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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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3
제38과빛 가운데 행하라
요일 1:6-7
읽을말씀 : 요일 1:6-7 | 외울말씀 : 요일 1:6-7
교육목표 :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과 믿음의 선진들의 사귐
성경상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졌던 인물로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나 전쟁에 나가 싸울 때도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묻듯이 일일이 하나님께 여쭈어 행하였지요.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다윗에게 너무나도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알려 주셨으므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삼하 5:19-25).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 소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도록 역사하셨고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이스라엘은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마치 부자간에 대소사를 논하듯이 하나님께 의뢰하여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역시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여 말하였을(출 33:11) 뿐만 아니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얼굴 뵈옵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모세의 소원을 들어 주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고 대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합니다. 또 민수기 12:3을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행했기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다윗이나 모세처럼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신실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는 누구이시고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등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 담아 놓은 것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거나 보장받을 수도 없으며 기도의 응답도 더디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육적인 충성과 더불어 영적인 충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감으로 의(義)와 인(人)과 신(信)을 이루는 충성"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의(義)"란 하나님께로 난 의, 즉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인(人)"이란 사람의 삶 속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信)"이란 믿음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마음의 할례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셨으니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 눈에 나타나는 행함도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되 우선이 무엇이며 차선은 무엇인지, 또 내용은 무엇이고 형식은 무엇인지를 밝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말씀했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한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할례의 성경적 배경과 마음의 할례
할례란 남자의 성기 끝을 난 지 팔일 만에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창 17:9-14). 또한 이 할례에 관한 규례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셨으니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규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1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구약이며 "장차 오는 것"은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림자와 참형상은 하나이며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육적인 할례가 아닌 영적인 할례로서 바로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신 10:16, 30:6, 롬 2:28-29).
그러면 마음의 할례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이 곧 마음의 할례입니다. 여기서 마음 가죽을 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할례는 육신의 할례와는 달리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또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받아 나가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함에 있어서 먼저는 육체의 일을 벗어내야 합니다. 즉 행함으로 나타나는 모든 죄를 끊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전에는 술과 담배를 했을지라도 이제는 끊어야 하며, 혈기가 많은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으로 나타나는 죄를 벗은 다음에는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 곧 미움, 시기, 질투 등 육신의 일들을 벗어야 합니다.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한 나의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근본 기(氣) 속에 있는 죄성까지도 모두 빼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 자체를 뿌리째 뽑아낼 때 육신의 생각 또한 깨끗이 사라지게 되니 비로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벗어내야 합니다. 자기 보기에 의, 자기적인 틀 등이 여기에 속하지요. 즉 자신이 보기에는 옳다고 여겨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고 악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일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 보기에 옳아도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 하시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이런 부분까지 철저히 발견하여 벗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3.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 이유
본문 7절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만일 내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원한다면 이는 합당치 못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죄가 사해졌지만 마음의 근본 죄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양심에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마음의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가 잘 되는 것이나 칭찬받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하고 더 나아가서는 상대를 해하고자 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시기심을 빼낸다면 범죄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빛 가운데 살라 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사망의 길에서 나와 축복받는 길이요,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6:53-54을 보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인자의 살"은 곧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요(요 1:1, 14),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피를 마신다는 것은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알아도 정작 마시지 않으면 여전히 갈증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양식삼고 행해 나갈 때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영양분으로 소화 흡수되고 모든 죄악들은 찌꺼기로 배설되므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기 질투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이러한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바로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심으며 행해 나가면 이 말씀이 영양분으로 흡수되면서 미움이나 시기, 질투의 마음은 찌꺼기로 배설되고 사랑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악들도 이와 같이 마음에서 빼내어 버리면 추한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죄악이 배설물로 배출되고 차츰 영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주님과 사귐이 있다 하는 것이요,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피를 마셔 본 사람만이 참생명을 얻어 소망과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며,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역사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과 믿음의 선진들의 사귐
성경상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졌던 인물로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나 전쟁에 나가 싸울 때도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묻듯이 일일이 하나님께 여쭈어 행하였지요.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다윗에게 너무나도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알려 주셨으므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삼하 5:19-25).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 소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도록 역사하셨고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이스라엘은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마치 부자간에 대소사를 논하듯이 하나님께 의뢰하여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역시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여 말하였을(출 33:11) 뿐만 아니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얼굴 뵈옵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모세의 소원을 들어 주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고 대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합니다. 또 민수기 12:3을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행했기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다윗이나 모세처럼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신실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는 누구이시고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등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 담아 놓은 것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거나 보장받을 수도 없으며 기도의 응답도 더디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육적인 충성과 더불어 영적인 충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감으로 의(義)와 인(人)과 신(信)을 이루는 충성"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의(義)"란 하나님께로 난 의, 즉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인(人)"이란 사람의 삶 속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信)"이란 믿음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마음의 할례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셨으니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 눈에 나타나는 행함도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되 우선이 무엇이며 차선은 무엇인지, 또 내용은 무엇이고 형식은 무엇인지를 밝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말씀했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한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할례의 성경적 배경과 마음의 할례
할례란 남자의 성기 끝을 난 지 팔일 만에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창 17:9-14). 또한 이 할례에 관한 규례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셨으니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규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1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구약이며 "장차 오는 것"은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림자와 참형상은 하나이며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육적인 할례가 아닌 영적인 할례로서 바로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신 10:16, 30:6, 롬 2:28-29).
그러면 마음의 할례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이 곧 마음의 할례입니다. 여기서 마음 가죽을 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할례는 육신의 할례와는 달리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또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받아 나가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함에 있어서 먼저는 육체의 일을 벗어내야 합니다. 즉 행함으로 나타나는 모든 죄를 끊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전에는 술과 담배를 했을지라도 이제는 끊어야 하며, 혈기가 많은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으로 나타나는 죄를 벗은 다음에는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 곧 미움, 시기, 질투 등 육신의 일들을 벗어야 합니다.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한 나의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근본 기(氣) 속에 있는 죄성까지도 모두 빼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 자체를 뿌리째 뽑아낼 때 육신의 생각 또한 깨끗이 사라지게 되니 비로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벗어내야 합니다. 자기 보기에 의, 자기적인 틀 등이 여기에 속하지요. 즉 자신이 보기에는 옳다고 여겨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고 악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일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 보기에 옳아도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 하시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이런 부분까지 철저히 발견하여 벗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3.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 이유
본문 7절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만일 내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원한다면 이는 합당치 못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죄가 사해졌지만 마음의 근본 죄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양심에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마음의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가 잘 되는 것이나 칭찬받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하고 더 나아가서는 상대를 해하고자 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시기심을 빼낸다면 범죄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빛 가운데 살라 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사망의 길에서 나와 축복받는 길이요,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6:53-54을 보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인자의 살"은 곧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요(요 1:1, 14),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피를 마신다는 것은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알아도 정작 마시지 않으면 여전히 갈증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양식삼고 행해 나갈 때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영양분으로 소화 흡수되고 모든 죄악들은 찌꺼기로 배설되므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기 질투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이러한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바로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심으며 행해 나가면 이 말씀이 영양분으로 흡수되면서 미움이나 시기, 질투의 마음은 찌꺼기로 배설되고 사랑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악들도 이와 같이 마음에서 빼내어 버리면 추한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죄악이 배설물로 배출되고 차츰 영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주님과 사귐이 있다 하는 것이요,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피를 마셔 본 사람만이 참생명을 얻어 소망과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며,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역사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16
제37과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연휴를 지내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요? 가족과 함께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실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된 가정이지요.
