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청자 여러분, ‘정말 마음 중심에서 겸손하며 상대를 섬기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그 사람의 지위가 올라가고 권세가 주어졌을 때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별로 드러나지도 않고,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는 잘 섬기고 순종도 잘하던 사람이, 막상 어떤 권세와 힘을 가지고 드러나게 되면 이내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돌변해 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이제는 섬김 받으려 하며 아랫사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특히 머리 된 사람의 인정과 신임을 받아서 권세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머리 된 사람의 권세를 등에 업고 더욱 자기를 드러내기 원하며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지요. 또한 욕심이나 사심이 있게 되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를 가로채기도 하고요.
이처럼 예전에는 자기 자신도 모르던 악이 막상 섬김 받는 위치에 올라 힘과 권세를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잠 27:21에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는 말씀도 있듯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연단하시는 방법도 각각 다른 것을 볼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오히려 칭찬이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도 모르던 교만이나 들레려는 마음을 발견하도록 하셔서 연단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지위가 더 올라간다고 해도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서 미세한 악의 모양이라도 발견하여 버려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제 더 이상 사심이나 욕심 또는 교만이나 들레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칭찬을 받고 지위가 높아진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높아진 마음이 되지는 않지요.
바로 오늘 본문의 요셉도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가정의 총무가 되고 주인의 식료 외에는 모든 것을 위임받아 자기 주관 아래 두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가정의 총무가 되었다 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거나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지요.
또한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부를 축적한다거나 사사로이 일을 처리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요셉은 주인에게는 물론이고, 주변사람들에게도 더욱 인정받고 신뢰를 받을 수가 있게 되었지요.
성도 여러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하인의 신분으로 연단을 받아가면서 예전에 형들 앞에서 들레기 좋아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던 모습을 신속히 버려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특별히 어떤 악의 모양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이처럼 자신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자기 의와 틀을 발견하여 깨뜨려 나갈 때 신속히 영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지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더욱 좋고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이러한 연단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연단을 통해 장차 요셉을 쓰시려는 목적에 맞도록 그를 준비시켜 나가셨지요. 즉 요셉은 장차 애굽이라고 하는 거대한 나라의 총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총리라고 하는 자리가 그냥 세워 놓는다고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요. 나라의 돌아가는 사정이나 그 큰 나라 살림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전까지는 아버지 야곱 밑에만 있으면서 집안의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러한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아무런 아는 바도 없었지요. 그러니 이런 요셉을 곧바로 애굽의 총리로 세운다 해서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요셉을 보디발의 집의 가정 총무로 세우시고 집안의 모든 살림을 총괄하게 하시므로 요셉으로 하여금 한 집안의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그 원리를 터득하게 하신 것이지요. 보디발의 집안 살림도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기에 요셉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장차 애굽의 큰 살림도 꿰뚫어 보고 경영할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키운 것입니다.
또한 가정 총무로서 집안의 모든 일을 주관하다 보면 이런저런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되지요. 자기 아래에 부리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상대해야 하는 외부 사람들 중에서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겪어 보게 됩니다.
속이는 사람, 게으른 사람, 아첨하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을 겪어 보면서 요셉은 점차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도 가지게 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도 터득해 갔지요.
상대의 마음과 생각도 꿰뚫어 보며 각각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능력을 삼아 나갔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훈련과정이 있어야 만이 요셉이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부족됨이 없이 모든 일들을 처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머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루아침에 머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며 설령 준비 없이 머리가 되었다 해도 머리 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훈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육의 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랜 세월 훈련과 교육, 경험 등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게 되지요. 이는 주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떤 사람에게 커다란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훈련 과정을 거치게 하시지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갖추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기까지는 오랜 인내의 세월이 필요했지요. 어느 날 갑자기 모세를 불러서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자랄 수 있도록 역사하셔서 그가 왕자로 자라면서 지도자로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게 하셨지요. 그렇게 40년 동안이나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모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40년 동안이나 더 연단하시지요. 만약 모세를 40세 때 부르셨다면 모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적인 능력과 방법에 의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육적인 능력과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머리 된 자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육적으로 아무리 똑똑하고 일은 잘한다 해도 사람 하나 품지 못하는 마음 그릇이라면 그는 머리로서의 자격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후로 40년간의 연단의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죽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죽어지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지요. 이제는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해서 그 지식과 방법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도자로서의 필요한 자질과 능력은 충분히 갖추게 하시면서도 그것이 결코 자기적인 것이 되지 않고 오직 주 안에서 쓰여질 수 있도록 80년이라는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리셨지요.
