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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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세례는 왜 받아야 하며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교회에서는 세례식을 거행하는데 세례는 왜 받는 것이며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중대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오는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예전이 바로 세례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거룩한 예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할례로 나타내었습니다. 남자의 성기에 할례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언약의 표를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육체에 행해지는 표면적인 할례보다는 마음에 행해지는 내면적인 할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할례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내면적인 할례를 받게 하시고 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약시대의 할례가 발전된 의식으로서 내적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됩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물로 세례를 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위적으로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내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가 없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성령받은 자체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함입니다.
세례는 성령받은 자체 즉 이제 성령받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성령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예적인 표가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날마다 씻김을 받기 위함입니다.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더러운 죄의 모습들을 깨끗이 씻어 버려서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외적인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데 이러한 증거로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2.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생명을 주고 죄를 씻어 주는 구원의 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은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러움으로 가득 찰 것이요, 모든 생물들은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어 깨끗케 하는 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영생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지켜 행해야 마음 안에 있는 더러운 죄가 버려지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요, 또한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에는 물로 베푸는 것이요,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되는 것입니다.
3. 세례를 받는 시기
물세례에 있어 성령이 오시기 이전의 물세례와 오늘날의 물세례는 다릅니다.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상황에서 주었던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10일 있다가 성령이 오셨을 때에 그 이전에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장 16-17절을 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도 성령을 알지 못하고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어 사도들이 가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을 받지 않고도 물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오늘날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받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다음에 물세례를 받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물세례를 먼저 받고 그 다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7, 48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했습니다. 즉 성령받은 사람은 누구나 물로 세례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 등록을 하고 6개월간 학습을 받은 후, 또다시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세례를 받도록 각 교단의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정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한 후, 세례를 받게 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변치 아니하고 충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마음에 성령받은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요,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중대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오는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예전이 바로 세례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거룩한 예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할례로 나타내었습니다. 남자의 성기에 할례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언약의 표를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육체에 행해지는 표면적인 할례보다는 마음에 행해지는 내면적인 할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할례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내면적인 할례를 받게 하시고 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약시대의 할례가 발전된 의식으로서 내적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됩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물로 세례를 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위적으로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내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가 없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성령받은 자체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함입니다.
세례는 성령받은 자체 즉 이제 성령받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성령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예적인 표가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날마다 씻김을 받기 위함입니다.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더러운 죄의 모습들을 깨끗이 씻어 버려서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외적인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데 이러한 증거로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2.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생명을 주고 죄를 씻어 주는 구원의 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은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러움으로 가득 찰 것이요, 모든 생물들은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어 깨끗케 하는 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영생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지켜 행해야 마음 안에 있는 더러운 죄가 버려지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요, 또한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에는 물로 베푸는 것이요,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되는 것입니다.
3. 세례를 받는 시기
물세례에 있어 성령이 오시기 이전의 물세례와 오늘날의 물세례는 다릅니다.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상황에서 주었던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10일 있다가 성령이 오셨을 때에 그 이전에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장 16-17절을 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도 성령을 알지 못하고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어 사도들이 가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을 받지 않고도 물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오늘날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받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다음에 물세례를 받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물세례를 먼저 받고 그 다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7, 48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했습니다. 즉 성령받은 사람은 누구나 물로 세례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 등록을 하고 6개월간 학습을 받은 후, 또다시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세례를 받도록 각 교단의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정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한 후, 세례를 받게 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변치 아니하고 충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마음에 성령받은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요,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Q.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 20장 8-11절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있는데 얼마나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지 주일 아침이면 교회에 가서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주일 대예배 뿐 아니라 저녁예배도 드리고 기도모임, 친교모임도 가지며 봉사도 하는데 너무나 좋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는 일주일 중에서 가장 편안히 육체를 쉴 수 있는 휴일에 왜 하루 종일 교회에 가 있느냐고 말렸는데 지금은 함께 교회에 다니고 있 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대로 살고 싶습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왜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지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그 의미와 방법은 무엇이며 또 그에 따른 약속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우치시고 마음에 귀한 양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안식일의 의미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복(福)주시되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날에 친히 안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2:1-3).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네 번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20:8-10).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날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으로 편안히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참된 안식 곧 영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위해 먹고 마시며 깊은 수면이나 오락을 취하는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하므로 사람에게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지식과 명예, 부귀영화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했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질병의 고통 속에서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다면 이것 역시 참된 안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므로(롬 5:12)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요 14:6)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함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정하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은 오늘날로 보면 토요일이었습니다. 달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일요일이 첫째 날이고 토요일이 한 주의 마지막인 일곱째 날이지요.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고 지금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갈 3:13) 생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인 일요일 새벽 미명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마 28:1)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지요(고전15:20).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생명과 참된 안식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셨으며(마 12:8) 이 때부터 교회에서는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고전 16:2)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로서 주일(主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에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기쁨과 행복과 안식을 누린다는 의미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여 참생명과 안식을 주게 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토요일이었던 안식일이 일요일 즉 주일로 바뀌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해 놓고 계십니다. 레위기 23:10-12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했지요.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은 바로 그들이 안식일로 지키던 토요일의 다음날인 일요일을 말합니다. 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이처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안식일 이튿날에 여호와께 드리라 했으니 이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이 날이 진정한 기쁨과 감사로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안식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3.