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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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제50과여호와의 묵시와 정한 때
하박국 2:2~4
읽을말씀 : 하박국 2:2~4 | 외울말씀 : 아모스 3:7 l 참고 말씀: 마태복음 24장
교육목표 :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게 한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한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남유다는 요시야왕 시대가 끝나고 여호아하스왕을 거쳐 여호야김의 통치 시대로 오면서 불의와 유혈로 가득 찹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를 탄식하며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나님은 남유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 섭리와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을 하나님께서는 열국 가운데 일어나는 세계사의 현장을 바라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는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앞으로 갈대아인을 일으킬 것을 알려 주십니다(합 1:5~11). 갈대아인이란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바벨론 사람들은 사나웠고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 예언이 성취되어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급기야 유다를 멸망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하나님의 선민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먼저 심판하지 않고 남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하였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본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것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것입니다(전 12:14).
믿음이 있으면 겸손히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38~40절에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말씀했지요. 또한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며 심판에 이릅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우리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지요.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하도 재촉하니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 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지켜 주셨지요.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고, 심판의 때가 되면 지체치 않고 이뤄집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환난도 속히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정한 때가 있음을 미리 알려 주고 피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십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의인 된 하나님의 자녀는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늘날은 악이 관영할 뿐만 아니라 악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고, 14절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었습니까? 또한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요.
다니엘 12장 4절에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했습니다. 요즈음 국가 간에도 얼마나 빨리 왕래합니까?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일일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또 급격히 발달하는 지식과 정보로 과학 문명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33절에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곧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라가 멸망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를 찾아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께서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셨으니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때가 악하여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할 것을 알아 세월을 아낌은 물론 어둠의 일 즉 비진리, 죄를 열심히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인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요(롬 13:11~14).
그렇지 않고 세상을 돌아본다면 롯의 아내처럼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피하여 소돔성에서 나온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는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결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고 계십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했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며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구원은 물론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유다를 어느 나라를 통해 심판하셨을까요?
2. 무화과나무는 ( )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 )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벨론’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경 여호야긴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남겨 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3차 바벨론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B.C. 539년경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여 가장 수명이 짧은 제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교육목표 :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게 한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한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남유다는 요시야왕 시대가 끝나고 여호아하스왕을 거쳐 여호야김의 통치 시대로 오면서 불의와 유혈로 가득 찹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를 탄식하며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나님은 남유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 섭리와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을 하나님께서는 열국 가운데 일어나는 세계사의 현장을 바라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는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앞으로 갈대아인을 일으킬 것을 알려 주십니다(합 1:5~11). 갈대아인이란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바벨론 사람들은 사나웠고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 예언이 성취되어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급기야 유다를 멸망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하나님의 선민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먼저 심판하지 않고 남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하였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본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것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것입니다(전 12:14).
믿음이 있으면 겸손히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38~40절에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말씀했지요. 또한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며 심판에 이릅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우리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지요.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하도 재촉하니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 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지켜 주셨지요.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고, 심판의 때가 되면 지체치 않고 이뤄집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환난도 속히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정한 때가 있음을 미리 알려 주고 피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십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의인 된 하나님의 자녀는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늘날은 악이 관영할 뿐만 아니라 악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고, 14절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었습니까? 또한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요.
다니엘 12장 4절에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했습니다. 요즈음 국가 간에도 얼마나 빨리 왕래합니까?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일일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또 급격히 발달하는 지식과 정보로 과학 문명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33절에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곧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라가 멸망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를 찾아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께서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셨으니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때가 악하여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할 것을 알아 세월을 아낌은 물론 어둠의 일 즉 비진리, 죄를 열심히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인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요(롬 13:11~14).
그렇지 않고 세상을 돌아본다면 롯의 아내처럼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피하여 소돔성에서 나온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는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결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고 계십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했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며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구원은 물론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유다를 어느 나라를 통해 심판하셨을까요?
2. 무화과나무는 ( )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 )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벨론’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경 여호야긴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남겨 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3차 바벨론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B.C. 539년경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여 가장 수명이 짧은 제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2019-12-06
제49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누가복음 8:43~48
읽을말씀 : 누가복음 8:43~48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6 l 참고 말씀/ 룻기 1장, 창세기 50장
교육목표 : 혈루증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 치료받은 것처럼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무엇이든지 응답받게 한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같이 동조하거나 악을 행치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 경계하는 계기로 삼지요. 또한 선하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귀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은 이런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온 혈루증 여인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어떠한 믿음을 지녔기에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지요.
혈루증은 습관성 자궁 출혈로 계속하여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그런 생활을 1, 2년도 아닌 열두 해나 계속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신도 허약해졌겠습니까? 이 의원 저 의원을 찾아다니며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돈만 허비하고 병은 더 중해졌습니다. 오랜 병으로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세상을 원망하며 탄식과 고통 가운데 좌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희망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문둥병, 중풍 등 갖가지 병든 사람이 치료된다는 것입니다. 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케 되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으며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여인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여인은 중심이 선하기 때문에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든 사람, 치료받고자 온 사람 등 어찌나 에워싼 무리가 많던지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마음으로 애써 손을 뻗어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혈루 근원이 마르고 정상으로 회복되었지요. 여인은 마음이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그 앞에 나아왔고, 옷자락만 만지고도 나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온 여인은 믿음으로 새 삶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 의인은 어떠한 중심으로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의인은 어떠한 중심을 가진 사람일까요? 바로 룻이나 요셉과 같은 마음입니다. 먼저 룻을 살펴보겠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기근이 든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 두 아들 역시 죽고 말지요.
나오미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다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홀로 된 며느리들이 불쌍하여 새 출발하라 한 것이지요. 이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울면서 나오미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죽는 일 외에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고백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으며 봉양하였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자녀 된 도리를 다한 룻은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룻에게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까요?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도리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중심이 의롭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그러한 중심을 기뻐하여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좇지 않고 큰 손해를 본다 해도 선한 길을 택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영광 돌려 나갑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3년 만에 애굽 총리가 되었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이복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혹여 보복은 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그에게 행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구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이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며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창 50:19~21).
