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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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제33과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1)
다니엘 6:10
읽을말씀 : 다니엘 6:10 | 외울말씀 : 신명기 28:1 | 참고 말씀: 다니엘 1:17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 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 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왔습니다.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보다 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장 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 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신 것은 하나님 홀로 경배받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배어 있지요.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세계 평화, 종교 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결코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 뜻을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나와지는 행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 간의 질서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채워 넣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시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했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 불에 그들을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가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를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를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뿐 아니라 하나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 뜻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임을 알았기에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원로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셨고,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으셨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의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셨지요.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치셨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러 믿음의 선진들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보기에서 괄호 안에 알맞은 답을 찾아보세요.
<보기 : 룻, 오르바, 요나단, 사울, 다윗, 솔로몬, 다니엘과 세 친구>
①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
② 아버지의 범죄를 힘껏 막으면서도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③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사울 왕을 선대 하며 감동을 주었다( )
④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
2.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나는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없다)
② 성도들끼리 돈거래를 (한다, 안 한다)
③ 이성을 보면 간음의 마음이 (있다, 없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환관장’이란?
궁중에서 활동하던 내시인 환관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 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 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왔습니다.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보다 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장 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 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신 것은 하나님 홀로 경배받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배어 있지요.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세계 평화, 종교 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결코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 뜻을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나와지는 행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 간의 질서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채워 넣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시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했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 불에 그들을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가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를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를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뿐 아니라 하나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 뜻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임을 알았기에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원로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셨고,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으셨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의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셨지요.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치셨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러 믿음의 선진들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보기에서 괄호 안에 알맞은 답을 찾아보세요.
<보기 : 룻, 오르바, 요나단, 사울, 다윗, 솔로몬, 다니엘과 세 친구>
①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
② 아버지의 범죄를 힘껏 막으면서도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③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사울 왕을 선대 하며 감동을 주었다( )
④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
2.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나는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없다)
② 성도들끼리 돈거래를 (한다, 안 한다)
③ 이성을 보면 간음의 마음이 (있다, 없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환관장’이란?
궁중에서 활동하던 내시인 환관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2024-08-09
제32과다윗의 선(善)
사무엘상 26:23
읽을말씀 : 사무엘상 26:23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6:7 | 참고 말씀: 사무엘상 24장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감으로 결국 버림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 담대히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물맷돌이 이마에 적중해 그대로 쓰러졌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한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만일 부모님이 애매하게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 하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하자 그때부터 다윗을 시기하며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지는가 하면,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 죽이려 하는 등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삼상 24장).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 사울에게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해 돌아갔지요.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그러나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은 감동하여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 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성령 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온전한 선에 이르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즉 자기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지요.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 후 이 일로 혹독한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지요.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받을 때 즉시 회개하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는데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아비새가 당장에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하자 다윗은 만류하지요. 이처럼 다윗은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연단을 허락하신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욥 23:10).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었지만, 선으로 잘 통과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온전한 선을 이루되, 항상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주위에 아름다운 선의 향을 발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선입니다.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쓰세요.
A. 하나님의 이름이 ( )을 당할 때 담대히 ( )으로 행했다.
B.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 ) 하며 ( )을 주었다.
C. 지적받을 때 즉시 ( )하고 감사함으로 ( )을 받았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만 행하신 부모님이 애매하게 욕을 당하고 있는데 잠잠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위의 A, B, C 항목 중 연관된 말씀을 고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시므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로 사울 왕의 친척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가의 사람으로서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다윗의 신하 아비새에게 죽을 뻔하였지만, 다윗의 만류로 생명을 건졌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감으로 결국 버림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 담대히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물맷돌이 이마에 적중해 그대로 쓰러졌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한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만일 부모님이 애매하게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 하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하자 그때부터 다윗을 시기하며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지는가 하면,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 죽이려 하는 등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삼상 24장).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 사울에게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해 돌아갔지요.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그러나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은 감동하여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 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성령 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온전한 선에 이르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즉 자기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지요.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 후 이 일로 혹독한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지요.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받을 때 즉시 회개하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는데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아비새가 당장에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하자 다윗은 만류하지요. 이처럼 다윗은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연단을 허락하신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욥 23:10).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었지만, 선으로 잘 통과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온전한 선을 이루되, 항상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주위에 아름다운 선의 향을 발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선입니다.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쓰세요.
A. 하나님의 이름이 ( )을 당할 때 담대히 ( )으로 행했다.
B.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 ) 하며 ( )을 주었다.
C. 지적받을 때 즉시 ( )하고 감사함으로 ( )을 받았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만 행하신 부모님이 애매하게 욕을 당하고 있는데 잠잠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위의 A, B, C 항목 중 연관된 말씀을 고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시므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로 사울 왕의 친척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가의 사람으로서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다윗의 신하 아비새에게 죽을 뻔하였지만, 다윗의 만류로 생명을 건졌다.
2024-08-02
제31과요나단의 선(善)
사무엘상 19:4~5
읽을말씀 : 사무엘상 19:4~5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9:4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8:1, 사무엘하 1:26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죄짓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에 대해 알아본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습니다(삼상 18:1 ;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은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9장 4~5절에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 뜻임을 알았습니다.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지요.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사람이 있을 때, A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어떠한 일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B라는 사람이 그동안 A가 해 놓은 것을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에게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 없이 녹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한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생각에 맞지 않는다며 윗분을 임의로 판단하지는 않는지요?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며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하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이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며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그것도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뢰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 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로 목사님의 예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원로 목사님께서는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으셨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죄짓지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구제를 통해 막힐 일이라면 구제해서 범죄를 막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셨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의 도리를 절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하였지요.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한 것이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죄짓지 않도록 여러 차례 간청했습니다. 즉 요나단은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요나단처럼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무엘상 19장 4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요나단의 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의리상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다.
②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따랐다.
③ 해를 받을지라도 사울 왕이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힘써 막았다.
④ 악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으면서도 자녀 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블레셋’이란?
함 계통 가슬루힘의 자손이다. 이주자,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블레셋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바로 블레셋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랜 기간 팔레스타인 서부의 해안평야 지대의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블레셋인들은 다곤 신, 바알세붑 등 우상을 섬겼던 해양 민족이다.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죄짓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에 대해 알아본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습니다(삼상 18:1 ;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은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9장 4~5절에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 뜻임을 알았습니다.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지요.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사람이 있을 때, A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어떠한 일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B라는 사람이 그동안 A가 해 놓은 것을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에게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 없이 녹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한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생각에 맞지 않는다며 윗분을 임의로 판단하지는 않는지요?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며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하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이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며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그것도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뢰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 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로 목사님의 예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원로 목사님께서는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으셨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죄짓지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구제를 통해 막힐 일이라면 구제해서 범죄를 막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셨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의 도리를 절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하였지요.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한 것이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죄짓지 않도록 여러 차례 간청했습니다. 즉 요나단은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요나단처럼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무엘상 19장 4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요나단의 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의리상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다.
②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따랐다.
③ 해를 받을지라도 사울 왕이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힘써 막았다.
④ 악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으면서도 자녀 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블레셋’이란?
함 계통 가슬루힘의 자손이다. 이주자,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블레셋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바로 블레셋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랜 기간 팔레스타인 서부의 해안평야 지대의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블레셋인들은 다곤 신, 바알세붑 등 우상을 섬겼던 해양 민족이다.
2024-07-26
제30과룻의 선(善)
룻기 1:16~17
읽을말씀 : 룻기 1:16~17 | 외울말씀 : 레위기 25:25 | 참고 말씀: 하박국 3:17~19
교육목표 : 어려운 상황에서도 룻처럼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에 나오는 룻이라는 여인은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부닥쳤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이루었지요. 그 결과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을 소유하였기에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은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죽음을 맞아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만 남게 되었지요. 어느 날 시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이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지요.