1. 추석의 유래 및 성경적 이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에 하나인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합니다.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 한 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 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이처럼 신라시대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농사한 햇곡식과 햇과일을 추수하여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절기로 초실절(맥추감사절)과 수장절(추수감사절)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것처럼 추석은 우리 민족에게 주신 추수감사의 절기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2. 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 풍성한 수확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시겠습니다.
묵상기도 : 다같이
기 원 :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아멘 -
찬 송 : 460장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 도 : 가족 중에서
(예 문)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날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이 아침에 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써 사해 주옵시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석 명절의 의미를 잘 알아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옵시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가족들도 기억하여 주옵시고 늘 주님의 품 안에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모든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성경봉독 : 민 6:24-26 : 인도자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설교자
찬 송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3. 설교 예문
본 문 : 민수기 6 : 24-26 ( 제목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날마다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절)
먼저, 지켜 주시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오늘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오늘 우리 가족은 이렇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다음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스승님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환난과 재앙 많은 세상에서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절)
마지막으로,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늘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온 가족들을 평강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추석이면 으레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을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동안은 진리를 몰랐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서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를 다하는 자녀가 되며 온 가족이 주 하나님을 잘 섬겨 복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가족은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연휴를 지내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요? 가족과 함께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실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된 가정이지요.
1. 추석의 유래 및 성경적 이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에 하나인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합니다.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 한 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 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이처럼 신라시대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농사한 햇곡식과 햇과일을 추수하여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절기로 초실절(맥추감사절)과 수장절(추수감사절)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것처럼 추석은 우리 민족에게 주신 추수감사의 절기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2. 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 풍성한 수확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시겠습니다.
묵상기도 : 다같이
기 원 :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아멘 -
찬 송 : 460장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 도 : 가족 중에서
(예 문)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날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이 아침에 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써 사해 주옵시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석 명절의 의미를 잘 알아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옵시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가족들도 기억하여 주옵시고 늘 주님의 품 안에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모든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성경봉독 : 민 6:24-26 : 인도자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설교자
찬 송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3. 설교 예문
본 문 : 민수기 6 : 24-26 ( 제목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날마다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절)
먼저, 지켜 주시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오늘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오늘 우리 가족은 이렇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다음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스승님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환난과 재앙 많은 세상에서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절)
마지막으로,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늘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온 가족들을 평강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추석이면 으레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을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동안은 진리를 몰랐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서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를 다하는 자녀가 되며 온 가족이 주 하나님을 잘 섬겨 복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가족은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09
제36과육신의 일과 영의 일
롬 8:5-6
읽을말씀 : 롬 8:5-6 | 외울말씀 : 롬 8:5-6
교육목표 :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육신의 일을 벗고 영을 좇아 빛으로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므로 우리가 어두움을 버리고 빛으로 들어가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십니다.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으로 인해 죄를 지어 어두움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진리를 행함으로 빛 가운데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로마서 8:5-6에 육신을 좇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함으로 죄를 짓고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을 좇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우선 "육신"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과 우리의 몸이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몸"의 사전적인 의미는 "몸뚱이, 신체, 살" 등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몸"이란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심어 주신 영의 지식 곧 생명의 지식이 사라져 버리고 남은 껍질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콜라가 담긴 컵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콜라를 제외한 컵만 따로 볼 때는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몸"이라는 컵 안에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지식들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죄성이 들어가서 컵 곧 몸과 결합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의 몸이 육신이 되었을까요? 아담의 불순종 이후 그 후손인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하며 태어나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비진리를 행하면서 지어 가는 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즉 진리가 빠져 나가 버린 사람의 몸에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이 결합되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25을 통하여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백한 대로 육신은 죄 곧 세상과 불의를 좇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신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어둠에 거하여 결국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육신의 일"이란 아직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을 각각 분해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즉 몸과 죄가 결합된 것이 육신이라면, 그 죄성들을 낱낱이 분해해 놓은 것이 육신의 일인 것입니다. 미움, 거짓, 음욕, 교만 등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육신의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움이나 간음 등이 마음 속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지는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죄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일들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난 것이 곧 육체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을 총칭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란 영적으로 썩어지고 없어지며 변질되고 추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즉 육체와 육신,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을 다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육신의 일, 육체의 일이 있다면 이는 곧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므로 어두움의 권세자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육과 반대인 "영"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참이요 진리이며 생명 자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성령으로 영을 낳아(요 3:6) 성령의 열매가 하나하나 맺히게 됩니다(갈 5:22-23).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영으로 일구어졌는가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치가 됩니다. 가령, 성령의 열매가 10% 맺혀 있다면 10%만큼 내 마음이 변치 않는 영으로 일구어진 것이고, 50% 맺혀 있다면 50%만큼 영으로 일구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영의 일"이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와 전도, 구제, 선행, 봉사 등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영의 일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면 맺힐수록 영의 일을 더 생각하게 되고 영의 일을 생각하므로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좇는지, 아니면 영을 좇는지를 알려면 행함을 통해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 이유 없이 오른뺨을 때렸을 때 영을 좇는 사람은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왼뺨도 돌려 댑니다. 또한 자신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슬퍼하거나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영을 좇는 사람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과 같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으며 빛 가운데 행하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 5:9).
2.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의 차이점
1) 하나님을 믿고 만나는 분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후에도 범사에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려면 항상 영을 좇아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막상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어둠과 짝하므로 하나님의 지킴을 받지 못하니 시험 환난에 빠지거나 각종 어려움을 만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요.
