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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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4
제15과부활의 소망과 확신
요 11:25-26, 고전 15:12-22
읽을말씀 : 요 11:25-26, 고전 15:12-22 | 외울말씀 : 고전 15:20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나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던 경우 또는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라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일도 항상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꿈틀대던 굼벵이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고, 구더기가 변하여 파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장차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심어 주신 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9-11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그 후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친히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결코 평안함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간구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지요(행 7:59-60).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확신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떠한 고통도 괘념하지 않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0:24).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확신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아 느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보임으로 행함을 통해 확신이 와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 믿어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받아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나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던 경우 또는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라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일도 항상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꿈틀대던 굼벵이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고, 구더기가 변하여 파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장차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심어 주신 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9-11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그 후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친히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결코 평안함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간구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지요(행 7:59-60).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확신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떠한 고통도 괘념하지 않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0:24).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확신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아 느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보임으로 행함을 통해 확신이 와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 믿어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받아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07
제14과선 (14) - 아브라함 (2)
히 11:17-19
읽을말씀 : 히 11:17-19 | 외울말씀 : 히 11:1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아브람은 즉시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한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람은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첫 시험이었던 이때부터 백 세에 얻게 하신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서 채비를 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러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어지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5년이 지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래가 참지 못하여 아브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로마서 4:19-21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되므로 인해 낙심하여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아브람은 즉시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한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람은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첫 시험이었던 이때부터 백 세에 얻게 하신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서 채비를 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러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어지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5년이 지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래가 참지 못하여 아브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로마서 4:19-21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되므로 인해 낙심하여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31
제13과선 (13) - 아브라함 (1) -
창 13:8-9
읽을말씀 : 창 13:8-9 | 외울말씀 : 창 13:9
교육목표 :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하였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시며 소유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온전히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모두의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조카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롯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하여 떠났다 해서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기므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그릇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었으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런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과 가족이 전쟁에 연루되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지요.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백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가하지만 사사로운 유익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10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헷 족속이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할 수도 있지요. 이러한 훗날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가운데 나와진 일이지요. 훗날 아브람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람에 돌렸기 때문에 아브람이 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니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 할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우물의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케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에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18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셨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하였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시며 소유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온전히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모두의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조카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롯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하여 떠났다 해서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기므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그릇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었으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런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과 가족이 전쟁에 연루되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지요.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백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가하지만 사사로운 유익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10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헷 족속이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할 수도 있지요. 이러한 훗날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가운데 나와진 일이지요. 훗날 아브람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람에 돌렸기 때문에 아브람이 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니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 할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우물의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케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에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18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하셨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24
제12과선 (12) - 모세(2) -
민 12:3, 7
읽을말씀 : 민 12:3, 7 | 외울말씀 : 민 12:3, 7
교육목표 :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영적으로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와 같이 아름다운 선(善)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좋은 그릇들로 나오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던 것과 광야에서 연단을 받을 때 오직 감사로 받았던 선의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과연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나아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또한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줄 수 있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를 감싸주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불편함을 주지도 않으며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러한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므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갖가지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사흘 동안 광야 길을 행하고 나서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들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는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자 이번에는 먹을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했고(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란 곳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다시 마실 물이 없자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을 할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백성들이지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의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찌하든 백성들의 원을 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여 진멸 당할 상황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조금 오랜 날을 산에 올라 있을 때, 백성들은 금세 마음이 방자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그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1-13). 이에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사 화를 내리지 않으셨지요.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이 행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를 범하였지만 그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을 구했지요. 그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틈만 나면 불평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었지만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5을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위해 고용된 일꾼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와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마음에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고자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모세는 늘 백성들로 인해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백성들로 인한 애통과 번민, 염려로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백성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믿고 신뢰하심으로 많은 교통을 이루셨고 또 큰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금식하며 기도하되 모든 힘을 다해 짜내기까지 처절하게 노력하여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풀어 받았고 하나님과 많은 교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입으로 내지 않고 철저히 지켰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으되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출애굽 2세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믿음으로 백성을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많은 권능들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는데, 더 온전히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인 것이지요. 