그러나 룻은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고백하며(룻 1:16)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살 뚜렷한 방안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형제간에도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도리를 좇는 선은 가정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곳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은 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며 상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곳에서 좋은 기술을 배워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어 지금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 것임을 알게 되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지요.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 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했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으로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뻐했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지요(룻 2:20 ; 레 25:25). 룻은 보아스에게서 아들 오벳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바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지요.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지요. 자녀 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 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얼마나 자녀 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가야 하지요(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다면 영육 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룻과 같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레위기 25장 25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최고의 선을 이룬 룻과 관계없는 것을 고르세요.
①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
② 자신을 희생하며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③ 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다.
④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하나님을 믿었다.
3.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음에 어떤 부담이나 불편함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교육목표 : 어려운 상황에서도 룻처럼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에 나오는 룻이라는 여인은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부닥쳤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이루었지요. 그 결과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을 소유하였기에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은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죽음을 맞아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만 남게 되었지요. 어느 날 시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이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지요.
그러나 룻은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고백하며(룻 1:16)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살 뚜렷한 방안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형제간에도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도리를 좇는 선은 가정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곳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은 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며 상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곳에서 좋은 기술을 배워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어 지금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 것임을 알게 되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지요.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 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했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으로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뻐했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지요(룻 2:20 ; 레 25:25). 룻은 보아스에게서 아들 오벳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바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지요.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지요. 자녀 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 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얼마나 자녀 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가야 하지요(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다면 영육 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룻과 같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레위기 25장 25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최고의 선을 이룬 룻과 관계없는 것을 고르세요.
①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
② 자신을 희생하며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③ 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다.
④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하나님을 믿었다.
3.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음에 어떤 부담이나 불편함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2024-07-19
제29과선의 단계(2)
로마서 12:2
읽을말씀 : 로마서 12:2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39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39~42
교육목표 : 선의 3단계와 4단계에 대해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온전한 선에 이르는 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1, 2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에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1단계의 선, 마음에 어떠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을 넘어서 3, 4단계의 선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3단계의 선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단지 악으로 맞서 대항치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의 단계라면, 악으로 대항치 않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선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온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육을 온전히 벗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도 온전히 임한 상태이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어찌하면 그 마음을 녹여 화평을 이룰까’만 생각하지요.
선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수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선으로 채워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힘들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선의 2단계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가고, 시험이 온다 해도 선으로 통과함으로 오히려 축복을 받게 되지요.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으로 나온 상대의 마음이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에 감동하여 악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너무나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그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이란 단지 착해서 져 주고 다 내주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도 파하는 큰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구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도 오직 지극한 섬김의 말로 왕에게 고하지요.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 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왕의 심금을 울렸겠습니까?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즉각 징벌하고 다니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온 나라에 다니엘의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렸습니다.
다니엘처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3단계의 선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선이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3단계의 선에 머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에서도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말씀하셨으니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신속히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 자체가 선으로 일궈져서 선한 말과 행실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간다면 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선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되 악이 온전히 벗어졌다면 그때가 비로소 선의 2단계입니다. 그러니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한 말이나 선한 행함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론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섬김의 행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이 항상 나옵니다.
그러니 ‘상대가 악으로 나와도 마음에 아무 불편함이 없고 오히려 선한 말을 했으니, 선의 3단계구나.’ 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어떠한 상대에게도 항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그를 선대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생명도 아낌없이 주는 4단계의 선
가장 차원 높은 4단계의 선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요, 의인들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선의 차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해 주셨습니다. 정녕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예수님처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4단계의 선에 이른 분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 선지자가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서 건너는 등의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케 해 줬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늘 불평했고, 모세를 원망하며 심지어는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이런 백성들인데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그들은 당시 심히도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에녹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의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 권능도 받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장차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처소인 새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거하여 세세토록 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아름다운 선을 사모하며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신속히 온전한 선의 단계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채워 보세요.
선의 1단계 : ( )으로 대항치 않고 ( )을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 )으로 갚지 않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 )을 행하여 오히려 ( )을 준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 )도 아낌없이 줄 수 있다.
2. 다음 중 최고의 선을 이룬 분만 O 표를 해 보세요.
① 사도 바울 ② 다니엘 ③ 모세 ④ 엘리사
3. 다음 중 선에 관한 말씀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마 5:39~42 ② 롬 9:3 ③ 마 5:28 ④ 출 32:32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송사’란?
백성 사이에 발생한 분쟁의 판결을 관청에 호소하는 일로 ‘소송’이라고도 한다.
교육목표 : 선의 3단계와 4단계에 대해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온전한 선에 이르는 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1, 2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에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1단계의 선, 마음에 어떠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을 넘어서 3, 4단계의 선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3단계의 선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단지 악으로 맞서 대항치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의 단계라면, 악으로 대항치 않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선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온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육을 온전히 벗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도 온전히 임한 상태이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어찌하면 그 마음을 녹여 화평을 이룰까’만 생각하지요.
선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수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선으로 채워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힘들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선의 2단계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가고, 시험이 온다 해도 선으로 통과함으로 오히려 축복을 받게 되지요.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으로 나온 상대의 마음이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에 감동하여 악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너무나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그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이란 단지 착해서 져 주고 다 내주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도 파하는 큰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구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도 오직 지극한 섬김의 말로 왕에게 고하지요.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 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왕의 심금을 울렸겠습니까?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즉각 징벌하고 다니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온 나라에 다니엘의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렸습니다.
다니엘처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3단계의 선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선이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3단계의 선에 머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에서도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말씀하셨으니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신속히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 자체가 선으로 일궈져서 선한 말과 행실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간다면 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선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되 악이 온전히 벗어졌다면 그때가 비로소 선의 2단계입니다. 그러니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한 말이나 선한 행함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론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섬김의 행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이 항상 나옵니다.
그러니 ‘상대가 악으로 나와도 마음에 아무 불편함이 없고 오히려 선한 말을 했으니, 선의 3단계구나.’ 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어떠한 상대에게도 항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그를 선대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생명도 아낌없이 주는 4단계의 선
가장 차원 높은 4단계의 선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요, 의인들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선의 차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해 주셨습니다. 정녕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예수님처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4단계의 선에 이른 분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 선지자가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서 건너는 등의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케 해 줬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늘 불평했고, 모세를 원망하며 심지어는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이런 백성들인데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그들은 당시 심히도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에녹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의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 권능도 받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장차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처소인 새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거하여 세세토록 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아름다운 선을 사모하며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신속히 온전한 선의 단계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채워 보세요.
선의 1단계 : ( )으로 대항치 않고 ( )을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 )으로 갚지 않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 )을 행하여 오히려 ( )을 준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 )도 아낌없이 줄 수 있다.
2. 다음 중 최고의 선을 이룬 분만 O 표를 해 보세요.
① 사도 바울 ② 다니엘 ③ 모세 ④ 엘리사
3. 다음 중 선에 관한 말씀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마 5:39~42 ② 롬 9:3 ③ 마 5:28 ④ 출 32:32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송사’란?
백성 사이에 발생한 분쟁의 판결을 관청에 호소하는 일로 ‘소송’이라고도 한다.
