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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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2
제48과빛들로 나타내며
빌 2:14-18
읽을말씀 : 빌 2:14-18 | 외울말씀 : 빌 2:14-16
교육목표 :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태양에서부터 등대나 가로등, 집안의 작은 조명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들의 빛의 밝기는 다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삶 가운데 이처럼 빛을 발한다면 가로등 불빛보다는 태양처럼 만방에 비출 수 있는 빛이 되길 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빛을 발하되 밝은 태양처럼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관영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내려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빌립보서 2:14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이 화평함을 이룰 때라야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려면 어떤 마음을 소유해야 할까요?
1) 흠이 없고 순전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5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하신 말씀처럼 우리 마음이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에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만일 흉터가 전혀 없다면 자기 몸을 잘 돌보았다는 것이니 그만큼 온유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성격도 마찬가지여서 만일 '저 사람은 참 좋은데 끊고 맺을 줄 모르는 게 흠이야'라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이는 바로 성격에 흠이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 흠이 없었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니엘 선지자입니다. 다니엘 6:4을 보면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다' 했지요. 그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처지에서도 왕이 지정한 음식 중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의 제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러한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대신 채소와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흠도 없이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하여 국사를 돌아볼 때에도 명철과 총명함으로 슬기롭게 행했으며, 마음이 민첩하여 왕에게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다니엘에 대하여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무런 틈이나 허물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순전"에 대해 살펴보지요.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인데 영적으로는 "온유함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을 뜻하며 흠이 없으면서 또한 옳은 것에 대해 완전히 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그 행함에 덕이 있으므로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날지라도 그것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에 수용하여 모든 면에서 스스로 삼가 지켜 행합니다. 또한 험한 말이나 악한 행동은 물론 악한 생각조차도 아니하며 오직 밝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성경상에서 순전했던 사람의 예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욥은 그 소유가 많아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사람으로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욥 29:12, 31:18). 단지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며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큰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순전한 행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속 중심까지 완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욥에게 시험이 시작되자 한마디로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들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되었지요.
이때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백함으로 자신의 순전을 굳게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욥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이지요.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오히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며 타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겸하여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바로 욥이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했던 말이지만, 욥은 하나님께 대해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로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욥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악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연단하셔서 더욱 온전케 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왔을 때 욥처럼 순전을 굳게 지키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욥처럼 말과 행실에 순전함을 지킨다면 원망과 시비할 일은 당연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어그러지지 않고 거스리지 않는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그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만, 자랑, 다투고 들레는 것, 혈기내는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이탈된 것으로, 이를 가리켜 "어그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매스컴에 보도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얼마나 어그러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사용하는 말만 보아도 저속하고 듣기 민망한 말들이 너무 많지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만들게 하신 언어는 우리가 서로 아름답게 교통함을 이루게 하기 위함인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에 많이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스린다는 것은 바로 자기 위치를 떠나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순종치 아니하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행해야 할 텐데 이런 도리를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중요하게 여겨왔지만 오늘날은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를 학대하기까지 하는 참으로 자기의 본분과 위치에서 떠나 부모를 거스리는 차원을 넘어 버린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말씀의 의미와 그 방법
본문 빌립보서 2:15-16을 보면 이처럼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 안에서 이루는 모든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춰 줌으로 그로 하여금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전도해서 성령을 받게 하기까지는 많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 사람이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하나님을 떠나간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주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밝혀 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기뻐하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며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밝혀 줌으로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천국에 가기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그중에 믿음 있는 사람이 "세상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을 간증하고 가족에게 기도를 하게 하고 믿음을 심어 주었다면 바로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게 되니 가족의 믿음이 자라게 될 뿐 아니라, 주위의 일가친척이나 이웃들까지 믿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힌 사도 바울
본문 빌립보서 2:17-18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주 안에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차원을 넘어,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곧 무익한 종의 마음을 가진 고백이지요.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참으로 넘치도록 수고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고난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뛰어난 지식이나 가문 등이 있었지만,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받기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낮춰 고백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그가 가는 길이 엄청난 가시밭길이요, 종국에는 참수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 전체가 오직 생명의 말씀을 밝혀 달음질하며 달려온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많은 수고와 고생을 했지만 장차 그에게 주어질 하늘의 상급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딤후 4:7-8).
그러므로 오늘 증거된 말씀이 은혜와 능력이 되어 참으로 생명과 빛으로 나타나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태양에서부터 등대나 가로등, 집안의 작은 조명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들의 빛의 밝기는 다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삶 가운데 이처럼 빛을 발한다면 가로등 불빛보다는 태양처럼 만방에 비출 수 있는 빛이 되길 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빛을 발하되 밝은 태양처럼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관영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내려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빌립보서 2:14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이 화평함을 이룰 때라야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려면 어떤 마음을 소유해야 할까요?
1) 흠이 없고 순전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5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하신 말씀처럼 우리 마음이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에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만일 흉터가 전혀 없다면 자기 몸을 잘 돌보았다는 것이니 그만큼 온유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성격도 마찬가지여서 만일 '저 사람은 참 좋은데 끊고 맺을 줄 모르는 게 흠이야'라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이는 바로 성격에 흠이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 흠이 없었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니엘 선지자입니다. 다니엘 6:4을 보면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다' 했지요. 그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처지에서도 왕이 지정한 음식 중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의 제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러한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대신 채소와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흠도 없이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하여 국사를 돌아볼 때에도 명철과 총명함으로 슬기롭게 행했으며, 마음이 민첩하여 왕에게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다니엘에 대하여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무런 틈이나 허물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순전"에 대해 살펴보지요.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인데 영적으로는 "온유함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을 뜻하며 흠이 없으면서 또한 옳은 것에 대해 완전히 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그 행함에 덕이 있으므로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날지라도 그것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에 수용하여 모든 면에서 스스로 삼가 지켜 행합니다. 또한 험한 말이나 악한 행동은 물론 악한 생각조차도 아니하며 오직 밝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성경상에서 순전했던 사람의 예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욥은 그 소유가 많아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사람으로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욥 29:12, 31:18). 단지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며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큰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순전한 행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속 중심까지 완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욥에게 시험이 시작되자 한마디로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들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되었지요.
이때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백함으로 자신의 순전을 굳게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욥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이지요.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오히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며 타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겸하여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바로 욥이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했던 말이지만, 욥은 하나님께 대해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로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욥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악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연단하셔서 더욱 온전케 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왔을 때 욥처럼 순전을 굳게 지키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욥처럼 말과 행실에 순전함을 지킨다면 원망과 시비할 일은 당연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어그러지지 않고 거스리지 않는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그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만, 자랑, 다투고 들레는 것, 혈기내는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이탈된 것으로, 이를 가리켜 "어그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매스컴에 보도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얼마나 어그러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사용하는 말만 보아도 저속하고 듣기 민망한 말들이 너무 많지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만들게 하신 언어는 우리가 서로 아름답게 교통함을 이루게 하기 위함인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에 많이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스린다는 것은 바로 자기 위치를 떠나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순종치 아니하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행해야 할 텐데 이런 도리를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중요하게 여겨왔지만 오늘날은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를 학대하기까지 하는 참으로 자기의 본분과 위치에서 떠나 부모를 거스리는 차원을 넘어 버린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말씀의 의미와 그 방법
본문 빌립보서 2:15-16을 보면 이처럼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 안에서 이루는 모든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춰 줌으로 그로 하여금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전도해서 성령을 받게 하기까지는 많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 사람이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하나님을 떠나간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주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밝혀 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기뻐하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며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밝혀 줌으로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천국에 가기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그중에 믿음 있는 사람이 "세상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을 간증하고 가족에게 기도를 하게 하고 믿음을 심어 주었다면 바로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게 되니 가족의 믿음이 자라게 될 뿐 아니라, 주위의 일가친척이나 이웃들까지 믿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힌 사도 바울
본문 빌립보서 2:17-18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주 안에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차원을 넘어,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곧 무익한 종의 마음을 가진 고백이지요.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참으로 넘치도록 수고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고난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뛰어난 지식이나 가문 등이 있었지만,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받기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낮춰 고백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그가 가는 길이 엄청난 가시밭길이요, 종국에는 참수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 전체가 오직 생명의 말씀을 밝혀 달음질하며 달려온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많은 수고와 고생을 했지만 장차 그에게 주어질 하늘의 상급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딤후 4:7-8).