만일 여러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요셉처럼 행할 수 있겠는지요? 요셉은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악하니 요셉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판단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인과 악인의 마음씀이 다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하고 의로웠다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실수로 범죄했다 해도 겸허히 아우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3. 의인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는가
의로운 마음과 중심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갈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혈루증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기고 접촉조차 피했지요(레 15:25). 따라서 여인은 누구 앞에 나서거나 감히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조차 민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니 그분 앞에 서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분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인처럼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응답을 받습니다. 배움이 부족하다든가 가난하다, 못났다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하나님 앞에 구하기도 민망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다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진정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아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 중심이 중요하지, 부족해서 혹은 나약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그 자체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가 치료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믿음을 소유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축복받을 만한 중심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어 축복해 주시지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 다윗을 찾아내어 왕으로 삼으셨고, 보잘것없고 아무 희망이 없는 룻이었지만 그 중심이 선하고 의로우니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주셨습니다. 또 에스더처럼 피지배국의 사람이라 해도 일국의 왕후로 만들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을 수 있는 중심, 선하고 겸비한 중심을 이루어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 )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 )이 있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받을 수 있었다.
2. 우리가 룻에게서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 )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1~20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룻의 선’
①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음은 물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를 좇는 길을 선택했다.
② 억지로 도리를 좇은 것이 아니라 성실과 진심으로 변함없이 행했다.
* 훗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복을 받았고, 천국에서도 존귀한 여인으로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렀다.
교육목표 : 혈루증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 치료받은 것처럼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무엇이든지 응답받게 한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같이 동조하거나 악을 행치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 경계하는 계기로 삼지요. 또한 선하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귀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은 이런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온 혈루증 여인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어떠한 믿음을 지녔기에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지요.
혈루증은 습관성 자궁 출혈로 계속하여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그런 생활을 1, 2년도 아닌 열두 해나 계속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신도 허약해졌겠습니까? 이 의원 저 의원을 찾아다니며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돈만 허비하고 병은 더 중해졌습니다. 오랜 병으로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세상을 원망하며 탄식과 고통 가운데 좌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희망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문둥병, 중풍 등 갖가지 병든 사람이 치료된다는 것입니다. 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케 되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으며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여인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여인은 중심이 선하기 때문에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든 사람, 치료받고자 온 사람 등 어찌나 에워싼 무리가 많던지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마음으로 애써 손을 뻗어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혈루 근원이 마르고 정상으로 회복되었지요. 여인은 마음이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그 앞에 나아왔고, 옷자락만 만지고도 나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온 여인은 믿음으로 새 삶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 의인은 어떠한 중심으로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의인은 어떠한 중심을 가진 사람일까요? 바로 룻이나 요셉과 같은 마음입니다. 먼저 룻을 살펴보겠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기근이 든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 두 아들 역시 죽고 말지요.
나오미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다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홀로 된 며느리들이 불쌍하여 새 출발하라 한 것이지요. 이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울면서 나오미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죽는 일 외에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고백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으며 봉양하였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자녀 된 도리를 다한 룻은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룻에게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까요?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도리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중심이 의롭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그러한 중심을 기뻐하여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좇지 않고 큰 손해를 본다 해도 선한 길을 택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영광 돌려 나갑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3년 만에 애굽 총리가 되었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이복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혹여 보복은 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그에게 행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구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이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며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창 50:19~21).
만일 여러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요셉처럼 행할 수 있겠는지요? 요셉은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악하니 요셉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판단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인과 악인의 마음씀이 다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하고 의로웠다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실수로 범죄했다 해도 겸허히 아우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3. 의인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는가
의로운 마음과 중심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갈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혈루증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기고 접촉조차 피했지요(레 15:25). 따라서 여인은 누구 앞에 나서거나 감히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조차 민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니 그분 앞에 서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분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인처럼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응답을 받습니다. 배움이 부족하다든가 가난하다, 못났다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하나님 앞에 구하기도 민망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다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진정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아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 중심이 중요하지, 부족해서 혹은 나약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그 자체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가 치료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믿음을 소유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축복받을 만한 중심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어 축복해 주시지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 다윗을 찾아내어 왕으로 삼으셨고, 보잘것없고 아무 희망이 없는 룻이었지만 그 중심이 선하고 의로우니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주셨습니다. 또 에스더처럼 피지배국의 사람이라 해도 일국의 왕후로 만들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을 수 있는 중심, 선하고 겸비한 중심을 이루어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 )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 )이 있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받을 수 있었다.
2. 우리가 룻에게서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 )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1~20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룻의 선’
①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음은 물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를 좇는 길을 선택했다.
② 억지로 도리를 좇은 것이 아니라 성실과 진심으로 변함없이 행했다.
* 훗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복을 받았고, 천국에서도 존귀한 여인으로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렀다.
2019-11-29
제48과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7~8
읽을말씀 : 디모데후서 4:7~8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4:7 ㅣ 참고 말씀: 히브리서 11:6
교육목표 : 믿음을 지킴으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응답받아 축복된 삶을 영위하며 소망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아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법을 행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지요.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성령 받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에 베드로는 당당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결국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니 생명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키는 수제자가 되었지요.
2. 믿음을 굳게 지킨 선진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고,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제자로 수학하였습니다. 독실한 유대교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지요.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였지요(딤후 4:7~8).
그러면 다니엘은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은 바사 제국 총리가 됐을 때 시기하는 무리의 궤계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한 달 동안 왕 외에 사람이나 신 앞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금령을 반포하게 하였지요. 이를 알면서도 다니엘은 습관을 좇아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앞일에 대해 밝히 알려 주시며 높여 주셨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로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지려 할 때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다니엘 3장 17~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같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과감히 비진리를 끊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설령 핍박을 받는다 해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지요. 만일 주를 위해 핍박을 받고 죽임 당한다면 천국에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과 달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궤계를 꾸민 이세벨에게 매수당한 두 거짓 증인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모함으로 무죄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요. 믿음을 굳게 지킨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행치 않습니다. 어떤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을 하며 믿음을 저버립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아람 나라에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남유다 여호사밧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선지자들에게 들어 보자고 제안하지요. 그래서 아합왕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중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흔들며 승리를 장담하지요.