2024-07-12
제28과선의 단계(1)
로마서 12:2
읽을말씀 : 로마서 12:2 | 외울말씀 : 로마서 12:2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19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단계를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의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시험 환난이 떠나며 무엇이나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를 수 있도록 선의 기준과 단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너무나 세찬 육의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추하고 악한 육의 흐름을 타지 말고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영의 흐름을 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착하다, 좋다’ 혹은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을, 다시 각자의 기준에 맞춰서 ‘양심’이라는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는 기준에 의해 어떤 것이 ‘선하다’, ‘선하지 않다’ 말하지만, 사람의 양심은 결코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나름대로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자기의 가치 판단 기준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양심에는 비진리도 섞여 있으며 지역, 혹은 시대마다 달라지지요. 같은 시대, 같은 곳에 산다 해도 사람마다 양심이 다르고 어떤 환경,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집니다. 그러니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의 기준으로 삼는 양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의 기준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은 악이며 용서하는 것이 선이라 하십니다(마 5:44 ; 롬 12:20).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전한 선의 기준이요, 선 자체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배운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서 온전한 선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 단계를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선의 1, 2단계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여러분을 욕하고 때리는데 같이 욕하고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억울하고 속상하여 마음이 불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또는 나름대로 갖추어진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해도 그 마음에 여전히 악이 있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에 들 수 없습니다. 악에 맞대응해 싸우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선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게 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악을 행하거나 심지어는 더 악을 행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고 진실한 믿음 가진 사람을 찾기도 어렵습니다(눅 18:8). 그런데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작은 불빛도 눈에 잘 띄는 법입니다. 사랑이 식고 더욱 심한 악으로 치닫는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선을 행해 나간다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 많은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이끌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바로 선의 2단계부터인데, 선의 2단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속이 상해도 꾹꾹 눌러 참는 것이 아니요, 아예 미움도 불편함도 없고 상대에 대한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차원입니다. 이는 바로 마음에 악이 전혀 없는 상태로서 ‘영의 마음’이라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상태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당할 때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며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 일어나지 않는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경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약혼녀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간음했다고 율법대로 벌을 받게 하거나, 그냥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지요(마 1:19). 이처럼 선한 요셉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 마음을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어찌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악을 부추기는 대로 순종하여 악으로 생각하고 악으로 말하며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룬다 해도 그 선이 빛으로 역사 되어 자연히 어둠이 물러갑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는데,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일이 잘못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많은 분이 제 앞에서 “제 탓입니다. 제가 더 잘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혹 마음 한편에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를 탓하고 책망했다면 이는 결코 선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 탓이라 고백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주시며 다음에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직접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혹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거나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지는 않았는지요?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니 직접 관련된 일인 경우는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되,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할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어려움과 곤욕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선을 사모함으로 모든 일을 선으로 생각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며, 선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로마서 12장 2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선의 ( )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 )으로 ( )하지 않는다. 이를 하나님께서는 선이라 인정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선의 ( )단계는 악을 ( )으로 갚지 않으며 ( )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이는 마음에 악이 전혀 없는 영의 마음이며,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 )의 ( )의 단계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마귀’란?
천사와 정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생각을 통해 비진리를 사주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라면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귀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씀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단계를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의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시험 환난이 떠나며 무엇이나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를 수 있도록 선의 기준과 단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너무나 세찬 육의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추하고 악한 육의 흐름을 타지 말고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영의 흐름을 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착하다, 좋다’ 혹은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을, 다시 각자의 기준에 맞춰서 ‘양심’이라는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는 기준에 의해 어떤 것이 ‘선하다’, ‘선하지 않다’ 말하지만, 사람의 양심은 결코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나름대로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자기의 가치 판단 기준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양심에는 비진리도 섞여 있으며 지역, 혹은 시대마다 달라지지요. 같은 시대, 같은 곳에 산다 해도 사람마다 양심이 다르고 어떤 환경,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집니다. 그러니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의 기준으로 삼는 양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의 기준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은 악이며 용서하는 것이 선이라 하십니다(마 5:44 ; 롬 12:20).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전한 선의 기준이요, 선 자체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배운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서 온전한 선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 단계를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선의 1, 2단계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여러분을 욕하고 때리는데 같이 욕하고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억울하고 속상하여 마음이 불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또는 나름대로 갖추어진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해도 그 마음에 여전히 악이 있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에 들 수 없습니다. 악에 맞대응해 싸우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선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게 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악을 행하거나 심지어는 더 악을 행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고 진실한 믿음 가진 사람을 찾기도 어렵습니다(눅 18:8). 그런데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작은 불빛도 눈에 잘 띄는 법입니다. 사랑이 식고 더욱 심한 악으로 치닫는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선을 행해 나간다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 많은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이끌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바로 선의 2단계부터인데, 선의 2단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속이 상해도 꾹꾹 눌러 참는 것이 아니요, 아예 미움도 불편함도 없고 상대에 대한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차원입니다. 이는 바로 마음에 악이 전혀 없는 상태로서 ‘영의 마음’이라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상태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당할 때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며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 일어나지 않는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경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약혼녀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간음했다고 율법대로 벌을 받게 하거나, 그냥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지요(마 1:19). 이처럼 선한 요셉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 마음을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어찌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악을 부추기는 대로 순종하여 악으로 생각하고 악으로 말하며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룬다 해도 그 선이 빛으로 역사 되어 자연히 어둠이 물러갑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는데,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일이 잘못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많은 분이 제 앞에서 “제 탓입니다. 제가 더 잘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혹 마음 한편에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를 탓하고 책망했다면 이는 결코 선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 탓이라 고백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주시며 다음에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직접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혹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거나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지는 않았는지요?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니 직접 관련된 일인 경우는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되,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할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어려움과 곤욕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선을 사모함으로 모든 일을 선으로 생각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며, 선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로마서 12장 2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선의 ( )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 )으로 ( )하지 않는다. 이를 하나님께서는 선이라 인정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선의 ( )단계는 악을 ( )으로 갚지 않으며 ( )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이는 마음에 악이 전혀 없는 영의 마음이며,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 )의 ( )의 단계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마귀’란?
천사와 정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생각을 통해 비진리를 사주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라면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귀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씀한다.
2024-07-05
제27과신실하신 분께 감사함으로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민수기 23:19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1:6 ; 야고보서 2:22 ; 갈라디아서 6:9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인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약속하신 축복을 풍성하게 거두는 성도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한 대로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맥추절이 되면 처음 수확한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 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말씀을 100%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영적 믿음이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불가능이란 것이 없으며 한 번 이루리라 하시면 변개치 않고 반드시 이루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셔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장차 세계를 이루고, 천하 만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 하시며 앞일에 대한 말씀을 주실 때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믿었기에 무수한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며 세계를 이루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현실과 상관없이 온전히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만민의 성도님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수없이 보고 들으며 체험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는 주역이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소망하며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뤄 주신다는 믿음으로 범사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면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2.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믿음은 행함의 증거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으면 애굽 군대에 사로잡혔고, 요단강물이 멈췄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어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지 않으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누릴 방법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즉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한 대로 순종하면 신속히 죄악을 버리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한 대로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만일 갈증이 나도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된다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를 내고 감정을 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지요. 죄악을 벗고 충성하는 행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을 통해 무수한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시며 급속한 영의 흐름 속에 신속하게 성결을 이룰 수 있도록 넘치는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믿는다면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지요(겔 36:37).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서 불같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행해야 할지 그 방법론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식언치 않고 후회가 없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섭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전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많은 주의 종과 일꾼을 양성했고, 문서와 방송 선교 등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고 희생이 따랐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었기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만약 “여력이 되면 준비하겠다.” 하며 손을 놓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세계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단강이 멈추는 것은 하나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믿음으로 강을 밟고 건너는 행함은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 보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3.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며 변함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 주변을 믿음으로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후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금성철벽 같은 여리고 성을 돈다고 해서 무너질 리도 없고, 더구나 성안에서 먼저 공격해 올 수도 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명하신 대로 순종하였고, 마침내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은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행함을 나타내야 심은 대로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때론 상황이 더 어려워져 기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부정적인 말로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하면 그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어도 열매로 거둘 수 없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후 변함없이 축복의 언약을 믿고 행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 가운데 완전히 죽는 것 같은 상황도 있었지만, 연단을 믿음과 진실함으로 이겨낼 때마다 전보다 더한 축복을 주셨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을 곧바로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민수기 23장 19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하반기에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넣으세요.
