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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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제19과빛 가운데 행할 때의 축복
요한일서 1:5~7
읽을말씀 : 요한일서 1:5~7 | 외울말씀 : 요한일서 1:7 | 참고 말씀: 요한일서 5:18
교육목표 :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해도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태양과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각종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1. 빛과 어둠의 영적인 의미
요한일서 1장 5절에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이 진리의 말씀들이 바로 빛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대로 행할 때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도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죄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곧 불의, 불법, 악, 비진리가 어둠에 속하지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어둠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 교만을 버리라, 육신의 생각을 버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어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지 않는 것 역시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과 어둠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둠이 단 1%도 없는 100% 온전한 빛이시므로 우리도 100% 빛 가운데 행하기 원하십니다. 어둠이있으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이 그것을 빌미로 시험과 환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부모에게 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녀가 장성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깊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밀한 사귐을 갖기 원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데에는 단서가 있는데, 진리 즉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짝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원수 마귀 사단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자녀가 나를 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죄를 짓는다면 원수 마귀 사단을 붙좇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심히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편에서 상대를 안다고 해서 사귐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잘 알아도 대통령이 나를 모른다면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니지요. 또 사귐도 그 정도가 다 다릅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좀 더 가깝게 안부를 묻는 관계도 있고, 아주 친밀하게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이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진정한 사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믿으며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때, 곧 빛이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다, 내가 너를 안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그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지킴과 보호를 받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지도 않고, 시험 환난을 만나거나 재앙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3.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해야 축복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이 비취면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의 권세가 결코 역사하지 못합니다.
빛의 권세는 우리가 얼마나 빛 가운데 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등을 열 개 켰을 때의 빛은 한 개 켰을 때보다 훨씬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이 강할수록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힘도 세집니다. 따라서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전에는 어둠에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라도 빛 가운데 거하면 질병과 가난 등 온갖 문제가 떠납니다. 축복의 길이 열리며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임하지요. 이처럼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빛의 권세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며 어둠 가운데 살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합니다. 죄 가운데 살면 그 자체가 어둠이기에 어둠의 세력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벗고 진리를 좇을 때라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여 범죄하여 어둠 가운데 있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해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빛 가운데 행할 때 서로 사귐이 있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으면 참 빛이신 주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권세’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 것이지요. 주님과 하나 된 증거는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물러가라, 시험 환난아 물러가라” 하며 기도할 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므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아 만사가 형통합니다(신 28:1∼14 ; 요삼 1:2).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영적으로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한다.
2. ( )이란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 )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곧 불의, 불법, 악, 비진리가 여기에 속하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어둠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마귀’란?
악한 영들에 속한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이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귀신을 관리하고 지시하며, 비진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사단이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한다면, 마귀는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교육목표 :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해도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태양과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각종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1. 빛과 어둠의 영적인 의미
요한일서 1장 5절에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이 진리의 말씀들이 바로 빛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대로 행할 때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도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죄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곧 불의, 불법, 악, 비진리가 어둠에 속하지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어둠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 교만을 버리라, 육신의 생각을 버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어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지 않는 것 역시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과 어둠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둠이 단 1%도 없는 100% 온전한 빛이시므로 우리도 100% 빛 가운데 행하기 원하십니다. 어둠이있으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이 그것을 빌미로 시험과 환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부모에게 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녀가 장성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깊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밀한 사귐을 갖기 원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데에는 단서가 있는데, 진리 즉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짝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원수 마귀 사단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자녀가 나를 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죄를 짓는다면 원수 마귀 사단을 붙좇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심히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편에서 상대를 안다고 해서 사귐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잘 알아도 대통령이 나를 모른다면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니지요. 또 사귐도 그 정도가 다 다릅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좀 더 가깝게 안부를 묻는 관계도 있고, 아주 친밀하게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이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진정한 사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믿으며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때, 곧 빛이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다, 내가 너를 안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그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지킴과 보호를 받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지도 않고, 시험 환난을 만나거나 재앙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3.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해야 축복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이 비취면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의 권세가 결코 역사하지 못합니다.