반면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며, 아합왕은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승리를 호언하지요. 아합은 미가야를 투옥시키고 여호사밧 연합군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시드기야와 사백 인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왕이 맞아 전사하였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지요. 믿음을 저버리고 거짓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맞을 리가 없음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데마 역시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재차 투옥되자 그를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지요. 바울과 함께 고난당하기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기록합니다(딤후 4:10).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진리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호수아 당시 아간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범죄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 후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 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지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그 행한 일을 고하라고 하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수 7:21).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였고, 범죄한 아간은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자기 유익을 좇아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지요. 여러분은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투옥되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2.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뻔하며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신약 시대 권능의 사도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79~1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데마’
데마는 사도 바울 일행과 함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에서 멀리 떨어진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할 때 ‘데마’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할 때는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갇혀 있을 때였다. 그만큼 데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울의 곁을 지키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훗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배신하고 떠나갔다(딤후 4:10). 한때는 바울의 고난에 함께한 그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바울이 다시 감옥에 갇히자 결국 변질되어 믿음을 잃고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교육목표 : 믿음을 지킴으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응답받아 축복된 삶을 영위하며 소망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아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법을 행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지요.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성령 받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에 베드로는 당당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결국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니 생명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키는 수제자가 되었지요.
2. 믿음을 굳게 지킨 선진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고,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제자로 수학하였습니다. 독실한 유대교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지요.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였지요(딤후 4:7~8).
그러면 다니엘은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은 바사 제국 총리가 됐을 때 시기하는 무리의 궤계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한 달 동안 왕 외에 사람이나 신 앞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금령을 반포하게 하였지요. 이를 알면서도 다니엘은 습관을 좇아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앞일에 대해 밝히 알려 주시며 높여 주셨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로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지려 할 때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다니엘 3장 17~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같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과감히 비진리를 끊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설령 핍박을 받는다 해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지요. 만일 주를 위해 핍박을 받고 죽임 당한다면 천국에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과 달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궤계를 꾸민 이세벨에게 매수당한 두 거짓 증인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모함으로 무죄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요. 믿음을 굳게 지킨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행치 않습니다. 어떤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을 하며 믿음을 저버립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아람 나라에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남유다 여호사밧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선지자들에게 들어 보자고 제안하지요. 그래서 아합왕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중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흔들며 승리를 장담하지요.
반면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며, 아합왕은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승리를 호언하지요. 아합은 미가야를 투옥시키고 여호사밧 연합군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시드기야와 사백 인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왕이 맞아 전사하였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지요. 믿음을 저버리고 거짓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맞을 리가 없음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데마 역시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재차 투옥되자 그를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지요. 바울과 함께 고난당하기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기록합니다(딤후 4:10).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진리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호수아 당시 아간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범죄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 후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 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지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그 행한 일을 고하라고 하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수 7:21).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였고, 범죄한 아간은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자기 유익을 좇아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지요. 여러분은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투옥되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2.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뻔하며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신약 시대 권능의 사도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79~1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데마’
데마는 사도 바울 일행과 함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에서 멀리 떨어진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할 때 ‘데마’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할 때는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갇혀 있을 때였다. 그만큼 데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울의 곁을 지키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훗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배신하고 떠나갔다(딤후 4:10). 한때는 바울의 고난에 함께한 그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바울이 다시 감옥에 갇히자 결국 변질되어 믿음을 잃고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2019-11-22
제47과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 2:1~5
읽을말씀 : 마가복음 2:1~5 | 외울말씀 : 출애굽기 15:26 l 참고 말씀: 마태복음 8:13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의인과 악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신명기 34장 8절 이하를 보면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모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했지요.
이와 반면 악인의 죽음은 어떠합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아돌프 히틀러는 전쟁이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환호했겠습니까.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시돈 왕의 딸 이세벨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로 시집온 그녀는 왕과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물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 한 번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고민할 때에 거짓 증인을 세우고 성의 유력한 사람을 매수하여 무죄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악행을 거듭한 이세벨은 신하들의 손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시체를 개들이 먹으므로 장사조차 지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이처럼 악인에게 힘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듯하지만 결국 힘이 사라지면 모두가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립니다.
2.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운 중풍병자와 친구들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에 살고 있던 한 중풍병자는 병이 중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는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을 그대로 믿고 마음에 새기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중풍병자는 자신이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 앞으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중풍병자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는데 정작 가서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집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들것에 실린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 중심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행함을 보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도착은 했으나 도저히 용신할 수 없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으니 거기에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붕까지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았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였는지요.
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하든 예수님 앞에 데려가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우정과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어떤 문제를 당했을 때에 그를 살리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중심을 지니고 있었지요. 사람들 중에는 그 행함에 따라 잘 죽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슬퍼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리려 했던 것은 그만큼 이 중풍병자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의인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실 때에 장례 행렬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성 안에 사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염없이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청년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눅 7:11~16). 어려운 여건에서 기른 사랑스러운 독자를 잃었으니 과부의 참담함과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여인은 아들을 다시 살려 준다면 자신의 생명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인은 생명 다해 충성하며 변함없이 붙좇을 중심임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욥바에 사는 여제자 다비다는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죽자 생전에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니 모든 과부가 그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 지어 준 옷가지를 다 내보였습니다. 자신의 안락을 누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다비다의 행함에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행 9:36~40).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여인의 행함이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 심히 핍박받던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다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큰 믿음의 행함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의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의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야 하겠습니까?
첫째,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후덕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욥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비록 변론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친구들은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같이 염려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욥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욥을 위한다면서 그를 깨우치려 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고 자기 보기에 의였기 때문에 변론이 일어났지만 처음부터 그런 동기를 가지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인인지 아닌지 스스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이라면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의 형제들이, 가정에서는 가족이, 일가친척과 이웃이 따릅니다. 의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 사랑과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축복해 주십니다.
둘째, 의인에게는 믿음의 행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친구가 죽어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믿음으로 구제하고 도우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이런저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친구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어떤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지요.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고 분명히 역사하여 불가능한 것까지라도 가능케 하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니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지만 도저히 용신할 수 없자 어떠한 행함을 내보였을까요?
2. 의인의 특징 두 가지를 써 보세요.
①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 )이 있다.
② 의인에게는 믿음의 ( )이 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65~1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세벨’
시돈 왕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아합왕과 결혼하면서 시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와 왕은 물론 신하와 백성까지도 우상숭배에 물들게 했다. 이에 북이스라엘은 공의의 심판에 따라 삼 년 반이나 계속된 가뭄과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이세벨은 요한계시록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서신에도 등장한다.