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과 하나님의 축복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엿새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일에는 세상일을 멈추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쉼은 물론 영혼의 안식을 누림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진리 안에서 쉼을 얻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서는 우리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한 주간 동안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린 후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교제할 때 우리의 믿음을 더욱 돈독케 해주십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하는 성도들에게 사고와 질병, 시험환난이 없도록 막아주시며 한 주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혹 실수가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사고파는 매매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세상일을 삼가면서(느 13:15-22) 하나님의 뜻대로 참된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영적 축복 뿐 아니라 범사에 축복을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반면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악(惡)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예배를 드린 후 다시 가게문을 열거나 사업터, 일터의 일을 연장하여도 하나님께서 죄있다 하시지 않지만, 만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분명히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유익을 좇아간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따라서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이라면 배우고 성장함에 따라 온전히 주일을 지켜가야 하고 또 믿음이 있는 자는 마땅히 가르침 받은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며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던 것같이(마 10:10-12) 병든 자를 위해 선을 행하는 의사나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군인, 경찰 등 특수한 직업이나 부득이한 공무관계로 주일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근무한다 해도 주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예배를 드리고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그 의미와 방법은 무엇이며 또 그에 따른 약속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우치시고 마음에 귀한 양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안식일의 의미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복(福)주시되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날에 친히 안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2:1-3).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네 번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20:8-10).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날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으로 편안히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참된 안식 곧 영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위해 먹고 마시며 깊은 수면이나 오락을 취하는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하므로 사람에게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지식과 명예, 부귀영화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했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질병의 고통 속에서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다면 이것 역시 참된 안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므로(롬 5:12)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요 14:6)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함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정하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은 오늘날로 보면 토요일이었습니다. 달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일요일이 첫째 날이고 토요일이 한 주의 마지막인 일곱째 날이지요.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고 지금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갈 3:13) 생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인 일요일 새벽 미명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마 28:1)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지요(고전15:20).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생명과 참된 안식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셨으며(마 12:8) 이 때부터 교회에서는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고전 16:2)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로서 주일(主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에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기쁨과 행복과 안식을 누린다는 의미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여 참생명과 안식을 주게 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토요일이었던 안식일이 일요일 즉 주일로 바뀌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해 놓고 계십니다. 레위기 23:10-12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했지요.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은 바로 그들이 안식일로 지키던 토요일의 다음날인 일요일을 말합니다. 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이처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안식일 이튿날에 여호와께 드리라 했으니 이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이 날이 진정한 기쁨과 감사로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안식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3.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과 하나님의 축복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엿새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일에는 세상일을 멈추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쉼은 물론 영혼의 안식을 누림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진리 안에서 쉼을 얻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서는 우리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한 주간 동안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린 후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교제할 때 우리의 믿음을 더욱 돈독케 해주십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하는 성도들에게 사고와 질병, 시험환난이 없도록 막아주시며 한 주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혹 실수가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사고파는 매매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세상일을 삼가면서(느 13:15-22) 하나님의 뜻대로 참된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영적 축복 뿐 아니라 범사에 축복을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반면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악(惡)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예배를 드린 후 다시 가게문을 열거나 사업터, 일터의 일을 연장하여도 하나님께서 죄있다 하시지 않지만, 만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분명히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유익을 좇아간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따라서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이라면 배우고 성장함에 따라 온전히 주일을 지켜가야 하고 또 믿음이 있는 자는 마땅히 가르침 받은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며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던 것같이(마 10:10-12) 병든 자를 위해 선을 행하는 의사나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군인, 경찰 등 특수한 직업이나 부득이한 공무관계로 주일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근무한다 해도 주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예배를 드리고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Q.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요?
저는 찬양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찬양의 사전적 의미는 '훌륭함을 기리어 드러냄' 입니다. 그러나 찬양의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및 그분의 모든 행사를 시, 노래, 여러 악기들의 연주 및 춤 등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50장 3-5절에는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음악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래를 많이 부른다고 해도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이 임한다거나 사업터나 일터에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또는 영광을 돌리기 위해 드리는 찬양은 생명이 있기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고, 영혼이 잘 되게 하므로 갖가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을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참생명을 얻었고 영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속의 은혜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찬송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시 22:3). 따라서 곡조 있는 기도인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
1)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찬양
찬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개의 찬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하여 죄를 지음으로 충만함이 떨어지니 곤고함 속에서 드리는 슬픔의 찬양을 말합니다.
둘째로는 사명감당을 위한 찬양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찬양이지요.
셋째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참생명의 찬양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증거하다가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고 착고에 채인 채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옥문을 여시고 착고를 풀어 주시며 간수의 가정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함께하신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을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마음 중심을 다해 드리는 찬양
찬양에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살아 역사하는 영혼의 찬양이 있는가 하면, 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한다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기로운 찬양을 올릴 때 기뻐 받으십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 중심에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겸비한다면 최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중심을 다한 찬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룩하고 흠 없는 상태에서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며 사랑 자체가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악이 전혀 없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며 또한 찬양하는 사람의 외모도 깨끗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로 준비된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에도 만반의 준비가 선행되어야 하듯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곡과 가사 등 분야 분야를 정성껏 준비하되 무엇보다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마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는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4:15). 그래야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벗어 버림으로 마음에 평강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감동함 속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고 감동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사람이 먼저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은혜로운 찬양을 할 수 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가 될 수 있는 영혼이 담긴 감동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우리에게 충만함을 주어 영혼을 살찌우며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어 줍니다. 즉 슬플 때에 충만함과 기쁨을 주고(시 105:2, 3), 상한 마음을 치료받으며(삼상 16:23),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벧전 1:3-7).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행 16:25, 26), 어떤 상황에서도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욜 2:26),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는 등 많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찬양의 사전적 의미는 '훌륭함을 기리어 드러냄' 입니다. 그러나 찬양의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및 그분의 모든 행사를 시, 노래, 여러 악기들의 연주 및 춤 등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50장 3-5절에는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음악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래를 많이 부른다고 해도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이 임한다거나 사업터나 일터에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또는 영광을 돌리기 위해 드리는 찬양은 생명이 있기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고, 영혼이 잘 되게 하므로 갖가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을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참생명을 얻었고 영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속의 은혜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찬송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시 22:3). 따라서 곡조 있는 기도인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
1)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찬양
찬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개의 찬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하여 죄를 지음으로 충만함이 떨어지니 곤고함 속에서 드리는 슬픔의 찬양을 말합니다.