빛의 권세는 우리가 얼마나 빛 가운데 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등을 열 개 켰을 때의 빛은 한 개 켰을 때보다 훨씬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이 강할수록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힘도 세집니다. 따라서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전에는 어둠에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라도 빛 가운데 거하면 질병과 가난 등 온갖 문제가 떠납니다. 축복의 길이 열리며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임하지요. 이처럼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빛의 권세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며 어둠 가운데 살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합니다. 죄 가운데 살면 그 자체가 어둠이기에 어둠의 세력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벗고 진리를 좇을 때라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여 범죄하여 어둠 가운데 있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해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빛 가운데 행할 때 서로 사귐이 있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으면 참 빛이신 주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권세’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 것이지요. 주님과 하나 된 증거는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물러가라, 시험 환난아 물러가라” 하며 기도할 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므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아 만사가 형통합니다(신 28:1∼14 ; 요삼 1:2).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영적으로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한다.
2. ( )이란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 )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곧 불의, 불법, 악, 비진리가 여기에 속하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어둠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마귀’란?
악한 영들에 속한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이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귀신을 관리하고 지시하며, 비진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사단이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한다면, 마귀는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2022-05-06
제18과영적인 어린아이
마태복음 18:1~4
읽을말씀 : 마태복음 18:1~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8:3 | 참고 말씀: 마태복음 23:12
교육목표 :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첫째로, 단순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무엇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어른보다는 세상 때가 묻지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으며 사고방식도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동생을 사랑해야 한다. 군것질을 많이 하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할 때도 이유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지,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따지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여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고 들은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생각이나 판단, 분별 능력이 전혀 없는 무 상태로 태어납니다. 자라면서 부모와 가족, 이웃과 친구를 통해 선과 악을 배우고 사리를 분별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으며 순수하게 반응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두려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 어른들은 세상 어둠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니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줄 배웠어도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잘못을 행하면서도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어떻습니까?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진리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고 어찌하든 버리려고 합니다. 오직 선한 것만 간절히 사모하며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부모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믿고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믿고 순종한 사람은 “이만한 권능을 행하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였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놀라운 역사를 체험케 하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첫째로,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갔고 교만, 혈기, 판단, 욕심, 시기 등 비진리로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 말씀한 대로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 말씀으로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욕심과 자존심, 그 밖의 모든 죄악을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로 믿고 깨달으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가 원수 마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진리가 아닌 것들을 생각에 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비진리 속에 성장했기 때문에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못마땅히 여기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8~9)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생각을 동원치 않고 선한 마음으로 행했기에 예수님께 칭찬받았지만,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오히려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한 것입니다(롬 8:7).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불같은 기도와 말씀 무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어린아이는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① ( )하다.
② ( )하다.
③ ( )하지 않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불같은 기도와 ( )을 통해 ( )을 벗어 버려야 한다.
② 모든 ( )과 ( )을 파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이론’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이나 사고, 학습 등을 통해 스스로 정립시켜 놓은 논리를 말한다.