마치 하나님과 교통하는 선지자인 양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우상숭배, 곧 영적 음행에 빠지게 한 ‘자칭 선지자’의 표상으로 그 이름이 거론되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의인과 악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신명기 34장 8절 이하를 보면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모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했지요.
이와 반면 악인의 죽음은 어떠합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아돌프 히틀러는 전쟁이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환호했겠습니까.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시돈 왕의 딸 이세벨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로 시집온 그녀는 왕과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물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 한 번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고민할 때에 거짓 증인을 세우고 성의 유력한 사람을 매수하여 무죄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악행을 거듭한 이세벨은 신하들의 손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시체를 개들이 먹으므로 장사조차 지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이처럼 악인에게 힘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듯하지만 결국 힘이 사라지면 모두가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립니다.
2.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운 중풍병자와 친구들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에 살고 있던 한 중풍병자는 병이 중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는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을 그대로 믿고 마음에 새기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중풍병자는 자신이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 앞으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중풍병자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는데 정작 가서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집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들것에 실린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 중심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행함을 보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도착은 했으나 도저히 용신할 수 없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으니 거기에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붕까지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았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였는지요.
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하든 예수님 앞에 데려가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우정과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어떤 문제를 당했을 때에 그를 살리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중심을 지니고 있었지요. 사람들 중에는 그 행함에 따라 잘 죽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슬퍼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리려 했던 것은 그만큼 이 중풍병자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의인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실 때에 장례 행렬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성 안에 사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염없이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청년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눅 7:11~16). 어려운 여건에서 기른 사랑스러운 독자를 잃었으니 과부의 참담함과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여인은 아들을 다시 살려 준다면 자신의 생명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인은 생명 다해 충성하며 변함없이 붙좇을 중심임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욥바에 사는 여제자 다비다는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죽자 생전에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니 모든 과부가 그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 지어 준 옷가지를 다 내보였습니다. 자신의 안락을 누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다비다의 행함에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행 9:36~40).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여인의 행함이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 심히 핍박받던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다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큰 믿음의 행함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의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의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야 하겠습니까?
첫째,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후덕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욥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비록 변론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친구들은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같이 염려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욥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욥을 위한다면서 그를 깨우치려 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고 자기 보기에 의였기 때문에 변론이 일어났지만 처음부터 그런 동기를 가지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인인지 아닌지 스스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이라면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의 형제들이, 가정에서는 가족이, 일가친척과 이웃이 따릅니다. 의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 사랑과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축복해 주십니다.
둘째, 의인에게는 믿음의 행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친구가 죽어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믿음으로 구제하고 도우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이런저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친구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어떤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지요.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고 분명히 역사하여 불가능한 것까지라도 가능케 하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니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지만 도저히 용신할 수 없자 어떠한 행함을 내보였을까요?
2. 의인의 특징 두 가지를 써 보세요.
①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 )이 있다.
② 의인에게는 믿음의 ( )이 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65~1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세벨’
시돈 왕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아합왕과 결혼하면서 시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와 왕은 물론 신하와 백성까지도 우상숭배에 물들게 했다. 이에 북이스라엘은 공의의 심판에 따라 삼 년 반이나 계속된 가뭄과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이세벨은 요한계시록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서신에도 등장한다.
마치 하나님과 교통하는 선지자인 양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우상숭배, 곧 영적 음행에 빠지게 한 ‘자칭 선지자’의 표상으로 그 이름이 거론되었다.
2019-11-15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갈라디아서 6:9 ㅣ 참고 말씀: 야고보서 2:2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람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직접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바로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이 그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가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고 감정을 품으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두기 위해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 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습니다.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며 여리고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
②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 )과 행함을 내보여야 한다.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으며 대륙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있어서 고대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점령한 성읍으로 점령할 당시 백성들은 육 일 동안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돌고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수 6장).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재건하지 말라고 명했다. 만일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아합왕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재건하다가 장자와 계자가 죽는 화를 당했다(왕상 16:34).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람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직접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바로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이 그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가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고 감정을 품으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두기 위해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 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습니다.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며 여리고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
②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 )과 행함을 내보여야 한다.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으며 대륙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있어서 고대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점령한 성읍으로 점령할 당시 백성들은 육 일 동안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돌고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수 6장).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재건하지 말라고 명했다. 만일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아합왕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재건하다가 장자와 계자가 죽는 화를 당했다(왕상 16:34).
2019-11-08
제45과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브리서 11:6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6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6 l 참고 말씀: 민수기 14:7~9
교육목표 :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봄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운동선수 중에는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금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는 혹독한 훈련이 따릅니다. 그 과정을 잘 인내하여 금메달을 땄을 때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감독, 국민에게도 큰 기쁨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도 믿음의 훈련을 잘 마쳐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십니다. 학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부귀를 주실 수도 있고, 권세자로 세우거나 폐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8절에는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리한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적군을 물리쳐 승리하였습니다(삿 7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적의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니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해 주셨지요(대하 20:21~28).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는 물론, 사업이 위태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형통케 하며 크게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불화한 가정이라도 화평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핍박하던 배우자의 마음을 순간에 돌이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 드리느냐,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계속 머물렀다면 호화로운 궁전에서 마음껏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의 낙은 잠시 잠깐이고 결과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감히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믿음으로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애굽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길을 좇았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상 주심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갈 수 있었지요.
광야에서의 40년간 연단을 통해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 된 모세는 큰 기사와 표적을 나타냅니다.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며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을 높여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민 14:9).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들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다른 열 정탐꾼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했습니다. 즉 건장하고 힘센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왜소하여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의 보고에 백성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온 백성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포도 열매를 혼자 들기도 버거워 장정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동할 정도로 크고 탐스러웠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도 호전적이고 사나운 가나안 족속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철병거를 가진 족속도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아무런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 비한다면 가나안 거민들은 타고난 용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이나 문제보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 반석에서 물을 내어 수백만이 넘는 백성을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아무리 철병거로 무장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나안 거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영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계수된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군하면 무엇이든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 될 것이 없습니다.
