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99)  [창39: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6.01.13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에게는 각기 다른 네 명의 아내로부터 얻은 열두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열두 명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로부터 얻은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하고 아꼈지요. 즉 요셉만을 편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은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편애를 받는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지요.
거기다가 요셉까지도 ‘자기 의’로 인해 형들로부터 미움 받을 행동을 하고 맙니다. 형들에게 어떤 과실이 있을 때 그것을 아버지에게 고했던 것이지요. 요셉 편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며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것이 결국 ‘자기 보기에 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형들의 행동이 고쳐진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형들과의 사이에 화평이 깨지며 형들로부터 미움까지 받게 되었지요.
물론 형들의 과실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의롭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상대의 과실을 깨우쳐줌에 있어서도 ‘자기 의’가 앞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상대의 입장도 생각해주면서 어떻게 하면 화평 가운데 상대를 깨우쳐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더 선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 자신은 늘 아버지로부터 가르침 받은 것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형들을 보면서 형들의 입장을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옳다’ 하는 자기 의가 앞섰던 것이지요.
또한 요셉은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아버지나 형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은 채 마치 자랑하듯이 그 내용을 말했습니다. 즉 장차 형제들은 물론이고 아버지까지도 자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지요.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영의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꿈의 내용을 들었을 때, 함께 기뻐해 줄 수도 있겠지만 요셉의 형들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설령 그 꿈의 내용이 맞다 해도 아랫사람으로서 아버지와 형들 앞에서 그러한 꿈의 내용을 말한다는 것은 심히도 민망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럼에도 요셉에게는 아직 들레려는 마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입장까지도 고려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이처럼 형들의 감정을 건드릴 일을 하고 맙니다. 형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미움을 받게 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믿음의 3단계 말엽에서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바로 이러한 자기적인 모습들을 발견하여 자기 의와 틀을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 자신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 자신은 전혀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하는 일들, ‘그런데 상대는 왜 이해를 못할까’ 하는 바로 이러한 일들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화평이 깨어지고 때로는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발견해야 하지요.
또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진리의 틀 안에 갇혀서 더 깊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므로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로 나오지 못한 채 답답하고 곤고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발견하여 깨뜨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적인 의와 틀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요. 요셉도 자신의 의를 쉽게 발견하여 깨뜨렸다면 형들과 더 이상 걸릴 것도 없이 화평을 좇을 수 있었겠지만, 요셉은 결국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연단을 맞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발견하는 계기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연단을 통해 요셉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영의 사람으로 나와지도록 하시기 위해 이와 같은 축복의 연단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자신의 의와 틀을 스스로가 잘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은 환경 가운데서 여러분이 연단을 받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단을 받아 나감에 있어서 사람마다 그 과정이 다른 것을 보게 되지요. 요셉과 같은 경우는 연단을 받아도 참으로 그 길이 형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너무나 험난한 고생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요셉의 연단은 결코 험한 길이 아니었지요. 흔히들 ‘연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대개 힘들고 험난한 과정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요셉에게는 범사에 형통한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연단을 어떻게 받고 계십니까? 또한 요셉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형통한 가운데 연단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강해를 통해 요셉이 어떻게 해서 그처럼 형통한 가운데 연단을 받아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깨우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요셉의 신앙을 오늘날의 여러분의 신앙과 비교하면서 말씀을 들으시면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점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믿음의 단계를 침노해 들어가는데 있어서도 많은 깨우침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3단계 말엽에서 4단계를 향해 들어오고 계시는 분들이나 4단계에서 5단계를 향해 들어오고 있는 분들에게는 지금부터 요셉이 겪게 되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실질적인 큰 도움이 될 것이고요.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의를 깨뜨렸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감사할 조건이 있음에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의 조건이 있으면 그래도 감사할 줄을 알지요.
기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는 일이지요. 세상 사람들도 기쁜 일이 있으면 웃고 즐거워하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 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라” 하십니다. 빌 4:4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했으며, 골 3:17에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런데 연단 중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사실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을 봅니다. 설령 겉으로는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사를 가진 사람은 쉽지 않은 것이지요.