둘째로는 사명감당을 위한 찬양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찬양이지요.
셋째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참생명의 찬양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증거하다가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고 착고에 채인 채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옥문을 여시고 착고를 풀어 주시며 간수의 가정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함께하신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을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마음 중심을 다해 드리는 찬양
찬양에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살아 역사하는 영혼의 찬양이 있는가 하면, 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한다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기로운 찬양을 올릴 때 기뻐 받으십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 중심에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겸비한다면 최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중심을 다한 찬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룩하고 흠 없는 상태에서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며 사랑 자체가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악이 전혀 없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며 또한 찬양하는 사람의 외모도 깨끗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로 준비된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에도 만반의 준비가 선행되어야 하듯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곡과 가사 등 분야 분야를 정성껏 준비하되 무엇보다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마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는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4:15). 그래야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벗어 버림으로 마음에 평강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감동함 속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고 감동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사람이 먼저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은혜로운 찬양을 할 수 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가 될 수 있는 영혼이 담긴 감동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우리에게 충만함을 주어 영혼을 살찌우며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어 줍니다. 즉 슬플 때에 충만함과 기쁨을 주고(시 105:2, 3), 상한 마음을 치료받으며(삼상 16:23),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벧전 1:3-7).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행 16:25, 26), 어떤 상황에서도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욜 2:26),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는 등 많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Q.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나요?
성경을 읽다보면 간혹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행하셨을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담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짤막하게 축약된 성경 몇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 최초의 기원과 종말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들을 기록하되 자세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매우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 25절에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대할 때에 보다 넓고 깊이 있는 안목으로 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진리 자체이시니 한 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모든 일을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을까요?
1. 가인과 아벨의 제사방법
가인과 아벨은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등등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모든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상태가 아니므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죄사함을 받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며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 가인은 농사짓는 일을 하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일을 하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은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가인의 제사
레위기 1:2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 소나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레위기 23:10-12을 보면 땅의 소산으로 드릴 경우,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리되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함께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가르침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땅의 소산을 취하여 적당히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더니 결국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것이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인데 가인은 회개하며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내며 살인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인과 같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아니하시는 형식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 지켜 행하려 하지 않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아도 행치 아니하고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산다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
히브리서 11:4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정성껏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며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기 때문에(히 9:22) 하나님께서는 피의 제사를 원하신 것이요,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요한복음 4:23-24)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예물로써 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할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의를 행하였고, 가인이 악하여 분내며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기에 가인을 대항치 아니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형제를 사랑하고 의를 행한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나라의 상이 큰 것입니다. 우리도 아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며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짤막하게 축약된 성경 몇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 최초의 기원과 종말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들을 기록하되 자세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매우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 25절에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대할 때에 보다 넓고 깊이 있는 안목으로 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진리 자체이시니 한 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모든 일을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을까요?
1. 가인과 아벨의 제사방법
가인과 아벨은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등등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모든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상태가 아니므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죄사함을 받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며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 가인은 농사짓는 일을 하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일을 하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은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가인의 제사
레위기 1:2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 소나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레위기 23:10-12을 보면 땅의 소산으로 드릴 경우,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리되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함께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가르침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땅의 소산을 취하여 적당히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더니 결국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것이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인데 가인은 회개하며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내며 살인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인과 같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아니하시는 형식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 지켜 행하려 하지 않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아도 행치 아니하고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산다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
히브리서 11:4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정성껏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며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기 때문에(히 9:22) 하나님께서는 피의 제사를 원하신 것이요,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요한복음 4:23-24)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예물로써 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할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의를 행하였고, 가인이 악하여 분내며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기에 가인을 대항치 아니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형제를 사랑하고 의를 행한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나라의 상이 큰 것입니다. 우리도 아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며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Q.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까?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다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주님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인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큰 목적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나라이므로 이 세상과는 달리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러한 천국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므로 죄가 있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으며,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에 이를 것을 약속하신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라 할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1장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해도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고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 해도 어떠한 경우에 구원받을 수 없는지를 밝히 깨달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불법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는다는 고백인데 이러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만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도 보면 알곡과 가라지를 비유하여 알곡은 창고에 들이지만 가라지는 불에 살라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인 심판 때에도 알곡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가라지 곧 믿는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짐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대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란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곧 불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 외에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말하므로 이것도 불법을 행하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모독한 경우
마태복음 12장 31-32절을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훼방이란 마가복음 3장 20-30절에 나와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사단으로 말미암은 사술(邪術)이라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2절에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했고, 누가복음 12장 10절에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고 사람으로 안다는 것이니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거나 모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이므로 사함을 받을 수 없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훼방이나 거역, 모독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결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을 받은 후 타락해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인 자들이란 성령을 받은 후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알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믿으면서도 세상의 유혹을 받아서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해 타락되어져 현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영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
히브리서 10장 26-27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자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만 사울 왕은 버림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시기 때문에 성령이 소멸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 타락하여 짐짓 죄를 범하게 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회개할 수 없으니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리게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계시록 3:5).
그러나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마음 중심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구원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떠났다 해도 다시 전도를 받아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롭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한 번 지었다고 해서 단번에 버리시는 것이 아니요, 몇 차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알려주셔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하여 범죄함으로 양심이 화인을 맞아 구원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불법을 행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 오직 진리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큰 목적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나라이므로 이 세상과는 달리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러한 천국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므로 죄가 있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으며,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에 이를 것을 약속하신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라 할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1장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해도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고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 해도 어떠한 경우에 구원받을 수 없는지를 밝히 깨달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불법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는다는 고백인데 이러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만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도 보면 알곡과 가라지를 비유하여 알곡은 창고에 들이지만 가라지는 불에 살라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인 심판 때에도 알곡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가라지 곧 믿는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짐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대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란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곧 불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 외에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말하므로 이것도 불법을 행하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모독한 경우
마태복음 12장 31-32절을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훼방이란 마가복음 3장 20-30절에 나와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사단으로 말미암은 사술(邪術)이라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2절에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했고, 누가복음 12장 10절에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고 사람으로 안다는 것이니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거나 모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이므로 사함을 받을 수 없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훼방이나 거역, 모독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결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을 받은 후 타락해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인 자들이란 성령을 받은 후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알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믿으면서도 세상의 유혹을 받아서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해 타락되어져 현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영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
히브리서 10장 26-27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자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만 사울 왕은 버림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시기 때문에 성령이 소멸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 타락하여 짐짓 죄를 범하게 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회개할 수 없으니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리게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계시록 3:5).