첫째, ( )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둘째, 행함으로 ( )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셋째, 열매를 거두기까지 ( )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 )을 내보여야 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맥추절의 유래
밭에 뿌린 밀의 첫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다.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한다. 칠칠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 만에 돌아오는 절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고, 오순절이란 명칭은 동일한 기간을 날수로 계산하면 50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맥추절은 맥추감사절로 구별하여 지키고 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인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약속하신 축복을 풍성하게 거두는 성도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한 대로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맥추절이 되면 처음 수확한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 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말씀을 100%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영적 믿음이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불가능이란 것이 없으며 한 번 이루리라 하시면 변개치 않고 반드시 이루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셔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장차 세계를 이루고, 천하 만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 하시며 앞일에 대한 말씀을 주실 때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믿었기에 무수한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며 세계를 이루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현실과 상관없이 온전히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만민의 성도님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수없이 보고 들으며 체험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는 주역이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소망하며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뤄 주신다는 믿음으로 범사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면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2.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믿음은 행함의 증거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으면 애굽 군대에 사로잡혔고, 요단강물이 멈췄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어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지 않으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누릴 방법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즉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한 대로 순종하면 신속히 죄악을 버리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한 대로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만일 갈증이 나도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된다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를 내고 감정을 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지요. 죄악을 벗고 충성하는 행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을 통해 무수한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시며 급속한 영의 흐름 속에 신속하게 성결을 이룰 수 있도록 넘치는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믿는다면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지요(겔 36:37).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서 불같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행해야 할지 그 방법론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식언치 않고 후회가 없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섭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전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많은 주의 종과 일꾼을 양성했고, 문서와 방송 선교 등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고 희생이 따랐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었기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만약 “여력이 되면 준비하겠다.” 하며 손을 놓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세계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단강이 멈추는 것은 하나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믿음으로 강을 밟고 건너는 행함은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 보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3.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며 변함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 주변을 믿음으로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후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금성철벽 같은 여리고 성을 돈다고 해서 무너질 리도 없고, 더구나 성안에서 먼저 공격해 올 수도 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명하신 대로 순종하였고, 마침내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은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행함을 나타내야 심은 대로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때론 상황이 더 어려워져 기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부정적인 말로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하면 그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어도 열매로 거둘 수 없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후 변함없이 축복의 언약을 믿고 행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 가운데 완전히 죽는 것 같은 상황도 있었지만, 연단을 믿음과 진실함으로 이겨낼 때마다 전보다 더한 축복을 주셨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을 곧바로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민수기 23장 19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하반기에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넣으세요.
첫째, ( )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둘째, 행함으로 ( )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셋째, 열매를 거두기까지 ( )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 )을 내보여야 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맥추절의 유래
밭에 뿌린 밀의 첫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다.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한다. 칠칠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 만에 돌아오는 절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고, 오순절이란 명칭은 동일한 기간을 날수로 계산하면 50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맥추절은 맥추감사절로 구별하여 지키고 있다.
2024-06-28
제26과천국의 처소와 면류관(5)
요한일서 3:21~22
읽을말씀 : 요한일서 3:21~22 | 외울말씀 : 요한계시록 21:11 | 참고 말씀: 디모데후서 4:8 ; 요한계시록 4:4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4단계의 믿음이 성장하면 5단계의 믿음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해 계명에 순종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차원이지요. 믿음의 5단계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넘치도록 순종하는 단계
부모 자녀 간에 사랑한다고 하지만 부모님 말씀에 100퍼센트 순종하는 자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것도 있고 못 하는 것도 있으며, 어떤 자녀는 순종은커녕 아예 반항하거나 빗나가기도 하지요. 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은 아니지만 부모님 말씀이므로 도리를 좇아 복종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선한 자녀는 부모님을 사랑하여 마음 아프지 않도록 말씀에 오직 순종만 합니다. 말씀하는 대로 100퍼센트 순종하여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사랑이 승한 자녀는 부모님이 무엇을 명하실 때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마음까지 헤아려 부모님이 원하시는 그 이상으로 이뤄 드립니다. 또한 시키지 않은 것까지 찾아서, 부모님의 마음에 꼭 맞게 미리미리 해 놓습니다.
부모님은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하지만, 특히 부모를 사랑하여 중심에서 순종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부모의 좋은 점들을 쏙 빼닮았고 부모의 마음 깊은 것까지 하는 일마다 마음에 꼭 들게 해 준다면 부모님은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기록된 성경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녀를 지극히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뜻까지 헤아려 행한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믿음의 5단계에 이른 사람이 이러합니다.
믿음의 4단계에서는 마음에 죄악이 없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면 무조건 순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려서 순종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요. 반면 믿음의 5단계는 명하신 대로 순종할 뿐 아니라 ‘왜 그런 것을 명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서 명하신 것보다 넘치도록 순종합니다.
그것도 어느 한순간에만 넘치는 행함을 보이거나 가끔가다가 진한 사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매분, 매초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살아가지요. 이러한 모습이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변함이 없으며 오히려 승해지기만 하는 것이 믿음의 5단계입니다.
2. 믿음의 5단계가 들어가는 새 예루살렘 성
천국의 처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랑의 결정체이지요.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오신 하나님께서 참 자녀들과 영원히 사랑을 나누며 살고자 정성을 다해 마련하신 보금자리입니다. 이곳에는 꽃잎 하나, 장식된 보석 하나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담겨 있으며 그분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1)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와 모양
새 예루살렘 성의 모양은 정육면체로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하며 일만 이천 스다디온(약 2,400km)입니다(계 21~22장). 성곽은 맑고 투명한 푸른빛이 감도는 벽옥이고, 성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지요. 사면 성벽에는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아치형 진주 문이 있고, 문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은 열두 보석으로 되어 있고, 열두 보석의 영적인 의미를 종합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마음이며 주님의 마음입니다. 진주 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면 해나 달이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온통 두르고 있어 항상 낮처럼 밝고 눈이 부십니다. 찬란한 영광의 구름 사이로 집을 장식한 각종 보석빛이 어우러져 마치 성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요.
3천층과 새 예루살렘 성의 집은 복층이며 정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연못, 정원, 동물원, 골프장, 무도회장 등 원하는 시설을 모두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지요. 그런데 3천층 집도 정금과 보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종류와 빛이 새 예루살렘 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보석이 있으며 각 보석에서 이중, 삼중으로 빛을 발산하기도 하지요.
또한 새 예루살렘 성의 집마다 주인이 영으로 들어간 깊이와 충성한 공로에 따라, 행적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특색이 있습니다. 집에 영광의 빛이 얼마나 둘려 있는지, 어떤 보석으로 장식되었는지만 보아도 주인이 얼마나 성결되었으며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새 예루살렘의 상급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뤄지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크고 아름다운 처소와 상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건축자재와 시설 하나하나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사랑과 인내, 충성과 헌신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사랑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드리면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위로와 상급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흘린 눈물 한 방울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집을 만드는 자재와 장식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에 천국에서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지요. 이곳의 옷은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며, 광채가 나고 하늘하늘한 옷감에 화려한 보석이 달려 있고 다양한 문양이 수놓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에 따라 감사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찬양의 문양, 기쁨, 기도 등 다양한 문양이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 영광의 문양은 하나님께 특별히 영광 돌린 사람이 받습니다. 다른 문양과 확연하게 구별되며 이러한 문양을 단 사람은 더욱 존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머리에 쓰는 면류관에는 기본적으로 의의 면류관(딤후 4:8)과 금 면류관(계 4:4)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꽃으로 장식한 화관과 진주관, 크리스털 관을 비롯하여 온갖 보석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면류관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때에 맞게 바꾸어 사용합니다. 또 여인에게는 특별한 머리 장식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면류관이 없고 장식도 없는 맨머리이지만 위 단계로 갈수록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을 합니다. 새 예루살렘 여인들은 각종 보석과 함께 특별히 아름다운 색을 발하는 실과 같은 장식으로 머리를 꾸밉니다.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장식한 줄이 마치 머리카락 일부처럼 길게 드리워져 황홀한 광채를 발산합니다.