또한 모세는 이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사람이 되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고 갈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란 무엇보다도 덕과 사랑이 넘치는 온유함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러한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불러 출애굽의 사명을 맡겨 주신 것이지요.
이처럼 지도자란 영육 간에 합당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주 안에서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머리가 되기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지요.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머리로 세우시기 위해서는 그만한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면서 많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도 접해 보고 이런저런 일들도 경험해 보도록 하시지요. 영육 간에 준비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육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자신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지요. 물론 영적인 준비가 우선이고 중요하지만 그렇다 하여 육적인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되면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제한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차원의 공의와 질서에도 맞아야 하기 때문에 육적인 준비도 필요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해외선교 업무를 담당하는 일꾼이 영적으로만 뛰어나다고 해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도 능숙히 익혀야 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해외선교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육적인 자질과 능력도 갖추어야 더 크게 쓰임 받을 수가 있지요.
만약 영적인 분야만 뛰어나다면 그런 사람은 해외선교 업무가 아니라 오히려 주의 종으로 가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주의 종은 영적인 분야만 뛰어나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물론 주의 종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오직 위로부터 능력을 끌어내리는 것이 첫째이지만 주의 종으로서 다양한 부류의 양 떼들을 갈무리 하려면 때로는 육적인 분야도 알아야 하지요. 그렇다고 주의 종이 육적인 분야를 익히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분야는 아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이 점점 더 머리가 되어 간다면 육적인 분야도 뒷받침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주의 종은 첫째가 영적인 분야이기에 그것이 먼저 준비되어야 진정한 주의 종으로서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의 종이 영적인 분야는 소홀히 한 채 육적인 분야에 대해서만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될 수는 없지요.
그러므로 각각 쓰임 받는 분야에 따라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분야에서든지 영육 간에 잘 갖추어 주고 준비가 되어야 더 크게 쓰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요셉도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아셨기 때문에 이처럼 요셉에게 필요한 연단의 과정을 하나하나 인도해 가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그 집안 살림에 대해 모든 것을 터득한 후에는 요셉으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육으로 볼 때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것이었지만, 요셉은 오히려 그 일을 통해 애굽의 총리로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지요. 일반 죄수나 흉악범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왕의 죄수들만 가두는 감옥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요셉은 그곳에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지식과 경험들을 쌓게 됩니다.
왕의 죄수라면 당연히 애굽의 최고 고위층에 속했던 사람들이니 요셉은 그들을 통해 나라 전반에 대한 것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터득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정치가 어떤 것이고, 정치 세계에는 어떤 권모술수와 궤계가 있는지 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등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산지식을 배워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요셉은 왕의 죄수들만 있는 감옥에 들어가야 했지요.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충실하게 사명을 감당하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감옥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길을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한 가지 시험을 허락하시지요. 이것이 육적으로는 요셉으로 하여금 감옥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가 되지만, 영적으로는 요셉을 더 큰 축복 가운데로 이끄시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디발의 아내로 하여금 요셉을 유혹하게 하신 것이지요. 요셉은 이 시험을 통해 육적으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시험을 잘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서 크게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고, 더 큰 축복의 길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을 잘 통과했을 때는 거기에 반드시 축복이 따른다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지요.
그 축복이 때로는 영적인 축복으로, 때로는 육적인 축복으로 올 수도 있지만, 영적인 축복으로 왔다면 그 후에는 결국 육적인 축복도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요셉에게 어떤 시험이 찾아왔고 또 요셉이 그 시험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7절에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했는데, 6절 후반절에 말씀한 대로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지요.