이론은 각 사람의 체험과 생각,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변론을 낳으며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교육목표 :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첫째로, 단순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무엇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어른보다는 세상 때가 묻지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으며 사고방식도 단순합니다.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처럼 어린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동생을 사랑해야 한다. 군것질을 많이 하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할 때도 이유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지,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따지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반드시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여 진리를 배우는 대로 믿고 들은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생각이나 판단, 분별 능력이 전혀 없는 무 상태로 태어납니다. 자라면서 부모와 가족, 이웃과 친구를 통해 선과 악을 배우고 사리를 분별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그 자체로 행복해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으며 순수하게 반응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두려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반면 어른들은 세상 어둠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니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줄 배웠어도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잘못을 행하면서도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면 어떻습니까?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악한 것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진리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몹시 싫어하고 어찌하든 버리려고 합니다. 오직 선한 것만 간절히 사모하며 미세한 죄악이라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지식이 적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그대로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부모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거나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지식과 맞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판단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믿고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을 믿고 순종한 사람은 “이만한 권능을 행하는 분이라면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겸손히 인정하였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놀라운 역사를 체험케 하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첫째로, 불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면서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갔고 교만, 혈기, 판단, 욕심, 시기 등 비진리로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 말씀한 대로 불같은 기도와 하나님 말씀으로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욕심과 자존심, 그 밖의 모든 죄악을 버리는 만큼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로 믿고 깨달으며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무조건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이론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가 원수 마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진리가 아닌 것들을 생각에 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비진리 속에 성장했기 때문에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이론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하려 한다면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높아진 교만이지요.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못마땅히 여기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8~9)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생각을 동원치 않고 선한 마음으로 행했기에 예수님께 칭찬받았지만,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오히려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한 것입니다(롬 8:7).
그러므로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불같은 기도 속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을 진리에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이론과 지식을 파하며 오직 영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불같은 기도와 말씀 무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어린아이는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① ( )하다.
② ( )하다.
③ ( )하지 않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불같은 기도와 ( )을 통해 ( )을 벗어 버려야 한다.
② 모든 ( )과 ( )을 파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이론’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이나 사고, 학습 등을 통해 스스로 정립시켜 놓은 논리를 말한다.
이론은 각 사람의 체험과 생각,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변론을 낳으며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2022-04-29
제17과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영생
요한복음 6:53~55
읽을말씀 : 요한복음 6:53~55 | 외울말씀 : 요한복음 6:53 | : 출애굽기 12:9~10
교육목표 : 인자의 살과 피가 상징하는 의미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며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음식을 섭취해야 하듯이,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과연 인자의 살과 피란 무엇이며,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일까요? 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할 수 있을까요?
1.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 53절에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인자의 살이란 예수님의 살, 곧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하셨습니다. 참된 양식인 인자의 살, 곧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는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잊어버리기도 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반면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암송할 때도 영적인 의미를 새기고 묵상하며 삶 속에 행함으로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마음에 양식 삼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고 핍박할 때 감정이 상하고 미워지며 결국 악으로 갚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이 말씀이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는지는 잊어버렸다 해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저절로 사랑과 긍휼이 우러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아 가면 진리가 채워지며 반대로 비진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인자의 살을 먹는 방법
출애굽기 12장 9~10절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에 비유하여 인자의 살을 먹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요. 즉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했습니다.
먼저, ‘날로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날로 먹으면 소화도 잘 안 되고 배탈 나기 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날로 먹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의 선진들이 골방에서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골방이 아닌 동산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골방은 영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은 골방에 들어가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듯이, 세상 근심 걱정이나 잡념을 차단하여 중언부언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중심 바쳐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자의 살을 먹되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적인 뜻을 알아서 양식 삼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물에 삶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면서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며 마치 세상 지식이 진리인 양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며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 말씀은 세상 어떤 지식보다 뛰어나며(고전 1:25) 유일한 진리요, 영원히 변함 없기 때문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고 했는데, 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양식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레위기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빼고 읽거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사와 표적은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을 빼고 나면 결국 윤리와 도덕에 해당하는 것만 남지요. 더구나 자신이 지키기 어려운 말씀들은 흘려버리니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해도 믿음이 성장할 수도, 영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자기 생각에 맞는 특정한 부분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온전히 믿고 양식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통째로 불에 구워 먹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성령의 불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함 속에 깨닫고 양식 삼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풀지 않고 억지로 풀면 오히려 진리에서 벗어나 사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벧후 3:16).
마지막으로,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밤에 속하지만 때가 이르러 참 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면 아침이 되지요.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면 더 이상 마음밭을 개간하여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더 빨리 죄악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걸,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상급도 많이 쌓을 걸’ 아무리 안타깝게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고기를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부지런히 하나님 말씀을 잘 양식 삼아 신부단장을 온전히 마치라는 뜻입니다.