그러므로 오늘 증거된 말씀이 은혜와 능력이 되어 참으로 생명과 빛으로 나타나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25
제47과주의 말씀은 등이요 빛이라
시 119:100-105
읽을말씀 : 시 119:100-105 | 외울말씀 : 시 119:105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으로, 길에 빛으로 삼아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으며 항상 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가로등이 없던 옛날에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닐 때면 환하게 비춰 주는 달빛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앞길을 환히 비춰 주는 빛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모든 문제의 해답과 방법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등이요 빛이 된다면 아무 막힘이나 힘들 것이 없고, 지름길을 찾아 신속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아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주의 말씀을 등과 빛으로 삼는 명철한 사람
시편 119:100을 보면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했습니다. 명철이란 영적으로 길이 환히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은 길이 환히 보이므로 노인보다 명철함이 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노인은 단순히 나이만 많은 연장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통해 사리를 밝히 분별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연륜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분별할 줄 알므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 삶의 전반에 많은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분으로 인생의 처음과 끝을 성경에 모두 담아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행해 나갈 때 확실하고 완전한 길로 가게 되며 결코 무너지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지요. 또한 인생을 값지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길은 바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는 데 있는 것입니다.
2. 주의 말씀이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려면
1)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시편 119:101에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발을 지칭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겠다고 결정하면 그대로 움직여 주는 지체가 발이기 때문입니다.
발은 영적으로 세월의 흐름과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 가느냐를 비롯하여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의미하므로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악한 일을 도모하거나 동참하지 않고 오직 선한 일에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었던 사람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실히 일한 덕분에 주인의 은총을 받아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 날마다 유혹을 해 오지요. 이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며 죄와 타협지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정도를 지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고, 단번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라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지요. 이처럼 악에서 떠나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늘로부터 지혜와 명철이 오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2)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 119:102에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주의 규례"란 대대로 지키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들로서 일정한 규칙과 법과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정하신 규례를 대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했던 의식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구약에서는 육의 할례를 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마음의 할례를 하듯이 규례 역시 그 영적인 의미를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명심할 수 있으며 죄와 불의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은 이방신들을 숭배하여 심히 하나님을 격노케 했던 악한 왕이었으나 같은 시대의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지요. 한번은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을 도와 아람과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아합 왕은 혹시 적군이 자신이 왕임을 알아보고 죽일까 하여 변장까지 하고 군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은 바로 아합 왕이었으며 죽은 후에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피를 개들이 핥는 수치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지혜를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견고한 산성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하며, 그럴 때 주의 말씀이 등이요 빛이 되어 앞일을 내다 볼 수 있고 범사에 형통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3) 주의 말씀을 꿀을 먹는 것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인물로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으로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 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융화정책으로 포로들 중에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뽑을 때 다니엘도 그중에 하나로 뽑혀 왕궁에 들어가게 되지요.
어느 날 다니엘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나아갈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3년 동안 왕이 지정해 준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하는데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먹게 해 달라고 환관장에게 구하지요. 그 후 10일 동안 채식과 물만 먹은 결과 다니엘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하여 결국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보다 더 달고 맛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채식과 물을 먹으며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케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도 왕의 진미와 같은 유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부나 명예가,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이나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과 욕심이 왕의 진미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같이 달게 먹었기에 그 삶이 참으로 가치 있고 형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는가 하면,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을지라도 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해야 합니다
시편 119:104에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법도로 명철한 사람이 되면 왜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하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구별되면 진리를 굽게 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악이 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는 옷이나 몸에 오물이 묻어도 별로 상관치 않고 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오물이 더러운 것인 줄 알게 되면 씻거나 닦아내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무엇이며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모를 때는 내 안에 죄가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힘써 달려 나가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흠도 티도 없는 성결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거짓 행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짓 행위에 해당되는 입술의 말에는 악한 말, 망령된 말, 진실치 못한 말, 거스리는 말, 속이는 말, 패려한 말, 비방하는 말, 헛된 말, 원망하는 말 등이 있습니다.
둘째로, 남을 속이는 것 곧 물건값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거나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있지요.
셋째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것 이상의 것을 얻으려 한다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 허황된 것을 바라는 것 등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결국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거짓 행위를 미워하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분을 내며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악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악을 버리는 것이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며, 고아와 과부 등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일 등이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19:165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으셔서 참으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뿐 아니라 가는 길에 늘 형통함을 입어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려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으로, 길에 빛으로 삼아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으며 항상 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가로등이 없던 옛날에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닐 때면 환하게 비춰 주는 달빛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앞길을 환히 비춰 주는 빛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모든 문제의 해답과 방법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등이요 빛이 된다면 아무 막힘이나 힘들 것이 없고, 지름길을 찾아 신속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아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주의 말씀을 등과 빛으로 삼는 명철한 사람
시편 119:100을 보면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했습니다. 명철이란 영적으로 길이 환히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은 길이 환히 보이므로 노인보다 명철함이 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노인은 단순히 나이만 많은 연장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통해 사리를 밝히 분별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연륜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분별할 줄 알므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 삶의 전반에 많은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분으로 인생의 처음과 끝을 성경에 모두 담아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행해 나갈 때 확실하고 완전한 길로 가게 되며 결코 무너지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지요. 또한 인생을 값지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길은 바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는 데 있는 것입니다.
2. 주의 말씀이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려면
1)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시편 119:101에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발을 지칭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겠다고 결정하면 그대로 움직여 주는 지체가 발이기 때문입니다.
발은 영적으로 세월의 흐름과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 가느냐를 비롯하여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의미하므로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악한 일을 도모하거나 동참하지 않고 오직 선한 일에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었던 사람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실히 일한 덕분에 주인의 은총을 받아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 날마다 유혹을 해 오지요. 이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며 죄와 타협지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정도를 지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고, 단번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라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지요. 이처럼 악에서 떠나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늘로부터 지혜와 명철이 오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2)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 119:102에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주의 규례"란 대대로 지키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들로서 일정한 규칙과 법과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정하신 규례를 대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했던 의식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구약에서는 육의 할례를 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마음의 할례를 하듯이 규례 역시 그 영적인 의미를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명심할 수 있으며 죄와 불의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은 이방신들을 숭배하여 심히 하나님을 격노케 했던 악한 왕이었으나 같은 시대의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지요. 한번은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을 도와 아람과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아합 왕은 혹시 적군이 자신이 왕임을 알아보고 죽일까 하여 변장까지 하고 군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은 바로 아합 왕이었으며 죽은 후에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피를 개들이 핥는 수치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지혜를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견고한 산성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하며, 그럴 때 주의 말씀이 등이요 빛이 되어 앞일을 내다 볼 수 있고 범사에 형통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3) 주의 말씀을 꿀을 먹는 것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인물로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으로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 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융화정책으로 포로들 중에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뽑을 때 다니엘도 그중에 하나로 뽑혀 왕궁에 들어가게 되지요.
