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501 PAGE : 101/106
2006-02-03
제5과선 (5) - 다윗 -
삼상 26:23
읽을말씀 : 삼상 26:23 | 외울말씀 : 삼상 26:23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선의 감동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져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가자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갔던 선(善)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단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며, 사울 왕에게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맨몸으로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물맷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대로 쓰러졌고 이스라엘 군대는 힘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하신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해 용납지 않으시고 과감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하되 감동을 주는 선(善)
다윗과 사울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환영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니 사울의 시기심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악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을 죽이려고 전쟁터에 보내기도 했으며, 집요하게 다윗을 찾아다니며 잡아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울에게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써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의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이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도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자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는 선(善)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당시는 성령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더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셨는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하시며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이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하며 연단이 따를 것을 알려 주었고 이후 다윗은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받지만 그 연단을 감사함으로 잘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의 분야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했으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 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음이 교만한 것이요,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을 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치던 중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의 일입니다. 신하 중 한 명이 당장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했으나 다윗은 이를 만류했지요(삼하 16:11-12). 다윗은 이처럼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연단을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서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면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욥 23:10)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되지요.
다윗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연단도 신속히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어야 했지만 선 가운데 잘 통과하니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 온전한 선을 이루시되 날마다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선의 감동함 가운데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선의 감동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져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가자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갔던 선(善)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단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며, 사울 왕에게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맨몸으로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물맷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대로 쓰러졌고 이스라엘 군대는 힘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하신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해 용납지 않으시고 과감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하되 감동을 주는 선(善)
다윗과 사울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환영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니 사울의 시기심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악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을 죽이려고 전쟁터에 보내기도 했으며, 집요하게 다윗을 찾아다니며 잡아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울에게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써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의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이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도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자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는 선(善)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당시는 성령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더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셨는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하시며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이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하며 연단이 따를 것을 알려 주었고 이후 다윗은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받지만 그 연단을 감사함으로 잘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의 분야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했으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 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음이 교만한 것이요,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을 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치던 중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의 일입니다. 신하 중 한 명이 당장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했으나 다윗은 이를 만류했지요(삼하 16:11-12). 다윗은 이처럼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연단을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서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면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욥 23:10)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되지요.
다윗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연단도 신속히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어야 했지만 선 가운데 잘 통과하니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 온전한 선을 이루시되 날마다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선의 감동함 가운데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27
제4과선 (4) - 요나단 -
삼상 19:4-5
읽을말씀 : 삼상 19:4-5 | 외울말씀 : 삼상 19:4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봄으로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서로를 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으며 친구를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합니다(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던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4-5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하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선(善)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부서가 있다고 할 때, A라는 부서가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만들어진 B라는 부서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A부서가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부서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부서에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하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여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은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고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또는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이 또한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뢸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경우, 성도님들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기도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필요한 데만 다 쓰고 십일조를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또 죄를 범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아예 십일조까지 드릴 수 있도록 넉넉하게 구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해 성도들이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주어도 또 죄를 짓는 성도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에 품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도하면 기가 빠질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거나 옳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이 자녀된 입장에서 멸망 길로 가는 아버지를 자신마저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죄치 아니하며 더욱 신속히 온전한 선에 이르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봄으로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서로를 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으며 친구를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합니다(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던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4-5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하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선(善)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부서가 있다고 할 때, A라는 부서가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만들어진 B라는 부서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A부서가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부서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부서에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하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여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은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고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또는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이 또한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뢸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경우, 성도님들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기도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필요한 데만 다 쓰고 십일조를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또 죄를 범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아예 십일조까지 드릴 수 있도록 넉넉하게 구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해 성도들이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주어도 또 죄를 짓는 성도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에 품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도하면 기가 빠질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거나 옳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이 자녀된 입장에서 멸망 길로 가는 아버지를 자신마저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죄치 아니하며 더욱 신속히 온전한 선에 이르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20
제3과선 (3) - 룻 -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룻 1:16-17
교육목표 :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룻과 같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를 보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善)'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의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이처럼 축복된 여인이 되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서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음을 맞는 비극을 겪게 되자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 자신뿐이었지요. 이때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시어머니는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시어머니의 고향이지만 룻에게는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으며,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끔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상담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분명히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음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든지, 그 직장에서 좋은 기술을 배웠기에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다든지, 그래서 지금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移職)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게 되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쁘게 여겼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근조근 상세히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삼게 되었고 룻은 영육간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룻 2:20, 레 25:25).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며, 이로써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지요. 자식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 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식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므로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 사람이라면 영육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룻과 같이 도리를 좇는 선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랑과 축복을 넘치게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룻과 같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를 보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善)'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의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이처럼 축복된 여인이 되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서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음을 맞는 비극을 겪게 되자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 자신뿐이었지요. 이때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시어머니는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시어머니의 고향이지만 룻에게는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으며,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끔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상담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분명히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음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든지, 그 직장에서 좋은 기술을 배웠기에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다든지, 그래서 지금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移職)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게 되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쁘게 여겼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근조근 상세히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삼게 되었고 룻은 영육간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룻 2:20, 레 25:25).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며, 이로써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지요. 자식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 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식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므로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 사람이라면 영육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룻과 같이 도리를 좇는 선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랑과 축복을 넘치게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13
제2과선 (2) - 선의 단계 (2) -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2
교육목표 : 선의 3단계와 4단계에 대해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선의 1, 2단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의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1단계의 선, 마음에 어떠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을 넘어선 3, 4단계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을 행하여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단지 악으로 맞서 대항치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의 단계라면, 악으로 대항치 않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선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온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육을 온전히 벗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도 온전히 임한 상태이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9-4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녹여 화평을 이룰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수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마음이 선으로 채워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힘들다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고 했고 또 시험이 온다 해도 그것을 선으로 통과하므로 오히려 축복을 받게 된다 했지요.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파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악으로 나온 상대의 마음이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에 감동을 받아 악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너무나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그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이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도 파해 버리는 큰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도 오직 지극한 섬김의 말로 왕에게 고합니다.