이렇게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입은 옷 색깔이나 빛, 옷에 새겨진 문양과 장식한 보석, 또 머리에 쓴 면류관과 각종 장식을 통해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옷을 갈아입을 때나, 잔치 자리에 가거나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지 각 사람에게 딸린 천사가 그림자처럼 수종 듭니다. 또한 각 사람이 영으로 들어온 정도에 따라 수종하는 천사의 수도 다르지요.
새 예루살렘 성은 아름답고 화려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배우고 보고 듣고 즐기며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 영원한 삶의 순간마다 새롭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항상 연회가 열리는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도 하고 주님과 성령님께서 주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연회에는 사람마다 최고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최상의 것을 먹고 마시며 아름다운 찬양과 춤을 즐깁니다. 그 영화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성결되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천국의 행복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더해질수록 이 땅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함께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영적인 소원만 마음에 가득해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으니 신속히 성결을 이루고 온 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 ) 같고 ( )과 ( ) 같이 맑더라” (계 21:11)
2. 믿음의 5단계가 들어가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새 예루살렘 성의 모양은 정육면체로 가로, 세로, 높이가 같다.
② 사면 성벽에는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아치형 진주 문이 있다.
③ 새 예루살렘에서는 의의 면류관과 금 면류관만 주어진다.
④ 집은 복층으로 정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지며 연못, 정원, 동물원, 골프장, 무도회장 등 원하는 모든 시설을 소유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열두 문을 ‘진주’로 만드신 이유
조개는 이물질이 살점을 파고들면 고통스러워서 진액을 내어 이물질을 감싸는데, 그 진액의 결정체가 바로 진주이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기까지 많은 아픔과 인내가 필요하듯이,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의 자격을 얻기까지 어떠한 고통도 인내하고 진리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진주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만드셨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5단계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알아본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4단계의 믿음이 성장하면 5단계의 믿음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해 계명에 순종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차원이지요. 믿음의 5단계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넘치도록 순종하는 단계
부모 자녀 간에 사랑한다고 하지만 부모님 말씀에 100퍼센트 순종하는 자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것도 있고 못 하는 것도 있으며, 어떤 자녀는 순종은커녕 아예 반항하거나 빗나가기도 하지요. 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은 아니지만 부모님 말씀이므로 도리를 좇아 복종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선한 자녀는 부모님을 사랑하여 마음 아프지 않도록 말씀에 오직 순종만 합니다. 말씀하는 대로 100퍼센트 순종하여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사랑이 승한 자녀는 부모님이 무엇을 명하실 때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마음까지 헤아려 부모님이 원하시는 그 이상으로 이뤄 드립니다. 또한 시키지 않은 것까지 찾아서, 부모님의 마음에 꼭 맞게 미리미리 해 놓습니다.
부모님은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하지만, 특히 부모를 사랑하여 중심에서 순종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부모의 좋은 점들을 쏙 빼닮았고 부모의 마음 깊은 것까지 하는 일마다 마음에 꼭 들게 해 준다면 부모님은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기록된 성경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녀를 지극히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뜻까지 헤아려 행한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믿음의 5단계에 이른 사람이 이러합니다.
믿음의 4단계에서는 마음에 죄악이 없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면 무조건 순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려서 순종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요. 반면 믿음의 5단계는 명하신 대로 순종할 뿐 아니라 ‘왜 그런 것을 명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서 명하신 것보다 넘치도록 순종합니다.
그것도 어느 한순간에만 넘치는 행함을 보이거나 가끔가다가 진한 사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매분, 매초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살아가지요. 이러한 모습이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변함이 없으며 오히려 승해지기만 하는 것이 믿음의 5단계입니다.
2. 믿음의 5단계가 들어가는 새 예루살렘 성
천국의 처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랑의 결정체이지요.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오신 하나님께서 참 자녀들과 영원히 사랑을 나누며 살고자 정성을 다해 마련하신 보금자리입니다. 이곳에는 꽃잎 하나, 장식된 보석 하나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담겨 있으며 그분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1)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와 모양
새 예루살렘 성의 모양은 정육면체로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하며 일만 이천 스다디온(약 2,400km)입니다(계 21~22장). 성곽은 맑고 투명한 푸른빛이 감도는 벽옥이고, 성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지요. 사면 성벽에는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아치형 진주 문이 있고, 문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은 열두 보석으로 되어 있고, 열두 보석의 영적인 의미를 종합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마음이며 주님의 마음입니다. 진주 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면 해나 달이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온통 두르고 있어 항상 낮처럼 밝고 눈이 부십니다. 찬란한 영광의 구름 사이로 집을 장식한 각종 보석빛이 어우러져 마치 성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요.
3천층과 새 예루살렘 성의 집은 복층이며 정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연못, 정원, 동물원, 골프장, 무도회장 등 원하는 시설을 모두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지요. 그런데 3천층 집도 정금과 보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종류와 빛이 새 예루살렘 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보석이 있으며 각 보석에서 이중, 삼중으로 빛을 발산하기도 하지요.
또한 새 예루살렘 성의 집마다 주인이 영으로 들어간 깊이와 충성한 공로에 따라, 행적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특색이 있습니다. 집에 영광의 빛이 얼마나 둘려 있는지, 어떤 보석으로 장식되었는지만 보아도 주인이 얼마나 성결되었으며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새 예루살렘의 상급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뤄지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크고 아름다운 처소와 상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건축자재와 시설 하나하나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사랑과 인내, 충성과 헌신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사랑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드리면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위로와 상급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흘린 눈물 한 방울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집을 만드는 자재와 장식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에 천국에서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지요. 이곳의 옷은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며, 광채가 나고 하늘하늘한 옷감에 화려한 보석이 달려 있고 다양한 문양이 수놓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에 따라 감사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찬양의 문양, 기쁨, 기도 등 다양한 문양이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 영광의 문양은 하나님께 특별히 영광 돌린 사람이 받습니다. 다른 문양과 확연하게 구별되며 이러한 문양을 단 사람은 더욱 존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머리에 쓰는 면류관에는 기본적으로 의의 면류관(딤후 4:8)과 금 면류관(계 4:4)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꽃으로 장식한 화관과 진주관, 크리스털 관을 비롯하여 온갖 보석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면류관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때에 맞게 바꾸어 사용합니다. 또 여인에게는 특별한 머리 장식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면류관이 없고 장식도 없는 맨머리이지만 위 단계로 갈수록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을 합니다. 새 예루살렘 여인들은 각종 보석과 함께 특별히 아름다운 색을 발하는 실과 같은 장식으로 머리를 꾸밉니다.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장식한 줄이 마치 머리카락 일부처럼 길게 드리워져 황홀한 광채를 발산합니다.
이렇게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입은 옷 색깔이나 빛, 옷에 새겨진 문양과 장식한 보석, 또 머리에 쓴 면류관과 각종 장식을 통해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옷을 갈아입을 때나, 잔치 자리에 가거나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지 각 사람에게 딸린 천사가 그림자처럼 수종 듭니다. 또한 각 사람이 영으로 들어온 정도에 따라 수종하는 천사의 수도 다르지요.