반면에 영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대로 천군 천사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영혼이 점점 잘되어 가니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질병에 걸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다 병균에 감염되었거나 몸에 무리를 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등 외부적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 방법도 병원이나 약을 의존하게 되지요. 그런데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얻어 나갑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질병은 죄로 인해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렸다면 스스로 돌아보아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물론 질병의 원인에는 죄뿐만 아니라 과식, 무절제,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경우도 있고 원수 마귀가 질병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면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중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세상 의원에게 의존한 결과 치료받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경영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만 영을 좇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기록된 말씀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 나갑니다. 또한 당장의 손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진리에 맞는 일인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가?"를 살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슨 결정을 내릴 때는 자기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여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 나갑니다(잠 16:3). 따라서 앞일을 예지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가게 되니 매사에 실수가 없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형통함을 입으려면 무엇보다도 불같이 기도하여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영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성령의 밝은 음성과 인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입는 방법
첫째,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고 영의 생각만을 좇게 되어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서는 행함으로 산 믿음을 내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회개의 역사를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만일 육을 좇았다면 그만큼 하나님과 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힘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불같은 기도를 통해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죄의 담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되며 성령의 불로 죄성을 태움받아 영의 일을 좇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을 좇아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질병이 치료되고 사업터, 일터에 축복이 임하게 되며 불화했던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또한 야고보서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들이 임하게 됩니다. 즉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며, 머리 되는 축복,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다 응답받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을 밝히 구분하여 아직 남아 있는 육신의 일을 버리고 항상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오직 진리대로 행함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며 만사형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육신의 일을 벗고 영을 좇아 빛으로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므로 우리가 어두움을 버리고 빛으로 들어가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십니다.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으로 인해 죄를 지어 어두움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진리를 행함으로 빛 가운데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로마서 8:5-6에 육신을 좇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함으로 죄를 짓고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을 좇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우선 "육신"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과 우리의 몸이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몸"의 사전적인 의미는 "몸뚱이, 신체, 살" 등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몸"이란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심어 주신 영의 지식 곧 생명의 지식이 사라져 버리고 남은 껍질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콜라가 담긴 컵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콜라를 제외한 컵만 따로 볼 때는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몸"이라는 컵 안에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지식들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죄성이 들어가서 컵 곧 몸과 결합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의 몸이 육신이 되었을까요? 아담의 불순종 이후 그 후손인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하며 태어나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비진리를 행하면서 지어 가는 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즉 진리가 빠져 나가 버린 사람의 몸에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이 결합되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25을 통하여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백한 대로 육신은 죄 곧 세상과 불의를 좇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신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어둠에 거하여 결국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육신의 일"이란 아직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을 각각 분해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즉 몸과 죄가 결합된 것이 육신이라면, 그 죄성들을 낱낱이 분해해 놓은 것이 육신의 일인 것입니다. 미움, 거짓, 음욕, 교만 등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육신의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움이나 간음 등이 마음 속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지는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죄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일들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난 것이 곧 육체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을 총칭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란 영적으로 썩어지고 없어지며 변질되고 추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즉 육체와 육신,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을 다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육신의 일, 육체의 일이 있다면 이는 곧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므로 어두움의 권세자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육과 반대인 "영"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참이요 진리이며 생명 자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성령으로 영을 낳아(요 3:6) 성령의 열매가 하나하나 맺히게 됩니다(갈 5:22-23).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영으로 일구어졌는가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치가 됩니다. 가령, 성령의 열매가 10% 맺혀 있다면 10%만큼 내 마음이 변치 않는 영으로 일구어진 것이고, 50% 맺혀 있다면 50%만큼 영으로 일구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영의 일"이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와 전도, 구제, 선행, 봉사 등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영의 일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면 맺힐수록 영의 일을 더 생각하게 되고 영의 일을 생각하므로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좇는지, 아니면 영을 좇는지를 알려면 행함을 통해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 이유 없이 오른뺨을 때렸을 때 영을 좇는 사람은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왼뺨도 돌려 댑니다. 또한 자신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슬퍼하거나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영을 좇는 사람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과 같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으며 빛 가운데 행하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 5:9).
2.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의 차이점
1) 하나님을 믿고 만나는 분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후에도 범사에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려면 항상 영을 좇아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막상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어둠과 짝하므로 하나님의 지킴을 받지 못하니 시험 환난에 빠지거나 각종 어려움을 만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요.
반면에 영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대로 천군 천사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영혼이 점점 잘되어 가니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질병에 걸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다 병균에 감염되었거나 몸에 무리를 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등 외부적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 방법도 병원이나 약을 의존하게 되지요. 그런데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얻어 나갑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질병은 죄로 인해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렸다면 스스로 돌아보아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물론 질병의 원인에는 죄뿐만 아니라 과식, 무절제,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경우도 있고 원수 마귀가 질병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면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중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세상 의원에게 의존한 결과 치료받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경영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만 영을 좇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기록된 말씀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 나갑니다. 또한 당장의 손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진리에 맞는 일인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가?"를 살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슨 결정을 내릴 때는 자기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여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 나갑니다(잠 16:3). 따라서 앞일을 예지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가게 되니 매사에 실수가 없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형통함을 입으려면 무엇보다도 불같이 기도하여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영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성령의 밝은 음성과 인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입는 방법
첫째,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고 영의 생각만을 좇게 되어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서는 행함으로 산 믿음을 내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회개의 역사를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만일 육을 좇았다면 그만큼 하나님과 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힘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불같은 기도를 통해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죄의 담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되며 성령의 불로 죄성을 태움받아 영의 일을 좇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을 좇아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질병이 치료되고 사업터, 일터에 축복이 임하게 되며 불화했던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또한 야고보서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들이 임하게 됩니다. 즉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며, 머리 되는 축복,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다 응답받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을 밝히 구분하여 아직 남아 있는 육신의 일을 버리고 항상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오직 진리대로 행함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며 만사형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02
제35과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 1:5
읽을말씀 : 요일 1:5 | 외울말씀 : 요일 1:5
교육목표 : 빛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항상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1. 빛의 영적인 의미
하나님께서는 질병이나 사업터, 가정이나 자녀의 문제든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각종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으니 빛을 따라 나오기만 하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 자체가 되시고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야고보서 1:17을 보면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빛이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최고의 완벽함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땅에 보여지는 것으로 나타내 주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믿음, 선(善), 의(義), 영(靈), 빛과의 관계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단지 말씀을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믿음으로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말씀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서 산 믿음, 즉 행함이 따르는 참믿음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담의 범죄 이후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즉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모양들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선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의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 생각이나 경험, 내 지식에 맞지 아니해도 진리를 좇아 오직 "아멘" 하고 순종하며 변함없이 의를 행해 나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용서하라 하신 말씀에 은혜를 받아 열심히 용서해 나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는 상황을 만나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 안에 변하는 속성, 곧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으니 끝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룬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성경 안에서의 의미로서 단순히 영, 혼, 육의 구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즉 육의 반대적인 의미로서 썩지 않는 것,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진리, 부활, 소망과 사랑, 생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5:18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의 행동은 바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의가 사랑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결정체로 나오게 된 것을 영이라 하며,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에 변함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의 모습이 모든 분야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이를 가리켜 온 영이라고 말합니다(살전 5:23).