어느 날 다니엘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나아갈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3년 동안 왕이 지정해 준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하는데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먹게 해 달라고 환관장에게 구하지요. 그 후 10일 동안 채식과 물만 먹은 결과 다니엘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하여 결국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보다 더 달고 맛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채식과 물을 먹으며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케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도 왕의 진미와 같은 유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부나 명예가,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이나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과 욕심이 왕의 진미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같이 달게 먹었기에 그 삶이 참으로 가치 있고 형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는가 하면,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을지라도 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해야 합니다
시편 119:104에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법도로 명철한 사람이 되면 왜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하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구별되면 진리를 굽게 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악이 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는 옷이나 몸에 오물이 묻어도 별로 상관치 않고 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오물이 더러운 것인 줄 알게 되면 씻거나 닦아내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무엇이며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모를 때는 내 안에 죄가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힘써 달려 나가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흠도 티도 없는 성결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거짓 행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짓 행위에 해당되는 입술의 말에는 악한 말, 망령된 말, 진실치 못한 말, 거스리는 말, 속이는 말, 패려한 말, 비방하는 말, 헛된 말, 원망하는 말 등이 있습니다.
둘째로, 남을 속이는 것 곧 물건값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거나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있지요.
셋째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것 이상의 것을 얻으려 한다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 허황된 것을 바라는 것 등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결국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거짓 행위를 미워하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분을 내며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악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악을 버리는 것이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며, 고아와 과부 등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일 등이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19:165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으셔서 참으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뿐 아니라 가는 길에 늘 형통함을 입어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려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18
제46과추수감사제
출 23:14-17
읽을말씀 : 출 23:14-17 | 외울말씀 : 출 23:16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이러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지금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추수감사제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는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역사해 주심으로 전쟁애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대하 20:20 이하).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먹을 것이 금보다도 귀한 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에게 심었더니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에도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이 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기니 그녀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구원받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믿음과 영적인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이러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지금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추수감사제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는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역사해 주심으로 전쟁애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대하 20:20 이하).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먹을 것이 금보다도 귀한 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에게 심었더니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에도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이 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기니 그녀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구원받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믿음과 영적인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11
제45과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마 5:14-16
읽을말씀 : 마 5:14-16 | 외울말씀 : 마 5:16
교육목표 : 항상 정도를 좇아 행하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빛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모든 만물이 드러나며, 그 빛으로 말미암아 식물은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또한 어두움 가운데서는 방향을 잡기 어렵고 때로 실족할 수도 있지만 밝은 빛 가운데서는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곳을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진리의 등불이 되어 주고 따스한 빛이 되어 준다면 참으로 가치 있고 고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빚어져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8:12을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죄로 물들어 혼탁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악함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사랑과 용서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곧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인류를 빛으로 인도해 주셨지요. 우리도 죄악이 관영된 이 세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주관자인 마귀가 주관하는 대로 진리를 거스려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빛 되신 주님을 만나 마음과 행함이 빛으로 변화된 사람이 구원의 도를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의 빛이 된 룻의 행함
마태복음 5:15을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했습니다. 즉 내가 진리의 등불이 되면 나로 인해 그 빛이 온 세상에 비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룻을 들 수 있는데, 룻은 과연 어떻게 행하였기에 그 행함이 빛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울며 시어머니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베들레헴이 자신의 고향도 아니요, 오히려 룻의 입장에서는 모국과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하며 애원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면서 자신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습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먼 곳까지 홀로 가야 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시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자신을 위한 편안한 삶을 찾아 떠나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참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이지요.
그런데 요즘 세대는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등 자신의 유익만을 좇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이나 장애를 하나님 앞에 나와 치료받은 사람이 당시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가는 것을 봅니다. 또 은혜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 감사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룻은 마음이 의로우니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끝까지 선을 좇아 섬김의 도리를 다하였던 것입니다.
2) 현숙한 언행과 마음가짐을 소유한 룻
모압 지방을 떠나 베들레헴에 이른 룻은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부유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룻에게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홀로 살아가다 보면 매일 곳이 없으므로 말이나 행동, 마음가짐 등이 단정치 못할 수도 있으나 룻은 그 모든 것이 참으로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룻기 2:10을 보면 룻은 좋은 배려를 해 준 보아스에게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했고 13절에는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지극히 겸비한 마음으로 보아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룻의 고백을 통해 룻이 얼마나 거룩한 입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룻이 거룩한 입술을 가지며 진실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돈된 생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생각하는 것이 정돈되어 있으니 그 행함도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서 분야 분야마다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3) 순종과 섬김의 본을 보여 축복받은 룻
그 당시에는 모세의 율법에 "기업 무르기 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해 주기 위해 죽은 사람의 미망인을 그 사망자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바로 그 집안에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하여 줌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하려고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지시했습니다(룻 3:3-4).
룻은 항상 시어머니에게 순종했고 그 말씀대로 다 지켜 행할 마음이었습니다. 다만 시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평안하게 살라는 말씀에만 순종하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모두 순종했지요. 부모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룻이 시어머니에게 순종을 잘 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도 순종을 잘 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지옥에 가라고 말씀하셔도 어찌하든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천국에 가야 하는 것처럼, 룻은 자기를 떠나라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끝까지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이는 곧 룻이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중심이니 어찌 하나님께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룻은 나오미가 시킨 대로 가만히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누운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밤중에 여인을 발견하고 "네가 누구뇨"라고 묻는 보아스에게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라고 상대의 마음을 살 만한 지혜로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보아스도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하고 복을 빌어 주며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지요.
또 룻기 2:11-12을 보면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아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룻의 행함이 어찌나 곱고 아리따운지 그 현숙함을 온 성읍이 다 안다 할 만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현숙한 여인이 되면 남편과 부모, 친구와 주위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지만, 실없는 사람이란 말을 들으면 그만큼 신뢰를 잃어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되지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온전하고 거룩한 입술이 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심히 마음을 개조하면 깨끗하고 단물만 내는 입술이 되며 온전치 못하던 행함까지도 고쳐지게 됩니다. 걸음걸이나 앉고 서고 인사하고 대화하는 각종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정돈된 생각과 의로운 마음과 거룩한 입술이 되어지면 행함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보아스는 결국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다윗 왕의 조부인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이 선을 좇아 정도를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이방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심으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말씀을 통해 빛의 갑옷을 입으셔서 다툼과 절망,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소망, 그리고 사랑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항상 정도를 좇아 행하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빛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모든 만물이 드러나며, 그 빛으로 말미암아 식물은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또한 어두움 가운데서는 방향을 잡기 어렵고 때로 실족할 수도 있지만 밝은 빛 가운데서는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곳을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진리의 등불이 되어 주고 따스한 빛이 되어 준다면 참으로 가치 있고 고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빚어져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8:12을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죄로 물들어 혼탁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악함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사랑과 용서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곧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인류를 빛으로 인도해 주셨지요. 우리도 죄악이 관영된 이 세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주관자인 마귀가 주관하는 대로 진리를 거스려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빛 되신 주님을 만나 마음과 행함이 빛으로 변화된 사람이 구원의 도를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의 빛이 된 룻의 행함
마태복음 5:15을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했습니다. 즉 내가 진리의 등불이 되면 나로 인해 그 빛이 온 세상에 비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룻을 들 수 있는데, 룻은 과연 어떻게 행하였기에 그 행함이 빛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울며 시어머니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베들레헴이 자신의 고향도 아니요, 오히려 룻의 입장에서는 모국과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하며 애원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면서 자신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습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먼 곳까지 홀로 가야 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시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자신을 위한 편안한 삶을 찾아 떠나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참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이지요.
그런데 요즘 세대는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등 자신의 유익만을 좇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이나 장애를 하나님 앞에 나와 치료받은 사람이 당시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가는 것을 봅니다. 또 은혜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 감사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룻은 마음이 의로우니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끝까지 선을 좇아 섬김의 도리를 다하였던 것입니다.