3.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나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기도받고 단번에 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1년, 2년, 10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로 치료받은 뒤에 변치 않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중심이라면 아직은 믿음이 없다 해도 치료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고 얼마나 정성을 내보여 행하느냐에 따라 치료받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얼마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나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어려운 일, 즉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귀신이 나가는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행함과 정성과 중심, 그리고 사랑과 헌신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의롭고 선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 옵니다. 비진리와 악의 모습을 벗고 진리를 좇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 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육적인 믿음을 소유하는데 이것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우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서 행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쁘시게 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2.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떠한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3. 영적인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51~1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사밧왕’
유다 4대 왕으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대하 17장). 레위 사람, 제사장을 뽑아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공정한 재판을 하게 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들 여호람을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시켜 훗날 유다가 종교적으로 부패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교육목표 :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봄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운동선수 중에는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금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는 혹독한 훈련이 따릅니다. 그 과정을 잘 인내하여 금메달을 땄을 때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감독, 국민에게도 큰 기쁨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도 믿음의 훈련을 잘 마쳐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십니다. 학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부귀를 주실 수도 있고, 권세자로 세우거나 폐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8절에는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리한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적군을 물리쳐 승리하였습니다(삿 7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적의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니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해 주셨지요(대하 20:21~28).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는 물론, 사업이 위태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형통케 하며 크게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불화한 가정이라도 화평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핍박하던 배우자의 마음을 순간에 돌이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 드리느냐,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계속 머물렀다면 호화로운 궁전에서 마음껏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의 낙은 잠시 잠깐이고 결과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감히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믿음으로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애굽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길을 좇았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상 주심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갈 수 있었지요.
광야에서의 40년간 연단을 통해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 된 모세는 큰 기사와 표적을 나타냅니다.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며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을 높여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민 14:9).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들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다른 열 정탐꾼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했습니다. 즉 건장하고 힘센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왜소하여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의 보고에 백성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온 백성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포도 열매를 혼자 들기도 버거워 장정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동할 정도로 크고 탐스러웠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도 호전적이고 사나운 가나안 족속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철병거를 가진 족속도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아무런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 비한다면 가나안 거민들은 타고난 용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이나 문제보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 반석에서 물을 내어 수백만이 넘는 백성을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아무리 철병거로 무장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나안 거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영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계수된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군하면 무엇이든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 될 것이 없습니다.
3.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나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기도받고 단번에 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1년, 2년, 10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로 치료받은 뒤에 변치 않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중심이라면 아직은 믿음이 없다 해도 치료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고 얼마나 정성을 내보여 행하느냐에 따라 치료받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얼마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나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어려운 일, 즉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귀신이 나가는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행함과 정성과 중심, 그리고 사랑과 헌신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의롭고 선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 옵니다. 비진리와 악의 모습을 벗고 진리를 좇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 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육적인 믿음을 소유하는데 이것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우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서 행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쁘시게 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2.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떠한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3. 영적인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51~1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사밧왕’
유다 4대 왕으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대하 17장). 레위 사람, 제사장을 뽑아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공정한 재판을 하게 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들 여호람을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시켜 훗날 유다가 종교적으로 부패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2019-11-01
제44과들풀도 입히시거든
마태복음 6:26~33
읽을말씀 : 마태복음 6:26~3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6:33 ㅣ 참고 말씀: 전도서 1: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함으로 세상의 헛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고 아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질병이나 가족 간의 문제 등 이런저런 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의 분야
중국을 통일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진시황도 그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불과 50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고민하며 수고하고 힘써 무언가를 이루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하시지요(마 6:25~27). 만일 염려해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상할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 재물과 건강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염려하며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3장 17절 이하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땀 흘려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질병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진시황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2.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된 삶
솔로몬은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금이 넘쳐 나고 은은 돌같이 여길 정도였으며,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평지의 뽕나무같이 허다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예물을 가져오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쳤으니 그 권력과 명성은 어마어마했지요. 이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입은 옷이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9절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들에 핀 꽃은 자신이 수고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답게 핍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알맞은 햇볕과 온도를 주는 등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그만한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해야 했겠습니까? 사람이 열매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합니까?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수고와 물질이 필요한지요. 우리는 이처럼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데 들에 피는 꽃은 수고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히 피어납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것이 수고임을 깨닫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 원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 대가가 미미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많은 수고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죽음을 맞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명예나 권세, 부귀와 영화 등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정녕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요?
3.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들풀도 입히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헛되지 않은 삶을 살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이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 내 부모 형제, 일가친척에게 전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일터, 사업터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나라와 민족, 세계 복음화를 위해 불같이 기도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자기 삶을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이 잘되기 위하여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칩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어둠에서 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것, 성령의 소욕을 좇아 진리대로 행하며 성결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어떤 성도는 “그동안 여러 사명을 맡아 하나님 일을 했는데, 이젠 성결되기 위해 잠시 사명을 맡지 않고 열심히 기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만 구하겠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병행해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낼 때 위로부터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더욱 신속히 이루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2.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이 들에 핀 꽃보다도 못하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39~1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받았다.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고,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전을 세우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함으로 세상의 헛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고 아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질병이나 가족 간의 문제 등 이런저런 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의 분야
중국을 통일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진시황도 그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불과 50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고민하며 수고하고 힘써 무언가를 이루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하시지요(마 6:25~27). 만일 염려해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상할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 재물과 건강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염려하며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3장 17절 이하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땀 흘려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질병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진시황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2.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된 삶
솔로몬은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금이 넘쳐 나고 은은 돌같이 여길 정도였으며,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평지의 뽕나무같이 허다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예물을 가져오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쳤으니 그 권력과 명성은 어마어마했지요. 이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입은 옷이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9절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들에 핀 꽃은 자신이 수고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답게 핍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알맞은 햇볕과 온도를 주는 등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그만한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해야 했겠습니까? 사람이 열매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합니까?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수고와 물질이 필요한지요. 우리는 이처럼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데 들에 피는 꽃은 수고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히 피어납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것이 수고임을 깨닫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 원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 대가가 미미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많은 수고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죽음을 맞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명예나 권세, 부귀와 영화 등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정녕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요?
3.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들풀도 입히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헛되지 않은 삶을 살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이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 내 부모 형제, 일가친척에게 전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일터, 사업터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나라와 민족, 세계 복음화를 위해 불같이 기도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자기 삶을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이 잘되기 위하여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칩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어둠에서 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것, 성령의 소욕을 좇아 진리대로 행하며 성결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어떤 성도는 “그동안 여러 사명을 맡아 하나님 일을 했는데, 이젠 성결되기 위해 잠시 사명을 맡지 않고 열심히 기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만 구하겠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병행해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낼 때 위로부터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더욱 신속히 이루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2.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이 들에 핀 꽃보다도 못하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39~1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받았다.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고,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전을 세우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2019-10-25
제43과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태복음 15:24~28
읽을말씀 : 마태복음 15:24~28 | 외울말씀 : 로마서 1:17 ㅣ 참고 말씀: 사무엘상 21장
교육목표 :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큰 자가 되게 한다.
