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가장 안전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을 때는 당장의 현실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했는데도 당장의 현실이 더 안 좋아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한 과정이지요. 이럴 때 결코 믿음이 흔들리거나 의심해서는 안 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하게 되면 반드시 축복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현실의 상황이 아무리 좋아 보이고 형통한 길인 것처럼 보인다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구나.’ 하며 무조건 그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도 반드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서 나가야 하지요. 형통해 보이는 그 길이 자칫 안목의 정욕에 이끌리는 것일 수 있고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것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지 못하고 성령의 주관을 밝히 받지 못하는 데에 있지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이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지...등 여러 가지 선택의 상황에서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지 못하면 참으로 난감한 경우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춰서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분별해 보아야겠지만,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는 정확한 분별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지요. 더욱이 진리 안에서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할지가 분별이 안 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고요.
이런 경우에 바로 자신보다 영적으로 앞선 사람을 찾아가서 대화나 상담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풀지 못하는 문제나 상황을 만났을 때, 누군가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주관을 받아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준다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구역장, 조장, 지역장, 교구장, 대교구장 그리고 기관장, 선교회장, 연합회장, 총연합회장, 지도교사, 총지도교사 이렇게 질서를 따라 조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질서를 좇아 영적인 신앙의 지도와 갈무리가 되어진다면 양떼들이 더 충만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의 아들 유다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인 결혼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아버지 야곱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던 것이지요.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아내를 정함에 있어서 야곱에게 상의를 했거나 야곱의 조언을 듣고 결정했다면,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집안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었겠지요.
물론 유다가 아버지 야곱과 결혼 문제를 놓고 상의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들어서 알았지요. 그럼에도 유다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머리로 아는 것과 믿고 순종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막상 자기 유익과 자기 정욕 앞에서는 결국 진리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약 2:19-20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말씀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믿지만 그렇다 하여 귀신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은 아니지요. 이런 것처럼 ‘믿는다’ 하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는 것일 뿐이며 그런 사람이 믿는다 하는 믿음도 헛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유다는 참 믿음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바르게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자기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고 말았지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때로는 양떼들 편에서 영적인 상담을 하고 싶고 영적인 지도를 받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상담을 하고 나면 오히려 더 답답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윗사람의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으로 인해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로 상담을 해 주는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믿음과 형편을 살펴서 마음에 쉼을 얻고 평안해질 수 있는 길로 상담을 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믿음과 입장에 맞추다 보니 상대에게는 짐을 지워주게 되고 말지요.
그렇다 하여 육적인 위로를 해주라거나 비진리와 타협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 했으니 진리 안에서, 어떻게 하면 양떼가 더 충만하고 행복하게 달려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서 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초신자나 새신자들 또는 믿음이 아직 연약한 양떼들이 신앙생활을 부담스럽고 힘들게 생각하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무서운 하나님으로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영적인 상담이 양떼에게 큰 영적성장을 주며 충만함 가운데로 이끌 수가 있는가 하면, 한 번의 육적인 상담이 양떼의 충만함을 떨어뜨리고 오히려 연단 가운데로 이끌 수도 있음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가 이처럼 자기 좋을 대로 결정하고 행동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육신의 생각대로 행동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나름대로는 좋은 것을 택한다고 했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잘못된 선택이었지요. 그런데 유다는 이후로도 번번이 육신의 생각 가운데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만 행동을 합니다.
장자 엘이 죽었을 때, 둘째 아들 오난에게 한마디 상의나 의견을 물어보는 것도 없이 형을 위해 형의 대를 잇게 하라고 말을 하지요.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둘째 오난의 당연한 의무였지만 비록 당연한 의무라 해도 충분히 대화하고 설명해서 자유 의지 가운데 자원하도록 하는 것과 일방적인 명령과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도록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그런데 유다는 둘째 오난에게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을 했던 것이고 이것이 오난으로 하여금 오히려 반발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유다의 육신의 생각은 계속되지요.