보디발의 처는 바로 이러한 요셉의 육적인 외모에 이끌려 요셉을 유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요셉의 외모를 보고 안목의 정욕이 틈타니 이것이 육신의 정욕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요셉을 영적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고 단지 육체의 정욕을 위해 요셉과 동침하기를 청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범죄이지요. 오늘날도 얼마나 이러한 경우가 많습니까? 입술로는 “사랑한다. 우리 곧 결혼하자 내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들은 잘하지만 정작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지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그럴듯한 말로 상대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고 나면 이내 변해 버리는 냄새나고 썩어질 육이지요.
물론 당장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육은 결국 세월이 지나면 변하고 맙니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너무나 영적인 사랑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고 나면 이내 이기적이고 정욕적이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의 본색이 드러나고 말지요.
요셉은 바로 주인 보디발의 처가 자신을 유혹해 오는 것이 어떤 마음에서 그러는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 요셉에게 있어서 보디발의 처의 유혹은 거들떠 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지요.
이에 요셉은 8-9절에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치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했던 것입니다.
설령 아무도 지금의 상황을 보지 않았다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니 요셉은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결코 범죄할 수가 없었지요. 범죄할 마음조차도 없었던 것이고요.
성도 여러분, 요셉이 주인의 처의 유혹을 이처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신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하나님 앞에서 득죄할 마음조차 없었지요.
그런데 요셉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적인 도리로 볼 때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지요. 더욱이 자신을 믿고 신뢰하여 가정 총무의 자리까지 주었습니다. 그 집에서 요셉보다 큰 사람이 없었고 주인이 요셉에게는 아무것도 금하지 않았지요. 그 집안의 재물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금한 것은 보디발, 자신의 아내였지요. 보디발이 그렇게 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그런데 만약 요셉이 주인의 아내와 동침했다면 이는 요셉 자신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었고 또한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 준 주인의 은혜를 완전히 저버리는 배신행위입니다. 요셉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결코 이러한 악을 행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이런 요셉에게 주인의 처는 날마다 유혹을 해 옵니다. 하지만 요셉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지요. 10절에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말씀합니다.
여인이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해 왔지만 요셉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동침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않았다 했지요. 오해될 만한 상황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던 것이고 상대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범죄할 마음조차 없다면 바로 이러한 행함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입술로는 “안 된다”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도 은근히 바라며 범죄할 마음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어떤 상황이 되어 범죄하고 난 후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다” 하며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상황을 핑계 대거나 상대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가 중요하지요. 내 마음에서 정녕 범죄할 마음이 없다면 요셉처럼 조금의 여지라도 줄 수 있는 상황은 아예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마음이라면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와도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시게 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이처럼 요셉이 계속 거절을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보디발의 아내가 마음에 조금의 선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의 끈질긴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요셉을 보면서 도리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라도 뉘우치고 회개했을 텐데 그는 오히려 정욕에 더욱 불타서 그것이 더 큰 악의 모습으로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 37:3에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하신 말씀과 같이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의뢰하여 선을 행했고, 성실하게 사명을 감당하며 충성했습니다. 이런 요셉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비록 남의 집에 종으로 있다 해도 요셉은 늘 만사가 형통했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그런데 이런 요셉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음 시간에 설명이 되겠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빠져나올 길이 없는 깊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자신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 위해 조금의 부끄러운 행동이나 마음도 없었는데도 이처럼 억울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온 것이지요. 이런 경우 그 어려움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연단입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 육으로는 너무나 불통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결국은 요셉을 축복하는 길이었지요.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선으로 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만약 이때 감사하지 못했다면 그의 연단은 더 오래 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요셉은 벧전 2:19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에게 이런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선으로 바라보았지요.
그래서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해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자신을 발견하며 깨뜨리고 변화되어감으로 그릇 준비를 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13년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일 수 있는 영육 간의 준비를 잘 마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모든 것을 오직 감사함으로 받으시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연단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릇 준비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연단을 통해 요셉과 같이 신속히 자신의 의와 틀은 물론이고 세미한 악의 모양이라도 발견하여 버려나감으로 연단 중에라도 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2-06 오전 9:22:45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