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는 창세기 38장 전체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에 이어 요셉의 일대기가 나오던 중에 38장에서는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가 중단되고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가정사가 서술되고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왜 갑자기 유다 집안의 복잡하고 불행한 가정사가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안에서 각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얻게 하시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 경작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하여서 깨닫게 하시려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사랑과 공의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시며, 완벽하게 그 섭리를 이루어 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 태어날 것을 아시며, 이러한 예지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온전히 이루어 가시지요. 선한 사람을 들어 선한 도구로 쓰실 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이 어떻게 나와질 것도 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고려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역할을 정해서 “너는 선한 도구로 쓰임받아라” 혹은 “너는 악하게 쓰임받아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열어 주시지만 사람 편에서 자유 의지 가운데 자신의 길을 택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과 결과를 아시므로 그에 맞춰 모든 것을 섭리해 두시고 또한 각 사람의 그릇에 맞게 사용하실 뿐이지요. 그러니 사람 편에서 “나는 원래부터 이런 그릇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 하며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계보가 어떤 사람들을 통해 이어졌는지를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인간 경작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날 배경을 미리부터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어 가셨지요. 그런데 야곱에서 다음 대로 이어지는 계보가 야곱의 아들들 중에 가장 선하고 합한 요셉을 통해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유다를 통해 계보가 이어지면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시지요. 오직 아브라함의 씨로써 얻은 아들 이삭을 통해 계보를 이으셨고 야곱과 에서 중에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당연히 요셉과 같은 선한 중심을 가진 사람을 통해 계보를 이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큰 사명 즉,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족속이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지요. 이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오직 요셉의 선한 마음과 그릇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사명이었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것은 야곱의 아들들 중에 유다를 통해 이루어지지요.
그런데 유다 이후의 후손들을 보아도 그 마음과 중심이 천차만별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들이라 해도 마음과 중심과 그릇이 다 각각이지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저주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선하지만 자녀는 조상의 악한 기를 타고날 수도 있고, 반대로 악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가 그 조상의 선한 기를 타고 태어나기도 하지요. 또한 태어나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고요.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며 교차되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 무수한 인생들 중에서도 그때 그때마다 비교적 선한 사람들과 합당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구세주의 계보를 이어 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다를 놓고 볼 때,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과 비교하면 계보를 잇기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는 요셉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나은 마음을 가졌지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때 유다는 그를 죽이지는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다는 자신의 허물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숨기거나 모면해 보려 하지 않았지요.
26절에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며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인합니다. 타고난 중심이나 그릇이 탁월하다고 할 수 없고 마음에 악도 많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사람의 도리를 좇고자 하는 일말의 선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 하여 조상의 기를 받고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으로 나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형식적인 계보를 이어감에 있어서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나마 선한 자들을 택하시고 목적에 맞는 사람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과 같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이 성결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계획해 놓으셨지요. 그래서 여러분 각자의 중심과 그릇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들어 쓰시는데 이때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이렇게 작은 그릇을 타고 났으니까 내 중심은 이것밖에 안 되니까’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정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아버지 앞에서 선을 이루고자 달려왔는지, 또, 선한 도구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지 이것이 중요하지요. 그것에 따라 여러분도 얼마든지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선한 도구로 귀하게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는 38장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는 일찍 자식들도 잃고 자신도 큰 수치를 당해야 했는데, 이는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에게 어떤 보응이 임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샘플로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을 때, 그리고 악을 버리지 않고 계속 쌓아갔을 때, 그것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유다가 비록 요셉의 목숨만은 살리자고 했지만, 그도 역시 요셉을 팔아넘기는 큰 악에 동참했기에 아들을 둘씩이나 잃게 되는 보응이 임했던 것을 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단지 요셉을 팔았다는 것 외에도 그가 가진 악들이 쌓여온 결과였으며 죽은 아들들 역시 그러한 보응을 받을만한 커다란 악들을 계속 쌓아온 결과이지요.