유다는 두 아들이 왜 갑자기 죽게 되었는지 그 영적인 이유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관습에 따라 이제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로 하여금 며느리 다말을 취하여 대를 잇게 하는 것에 있어서 멈칫하게 되었지요. 두 아들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면 셋째 셀라에게는 그러한 화가 임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삼가 주의를 시켰겠지만 깨달음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먼저 염려와 걱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혹여 두 아들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며느리 다말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면 그마저도 다말로 인해 죽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이러한 염려가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다는 다말에게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다가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면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계속될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을 것이고 하다못해 아버지 야곱에게 물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겠지만, 유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계산속에서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지요.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줄 마음이 전혀 없던 유다는 일단 며느리를 떠나보내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유다는 오직 며느리를 멀리 떠나보내려는 생각에 며느리의 입장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았지요. 다말에게 셋째 아들을 줄 마음이 없었다면 차라리 다말에게 자유를 주어, 다른 사람에게 재가할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 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적당히 그 상황만 모면하고자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해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고 말았지요.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유다와는 전혀 다르게 행했던 경우가 나오는데 바로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입니다. 이스라엘 여인인 나오미는 이방 모압 땅에서 남편과 장성한 두 아들을 잃고 말았지요. 모압 여인들인 두 며느리만 곁에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는 고향인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고, 두 며느리에게는 진심어린 말로 위로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지요. 자신의 두 아들이 다 죽은 상황에서 며느리들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할 수가 없으니 이제 더 이상 시어머니에 대한 의무감에 매어 있지 말고 새롭게 결혼하여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나오미가 자기 입장만을 생각했다면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지요. 홀로 남은 노년을 보내는 것보다야 두 며느리라도 곁에 있는 것이 훨씬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기 입장보다는 앞날이 창창한 며느리들의 입장을 생각했지요. 이 말을 듣고 큰 며느리 오르바는 마음 아파 울면서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끝내 시모를 떠나지 않고 시모의 고향인 이스라엘 땅까지 따라와 곁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며느리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던 나오미와 비교해 볼 때, 오늘 본문의 유다는 며느리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자기의 입장만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거짓말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후에도 셋째 아들이 장성하기까지 아무런 기별을 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아들이 장성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다말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이후에라도 며느리에게 길을 열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지요.
노년이 되면 의지할 자녀도 하나 없이 홀몸으로 살아야 할 며느리 다말은 유다의 기억 속에서조차도 사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을 때, 다말이 느낀 배신감은 참으로 컸지요. 자신에게 재가의 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고, 오직 시아버지의 말만 믿고 셀라가 장성하기만을 기다려왔는데, 이제 와서 셀라를 줄 마음이 없는 것을 알았을 때 그동안 자신이 속은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참고 보내온 지난 세월이 억울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라는 여인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지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더 이상 시아버지 유다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다말은 치밀한 계략을 세워서 자신의 살 길을 찾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교묘히 속여 유다를 통해 대를 잇는 것이었는데, 이는 육신의 생각 가운데 자기 욕심과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실제 그 속에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과 시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있었지요.
다말은 유다 집안의 큰 며느리로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면서까지 참고 인내하며 있었는데, 이제 와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유다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일종의 ‘오기’와 같은 마음도 있었지요. 그래서 결국 선하지 못한 방법을 좇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말과 룻의 선의 차이를 깨달아 보아야 합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다말과 룻은 비슷한 처지라 말할 수 있지요. 그런데 둘의 행동은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물론 유다와 나오미의 마음씀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말과 룻의 행동이 다르게 나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본 마음의 선이 달랐지요.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자신에게는 이방 땅인 이스라엘까지 옵니다. 이스라엘에 와서도 시어머니 봉양을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희생하며 헌신했지요. 이스라엘의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보아스를 만나 재가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유익이나 주장은 전혀 없이 오직 시어머니 나오미의 뜻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부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재건을 위해서 시어머니의 뜻을 전적으로 따랐던 것이지요. 이렇게 선한 마음이니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으며, 천국에서도 귀한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말은 그렇지를 못했지요. 다말의 입장에서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와 시아버지인 유다가 자신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기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여 다말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좀 더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대를 잇는 길이 열릴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어 유다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선이 있었다면 유다로 하여금 셀라를 며느리 다말에게 줄 마음이 생기도록 할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선의 지혜가 아닌 육의 지혜를 동원하여 육신의 생각 가운데 육의 방법을 동원해 갔습니다.