새 예루살렘 성은 아름답고 화려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배우고 보고 듣고 즐기며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 영원한 삶의 순간마다 새롭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항상 연회가 열리는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도 하고 주님과 성령님께서 주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연회에는 사람마다 최고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최상의 것을 먹고 마시며 아름다운 찬양과 춤을 즐깁니다. 그 영화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성결되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천국의 행복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더해질수록 이 땅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함께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영적인 소원만 마음에 가득해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으니 신속히 성결을 이루고 온 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 ) 같고 ( )과 ( ) 같이 맑더라” (계 21:11)
2. 믿음의 5단계가 들어가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새 예루살렘 성의 모양은 정육면체로 가로, 세로, 높이가 같다.
② 사면 성벽에는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아치형 진주 문이 있다.
③ 새 예루살렘에서는 의의 면류관과 금 면류관만 주어진다.
④ 집은 복층으로 정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지며 연못, 정원, 동물원, 골프장, 무도회장 등 원하는 모든 시설을 소유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열두 문을 ‘진주’로 만드신 이유
조개는 이물질이 살점을 파고들면 고통스러워서 진액을 내어 이물질을 감싸는데, 그 진액의 결정체가 바로 진주이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기까지 많은 아픔과 인내가 필요하듯이,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의 자격을 얻기까지 어떠한 고통도 인내하고 진리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진주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만드셨다.
2024-06-21
제25과천국의 처소와 면류관(4)
요한복음 14:21
읽을말씀 : 요한복음 14:21 | 외울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 참고 말씀: 요한계시록 2:10, 야고보서 1:12
교육목표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가 들어가는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알아본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경작하는 것은 튼실한 열매를 거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도록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알곡은 천국으로, 쭉정이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알곡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자녀를 말합니다. 이처럼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영의 사람을 얻고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이라는 씨를 심고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영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며, 이때부터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3단계에서도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했지요.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는 아직 마음의 죄성까지 다 버리지 않았기에 “주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조금은 민망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를 지나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온전히 계명을 지키며 죄성을 벗어 버려야 담대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항상 나타납니다. 이 땅에서 강건하고 형통한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영광과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1, 2, 3단계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살전 5:16~18)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애매한 말로 여러분을 모함한다면 믿음의 1단계나 2단계 초입인 경우, 상대를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지려 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만나면 감정이 난 상태에서 변론하며 언성이 높아지거나 다투기도 합니다. 하지만 2단계 중반만 되어도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 들어와 반석에 서기 전이라면 감정이 요동하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기에 ‘감사하자, 기뻐하자.’ 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참지만, 마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반면에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전혀 요동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기에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지 않지요. 예수님과 같이 원수라도 축복하고 상대가 범죄하지 않도록 긍휼히 여기며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이라 해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반응이 다르고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마음의 향이 다른 것입니다.
다른 예로, 만일 부모님이 위독하여 급히 수술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이때 돈가방을 주웠다면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서는 그 돈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선한 것을 좇으려는 영의 마음과 자기 욕심을 좇으려는 육의 마음이 싸웁니다. 그러다가 ‘이 돈이 너무 필요하다.’ 하면서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양심의 가책은 있지만 자신이 써버릴 수 있지요.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는 ‘이 돈만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 하는 비진리의 생각이 잠시 틈탈 수는 있지만 결국 선한 양심을 좇아 주인을 찾아 줍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물질이 필요하다 해도 남의 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고민하지 않습니다. ‘돈을 잃은 주인이 얼마나 걱정할까?’ 염려해 한시라도 빨리 주인을 찾아 주려는 마음뿐이지요. 이런 마음이 되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없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어서 사람과의 문제나 어떤 환경에 따라 힘이 들고 곤고한 것인데, 악이 없으니 항상 성령 충만하고 행복하며 평안합니다.
2. 믿음의 4단계에 주어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
천국의 모든 처소는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곳입니다. 어둠은 조금도 없고 사랑과 기쁨만 있지요. 곳곳에는 천사들이 있고 감미로운 찬양이 흐르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의 영광도 믿음의 단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낙원이나 1, 2천층에는 많은 천사가 있어서 천국을 관리하고 때를 좇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수종 드는 천사가 딸려 있지는 않습니다. 3천층 이상의 천국에 들어가야 각 사람에게 수종 드는 천사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얼마나 더 성결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에 따라 천사의 숫자가 달라집니다. 천사가 수종 드는 것도 천국의 처소에 따라 다른 것을 볼 수 있지요. 3천층에서는 천사가 주인의 마음을 읽고 순종합니다. 주인이 과일을 먹고 싶어 하면 과일을 따다 주지요. 하지만 2천층의 천사는 과일을 가져오라고 명해야 움직입니다.
또 3천층 이상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구름 자가용이 주어지는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은 개인 소유의 구름 자가용을, 3천층에 들어간 사람은 공동 소유의 구름 자가용을 탈 수 있습니다. 천국의 구름은, 이 세상의 구름과 다릅니다.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장식품과 같지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고, 솔로몬왕이 성전을 봉헌할 때는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해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말씀하셨지요(마 26:64).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천국 구름으로 만들어진 구름 자가용을 타려면 3천층 이상의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3천층 이상에 들어간 사람은 겉모습만 보아도 2천층의 사람과 큰 차이가 납니다. 각 사람에게 영광의 빛이 다르고 옷과 옷의 문양, 달린 장식, 머리 모양 등이 달라서 얼마나 성결된 사람인지,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인지를 금방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3천층의 집은 어떻게 지어졌을까요? 2천층의 건물은 모두 단층이지만 3천층부터는 복층 건물입니다. 이 땅에서는 땅이 좁으니 높은 빌딩이 필요하지만, 천국은 끝없이 넓으므로 건물을 높이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집은 정금과 보석으로 장식돼 있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로 화려하게 단장된 정원과 호수가 있습니다. 2천층에서는 호수나 골프장, 수영장 등 한 가지 부속시설을 가질 수 있지만 3천층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백만장자라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게 꾸며져 있지요.
또한 2천층과 다른 점은 집에 문패가 없다는 것인데 집 자체에서 주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영적인 향이 흘러나와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영적인 향이 다른 것처럼 그 집에서 흘러나오는 향과 빛도 다릅니다. 주인이 성결되어 하나님을 닮을수록 더 아름다운 빛과 향이 나오지요. 천국에는 이 땅의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영리하고 온순한 동물과 새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3천층에서는 야고보서 1장 12절에 “…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말씀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했는데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영적인 충성을 말합니다. 즉 순교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세상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린 사람, 온전히 성결된 사람이 되어야 죽도록 충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결을 이루고 생명을 다해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 3천층에 들어가며, 그에 대한 상급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비록 성결을 온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한 사람은 3천층에 들어가며,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물론 참된 믿음과 사랑으로 생명을 드린 경우여야 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리라 하는 사모함과 소망으로 결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매 순간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믿음의 4단계가 들어가는 3천층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2천층의 집은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 형태지만 3천층의 집은 단층이다.
② 성결하며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 들어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
③ 2천층과 다른 점은 문패가 없고, 집 자체에서 주인의 향이 흘러나온다.
④ 3천층에서는 천사가 주인의 마음을 읽고 순종하지만, 2천층에서는 천사에게 명해야만 움직인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구름 자가용’이란?
천국의 교통수단으로 3천층에 들어간 영혼들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다.