다니엘 6:21-22에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지요.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왕의 심금을 울렸겠습니까. 다니엘 6:23에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즉각 징벌하고 다니엘을 영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온 나라에 다니엘의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린 것을 봅니다.
이러한 차원의 선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선이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선의 3단계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어 새예루살렘에서도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는지요?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했으니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악의 모양을 더욱 신속히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 자체가 선으로 일궈져서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간다면 선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을 행하면 자연히 미움이 떠나는 것처럼, 선으로 생각하고 선으로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악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동시에 하되 악이 온전히 벗어졌다면 그때가 비로소 선의 2단계입니다. 그러니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한 말이나 선한 행함이 나올 수는 있지요. 그런데 때론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섬김의 행함이 선의 2단계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입술의 말과 선한 행함이 항상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는 상대가 악으로 나와도 마음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그에게 오히려 선한 말을 했으니 선의 3단계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상대에게도 항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그를 선대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2. 생명도 아낌없이 주는 선의 4단계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인 선의 4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바로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한 화목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요, 의인들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선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다 흘리며 죽으시기까지 받으신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더 나아가 참으로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하나님의 참자녀를 얻으시고자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가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씌운 가시 면류관과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온몸은 피가 낭자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키보다 크고 심히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힘겹게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고난 받으시는 이유는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시므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하셨습니다. 또한 잔혹한 채찍에 맞으신 것도 우리가 모든 질병에서 나음을 입게 하려 하심이지요. 그 고통스런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이요,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것은 행함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죄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에는 생명까지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예수님께서 정녕 우리에게 원하셨던 바를 꼭 이뤄드려야 하겠습니다. 바로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 마음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분들이 나오는데 바로 모세 선지자를 들 수 있지요. 출애굽기 32:3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 선지자가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서 건너는 등의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케 해 줬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늘 불평했고, 모세를 원망했으며 심지어는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이런 백성들인데도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상황이 되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였지요. 로마서 9:3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그들은 당시 심히도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이지요. 심지어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에녹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의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권세와 권능도 받아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처소인 새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거하여 세세토록 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더욱 차원 높은 선을 사모하여 온전한 선의 단계로 신속히 들어오시기 바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선의 3단계와 4단계에 대해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선의 1, 2단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의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1단계의 선, 마음에 어떠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을 넘어선 3, 4단계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을 행하여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단지 악으로 맞서 대항치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의 단계라면, 악으로 대항치 않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선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온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육을 온전히 벗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도 온전히 임한 상태이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9-4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녹여 화평을 이룰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수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마음이 선으로 채워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힘들다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고 했고 또 시험이 온다 해도 그것을 선으로 통과하므로 오히려 축복을 받게 된다 했지요.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파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악으로 나온 상대의 마음이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에 감동을 받아 악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너무나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그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이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도 파해 버리는 큰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도 오직 지극한 섬김의 말로 왕에게 고합니다.
다니엘 6:21-22에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지요.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왕의 심금을 울렸겠습니까. 다니엘 6:23에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즉각 징벌하고 다니엘을 영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온 나라에 다니엘의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린 것을 봅니다.
이러한 차원의 선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선이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선의 3단계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어 새예루살렘에서도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는지요?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했으니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악의 모양을 더욱 신속히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 자체가 선으로 일궈져서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간다면 선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을 행하면 자연히 미움이 떠나는 것처럼, 선으로 생각하고 선으로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악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동시에 하되 악이 온전히 벗어졌다면 그때가 비로소 선의 2단계입니다. 그러니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한 말이나 선한 행함이 나올 수는 있지요. 그런데 때론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섬김의 행함이 선의 2단계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입술의 말과 선한 행함이 항상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는 상대가 악으로 나와도 마음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그에게 오히려 선한 말을 했으니 선의 3단계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상대에게도 항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그를 선대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2. 생명도 아낌없이 주는 선의 4단계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인 선의 4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바로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한 화목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요, 의인들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선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다 흘리며 죽으시기까지 받으신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더 나아가 참으로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하나님의 참자녀를 얻으시고자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가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씌운 가시 면류관과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온몸은 피가 낭자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키보다 크고 심히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힘겹게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고난 받으시는 이유는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시므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하셨습니다. 또한 잔혹한 채찍에 맞으신 것도 우리가 모든 질병에서 나음을 입게 하려 하심이지요. 그 고통스런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이요,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것은 행함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죄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에는 생명까지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예수님께서 정녕 우리에게 원하셨던 바를 꼭 이뤄드려야 하겠습니다. 바로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 마음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분들이 나오는데 바로 모세 선지자를 들 수 있지요. 출애굽기 32:3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 선지자가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서 건너는 등의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케 해 줬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늘 불평했고, 모세를 원망했으며 심지어는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이런 백성들인데도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상황이 되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였지요. 로마서 9:3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그들은 당시 심히도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이지요. 심지어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에녹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의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권세와 권능도 받아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처소인 새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거하여 세세토록 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더욱 차원 높은 선을 사모하여 온전한 선의 단계로 신속히 들어오시기 바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06
제1과선 (1) - 선의 단계 (1) -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2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단계를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로마서 12:2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여 너무나 세찬 육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 세대를 좇아 육의 흐름을 타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영의 흐름을 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증거되는 "선(善)"의 말씀을 통해, 정녕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고 더욱 힘써서 선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영의 흐름을 타기 위해서는 매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 가운데 행해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선의 기준이 있어야 하지요. 누가복음 18:18-19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선의 기준이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도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주님과 성령님의 마음도 선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선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모르고 피조물인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피조물로서는 결코 스스로 온전한 선에 이를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사명을 다 감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구세주가 되셨을 때에는 주님의 선도 하나님의 선과 온전히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마음도 온전한 선이시기에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면 누구나 온전한 선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착하다, 좋다' 혹은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을, 다시 각자의 기준에 맞춰서 '양심'이라는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는 기준에 의해 어떤 것이 '선하다' '선하지 않다' 말하지요. 하지만 사람의 양심은 결코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 즉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서로 혼합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자라면서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을 만들어 내지요.
