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202)  [창39:11-2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6.02.10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2절 - 19절까지 중략]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비록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니 그런 상황에서도 범사에 형통함을 입었습니다. 주인인 보디발로부터 신임과 인정을 받아 그 집안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는 가정 총무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애굽이라는 막강한 나라의 시위대장 집에서 가정 총무를 맡고 있다면 이는 마음만 먹으면 적지 않은 부와 권세를 누릴 수도 있는 힘 있는 자리입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그 집에서 주인 이외에는 요셉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요셉은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을 겨우 시위대장 집의 가정 총무로 삼으시고자 그를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오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을 영육 간에 연단하고 준비시켜서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위한 귀한 도구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장차 애굽의 총리 자리도 넉넉히 감당해 낼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계획에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이끌어 가셨습니다.
먼저는 시위대장 집의 가정 총무를 맡아 감당하도록 하심으로써 집안 살림이 돌아가는 원리부터 터득하게 하셨고, 또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접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도 체험을 통해 깨우치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바를 터득하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로서 필요한 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식과 체험들을 배우고 익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러한 지식과 체험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정상적으로라면 요셉으로 하여금 왕궁으로 들어가 정치 세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의 신분을 가진 요셉이 하루아침에 애굽 왕의 신하가 되어 왕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공의에 맞지가 않지요.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질서를 어그러트리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아이가 믿음을 가지고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에 그 어린아이를 대통령이 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 아이가 정말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라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대통령이 될 만한 그릇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믿음의 기도가 응답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 가심에 있어서 공의의 법칙을 어그러트리면서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번에 그를 총리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요셉으로 하여금 단계, 단계 필요한 과정들을 밟아 나가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전혀 총리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 안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가장 빨리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었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종의 신분을 가진 요셉을 왕의 신하가 되도록 하셨다 해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 자리에까지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단계, 단계 승진하며 나라의 정치와 살림에 대해 배우고 익히려면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리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육으로 볼 때는 전혀 엉뚱한 길로 요셉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왕의 죄수들만 가는 감옥으로 요셉이 들어가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것이 육으로 볼 때는 지금의 상황보다도 오히려 더 비참한 처지로 추락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로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게 하는 최단기 속성 과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장차 왕과 직접 연결되어 총리에 발탁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었지요.
사람은 당장 현실을 보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모든 일까지 아시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지요.

저에게도 1998, 1999년도에 세 차례의 시험이 왔을 때 만약 그 당시의 현실만을 바라보았다면 어찌 당장 다음 해인 2000년도부터 이루어질 그 놀라운 일들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세 차례 시험을 허락하시면서 “이것은 축복의 연단이다.” 하신 말씀을 믿었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지요. 그랬더니 정말 시험이 끝나고 1년도 채 안 되어 권능의 대폭발적인 역사와 함께 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 순식간에 열렸던 것을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목도했습니다.
세 차례의 시험이 왔을 때 제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해 낼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셨기에 세 차례의 시험도 허락하셨던 것이며,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예비해 두셨던 축복으로 그처럼 놀랍게 부어 주셨던 것이지요.

이런 것처럼 요셉 역시 어떤 미혹이 온다 해도 결코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미혹하려는 것도 또한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도 놔두셨던 것이며 그러한 방법을 통해 요셉이 결국은 왕의 죄수들이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게 하셨지요.
요셉을 왕의 죄수들이 있는 감옥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그렇다고 요셉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해서 감옥에 가도록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결백이 보존되면서 동시에 감옥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역사하셨지요.
이때 도구로 쓰인 것이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만약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미혹에 넘어가 범죄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법으로 요셉을 인도해 가실 수는 없으셨겠지요. 하지만 요셉은 결코 미혹당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에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보디발의 아내가 이처럼 요셉을 미혹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관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요. 마치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바로 왕이 자기 악을 좇아 악한 도구로 쓰였던 것처럼, 보디발의 아내도 자기의 정욕을 좇아 요셉을 미혹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입니다. 결국 자기 악 가운데 스스로가 악한 도구가 되는 길을 택한 것뿐이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주인의 집에 시무하러 갔는데 마침 그 집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요.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까지 붙잡으면서 자신과 동침하기를 요구합니다. 그 여인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지요.