그것은 유다와 유다의 아들들이 야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듣고 배워서 알기는 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받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를 좇아 제사를 드리기도 하며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에 악을 버리지는 않았고 자기 생각에 맞춰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지요. 그랬기 때문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했던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이 집안에 틈탈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와 그로부터 비롯된 많은 악들을 행하게 되지요.
바로 유다의 아들들도 하나님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이처럼 점점 이방 풍속과 그들의 죄악에 함께 빠져들어 가면서도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 유다를 통해서도 신실한 신앙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아비의 가르침 역시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빠르게 악에 악을 쌓아갔고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선을 넘으므로 장자 엘의 경우는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갑작스런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 중에 유다나 그 아들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사랑하고 남을 속이며 거짓말하고 간음하며 미워하고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계명은 마치 액자 속에 걸어 놓는 장식품처럼 생각하고 있지요. 아무리 주일날 예배에 나가고 교회에서 많은 활동을 한다 해도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악의 낙을 누리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라야 그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실을 수없이 강조합니다. 잠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했고, 요 14:15에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지요. 요일 2:3-4에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였던 다윗조차도 그가 잠시 진리를 떠나 죄 가운데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삼하 12:10에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다윗에게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동안 마음 다해 하나님을 섬겨왔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해 왔다고 했지만, 이런 다윗도 범죄했을 때는 “하나님을 업신여겼다” 하신 것이지요.
물론 다윗은 즉시로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므로 다시 은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결코 흘려버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악을 행할 때는 하나님께서 “너는 나를 업신여겼다”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녕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악에서 떠나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음으로 여러분이 유다와 그 아들들을 통해 깨달아야 할 점은, 진리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자신은 행하지 않으면서 가르치기만 할 때는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생명을 심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진리를 유창하게 말한다 해도 자신이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말에는 영적인 권세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지요. 물론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대의 말이 진리라면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듣고 순종해서 행해야 합니다. “자기는 행하지도 않으면서” 하며 흘려버려서는 안 되지요. 마 23:3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하셨지요.
이와 더불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 5:19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자신이 행하면서 말씀을 가르칠 때만이 그 말씀 자체가 검이 되어 상대의 혼과 영과 및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어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가르침 받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악한 심령도 깨어지고 회개하여 돌이켜서 결국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게 되지요. 그러니 이런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녀를 교육할 때는 물론이고 주일학교 교사든, 기관장이든, 구역장이든, 아무리 작은 사명을 맡았다 할지라도 자신이 먼저 진리대로 행하면서 가르칠 때라야 맡은 영혼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도 설명했던 것처럼, 유다는 자녀들을 대함에 있어서 상대의 입장을 살피고 화평을 좇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려는 편이었습니다. 큰 아들 엘이 죽었을 때도 둘째 아들인 오난에게 형에 대한 도리를 다하도록 권면해 보거나 의사를 물어본 것이 아니었지요. 물론 당시의 관습이 그렇기는 했지만 유다는 아들 오난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다의 행동 뒤에는 그가 자라온 환경 가운데서 받은 피해 의식과 장자에 대한 강한 집착이 깔려 있었지요.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장남인 르우벤이나 다른 장성한 아들들을 제쳐두고 어린 요셉을 편애하여 그에게 장자권까지 물려주려 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유다에게는 마음 깊이 박혀 있었기에 자신은 반드시 장자를 통해 대를 잇게 하려는 마음이 더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장자 엘이 죽었을 때도 둘째 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형수를 취하여 대신 장자 엘의 대를 잇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마음이 둘째 오난에게는 오히려 일방적으로 억누르는 듯한 독단적인 행동으로 나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둘째 아들 오난도 이런 아버지의 뜻에 고분고분 순종해 준 것이 아니라 반발하려는 마음과 함께 자기 욕심과 악을 좇아 행동하고 말았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못 이겨 형수와 동침하기는 했지만, 형수 다말이 형의 대를 이을 아들을 잉태하지 못하도록 속임수를 쓰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렇게 한 데에는, 형의 후사가 없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장자권이 넘어오리라는 계산이 있었지요. 그렇지 않아도 오난은 형인 엘과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 앞에 악에 악을 쌓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런 오난이, 이처럼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고 형에 대한 도리마저도 저버리게 되자, 그는 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생명이 끊어져 버리게 되지요.