구름 자가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유한 사람의 영광과 위엄과 권세를 나타내 준다. 주로 천사가 운전하며, 혼자 탈 수 있는 개인용과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탈 수 있는 것이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가 들어가는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알아본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경작하는 것은 튼실한 열매를 거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도록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알곡은 천국으로, 쭉정이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알곡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자녀를 말합니다. 이처럼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영의 사람을 얻고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이라는 씨를 심고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영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며, 이때부터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3단계에서도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했지요.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는 아직 마음의 죄성까지 다 버리지 않았기에 “주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조금은 민망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를 지나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온전히 계명을 지키며 죄성을 벗어 버려야 담대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항상 나타납니다. 이 땅에서 강건하고 형통한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영광과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1, 2, 3단계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살전 5:16~18)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애매한 말로 여러분을 모함한다면 믿음의 1단계나 2단계 초입인 경우, 상대를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지려 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만나면 감정이 난 상태에서 변론하며 언성이 높아지거나 다투기도 합니다. 하지만 2단계 중반만 되어도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 들어와 반석에 서기 전이라면 감정이 요동하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기에 ‘감사하자, 기뻐하자.’ 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참지만, 마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반면에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전혀 요동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기에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지 않지요. 예수님과 같이 원수라도 축복하고 상대가 범죄하지 않도록 긍휼히 여기며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이라 해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반응이 다르고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마음의 향이 다른 것입니다.
다른 예로, 만일 부모님이 위독하여 급히 수술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이때 돈가방을 주웠다면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서는 그 돈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선한 것을 좇으려는 영의 마음과 자기 욕심을 좇으려는 육의 마음이 싸웁니다. 그러다가 ‘이 돈이 너무 필요하다.’ 하면서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양심의 가책은 있지만 자신이 써버릴 수 있지요.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는 ‘이 돈만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 하는 비진리의 생각이 잠시 틈탈 수는 있지만 결국 선한 양심을 좇아 주인을 찾아 줍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물질이 필요하다 해도 남의 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고민하지 않습니다. ‘돈을 잃은 주인이 얼마나 걱정할까?’ 염려해 한시라도 빨리 주인을 찾아 주려는 마음뿐이지요. 이런 마음이 되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없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어서 사람과의 문제나 어떤 환경에 따라 힘이 들고 곤고한 것인데, 악이 없으니 항상 성령 충만하고 행복하며 평안합니다.
2. 믿음의 4단계에 주어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
천국의 모든 처소는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곳입니다. 어둠은 조금도 없고 사랑과 기쁨만 있지요. 곳곳에는 천사들이 있고 감미로운 찬양이 흐르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의 영광도 믿음의 단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낙원이나 1, 2천층에는 많은 천사가 있어서 천국을 관리하고 때를 좇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수종 드는 천사가 딸려 있지는 않습니다. 3천층 이상의 천국에 들어가야 각 사람에게 수종 드는 천사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얼마나 더 성결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에 따라 천사의 숫자가 달라집니다. 천사가 수종 드는 것도 천국의 처소에 따라 다른 것을 볼 수 있지요. 3천층에서는 천사가 주인의 마음을 읽고 순종합니다. 주인이 과일을 먹고 싶어 하면 과일을 따다 주지요. 하지만 2천층의 천사는 과일을 가져오라고 명해야 움직입니다.
또 3천층 이상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구름 자가용이 주어지는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은 개인 소유의 구름 자가용을, 3천층에 들어간 사람은 공동 소유의 구름 자가용을 탈 수 있습니다. 천국의 구름은, 이 세상의 구름과 다릅니다.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장식품과 같지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고, 솔로몬왕이 성전을 봉헌할 때는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해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말씀하셨지요(마 26:64).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천국 구름으로 만들어진 구름 자가용을 타려면 3천층 이상의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3천층 이상에 들어간 사람은 겉모습만 보아도 2천층의 사람과 큰 차이가 납니다. 각 사람에게 영광의 빛이 다르고 옷과 옷의 문양, 달린 장식, 머리 모양 등이 달라서 얼마나 성결된 사람인지,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인지를 금방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3천층의 집은 어떻게 지어졌을까요? 2천층의 건물은 모두 단층이지만 3천층부터는 복층 건물입니다. 이 땅에서는 땅이 좁으니 높은 빌딩이 필요하지만, 천국은 끝없이 넓으므로 건물을 높이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집은 정금과 보석으로 장식돼 있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로 화려하게 단장된 정원과 호수가 있습니다. 2천층에서는 호수나 골프장, 수영장 등 한 가지 부속시설을 가질 수 있지만 3천층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백만장자라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게 꾸며져 있지요.
또한 2천층과 다른 점은 집에 문패가 없다는 것인데 집 자체에서 주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영적인 향이 흘러나와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영적인 향이 다른 것처럼 그 집에서 흘러나오는 향과 빛도 다릅니다. 주인이 성결되어 하나님을 닮을수록 더 아름다운 빛과 향이 나오지요. 천국에는 이 땅의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영리하고 온순한 동물과 새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3천층에서는 야고보서 1장 12절에 “…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말씀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했는데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영적인 충성을 말합니다. 즉 순교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세상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린 사람, 온전히 성결된 사람이 되어야 죽도록 충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결을 이루고 생명을 다해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 3천층에 들어가며, 그에 대한 상급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비록 성결을 온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한 사람은 3천층에 들어가며,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물론 참된 믿음과 사랑으로 생명을 드린 경우여야 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리라 하는 사모함과 소망으로 결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매 순간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믿음의 4단계가 들어가는 3천층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2천층의 집은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 형태지만 3천층의 집은 단층이다.
② 성결하며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 들어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
③ 2천층과 다른 점은 문패가 없고, 집 자체에서 주인의 향이 흘러나온다.
④ 3천층에서는 천사가 주인의 마음을 읽고 순종하지만, 2천층에서는 천사에게 명해야만 움직인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구름 자가용’이란?
천국의 교통수단으로 3천층에 들어간 영혼들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다.
구름 자가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유한 사람의 영광과 위엄과 권세를 나타내 준다. 주로 천사가 운전하며, 혼자 탈 수 있는 개인용과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탈 수 있는 것이 있다.
2024-06-14
제24과천국의 처소와 면류관(3)
마태복음 7:24~25
읽을말씀 : 마태복음 7:24~25 | 외울말씀 : 마태복음 7:24 | 참고 말씀: 베드로전서 5:2~4
교육목표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알아본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행하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성장하여 점차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서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행함으로 나타나는 죄를 버리게 됩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행함으로 나타내는 죄, 곧 육체의 일을 범할 때도 있지만 3단계에 이르면 당연히 육체의 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부터는 오히려 행함이 변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애매하게 욕하고 책망하는 말을 듣는다 해도 잠잠히 참으며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자 노력하지요. 어찌하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사람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이 볼 때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니, 뭔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므로 의무감 속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함이 나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과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하여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한 주간 재난이나 질병, 사고에서 지키시며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물적 주권을 인정하여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함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서 알지만 행치 못하고 아는 데 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는 마음으로 깨달아 행함으로 나타내기에 믿음의 2단계와 믿음의 3단계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또한 믿음의 3단계에서는 눈에 드러나는 비진리를 버려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죄, 곧 육신의 일을 버리며 마음의 죄성까지 뽑아 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며 마음의 죄성이 온전히 뽑힐 때까지 계속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면 믿음의 4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3단계 초입과 믿음의 반석
믿음의 단계가 같다고 해도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은 다릅니다. 믿음의 2단계를 1에서 100퍼센트까지 나눌 때 100퍼센트에 가까울수록 믿음의 3단계에 이른 것이며, 믿음의 3단계에서 100퍼센트가 되어야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갑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말씀대로 행한다 해도 처음에는 마음에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은 하지만,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두 마음이 서로 싸우지요. 진리대로 행하기는 하되 선을 좇으려는 영의 생각과 악을 좇으려는 육신의 생각이 싸우는 것입니다.