모세는 바로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여러분은 혹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너무도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신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까지 백성들로 인해 한시도 마음 편히 눕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뜨겁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17:7-8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말씀하셨으니 모세의 선을 닮은 거목(巨木)으로 자라나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영적으로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와 같이 아름다운 선(善)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좋은 그릇들로 나오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던 것과 광야에서 연단을 받을 때 오직 감사로 받았던 선의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과연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나아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또한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줄 수 있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를 감싸주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불편함을 주지도 않으며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러한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므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갖가지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사흘 동안 광야 길을 행하고 나서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들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는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자 이번에는 먹을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했고(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란 곳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다시 마실 물이 없자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을 할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백성들이지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의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찌하든 백성들의 원을 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여 진멸 당할 상황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조금 오랜 날을 산에 올라 있을 때, 백성들은 금세 마음이 방자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그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1-13). 이에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사 화를 내리지 않으셨지요.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이 행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를 범하였지만 그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을 구했지요. 그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틈만 나면 불평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었지만 모세는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5을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위해 고용된 일꾼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와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마음에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고자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모세는 늘 백성들로 인해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백성들로 인한 애통과 번민, 염려로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백성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믿고 신뢰하심으로 많은 교통을 이루셨고 또 큰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금식하며 기도하되 모든 힘을 다해 짜내기까지 처절하게 노력하여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풀어 받았고 하나님과 많은 교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입으로 내지 않고 철저히 지켰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으되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출애굽 2세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믿음으로 백성을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많은 권능들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는데, 더 온전히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인 것이지요. 모세는 바로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여러분은 혹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너무도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신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까지 백성들로 인해 한시도 마음 편히 눕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뜨겁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17:7-8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말씀하셨으니 모세의 선을 닮은 거목(巨木)으로 자라나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17
제11과선 (11) - 모세(1)-
히 11:24 - 26
읽을말씀 : 히 11:24 - 26 | 외울말씀 : 히 11:25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하여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과연 모세는 마음 중심에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한 모세의 선(善)
애굽이 노예로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심하게 학대할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백성보다 더욱 왕성하게 번식하고 창성해지자 애굽 왕은 이를 두려워하여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모세도 이 명령에 따라 태어났을 때 죽임 당할 처지였으나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간 모세를 숨겼습니다(히 11:23). 석 달이 지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모세의 어미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지요.
마침 애굽의 공주가 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상자에 담긴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강변에서 떠내려가는 모세를 지켜보던 누이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었고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서 왕궁에서 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의 역사로 모세는 생명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지요.
당시 애굽은 앞서가는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머물러 있는 한 모세는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모세의 마음에 항상 떠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 땅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항상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나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동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행여 자신에게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여 모른 체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잃어버릴지언정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지요. 더구나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가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왕궁을 뛰쳐나와 광야로 갔습니다. 화려한 왕궁 대신 집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며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도망자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고난을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받는 능욕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한 것입니다.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善)
모세는 바로의 궁정을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양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느 정도 생활이 정착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비로소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인식하자 공허함과 적막함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들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왕궁에 있을 때와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음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드니 철저히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신다' 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했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내가 갖고자 해도 가질 수가 없고 내가 움직이고자 해도 임의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쳤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마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호흡할 수 있음도 감사했고 먹을 양식이 있음에도 감사했으며 때론 찬 이슬을 맞으며 광야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할지라도 쉼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땅을 보며 그 땅을 바라볼 수 있음도 감사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음도 감사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하여 그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정녕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자신이 취한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으로부터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실 때에 심히 자신이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연단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에서 믿었기에 이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나는 왜 이 같은 연단을 받나? 내 연단이 심히도 혹독하니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 낼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하여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것도 아닌 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시간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다 하여 힘들어하지 않았고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가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하여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인데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지는 않는지요.
잠언 17:3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셨으니 연단을 받을 때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하여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과연 모세는 마음 중심에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한 모세의 선(善)
애굽이 노예로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심하게 학대할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백성보다 더욱 왕성하게 번식하고 창성해지자 애굽 왕은 이를 두려워하여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모세도 이 명령에 따라 태어났을 때 죽임 당할 처지였으나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간 모세를 숨겼습니다(히 11:23). 석 달이 지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모세의 어미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지요.
마침 애굽의 공주가 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상자에 담긴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강변에서 떠내려가는 모세를 지켜보던 누이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었고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서 왕궁에서 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의 역사로 모세는 생명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지요.
당시 애굽은 앞서가는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머물러 있는 한 모세는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모세의 마음에 항상 떠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 땅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항상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나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동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행여 자신에게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여 모른 체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잃어버릴지언정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지요. 더구나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가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왕궁을 뛰쳐나와 광야로 갔습니다. 화려한 왕궁 대신 집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며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도망자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고난을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받는 능욕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한 것입니다.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善)
모세는 바로의 궁정을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양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느 정도 생활이 정착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비로소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인식하자 공허함과 적막함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들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왕궁에 있을 때와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음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드니 철저히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신다' 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했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내가 갖고자 해도 가질 수가 없고 내가 움직이고자 해도 임의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쳤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마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호흡할 수 있음도 감사했고 먹을 양식이 있음에도 감사했으며 때론 찬 이슬을 맞으며 광야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할지라도 쉼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땅을 보며 그 땅을 바라볼 수 있음도 감사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음도 감사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하여 그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정녕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자신이 취한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으로부터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실 때에 심히 자신이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연단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에서 믿었기에 이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나는 왜 이 같은 연단을 받나? 내 연단이 심히도 혹독하니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 낼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하여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것도 아닌 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시간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다 하여 힘들어하지 않았고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가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하여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인데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지는 않는지요.
