 증표가 된다.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된다. 또한 4차원 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이 육의 공간에 드러내는 기념물이 된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성전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면류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듯이 인간 경작을 하나님의 승리로 이끈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육목표 :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기름 준비를 잘함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한다.
베드로후서 3장 3~4절에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신 말씀대로 오늘날은 마지막 때를 알려 줘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태양은 뜨고 지며,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며, 문명은 날로 발달하여 계속 이어질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는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는 때가 오듯이 인류 역사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이 세상 모든 것도 종말을 맞습니다.
1.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개척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죽음이나 대통령 선거 결과 등 국내외 정세에 관한 것도 많이 알려 주셨지요. 이런 내용들을 주보에 약자로 내기도 했고 널리 알릴 수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라도 전달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북한이나 미국, 중국과 러시아 등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세계 정세의 흐름에 대해 주신 내용들을 설교하였지요. 예언한 내용들은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나타날 일들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 중에서 마지막 때에 관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북 관계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 당시부터 북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북한 선교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83년도에는 마지막 때 남북 간 정상급 회담이 열리게 될 것과 그 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북한이 외부 세계에 대해 문을 열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문을 닫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잠시 북한의 문이 열릴 때 그곳에 들어가 선교할 것을 알려 주시며 그 후 남북 간에 어떤 표현이 나오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2000년에는 남북 정상 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정세를 살펴볼 때 북한이 국제적인 압박에 못 이겨 개방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지요.
2) 세계 선교의 사명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 명이 모이는 해외 성회를 예비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CNN을 통해 보도된 우간다 연합대성회를 시작으로 중동 선교의 문을 연 파키스탄 연합대성회, 에이즈 등 수많은 질병들이 치료된 케냐 연합대성회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필리핀 연합대성회와 중남미에 성령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세계 최대 힌두교 국가에서 연인원 3백만 명 이상이 참석한 인도 연합대성회를 통해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두바이 선교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중동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지요. 그 후에도 러시아, 독일, 페루, 콩고민주공화국, 미국 뉴욕, 이스라엘, 에스토니아 해외 성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치료받고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들어가 선교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2007년 7월 선교를 시작하여 2009년 9월까지 3년 동안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결실은 기독교 단체인 크리스털 포럼이 결성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부부 세미나, 청소년 캠프, 찬양 페스티벌 등 활발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의 근원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복음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마지막 때에 성령의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 권능을 펼치시며 복음이 전파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마지막 때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될 것입니다.
3) 대성전 건축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섭리를 알려 주시면서, 주님이 오시기 전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대성전 건축 사명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행위적으로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어도 행위적으로만 범죄하지 않으면 되었지요. 구약 시대 성전 역시 백성이 율법 가운데서 행위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행위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성전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건축한 참된 의미의 성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이 훼파되도록 허락하셨고 새롭고 참된 의미의 영적 성전을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심령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참 자녀들이라야 대성전을 건축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녀들의 손으로 이뤄진 대성전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나온 인간 경작 과정을 회상하시며, 모든 눈물과 희생과 인내의 열매로 얻으신 참 자녀들을 떠올리며 위로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들을 얻은 위로의 상징이라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대성전을 이루게 하시는 이유는 마지막 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전은 지름이 600미터에 높이가 70미터의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재료로 이루어지며 구조와 장식, 문양 하나하나에 천국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담기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권능을 나타내도록 건축됩니다. 대성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느끼며 믿지 않는 사람조차 그 영광이 어떠한지 인정하며 감동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성전 건축은 마지막 때 무수한 영혼이 구원받을 방주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와 같이 죄악이 두루 퍼진 마지막 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나오게 하시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많은 하나님의 증거들을 보여 주고 영계의 비밀에 대해 가르치며, 또한 하나님 뜻은 거룩한 참 자녀를 얻는 데 있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성전은 복음 전파의 마무리 작업을 위한 중추기지가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대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권능을 사모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도울 수 있도록 주관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 교회가 마지막 때 섭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부흥과 권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험한 산을 넘듯, 거친 풍파를 지나듯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고 견고한 믿음으로 연단을 통과한 성도들을 모아 세계를 이룰 그릇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믿음이 일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하지요.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의 담을 헐고 변질되지 않는 뜨거운 신앙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를 굳게 다지고 변함없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귀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영적 능력과 권세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모델로 어느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2.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대성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
우리가 이 땅에서 짓게 될 대성전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 따라서 대성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되었다는 증표가 된다.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된다. 또한 4차원 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이 육의 공간에 드러내는 기념물이 된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성전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면류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듯이 인간 경작을 하나님의 승리로 이끈 열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