성도 여러분, 유다와 오난, 이 두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자면 사실 두 사람 모두 잘못이 있습니다. 유다는 아비로서 자녀의 의중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지시하고자 했으니 잘못이고, 오난은 그런 아비에게 반발하여 뜻을 거슬러 나갔으니 잘못이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굳이 잘못의 경중(輕重)을 따지자면 아들 오난의 잘못이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가정의 머리라는 입장에서 가정의 질서를 바로 세워 가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지, 다른 어떤 악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방법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유다 자신의 유익이나 욕심을 좇아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오난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자신이 장자권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인해 노골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악을 행해 나갔지요. 오난이 만약 조금만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선으로 이해하려 했다면 최소한 죽임이라는 저주만은 모면할 수 있었을 텐데 오난에게는 그만한 선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가치관이나 의견의 차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충돌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부서의 머리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늘 지시하고 명령하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편이라고 합시다. 더 나은 방법이나 의견이 있을 때도 다른 사람의 의견들을 무시하고 본인의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대로만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랫사람도 진리를 들어서 알기 때문에 윗분의 이러한 모습에 걸림이 됩니다. “진리는 화평 가운데 상대의 의견도 존중하는 것인데 저렇게 남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독단적으로만 하시네.” 하면서 불만을 품기도 하지요. 물론 아무리 윗분이라도 명백한 비진리를 명하며 범죄하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절대로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한 상황에서 윗분이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한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설령 내가 더 좋은 의견을 갖고 있다 해도 일단은 질서상 마음을 모아 순종하여 먼저 화평을 좇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아는 진리로 인해 윗사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여기저기에 그의 허물을 말한다거나, 윗분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하시겠는지요? 물론 윗사람도 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랫사람에게 더 악하다고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진리로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방법과 내 생각대로 상대와 부딪힌다면 이것은 결코 진리가 아님을 알아야 하지요. 더구나 상대가 질서상 윗사람일 때는 아랫사람 편에 더 악이 많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선을 좇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선한 마음을 보시고 상대를 주관해서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수가 있지요. 그렇지 않고 자신의 의 가운데 육의 방법을 좇게 되면 오히려 상황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상대와의 관계도 더 악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화평의 열매가 무엇인지 기억하시는지요?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더불어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마음이며, 내 믿음과 입장에만 맞추지 않고 상대의 믿음과 입장에 맞춰줄 수 있으므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설령 내가 옳다 할지라도 나를 주장하지 않고 상대에게 맞춰줄 수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아 은혜를 끼치는 마음이지요. 또한 나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고 사람에게 걸림이 되지 않으며 언행에 편벽됨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이러한 화평의 열매 하나만 맺혔다고 해도 가정이든 직장이든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얼마나 행복하고 사랑이 넘쳐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나 자기 의와 아집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소리 나며 화평을 깨뜨리는 모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신속히 뽑아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범사에 헤아려 선을 좇을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유다와 다말의 모습을 나오미와 룻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이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이 일을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있다면 참 쉽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쓰고 방법도 자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하며 모든 것을 자기 계획대로만 할 수 있다면 일이 너무나 쉽게 될 것 같지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이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지요.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설령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르게 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떤 일을 아무 잡음 없이 이루었다 해도 그것을 화평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변과 얼마나 화평을 이루셨습니까? 여러분의 권세 앞에 눌려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못하고 있는 것을 혹시 화평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지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부딪히기 싫어서 모두 여러분의 뜻을 따라주는 것인데도 혹시 자신은 화평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을 따르는 사람과는 화평하지만 따르지 않는 사람과는 불편하면서도, ‘저 사람이 악해서 그래.’ 하며 상대의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는지요? ‘참된 화평’이란 ‘진리 안에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평은 내 의와 틀을 비롯하여 ‘자기’가 철저히 깨어졌을 때 이룰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 죽어져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참된 아들과 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2-11 오후 9:40:11 Posted
2015-11-03 오후 5:54:3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