자존심이란 ‘자기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였기에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다윗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입니다. 그는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삼상 21장).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국으로 다윗은 사울의 휘하에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를 왕에게 알립니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곤경에 처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하며 쫓아내 버렸지요.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미친 척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블레셋으로부터 조공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자존심을 세우다 아기스의 손에 죽었다면 위대한 왕이 될 수 없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망정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이 가치가 있는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옳은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는 악은 행치 않았지요. 도리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에 비유하며 사울을 죽일 의사가 없다고 하자 이에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았습니다(삼상 24장). 결국 연단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높여 주셨고 그는 견고한 통일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2. 자존심을 내세우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사울과 시드기야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을 때에 회개하기는커녕 백성 앞에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워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실을 알고는 다윗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똑똑한 귀인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힘없는 백성만 유다에 남았지요. 이때 시드기야왕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 소환을 당해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리에 동맹관계를 맺고 내통하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지요.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지만 시드기야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선지자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세 번째 침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바벨론에 무려 1년 7개월간 포위되어 성 안의 보급 물자들이 완전히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와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한밤중에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완전히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왕은 배반한 시드기야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버리지요. 그리고 포로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인지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3. 겸비한 마음으로 응답받은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마 15:21~28).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지요.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큰소리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즉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지요. 여인이 계속하여 소리 지르자 제자들이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할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공손히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 취급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운함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구하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자 딸이 그때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를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았습니다.
4. 의로운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은, 오로지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분을 누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의롭고 겸비했기에 예수님이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을 때도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순간에 지혜를 짜내 “내가 이렇게 대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과 겸손이 그대로 나왔을 뿐이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며, 마음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육의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영의 마음,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 어떤 문제든 응답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중심이 겸비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해도 믿음의 행함이 나오므로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됩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에 변함이 없으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셔도 요지부동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 말씀에 겸손히 긍정의 고백을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내보이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자존심,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여 모든 것에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에게 가서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2.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 취급하였을 때 여인은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3. 나는 누구일까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망당했습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25~13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수로보니게’
팔레스타인 북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이르는 말이다.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수리아의 베니게란 뜻이다(막 7:26).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나안 여자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가나안이 베니게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교육목표 :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큰 자가 되게 한다.
자존심이란 ‘자기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였기에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다윗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입니다. 그는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삼상 21장).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국으로 다윗은 사울의 휘하에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를 왕에게 알립니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곤경에 처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하며 쫓아내 버렸지요.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미친 척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블레셋으로부터 조공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자존심을 세우다 아기스의 손에 죽었다면 위대한 왕이 될 수 없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망정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이 가치가 있는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옳은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는 악은 행치 않았지요. 도리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에 비유하며 사울을 죽일 의사가 없다고 하자 이에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았습니다(삼상 24장). 결국 연단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높여 주셨고 그는 견고한 통일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2. 자존심을 내세우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사울과 시드기야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을 때에 회개하기는커녕 백성 앞에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워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실을 알고는 다윗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똑똑한 귀인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힘없는 백성만 유다에 남았지요. 이때 시드기야왕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 소환을 당해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리에 동맹관계를 맺고 내통하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지요.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지만 시드기야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선지자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세 번째 침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바벨론에 무려 1년 7개월간 포위되어 성 안의 보급 물자들이 완전히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와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한밤중에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완전히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왕은 배반한 시드기야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버리지요. 그리고 포로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인지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3. 겸비한 마음으로 응답받은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마 15:21~28).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지요.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큰소리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즉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지요. 여인이 계속하여 소리 지르자 제자들이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할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공손히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 취급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운함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구하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자 딸이 그때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를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았습니다.
4. 의로운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은, 오로지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분을 누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의롭고 겸비했기에 예수님이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을 때도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순간에 지혜를 짜내 “내가 이렇게 대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과 겸손이 그대로 나왔을 뿐이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며, 마음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육의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영의 마음,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 어떤 문제든 응답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중심이 겸비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해도 믿음의 행함이 나오므로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됩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에 변함이 없으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셔도 요지부동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 말씀에 겸손히 긍정의 고백을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내보이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자존심,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여 모든 것에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에게 가서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2.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 취급하였을 때 여인은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3. 나는 누구일까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망당했습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25~13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수로보니게’
팔레스타인 북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이르는 말이다.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수리아의 베니게란 뜻이다(막 7:26).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나안 여자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가나안이 베니게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9-10-18
제42과일천 번제의 정성
열왕기상 3:4~12
읽을말씀 : 열왕기상 3:4~12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9:7 l 참고 말씀 / 말라기 1:6~9
교육목표 : 솔로몬왕처럼 하나님께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고 축복이 넘쳐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정성을 다한다면 뜻을 이루게 됨을 나타냅니다. 솔로몬왕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전무후무한 지혜는 물론 부와 영광까지 받았습니다.
1. 일천 번제를 지극 정성으로 드린 솔로몬
솔로몬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왕이 정치, 경제, 군사 등 전반적으로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안정 속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지요. 또한 솔로몬은 나단 선지자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무엇보다 먼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가져온 짐승을 하나하나 각을 떠서 불태워 그 향기로 드리는 제사법으로 많은 수고와 정성이 필요하지요. 이는 가장 보편적인 제사법으로서 생명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과 헌신, 자발적인 봉사를 상징하는 번제를 일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가 여기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배드릴 때 기쁨 없이 피곤, 졸음, 잡념 속에서 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충만하고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중심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얼마나 정성껏, 믿음으로, 사랑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막 12장). 두 렙돈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동전 두 닢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과부에게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중심을 보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담아 즐거이 드릴 때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솔로몬의 정성 다한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시니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재판할 때에 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사사로이 명예나 부를 구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시며,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총명은 물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겸하여 주셨습니다(왕상 3:13).