따라서 양심에는 비진리도 섞여 있으며 지역마다, 혹은 시대마다 달라집니다. 또한 같은 시대, 같은 곳에 산다 해도 사람마다 양심이 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지지요. 그러니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가 없으며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선의 기준으로 삼는 양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의 기준은 매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간단한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을 악이라 하시고 용서하는 것이 선이라 하십니다(마 5:44, 롬 12:20). 따라서 우리는 온전한 선의 기준이요,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배운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서 온전한 선, 참된 선에 이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온전한 선에 이르는 과정을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2. 온전한 선에 이르는 단계
1)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할지라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여러분을 욕하고 때리는데 같이 욕하고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억울하고 속상하여 마음이 불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또는 나름대로 갖추어진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해도 그 마음에 여전히 악이 있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에 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에 맞대응해 싸우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선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도 믿을 것이며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하게 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악을 행하거나 심지어는 더욱 악을 행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8:8 후반절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진실한 믿음 가진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반대로 작은 불빛도 눈에 잘 띄는 법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식어지고 더욱 심한 악으로 치닫는 이 세대 가운데 참된 선을 행해 나간다면 어둔 세상의 빛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이끌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앞서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눌러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다 인정받을 수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바로 선의 2단계부터인데, 선의 2단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속이 상해도 꾹꾹 눌러 참는 것이 아니요, 아예 미움도 불편함도 없고 상대에 대한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차원입니다. 이는 바로 마음에 악이 전혀 없는 상태로서 "영의 마음"이라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상태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당할 때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며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경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혼녀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게 됐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간음했다고 판단함으로 율법을 좇아서 벌을 주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냥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마 1:19)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처럼 선한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심을 알려 주셨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이 정도의 선은 마음에 이뤄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여러분을 어찌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원수 마귀 사단이 악을 부추기는 대로 순종하여 악으로 생각하고 악으로 말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 해도 하나님께 지킴받을 수도 없고 축복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 최소한의 선만 이룬다 해도 그 선이 빛으로 역사되어 자연히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어찌하든 선으로 영으로 변화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정녕 선한가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는데,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일이 잘못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많은 분들이 제 앞에서 "제 탓입니다. 제가 더 잘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혹 마음 한편에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를 탓하고 책망했다면 이는 결코 선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 탓이라 고백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주시며 다음에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직접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책망을 듣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혹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거나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지 않았는지요? 그러나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인 경우는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할 것이며,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의당 자신이 져야 할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어려움과 곤욕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선을 사모함으로 모든 일을 선으로 생각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며, 선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의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받으므로 모든 시험 환난이 떠나며 무엇이나 응답받는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을 더욱 사모하여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단계를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로마서 12:2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여 너무나 세찬 육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 세대를 좇아 육의 흐름을 타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영의 흐름을 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증거되는 "선(善)"의 말씀을 통해, 정녕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고 더욱 힘써서 선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영의 흐름을 타기 위해서는 매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 가운데 행해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선의 기준이 있어야 하지요. 누가복음 18:18-19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선의 기준이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도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주님과 성령님의 마음도 선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선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모르고 피조물인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피조물로서는 결코 스스로 온전한 선에 이를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사명을 다 감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구세주가 되셨을 때에는 주님의 선도 하나님의 선과 온전히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마음도 온전한 선이시기에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면 누구나 온전한 선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착하다, 좋다' 혹은 '사람의 좋고 나쁨과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막연한 기준을, 다시 각자의 기준에 맞춰서 '양심'이라는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는 기준에 의해 어떤 것이 '선하다' '선하지 않다' 말하지요. 하지만 사람의 양심은 결코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 즉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서로 혼합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자라면서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을 만들어 내지요.
따라서 양심에는 비진리도 섞여 있으며 지역마다, 혹은 시대마다 달라집니다. 또한 같은 시대, 같은 곳에 산다 해도 사람마다 양심이 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지지요. 그러니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가 없으며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선의 기준으로 삼는 양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의 기준은 매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간단한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을 악이라 하시고 용서하는 것이 선이라 하십니다(마 5:44, 롬 12:20). 따라서 우리는 온전한 선의 기준이요,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배운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서 온전한 선, 참된 선에 이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온전한 선에 이르는 과정을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2. 온전한 선에 이르는 단계
1)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할지라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여러분을 욕하고 때리는데 같이 욕하고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억울하고 속상하여 마음이 불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또는 나름대로 갖추어진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해도 그 마음에 여전히 악이 있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에 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에 맞대응해 싸우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선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도 믿을 것이며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하게 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악을 행하거나 심지어는 더욱 악을 행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8:8 후반절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진실한 믿음 가진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반대로 작은 불빛도 눈에 잘 띄는 법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식어지고 더욱 심한 악으로 치닫는 이 세대 가운데 참된 선을 행해 나간다면 어둔 세상의 빛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이끌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앞서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눌러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다 인정받을 수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바로 선의 2단계부터인데, 선의 2단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속이 상해도 꾹꾹 눌러 참는 것이 아니요, 아예 미움도 불편함도 없고 상대에 대한 어떤 감정도 품지 않는 차원입니다. 이는 바로 마음에 악이 전혀 없는 상태로서 "영의 마음"이라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상태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당할 때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며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경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혼녀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게 됐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간음했다고 판단함으로 율법을 좇아서 벌을 주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냥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마 1:19)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처럼 선한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심을 알려 주셨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이 정도의 선은 마음에 이뤄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여러분을 어찌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원수 마귀 사단이 악을 부추기는 대로 순종하여 악으로 생각하고 악으로 말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 해도 하나님께 지킴받을 수도 없고 축복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 최소한의 선만 이룬다 해도 그 선이 빛으로 역사되어 자연히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어찌하든 선으로 영으로 변화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정녕 선한가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는데,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일이 잘못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많은 분들이 제 앞에서 "제 탓입니다. 제가 더 잘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혹 마음 한편에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를 탓하고 책망했다면 이는 결코 선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 탓이라 고백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주시며 다음에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직접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책망을 듣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혹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거나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지 않았는지요? 그러나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인 경우는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할 것이며,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의당 자신이 져야 할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어려움과 곤욕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선을 사모함으로 모든 일을 선으로 생각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며, 선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의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받으므로 모든 시험 환난이 떠나며 무엇이나 응답받는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을 더욱 사모하여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05
제1과마음을 새롭게 하자
롬 12:1-2
읽을말씀 : 롬 12:1-2 | 외울말씀 : 롬 12:2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아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새로 산 옷, 새로 지은 집 등 무엇이든지 새것으로 바꾸면 신선한 기분이 느껴지고 새로운 꿈으로 마음이 부풀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신선한 기분이 사라지고 새로운 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새해를 맞아 새로운 기분으로 한해를 시작하여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여전히 옛것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먹고 마시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좇아 거짓말하고 미워하며 쾌락을 좇아 살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거나 어떤 계기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마음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즉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므로 열심히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7:21, 고전 6:9).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여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 옥토밭으로 설명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길가밭은 단단하게 굳어 있는 밭으로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밭을 비유한 것입니다.