우리가 온 영을 이루게 되면 이때는 행하는 것마다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영이 내면적인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빛은 내면적인 것이 밖으로 나타났을 때의 속성을 표현해 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 자체를 가리켜 "태양"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우리가 보는 것은 태양빛인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했고, 본문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온전한 영으로서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빛으로 나타나는 과정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온 영의 단계에 이르러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그 단계에 맞는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은 과연 각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착함이란 곧 선을, 의로움은 선의 기준이 되는 의를, 진실함은 곧 변함없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니 빛의 열매에는 반드시 선이 나타나되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영의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 영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사람에 맞는 선의 단계의 모습이 의의 행함을 통해 나오게 되지만, 육이 있는 만큼 상황에 따라 변할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즉 '믿습니다' 하고 백 사람이 고백한다고 해도 각 사람의 선이 다르고 의가 다르며, 영이 다르고 빛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단계에 이르면 이때는 상대를 감동시킬 만한 선이 변함없는 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고, 온 영으로 이루게 되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선의 마음으로 믿음과 순종과 행함의 의를 변함없이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이와 같이 빛에 속한 것들이 있는 반면에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에 속한 것들도 있습니다. 어두움은 한 마디로 죄에 속한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육체의 일과 육신의 일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는 의로 여기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인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의 육신의 일과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과 같은 육체의 일들은 듣기만 해도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기 보기에는 의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어두움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빛 앞에는 조금의 어두움도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빛으로 비추면 반드시 어두움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마 16:21-23). 이는 베드로 편에서는 스승을 위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스스로는 어두움이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빛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므로 빛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비추이는 곳에는 어두움인 죄가 떠나고 죄가 떠나면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지며 빛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2: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으니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빛 가운데 나올 수 있습니다.
5. 빛 가운데 거하면 응답과 축복
그러면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둠에 거하면서 어둠을 더 사랑하고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요 3:19-20). 세상의 쾌락과 물질, 자기 유익을 좇아 살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을 좇으라는 빛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가려서 오해됨으로 인해 빛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왜 꼭 교회에 나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은 인정하지만 왜 우리가 죄인이며 또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실족당해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짓되고 가식적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만이 참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요, 믿는다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 문을 닫으며 영생의 길로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본이 되는 빛의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빛으로 인도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왔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질병이 떠나지 않고 사업터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약속하셨고, 또한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는데(마 9:29) 왜 응답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빛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나오는 것과 빛에 거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빛으로 나왔다 해도 다시 어두움으로 되돌아간다면 이는 결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그 마음을 잠시 돌이켰다가 다시 예전처럼 미워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빛에 거한다 해도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빛으로 더 가까이 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빛에 거하여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니 믿음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함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물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항상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1. 빛의 영적인 의미
하나님께서는 질병이나 사업터, 가정이나 자녀의 문제든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각종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으니 빛을 따라 나오기만 하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 자체가 되시고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야고보서 1:17을 보면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빛이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최고의 완벽함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땅에 보여지는 것으로 나타내 주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믿음, 선(善), 의(義), 영(靈), 빛과의 관계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단지 말씀을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믿음으로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말씀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서 산 믿음, 즉 행함이 따르는 참믿음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담의 범죄 이후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즉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모양들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선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의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 생각이나 경험, 내 지식에 맞지 아니해도 진리를 좇아 오직 "아멘" 하고 순종하며 변함없이 의를 행해 나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용서하라 하신 말씀에 은혜를 받아 열심히 용서해 나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는 상황을 만나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 안에 변하는 속성, 곧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으니 끝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룬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성경 안에서의 의미로서 단순히 영, 혼, 육의 구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즉 육의 반대적인 의미로서 썩지 않는 것,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진리, 부활, 소망과 사랑, 생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5:18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의 행동은 바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의가 사랑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결정체로 나오게 된 것을 영이라 하며,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에 변함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의 모습이 모든 분야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이를 가리켜 온 영이라고 말합니다(살전 5:23).
우리가 온 영을 이루게 되면 이때는 행하는 것마다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영이 내면적인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빛은 내면적인 것이 밖으로 나타났을 때의 속성을 표현해 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 자체를 가리켜 "태양"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우리가 보는 것은 태양빛인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했고, 본문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온전한 영으로서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빛으로 나타나는 과정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온 영의 단계에 이르러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그 단계에 맞는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은 과연 각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착함이란 곧 선을, 의로움은 선의 기준이 되는 의를, 진실함은 곧 변함없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니 빛의 열매에는 반드시 선이 나타나되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영의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 영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사람에 맞는 선의 단계의 모습이 의의 행함을 통해 나오게 되지만, 육이 있는 만큼 상황에 따라 변할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즉 '믿습니다' 하고 백 사람이 고백한다고 해도 각 사람의 선이 다르고 의가 다르며, 영이 다르고 빛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단계에 이르면 이때는 상대를 감동시킬 만한 선이 변함없는 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고, 온 영으로 이루게 되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선의 마음으로 믿음과 순종과 행함의 의를 변함없이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이와 같이 빛에 속한 것들이 있는 반면에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에 속한 것들도 있습니다. 어두움은 한 마디로 죄에 속한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육체의 일과 육신의 일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는 의로 여기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인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의 육신의 일과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과 같은 육체의 일들은 듣기만 해도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기 보기에는 의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어두움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빛 앞에는 조금의 어두움도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빛으로 비추면 반드시 어두움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마 16:21-23). 이는 베드로 편에서는 스승을 위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스스로는 어두움이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빛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므로 빛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비추이는 곳에는 어두움인 죄가 떠나고 죄가 떠나면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지며 빛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2: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으니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빛 가운데 나올 수 있습니다.
5. 빛 가운데 거하면 응답과 축복
그러면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둠에 거하면서 어둠을 더 사랑하고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요 3:19-20). 세상의 쾌락과 물질, 자기 유익을 좇아 살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을 좇으라는 빛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가려서 오해됨으로 인해 빛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왜 꼭 교회에 나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은 인정하지만 왜 우리가 죄인이며 또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실족당해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짓되고 가식적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만이 참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요, 믿는다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 문을 닫으며 영생의 길로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본이 되는 빛의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빛으로 인도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왔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질병이 떠나지 않고 사업터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약속하셨고, 또한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는데(마 9:29) 왜 응답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빛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나오는 것과 빛에 거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빛으로 나왔다 해도 다시 어두움으로 되돌아간다면 이는 결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그 마음을 잠시 돌이켰다가 다시 예전처럼 미워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빛에 거한다 해도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빛으로 더 가까이 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빛에 거하여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니 믿음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함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물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26
제34과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삿 11:30-35
읽을말씀 : 삿 11:30-35 | 외울말씀 : 삿 11:31
교육목표 : 서원한 것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 행하는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서로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명심하여 반드시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는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하고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약속을 지킬 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작정하여 서원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 대통령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시간이 다 되어 "급한 볼일이 있으니 10분만 늦게 가겠습니다" 한다든가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일방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심히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신뢰나 축복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킨 입다를 통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축복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입다의 서원과 전쟁에서의 승리
이스라엘 길르앗 지방의 큰 용사로서,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이 입다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아들들이 입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으려고 길르앗에서 내쫓아 버림으로 입다는 돕 땅으로 가서 추종세력을 모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신 바알을 섬김으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 의해 크게 학대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심히 곤고해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회개하고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삿 10:10). 마침 암몬 자손의 공격을 받자 미스바에 모여 진을 치기는 했으나 군대를 통솔하며 앞서 싸울 장수가 없었지요.