3.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 54∼55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과 함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함께 섭취해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흡수되고 노폐물은 배설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자의 살과 함께 반드시 인자의 피를 마셔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 실천할 때 영적인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할 때 진리는 흡수되고 반대되는 비진리는 배설되므로 검은 마음에서 하얀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양식 삼아 그대로 행하면 ‘사랑’이라는 영양분은 흡수되고 ‘미움’이라는 노폐물은 배설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하면 비진리의 마음은 빠져나가고 진리의 마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고 지켜 행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어린양을 ( ) 먹지 말라고 하신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 )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 )에 삶아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 )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 ( )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양식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어린양’이란?
아직 교미하지 않은 일 년 된 양을 어린양이라고 하는데 영적으로는 흠도 점도 없이 순결하신 예수님을 뜻한다.
양이 순종을 잘하고 온유하며 사람에게 털과 고기와 젖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므로 어린양은 초신자를 의미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
교육목표 : 인자의 살과 피가 상징하는 의미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며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음식을 섭취해야 하듯이,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과연 인자의 살과 피란 무엇이며,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일까요? 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할 수 있을까요?
1.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 53절에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인자의 살이란 예수님의 살, 곧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하셨습니다. 참된 양식인 인자의 살, 곧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는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잊어버리기도 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반면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암송할 때도 영적인 의미를 새기고 묵상하며 삶 속에 행함으로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마음에 양식 삼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고 핍박할 때 감정이 상하고 미워지며 결국 악으로 갚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이 말씀이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는지는 잊어버렸다 해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저절로 사랑과 긍휼이 우러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아 가면 진리가 채워지며 반대로 비진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인자의 살을 먹는 방법
출애굽기 12장 9~10절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에 비유하여 인자의 살을 먹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요. 즉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했습니다.
먼저, ‘날로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날로 먹으면 소화도 잘 안 되고 배탈 나기 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날로 먹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의 선진들이 골방에서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골방이 아닌 동산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골방은 영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은 골방에 들어가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듯이, 세상 근심 걱정이나 잡념을 차단하여 중언부언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중심 바쳐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자의 살을 먹되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적인 뜻을 알아서 양식 삼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물에 삶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면서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며 마치 세상 지식이 진리인 양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며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 말씀은 세상 어떤 지식보다 뛰어나며(고전 1:25) 유일한 진리요, 영원히 변함 없기 때문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고 했는데, 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양식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레위기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빼고 읽거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사와 표적은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을 빼고 나면 결국 윤리와 도덕에 해당하는 것만 남지요. 더구나 자신이 지키기 어려운 말씀들은 흘려버리니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해도 믿음이 성장할 수도, 영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자기 생각에 맞는 특정한 부분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온전히 믿고 양식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통째로 불에 구워 먹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성령의 불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함 속에 깨닫고 양식 삼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풀지 않고 억지로 풀면 오히려 진리에서 벗어나 사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벧후 3:16).
마지막으로,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밤에 속하지만 때가 이르러 참 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면 아침이 되지요.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면 더 이상 마음밭을 개간하여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더 빨리 죄악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걸,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상급도 많이 쌓을 걸’ 아무리 안타깝게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고기를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부지런히 하나님 말씀을 잘 양식 삼아 신부단장을 온전히 마치라는 뜻입니다.
3.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 54∼55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과 함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함께 섭취해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흡수되고 노폐물은 배설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자의 살과 함께 반드시 인자의 피를 마셔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 실천할 때 영적인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할 때 진리는 흡수되고 반대되는 비진리는 배설되므로 검은 마음에서 하얀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양식 삼아 그대로 행하면 ‘사랑’이라는 영양분은 흡수되고 ‘미움’이라는 노폐물은 배설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하면 비진리의 마음은 빠져나가고 진리의 마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고 지켜 행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어린양을 ( ) 먹지 말라고 하신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 )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 )에 삶아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 )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 ( )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양식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어린양’이란?