돌밭은 싹이 나더라도 돌멩이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서 지식적으로 말씀을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는 않으니 믿음의 확신이 없고 시험이 오면 넘어지게 됩니다. 가시떨기밭은 가시떨기로 인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서 말씀을 믿고 행한다고 해도 탐욕과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옥토밭은 씨를 뿌리면 싹이 잘 나고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는 밭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옥토밭으로 우리의 마음밭을 개간하려면 무엇보다 변화되고자 하는 노력 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농부가 묵은 밭을 옥토로 바꾸어 풍성한 수확을 거두려면 돌을 골라내고 흙을 고르게 하고 거름을 주며 잡초도 뽑고 벌레도 잡아주는 등 많은 수고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밭을 일구는 농부와 같이 마음밭을 개간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결된 자녀가 되기 위한 과정이지요.
우리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묵은 밭을 개간해 가면 예전의 강퍅한 마음이 변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더러운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비진리의 마음이 진리의 마음으로,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설령 누가 섭섭한 말을 해도 서운해 하지 않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대어 주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옥토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야
이처럼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신 뜻
마음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아무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것'이라고 알려 주어도 이해가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새로워지면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되므로 옥토로 변화된 만큼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 10:17-18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단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고 되물으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질문하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이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것이지요.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 다르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아무리 선한 사람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니 자신이 악한 사람이고 죄인인 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곧 선을 좇아 살아갈 때 많은 열매를 거두며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히브리서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고, 시편 37:4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중풍병자인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 백부장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가서 고쳐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크게 칭찬하시고 즉시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습니다(히 11장).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갔으며,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진리를 좇아 살면서 큰 믿음을 내보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제가 파키스탄에서 연합성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파키스탄은 회교국가로서 기독교 성회를 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준비를 해 나갔고, 막상 성회 당일이 되자 국민 대다수가 회교도이기 때문에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집회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지요. 성회 장소의 문은 굳게 닫혔고, 참석하는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선교팀들은 성회가 무사히 열릴 것을 믿었고, 저는 "낮 12시가 되면 운동장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담대히 선포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행하였더니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권세자의 마음을 주관하여 굳게 닫힌 문이 열렸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다 해도 행함이 없으면 온전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2:26).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면 야구에 관한 책을 공부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공을 던져보고 쳐 보면서 열심히 연습해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행함이 동반되어야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대로 '기도해야지' 하고 마음먹었으면 변개함 없이 기도하고, 기뻐하기로 작정했으면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기뻐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시며 크게 축복해 주셨지요(창 22:17-18).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번성하였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으로 오셔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시고 천하 만민이 복을 받아 영생의 길로 가게 되었지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많은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였기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으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아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새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며, 온전히 행함으로 나타내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아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새로 산 옷, 새로 지은 집 등 무엇이든지 새것으로 바꾸면 신선한 기분이 느껴지고 새로운 꿈으로 마음이 부풀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신선한 기분이 사라지고 새로운 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새해를 맞아 새로운 기분으로 한해를 시작하여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여전히 옛것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먹고 마시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좇아 거짓말하고 미워하며 쾌락을 좇아 살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거나 어떤 계기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마음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즉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므로 열심히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7:21, 고전 6:9).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여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 옥토밭으로 설명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길가밭은 단단하게 굳어 있는 밭으로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밭을 비유한 것입니다.
돌밭은 싹이 나더라도 돌멩이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서 지식적으로 말씀을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는 않으니 믿음의 확신이 없고 시험이 오면 넘어지게 됩니다. 가시떨기밭은 가시떨기로 인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서 말씀을 믿고 행한다고 해도 탐욕과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옥토밭은 씨를 뿌리면 싹이 잘 나고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는 밭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옥토밭으로 우리의 마음밭을 개간하려면 무엇보다 변화되고자 하는 노력 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농부가 묵은 밭을 옥토로 바꾸어 풍성한 수확을 거두려면 돌을 골라내고 흙을 고르게 하고 거름을 주며 잡초도 뽑고 벌레도 잡아주는 등 많은 수고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밭을 일구는 농부와 같이 마음밭을 개간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결된 자녀가 되기 위한 과정이지요.