2) 현숙한 언행과 마음가짐을 소유한 룻
모압 지방을 떠나 베들레헴에 이른 룻은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부유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룻에게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홀로 살아가다 보면 매일 곳이 없으므로 말이나 행동, 마음가짐 등이 단정치 못할 수도 있으나 룻은 그 모든 것이 참으로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룻기 2:10을 보면 룻은 좋은 배려를 해 준 보아스에게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했고 13절에는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지극히 겸비한 마음으로 보아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룻의 고백을 통해 룻이 얼마나 거룩한 입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룻이 거룩한 입술을 가지며 진실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돈된 생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생각하는 것이 정돈되어 있으니 그 행함도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서 분야 분야마다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3) 순종과 섬김의 본을 보여 축복받은 룻
그 당시에는 모세의 율법에 "기업 무르기 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해 주기 위해 죽은 사람의 미망인을 그 사망자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바로 그 집안에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하여 줌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하려고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지시했습니다(룻 3:3-4).
룻은 항상 시어머니에게 순종했고 그 말씀대로 다 지켜 행할 마음이었습니다. 다만 시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평안하게 살라는 말씀에만 순종하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모두 순종했지요. 부모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룻이 시어머니에게 순종을 잘 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도 순종을 잘 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지옥에 가라고 말씀하셔도 어찌하든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천국에 가야 하는 것처럼, 룻은 자기를 떠나라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끝까지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이는 곧 룻이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중심이니 어찌 하나님께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룻은 나오미가 시킨 대로 가만히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누운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밤중에 여인을 발견하고 "네가 누구뇨"라고 묻는 보아스에게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라고 상대의 마음을 살 만한 지혜로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보아스도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하고 복을 빌어 주며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지요.
또 룻기 2:11-12을 보면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아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룻의 행함이 어찌나 곱고 아리따운지 그 현숙함을 온 성읍이 다 안다 할 만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현숙한 여인이 되면 남편과 부모, 친구와 주위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지만, 실없는 사람이란 말을 들으면 그만큼 신뢰를 잃어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되지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온전하고 거룩한 입술이 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심히 마음을 개조하면 깨끗하고 단물만 내는 입술이 되며 온전치 못하던 행함까지도 고쳐지게 됩니다. 걸음걸이나 앉고 서고 인사하고 대화하는 각종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정돈된 생각과 의로운 마음과 거룩한 입술이 되어지면 행함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보아스는 결국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다윗 왕의 조부인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이 선을 좇아 정도를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이방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심으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말씀을 통해 빛의 갑옷을 입으셔서 다툼과 절망,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소망, 그리고 사랑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04
제44과빛의 열매
엡 5:8-13
읽을말씀 : 엡 5:8-13 | 외울말씀 : 엡 5:9
교육목표 :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아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갖게 되고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미
본문 에베소서 5:9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는데,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불우한 이웃이나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 공경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 생명을 다해 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이란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 드리는 것,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것이나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함이란 세 가지 속성이 있는데 바로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해 놓고는 지키지 않거나 입술로 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고 한 번 정한 마음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는데 왜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살펴 주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할 때 "저 사람은 참 착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가 선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남의 돈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또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기 싫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그를 더욱 무능하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지 일하기가 싫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기보다는 간증 등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해 줌으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한 행실이 빛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의로움, 즉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착함과 의로움만 가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진실함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령, 수재민 돕기 모금 등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금을 냈다면 진실이 아니므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빛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의 차원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선행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 참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빛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의 축복
본문 에베소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는데,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아랫사람인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심에 아브라함은 미처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믿어 드렸지요.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5:6). 이처럼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힌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진실함에 해당됩니다.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갈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조금의 원망이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중심이 얼마나 진실했던가를 잘 보여 주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벗이라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본문 에베소서 5:11-13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책망을 통해 어두움에서 나와 빛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한 것을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나 잘못한 것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버려 나갔지요. 혹 미움이나 혈기 등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노트에 적어 놓고 철야하고 금식해서라도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버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있는가를 찾으며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니 지금은 세계선교를 창대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축복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 모든 시험 환난이 닥쳐오는 것을 알기에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시험 환난이 왔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고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할 때는 지적하고 책망을 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누가 권면하고 지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진리에 비추어 어긋났을 때에는 자신을 책망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며,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리로 깨우쳐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육신에 속한 생각이었으므로 호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책망받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책망받을 것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혹여 부족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있어 책망을 받을 때는 중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책망받는 것마다 즉시 돌이켜야 신속히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바로 잡아 주고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는 것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훈계나 책망을 받아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며 빛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아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갖게 되고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미
본문 에베소서 5:9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는데,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불우한 이웃이나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 공경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 생명을 다해 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이란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 드리는 것,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것이나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함이란 세 가지 속성이 있는데 바로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해 놓고는 지키지 않거나 입술로 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고 한 번 정한 마음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는데 왜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살펴 주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할 때 "저 사람은 참 착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가 선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남의 돈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또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기 싫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그를 더욱 무능하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지 일하기가 싫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기보다는 간증 등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해 줌으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한 행실이 빛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의로움, 즉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착함과 의로움만 가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진실함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령, 수재민 돕기 모금 등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금을 냈다면 진실이 아니므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빛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의 차원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선행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 참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빛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의 축복
본문 에베소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는데,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아랫사람인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심에 아브라함은 미처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믿어 드렸지요.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5:6). 이처럼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힌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진실함에 해당됩니다.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갈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조금의 원망이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중심이 얼마나 진실했던가를 잘 보여 주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벗이라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본문 에베소서 5:11-13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책망을 통해 어두움에서 나와 빛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한 것을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나 잘못한 것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버려 나갔지요. 혹 미움이나 혈기 등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노트에 적어 놓고 철야하고 금식해서라도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버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있는가를 찾으며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니 지금은 세계선교를 창대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축복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 모든 시험 환난이 닥쳐오는 것을 알기에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시험 환난이 왔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고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할 때는 지적하고 책망을 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누가 권면하고 지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진리에 비추어 어긋났을 때에는 자신을 책망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며,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리로 깨우쳐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육신에 속한 생각이었으므로 호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책망받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책망받을 것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혹여 부족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있어 책망을 받을 때는 중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책망받는 것마다 즉시 돌이켜야 신속히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바로 잡아 주고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는 것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훈계나 책망을 받아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며 빛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28
제43과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나니
요일 5:18
읽을말씀 : 요일 5:18 | 외울말씀 : 요일 5: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범죄치 아니하며 진리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자동화된 설비들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해진 일만 수행하고 자석도 철 이외의 다른 것은 붙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일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범죄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덮을 수 없듯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틈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범죄치 않는 빛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15, 요일 5:2). 그 계명 안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마음 자체에 죄를 유발할 만한 근본 악이 없어야 죄를 행치 않는 것이므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도 미세한 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악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이 모르는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악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으려면 근본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사람은 설령 악으로 관영된 곳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 악에 물들 수 없습니다. 이미 육을 체험하여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고, 그 무익한 육을 벗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는 썩어지고 변하는 육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전혀 없으므로 죄를 행치 않으며, 이러한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의 예