그러나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마음 중심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구원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떠났다 해도 다시 전도를 받아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롭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한 번 지었다고 해서 단번에 버리시는 것이 아니요, 몇 차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알려주셔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하여 범죄함으로 양심이 화인을 맞아 구원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불법을 행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 오직 진리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Q.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는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친구로부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신속히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의학이나 과학의 발달로 많은 질병들이 치료되고 있지만 환자들의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의술로도 해결 못하는 난치병과 불치병이 날로 늘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질병의 문제를 약이나 의술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치료를 통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강건한 삶을 영위하려면 질병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치료받는 방법을 알면 신속하고 온전하게 치료받을 뿐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더불어 받게 됩니다.
1.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질병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치 아니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모든 규례를 지키지 않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는 질병의 원인이 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14을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였고, 신명기 7:12-15에는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받는 복과 불순종할 때에 받는 저주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재앙과 질병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질병이 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라 생각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거나 비도덕적으로 잘못 행하였을 때, 또는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실수를 범했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하는 것이요, 자기 몸을 사랑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은 것이니 죄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2. 믿음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 행해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어떠한 기적이라도 행하실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모든 질병을 대속해 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치료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하고 오래된 병이라도 능력의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면 순간에 나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모든 질병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3-12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과 정성을 내보임으로 그 즉시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잠언 8:17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15-20에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59:1-3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죄이며 하나님과 담이 되므로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욕심과 정욕을 위해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이 없이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질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미움, 시기, 질투, 불의, 탐욕, 악의, 살인, 분쟁, 비방, 교만, 수군수군하는 것 등 악한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로 모든 질병의 균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약한 것도 고치시며 죽은 것도 살리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 각색 질병이 치료되고 불구자도 정상이 되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것입니다.
3. 건강을 유지하려면 믿음으로 의 가운데 살아야
신명기 34:7에는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민 12:3,7) 성결되어 의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175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창세기 25:7). 다니엘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채소만 먹었어도 고기와 기름을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강건하고 지혜로워 바벨론 왕에게까지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단 1장).
이처럼 믿음으로 의 가운데, 진리 가운데 살면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심으로(마 8:17) 나음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사 53:5-6, 벧전 2:24).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믿음이 없으니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고 그 죄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지만 믿음 안에 들어와 의 가운데 행하면 온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병이 떠나고 강건함을 받으며 질병이 틈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의학이나 과학의 발달로 많은 질병들이 치료되고 있지만 환자들의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의술로도 해결 못하는 난치병과 불치병이 날로 늘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질병의 문제를 약이나 의술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치료를 통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강건한 삶을 영위하려면 질병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치료받는 방법을 알면 신속하고 온전하게 치료받을 뿐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더불어 받게 됩니다.
1.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질병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치 아니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모든 규례를 지키지 않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는 질병의 원인이 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14을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였고, 신명기 7:12-15에는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받는 복과 불순종할 때에 받는 저주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재앙과 질병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질병이 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라 생각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거나 비도덕적으로 잘못 행하였을 때, 또는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실수를 범했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하는 것이요, 자기 몸을 사랑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은 것이니 죄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2. 믿음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 행해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어떠한 기적이라도 행하실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모든 질병을 대속해 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치료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하고 오래된 병이라도 능력의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면 순간에 나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모든 질병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3-12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과 정성을 내보임으로 그 즉시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잠언 8:17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15-20에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59:1-3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죄이며 하나님과 담이 되므로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욕심과 정욕을 위해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이 없이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질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미움, 시기, 질투, 불의, 탐욕, 악의, 살인, 분쟁, 비방, 교만, 수군수군하는 것 등 악한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로 모든 질병의 균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약한 것도 고치시며 죽은 것도 살리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 각색 질병이 치료되고 불구자도 정상이 되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것입니다.
3. 건강을 유지하려면 믿음으로 의 가운데 살아야
신명기 34:7에는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민 12:3,7) 성결되어 의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175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창세기 25:7). 다니엘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채소만 먹었어도 고기와 기름을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강건하고 지혜로워 바벨론 왕에게까지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단 1장).
이처럼 믿음으로 의 가운데, 진리 가운데 살면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심으로(마 8:17) 나음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사 53:5-6, 벧전 2:24).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믿음이 없으니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고 그 죄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지만 믿음 안에 들어와 의 가운데 행하면 온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병이 떠나고 강건함을 받으며 질병이 틈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Q.기도의 응답을 신속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때론 기도의 응답이 신속하게 오지 않아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신속하게 응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교훈하시며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구해야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의 명예와 지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1. 영계의 법칙에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므로(시 7:11)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영계의 법칙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해 주십니다. 아무리 자녀라 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한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은 마치 정육점의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고기를 사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정육점 주인을 하나님께 비유한다면 저울은 기도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을 좇아 응답의 여부를 알려 주는 기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시되 정육점의 주인처럼 반드시 그 값을 받고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많은 기도를 했어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그에 상당한 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응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며 영계의 법칙에 합당한 양을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행할 때 기도의 응답에 필요한 양이 채워져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응답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좇아 응답받기 위해 작정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응답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작정기도가 끝나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지금 당장 응답을 주어도 끝까지 충만하게 작정기도를 채울 중심이라고 인정이 되면 작정이 끝나지 않았어도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응답을 받아야 할 문제인데 응답받지 못했다면 아직 응답받을 만한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똑같은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각 사람마다 성결의 차원이 다르고 온전히 믿어지는 믿음의 분량이 다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의 양이 다른 것이요(계 5:8), 한 달 만에 응답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만에 응답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응답을 받으려 한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즉 무엇을 놓고 기도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기도의 양을 채우며 하나님과 담이 없이 깨끗한 심령이 되어야 하고 감사와 기쁨과 예물 등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일곱 영으로 감찰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
앞서 설명한 저울의 비유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정확히 기도의 양을 재시고 응답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판단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사물을 감찰할 때 육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신 일곱 영으로서 정확히 감찰하십니다(계 5:6).