2. 정성된 마음으로 행했을 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성된 마음을 흠향하십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완벽하다 해도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받지 않으시지요. 주의 종이나 부모, 형제, 이웃, 동료 어느 누구를 섬길 때도 마음 다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므로 정성된 마음으로 했는지 다 아시지요.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솔로몬의 중심과 마음씀씀이를 아셨기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에 시작된 성전 건축은 완공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며 웅장하게 건축되었습니다.
돌을 뜨는 곳에서 아예 규격에 맞게 다듬어 성전에서 망치나 철 연장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성전 내부는 백향목 널판으로 벽에 입힌 후 정금으로 덧입혀 돌이 보이지 않게 하였고, 사면 벽에는 그룹들과 종려와 꽃 핀 형상을 정교하게 아로새겼습니다. 성전 앞에는 기둥 둘을 웅장하게 만들었는데 사슬로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일백 개를 달았습니다. 또 등대와 꽃, 등잔과 화 젓가락, 불집게와 주발, 숟가락과 불 옮기는 그릇 등 성전의 기구들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정성을 다해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헌물을 드리거나 무엇을 하든지 정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바로 솔로몬이 사사로이 자신의 부귀영화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즉 자기 유익이 아닌 상대의 유익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영혼들을 위해 구하면 기뻐하시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의 귀부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그 지방을 지날 때면 음식을 대접하고 쉴 수 있는 방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여인의 섬김에 감동한 엘리사가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정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니 구하지 않은 축복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기보다 백성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 곧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 앞에 감동적인 정성을 보인 사람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갈 때 많은 금은과 귀한 의복을 정성껏 준비하여 갔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받지 않았지만 나아만의 정성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또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주를 섬기듯 대접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고대하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예언을 또다시 듣지요.
야곱은 자기를 미워하는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감정을 풀고자 했지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화해할 수 있었지만 야곱의 정성 역시 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이 자원하여 너도 나도 즐거이 예물을 드렸는데 어찌나 많이 드렸던지 그만 가져오도록 공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정성이 그처럼 지극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정성과 사모함은 어떻습니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 따위는 생각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눅 19장). 그의 사모함을 아신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감격에 찬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지요.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시며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지극한 정성과 사모함을 보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신약 시대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어머니 한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였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또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자녀를 얻었습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스승 엘리야를 붙좇는 정성을 보임으로 스승의 갑절의 영감을 받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풍족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 )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 )로
드리기 원하신다.
2.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13~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왕이 온갖 귀한 자재들과 황금 보석을 드려 지은 아름다운
성전이다. 이 성전을 봉헌할 때 그 안에는 영광의 구름이 가득했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살라 그 향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나오는 이들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리라 약속하셨다.
그러나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때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죄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서 떠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떠나신 결과
성전도 훼파된 것이다.
교육목표 : 솔로몬왕처럼 하나님께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고 축복이 넘쳐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정성을 다한다면 뜻을 이루게 됨을 나타냅니다. 솔로몬왕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전무후무한 지혜는 물론 부와 영광까지 받았습니다.
1. 일천 번제를 지극 정성으로 드린 솔로몬
솔로몬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왕이 정치, 경제, 군사 등 전반적으로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안정 속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지요. 또한 솔로몬은 나단 선지자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무엇보다 먼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가져온 짐승을 하나하나 각을 떠서 불태워 그 향기로 드리는 제사법으로 많은 수고와 정성이 필요하지요. 이는 가장 보편적인 제사법으로서 생명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과 헌신, 자발적인 봉사를 상징하는 번제를 일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가 여기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배드릴 때 기쁨 없이 피곤, 졸음, 잡념 속에서 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충만하고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중심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얼마나 정성껏, 믿음으로, 사랑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막 12장). 두 렙돈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동전 두 닢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과부에게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중심을 보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담아 즐거이 드릴 때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솔로몬의 정성 다한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시니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재판할 때에 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사사로이 명예나 부를 구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시며,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총명은 물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겸하여 주셨습니다(왕상 3:13).
2. 정성된 마음으로 행했을 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성된 마음을 흠향하십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완벽하다 해도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받지 않으시지요. 주의 종이나 부모, 형제, 이웃, 동료 어느 누구를 섬길 때도 마음 다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므로 정성된 마음으로 했는지 다 아시지요.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솔로몬의 중심과 마음씀씀이를 아셨기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에 시작된 성전 건축은 완공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며 웅장하게 건축되었습니다.
돌을 뜨는 곳에서 아예 규격에 맞게 다듬어 성전에서 망치나 철 연장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성전 내부는 백향목 널판으로 벽에 입힌 후 정금으로 덧입혀 돌이 보이지 않게 하였고, 사면 벽에는 그룹들과 종려와 꽃 핀 형상을 정교하게 아로새겼습니다. 성전 앞에는 기둥 둘을 웅장하게 만들었는데 사슬로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일백 개를 달았습니다. 또 등대와 꽃, 등잔과 화 젓가락, 불집게와 주발, 숟가락과 불 옮기는 그릇 등 성전의 기구들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정성을 다해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헌물을 드리거나 무엇을 하든지 정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바로 솔로몬이 사사로이 자신의 부귀영화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즉 자기 유익이 아닌 상대의 유익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영혼들을 위해 구하면 기뻐하시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의 귀부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그 지방을 지날 때면 음식을 대접하고 쉴 수 있는 방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여인의 섬김에 감동한 엘리사가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정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니 구하지 않은 축복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기보다 백성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 곧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 앞에 감동적인 정성을 보인 사람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갈 때 많은 금은과 귀한 의복을 정성껏 준비하여 갔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받지 않았지만 나아만의 정성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또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주를 섬기듯 대접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고대하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예언을 또다시 듣지요.
야곱은 자기를 미워하는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감정을 풀고자 했지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화해할 수 있었지만 야곱의 정성 역시 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이 자원하여 너도 나도 즐거이 예물을 드렸는데 어찌나 많이 드렸던지 그만 가져오도록 공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정성이 그처럼 지극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정성과 사모함은 어떻습니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 따위는 생각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눅 19장). 그의 사모함을 아신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감격에 찬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지요.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시며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지극한 정성과 사모함을 보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신약 시대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어머니 한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였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또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자녀를 얻었습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스승 엘리야를 붙좇는 정성을 보임으로 스승의 갑절의 영감을 받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풍족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 )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 )로
드리기 원하신다.