우리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묵은 밭을 개간해 가면 예전의 강퍅한 마음이 변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더러운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비진리의 마음이 진리의 마음으로,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설령 누가 섭섭한 말을 해도 서운해 하지 않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대어 주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옥토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야
이처럼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신 뜻
마음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아무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것'이라고 알려 주어도 이해가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새로워지면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되므로 옥토로 변화된 만큼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 10:17-18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단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고 되물으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질문하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이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것이지요.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 다르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아무리 선한 사람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니 자신이 악한 사람이고 죄인인 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곧 선을 좇아 살아갈 때 많은 열매를 거두며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히브리서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고, 시편 37:4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중풍병자인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 백부장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가서 고쳐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크게 칭찬하시고 즉시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습니다(히 11장).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갔으며,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진리를 좇아 살면서 큰 믿음을 내보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제가 파키스탄에서 연합성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파키스탄은 회교국가로서 기독교 성회를 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준비를 해 나갔고, 막상 성회 당일이 되자 국민 대다수가 회교도이기 때문에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집회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지요. 성회 장소의 문은 굳게 닫혔고, 참석하는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선교팀들은 성회가 무사히 열릴 것을 믿었고, 저는 "낮 12시가 되면 운동장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담대히 선포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행하였더니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권세자의 마음을 주관하여 굳게 닫힌 문이 열렸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다 해도 행함이 없으면 온전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2:26).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면 야구에 관한 책을 공부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공을 던져보고 쳐 보면서 열심히 연습해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행함이 동반되어야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대로 '기도해야지' 하고 마음먹었으면 변개함 없이 기도하고, 기뻐하기로 작정했으면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기뻐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시며 크게 축복해 주셨지요(창 22:17-18).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번성하였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으로 오셔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시고 천하 만민이 복을 받아 영생의 길로 가게 되었지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많은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였기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으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아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새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며, 온전히 행함으로 나타내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2-30
제52과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사 60:1-3
읽을말씀 : 사 60:1-3 | 외울말씀 : 사 60:1
교육목표 :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밤이 깊고 어두움이 짙어갈수록 사람들은 빛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관영하여 날로 어두워져 가는 이 세대 속에서 비추이는 그리스도의 빛은 수많은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있으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찬란히 그리스도의 빛을 발함으로 세상의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
땅에 심겨진 작은 씨앗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한 알의 씨가 썩어져 열매를 맺는 원리는 비단 식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사람 또한 주님 안에서 죽어질 때 풍성한 열매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육을 죽이고 온전히 영으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
베드로는 본래 평범한 어부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큰 권능을 받아 빛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생계수단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곧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는 것을 뜻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된 길을 가기 시작한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관한 한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지 않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이와 같은 체험은 베드로에게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자신의 모든 어두움이 드러남을 느낀 베드로는 그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3. 육신의 생각을 깨뜨린 베드로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배를 타고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며 참으로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라" 명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담대한 믿음을 내보였던 베드로가 바람이 이는 것을 보자 무서워하다가 그만 물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했을 때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바람을 보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니 이내 의심이 생겨 물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영적인 믿음, 곧 참믿음을 소유하는 데 있어 방해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 10:5). 베드로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신속히 믿음이 성장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영적인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마 16:16).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축복하셨습니다(마 16:18-19). 그런데 이러한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베드로는 더 빛으로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정녕 육신의 생각은 모두 남김없이 빼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말하지요. 이는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갸륵한 마음이 담긴 말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지요. 이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는 사단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한 대로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고 해서 힘들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4.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
어느 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7:2-5을 보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증시키심과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인 사귐을 갖는 시간이었지요. 베드로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한층 더 신속히 변화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를 수 있는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고 시비하는 사람들을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지고 입을 열면 그 안에 돈 한 세겔이 있을 터이니 그것으로 세를 내도록 지시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말씀에도 능히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5.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룬 베드로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는 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고 이를 깨뜨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당당히 고백하지만(마 26:31-33)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하자 그 역시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는 더욱 깨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시험이 닥쳐오는 순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의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유익 앞에서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100퍼센트 믿고 순복해 나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의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후일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데,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말씀의 권세가 따랐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던 것이지요. 사도행전 5:15을 보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말씀할 정도로 큰 권능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세대는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고 있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말씀한 대로 사랑이 식어진 세대가 되었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마 24:7-8). 바로 이러한 때이기에 빛이 더욱 필요한 것이요, 확실한 권세와 능력이 따르는 빛의 갑옷을 입은 빛의 자녀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 나감으로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밤이 깊고 어두움이 짙어갈수록 사람들은 빛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관영하여 날로 어두워져 가는 이 세대 속에서 비추이는 그리스도의 빛은 수많은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있으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찬란히 그리스도의 빛을 발함으로 세상의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
땅에 심겨진 작은 씨앗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한 알의 씨가 썩어져 열매를 맺는 원리는 비단 식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사람 또한 주님 안에서 죽어질 때 풍성한 열매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육을 죽이고 온전히 영으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
베드로는 본래 평범한 어부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큰 권능을 받아 빛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생계수단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곧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는 것을 뜻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된 길을 가기 시작한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관한 한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지 않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이와 같은 체험은 베드로에게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자신의 모든 어두움이 드러남을 느낀 베드로는 그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3. 육신의 생각을 깨뜨린 베드로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배를 타고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며 참으로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라" 명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담대한 믿음을 내보였던 베드로가 바람이 이는 것을 보자 무서워하다가 그만 물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했을 때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바람을 보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니 이내 의심이 생겨 물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영적인 믿음, 곧 참믿음을 소유하는 데 있어 방해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 10:5). 베드로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신속히 믿음이 성장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영적인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마 16:16).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축복하셨습니다(마 16:18-19). 그런데 이러한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베드로는 더 빛으로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정녕 육신의 생각은 모두 남김없이 빼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말하지요. 이는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갸륵한 마음이 담긴 말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지요. 이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는 사단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한 대로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고 해서 힘들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4.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
어느 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7:2-5을 보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증시키심과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인 사귐을 갖는 시간이었지요. 베드로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한층 더 신속히 변화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를 수 있는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고 시비하는 사람들을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지고 입을 열면 그 안에 돈 한 세겔이 있을 터이니 그것으로 세를 내도록 지시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말씀에도 능히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5.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룬 베드로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는 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고 이를 깨뜨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당당히 고백하지만(마 26:31-33)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하자 그 역시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는 더욱 깨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시험이 닥쳐오는 순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의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유익 앞에서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100퍼센트 믿고 순복해 나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의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후일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데,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말씀의 권세가 따랐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던 것이지요. 사도행전 5:15을 보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말씀할 정도로 큰 권능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세대는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고 있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말씀한 대로 사랑이 식어진 세대가 되었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마 24:7-8). 바로 이러한 때이기에 빛이 더욱 필요한 것이요, 확실한 권세와 능력이 따르는 빛의 갑옷을 입은 빛의 자녀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 나감으로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23
제51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 2:1-12
읽을말씀 : 마 2:1-12 | 외울말씀 : 마 2:11
교육목표 :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왜 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으며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이유는 무엇인지 영적인 의미를 깨우쳐 알게 한다.