잠언 17:3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셨으니 연단을 받을 때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10
제10과선 (10) - 사도 바울(2)-
롬 9:1-3
읽을말씀 : 롬 9:1-3 | 외울말씀 : 롬 9:3
교육목표 :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도 바울의 지극한 선에 대해 밝히 알고 온전히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불같은 성령의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선의 분야는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짙은 농도로 하나님께 올려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사도 바울의 선(善)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8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할 때에 사도 바울은 얼마나 애통했던지요. 빌립보서 3:18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영혼을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1-3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단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전하는 사도 바울을 심히도 싫어하고 훼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동맹한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지요(행 23:12-13).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들이 구원받는 대신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길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걷는가 하면 자신이 독사에게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면서도 결코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고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10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마음을 지녔고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깨끗한 마음을 이뤘기에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많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도 날로 더욱 승하게 되었고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 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 절제할 능이 있었으므로 받지 못하고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는 들려 주지 않았습니다.
2.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려 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 자신을 들레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마음을 지녔고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와 같은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입술의 말 한 마디라 할지라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주지 아니하였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도 혹여 실족 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1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고린도후서 12:5에도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더해 주길 원하되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스스로 영의 것을 터득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모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내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던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 중에는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너무나 쉽게 말하지 않는지요?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은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에게 기도받은 손수건을 얹고 기도하여 환자가 치료받은 것을 간증할 때에도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지 않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진정 자신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깨닫고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더욱 담대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큰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백한 것처럼 사도 바울의 선을 온전히 본받아 참으로 권능 있는 일꾼으로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도 바울의 지극한 선에 대해 밝히 알고 온전히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불같은 성령의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선의 분야는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짙은 농도로 하나님께 올려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사도 바울의 선(善)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8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할 때에 사도 바울은 얼마나 애통했던지요. 빌립보서 3:18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영혼을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1-3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단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전하는 사도 바울을 심히도 싫어하고 훼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동맹한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지요(행 23:12-13).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들이 구원받는 대신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길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걷는가 하면 자신이 독사에게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면서도 결코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고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10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마음을 지녔고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깨끗한 마음을 이뤘기에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많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도 날로 더욱 승하게 되었고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 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 절제할 능이 있었으므로 받지 못하고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는 들려 주지 않았습니다.
2.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려 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 자신을 들레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마음을 지녔고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와 같은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입술의 말 한 마디라 할지라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주지 아니하였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도 혹여 실족 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1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고린도후서 12:5에도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더해 주길 원하되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스스로 영의 것을 터득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모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내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던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 중에는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너무나 쉽게 말하지 않는지요?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은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에게 기도받은 손수건을 얹고 기도하여 환자가 치료받은 것을 간증할 때에도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지 않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진정 자신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깨닫고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더욱 담대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큰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백한 것처럼 사도 바울의 선을 온전히 본받아 참으로 권능 있는 일꾼으로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03
제9과선 (9) - 사도 바울 (1) -
고전 15:9-10
읽을말씀 : 고전 15:9-10 | 외울말씀 : 고전 15:10
교육목표 : 한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서 귀히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엄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원래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다른 사람들을 누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에 대해 변론하기를 즐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3에 기록된대로 당대 최고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적인 의에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할 뿐 아니라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셨지요.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다른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시며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23-27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임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다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자기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의 마음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므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정녕 큰 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는 복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바 되고 귀한 성령의 도구로 변화되어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한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서 귀히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엄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원래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다른 사람들을 누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에 대해 변론하기를 즐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3에 기록된대로 당대 최고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적인 의에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할 뿐 아니라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셨지요.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다른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시며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23-27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임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다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자기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의 마음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므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정녕 큰 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는 복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바 되고 귀한 성령의 도구로 변화되어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24
제8과선 (8) - 나아만 -
눅 4:27
읽을말씀 : 눅 4:27 | 외울말씀 : 눅 4:27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27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했습니다.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서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그러나 문둥병은 불치병이기에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를 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아이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나아만은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왕 다음가는 권세를 지닌 지체 높은 신분이지만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마음이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의 마음이 강퍅하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그 말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할 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2.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마음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5:5 후반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길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의 마음이 아니라 정녕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기분이 상하여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했지요. 단지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자기적인 생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엘리사 선지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말했지요(왕하 5:13).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마음을 지녔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의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이며 요단 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을 씻었고, 그 결과 문둥병을 치료받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왕하 5:14).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
누가복음 17: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한 사람만이 와서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하지만 막상 치료받은 후에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15에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했습니다. 치료받은 후에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즉시로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섬기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왕하 5:17).