이에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화평 속에서 시비를 가리고 전쟁을 그치려 했지만 쉽게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고 입다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지요. 입다의 간절한 서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2.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입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입다가 기쁨을 안고 집에 이르렀을 때에 그를 맨 처음 맞이한 사람은 바로 사랑스런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승전이 너무나 기뻐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입다는 너무나 큰 괴로움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탄식하였습니다(삿 11:35). 그러나 아무리 무남독녀라 해도 한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임의로 변개할 수 없었기에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며 감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번복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사연을 알게 된 후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하게 하셨을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요, 입다에게 그런 서원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앞두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성급하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은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9)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너무도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맞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요.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이행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입다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성급한 서원을 했지만 그 중심만은 바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면 온전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다른 예를 찾는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수양을 준비해 두셔서 이삭이 죽지 않도록 해 주셨는데 왜 입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진실한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교훈 삼게 하시기 위한 섭리 때문입니다.
그러면 입다의 딸이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닐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확실한 신뢰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맞는 죽음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하나님과 아버지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조금도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이나 입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대신 불 속으로 뛰어들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나 가장 사랑하는 자녀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두 내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입다의 딸이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입다의 곧은 성품으로 보아 딸을 강제로라도 번제로 드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입다의 딸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기보다는 불순종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약속한 것이고 내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라는 한 마디 원망도 없이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드렸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칭송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올바른 서원과 이행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서원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말을 내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도 약속이나 서원의 이행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21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씀하시며 서원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수기 30:2을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고, 시편 15:4에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번제로 즉 짐승처럼 잡아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가른 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중심이 중요한 것이며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형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의 약속,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과 간사함이 없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누구와 약속한 것이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진실한 마음 중심을 이룰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으며 하나님께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약속 이행에 따르는 축복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서원한 것이 지키기 어렵더라도 마음에 결심하고 신속히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더디 행하면 그만큼 축복도 더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나마 서원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담이 되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아예 서원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후서 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말씀한 대로 믿음이 없어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성껏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넘치도록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도로, 봉사로, 물질로 심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핑계 대지 않고 서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마음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 중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는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임한다 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리고 저주는 왜 임하는지 밝히 알려 주고 계시지요.
요한삼서 2절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고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민 23:19), 더욱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음에 있는 바, 결심한 바,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서원한 것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 행하는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서로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명심하여 반드시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는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하고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약속을 지킬 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작정하여 서원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 대통령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시간이 다 되어 "급한 볼일이 있으니 10분만 늦게 가겠습니다" 한다든가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일방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심히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신뢰나 축복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킨 입다를 통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축복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입다의 서원과 전쟁에서의 승리
이스라엘 길르앗 지방의 큰 용사로서,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이 입다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아들들이 입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으려고 길르앗에서 내쫓아 버림으로 입다는 돕 땅으로 가서 추종세력을 모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신 바알을 섬김으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 의해 크게 학대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심히 곤고해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회개하고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삿 10:10). 마침 암몬 자손의 공격을 받자 미스바에 모여 진을 치기는 했으나 군대를 통솔하며 앞서 싸울 장수가 없었지요.
이에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화평 속에서 시비를 가리고 전쟁을 그치려 했지만 쉽게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고 입다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지요. 입다의 간절한 서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2.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입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입다가 기쁨을 안고 집에 이르렀을 때에 그를 맨 처음 맞이한 사람은 바로 사랑스런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승전이 너무나 기뻐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입다는 너무나 큰 괴로움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탄식하였습니다(삿 11:35). 그러나 아무리 무남독녀라 해도 한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임의로 변개할 수 없었기에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며 감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번복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사연을 알게 된 후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하게 하셨을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요, 입다에게 그런 서원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앞두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성급하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은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9)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너무도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맞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요.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이행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입다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성급한 서원을 했지만 그 중심만은 바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면 온전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다른 예를 찾는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수양을 준비해 두셔서 이삭이 죽지 않도록 해 주셨는데 왜 입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진실한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교훈 삼게 하시기 위한 섭리 때문입니다.
그러면 입다의 딸이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닐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확실한 신뢰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맞는 죽음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하나님과 아버지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조금도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이나 입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대신 불 속으로 뛰어들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나 가장 사랑하는 자녀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두 내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입다의 딸이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입다의 곧은 성품으로 보아 딸을 강제로라도 번제로 드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입다의 딸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기보다는 불순종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약속한 것이고 내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라는 한 마디 원망도 없이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드렸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칭송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올바른 서원과 이행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서원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말을 내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도 약속이나 서원의 이행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21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씀하시며 서원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수기 30:2을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고, 시편 15:4에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번제로 즉 짐승처럼 잡아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가른 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중심이 중요한 것이며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형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의 약속,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과 간사함이 없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누구와 약속한 것이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진실한 마음 중심을 이룰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으며 하나님께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약속 이행에 따르는 축복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서원한 것이 지키기 어렵더라도 마음에 결심하고 신속히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더디 행하면 그만큼 축복도 더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나마 서원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담이 되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아예 서원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후서 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말씀한 대로 믿음이 없어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성껏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넘치도록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도로, 봉사로, 물질로 심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핑계 대지 않고 서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마음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 중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는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임한다 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리고 저주는 왜 임하는지 밝히 알려 주고 계시지요.
요한삼서 2절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고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민 23:19), 더욱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음에 있는 바, 결심한 바,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19
제33과주신 자도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욥 1:20-22
읽을말씀 : 욥 1:20-22 | 외울말씀 : 욥 1:21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 중심과 온전한 선의 마음을 이루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보석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는 가공 전에는 하나의 돌에 불과하지만 잘 갈고 다듬으면 가치가 더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직 제 빛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점 그 빛을 발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돌을 갈고 다듬어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보석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연단과정을 잘 거쳐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욥이라는 인물의 연단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빈민과 고아를 돌아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친히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단지 하나님에 대해 전해 듣고 선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욥에게 시험이 찾아왔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선의 4단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누가 자신을 욕하고 괴롭힐 때 같이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 단계의 선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말하지요.
둘째는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미운 감정 자체를 마음에 품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낮아지고 섬겨 주는 선으로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선이라 인정하시는 가장 낮은 단계의 선입니다.
셋째는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마음에 감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감동적인 선의 말로써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넷째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서 바로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선,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인된 인류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 이것이 곧 최고의 선이며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선의 차원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욥의 연단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즉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이 아직 생명을 줄 수 있는 온전한 선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행위적으로는 너무도 완벽했지만 마음 안에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것마저 온전케 하심으로 욥의 마음을 온전한 선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2. 욥에게 찾아온 시험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루는 사단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으로 인해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송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되 욥의 소유물을 다 거둘지라도 오직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즉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욥 1:1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송사하므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했을 때 사단이 이를 송사하고 시험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욥의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한 마디로 정신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고백합니다.