일곱 영이란 성경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이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감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영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 가지를 측정하여 합격 판정이 내려지면 하나님 앞에 합한 중심이라는 인정을 받아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믿음은 크게 영적인 믿음과 육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곱 영이 측정하는 믿음은 지식적인 육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동반되는 영적인 믿음입니다(약 2:22).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믿나이다"라고 육적인 믿음을 고백하며 영적인 믿음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영적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히 11:6)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고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자신의 믿음이 영적인 믿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기쁨을 측정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움을 당하면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 걱정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개의치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기에 참된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9-4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에 임하게 되면 자연히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을 통해 바로 이러한 것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기도하고 싶을 때나 기쁠 때, 혹은 슬플 때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습관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감사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응답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마음 중심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영생복락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구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시니 더욱 감사한 것이요, 혹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할지라도 이 땅의 것은 잠시잠깐이요,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니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진정한 감사를 하는가를 측정합니다.
다섯째로,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요한일서 5장 2-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니 그분 말씀대로 준행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성경은 '동쪽으로 가라' 하는데 서쪽으로 가면서 응답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대로 믿고 준행하면 될 터인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에 맞추어 내 유익을 좇아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산의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기차 타기가 불편하고 귀찮다고 내 유익을 좇아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터미널에서 기다린다면 만나기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4:15 , 요일 5:3).
따라서 일곱 영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얼마나 마음 중심으로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여섯째로, 충성을 측정합니다.
민수기 12장 7절을 보면 모세는 온 집에 충성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한 분야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이 온 집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충성하되 가정이나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니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온 집에 충성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영적인 사랑을 측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믿음과 기쁨이 있고 기도와 감사가 있으며 계명들을 지키며 충성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일곱 영이 측정할 때 모든 분야에서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초신자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믿음을 내보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응답해 주시지만, 믿음이 장성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양을 채웠을 때 비로소 감동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할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니 더욱 신속하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신자가 오히려 신속하게 응답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가 넘치는 초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신속하게 일곱 영에 합당하게 행함으로 즉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항상 성령 충만함을 입어 열심히 진리대로 행함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신속하게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교훈하시며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구해야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의 명예와 지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1. 영계의 법칙에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므로(시 7:11)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영계의 법칙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해 주십니다. 아무리 자녀라 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한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은 마치 정육점의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고기를 사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정육점 주인을 하나님께 비유한다면 저울은 기도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을 좇아 응답의 여부를 알려 주는 기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시되 정육점의 주인처럼 반드시 그 값을 받고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많은 기도를 했어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그에 상당한 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응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며 영계의 법칙에 합당한 양을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행할 때 기도의 응답에 필요한 양이 채워져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응답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좇아 응답받기 위해 작정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응답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작정기도가 끝나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지금 당장 응답을 주어도 끝까지 충만하게 작정기도를 채울 중심이라고 인정이 되면 작정이 끝나지 않았어도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응답을 받아야 할 문제인데 응답받지 못했다면 아직 응답받을 만한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똑같은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각 사람마다 성결의 차원이 다르고 온전히 믿어지는 믿음의 분량이 다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의 양이 다른 것이요(계 5:8), 한 달 만에 응답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만에 응답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응답을 받으려 한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즉 무엇을 놓고 기도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기도의 양을 채우며 하나님과 담이 없이 깨끗한 심령이 되어야 하고 감사와 기쁨과 예물 등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일곱 영으로 감찰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
앞서 설명한 저울의 비유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정확히 기도의 양을 재시고 응답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판단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사물을 감찰할 때 육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신 일곱 영으로서 정확히 감찰하십니다(계 5:6).
일곱 영이란 성경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이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감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영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 가지를 측정하여 합격 판정이 내려지면 하나님 앞에 합한 중심이라는 인정을 받아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믿음은 크게 영적인 믿음과 육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곱 영이 측정하는 믿음은 지식적인 육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동반되는 영적인 믿음입니다(약 2:22).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믿나이다"라고 육적인 믿음을 고백하며 영적인 믿음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영적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히 11:6)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고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자신의 믿음이 영적인 믿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기쁨을 측정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움을 당하면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 걱정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개의치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기에 참된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9-4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에 임하게 되면 자연히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을 통해 바로 이러한 것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기도하고 싶을 때나 기쁠 때, 혹은 슬플 때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습관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감사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응답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마음 중심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영생복락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구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시니 더욱 감사한 것이요, 혹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할지라도 이 땅의 것은 잠시잠깐이요,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니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진정한 감사를 하는가를 측정합니다.
다섯째로,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요한일서 5장 2-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니 그분 말씀대로 준행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성경은 '동쪽으로 가라' 하는데 서쪽으로 가면서 응답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대로 믿고 준행하면 될 터인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에 맞추어 내 유익을 좇아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산의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기차 타기가 불편하고 귀찮다고 내 유익을 좇아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터미널에서 기다린다면 만나기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4:15 , 요일 5:3).
따라서 일곱 영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얼마나 마음 중심으로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여섯째로, 충성을 측정합니다.