먼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 있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나이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들 중 유능한 인재를 뽑아 나라의 일꾼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때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 후 벨사살 왕에 이은 다리오 왕은 뛰어나고 민첩한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방백들은 한 가지 간계를 꾸며 왕께 나아갑니다. 즉 왕으로 하여금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금령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바를 행했고 차라리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이내 타협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결코 범죄할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셉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복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형제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도 원인이 있었지요. 물론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의로 바꾸어 갔다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의 허물을 발견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더욱이 그것이 윗사람의 허물이라면 마치 자신의 허물처럼 여기며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의 권면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상대의 시기와 미움을 유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까지도 식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행하여 상대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해서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고 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바로 이런 점이 부족해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얻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웠고 감옥에 있으면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중심,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여지조차도 없도록 철저히 악의 근본까지 마음에서 벗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진리요(눅 8:11),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 쌓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영으로 양식삼은 상태, 즉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영으로 양식삼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비진리, 악, 불의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 후반절에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저"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셨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심고 양식삼아야 하며, 그럴 때만이 어두움이 빛 앞에 어찌할 수 없듯이 악한 자가 빛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우리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누리는 축복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아야 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지킴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원수 마귀가 시험 환난을 가져오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고 지켜 주시니 있던 문제도 자연히 떠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된 권세가 함께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버리시니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요셉 역시 30세의 나이에 왕의 신임받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고 요셉의 명철과 지혜에 탄복한 왕은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날 뿐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지킴을 받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주만물과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시 121:1-7). 설령 악한 사람들이 함정을 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며, 또 죽는다 해도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행하면 틀림없이 역사하시며 약속대로 지켜 주십니다(마 5:18).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항상 진리와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범죄치 아니하며 진리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자동화된 설비들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해진 일만 수행하고 자석도 철 이외의 다른 것은 붙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일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범죄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덮을 수 없듯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틈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범죄치 않는 빛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15, 요일 5:2). 그 계명 안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마음 자체에 죄를 유발할 만한 근본 악이 없어야 죄를 행치 않는 것이므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도 미세한 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악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이 모르는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악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으려면 근본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사람은 설령 악으로 관영된 곳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 악에 물들 수 없습니다. 이미 육을 체험하여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고, 그 무익한 육을 벗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는 썩어지고 변하는 육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전혀 없으므로 죄를 행치 않으며, 이러한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의 예
먼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 있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나이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들 중 유능한 인재를 뽑아 나라의 일꾼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때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 후 벨사살 왕에 이은 다리오 왕은 뛰어나고 민첩한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방백들은 한 가지 간계를 꾸며 왕께 나아갑니다. 즉 왕으로 하여금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금령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바를 행했고 차라리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이내 타협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결코 범죄할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셉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복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형제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도 원인이 있었지요. 물론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의로 바꾸어 갔다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의 허물을 발견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더욱이 그것이 윗사람의 허물이라면 마치 자신의 허물처럼 여기며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의 권면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상대의 시기와 미움을 유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까지도 식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행하여 상대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해서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고 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바로 이런 점이 부족해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얻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웠고 감옥에 있으면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중심,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여지조차도 없도록 철저히 악의 근본까지 마음에서 벗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진리요(눅 8:11),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 쌓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영으로 양식삼은 상태, 즉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영으로 양식삼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비진리, 악, 불의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 후반절에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저"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셨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심고 양식삼아야 하며, 그럴 때만이 어두움이 빛 앞에 어찌할 수 없듯이 악한 자가 빛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우리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누리는 축복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아야 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지킴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원수 마귀가 시험 환난을 가져오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고 지켜 주시니 있던 문제도 자연히 떠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된 권세가 함께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버리시니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요셉 역시 30세의 나이에 왕의 신임받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고 요셉의 명철과 지혜에 탄복한 왕은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날 뿐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지킴을 받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주만물과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시 121:1-7). 설령 악한 사람들이 함정을 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며, 또 죽는다 해도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행하면 틀림없이 역사하시며 약속대로 지켜 주십니다(마 5:18).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항상 진리와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21
제42과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요일 1:10
읽을말씀 : 요일 1:10 | 외울말씀 : 요일 1:10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분야들을 조명하여 봄으로 더욱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여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세공된 보석과 같이 참으로 존귀하고 값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석이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물질을 분리해 내는 연마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사람도 죄성과 자아를 버리는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즉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마음을 찢고 통회하는 과정을 통해 이물질과 같은 비진리의 악이 벗어지고 귀한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1. 말씀대로 사는 것 같으나 응답과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요한복음 11:40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고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이 내 안에 온전히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온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성하는 것 같으나 문제가 있는 경우
여호수아 6-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나온 물건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이 말씀을 어기고 외투 한 벌과 은 금을 탐내어 취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니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습니다. 결국 아간의 범죄가 드러나 아간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와 같이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열심인 것 같고 충성하는 것 같으나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2) 마음에 소원한 바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행하지 않는 경우
사도행전 4-5장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로 인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자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들의 소유를 팔아 바친다고 했으나 남편 아나니아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갔고,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 값을 들고 베드로에게 갔을 때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셔서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말하게 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바로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베드로 앞에 나온 그의 아내 삽비라 역시 육의 욕심을 좇아 사도들을 속였지요. 이는 곧 사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고, 따라서 그 결과는 사망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을 속이거나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은혜받았을 때나 치료받았을 경우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갖가지 마음의 소원을 두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두었던 소원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단순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만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범사에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리고 속이는 경우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그의 지시대로 순종하여 문둥병이 치료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너무 감사하여 나아만은 준비해 온 많은 예물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받기를 거절했고 이에 나아만은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오직 여호와께만 드릴 것을 약속하며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보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저를 쫓아가서 엘리사의 이름을 빙자하여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가지고 집에 감추어 두지요. 밝은 영감 가운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엘리사가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고 묻자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속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속이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 하나님과의 모든 막힌 담을 헐고 마음껏 응답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삶의 분야들을 통한 자기 발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에 보이는 죄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온전하진 않지만 그렇게 악하지도 않으니까" 하고 안주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도 그러한 죄의 찌끼가 남아 있음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과 관련된 네 분야를 통해 범죄치 않았다 함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족 복음화를 이루는 분야
사도행전 16:31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만일 교회에 나온 지가 수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핍박을 받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은 역사하지 못하며, 정녕 주의 교양으로 옷 입고 평소에도 가족과 일가친척에게 본이 된다면 사랑받고 칭송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전도하는 말에 귀 기울여 전도가 되어지지요. 그러니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전도함에 있어서 내가 주 예수를 바로 믿고 또한 진리 안에서 지혜롭게 전도한다면 가족 복음화를 신속히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 건강에 관한 분야
하나님께서는 요한삼서 2절에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고 마가복음 9:23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질병이 틈타거나 연약한 분야가 있었던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을 보면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이 있었고 큰 기사와 표적도 베풀었던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열왕기하 2:23-24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어느 날 길을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저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42명을 찢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심히 악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저주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돌로 쳐서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숨으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보아도 아무 이유 없이 병에 들거나 비참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질병이 틈탔다면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자백함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 28:4)라고 했고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데도 정작 사업터에 늘 어려움을 겪거나 가까스로 어려움을 넘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먼저, 정도를 걷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돈으로 무엇을 해 보려는 마음을 품은 자체가 정도에서 어긋난 것이며, 수고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근본 중심에서부터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동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상대를 힘들게 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에 축복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발견하여 돌이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부흥에 관한 분야
만일 자신이 맡은 분야에 부흥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양 떼를 잃고 있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믿는다면 내 가족보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가 더 소중하기에 결코 실족케 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며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므로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이처럼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양 떼가 실족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일꾼들이 육에 거하여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 속에서 일을 처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된다면 내 안의 성령께서 모든 길을 알려 주시고 주관해 주시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되니 가정, 건강, 사업터의 문제, 부흥 등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밝히 자신을 조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욱 온전히 거하는 빛된 자녀들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분야들을 조명하여 봄으로 더욱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여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세공된 보석과 같이 참으로 존귀하고 값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석이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물질을 분리해 내는 연마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사람도 죄성과 자아를 버리는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즉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마음을 찢고 통회하는 과정을 통해 이물질과 같은 비진리의 악이 벗어지고 귀한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1. 말씀대로 사는 것 같으나 응답과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요한복음 11:40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고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이 내 안에 온전히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온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성하는 것 같으나 문제가 있는 경우
