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분야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중심이 다르며 마음과 그릇도 다른 것을 봅니다. 물론 중심이나 마음이나 그릇은 부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태어나지만 같은 부모로부터 기를 받고 태어나도 자녀들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잉태할 당시의 상황과 태중에 있을 때의 환경 등이 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또한 태어나 자라면서 마음을 어떻게 써왔고 스스로가 그릇됨을 어떻게 만들어 왔느냐에 따라서도 중심과 마음과 그릇에 많은 차이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형제들 안에서도 그중에는 특별히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저 사람이 한 형제인가’ 싶을 정도로 선하지 못한 사람이 있기도 하지요.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만 비교해 보아도 둘의 중심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달랐습니다. 거기다가 태어나서 자라난 환경과 각각에게 주어진 연단의 과정을 어떻게 통과했느냐에 따라 결국 한 사람은 (즉, 야곱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지만 다른 한 사람 (즉, 에서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이방 민족의 조상이 되고 맙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이처럼 큰 차이가 나더라는 사실입니다.
하물며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야곱이 각각 다른 네 명의 아내들로부터 얻은 아들들이었지요. 그것도 네 여인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이 아니라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가운데서 잉태되고 태어나 자랐습니다. 결코 평안하고 행복한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어려서부터 늘 서로 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것이지요. 그러니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각각의 중심과 마음과 그릇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서로 하나 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를 해치려는 데 있어서는 하나 되었던 것을 봅니다.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니 이처럼 마음이 하나 되어 악한 일을 도모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잠 1:16에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발은 악을 향해 갈 뿐이며 악을 행하는 일에는 신속히 하나 되어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늘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귀가 여러분의 입이 여러분의 손과 발이 또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혹여 악한 일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는가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시 1:1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말씀처럼 여러분이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떠나야 만이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악을 행하는 일에 마음이 하나 되어 빠르게 움직였던 것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장자 르우벤과 유다는 요셉의 목숨만은 살려보려고 했습니다. 그들도 결코 선한 마음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조금의 선은 있었기에 차마 자신들의 동생이며 골육인 요셉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요셉은 르우벤과 유다로 인해 목숨은 건졌지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때를 따라 야곱과 함께 제사도 드렸을 것이고 야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해 들었지요. 약속하신 바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똑같이 가르침을 받았어도 그것을 받는 아들들의 마음은 각기 달랐지요. 그러니 각각의 신앙도 달랐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비록 연단 중에라도 늘 하나님을 경외했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의 신앙은 그렇지 못했지요.
그들의 신앙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창 38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유다 한 사람에 대한 내용 같지만 이것이 결국은 요셉의 다른 형들의 신앙 역시 어떠했는지를 나타내주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전체 내용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듯 보입니다. 요셉에 대한 내용이 한창 진행 중이다가 이처럼 갑자기 유다에 대한 내용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좀 이상할 수 있지요. 그러나 본문 창 38장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장면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며 하나님의 선민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 사건은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게 되는 데에 있어서도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내용은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사역에 대한 예표이지요.
죄악 가운데서 원수 마귀 사단의 종노릇하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어둠에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인 빛 가운데 살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이 요셉 개인적으로는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한 연단의 시작이지만 영적으로는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시작점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유다에 대한 내용을 등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 5:5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말씀하지요. 곧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께서 유대 지파 (즉,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미 5:2에도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하여 메시아가 유다 족속 중에서 나올 것을 예언하셨지요.
그러므로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유다를 통해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졌던 것입니다. 물론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에게 육적인 혈통이 있을 수도 없지만 예수님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육적인 계보가 필요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에 따라 유다 지파 중에서 나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확실히 증명했던 것이고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와 관련된 사건은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불행한 과거사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담긴 영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 엘, 오난, 셀이라는 세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유다는 장자 엘을 위해 다말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취하게 하는데 엘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지요.