1.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의 축복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지요(마 1:18-25). 그런데 약 2000여 년 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곳이 아닌, 아무 보잘것없는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눅 2:3-7). 이는 전도서 3:18에 말씀한 대로 사람들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으니 혼의 지배를 받는 혼의 사람이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며 죄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혼의 사람이 되어 버린 인류를 다시금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기 위해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람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55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영의 양식을 먹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참생명을 얻어 영생하게 하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기쁨으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1-12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으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고,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 예수를 찾거든 자기에게 고하여 자기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는데, 이는 아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에게 꿈으로 헤롯 왕에게 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고,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에게 역사하셔서 애굽으로 피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았던 것처럼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땅에는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또한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누가복음 2:8-20에 보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고 목자들은 이 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양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복음 2:25-38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안나'라는 여선지자 역시 나이 많아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는데, 결국 이들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히 오실 주님을 증거하지만(계 22:20),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을 마음 중심에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하나님께서 예언해 놓으신 모든 말씀은 알았어도 막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못했던 외식주의자들처럼, 교회에 다니며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알긴 알아도 속히 오실 주님을 중심에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식주의자들처럼 외모만 경건할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먼저 경건하여지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것,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만물이 썩어 없어질 것들이므로 황금, 유향, 몰약도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예물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 썩지 아니할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1) 황금의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고 했으니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저주를 받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친히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보잘것없는 짐승의 구유에 누이셨고 오히려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고후 8:9).
또한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귀히 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생을 사모하며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2) 유향의 의미
유향이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악들을 대속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23:27을 보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했고, 마태복음 15:11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므로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몰약의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썩지 않게 뿌려지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도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몰약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로써 우리의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 성탄절의 영적인 의미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린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조건 만인의 구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깨어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이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황금 곧 세상의 부귀, 영화, 명예를 주님 앞에 드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천국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향 곧 우리의 마음을 모두 주님께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또한 몰약, 곧 우리의 썩어 없어질 육체를 주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나갈 뿐 아니라, 오직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과 영생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맞아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황금과 유향, 몰약이 뜻하는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왜 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으며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이유는 무엇인지 영적인 의미를 깨우쳐 알게 한다.
1.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의 축복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지요(마 1:18-25). 그런데 약 2000여 년 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곳이 아닌, 아무 보잘것없는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눅 2:3-7). 이는 전도서 3:18에 말씀한 대로 사람들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으니 혼의 지배를 받는 혼의 사람이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며 죄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혼의 사람이 되어 버린 인류를 다시금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기 위해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람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55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영의 양식을 먹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참생명을 얻어 영생하게 하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기쁨으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1-12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으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고,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 예수를 찾거든 자기에게 고하여 자기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는데, 이는 아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에게 꿈으로 헤롯 왕에게 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고,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에게 역사하셔서 애굽으로 피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았던 것처럼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땅에는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또한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누가복음 2:8-20에 보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고 목자들은 이 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양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복음 2:25-38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안나'라는 여선지자 역시 나이 많아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는데, 결국 이들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히 오실 주님을 증거하지만(계 22:20),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을 마음 중심에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하나님께서 예언해 놓으신 모든 말씀은 알았어도 막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못했던 외식주의자들처럼, 교회에 다니며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알긴 알아도 속히 오실 주님을 중심에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식주의자들처럼 외모만 경건할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먼저 경건하여지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것,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만물이 썩어 없어질 것들이므로 황금, 유향, 몰약도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예물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 썩지 아니할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1) 황금의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고 했으니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저주를 받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친히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보잘것없는 짐승의 구유에 누이셨고 오히려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고후 8:9).
또한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귀히 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생을 사모하며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2) 유향의 의미
유향이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악들을 대속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23:27을 보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했고, 마태복음 15:11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므로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몰약의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썩지 않게 뿌려지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도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몰약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로써 우리의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 성탄절의 영적인 의미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린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조건 만인의 구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깨어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이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황금 곧 세상의 부귀, 영화, 명예를 주님 앞에 드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천국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향 곧 우리의 마음을 모두 주님께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또한 몰약, 곧 우리의 썩어 없어질 육체를 주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나갈 뿐 아니라, 오직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과 영생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맞아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황금과 유향, 몰약이 뜻하는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16
제50과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읽을말씀 : 롬 13:11-14 | 외울말씀 : 롬 13:12
교육목표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삶을 영위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고가의 옷을 입으며 만족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러한 모습이 조금도 부럽지 않지요. 잠시 잠깐인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특별히 입으라 하신 옷이 있는데 바로 빛의 갑옷입니다. 빛의 갑옷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광채를 두른 너무나 아름다운 옷으로, 바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짜인 옷이지요.
그러면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첫장을 열면 천지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를 조성하시고 그 안에 만물을 이루시며, 또한 사람을 살게 하셨을까요? 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고하여 경작하신 후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참자녀들을 찾아 천국에서 함께 영원히 사랑을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알곡된 성도들을 언제 추수하시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11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가 바로 추수 때이지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천국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면 알곡된 성도들을 추수하고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말씀하시며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것을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2.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려면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이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잠언 4:23을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했고 잠언 10:19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훈하셨으며, 베드로전서 1:15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권면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입술, 행실 등이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와 자신의 본분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등 여러 가지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선이 임한 만큼 성령의 소욕을 좇게 되지만 악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비진리를 좇아 행하므로 범사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어두움의 일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방탕이란 무절제하고 방종한 생활로 정돈되지 못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동물과 달리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를 지키는 것이 단정한 삶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는 것을 취하려고 정돈된 삶을 저버리는 것이 방탕입니다. 색욕을 좇아 음란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나 술에 취해 살아가는 등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술 취함 또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혹자는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합리화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대로 오직 성령의 충만함 속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호색과 음란이 있는데, 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무절제하게 음욕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나 동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수간(獸姦)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음란의 사전적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런 일들은 세상 도덕이나 윤리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이러한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 호색 등이 정욕을 좇아 행하는 어두움의 일이라면 쟁투와 시기 등은 물질이나 명예 등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좇아 나오는 어두움의 일들이지요. 야고보서 4:1-2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나을 때 생기는 시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지요.