아직 교미하지 않은 일 년 된 양을 어린양이라고 하는데 영적으로는 흠도 점도 없이 순결하신 예수님을 뜻한다.
양이 순종을 잘하고 온유하며 사람에게 털과 고기와 젖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므로 어린양은 초신자를 의미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
2022-04-22
제16과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요한복음 3:3~8
읽을말씀 : 요한복음 3:3~8 | 외울말씀 : 요한복음 3:5 | 참고 말씀: 사도행전 2:38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깨닫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천사와 종말론, 그리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하며 호되게 책망하시지요. 겉모습은 거룩한 체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해 회칠한 무덤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며 죽이고자 했습니다.
1. 선한 중심을 소유한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지만 선한 중심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여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요 3:2). 그는 유대 최고 회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상류층 인사였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철저히 지키는 그였지만 날이 갈수록 진리에 대한 갈급함은 더 깊어 갔습니다. 그의 눈에는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이 여느 사람과 달라 보였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모든 말씀은 확신에 찬 진리의 말씀이었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알 수 없는 권세가 느껴졌습니다.
니고데모는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며 예수님을 옹호하였지요(요 7:51). 이러한 발언은 유대 관원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직위를 박탈당하고 박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옹호한 것은 니고데모가 얼마나 진실하며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운명하셨을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장사 지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요 19:39~40).
2.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영적인 대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하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벙어리를 말하게 하고,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는 등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선한 양심 속에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으로 무지한 니고데모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니, 어떻게 사람이 두 번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되물었지요.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깨우치지 못하니 육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말씀하십니다(요 3:5~7). 천국에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영이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러면 사람의 영이 어떻게 죽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첫 사람 아담은 이 땅의 흙으로 지어졌지만 생기, 곧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이 들어가자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 생령이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하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영이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며 진리를 공급받았지만, 영이 죽자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져 육체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즉 하나님께 영의 지식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대신 원수 마귀 사단이 심어 주는 비진리를 받아들여 세상 정욕을 좇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자 진리인 영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비진리가 들어와 영을 꼼짝 못하게 감싸므로 영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의 영이 죽으니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 어둠을 짝하다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모든 사람의 죽은 영을 살리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지요.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이란 영생수, 곧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뜻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시며 영생수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물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생명을 유지하며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은 마음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악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없고, 씻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 없듯이 영생수인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한 대로 미움, 시기, 판단, 정죄 등 비진리를 버리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더불어 “하라, 지키라” 한 대로 사랑하고 섬기며 성경 말씀들을 지켜 행하면 마음 안에 진리가 채워지지요. 이렇게 비진리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인 진리로 채우는 것이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물,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통회자복함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죽은 영이 살아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죄를 버리도록 도우심으로 진리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죽은 영이 살아나서 죄를 버리고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으며 마음의 죄악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니고데모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2. 사람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 )를 받아 진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3. 보혜사 ( )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죄를 버리도록 도우심으로 진리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렇게 성령의 도움을 받아 ( )이 살아나서 죄를 버리고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곧 ( )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산헤드린 공회’란?
니고데모가 속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통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회와 법원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곳이다.
공회의 구성원 수를 총 71인 혹은 72인으로 보는 등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대개 70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최고의장은 대제사장으로 그 구성원은 제사장, 장로, 서기관이었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깨닫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천사와 종말론, 그리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하며 호되게 책망하시지요. 겉모습은 거룩한 체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해 회칠한 무덤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며 죽이고자 했습니다.
1. 선한 중심을 소유한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지만 선한 중심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여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요 3:2). 그는 유대 최고 회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상류층 인사였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철저히 지키는 그였지만 날이 갈수록 진리에 대한 갈급함은 더 깊어 갔습니다. 그의 눈에는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이 여느 사람과 달라 보였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모든 말씀은 확신에 찬 진리의 말씀이었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알 수 없는 권세가 느껴졌습니다.