이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나아만을 택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갖되 더욱 행함으로 온전케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모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27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했습니다.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서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그러나 문둥병은 불치병이기에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를 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아이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나아만은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왕 다음가는 권세를 지닌 지체 높은 신분이지만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마음이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의 마음이 강퍅하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그 말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할 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2.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마음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5:5 후반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길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의 마음이 아니라 정녕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기분이 상하여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했지요. 단지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자기적인 생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엘리사 선지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말했지요(왕하 5:13).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마음을 지녔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의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이며 요단 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을 씻었고, 그 결과 문둥병을 치료받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왕하 5:14).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
누가복음 17: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한 사람만이 와서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하지만 막상 치료받은 후에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15에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했습니다. 치료받은 후에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즉시로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섬기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왕하 5:17).
이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나아만을 택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갖되 더욱 행함으로 온전케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모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17
제7과선 (7) - 다니엘과 세 친구 (2) -
단 3:17-18, 6:21-22
읽을말씀 : 단 3:17-18, 6:21-22 | 외울말씀 : 단 3:18, 6:21-22
교육목표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보호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치 않으며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 인정하셨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해 주셨다 했습니다.
세상에도 자기 보기에 의로운 명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선이 결여된 '의'는 온전한 의가 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켰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얼마나 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다니엘의 세 친구의 선(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므로 풀무 불에 던져지는 시험을 만났습니다. 왕이 크게 진노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이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치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해도 서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변하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욱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신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 던짐 받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변함없이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다니엘의 선(善)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에 머리로서 왕 다음 가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시기한 악한 무리들은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으나 아무런 허물을 얻지 못하게 되자 율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습니다.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왕에게 악한 무리들의 궤계를 고하여 그 계략을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아니하고 악한 무리들에게 대항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자신이 큰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다니엘은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온전히 믿었는데,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이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들은 자연히 마음에서 걸러지게 되며,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달리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이미 악한 무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고, 이에 악한 무리들은 즉시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왕은 그제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찌하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악한 무리들이 재촉하니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말합니다. 왕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므로 이처럼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엘이 평소에 얼마나 왕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 심어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기에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날 새벽이 되자 왕은 급히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 가서 슬피 소리를 질러 다니엘을 불러 보았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생명을 잃었을 상황이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 속으로부터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다니엘의 음성이 울려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오히려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지요.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서운함도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까를 염려했지요. 그래서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므로 먼저는 왕을 안심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가 되며 상대가 조금도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함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므로 죽음이나 어떠한 재앙도 피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 선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보호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치 않으며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 인정하셨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해 주셨다 했습니다.
세상에도 자기 보기에 의로운 명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선이 결여된 '의'는 온전한 의가 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켰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얼마나 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다니엘의 세 친구의 선(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므로 풀무 불에 던져지는 시험을 만났습니다. 왕이 크게 진노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이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치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해도 서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변하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욱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신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 던짐 받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변함없이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다니엘의 선(善)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에 머리로서 왕 다음 가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시기한 악한 무리들은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으나 아무런 허물을 얻지 못하게 되자 율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습니다.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왕에게 악한 무리들의 궤계를 고하여 그 계략을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아니하고 악한 무리들에게 대항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자신이 큰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다니엘은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온전히 믿었는데,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이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들은 자연히 마음에서 걸러지게 되며,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달리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이미 악한 무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고, 이에 악한 무리들은 즉시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왕은 그제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찌하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악한 무리들이 재촉하니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말합니다. 왕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므로 이처럼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엘이 평소에 얼마나 왕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 심어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기에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날 새벽이 되자 왕은 급히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 가서 슬피 소리를 질러 다니엘을 불러 보았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생명을 잃었을 상황이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 속으로부터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다니엘의 음성이 울려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오히려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지요.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서운함도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까를 염려했지요. 그래서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므로 먼저는 왕을 안심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가 되며 상대가 조금도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함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므로 죽음이나 어떠한 재앙도 피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 선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10
제6과선 (6) - 다니엘과 세 친구 (1) -
단 6:10
읽을말씀 : 단 6:10 | 외울말씀 : 단 6:10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결과였습니다.
신명기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어떠한 것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라는 것이었지요.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했으며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17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하였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 홀로 경배 받기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 종교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는데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행함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간의 질서에 대한 것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히 금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다시 채워 넣었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을 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마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 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과정을 지켜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로 잡혀와 어렵고 힘든 신세가 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너무도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본교회 당회장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아시기에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었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들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르러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며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결과였습니다.
신명기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어떠한 것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라는 것이었지요.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했으며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17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하였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 홀로 경배 받기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 종교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는데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행함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간의 질서에 대한 것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히 금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다시 채워 넣었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을 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마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 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과정을 지켜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로 잡혀와 어렵고 힘든 신세가 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너무도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본교회 당회장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아시기에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었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들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르러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며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