민수기 12장 7절을 보면 모세는 온 집에 충성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한 분야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이 온 집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충성하되 가정이나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니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온 집에 충성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영적인 사랑을 측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믿음과 기쁨이 있고 기도와 감사가 있으며 계명들을 지키며 충성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일곱 영이 측정할 때 모든 분야에서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초신자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믿음을 내보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응답해 주시지만, 믿음이 장성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양을 채웠을 때 비로소 감동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할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니 더욱 신속하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신자가 오히려 신속하게 응답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가 넘치는 초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신속하게 일곱 영에 합당하게 행함으로 즉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항상 성령 충만함을 입어 열심히 진리대로 행함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신속하게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Q.물질의 축복을 받아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물질로 심으면 물질로 거두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 힘껏 물질로 심으며 마음껏 구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믿고 기도했는데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응답의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추수를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농부가 땀흘리며 씨를 심고 벌레를 잡아주면서 열심히 가꾸어 온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땀흘리며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되 심은 대로 거두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만일 물질을 심었는데도 아직 거두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물질 축복을 받으려면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게 된다고 가르쳐 주신 원리를 좇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 감사헌금은 당연히 심어야 하고 건축헌금, 작정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그리고 여러 가지 선행을 위한 물질도 심어야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성전 연보 궤에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칭찬하시며 "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후에 큰 축복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지요. 많든 적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기쁜 마음으로 힘써 드리기를 즐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심지 않았다면 자기의 유익을 좇아 심었기에 후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물질을 심었다고 생각되는데도 여전히 축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시돈 사람 사르밧 과부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밖에 남은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선지자인 엘리야가 축복을 약속하며 그것을 심으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심었기에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관하실 때 순종하여 심는 것도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일에는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임의로 심고 자기 본위로 행하였다면 그만큼 축복을 더디 받게 되지요. 더 나아가 하나님께 작정한 것이 있다면 더디 말고 신속히 드려야 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다른 데로 융통하였거나 혹은 성령께서 마음에 작정케 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고 변개하지는 않았는지, 또 마음에 주관이 온 대로 심지 않고 적게 심지는 않았는지, 더 나아가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심기로 약속한 것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열심히 심어도 축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
1) 그릇을 만드신 후에 주시기 위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먼저 그릇을 만드시고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으니 주실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먼저 그릇을 만들기 위한 연단을 하시고 때가 이르러 축복을 주시므로 열심히 심어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낙심치 말고 축복받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힘쓰면 때가 이르매 많은 열매로 거두게 되지요.
2) 이미 축복을 주셨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보기에는 물질 축복이 임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어떻게든 거두게 하시는데 단지 사람 편에서 어떻게 축복하셨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질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경우도 있고, 작은 축복을 여러 번에 걸쳐 받기도 하지만 마음 중심에서 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심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 못하는 것뿐입니다.
3) 억지로 심었기에 역사가 따르지 않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믿음으로 심어야 축복을 받는 것이지 믿음이 없이 억지로 심으면 물질의 축복이 따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질을 심고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이 되어 믿음으로 행하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4) 물질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경우
어린 아이가 칼을 들고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칼을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물질이 많으면 이내 세상으로 빠져 원수 마귀의 역사가 따르기 쉬운 사람에게는 주시는 것을 삼가하시는 것입니다(딤전 6:9 이하 참조).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심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많은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추수를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농부가 땀흘리며 씨를 심고 벌레를 잡아주면서 열심히 가꾸어 온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땀흘리며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되 심은 대로 거두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만일 물질을 심었는데도 아직 거두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물질 축복을 받으려면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게 된다고 가르쳐 주신 원리를 좇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 감사헌금은 당연히 심어야 하고 건축헌금, 작정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그리고 여러 가지 선행을 위한 물질도 심어야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성전 연보 궤에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칭찬하시며 "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후에 큰 축복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지요. 많든 적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기쁜 마음으로 힘써 드리기를 즐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심지 않았다면 자기의 유익을 좇아 심었기에 후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물질을 심었다고 생각되는데도 여전히 축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시돈 사람 사르밧 과부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밖에 남은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선지자인 엘리야가 축복을 약속하며 그것을 심으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심었기에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관하실 때 순종하여 심는 것도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일에는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임의로 심고 자기 본위로 행하였다면 그만큼 축복을 더디 받게 되지요. 더 나아가 하나님께 작정한 것이 있다면 더디 말고 신속히 드려야 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다른 데로 융통하였거나 혹은 성령께서 마음에 작정케 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고 변개하지는 않았는지, 또 마음에 주관이 온 대로 심지 않고 적게 심지는 않았는지, 더 나아가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심기로 약속한 것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열심히 심어도 축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
1) 그릇을 만드신 후에 주시기 위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먼저 그릇을 만드시고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으니 주실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먼저 그릇을 만들기 위한 연단을 하시고 때가 이르러 축복을 주시므로 열심히 심어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낙심치 말고 축복받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힘쓰면 때가 이르매 많은 열매로 거두게 되지요.
2) 이미 축복을 주셨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보기에는 물질 축복이 임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어떻게든 거두게 하시는데 단지 사람 편에서 어떻게 축복하셨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질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경우도 있고, 작은 축복을 여러 번에 걸쳐 받기도 하지만 마음 중심에서 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심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 못하는 것뿐입니다.
3) 억지로 심었기에 역사가 따르지 않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믿음으로 심어야 축복을 받는 것이지 믿음이 없이 억지로 심으면 물질의 축복이 따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질을 심고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이 되어 믿음으로 행하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4) 물질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경우
어린 아이가 칼을 들고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칼을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물질이 많으면 이내 세상으로 빠져 원수 마귀의 역사가 따르기 쉬운 사람에게는 주시는 것을 삼가하시는 것입니다(딤전 6:9 이하 참조).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심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많은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Q.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전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첫사람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하여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죄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아무 죄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화목제물을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복된 소식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 양심이 증거가 되는 양심심판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생령 곧 살아있는 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음 안에 죄가 들어와 환경을 통해 보고 들으며 나름대로 지식을 쌓아가게 되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을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마음과 죄로 인하여 들어온 비진리의 마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양심이라는 세가지 마음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7:22-2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행위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습니다.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마음에 심겨진 의의 도, 곧 양심을 좇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양심의 법이 행위의 기준이 되니 선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이 되게 하시고 그 행위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양심심판입니다.