니고데모는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며 예수님을 옹호하였지요(요 7:51). 이러한 발언은 유대 관원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직위를 박탈당하고 박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옹호한 것은 니고데모가 얼마나 진실하며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운명하셨을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장사 지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요 19:39~40).
2.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영적인 대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하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벙어리를 말하게 하고,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는 등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선한 양심 속에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으로 무지한 니고데모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니, 어떻게 사람이 두 번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되물었지요.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깨우치지 못하니 육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말씀하십니다(요 3:5~7). 천국에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영이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러면 사람의 영이 어떻게 죽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첫 사람 아담은 이 땅의 흙으로 지어졌지만 생기, 곧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이 들어가자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 생령이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하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영이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며 진리를 공급받았지만, 영이 죽자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져 육체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즉 하나님께 영의 지식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대신 원수 마귀 사단이 심어 주는 비진리를 받아들여 세상 정욕을 좇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자 진리인 영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비진리가 들어와 영을 꼼짝 못하게 감싸므로 영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의 영이 죽으니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 어둠을 짝하다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모든 사람의 죽은 영을 살리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지요.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이란 영생수, 곧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뜻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시며 영생수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물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생명을 유지하며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은 마음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악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없고, 씻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 없듯이 영생수인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한 대로 미움, 시기, 판단, 정죄 등 비진리를 버리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더불어 “하라, 지키라” 한 대로 사랑하고 섬기며 성경 말씀들을 지켜 행하면 마음 안에 진리가 채워지지요. 이렇게 비진리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인 진리로 채우는 것이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물,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통회자복함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죽은 영이 살아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죄를 버리도록 도우심으로 진리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죽은 영이 살아나서 죄를 버리고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으며 마음의 죄악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니고데모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2. 사람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 )를 받아 진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3. 보혜사 ( )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죄를 버리도록 도우심으로 진리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렇게 성령의 도움을 받아 ( )이 살아나서 죄를 버리고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곧 ( )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산헤드린 공회’란?
니고데모가 속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통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회와 법원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곳이다.
공회의 구성원 수를 총 71인 혹은 72인으로 보는 등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대개 70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최고의장은 대제사장으로 그 구성원은 제사장, 장로, 서기관이었다.
2022-04-15
제15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한복음 11:25~2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25~2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1:25 |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교육목표 :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이 갖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은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은 신경도 살려 주셨고,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였지요.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나온 후에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요.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 대신 사망에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그 품에 안길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데 이것을 ‘영적인 부활’이라 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목표 :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이 갖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은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은 신경도 살려 주셨고,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였지요.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나온 후에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요.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 대신 사망에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그 품에 안길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데 이것을 ‘영적인 부활’이라 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2022-04-08
제14과가상칠언 (3)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0:20 | 참고 말씀: 마태복음 27:51~53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남기신 가상칠언 중 6언,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은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졌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마침내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긴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약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마치고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리고 완전히 승리하셨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2)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합니다.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가상칠언 중 제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제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기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기도를 하신 것은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루었음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한 것입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했는데, 이는 산천초목 모든 것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는데,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삼 일 만에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함을 증거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우치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2. 가상칠언 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 서는 ( )라고 부르셨다. 죄를 대속해 주는 ( )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 )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3. 성소 휘장이 위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 )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 )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영, 혼, 육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이란, 사람의 뇌세포 안에 있는 기억 장치와 그 안에 입력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이란,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남기신 가상칠언 중 6언,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은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졌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마침내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긴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약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마치고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리고 완전히 승리하셨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2)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합니다.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가상칠언 중 제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제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기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기도를 하신 것은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루었음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한 것입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했는데, 이는 산천초목 모든 것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는데,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삼 일 만에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함을 증거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우치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2. 가상칠언 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 서는 ( )라고 부르셨다. 죄를 대속해 주는 ( )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 )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3. 성소 휘장이 위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 )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 )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영, 혼, 육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이란, 사람의 뇌세포 안에 있는 기억 장치와 그 안에 입력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이란,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2022-04-01
제13과가상칠언 (2)