엘의 죽음에 대해 오늘 본문에는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했습니다. 그렇다 하여 혹여 이 말씀을 오해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는구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엘을 죽이셨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를 속이므로 결국 성령을 속이려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나 죽었던 것과 같은 경우이지요. 엘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니 그 자리에서 순간에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지요. 대부분은 죄가 쌓여 어느 한계를 넘게 되면 공의 가운데 그 사람에게 닥친 재앙이나 사고로부터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수 없으므로 죽게 됩니다. 그러니 엘이 이처럼 저주로 인해 순간에 죽임 당했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을 쌓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엘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엘의 동생 오난이 형수 다말을 취하게 되지요.
이러한 풍습은 계대결혼(繼代結婚) 제도 (계대: 대를 이음)또는 형사취수 제도라고 불립니다. (형사취수: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함) 여기서 계대결혼 혹은 형사취수 제도가 무엇인지 잠깐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문과 혈통의 존속을 존중했던 고대 문화권에서는 후사 없이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주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자식 없이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가족과 이름을 보존케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죽은 사람의 형제들은 긍휼과 희생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의무를 준수해야 했습니다.
이 제도는 훗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도 명시가 되어 있지요. 신 25:5-6에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죽은 사람의 형제가 이러한 의무를 거부할 때에는 대중 앞에서 심한 모욕을 받아야 했지요. 이에 대해 신 25:7-10에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예수님 당시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을 알 수 있지요. 마 22:25-28에 보면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했지요. 이는 당시에도 형제가 후사 없이 죽으면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후사를 잇고자 했음을 말해 줍니다.
성도 여러분, 이 제도를 자칫 오늘날의 시각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서 보면 좀 이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이 제도의 목적은 후사 없이 죽은 형제의 가문을 보존케 하려는 긍휼과 희생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혈연관계에 의해 민족들이 형성되어가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가문의 계승을 중요시하던 시대적 배경 등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생겨난 풍습이 선민이라는 강력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후대에 계속하여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고요.
그러니 장자 엘이 후사가 없이 죽은 상황에서 둘째 아들 오난은 형을 위해 후사를 이어야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난은 이를 거부하지요. 자신이 형수를 통해 낳은 아들이 어차피 자신의 씨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형수로 하여금 잉태치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셨다” 했지요. 이 내용 역시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난의 행동이 그렇게까지 악한 것인가’ 생각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악하다 하신 것은 단순히 오난의 행동 때문만이 아니지요. 성경은 오난이 이렇게 행동한 것이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는 목적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게 했을 때 결국 장자의 명분과 권한이 그 아들을 통해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지요.
형에게 후사가 없으면 둘째인 자신이 자연스럽게 장자로서의 명분과 권한을 가질 텐데 굳이 형수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장자권을 넘겨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긍휼과 희생의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장자권을 차지하려는 자기적인 욕심만 있었던 것이지요.
더욱이 당시의 인식으로는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것이 가장 큰 저주 중에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생 오난이 이처럼 형수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는 자신의 당연한 의무를 행치 않았던 것은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형제의 집안이 저주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든지 건져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는 처사였지요. 그러니 이를 통해 우리는 오난의 마음이 얼마나 선과는 거리가 멀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었기에 오난은 그동안에도 여호와 앞에 많은 악을 쌓아왔을 뿐만 아니라, 선한 마음으로 행해야할 자신의 의무마저도 저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오난은 자신의 형 엘과 마찬가지로 악에 대한 보응으로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당시의 풍습대로라면 셋째 아들 셀라로 하여 금형의 후사를 잇도록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영적인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단지 막내 셀라마저도 형들처럼 죽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며느리 다말로 하여금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라는 핑계를 대어 그의 아비의 집에 가서 있게 합니다.
다말에게 아들 셀라를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지요. 다말도 이를 알았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육으로 볼 때 참으로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을 계획하지요. 마침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로 올라온 시아버지 유다 앞에 창녀처럼 행세하며 나아가 그를 미혹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다말의 목적은 오직 후사를 잇기 위한 것이었는데, 마침내 그의 목적대로 잉태를 하게 되지요.