여호수아 6-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나온 물건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이 말씀을 어기고 외투 한 벌과 은 금을 탐내어 취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니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습니다. 결국 아간의 범죄가 드러나 아간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와 같이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열심인 것 같고 충성하는 것 같으나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2) 마음에 소원한 바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행하지 않는 경우
사도행전 4-5장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로 인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자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들의 소유를 팔아 바친다고 했으나 남편 아나니아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갔고,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 값을 들고 베드로에게 갔을 때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셔서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말하게 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바로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베드로 앞에 나온 그의 아내 삽비라 역시 육의 욕심을 좇아 사도들을 속였지요. 이는 곧 사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고, 따라서 그 결과는 사망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을 속이거나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은혜받았을 때나 치료받았을 경우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갖가지 마음의 소원을 두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두었던 소원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단순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만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범사에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리고 속이는 경우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그의 지시대로 순종하여 문둥병이 치료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너무 감사하여 나아만은 준비해 온 많은 예물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받기를 거절했고 이에 나아만은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오직 여호와께만 드릴 것을 약속하며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보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저를 쫓아가서 엘리사의 이름을 빙자하여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가지고 집에 감추어 두지요. 밝은 영감 가운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엘리사가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고 묻자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속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속이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 하나님과의 모든 막힌 담을 헐고 마음껏 응답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삶의 분야들을 통한 자기 발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에 보이는 죄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온전하진 않지만 그렇게 악하지도 않으니까" 하고 안주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도 그러한 죄의 찌끼가 남아 있음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과 관련된 네 분야를 통해 범죄치 않았다 함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족 복음화를 이루는 분야
사도행전 16:31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만일 교회에 나온 지가 수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핍박을 받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은 역사하지 못하며, 정녕 주의 교양으로 옷 입고 평소에도 가족과 일가친척에게 본이 된다면 사랑받고 칭송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전도하는 말에 귀 기울여 전도가 되어지지요. 그러니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전도함에 있어서 내가 주 예수를 바로 믿고 또한 진리 안에서 지혜롭게 전도한다면 가족 복음화를 신속히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 건강에 관한 분야
하나님께서는 요한삼서 2절에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고 마가복음 9:23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질병이 틈타거나 연약한 분야가 있었던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을 보면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이 있었고 큰 기사와 표적도 베풀었던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열왕기하 2:23-24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어느 날 길을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저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42명을 찢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심히 악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저주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돌로 쳐서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숨으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보아도 아무 이유 없이 병에 들거나 비참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질병이 틈탔다면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자백함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 28:4)라고 했고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데도 정작 사업터에 늘 어려움을 겪거나 가까스로 어려움을 넘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먼저, 정도를 걷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돈으로 무엇을 해 보려는 마음을 품은 자체가 정도에서 어긋난 것이며, 수고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근본 중심에서부터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동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상대를 힘들게 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에 축복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발견하여 돌이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부흥에 관한 분야
만일 자신이 맡은 분야에 부흥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양 떼를 잃고 있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믿는다면 내 가족보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가 더 소중하기에 결코 실족케 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며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므로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이처럼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양 떼가 실족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일꾼들이 육에 거하여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 속에서 일을 처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된다면 내 안의 성령께서 모든 길을 알려 주시고 주관해 주시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되니 가정, 건강, 사업터의 문제, 부흥 등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밝히 자신을 조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욱 온전히 거하는 빛된 자녀들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14
제41과빛을 좇아오나니
요일 3:21
읽을말씀 : 요일 3:21 | 외울말씀 : 요일 3:21
교육목표 :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어렵고 힘든 환경을 비관하여 탈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는데, 얼마나 선한가 혹은 악한가에 따라 진리를 좇아 빛으로 나오기도 하고 악을 좇아 어두움에 물들어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능력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요한복음 3:21을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좇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런 사람은 빛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의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상태를 빛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5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고 야고보서 1:17에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5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빛"이라 증거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19에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란 하나님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진리 자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의 속성인 빛이 좋아지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게 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 119:97을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왜 주의 법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일까요? 가령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비진리이며 하나님의 법과 반대가 됩니다. 이렇게 비진리가 있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므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을 품으면 어느 누구하고도 걸리지 않으니 마음이 평안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편 19:9-10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천국에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며, 그럴 때 비로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시 1:3).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뿐 아니라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는 것은 행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은 버리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지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빛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나 감사예물을 드릴 때에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를 할 때에도 누가 알아주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할 때도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중심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지요.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기도하면 위로부터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힘입어 능히 원수 마귀를 이기고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는 사람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들로서 자신의 집을 성도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 줌으로 사도 바울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이때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충성되이 사도 바울을 도왔는지는 로마서 16:4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사도 바울을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하는 것을 봅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사람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알고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온갖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칼로 목베임으로 순교를 당하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헌신함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복음의 꽃을 찬란하게 피웠지요.
이처럼 정녕 믿음이 있고 천국에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5:11-12).
2.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전에는 어두움에 거하는 우리들을 빛 가운데 들이시기 위해 부르셨고, 이제는 빛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벧전 2:9).
더구나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처소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진주문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기초석으로 된 새예루살렘 성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12는 빛의 수입니다. 따라서 새예루살렘의 진주문과 기초석이 12개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어 빛으로 나온 사람, 곧 온 집에 충성하고 성결된 사람들만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빛으로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새예루살렘을 예비하신 것이니 그곳에 들어가려면 먼저 어두움에 속한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열심히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시며,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지요.
3.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천국 복음을 증거해 주셨지만 원수 마귀에게 속하여 어두움을 좇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또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감으로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며, 이러한 사람은 설령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란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빛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감으로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받을 수 있고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성결을 이루고 빛으로 들어가면 하늘로서 지혜와 명철이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빛에 거하면 빌립보서 4:11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하나님과 화평함을 이룸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넘쳐나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니 항상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어렵고 힘든 환경을 비관하여 탈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는데, 얼마나 선한가 혹은 악한가에 따라 진리를 좇아 빛으로 나오기도 하고 악을 좇아 어두움에 물들어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능력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요한복음 3:21을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좇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런 사람은 빛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의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상태를 빛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5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고 야고보서 1:17에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5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빛"이라 증거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19에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란 하나님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진리 자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의 속성인 빛이 좋아지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게 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 119:97을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왜 주의 법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일까요? 가령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비진리이며 하나님의 법과 반대가 됩니다. 이렇게 비진리가 있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므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을 품으면 어느 누구하고도 걸리지 않으니 마음이 평안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편 19:9-10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천국에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며, 그럴 때 비로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시 1:3).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뿐 아니라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는 것은 행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은 버리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지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빛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나 감사예물을 드릴 때에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를 할 때에도 누가 알아주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할 때도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중심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지요.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기도하면 위로부터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힘입어 능히 원수 마귀를 이기고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는 사람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들로서 자신의 집을 성도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 줌으로 사도 바울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이때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충성되이 사도 바울을 도왔는지는 로마서 16:4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사도 바울을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하는 것을 봅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사람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알고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온갖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칼로 목베임으로 순교를 당하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헌신함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복음의 꽃을 찬란하게 피웠지요.
이처럼 정녕 믿음이 있고 천국에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5:11-12).
2.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전에는 어두움에 거하는 우리들을 빛 가운데 들이시기 위해 부르셨고, 이제는 빛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벧전 2:9).
더구나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처소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진주문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기초석으로 된 새예루살렘 성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12는 빛의 수입니다. 따라서 새예루살렘의 진주문과 기초석이 12개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어 빛으로 나온 사람, 곧 온 집에 충성하고 성결된 사람들만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빛으로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새예루살렘을 예비하신 것이니 그곳에 들어가려면 먼저 어두움에 속한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열심히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시며,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지요.