그렇다면 이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집에 아무도 없겠다, 거기다가 이렇게까지 간청해 오니 귀찮아서라도 이번 한 번만 원하는 대로 해 줄까?’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더 이상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그러나 요셉에게는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여인이 잡고 있는 옷을 그 손에 벗어버린 채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지요. 요셉의 마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기에 이처럼 단호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를 지을 마음이 전혀 없다면 당연히 행함으로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마음에 아직 죄를 짓고자하는 죄성이 남아 있기에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죄성이 행함으로도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죄를 짓고 나서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상대가 하도 간절히 원해서 그랬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변명과 핑계일 뿐입니다. 마음에 죄성이 전혀 없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으며 아무리 부귀영화와 권세를 준다고 해도 결코 어둠 가운데 빠지지 않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셉의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기쁘셨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결코 범죄치 않을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행함으로 나타내었을 때 이를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행함으로 독자 이삭을 드린 것으로 인정받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요셉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중심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행함으로까지도 인정을 받았지요. 바로 이처럼 마음에 악이 전혀 없고 그래서 행함까지도 온전한 사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영의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옷까지 벗어 놓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와 미혹을 물리쳤지만 뜻하지 않았던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요셉의 행동을 심히도 괘씸하게 여긴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모든 것을 요셉의 잘못으로 몰아서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맙니다.

14-15절에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때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은 그 집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그들이 영의 사람이었다면 그 여인의 말만 듣고서 요셉을 판단, 정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은 한쪽말만 듣고 쉽게 판단, 정죄해 버리고 말지요. 더욱이 지금 그 여인의 손에는 요셉이 벗어 놓고 간 옷까지 증거물로 있으니 요셉은 영락없이 파렴치범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옷이 왜 그 여인의 손에 있게 되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요셉을 판단, 정죄하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잘못한 것은 보디발의 아내인데도 오히려 결백한 요셉을 모함하여 모든 누명을 씌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보디발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똑같은 거짓말로 요셉을 모함하지요. 이에 보디발은 아내의 말만 듣고 심히 노하여 요셉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넣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주인 보디발로부터도 결국 버림을 받은 처지가 되어 깊은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성도 여러분, 보디발의 아내에게 만약 조금의 선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민망해하며 어떻게든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요구를 그렇게까지 단호히 거절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겼을 것이고요.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악으로 나왔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그것을 도리어 악으로 갚았던 것이지요. 사실 요셉의 입장에서는 그의 허물을 어찌하든 덮어 주고 가려 준 것인데 이처럼 은혜를 악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조금이라도 악한 마음이 있어서 그 여인의 허물을 퍼트린다거나 어떤 증거와 증인을 세워서 그의 부정함을 드러내려 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 여인이 자기 주인의 아내였기에 주인을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지켜 주었고,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물러나기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지금 이 여인은 모든 허물을 뒤집어 씌워서 죄인으로 몰아가는 있을 수 없는 악을 행하고 있지요. 하지만 요셉은 이와 같은 엄청난 봉변을 당하면서도 결코 불평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셉이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이고, 사람의 도리를 저버린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요셉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래서 요셉은 변명하려 하지 않았고, 주인에게도 해명하려 하지 않았으며 주인의 처에게 따지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억울함을 풀어 보려고 하지 않았고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렸지요. 이 상황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롬 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러한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고 거기서 또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가야 하는 이와 같은 과정들을 거치면서 오래 참음을 이루었고 모든 것을 선으로 바라보며 감사로 받을 수 있는 깊은 그릇으로 점차 변화되어갔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본 교회도 1998, 1999년도에 본문의 요셉과 동일한 상황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지어낸 말만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저와 본 교회를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이었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라는 것도 자기들의 의도에 맞추어 편집하고 거짓으로 꾸며낸 것들이었습니다. 우리 편의 말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악한 사람들의 말만 일방적으로 듣고서 그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했던 것이고요.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을 참고 인내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참고 인내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승리해냈지요. 아버지 하나님만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린 채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한 저를 죽이려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는 누구 하나 미워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맞서 대항하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오직 선으로 생각하며 바라보았고 이 모든 시험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았습니다.
모 방송국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았으며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하신 대로 용서하고 사랑했지요. 혹시 성도님들 중에 ‘그러면 왜 그 방송국을 상대로 소송은 했나?’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아 내거나 그들에게 벌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앞으로 우리를 위해 선한 도구로 쓰일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그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지요. 때가 되면 이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후 5:10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또한 계 20:12-13에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 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했지요.
이 말씀들처럼 모든 사람은 마지막 심판 날에 반드시 이 땅에서 행한 대로 그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땅에서 행한 모든 행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는 누구도 ‘나는 안 했다’고 부인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은 것은 기록되었던 책에서도 삭제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지요.