2. 선한 양심은 양심심판으로 윗음부에 거하다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 신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자연만물의 오묘한 변화와 조화를 보면서 조물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선을 좇아 살았습니다. 또한 양심에서 내세가 있음을 증거하므로 현세의 쾌락을 좇아 자기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을 지키며 절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선생,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열사와 같은 분들의 경우를 보아도 참으로 선한 양심을 지녔기 때문에 신을 찾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어도 위로는 신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였고, 이율곡 선생은 하늘의 지혜를 받아 외적의 침입을 예감하고 10만 양병설 등을 나라에 건의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 대기하던 윗음부와 아래음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았지만 마음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지만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지 못하였지만 선한 양심을 지닌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윗음부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렇지 못한 부자는 아랫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9절을 보면 악인들이 그의 영화를 잃어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곳인 아래 음부가 나옵니다. 아래 음부는 악인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지만 거지 나사로가 의인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윗음부는 창세이래로 마음이 선하여 양심 심판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들이 편안하게 있는 곳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영들의 전도를 받아 구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에 3일 동안 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곧 윗음부에 있는 구원받을만한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므로 그동안 복음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40절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장 9절에는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도 죽으면 3일 동안 윗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에 감사하며 더욱 행함있는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첫사람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하여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죄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아무 죄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화목제물을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복된 소식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 양심이 증거가 되는 양심심판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생령 곧 살아있는 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음 안에 죄가 들어와 환경을 통해 보고 들으며 나름대로 지식을 쌓아가게 되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을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마음과 죄로 인하여 들어온 비진리의 마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양심이라는 세가지 마음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7:22-2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행위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습니다.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마음에 심겨진 의의 도, 곧 양심을 좇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양심의 법이 행위의 기준이 되니 선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이 되게 하시고 그 행위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양심심판입니다.
2. 선한 양심은 양심심판으로 윗음부에 거하다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 신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자연만물의 오묘한 변화와 조화를 보면서 조물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선을 좇아 살았습니다. 또한 양심에서 내세가 있음을 증거하므로 현세의 쾌락을 좇아 자기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을 지키며 절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선생,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열사와 같은 분들의 경우를 보아도 참으로 선한 양심을 지녔기 때문에 신을 찾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어도 위로는 신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였고, 이율곡 선생은 하늘의 지혜를 받아 외적의 침입을 예감하고 10만 양병설 등을 나라에 건의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 대기하던 윗음부와 아래음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았지만 마음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지만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지 못하였지만 선한 양심을 지닌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윗음부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렇지 못한 부자는 아랫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9절을 보면 악인들이 그의 영화를 잃어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곳인 아래 음부가 나옵니다. 아래 음부는 악인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지만 거지 나사로가 의인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윗음부는 창세이래로 마음이 선하여 양심 심판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들이 편안하게 있는 곳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영들의 전도를 받아 구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에 3일 동안 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곧 윗음부에 있는 구원받을만한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므로 그동안 복음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40절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장 9절에는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도 죽으면 3일 동안 윗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에 감사하며 더욱 행함있는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Q.타락한 천사들과 악의 영들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요?
지난 호에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창조된 천사들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타락한 천사들과 악의 영들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수많은 천사장과 천사들을 만드시고 질서와 서열을 정하시며 역할을 분담해 주셨고, 이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마치 로봇과 같이 명령에 따라 움직여지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세 천사에게는 예외적으로 인성을 주시고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서 마음으로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성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으로 기쁘시게 했던 루시퍼가 차츰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힘입어 그를 따르던 천사들은 물론,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용들과 그의 사자들을 거짓으로 속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타락하게 된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나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고,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통하여 참자녀를 얻고자 루시퍼에게 권세를 주시고 어두움의 주관자로서 악의 영들을 지시하고 조종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악한 영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사들의 조직을 본따 악의 영들의 조직을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어찌하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사회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범죄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음악이나 컴퓨터 등 세상적인 큰 흐름을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거나 악한 권세자들을 주관하여 공산주의 국가와 같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란 루시퍼가 아니라 바로 밑에 있는 용들을 의미하며 우리가 사단과 마귀, 귀신 등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 루시퍼로부터 실질적인 권세를 받아
공중에서 어두움의 세력을 다스리는 용들과 그의 사자들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는 자기를 믿고 따랐던 용들에게 실질적인 권세를 주어 수하에 있는 사자들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속한 영들과 악의 영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공중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용들은 루시퍼의 계획대로 어두움의 일들을 주관하고 있지만 일일이 루시퍼의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이미 루시퍼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용들의 마음 안에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용들은 실질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우두머리로서 항상 경배받는 위치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용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주관하여 곳곳에 용의 문양을 새기거나 조각해 넣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나 갖가지 우상 숭배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용들은 악한 집단의 머리급들에게 역사하여 악을 크게 행하게 하거나 어찌하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만들어 갑니다. 또한 이단의 교주나 기타 하나님의 역사를 사칭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역사하게 되는데 주로 자기 수하에 심복처럼 부리는 사자들을 동원하여 악한 일들을 이루어 갑니다.
그의 사자들이란 타락하기 이전에 용들의 수하에 있던 그룹들의 일부로서 용들을 도와 어두움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권세 또한 용에 못지 않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용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흉측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 사단, 마귀, 귀신의 정체와 그 역할
먼저, 사단은 루시퍼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 근본적으로는 루시퍼와 하나이지만, 루시퍼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하고 악한 일들을 행하게 하는 어두움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요.
그러면 사단은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일까요? 사단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므로 생각이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사단은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아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어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어두움을 행하게 하는 능력을 계속해서 공중에 퍼뜨리고 있는데 이 때 안테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어두움의 마음입니다.