소돔 성을 탈출한 롯의 두 딸들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통해 대를 잇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두 딸이 아비 롯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들은 각각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지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민족으로서 선민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육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지요. 물론 다말은 이런 방법을 통해 유다 가문을 잇고 예수님의 계보에도 이름이 오를 수는 있었지만, 그가 받은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의 행함으로 인해 장차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성도 여러분, 유다가 약속대로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한 이후에 그를 다말에게 주었다면 본문과 같은 불행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거짓말이 이러한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유익과 욕심을 위해서는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거짓말을 합니다. 단지 그 상황만 모면해 보고자 하여 나중 일은 생각지도 않고 당장에만 거짓말과 속임수로 넘어가려고 하지요.
예를 들어 ‘나중에 해 줄게’, ‘다음에 보자’, ‘곧 연락할게’, ‘조금만 기다려’, ‘지금은 상황이 안 되니 상황 될 때 보자’ 이런 말들을 쉽게 합니다. 물론 나중에 자신이 한 말을 지키면 좋겠지만, 그 당시만 잠시 모면하려고 했던 말들이기에 나중에는 결국 지키지 않는 거짓말이 되기 쉽지요. 그러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는지조차 깨닫지를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의도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해도 이렇게 간단한 거짓말이 하나 둘씩 쌓이다보면 그런 사람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신뢰를 받을 수가 없지요.
시 15:4 후반절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말씀합니다. 마음에만 서원한 것이라도, 더욱이 그것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라도 일단 서원하고 마음에 정했으면 변치 않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물며 입술로 낸 것이라면 어찌해야겠습니까? 그런데 유다는 입술로 낸 말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나 유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과 유익만을 생각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었지요. 그것이 결국은 며느리 다말로 하여금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육의 방법으로 나오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다말은 나름대로 육의 지혜가 있는 여인이었기에 일을 계획함에 있어서 아주 섬세하고 치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잉태하게 되면 분명히 부정한 행동을 했다고 오해받을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삼겹줄의 조치를 취해 놓았지요.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도장과 끈과 지팡이 이렇게 세 가지 물건을 받아 놓음으로써 결코 유다가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던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육의 지혜이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 때도 바로 이러한 지혜와 치밀함은 필요하지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선하다고 하여 무조건 속고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까지 파악하고 주변의 모든 상황을 주관받아서 조금의 실수나 손해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 10:16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하셨지요. 물론 뱀같이 지혜롭다는 것이 결코 육의 지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결되었을 때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의 지혜를 받으라는 의미이지요. 그랬을 때 설령 이리 떼 가운데 놓인 양 같은 처지라 해도 능히 상대를 영적으로 압도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를 통해 형성된 유다 지파의 계보를 따라 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육적인 계보이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께서 나실 유다 지파의 조상 유다에게 오늘 본문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얼마든지 더 정결하고 순결하며 선한 사람들만을 택해서 그들의 계보를 통해 예수님께서 나오시도록 하실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만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모습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도 모두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모든 인류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입니다. 막 2:17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선한 사람만 택하여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는 금그릇도 들어있고, 은그릇도 들어있으며, 질그릇도 들어 있지요. 그것도 처음부터 깨끗한 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들어와 맑은 물로 씻어 점점 깨끗해지는 만큼 더 존귀하게 쓰임받아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유다의 계보를 통해 예수님께서 나신 것만 보아도,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나서…’라는 이런 변명과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더욱이 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므로 자신을 낱낱이 해부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 있으니 얼마든지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쓰임받는 깨끗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은 창세기 강해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신앙에 대해 서로 비교해 가며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변화되기 이전의 야곱과 변화된 이후의 야곱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지요. 얍복강 앞에서 철저히 깨어지는 야곱에 대해 들으시면서 여러분도 대부분 ‘나도 야곱과 같이 자기를 철저히 깨트리고 부서져서 지렁이 같은 야곱처럼 되어야지.’ 이렇게 다짐하고 결단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기관장 교육을 통해 자기 의와 틀을 깨트리고 어떻게든 영으로 들어갈 것을 마음에 다지고 또 다지셨을 것이고요. 그 다짐과 결단이 변치 않으시기 바랍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영이기에, 변치 않는 마음으로 행해 나갈 때 그것이 곧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2005년도에도 온 영의 흐름을 주셨지만, 2006년도에는 더더욱 확연하게 온 영의 흐름이 드러날 텐데, 여러분 중에는 한분도 낙오됨이 없이 모두가 온 영의 흐름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가 마음껏 드러나는 2006년도에 모두가 각자의 맡은 위치에서 주인공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2-19 오전 9:08:52 Posted
2015-11-03 오후 5:54:3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