이처럼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사람은 단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말과 행실도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신속히 어두움의 일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정욕을 좇아 육신의 일을 도모하려는 속성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요 1:14) 말씀 자체가 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 말씀을 배우는 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말씀의 빛으로 옷을 입으면 이전에 정욕을 좇아 행하던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반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영적인 장수의 수준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신 5:8-9)으로 옷을 입었기에 풀무불에 던져질 위협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의 갑옷을 입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범사에 지킴을 받으며 진리로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인 전투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는 말씀같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한 영혼이라도 더 사망으로 이끌기 위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같이 치열한 영계의 전투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함
먼저,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24 말씀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감정도 오직 하나님께 맡겨 진리대로만 행하는 사람들이지요.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두려움과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을 끊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행함으로 결국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요한계시록 2:10의 말씀이 임해 있습니다. 즉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는 빛의 갑옷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열심으로 핍박했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한 번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은 이후 돌변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때로는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으며 강도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굶주림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또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어도 주님을 증거했지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마음이 사도 바울의 빛의 갑옷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최고의 선으로, 온전히 빛에 거한 것이니 어두움의 세력이 감히 만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빛의 갑옷을 입고 영적 장수들이 되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처럼 명철을 통해 바른 길로 나가며, 사단의 회를 깨뜨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5. 빛의 갑옷을 입어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일국의 왕까지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정도로 온전한 빛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선한 도리를 좇기를 즐거워하므로 빛의 갑옷을 입었던 룻은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가 하면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가 감히 해칠 수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건짐받았지요. 또한 불의와 타협지 않는 빛의 갑옷을 입은 요셉은 결국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시편 91:14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알아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말씀하신 대로 설령 시험과 환난이 왔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지키시니 오히려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이 땅의 모든 싸움이 마치는 날까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삶을 영위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고가의 옷을 입으며 만족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러한 모습이 조금도 부럽지 않지요. 잠시 잠깐인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특별히 입으라 하신 옷이 있는데 바로 빛의 갑옷입니다. 빛의 갑옷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광채를 두른 너무나 아름다운 옷으로, 바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짜인 옷이지요.
그러면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첫장을 열면 천지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를 조성하시고 그 안에 만물을 이루시며, 또한 사람을 살게 하셨을까요? 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고하여 경작하신 후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참자녀들을 찾아 천국에서 함께 영원히 사랑을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알곡된 성도들을 언제 추수하시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11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가 바로 추수 때이지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천국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면 알곡된 성도들을 추수하고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말씀하시며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것을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2.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려면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이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잠언 4:23을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했고 잠언 10:19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훈하셨으며, 베드로전서 1:15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권면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입술, 행실 등이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와 자신의 본분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등 여러 가지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선이 임한 만큼 성령의 소욕을 좇게 되지만 악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비진리를 좇아 행하므로 범사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어두움의 일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방탕이란 무절제하고 방종한 생활로 정돈되지 못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동물과 달리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를 지키는 것이 단정한 삶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는 것을 취하려고 정돈된 삶을 저버리는 것이 방탕입니다. 색욕을 좇아 음란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나 술에 취해 살아가는 등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술 취함 또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혹자는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합리화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대로 오직 성령의 충만함 속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호색과 음란이 있는데, 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무절제하게 음욕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나 동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수간(獸姦)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음란의 사전적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런 일들은 세상 도덕이나 윤리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이러한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 호색 등이 정욕을 좇아 행하는 어두움의 일이라면 쟁투와 시기 등은 물질이나 명예 등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좇아 나오는 어두움의 일들이지요. 야고보서 4:1-2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나을 때 생기는 시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지요.
이처럼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사람은 단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말과 행실도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신속히 어두움의 일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정욕을 좇아 육신의 일을 도모하려는 속성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요 1:14) 말씀 자체가 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 말씀을 배우는 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말씀의 빛으로 옷을 입으면 이전에 정욕을 좇아 행하던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반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영적인 장수의 수준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신 5:8-9)으로 옷을 입었기에 풀무불에 던져질 위협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의 갑옷을 입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범사에 지킴을 받으며 진리로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인 전투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는 말씀같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한 영혼이라도 더 사망으로 이끌기 위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같이 치열한 영계의 전투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함
먼저,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24 말씀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감정도 오직 하나님께 맡겨 진리대로만 행하는 사람들이지요.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두려움과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을 끊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행함으로 결국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요한계시록 2:10의 말씀이 임해 있습니다. 즉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는 빛의 갑옷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열심으로 핍박했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한 번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은 이후 돌변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때로는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으며 강도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굶주림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또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어도 주님을 증거했지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마음이 사도 바울의 빛의 갑옷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최고의 선으로, 온전히 빛에 거한 것이니 어두움의 세력이 감히 만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빛의 갑옷을 입고 영적 장수들이 되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처럼 명철을 통해 바른 길로 나가며, 사단의 회를 깨뜨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5. 빛의 갑옷을 입어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일국의 왕까지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정도로 온전한 빛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선한 도리를 좇기를 즐거워하므로 빛의 갑옷을 입었던 룻은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가 하면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가 감히 해칠 수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건짐받았지요. 또한 불의와 타협지 않는 빛의 갑옷을 입은 요셉은 결국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시편 91:14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알아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말씀하신 대로 설령 시험과 환난이 왔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지키시니 오히려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이 땅의 모든 싸움이 마치는 날까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09
제49과네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시 37:4-6
읽을말씀 : 시 37:4-6 | 외울말씀 : 시 37:4-6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응답받고 축복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시편 37:4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빛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모두 벗어 버리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어두움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에 대해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로 인해 투기하지 말아야
시편 37:1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악자들의 불의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되는 것 같아 보이면 불평하거나 내심 투기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어두움에 속한 일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신앙 자세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 것입니다(시편 37:3).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이 주어지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성실한 은혜에 자족함으로 진정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37:2에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말씀한 대로 악인이 잘되는 것은 풀이 곧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가 쇠잔하여짐과 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4:19-20에도 보면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말씀했지요. 악인의 종국이 멀지 않지만 의인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할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를 기뻐하는 방법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만 "믿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 생명도 드릴 수 있는 믿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러한 참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한 중심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였습니다. 당시 지배국가의 권세 있는 백부장이 육적으로 볼 때는 피지배국의 한 사람에 불과한 예수님께 나아와 이와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마음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부장은 이어 말하기를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기이히 여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며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을 통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분야는 시편 37:7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으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이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는 사람으로, 앞서 시편 37:1을 통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앞서 행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행함이기에 가장 적극적이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하며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이 얻는 결과