3.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천국 복음을 증거해 주셨지만 원수 마귀에게 속하여 어두움을 좇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또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감으로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며, 이러한 사람은 설령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란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빛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감으로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받을 수 있고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성결을 이루고 빛으로 들어가면 하늘로서 지혜와 명철이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빛에 거하면 빌립보서 4:11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하나님과 화평함을 이룸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넘쳐나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니 항상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07
제40과우리 죄를 자백하면
요일 1:8-9
읽을말씀 : 요일 1:8-9 | 외울말씀 : 요일 1:9
교육목표 : 우리가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를 깨달아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춤으로 흠도 점도 없는 온전한 빛의 자녀들로 나오게 한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작은 어두움이라 해도 결코 숨길 수 없으므로 어두움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설령 죄가 있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 자백하며 나오면 죄사함을 주시고 깨끗케 해 주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어두움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나 자라온 환경, 교양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죄로 여길 수 있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죄 없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왜 사람이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또한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죄를 자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가 죄 없다 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1:8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된 아담의 씨를 받고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성을 이어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원죄이며,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스스로 지은 자범죄도 많이 있기 때문에 결코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뵐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므로(롬 3:23, 5:12)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약 2천여 년 전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 1:12, 롬 3:24).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 해도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성결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근본 죄성이 남아 있는 것이고, 또한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들로 인해 순간적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알지 못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알면서도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없다" 인정하시는 온전한 성결을 이룰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 없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고 했는데(요일 1:8) 왜 그런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빛으로 비춰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어두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죄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두움이 있는데도 죄 없다 한다면 이는 그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요일 1:9), 이미 자백한 것은 더 이상 죄라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죄란?
국가나 사회가 정해 놓은 법을 어기는 행위를 죄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빌 3:20).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인 영계의 법이며 이것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의 법은 영의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법으로서 곧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4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셨으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이 곧 불법이요, 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밖에 사는 사람, 즉 믿지 않는 사람은 요한복음 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체가 이미 죄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 안에서 죄가 되는 것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행함으로 지은 죄 곧 육체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통해 벌을 받게 되고,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갈 5:19-21).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육체의 일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빛 가운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기도해 나갈 때 비로소 육체의 일들을 하나하나 버려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려 나가는 행함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생활인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육체의 사람이라 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으로 지은 죄 곧 육신의 일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외관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마음에 품은 온갖 불법도 어두움이며 죄입니다(롬 14:10, 약 4:11-12). 구약 시대에는 행위로 나타난 불법만을 죄라 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마음에 품은 불법까지 죄가 됩니다.
구약 시대와는 달리, 신약 시대에는 성령을 의지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아 가면 능히 마음의 죄까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변화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 안에 거하므로 마음 중심에서부터 온전한 빛의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은 곧 용서와 사랑과 자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마음, 또한 모든 것을 선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판단, 정죄, 미움, 시기, 질투 등 이러한 어두움의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행하지 않았다 해서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어두움 같지 않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두움인 것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어두움들은 발견하여 벗어 버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뜻 보기에는 어두움이 아닌 것 같지만, 근본이 어두움인 분야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남보다 못한 자신에 대해 낙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이러한 모습이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에 속한 영적인 사랑은 시기 질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따라서 상대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는 않는다 해도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빛이 될 수 없고 그만큼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상대가 나보다 더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을 볼 때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진리를 좇는다 했는데 결과를 보니 화평함이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전체의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갔는데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진정 빛을 좇았다면 반드시 화평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평은 자신이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 맞추어 주는 마음이요, 나를 드러내지 않고 누구와도 걸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빛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고 해도, 결과는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자기 보기에 옳다 여겨지므로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이 일을 지시하거나 지시를 받는 경우, 일의 결과가 좋으면 자신의 공로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을 온전히 버려야 사랑으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빛에 속한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전가하거나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탓으로 돌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설령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해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며 "죄 있다"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죄 없다 할 마음이 아니요, 작은 일에도 스스로 자백할 마음이기 때문에 "죄 없다" 여기시며 축복해 주시지요.
4. 빛 가운데 거하려면 죄를 자백하고 돌이켜야
지금까지 자신이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살펴보았는데, 빛으로 비추니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한 분야까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빛 가운데 행한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흠 없이 온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그녀를 취한 후 이 사실을 은폐하고자 결국은 죄 없는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하는 엄청난 죄까지 짓게 되었지요.
그런데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의 죄를 지적하시니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연단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윗 왕의 자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연단을 통해 흠 없이 빛에 거할 수 있는 온전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연단을 통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사랑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미쁘시다" 한 것은 상대의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시고 허물까지도 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며 "의로우시다"는 것은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어려움 가운데서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변화되는 만큼 더한 축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든 죄를 마음껏 자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며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추어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흠 없고 온전한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우리가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를 깨달아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춤으로 흠도 점도 없는 온전한 빛의 자녀들로 나오게 한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작은 어두움이라 해도 결코 숨길 수 없으므로 어두움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설령 죄가 있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 자백하며 나오면 죄사함을 주시고 깨끗케 해 주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어두움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나 자라온 환경, 교양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죄로 여길 수 있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죄 없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왜 사람이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또한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죄를 자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가 죄 없다 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1:8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된 아담의 씨를 받고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성을 이어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원죄이며,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스스로 지은 자범죄도 많이 있기 때문에 결코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뵐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므로(롬 3:23, 5:12)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약 2천여 년 전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 1:12, 롬 3:24).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 해도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성결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근본 죄성이 남아 있는 것이고, 또한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들로 인해 순간적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알지 못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알면서도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없다" 인정하시는 온전한 성결을 이룰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 없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고 했는데(요일 1:8) 왜 그런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빛으로 비춰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어두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죄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두움이 있는데도 죄 없다 한다면 이는 그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요일 1:9), 이미 자백한 것은 더 이상 죄라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죄란?
국가나 사회가 정해 놓은 법을 어기는 행위를 죄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빌 3:20).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인 영계의 법이며 이것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의 법은 영의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법으로서 곧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4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셨으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이 곧 불법이요, 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밖에 사는 사람, 즉 믿지 않는 사람은 요한복음 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체가 이미 죄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 안에서 죄가 되는 것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행함으로 지은 죄 곧 육체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통해 벌을 받게 되고,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갈 5:19-21).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육체의 일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빛 가운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기도해 나갈 때 비로소 육체의 일들을 하나하나 버려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려 나가는 행함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생활인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육체의 사람이라 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으로 지은 죄 곧 육신의 일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외관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마음에 품은 온갖 불법도 어두움이며 죄입니다(롬 14:10, 약 4:11-12). 구약 시대에는 행위로 나타난 불법만을 죄라 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마음에 품은 불법까지 죄가 됩니다.
구약 시대와는 달리, 신약 시대에는 성령을 의지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아 가면 능히 마음의 죄까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변화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 안에 거하므로 마음 중심에서부터 온전한 빛의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은 곧 용서와 사랑과 자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마음, 또한 모든 것을 선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판단, 정죄, 미움, 시기, 질투 등 이러한 어두움의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행하지 않았다 해서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어두움 같지 않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두움인 것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어두움들은 발견하여 벗어 버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뜻 보기에는 어두움이 아닌 것 같지만, 근본이 어두움인 분야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남보다 못한 자신에 대해 낙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이러한 모습이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에 속한 영적인 사랑은 시기 질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따라서 상대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는 않는다 해도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빛이 될 수 없고 그만큼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상대가 나보다 더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을 볼 때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진리를 좇는다 했는데 결과를 보니 화평함이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전체의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갔는데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진정 빛을 좇았다면 반드시 화평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평은 자신이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 맞추어 주는 마음이요, 나를 드러내지 않고 누구와도 걸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빛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고 해도, 결과는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자기 보기에 옳다 여겨지므로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이 일을 지시하거나 지시를 받는 경우, 일의 결과가 좋으면 자신의 공로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을 온전히 버려야 사랑으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빛에 속한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전가하거나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탓으로 돌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설령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해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며 "죄 있다"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죄 없다 할 마음이 아니요, 작은 일에도 스스로 자백할 마음이기 때문에 "죄 없다" 여기시며 축복해 주시지요.
4. 빛 가운데 거하려면 죄를 자백하고 돌이켜야
지금까지 자신이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살펴보았는데, 빛으로 비추니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한 분야까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빛 가운데 행한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흠 없이 온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그녀를 취한 후 이 사실을 은폐하고자 결국은 죄 없는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하는 엄청난 죄까지 짓게 되었지요.