더욱이 심판대 앞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드러나게 됩니다. 히 4:13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감출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느냐 입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당할 수도 있고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판단, 정죄를 당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만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꼭 심판대 앞에 서는 날에 가서야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때가 되면 반드시 진실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때까지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갈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대로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로서 드러나게 되지요. 그래서 마 7:20에는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열매를 맺는지’ 그 결과를 보고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분별해야 하지요. 그러므로 열매가 드러나기 전에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떤 열매로 나와졌습니까? 당장은 너무나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고 큰 죄인으로 여겨졌지만, 그는 결국 애굽의 총리라고 하는 확실한 열매로 나와졌다는 사실입니다. 선악 간에 모든 것이 드러나면서 결국 요셉의 결백함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셨지요.
본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오해와 판단, 정죄가 있었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잠잠히 참아 기다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멋지게 들어주셨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나타내 주셨고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무수한 열매들을 통해 우리의 결백과 진실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열매가 드러나기까지 잠잠히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해도 여러분은 오직 하늘에서 주어질 상급과 영광을 바라보며 열심히 선을 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 12:12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말씀한 대로 비록 환난 중에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축복의 연단이라면 기쁨과 감사함으로 참으며 항상 기도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보면서도 세상의 악한 사람들의 말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 정죄하는 크나큰 악은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보디발도 요셉을 진실하게 신뢰했고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정말 마음에서부터 믿었다고 하면 그처럼 쉽게 요셉을 정죄하지는 않았겠지요. 자기 아내의 말대로 요셉이 정말 흉악한 죄인이라면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과 함께하지를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디발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범사에 형통했던 것을 보았으면서도 마음에서부터 온전히 믿은 것이 아니었기에 아내의 말만 듣고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 정죄하여 감옥에 넣는 누를 행하고 말았지요.
보디발은 요셉을 믿고 신뢰한다고 했었지만 자기 생각과 맞지 않고 자기 유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자 이처럼 하루아침에 그 신뢰가 무너져 내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그토록 믿고 신뢰하여 집안의 모든 소유까지도 요셉의 손에 전부 위임했던 보디발이었지만 그 역시 이처럼 자기 아내의 말만 듣고 요셉을 판단하고 정죄해 버렸던 것이지요.
그동안 요셉을 지켜보았고,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이나마 알았다면, 그래도 한 번쯤은 요셉에게도 자초지종을 물었어야 할 텐데 보디발은 그런 과정도 전혀 없이 단번에 요셉을 감옥에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사람의 한계이며 육적인 선의 한계입니다.
보디발도 나름대로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선이었지요. 영적인 선은 누구도 함부로 판단, 정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 주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선은 육적인 선이었기에 ‘자신은 그처럼 요셉을 믿어 주었는데 요셉이 이처럼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분노로 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육의 사람은 사랑과 신뢰를 준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가를 바라는 것이기에 자신이 준 만큼 되돌려 받지 못할 때는 실망과 서운함이 따르고 심지어 미움으로까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의 사람은 한번 믿고 사랑을 준 사람에게서 설령 배신을 당한다 해도 결코 그에 대해 미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용서하고 살리려는 마음이지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는 있고 그를 위해 대신 애통해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하여 상대를 미워하거나 분이나 노를 발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저도 1998, 1999년도 당시에 제 편에서 많은 사랑을 주었고 그래도 어찌하든 믿어 주려고 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찔림당하는 일들도 당했을 때 결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주님의 심정을 느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셨지만 그래도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셔야 했고 잡혀 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던 제자들을 바라보셔야 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저도 물론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목자를 사랑한다 하며 붙좇았던 사람들이고 열심히 변화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제 편에서는 어떻게든 믿어 주려했던 사람들이 순간에 변하여 배신하고 떠나는 것을 보면서 주님의 심정을 느껴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사실 누구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육의 속성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이지요. 육은 언젠가 변할 수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신뢰관계가 되려면 반드시 영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는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이러한 영의 사람이라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도 결코 변할 리가 없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오해한다거나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할 리도 없지요.
그러니 이런 자녀는 하나님 편에서도 믿고 신뢰하여 무엇이나 맡기실 수가 있습니다. 실족할 염려도 없으니 마음껏 연단해서 귀한 도구로 쓰실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오늘 들으신 말씀을 통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점검하셔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신뢰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온전한 영의 사람들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2-13 오전 10:24:29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다음 글 창세기 강해(203) 이전글
이전 글 창세기 강해(201)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