앞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은 행악자들이 누리는 일시적인 형통함을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인이 잘 되는 것을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성숙한 단계는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신앙입니다(시편 37:5). 바로 이러한 신앙이 되면 그 의가 빛같이 나타나며 그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셔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간섭하셔서 그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의가 빛으로 비유된다면 공의는 태양이 가장 작열하는 정오의 빛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나 보기에 의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맞대응하여 이겨야 할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 피해야 할 때는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숨어야 할 때는 숨으시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는 의를 행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의가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빛으로 드러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름대로 의를 추구하며 산다 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여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해를 가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금방 불편해지고 분하여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의 화평이 깨어지고 상대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이 자기 보기에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감정과 악을 이기지 못하는 어두움임을 본문을 통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은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다 보고 계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티와 허물이 보이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의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3-5을 보면 형제의 티가 보이는 사람의 눈 속에는 그 티보다 훨씬 큰 들보가 있다는 말씀의 비유로 자신은 의로운 양 남을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은 외식이요, 더 큰 악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4.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의 기업
시편 37:9-11을 보면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이 운행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생사화복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 낀 하늘 아래서도 햇빛을 기대하듯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정도가 달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또한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동일하시지만 사람들 편에서 얼마큼 여호와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응답하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밀한 분야까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 더 온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는다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대하고 모든 문제를 맡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5.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의 중심과 마음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헌신적이었는지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룻이라는 여인을 상고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은 성경상에 소개된 룻의 단면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룻과 흡사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룻과 비교해 보며 "나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 대한 섬김과 예우가 각별하며, 여러 모로 선하며 지혜롭고 현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하나님께서 룻을 높이시고 기뻐하셨던 데에는 룻의 단면적인 착함이나 의로움, 진실함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심성을 룻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시어머니에 대한 헌신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지만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룻의 행함이나 마음 됨됨이와 인물 됨됨이를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다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표면적인 장점만 볼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됨에 관해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가를 깨닫고 종합하여 분별할 줄 알아 우리 자신을 온전케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며 정도를 좇아 행하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향한 의로움이 큰 빛을 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도 넓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응답받고 축복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시편 37:4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빛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모두 벗어 버리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어두움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에 대해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로 인해 투기하지 말아야
시편 37:1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악자들의 불의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되는 것 같아 보이면 불평하거나 내심 투기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어두움에 속한 일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신앙 자세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 것입니다(시편 37:3).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이 주어지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성실한 은혜에 자족함으로 진정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37:2에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말씀한 대로 악인이 잘되는 것은 풀이 곧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가 쇠잔하여짐과 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4:19-20에도 보면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말씀했지요. 악인의 종국이 멀지 않지만 의인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할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를 기뻐하는 방법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만 "믿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 생명도 드릴 수 있는 믿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러한 참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한 중심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였습니다. 당시 지배국가의 권세 있는 백부장이 육적으로 볼 때는 피지배국의 한 사람에 불과한 예수님께 나아와 이와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마음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부장은 이어 말하기를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기이히 여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며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을 통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분야는 시편 37:7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으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이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는 사람으로, 앞서 시편 37:1을 통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앞서 행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행함이기에 가장 적극적이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하며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이 얻는 결과
앞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은 행악자들이 누리는 일시적인 형통함을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인이 잘 되는 것을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성숙한 단계는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신앙입니다(시편 37:5). 바로 이러한 신앙이 되면 그 의가 빛같이 나타나며 그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셔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간섭하셔서 그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의가 빛으로 비유된다면 공의는 태양이 가장 작열하는 정오의 빛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나 보기에 의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맞대응하여 이겨야 할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 피해야 할 때는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숨어야 할 때는 숨으시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는 의를 행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의가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빛으로 드러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름대로 의를 추구하며 산다 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여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해를 가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금방 불편해지고 분하여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의 화평이 깨어지고 상대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이 자기 보기에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감정과 악을 이기지 못하는 어두움임을 본문을 통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은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다 보고 계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티와 허물이 보이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의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3-5을 보면 형제의 티가 보이는 사람의 눈 속에는 그 티보다 훨씬 큰 들보가 있다는 말씀의 비유로 자신은 의로운 양 남을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은 외식이요, 더 큰 악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4.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의 기업
시편 37:9-11을 보면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이 운행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생사화복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 낀 하늘 아래서도 햇빛을 기대하듯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정도가 달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또한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동일하시지만 사람들 편에서 얼마큼 여호와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응답하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밀한 분야까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 더 온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는다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대하고 모든 문제를 맡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5.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의 중심과 마음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헌신적이었는지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룻이라는 여인을 상고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은 성경상에 소개된 룻의 단면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룻과 흡사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룻과 비교해 보며 "나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 대한 섬김과 예우가 각별하며, 여러 모로 선하며 지혜롭고 현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하나님께서 룻을 높이시고 기뻐하셨던 데에는 룻의 단면적인 착함이나 의로움, 진실함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심성을 룻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시어머니에 대한 헌신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지만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룻의 행함이나 마음 됨됨이와 인물 됨됨이를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다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표면적인 장점만 볼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됨에 관해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가를 깨닫고 종합하여 분별할 줄 알아 우리 자신을 온전케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며 정도를 좇아 행하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향한 의로움이 큰 빛을 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도 넓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