3단계 중에서도 초입이라면 어려움을 만나는 순간 ‘너무 힘들다.’ 하는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어 충만함이 사라지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성령의 음성을 들으므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왜 낙심하는가.’ 하고 마음을 진리로 다지게 됩니다. 그리고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여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으면 더 큰 감사와 기쁨이 솟아납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60퍼센트 이상에 이르면 마음에서 죄성이 많이 버려진 상태이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악을 발하지 않으려고 애써 참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죄성을 버린 만큼 악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낙심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요. 혹 순간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스친다 해도 즉시 몰아내고 감사와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25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시험이나 환난에도 요동하지 않고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는 믿음이 되면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3단계에서 60퍼센트 이상이 되면 ‘믿음의 반석’ 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깨달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반석에 들어서면 신앙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신이 납니다. 70~80퍼센트가 되면 반석에 온전히 선 것이지요. 이때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저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믿음의 4단계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대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절대 미워하지 않습니다. 급히 돈이 필요할 때 지갑을 주웠다 해도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주인을 찾아 주려는 마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지 않고 즉시로 선을 좇으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3. 믿음의 3단계에 주어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
믿음의 3단계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는 2천층입니다. 다세대 주택 형태의 집이 주어지는 1천층과는 달리 독립된 주택이 주어집니다. 단층이지만 이 땅의 어떤 호화로운 저택이나 별장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꽃과 나무들로 잘 단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가장 원하는 부속시설이 한 가지씩 주어집니다. 아름다운 호수 혹은 정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수영장을 가질 수 있지요. 기화요초로 가득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이 노니는 아름다운 산책길 또는 무도회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2천층에서는 이 중 하나만 가질 수 있기에 필요에 따라 다른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고 시설을 사용한다 해도 서로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섬길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으니 기쁨으로 사용을 허락하고 사용하는 사람도 평안하게 즐길 수 있지요. 집에는 문패가 달려 있어 천국 글씨로 주인의 이름과, 이 땅에서 섬기던 교회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2천층의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벧전 5:2~4). 믿음의 3단계의 영혼들은 마음에 온전한 할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이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처소에 거하게 되고 자신이 행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주시므로 감사가 넘치지만, 그래도 성결된 사람이 가는 3천층이나 온 영의 사람이 가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2천층과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천국에는 시기 질투가 없기 때문에 더 좋은 천국의 영광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이 누리지 못한다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더 큰 영광을 누린다 해도 함께 기뻐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처소와 상급만으로도 감사와 행복이 넘치지요. 하지만 안타깝고 민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사랑과 기회를 주셨는데도 온전히 죄를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2천층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새 예루살렘을 향해 쉬지 않고 침노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변화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씀했으니 주어진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말씀과 기도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부지런히 천국을 침노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태복음 7장 24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믿음의 3단계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독립된 주택과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② 주인이 가장 원하는 부속시설이 한 가지씩 주어진다.
③ 2천층의 집에는 문패가 없으며, 향으로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있다.
④ 믿음의 3단계 60퍼센트가 되면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육신의 일’이란?
미움, 시기, 교만, 판단, 정죄, 간음 등 아직 행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로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죄의 성질을 말한다.
교육목표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알아본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행하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성장하여 점차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서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행함으로 나타나는 죄를 버리게 됩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행함으로 나타내는 죄, 곧 육체의 일을 범할 때도 있지만 3단계에 이르면 당연히 육체의 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부터는 오히려 행함이 변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애매하게 욕하고 책망하는 말을 듣는다 해도 잠잠히 참으며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자 노력하지요. 어찌하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사람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이 볼 때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니, 뭔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므로 의무감 속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함이 나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과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하여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한 주간 재난이나 질병, 사고에서 지키시며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물적 주권을 인정하여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함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서 알지만 행치 못하고 아는 데 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는 마음으로 깨달아 행함으로 나타내기에 믿음의 2단계와 믿음의 3단계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또한 믿음의 3단계에서는 눈에 드러나는 비진리를 버려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죄, 곧 육신의 일을 버리며 마음의 죄성까지 뽑아 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며 마음의 죄성이 온전히 뽑힐 때까지 계속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면 믿음의 4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3단계 초입과 믿음의 반석
믿음의 단계가 같다고 해도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은 다릅니다. 믿음의 2단계를 1에서 100퍼센트까지 나눌 때 100퍼센트에 가까울수록 믿음의 3단계에 이른 것이며, 믿음의 3단계에서 100퍼센트가 되어야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갑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말씀대로 행한다 해도 처음에는 마음에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은 하지만,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두 마음이 서로 싸우지요. 진리대로 행하기는 하되 선을 좇으려는 영의 생각과 악을 좇으려는 육신의 생각이 싸우는 것입니다.
3단계 중에서도 초입이라면 어려움을 만나는 순간 ‘너무 힘들다.’ 하는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어 충만함이 사라지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성령의 음성을 들으므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왜 낙심하는가.’ 하고 마음을 진리로 다지게 됩니다. 그리고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여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으면 더 큰 감사와 기쁨이 솟아납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60퍼센트 이상에 이르면 마음에서 죄성이 많이 버려진 상태이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악을 발하지 않으려고 애써 참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죄성을 버린 만큼 악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낙심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요. 혹 순간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스친다 해도 즉시 몰아내고 감사와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25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시험이나 환난에도 요동하지 않고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는 믿음이 되면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3단계에서 60퍼센트 이상이 되면 ‘믿음의 반석’ 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깨달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반석에 들어서면 신앙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신이 납니다. 70~80퍼센트가 되면 반석에 온전히 선 것이지요. 이때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저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믿음의 4단계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대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절대 미워하지 않습니다. 급히 돈이 필요할 때 지갑을 주웠다 해도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주인을 찾아 주려는 마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지 않고 즉시로 선을 좇으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3. 믿음의 3단계에 주어지는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
믿음의 3단계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는 2천층입니다. 다세대 주택 형태의 집이 주어지는 1천층과는 달리 독립된 주택이 주어집니다. 단층이지만 이 땅의 어떤 호화로운 저택이나 별장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꽃과 나무들로 잘 단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가장 원하는 부속시설이 한 가지씩 주어집니다. 아름다운 호수 혹은 정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수영장을 가질 수 있지요. 기화요초로 가득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이 노니는 아름다운 산책길 또는 무도회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2천층에서는 이 중 하나만 가질 수 있기에 필요에 따라 다른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고 시설을 사용한다 해도 서로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섬길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으니 기쁨으로 사용을 허락하고 사용하는 사람도 평안하게 즐길 수 있지요. 집에는 문패가 달려 있어 천국 글씨로 주인의 이름과, 이 땅에서 섬기던 교회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2천층의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벧전 5:2~4). 믿음의 3단계의 영혼들은 마음에 온전한 할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이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처소에 거하게 되고 자신이 행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주시므로 감사가 넘치지만, 그래도 성결된 사람이 가는 3천층이나 온 영의 사람이 가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2천층과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천국에는 시기 질투가 없기 때문에 더 좋은 천국의 영광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이 누리지 못한다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더 큰 영광을 누린다 해도 함께 기뻐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처소와 상급만으로도 감사와 행복이 넘치지요. 하지만 안타깝고 민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사랑과 기회를 주셨는데도 온전히 죄를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2천층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새 예루살렘을 향해 쉬지 않고 침노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변화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씀했으니 주어진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말씀과 기도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부지런히 천국을 침노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태복음 7장 24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믿음의 3단계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독립된 주택과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② 주인이 가장 원하는 부속시설이 한 가지씩 주어진다.
③ 2천층의 집에는 문패가 없으며, 향으로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있다.
④ 믿음의 3단계 60퍼센트가 되면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육신의 일’이란?
미움, 시기, 교만, 판단, 정죄, 간음 등 아직 행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로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죄의 성질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