만일 사단이 퍼뜨려 놓은 어두움의 전파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이라는 안테나가 서로 주파수를 맞추게 되면 사단은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능력을 불어넣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를 받았다.', 또는 '사단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어느 정도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사단은 그 배턴을 마귀에게 넘기게 됩니다. 즉,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 중의 일부이며 어두움 가운데 마음을 내어 준 사람들을 주관하여 실질적인 행함으로 죄를 짓도록 만드는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 또는 마귀의 자식이라 표현했으며(요 6:70 ,행 13:10) 불법과 악을 행하는 것을 '마귀 짓을 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 짓에도 단계가 있어 혈기나 다툼, 사소한 거짓말과 같은 것에서부터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등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 짓들이 자꾸 쌓여 어느 한계를 넘게 되면 귀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마귀는 귀신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며 귀신들을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귀신들을 관리하고 지시하여 사람들에게 갖가지 고통과 환난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물론 점점 악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마귀가 사람을 아예 사로잡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판 무당이나 박수, 그리고 술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에서 그 영혼이 아랫음부로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버려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고자 방황하게 되며, 일단 귀신이 들어가면 좀처럼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머리와 같이 그 영혼에 붙어서 끝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는 경우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는 자신의 악함이나 교만함 등으로 인해 마귀 짓이 어느 한계를 지나쳐서 그 악이 심히 정도를 넘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는 조상이나 부모가 심히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하여 자녀들에게 귀신이 들어가는 경우, 마지막으로 성결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교만에 빠져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해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직접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게 되므로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하며 귀신의 꼭두각시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악한 영의 세계를 밝히 알아 항상 깨어 근신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수많은 천사장과 천사들을 만드시고 질서와 서열을 정하시며 역할을 분담해 주셨고, 이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마치 로봇과 같이 명령에 따라 움직여지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세 천사에게는 예외적으로 인성을 주시고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서 마음으로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성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으로 기쁘시게 했던 루시퍼가 차츰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힘입어 그를 따르던 천사들은 물론,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용들과 그의 사자들을 거짓으로 속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타락하게 된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나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고,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통하여 참자녀를 얻고자 루시퍼에게 권세를 주시고 어두움의 주관자로서 악의 영들을 지시하고 조종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악한 영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사들의 조직을 본따 악의 영들의 조직을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어찌하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사회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범죄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음악이나 컴퓨터 등 세상적인 큰 흐름을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거나 악한 권세자들을 주관하여 공산주의 국가와 같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란 루시퍼가 아니라 바로 밑에 있는 용들을 의미하며 우리가 사단과 마귀, 귀신 등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 루시퍼로부터 실질적인 권세를 받아
공중에서 어두움의 세력을 다스리는 용들과 그의 사자들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는 자기를 믿고 따랐던 용들에게 실질적인 권세를 주어 수하에 있는 사자들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속한 영들과 악의 영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공중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용들은 루시퍼의 계획대로 어두움의 일들을 주관하고 있지만 일일이 루시퍼의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이미 루시퍼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용들의 마음 안에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용들은 실질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우두머리로서 항상 경배받는 위치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용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주관하여 곳곳에 용의 문양을 새기거나 조각해 넣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나 갖가지 우상 숭배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용들은 악한 집단의 머리급들에게 역사하여 악을 크게 행하게 하거나 어찌하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만들어 갑니다. 또한 이단의 교주나 기타 하나님의 역사를 사칭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역사하게 되는데 주로 자기 수하에 심복처럼 부리는 사자들을 동원하여 악한 일들을 이루어 갑니다.
그의 사자들이란 타락하기 이전에 용들의 수하에 있던 그룹들의 일부로서 용들을 도와 어두움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권세 또한 용에 못지 않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용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흉측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 사단, 마귀, 귀신의 정체와 그 역할
먼저, 사단은 루시퍼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 근본적으로는 루시퍼와 하나이지만, 루시퍼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하고 악한 일들을 행하게 하는 어두움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요.
그러면 사단은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일까요? 사단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므로 생각이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사단은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아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어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어두움을 행하게 하는 능력을 계속해서 공중에 퍼뜨리고 있는데 이 때 안테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어두움의 마음입니다.
만일 사단이 퍼뜨려 놓은 어두움의 전파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이라는 안테나가 서로 주파수를 맞추게 되면 사단은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능력을 불어넣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를 받았다.', 또는 '사단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어느 정도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사단은 그 배턴을 마귀에게 넘기게 됩니다. 즉,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 중의 일부이며 어두움 가운데 마음을 내어 준 사람들을 주관하여 실질적인 행함으로 죄를 짓도록 만드는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 또는 마귀의 자식이라 표현했으며(요 6:70 ,행 13:10) 불법과 악을 행하는 것을 '마귀 짓을 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 짓에도 단계가 있어 혈기나 다툼, 사소한 거짓말과 같은 것에서부터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등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 짓들이 자꾸 쌓여 어느 한계를 넘게 되면 귀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마귀는 귀신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며 귀신들을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귀신들을 관리하고 지시하여 사람들에게 갖가지 고통과 환난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물론 점점 악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마귀가 사람을 아예 사로잡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판 무당이나 박수, 그리고 술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에서 그 영혼이 아랫음부로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버려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고자 방황하게 되며, 일단 귀신이 들어가면 좀처럼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머리와 같이 그 영혼에 붙어서 끝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는 경우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는 자신의 악함이나 교만함 등으로 인해 마귀 짓이 어느 한계를 지나쳐서 그 악이 심히 정도를 넘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는 조상이나 부모가 심히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하여 자녀들에게 귀신이 들어가는 경우, 마지막으로 성결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교만에 빠져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해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직접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게 되므로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하며 귀신의 꼭두각시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악한 영의 세계를 밝히 알아 항상 깨어 근신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