특히 어떤 시험이나 환난이 자기 자신에게 닥쳤을 때는 더더욱 감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보게 되고요. 욥 1:1에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던 욥도 처음에 자신의 재산과 자녀들에게 재앙이 임했을 때는 그래도 입술을 지키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 자신에게 재앙이 임하자 그때는 그만 입술을 열어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에게까지 그렇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의 마음 깊은 속에 있던 본성 속의 악 즉 기(氣) 속의 악이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본성 속의 악까지도 깨닫고 발견하여 벗어 버리기를 원하셔서 이와 같은 연단을 허락하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환난 중에서 과연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절망하고 낙심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가’ 하며 원망하고 불평했을까요? 또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 보고자 반항하며 안간힘을 썼을까요?
요셉은 전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상황을 수긍하며 받아들였지요. 즉, 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닥쳤는지에 대해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부족된 모습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렇게 노예로 팔기까지 하는 형들을 보면서 ‘형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었는지’ ‘왜 자신을 이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 깨닫고 뼈 속 깊숙이까지 느끼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제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인간의 힘과 방법으로 애쓴다고 하여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았지요.
요셉은 이미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야곱이 어떻게 얍복강 앞에서 깨어졌고 자신을 죽이려던 형 에서와 화해하게 되었는지 모든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았지요.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을 푸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회피해 보려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요셉은 자신과 함께하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의 의가 남아 있는 요셉이었지만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고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자 노력하며 살았지요. 특별히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죄의 담을 쌓은 것도 아니었고 때를 좇아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이처럼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순종해 나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재앙이나 환난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못 미치는 행동을 했을 때 거기에 대해서는 사단의 송사거리가 되지만 자신의 믿음의 분량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한다 하여 그것으로 인해 사단의 송사를 받는 것은 아니지요.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하시기 위해 축복의 연단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힘과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어떤 죄의 담으로 인해 시험 환난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설령 연단 중에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연단을 허락하실 때도 그것이 어떤 죄로 인한 것이 아니며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연단이었기에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만은 해하지 못하도록 하셨지요. 그러니 욥이 정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러한 연단을 허락하신 이유를 깨달아 자신의 깊은 속의 악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버렸다면 그의 몸에 허락되었던 연단도 신속히 끝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것을 깨닫기까지 그의 기(氣) 속에 있던 악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확신이 있었기에 비록 육적으로는 험난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평안했지요.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도 낙심하고 좌절하여 살아갔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분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묵묵히 사명을 감당해 나갔던 것이고요.

자, 그렇다면 이러한 요셉과 비교하여 여러분은 연단 중에 과연 어떤 모습이셨습니까? 연단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했는지요? 아니면 연단을 피해보려고 이리 저리 안간힘을 쓰지는 않았습니까? 또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입술은 아니었나요? 연단 중에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니 마음이 평안하셨는지요? 아니면,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늘 근심과 걱정 가운데 살아가셨습니까? 또한 연단 중에라도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했나요? 아니면, 연단 받는 것이 힘들다 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도 놓은 채 주저앉아 있지는 않았습니까?