욥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는데, 이번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입니다.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으니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하고 타이르며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욥이 진리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지요.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처럼 욥이 처음에는 감사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욥기 3:1을 보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는데 이는 자신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지요. 생명이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 근본의 악이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원망과 저주는 욥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욥기 27:2을 보면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의로웠고 진실했고, 나는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했거늘 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하나님께 따지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녕 하나님을 믿었다면 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하였던 고백이 참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여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무엇이든 전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본 사람의 마음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도리어 욥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도 범죄할 뿐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더더욱 악을 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친구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욥 4:7). 즉 죄가 있으니 망한 것이고 정직하지 못하니 끊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시험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말지요.
다음으로 친구 소발은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10) 하였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가 막겠느냐 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문제가 왔을 때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반드시 지켜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오해해서 "시험 환난이 와도 욥처럼 참아라. 그러면 나중에는 축복이 온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욥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당하는 등 고통이 더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자복하여 신속히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고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 빌닷은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욥과의 계속된 변론도 있었고 또한 욥 역시 친구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위로해 주러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악이며 더욱이 빌닷은 전에 욥에 대해 느꼈던 시기심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더욱 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세 친구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이는 극도의 절망 가운데 한 말이니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감정이 상하거나 혈기를 내는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어 축복받은 욥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식적으로만 알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욥에게 친히 음성으로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하나님 앞에 큰소리치며 많은 말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해 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대하게 되니 욥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와 보라고 하면서 변론하자고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 면목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물으시고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욥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시며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이었으니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바로 철저히 돌이키며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는 중심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욥 42:2).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과 중심이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욥에게 원하셨던 온전한 선의 마음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 후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생명을 달라고 하신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그에 따른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까지 온전해진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더불어 자녀의 축복도 넘치게 주셔서 아들 일곱과 세 딸을 낳았는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명예, 권세,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 물질의 축복 등 모든 축복을 넘치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칠 수 있는 영적인 사랑, 온전한 선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영롱하고 아름다운 선의 빛을 발하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 중심과 온전한 선의 마음을 이루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보석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는 가공 전에는 하나의 돌에 불과하지만 잘 갈고 다듬으면 가치가 더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직 제 빛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점 그 빛을 발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돌을 갈고 다듬어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보석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연단과정을 잘 거쳐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욥이라는 인물의 연단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빈민과 고아를 돌아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친히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단지 하나님에 대해 전해 듣고 선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욥에게 시험이 찾아왔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선의 4단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누가 자신을 욕하고 괴롭힐 때 같이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 단계의 선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말하지요.
둘째는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미운 감정 자체를 마음에 품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낮아지고 섬겨 주는 선으로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선이라 인정하시는 가장 낮은 단계의 선입니다.
셋째는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마음에 감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감동적인 선의 말로써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넷째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서 바로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선,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인된 인류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 이것이 곧 최고의 선이며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선의 차원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욥의 연단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즉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이 아직 생명을 줄 수 있는 온전한 선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행위적으로는 너무도 완벽했지만 마음 안에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것마저 온전케 하심으로 욥의 마음을 온전한 선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2. 욥에게 찾아온 시험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루는 사단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으로 인해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송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되 욥의 소유물을 다 거둘지라도 오직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즉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욥 1:1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송사하므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했을 때 사단이 이를 송사하고 시험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욥의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한 마디로 정신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고백합니다.
욥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는데, 이번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입니다.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으니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하고 타이르며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욥이 진리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지요.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처럼 욥이 처음에는 감사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욥기 3:1을 보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는데 이는 자신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지요. 생명이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 근본의 악이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원망과 저주는 욥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욥기 27:2을 보면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의로웠고 진실했고, 나는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했거늘 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하나님께 따지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녕 하나님을 믿었다면 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하였던 고백이 참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여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무엇이든 전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본 사람의 마음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도리어 욥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도 범죄할 뿐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더더욱 악을 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친구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욥 4:7). 즉 죄가 있으니 망한 것이고 정직하지 못하니 끊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시험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말지요.
다음으로 친구 소발은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10) 하였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가 막겠느냐 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문제가 왔을 때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반드시 지켜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오해해서 "시험 환난이 와도 욥처럼 참아라. 그러면 나중에는 축복이 온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욥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당하는 등 고통이 더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자복하여 신속히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고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 빌닷은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욥과의 계속된 변론도 있었고 또한 욥 역시 친구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위로해 주러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악이며 더욱이 빌닷은 전에 욥에 대해 느꼈던 시기심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더욱 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세 친구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이는 극도의 절망 가운데 한 말이니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감정이 상하거나 혈기를 내는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어 축복받은 욥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식적으로만 알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욥에게 친히 음성으로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하나님 앞에 큰소리치며 많은 말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해 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대하게 되니 욥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와 보라고 하면서 변론하자고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 면목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물으시고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욥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시며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이었으니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바로 철저히 돌이키며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는 중심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욥 42:2).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과 중심이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욥에게 원하셨던 온전한 선의 마음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 후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생명을 달라고 하신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그에 따른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까지 온전해진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더불어 자녀의 축복도 넘치게 주셔서 아들 일곱과 세 딸을 낳았는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명예, 권세,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 물질의 축복 등 모든 축복을 넘치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칠 수 있는 영적인 사랑, 온전한 선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영롱하고 아름다운 선의 빛을 발하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12
제32과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1-9
읽을말씀 : 창 39:1-9 | 외울말씀 : 창 39:9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며 정도를 좇아 성실하고 정직히 행함으로 범사에 형통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만일 메마른 사막에서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옥토에서 얻은 어떠한 열매보다 참으로 값지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게 가치 있는 삶이 된다면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하나님 앞에 오직 정도만을 걸으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은 성경상의 인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요셉은 어린 시절 이방 나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만한 행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여 승리의 삶을 산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나 하나님께서 아버지 야곱에게 내리신 복을 함께 누리며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요셉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의 조상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관해 들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 중에서도 자신이 사랑한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눈에 드러날 정도로 편애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과 달리 채색옷을 입히기도 하고 요셉이 다른 형들의 과실을 고하면 그 말을 듣고 형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인즉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의 시기와 미움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형들은 요셉을 죽일 궤계를 꾸미게 됩니다. 다행히 요셉은 맏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애굽의 고위 관료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2. 오직 성실과 정도의 길을 걸었던 요셉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요셉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성들여 관리하니 주인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위임할 정도로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그 마음이 선했기에 요셉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해 주셨고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도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 소유물을 주관하게 된 때부터는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온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까지 복이 넘쳐났습니다. 결국 요셉은 성실함을 주인에게 인정받아 모든 소유를 관할하게 되고 주인이 간섭조차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요셉에게 시험이 왔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을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며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며 번번이 거절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하는 주인의 아내를 뿌리치느라 요셉은 자기 옷까지 버려두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요셉에게 앙심을 품고 자기의 남편에게 고하기를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전하였지요.