그런데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의 죄를 지적하시니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연단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윗 왕의 자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연단을 통해 흠 없이 빛에 거할 수 있는 온전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연단을 통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사랑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미쁘시다" 한 것은 상대의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시고 허물까지도 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며 "의로우시다"는 것은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어려움 가운데서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변화되는 만큼 더한 축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든 죄를 마음껏 자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며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추어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흠 없고 온전한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30
제39과낮에 다니면 실족지 아니하리라
요 11:9-10
읽을말씀 : 요 11:9-10 | 외울말씀 : 요 11:9-10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실족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범사에 형통함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낮에 다니는 삶의 영적인 의미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가 귀하다는 이유로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책망할 일에는 책망하고 때로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무조건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는 책망도 하시고 징계를 하셔서라도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밝은 빛 가운데, 곧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행할 때는 낮에 길을 가는 사람과 같아서 실족하는 일이 없이 평탄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1:9-10을 보면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12라는 숫자는 빛의 수로 낮 12시는 가장 밝은 대낮, 즉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지요. 따라서 낮 12시는 영적으로 어둠이 조금도 없는 온전한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어둠이 전혀 없으신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면 낮에 다니는 것과 같이 실족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려면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함으로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구원에 관한 분야
세상에는 부귀영화와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 등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누리고 사는 사람도 드물지만 혹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약 4:14).
이는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잘 느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 비천한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구원을 받아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전도를 하다 보면 예전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다른 사람과 불목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지만 참믿음을 가져 빛 가운데 거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니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성경상에서 빛 가운데 거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환난과 핍박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혹 아직도 작은 일에 불평하고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상대가 잘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여 서운한 마음이 틈타지는 않는지요?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얽어매는 어두움이 되어 실족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0:22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신대로 부지런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씻어 날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오면 구원은 물론,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죄로 인함이며, 둘째는 과로한다거나 당연히 지켜야 할 육의 질서를 어기므로 병이 오게 됩니다. 셋째는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함이며, 넷째는 원수 마귀에 의한 경우입니다. 곧 모든 질병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이같이 행할 때 비로소 이사야 53:5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질병을 치료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믿음의 행함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감동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이 여인은 자신을 개에 비유하시는 말씀에도 조금도 자존심 상해 하지 않고 더욱 겸비한 모습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는 고백을 합니다(막 7:28). 이처럼 겸비한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에 즉시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빛 가운데 온전히 거하면 늘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는 빛 가운데 거하였기에 120세의 나이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사업터, 일터에 관한 분야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타국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형통하였던 것을 봅니다(창 39:2-23). 바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로 세움받습니다. 그 후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감옥에서도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던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빛 가운데 정도를 좇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그 길이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에 거하는 사람은 사업터, 일터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을 하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큼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행할 때 그 길을 인도받아 실족지 않고 성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령, 가게를 내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놓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후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이내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라 단정 짓고 급히 일을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고 생각에 맞기에 진행해 나간 것이므로 오히려 사단이 송사해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가게를 운영할 때 전혀 제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가게를 계약할 때도 설령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을지라도 반드시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내 마음에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더 좋은 것으로 역사해 주셨지요.
또한 야고보서 1:6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듯이, 믿고 구한 것은 반드시 받은 줄로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주실 것을 믿고 오래 참음으로 인내할 수 있어야 하지요.
사업터, 일터의 문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보증을 서 달라 한다든지 또는 믿음의 형제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일은 내 유익을 구하는 일이요 상대를 힘들게 하는 어둠의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내 유익보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내가 손해를 본다 해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가정의 화목을 이루기 위한 분야
빛 가운데 거하면 가정이 화목해지는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나를 희생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생명도 줄 수 있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영적인 사랑이 임하면 가정이 하나 되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여성도님의 예를 들면, 처음 전도받을 당시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미움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편을 섬기되 주께 하듯 하라" 등 하나님의 말씀 곧 빛 앞에 자신을 비춰 보니 온갖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과,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비로소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발견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기도와 금식으로 비진리를 벗어 나가니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라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도 마음을 돌이킴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미움을 사랑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며 강퍅한 마음을 녹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에 범사에 실족지 않았음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마다 축복이 임했습니다.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고 오히려 그의 빛으로 인해 지금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일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범사에 실족함이 없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실족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범사에 형통함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낮에 다니는 삶의 영적인 의미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가 귀하다는 이유로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책망할 일에는 책망하고 때로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무조건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는 책망도 하시고 징계를 하셔서라도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밝은 빛 가운데, 곧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행할 때는 낮에 길을 가는 사람과 같아서 실족하는 일이 없이 평탄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1:9-10을 보면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12라는 숫자는 빛의 수로 낮 12시는 가장 밝은 대낮, 즉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지요. 따라서 낮 12시는 영적으로 어둠이 조금도 없는 온전한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어둠이 전혀 없으신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면 낮에 다니는 것과 같이 실족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려면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함으로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구원에 관한 분야
세상에는 부귀영화와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 등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누리고 사는 사람도 드물지만 혹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약 4:14).
이는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잘 느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 비천한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구원을 받아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전도를 하다 보면 예전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다른 사람과 불목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지만 참믿음을 가져 빛 가운데 거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니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성경상에서 빛 가운데 거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환난과 핍박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혹 아직도 작은 일에 불평하고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상대가 잘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여 서운한 마음이 틈타지는 않는지요?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얽어매는 어두움이 되어 실족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0:22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신대로 부지런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씻어 날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오면 구원은 물론,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죄로 인함이며, 둘째는 과로한다거나 당연히 지켜야 할 육의 질서를 어기므로 병이 오게 됩니다. 셋째는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함이며, 넷째는 원수 마귀에 의한 경우입니다. 곧 모든 질병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이같이 행할 때 비로소 이사야 53:5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질병을 치료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믿음의 행함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감동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이 여인은 자신을 개에 비유하시는 말씀에도 조금도 자존심 상해 하지 않고 더욱 겸비한 모습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는 고백을 합니다(막 7:28). 이처럼 겸비한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에 즉시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빛 가운데 온전히 거하면 늘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는 빛 가운데 거하였기에 120세의 나이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사업터, 일터에 관한 분야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타국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형통하였던 것을 봅니다(창 39:2-23). 바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로 세움받습니다. 그 후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감옥에서도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던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빛 가운데 정도를 좇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그 길이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에 거하는 사람은 사업터, 일터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을 하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큼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행할 때 그 길을 인도받아 실족지 않고 성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령, 가게를 내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놓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후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이내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라 단정 짓고 급히 일을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고 생각에 맞기에 진행해 나간 것이므로 오히려 사단이 송사해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가게를 운영할 때 전혀 제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가게를 계약할 때도 설령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을지라도 반드시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내 마음에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더 좋은 것으로 역사해 주셨지요.
또한 야고보서 1:6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듯이, 믿고 구한 것은 반드시 받은 줄로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주실 것을 믿고 오래 참음으로 인내할 수 있어야 하지요.
사업터, 일터의 문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보증을 서 달라 한다든지 또는 믿음의 형제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일은 내 유익을 구하는 일이요 상대를 힘들게 하는 어둠의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내 유익보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내가 손해를 본다 해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가정의 화목을 이루기 위한 분야
빛 가운데 거하면 가정이 화목해지는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나를 희생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생명도 줄 수 있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영적인 사랑이 임하면 가정이 하나 되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여성도님의 예를 들면, 처음 전도받을 당시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미움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편을 섬기되 주께 하듯 하라" 등 하나님의 말씀 곧 빛 앞에 자신을 비춰 보니 온갖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과,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비로소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발견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기도와 금식으로 비진리를 벗어 나가니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라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도 마음을 돌이킴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미움을 사랑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며 강퍅한 마음을 녹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에 범사에 실족지 않았음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마다 축복이 임했습니다.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고 오히려 그의 빛으로 인해 지금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일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범사에 실족함이 없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