유다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있다가 석 달쯤 후 며느리 다말이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다말은 영락없이 행음한 여인이 되고 말았지요. 이에 유다는 당장 다말을 끌어다가 불태워 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말은 이미 이러한 사태가 올 것을 예감하고 피할 길을 예비해 두었지요. 자신의 잉태가 바로 시아버지인 유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창녀 행세를 하여 유다를 미혹할 때 그로부터 받아 놓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지요. 이러한 증거 앞에서 유다는 모든 정황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합니다. 그래서 다말은 마침내 무사히 잉태한 아이를 낳게 되는데 마침 아이가 쌍둥이였지요. 낳은 두 아들의 이름은 베레스와 세라였으며 그중에 베레스를 통해 유다의 가문은 대를 잇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계보에 다말과 그가 낳은 아들 베레스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어찌 보면 부도덕적이고 패륜적인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에 기록케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이러한 사건을 통해 대가 이어진 유다 족속을 통해 나신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고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의 아들들 즉 요셉의 형들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아내로 취한 여인은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사람의 딸이었지요. 아버지 야곱도 할아버지 이삭도 모두가 이방인이 아닌 여인을 아내로 얻기 위해 어떻게 했었는지에 대해 유다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다의 신앙으로는 이처럼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고 말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한 것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유다가 이방 여인을 통해 얻은 아들들 역시 그 신앙이 어떠했겠습니까? 신앙이 유지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이미 이방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을 통해서는 순수한 혈통과 민족성이 이어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이방 민족과의 통혼을 엄격히 금하신 것입니다. 자칫 이방민족이 섬기는 우상이나 그들의 잘못된 관습과 악행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파고들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 빛이라” 말씀하신 대로 저와 여러분은 당연히 세상에 나아가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알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과 세상에 물들고 세상을 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세상의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금 옛 사람의 구습과 그 행위를 좇는 세상 가운데로 빠져들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므로 세상에 눈 돌리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늘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의 모임에는 어떠한 세상적인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조금의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되지요. 하나, 둘 세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적인 것들이 깊숙이 들어와도 깨닫지를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고후 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하신 말씀처럼 육과 영이 더욱 확실히 나누어지고 있는 이때에 결코 어둠 가운데로 다시 빠지는 어리석은 모습이 결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처럼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취함에 있어서도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고 말지요.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는 아들 이삭을 위해 며느리를 맞음에 있어서도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며 맡겼던 것을 봅니다. 이방 여인이 아닌 자기 민족 가운데서 며느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종을 보내지요. 그리고 그 종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적이 리브가라는 여인을 만났던 것이고요.
그런데 유다는 자기 뜻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고 관철시켰습니다. 이처럼 유다는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취할 때도 자기 뜻대로 결정했던 것이며 그밖에 집안의 모든 일들도 자기 뜻에 따라 간섭하고 결정해 나갔지요.
오늘날에도 이러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본인은 상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뜻과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고 상대를 이끌어가려는 것이지요. 물론 그 결정이 성령의 주관하심 가운데 정확히 인도받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자기보기에 좋을 대로 정해서 이끌어 가려는 경우들이 많은 것입니다. 얼마든지 상대방과 상의할 수도 있고 함께 기도하여 성령의 주관과 인도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 입장에서만 보면 자신이 하는 것은 모두가 옳고 정당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과 맞지 않는 것은 모두가 그르고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요. 그러니 이런 상태로는 자신을 발견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 가운데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너무나 강한 자기 의 가운데 묻혀 살면서도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지요. 그러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저 사람은 의가 강하다’ 말하기도 합니다. 바로 금번 기관장 교육을 통해 이러한 자기적인 의와 틀들을 발견하고 깨뜨리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금번 교육을 통해 많은 분들이 신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2-05 오전 10:23:33 Posted
2015-11-03 오후 5:54:3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