아내의 말을 곧이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요셉을 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성실함은 감옥을 관리하는 전옥에게도 인정을 받아 이번에는 옥중의 모든 사무와 죄수들을 다 맡게 되었지요. 전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실하고 담대히 정도를 지키는 요셉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항상 형통하게 하셔서 가는 곳마다 인정받아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느 날, 감옥에 있던 요셉은 새로 들어온 죄수들, 즉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을 각각 해석해 주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도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요셉의 해석대로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복직되었으나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린 채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3. 하나님의 축복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 요셉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축복하시고자 역사하기 시작하셨는데 애굽 왕 바로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므로 번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쇠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바로는 마음에 번민하여 이것을 해석해 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사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니 더욱 염려가 커지기만 했지요.
그제서야 꿈의 사람 요셉을 떠올린 술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요셉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창세기 41:16 이하를 보면 요셉은 이 꿈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는 바로에게 먼저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한 다음 하나님의 이름으로 꿈을 해석합니다.
즉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의 풍년이며 일곱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풍년 다음에 곧 이어질 일곱 해의 흉년으로 이 동안에 기근이 어찌나 극심한지 그 전의 풍작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며 동일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꾸었으니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원하게 꿈을 해석해 준 요셉은 이 일의 대처방법까지도 명쾌하게 제시해 줍니다. 즉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여 전 애굽에서 일곱 해 풍년 동안의 소산을 거두고 흉년을 대비하여 그 곡물을 보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왕은 요셉을 택하여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였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요셉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강대한 나라였던 애굽의 왕 다음 가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말대로 풍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산을 각 성에 거두어들이니 7년의 기근의 때에 이르러 각국에 양식이 떨어졌어도 애굽 왕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각지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마다 왕의 양식을 사려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사람 중에는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여 형들과 그 가족들까지 애굽에 오게 한 후 부양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떠나 타국에 종으로 팔려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나 진정 감정 하나 없이 형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지요.
이처럼 모든 일에 선한 마음으로 행했던 요셉은 당대에 크게 쓰임받는 의인이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참으로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4. 요셉처럼 득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득죄한 사람까지도 변화시키는 삶
지금까지 우리는 요셉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성실로 식물을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삼아 요셉처럼 성실히 살고자 노력하면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득죄하는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내가 어떻게 하면 그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으로 이끌어 줄까'를 생각하게 되니 설령 득죄한 사람이 있다 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헐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또한 혹여 잘못한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하면 그에게 힘이 되어 줄까' 하는 마음뿐이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므로 설령 죄인이라도 변화시켜 축복의 반열에 동참시킬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그러니 모난 사람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등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날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늘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며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각종 사고나 어려움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조건들이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인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모든 일에 성실히 행하며 자기의 위치 속에서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입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며 정도를 좇아 성실하고 정직히 행함으로 범사에 형통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만일 메마른 사막에서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옥토에서 얻은 어떠한 열매보다 참으로 값지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게 가치 있는 삶이 된다면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하나님 앞에 오직 정도만을 걸으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은 성경상의 인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요셉은 어린 시절 이방 나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만한 행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여 승리의 삶을 산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나 하나님께서 아버지 야곱에게 내리신 복을 함께 누리며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요셉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의 조상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관해 들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 중에서도 자신이 사랑한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눈에 드러날 정도로 편애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과 달리 채색옷을 입히기도 하고 요셉이 다른 형들의 과실을 고하면 그 말을 듣고 형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인즉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의 시기와 미움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형들은 요셉을 죽일 궤계를 꾸미게 됩니다. 다행히 요셉은 맏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애굽의 고위 관료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2. 오직 성실과 정도의 길을 걸었던 요셉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요셉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성들여 관리하니 주인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위임할 정도로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그 마음이 선했기에 요셉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해 주셨고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도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 소유물을 주관하게 된 때부터는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온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까지 복이 넘쳐났습니다. 결국 요셉은 성실함을 주인에게 인정받아 모든 소유를 관할하게 되고 주인이 간섭조차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요셉에게 시험이 왔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을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며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며 번번이 거절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하는 주인의 아내를 뿌리치느라 요셉은 자기 옷까지 버려두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요셉에게 앙심을 품고 자기의 남편에게 고하기를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전하였지요.
아내의 말을 곧이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요셉을 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성실함은 감옥을 관리하는 전옥에게도 인정을 받아 이번에는 옥중의 모든 사무와 죄수들을 다 맡게 되었지요. 전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실하고 담대히 정도를 지키는 요셉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항상 형통하게 하셔서 가는 곳마다 인정받아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느 날, 감옥에 있던 요셉은 새로 들어온 죄수들, 즉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을 각각 해석해 주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도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요셉의 해석대로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복직되었으나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린 채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3. 하나님의 축복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 요셉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축복하시고자 역사하기 시작하셨는데 애굽 왕 바로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므로 번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쇠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바로는 마음에 번민하여 이것을 해석해 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사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니 더욱 염려가 커지기만 했지요.
그제서야 꿈의 사람 요셉을 떠올린 술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요셉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창세기 41:16 이하를 보면 요셉은 이 꿈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는 바로에게 먼저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한 다음 하나님의 이름으로 꿈을 해석합니다.
즉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의 풍년이며 일곱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풍년 다음에 곧 이어질 일곱 해의 흉년으로 이 동안에 기근이 어찌나 극심한지 그 전의 풍작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며 동일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꾸었으니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원하게 꿈을 해석해 준 요셉은 이 일의 대처방법까지도 명쾌하게 제시해 줍니다. 즉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여 전 애굽에서 일곱 해 풍년 동안의 소산을 거두고 흉년을 대비하여 그 곡물을 보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왕은 요셉을 택하여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였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요셉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강대한 나라였던 애굽의 왕 다음 가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말대로 풍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산을 각 성에 거두어들이니 7년의 기근의 때에 이르러 각국에 양식이 떨어졌어도 애굽 왕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각지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마다 왕의 양식을 사려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사람 중에는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여 형들과 그 가족들까지 애굽에 오게 한 후 부양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떠나 타국에 종으로 팔려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나 진정 감정 하나 없이 형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지요.
이처럼 모든 일에 선한 마음으로 행했던 요셉은 당대에 크게 쓰임받는 의인이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참으로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4. 요셉처럼 득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득죄한 사람까지도 변화시키는 삶
지금까지 우리는 요셉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성실로 식물을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삼아 요셉처럼 성실히 살고자 노력하면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득죄하는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내가 어떻게 하면 그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으로 이끌어 줄까'를 생각하게 되니 설령 득죄한 사람이 있다 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헐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또한 혹여 잘못한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하면 그에게 힘이 되어 줄까' 하는 마음뿐이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므로 설령 죄인이라도 변화시켜 축복의 반열에 동참시킬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그러니 모난 사람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등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날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늘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며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각종 사고나 어려움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조건들이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인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모든 일에 성실히 행하며 자기의 위치 속에서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입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05
제31과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6-42
읽을말씀 : 행 9:36-42 | 외울말씀 : 행 9:36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지의 고아들과 나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나 크게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선행들은 성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특히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과 선으로 가득 찼던 아브라함,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모세, 담대한 믿음과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소유했던 다윗 등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지요.