설령 예전에는 연단 중에 감사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며 사명도 소홀히 했던 모습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 영을 향해, 온 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때에 더 이상 그런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롬 12:12에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말씀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환난 중에 참으라는 것이 단순히 힘든 시간을 눌러 참으라는 뜻이 아니지요. 그냥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연단이 끝나고 축복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연단을 허락하셨을 때는 그것을 통해 여러분을 이끌기 원하시는 수준이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어떤 연단이 왔을 때는 자신에게 왜 이러한 연단이 왔는지 그 원인을 깨닫고 발견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며 승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이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연단을 받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들을 잘합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연단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연단 중에 얼마나 자신을 신속히 발견하고 인정하며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느냐가 연단의 기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연단을 받아도 오늘 본문의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연단을 받도록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 했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연단을 허락하신 목적이 특별히 어떤 큰 악이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여 버리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야곱 밑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들은 바를 마음에 명심하고 양식 삼았지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계명과 명령을 지켰으며 마음에 큰 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를 깨뜨리며 장차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쓰일 수 있는 큰 그릇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신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연단 중에라도 요셉을 외면하실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늘 함께하시며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육체의 일과 같은 큰 죄의 담으로 인해 오는 보응이나, 마음에 커다란 악의 모양이 있어서 그것을 빼내어 버리도록 허락하신 연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악이 많은 사람은 비록 육체의 일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그 연단이 참으로 힘든 것을 보게 되지요. 그렇게 철저히 홀로된 가운데 연단을 받아야만 단단히 굳어진 악이 깨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이 많은 사람은 연단 중에도 결국은 자기 악을 발함으로 인해 더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사람만 하나님께서 차별하여 연단 중에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악의 모양대로 연단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큰 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연단 중에도 악을 발하거나 불평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과 겸비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변함없이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요셉과 함께하시며 연단 중에도 형통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친히 인도하여 그를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도록 역사하셨고, 이내 보디발의 눈에도 띄게 하셨지요. 물론 요셉이 성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기는 했지만, 그 집안에 있는 많은 노예들 중에서 주인인 보디발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디발을 주관하여 요셉이 발탁되도록 하셨던 것이고, 요셉으로 하여금 주인 가까이에 거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지요. 본문에 요셉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말씀하신 것은 요셉이 그만큼 주인의 처소와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주인이 거하는 집이 있고 하인들이 거하는 처소가 따로 있기 마련인데, 요셉은 그중에서도 주인의 처소와 가장 가까운 곳에 거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연단 중에라도 어디를 가든지 인정받고 사랑받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상사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게 되는 것이지요. 가정에서는 물론이고요.
이는 바로 오늘 본문 3절에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반드시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되지요. 주변의 사람들도 바로 그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범사에 형통함을 입는 그 사람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 하여 요셉은 가만히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셉도 모든 면에서 주인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지요. 맡겨진 모든 일에 성실히 행했으며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섬길 줄 알았습니다. 또한 주인의 뜻에 맞추어 순종을 했고 결과 또한 주인의 마음에 들게 이루었지요.
그러면서 요셉은 주인 보디발에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방인인 보디발이 하나님에 대해 알 리가 없지요. 이런 보디발에게 요셉은 열심히 자신이 믿는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전했습니다. 자신이 이처럼 성실히 행하는 것도 자신의 말이나 모든 행동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은 것이며 범사에 자신을 형통케 하시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 때문임을 증거했지요.
처음에는 보디발도 이러한 요셉의 말을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요셉의 말이 늘 확실한 증거로 보장되며 모든 일에 늘 형통한 것을 보면서 보디발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변함없이 성실히 행하는 요셉의 모습과 그를 보장하여 나타나는 열매들을 보면서 보디발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요셉이 이처럼 하나님의 함께하심 가운데 형통하게 연단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에게는 그의 아버지 야곱을 닮아서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출 수 있는 지혜와 명철도 있었지요. 주인의 의중을 깨달았으면 그것을 명심하여 순종할 줄도 알았습니다. 맡은 일에는 반드시 열매를 내놓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사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오기 전까지는 아버지 야곱 밑에서 큰 고생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평소에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배우고 듣고 가르침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지요.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해서 성공했고 어떻게 해서 인정받게 되었는지를 얘기해 줄 때 요셉은 그 말들을 그냥 흘려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 명심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연단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야곱으로부터 들은 교훈에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룰 수가 있었지요.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증거해야 그 말에 신뢰가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외치며 말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증거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믿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섬기라, 사랑하라, 충성하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이런 말씀들을 자신도 행하면서 외쳐야 그 사람에게 신뢰가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신의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내 보여 주어야 그의 말이 참임을 믿을 수 있지요.
요셉은 연단 중에 있으면서도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연단 중에 낙망하고 좌절하여 원망이나 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주어진 삶을 살았다면 이런 결과는 결코 나올 수 없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약 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대로 믿음의 시련 즉 연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믿음으로 승리하셔서 어느 곳에 있든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마음껏 영광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삶에 더욱 넘치는 축복으로 함께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1-16 오전 9:17:34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다음 글 창세기 강해(200) 이전글
이전 글 2006년 기도제목(4)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