요한복음 19:26∼28, 마태복음 27:4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26∼28, 마태복음 27:4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2:50 | 참고 말씀: 시편 69:21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일곱 가지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를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가상칠언 중 3언, 4언, 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늘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지요.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계시니 이를 보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아시고 위로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 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 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한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시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은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것임을 알리는 절규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지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이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며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셨는지를 잘 알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지요. 이는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핏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 이는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셨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신 포도주를 드심으로 우리에게는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새 포도주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신약의 사랑의 법을 의미하지요.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매번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곧 우리를 위해 신 포도주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우리에게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핏값을 찾아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은 곧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아 준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3. 예수님께서는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4.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도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일곱 가지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를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가상칠언 중 3언, 4언, 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늘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지요.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계시니 이를 보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아시고 위로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 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 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한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시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은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것임을 알리는 절규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지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이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며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셨는지를 잘 알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지요. 이는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핏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 이는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셨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신 포도주를 드심으로 우리에게는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새 포도주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신약의 사랑의 법을 의미하지요.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매번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곧 우리를 위해 신 포도주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우리에게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핏값을 찾아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은 곧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아 준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3. 예수님께서는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4.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도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2022-03-25
제12과가상칠언 (1)
누가복음 23:33~43
읽을말씀 : 누가복음 23:33~4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27:38~4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남긴 가상칠언 중 1언, 2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 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먼저 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흉악한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관원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합니다. 이럴 때에 마땅히 행할 바가무엇인지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을 통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용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좌우편에 있던 강도들에 대한 기록이 다르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 하지요. 반면 누가복음 23장에는 ‘한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강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현장감 있게 유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많은 군중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강도 중에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니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지요.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한 것인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두 강도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전했습니다. 반면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사람들은 한편 강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당시 상황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경 기자들을 통해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반면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낮은 처소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이 없는 낙원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니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습니다. 그리고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했는데 여기서 ‘옥’이란 감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윗음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윗음부에 가셔야 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나옵니다(눅 16:22).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해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사람도 있기에(롬 2:14∼15),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 윗음부에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행 4:12).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기도와 전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1언에서 ‘저희’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2. 회개한 강도는 왜 천국에서 가장 낮은 처소인 낙원을 허락받았을까요?
3.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윗음부’란?
윗음부는 정확히 천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천국에 속한 곳으로, 구약 시대 구원받은 영혼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다. 정확히 말해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이 대기하던 곳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대기 장소가 천국 낙원의 가장자리로 바뀌었다.
신약 시대 윗음부는 구원받은 영혼이 낙원의 대기 장소로 들어가기 전 3일간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거치는 곳이며, 임신 6개월 후 태중에서 유산 또는 낙태된 영혼 중에 구원받은 영혼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남긴 가상칠언 중 1언, 2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 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먼저 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흉악한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관원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합니다. 이럴 때에 마땅히 행할 바가무엇인지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을 통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용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좌우편에 있던 강도들에 대한 기록이 다르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 하지요. 반면 누가복음 23장에는 ‘한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강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현장감 있게 유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많은 군중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강도 중에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니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지요.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한 것인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두 강도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전했습니다. 반면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사람들은 한편 강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당시 상황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경 기자들을 통해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반면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낮은 처소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이 없는 낙원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니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습니다. 그리고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했는데 여기서 ‘옥’이란 감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윗음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윗음부에 가셔야 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나옵니다(눅 16:22).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해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사람도 있기에(롬 2:14∼15),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 윗음부에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행 4:12).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기도와 전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1언에서 ‘저희’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2. 회개한 강도는 왜 천국에서 가장 낮은 처소인 낙원을 허락받았을까요?
3.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윗음부’란?
윗음부는 정확히 천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천국에 속한 곳으로, 구약 시대 구원받은 영혼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다. 정확히 말해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이 대기하던 곳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대기 장소가 천국 낙원의 가장자리로 바뀌었다.