2.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13~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왕이 온갖 귀한 자재들과 황금 보석을 드려 지은 아름다운
성전이다. 이 성전을 봉헌할 때 그 안에는 영광의 구름이 가득했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살라 그 향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나오는 이들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리라 약속하셨다.
그러나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때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죄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서 떠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떠나신 결과
성전도 훼파된 것이다.
2019-10-11
제41과율법을 행하는 자
로마서 2:13
읽을말씀 : 로마서 2:13 | 외울말씀 : 야고보서 2:22 ㅣ 참고 말씀 / 요한일서 1:5~7, 마태복음 7: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심비에 새기고 지켜 행함으로 진정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자녀를 낳아 길러 보면 부모의 모습을 닮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걸음걸이, 습관까지 꼭 닮기도 하지요. 만일 부모가 조급한 성격이라면 자녀도 조급하기 쉽고, 폭력적이라면 그 성향을 물려받기도 합니다. 또 부모가 유난히 시기 질투가 많으면 자녀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고난 성격은 사람마다 다르며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성현의 교훈을 통해 마음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밝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기질, 죄의 속성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1. 저마다 다르게 타고난 마음 중심
조선 시대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질투심이 강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연산군도 시기심이 많고 포악할 뿐 아니라,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훌륭한 스승의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에다 악을 쌓아가니 마음 중심이 악해져 갔지요.
사람의 마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과 자신이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통해 형성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굳혀진 것이 중심이지요. 사람은 마음 중심에 따라 선을 추구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비록 태어날 때 좋지 않은 기질을 물려받았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만나 성결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말씀대로 행하면, 결국에는 좋은 중심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연산군과 달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금하신 가증한 음식은 먹지 않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우상에 절하지 않는 곧은 신앙을 가졌지요.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니 이방 나라에서도 중책을 맡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진정한 의인
어떤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을 무수히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다 벗어 버리고 마음 중심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야 참된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연단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과해야 값진 열매로 나올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원래 자기 의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 히브리 사람을 애굽 사람이 치는 것을 보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지요. 그 후 40년의 연단을 통해 철저히 자기 의가 깨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악한 백성을 대신하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으니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지요(출 32:32).
이처럼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율법을 들어서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진정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려면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앎으로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즉 “기도하라” 했으니 기도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했으니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 행하는 단계입니다. 곧 온전한 행함의 단계이지요.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할 때 온전한 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온전한 행함에 따르는 축복
우리가 온전한 행함의 단계로 들어가려면 먼저는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즉 “미워하지 말라, 시기 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죄를 버리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대로 하지 않고 버리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됩니다.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즉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열심히 행하면 믿음이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지요. 즉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할 수 없으므로 시험 환난과 질병이 떠나며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니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혹여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마음의 악이 버려지는 만큼 차츰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영혼이 잘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며,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면 스스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질병이나 가정의 화목, 가정 복음화를 비롯한 그 어떤 문제라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4.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행함이 따르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얼마나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니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입니다(롬 2:13).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했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짝을 이루어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당연히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믿고 행하면서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요,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은 물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 )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 )를 이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03~11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네 가지 마음밭’(마태복음 13장)
1. 길가밭: 단단히 굳은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마음밭을 말한다.
2. 돌밭: 돌멩이가 있어 싹이 나도 잘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믿음의 확신이 없고 시험 환난이 오면 넘어져 버린다.
3. 가시떨기밭: 가시떨기로 인해 싹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한다 해도 탐욕과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
4. 좋은 밭: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를 거두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기에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심비에 새기고 지켜 행함으로 진정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자녀를 낳아 길러 보면 부모의 모습을 닮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걸음걸이, 습관까지 꼭 닮기도 하지요. 만일 부모가 조급한 성격이라면 자녀도 조급하기 쉽고, 폭력적이라면 그 성향을 물려받기도 합니다. 또 부모가 유난히 시기 질투가 많으면 자녀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고난 성격은 사람마다 다르며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성현의 교훈을 통해 마음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밝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기질, 죄의 속성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1. 저마다 다르게 타고난 마음 중심
조선 시대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질투심이 강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연산군도 시기심이 많고 포악할 뿐 아니라,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훌륭한 스승의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에다 악을 쌓아가니 마음 중심이 악해져 갔지요.
사람의 마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과 자신이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통해 형성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굳혀진 것이 중심이지요. 사람은 마음 중심에 따라 선을 추구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비록 태어날 때 좋지 않은 기질을 물려받았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만나 성결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말씀대로 행하면, 결국에는 좋은 중심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연산군과 달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금하신 가증한 음식은 먹지 않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우상에 절하지 않는 곧은 신앙을 가졌지요.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니 이방 나라에서도 중책을 맡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진정한 의인
어떤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을 무수히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다 벗어 버리고 마음 중심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야 참된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연단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과해야 값진 열매로 나올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원래 자기 의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 히브리 사람을 애굽 사람이 치는 것을 보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지요. 그 후 40년의 연단을 통해 철저히 자기 의가 깨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악한 백성을 대신하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으니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지요(출 32:32).
이처럼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율법을 들어서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진정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려면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앎으로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즉 “기도하라” 했으니 기도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했으니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 행하는 단계입니다. 곧 온전한 행함의 단계이지요.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할 때 온전한 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온전한 행함에 따르는 축복
우리가 온전한 행함의 단계로 들어가려면 먼저는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즉 “미워하지 말라, 시기 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죄를 버리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대로 하지 않고 버리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됩니다.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즉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열심히 행하면 믿음이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지요. 즉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할 수 없으므로 시험 환난과 질병이 떠나며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니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혹여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마음의 악이 버려지는 만큼 차츰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영혼이 잘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며,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면 스스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질병이나 가정의 화목, 가정 복음화를 비롯한 그 어떤 문제라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4.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행함이 따르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얼마나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니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입니다(롬 2:13).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했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짝을 이루어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당연히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믿고 행하면서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요,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은 물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 )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 )를 이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03~11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네 가지 마음밭’(마태복음 13장)
1. 길가밭: 단단히 굳은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마음밭을 말한다.
2. 돌밭: 돌멩이가 있어 싹이 나도 잘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믿음의 확신이 없고 시험 환난이 오면 넘어져 버린다.
3. 가시떨기밭: 가시떨기로 인해 싹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한다 해도 탐욕과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
4. 좋은 밭: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를 거두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기에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