오늘은 "도르가"라는 성경상의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은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니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릎 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 등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었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도르가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는데 그러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이런 도르가가 죽었으니 평소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사람이요,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지요. 도르가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혹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습니까?" 하고 의문을 가질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15:26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사람이 보기에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도르가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옷을 지으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쓸 때도 있었을 것이니 그런 것이 무리가 되어 병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행을 한 도르가였기에 죽음에서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확연히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2.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역시 변함없는 마음으로 더욱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구제는 갈라디아서 6:10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3:10을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오히려 더 나태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인해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는 이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주면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까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할 때에, 풍랑이 일어 같은 배를 탄 사람들까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구제할 때에는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이지요.
그러면 구제하는 방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는 교회 앞에 드림으로 교회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드리는 목적을 명시한 후 헌금을 단으로 올리면 축복기도를 받은 후 적절한 곳에 구제로 쓰여지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의 종이 구제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질서를 좇아 구제하려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어 정작 필요할 때 공급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급박한 상황에서는 직접 구제해도 좋습니다.
3.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도 중요한 선행이지요. 학개서 1:8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시편 37:4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했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6-17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성전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와서는 세상적인 대화를 한다거나 어떤 분쟁이나 다툼이나 불화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함으로 성도들을 수송하는 일에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도르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또한 많은 사람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열심히 선행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지의 고아들과 나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나 크게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선행들은 성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특히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과 선으로 가득 찼던 아브라함,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모세, 담대한 믿음과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소유했던 다윗 등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지요.
오늘은 "도르가"라는 성경상의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은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니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릎 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 등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었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도르가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는데 그러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이런 도르가가 죽었으니 평소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사람이요,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지요. 도르가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혹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습니까?" 하고 의문을 가질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15:26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사람이 보기에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도르가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옷을 지으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쓸 때도 있었을 것이니 그런 것이 무리가 되어 병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행을 한 도르가였기에 죽음에서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확연히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2.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역시 변함없는 마음으로 더욱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구제는 갈라디아서 6:10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3:10을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오히려 더 나태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인해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는 이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주면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까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할 때에, 풍랑이 일어 같은 배를 탄 사람들까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구제할 때에는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이지요.
그러면 구제하는 방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는 교회 앞에 드림으로 교회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드리는 목적을 명시한 후 헌금을 단으로 올리면 축복기도를 받은 후 적절한 곳에 구제로 쓰여지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의 종이 구제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질서를 좇아 구제하려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어 정작 필요할 때 공급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급박한 상황에서는 직접 구제해도 좋습니다.
3.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도 중요한 선행이지요. 학개서 1:8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시편 37:4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했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6-17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성전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와서는 세상적인 대화를 한다거나 어떤 분쟁이나 다툼이나 불화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함으로 성도들을 수송하는 일에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도르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또한 많은 사람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열심히 선행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29
제30과네 소견에 선한 대로
삼상 24:4
읽을말씀 : 삼상 24:4 | 외울말씀 : 삼상 24:4
교육목표 :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넘치는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생각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여 자신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비관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선악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선인 것 같아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해감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시며 말째인 다윗에게 기름부을 것을 명하셨습니다(삼상 16장).
그러면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이방 족속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수가 나아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 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그저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단지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비록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이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실 때 어찌 기쁘고 사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둘째로,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두 번씩이나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그 후로도 사울 왕의 시기와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터이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요구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도 했고,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자신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마음만 먹는다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백성의 미움을 받든, 악한 임금이든 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을 베었는데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절대로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잠이 깨어 갈 길을 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고는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삼상 24:11)라고 고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없이 쫓겨 다니는 입장에서도 그를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할 정도로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무엘상 24:16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놓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뿐 시간이 지나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닙니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빼내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순간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마음 안의 악을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 안에는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사울 왕처럼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어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또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런 악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악의 종류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는데, 로마서 1:29-31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다윗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표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응답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넘치는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생각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여 자신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비관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선악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선인 것 같아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해감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시며 말째인 다윗에게 기름부을 것을 명하셨습니다(삼상 16장).
그러면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이방 족속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수가 나아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 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그저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단지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비록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이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실 때 어찌 기쁘고 사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둘째로,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두 번씩이나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그 후로도 사울 왕의 시기와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터이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요구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도 했고,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자신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마음만 먹는다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백성의 미움을 받든, 악한 임금이든 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을 베었는데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절대로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잠이 깨어 갈 길을 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고는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삼상 24:11)라고 고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없이 쫓겨 다니는 입장에서도 그를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할 정도로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무엘상 24:16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놓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뿐 시간이 지나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닙니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빼내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순간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마음 안의 악을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 안에는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사울 왕처럼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어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또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런 악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악의 종류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는데, 로마서 1:29-31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다윗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표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응답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22
제29과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이라
열상 17:8-14
읽을말씀 : 열상 17:8-14 | 외울말씀 : 열상 17:12-14
교육목표 : 사르밧 과부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고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 일들이 알려지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연 어떻게 행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왕과 온 백성이 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함으로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 앞에서 예언케 하셨는데, 회개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명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얼마 후 가뭄이 극심하여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너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이렇게 공궤하라" 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엘리야가 행함 하나까지도 인도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요,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써 참신을 가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르밧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을 만난 엘리야는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부탁하지요.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부탁합니다.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하게 여기며 설명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답변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금보다도 귀한 양식을 달라고 했으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있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2.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요, 이 여인에게도 축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으로 들어오면, 즉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요삼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대로 기도하니 그대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5-16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기록된 대로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교회에도 사르밧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림으로 영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바로 각자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주의 종들을 섬기는 것을 비롯하여 그 외의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만한 마음이요, 그러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 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사르밧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이 선하다 해서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사르밧 과부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고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 일들이 알려지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연 어떻게 행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왕과 온 백성이 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함으로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 앞에서 예언케 하셨는데, 회개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명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얼마 후 가뭄이 극심하여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너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이렇게 공궤하라" 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엘리야가 행함 하나까지도 인도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요,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써 참신을 가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르밧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을 만난 엘리야는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부탁하지요.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부탁합니다.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하게 여기며 설명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답변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금보다도 귀한 양식을 달라고 했으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있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2.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요, 이 여인에게도 축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으로 들어오면, 즉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요삼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대로 기도하니 그대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5-16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기록된 대로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교회에도 사르밧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림으로 영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바로 각자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주의 종들을 섬기는 것을 비롯하여 그 외의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만한 마음이요, 그러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 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사르밧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이 선하다 해서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