신약 시대 윗음부는 구원받은 영혼이 낙원의 대기 장소로 들어가기 전 3일간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거치는 곳이며, 임신 6개월 후 태중에서 유산 또는 낙태된 영혼 중에 구원받은 영혼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다.
2022-03-18
제11과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태복음 27:29~30
읽을말씀 : 마태복음 27:29~30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10:5 | 참고 말씀: 마가복음 9:45~47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선고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당하며 피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 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달라 입력된 지식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대부분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요. 따라서 사람의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진리를 좇아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비진리 생각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요일 2:1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적인 생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상들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한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또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또한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수많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려 주신 사랑을 믿기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군병 한 사람이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군병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쇠못이 양손과 양발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악을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막 9:45~47).
오늘날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혈기가 나면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유 없이 살인하고 총을 난사하며 방화를 일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과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히 죄를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진리로 마음을 지키며 늘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사람의 ( )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이다.
② 우리에게 좋은 ( )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2.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섭리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 육신의 정욕 : 육신을 좇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 교만, 혈기, 게으름, 간음 등 죄의 속성이 있는데,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만나면 육신의 정욕이 나온다.
- 안목의 정욕 :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이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고 결국 죄를 짓게 된다.
- 이생의 자랑 :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선고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당하며 피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 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달라 입력된 지식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대부분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요. 따라서 사람의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진리를 좇아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비진리 생각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요일 2:1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적인 생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상들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한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또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또한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수많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려 주신 사랑을 믿기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습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군병 한 사람이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군병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쇠못이 양손과 양발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통해 마음에 죄악을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막 9:45~47).
오늘날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혈기가 나면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유 없이 살인하고 총을 난사하며 방화를 일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과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습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히 죄를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는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진리로 마음을 지키며 늘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사람의 ( )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이다.
② 우리에게 좋은 ( )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2.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섭리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 육신의 정욕 : 육신을 좇아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 교만, 혈기, 게으름, 간음 등 죄의 속성이 있는데,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만나면 육신의 정욕이 나온다.
- 안목의 정욕 :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이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고 결국 죄를 짓게 된다.
- 이생의 자랑 :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한다.
2022-03-11
제10과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이사야 53:5~6
읽을말씀 : 이사야 53:5~6 | 외울말씀 : 베드로전서 2:24 | 참고 말씀: 히브리서 9:2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질병이나 연약함과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을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 즉시 치료되어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치료받지 못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습니다.
2.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했는데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도 틈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사람이 보는 의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맞고 왔습니다. 이때 화를 내며 “왜 너는 자꾸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 하거나,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 찾아가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갚아 줘야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사람의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시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름을 알아 진리대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정작 문제가 생기면 세상을 의존합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병원부터 찾는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지요.
아사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발에 병이 들자 의원을 의지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써 죄를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했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제사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불순종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 )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 )이 ( )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2.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 )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 )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 )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사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사는 어머니가 가증한 아세라 우상을 섬기자 태후 자리까지 폐해 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던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뢰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선지자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재위 39년에 발에 중한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을 의뢰하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고 만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질병이나 연약함과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을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성경 곳곳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 즉시 치료되어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치료받지 못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습니다.
2.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했는데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도 틈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는 사람이 보는 의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맞고 왔습니다. 이때 화를 내며 “왜 너는 자꾸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 하거나,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 찾아가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갚아 줘야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사람의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시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름을 알아 진리대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정작 문제가 생기면 세상을 의존합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병원부터 찾는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지요.
아사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발에 병이 들자 의원을 의지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써 죄를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했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제사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불순종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다.
그 통로가 구약 시대의 ( )로서 백성을 대신하여 ( )이 ( )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2.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 )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 )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 )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사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사는 어머니가 가증한 아세라 우상을 섬기자 태후 자리까지 폐해 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던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뢰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선지자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재위 39년에 발에 중한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을 의뢰하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