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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95)  [창37:33-3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11.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들들이 가져온 피 묻은 채색 옷을 본 야곱은 그것이 요셉의 옷임을 알아보고는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며 애통합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요셉을 위해 애통했지요.
그런데 이것은 야곱이 아들들에게 속은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짐승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형들의 손에 의해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지요. 요셉의 형들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자 일부러 수염소를 죽여서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로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야곱으로 하여금 요셉이 짐승들에 의해 죽임 당한 것처럼 스스로가 생각도록 만들었던 것이지요. 이 속임수에 야곱은 넘어간 것이고요.
그처럼 지혜 있고 꾀 많은 야곱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들들에게 보기 좋게 속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 감정을 절제하고 조금만 침착하게 사건의 정황을 살폈다면 아들들에게 속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열 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똑같이 말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 만약 야곱이 침착하게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을 하나하나 물어 들어갔다고 하면 아들들의 거짓말을 눈치 챌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그러한 명철까지는 없었지요. 더욱이 지금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다는 슬픔으로 인해 자기감정을 절제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피 묻은 요셉의 옷만 보고서 이미 스스로가 단정을 내린 채 깊은 애통에 빠져들고 말았지요. 다른 아들들의 위로는 받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아들들은 이처럼 끝까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로 인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되지요. 또한 야곱은 지금,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나 죽겠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잃고, 그 사랑을 대신 쏟아 부었던 요셉마저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얼마나 슬펐는지는 이해가 되지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소망도 없고 삶의 낙도 없어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면에서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말이지요. 영적으로 봤을 때 야곱의 고백은 너무나 믿음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꿈과 비전은 실로 크고 놀라운 것이었지요.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야곱의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창 진행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야곱은 지금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그와 같이 중요한 사명마저 뒷전으로 한 채 “요셉을 따라 나도 죽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그의 믿음이 온전하다 하겠습니까?
야곱이 비록 얍복강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난 후, 이전과 비교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아직 부족한 모습들이 나오고 있지요. 평상시에는 가리워져 있었다 해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상황 즉 가장 힘든 상황이 되자 이처럼 자신의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은 전혀 달랐지요. 먼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과 자신의 개인적인 일과의 구분을 확실히 했고 그러면서 늘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 전에 이미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이삭이나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오직 이삭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의 곁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랬을 때 아브라함은 육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힘든 결정을 내리지요. 하갈과 이스마엘을 정처 없이 떠나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육적인 정에 얽매이지 않고 단호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결코 육적인 정이나 욕심 또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코 아브라함에게 정이 없거나 그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지요. 누구보다도 정이 많고 사랑이 많았지만 그것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는 전혀 별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정과 사랑으로 인해 혹여라도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조금의 지장도 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과 하나님의 일을 정확히 구분했고, 그러면서 늘 하나님이 가장 우선이요, 하나님의 뜻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영으로 들어가면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삶 자체가 온전히 주 안에서 드려지기에 입으나 먹으나 마시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게 되지요.
하지만 굳이 자기 개인에 관련된 일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된 일을 구분하고자 했을 때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 구분이 늘 분명했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일과 뜻이 우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갈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육적인 정과 욕심을 철저히 끊어버렸기 때문이지요.
‘내 가족이라 해서, 나와 혈연관계라 해서 나와 친하다고 해서,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바로 이러한 것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 앞에서는 결코 사심이나 육적인 감정 또는 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지요.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가족보다도 믿음의 형제, 자매를 더 생각하고 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 하여 육의 가족들에게는 잘해주면 안 된다거나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족이라 해서 육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어야 하며 가족이라 하여 우선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특히 주의 종이요, 양 떼를 맡은 사명자라고 하면 당연히 가족보다도 양 떼를 먼저 생각하고 마음 써야 하는 것이고요.
저는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후는 물론이지만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가족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첫째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가 늘 먼저였고 우선이었지요.
아브라함도 바로 이런 마음이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앞에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것이나 육적인 관계성을 철저히 배제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렇지를 못했기에 육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이처럼 자신의 사명이나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 슬픔과 감정이 앞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고 가는 짐이 무겁다 하여 그것을 벗어보겠다는 마음을 결코 갖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들이 있었지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언약의 말씀임과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보장해서 이루어 드려야할 사명이었지요. 공의의 법칙 상 이 언약의 말씀이 그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자신이 감당해야 할 앞으로의 과정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본교회에 세계선교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라는 큰 꿈과 비전의 말씀을 주셨지요. 그래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까지 믿음으로 이 말씀을 이루고자 달려왔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놀라운 축복의 언약이자, 동시에 저와 여러분이 이루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까지는 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처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장하여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신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육으로 생각할 때 참으로 크고 무거운 것이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굳이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보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통과해야할 필요도 없었지요. 사라가 죽은 후 새로 얻은 아내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아들들을 독립시켜서 멀리 동방으로 보낼 필요도 없었고요. 많은 자녀들과 함께 말년을 오순도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또한 아들 이삭을 통해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했지요. 그런데 야곱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야곱이 했던 그 입술의 고백과 행동을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놓았던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 너무나 부족한 모습이었지요.
예를 들어 만약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요셉을 연단시키기 위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해야겠다’고 하셨다면 야곱은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 같으면 무조건 ‘예’ 했겠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신앙으로 볼 때 야곱은 ‘예’ 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기쁨으로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러한 힘든 상황에 처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기쁨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 너무 크고 무겁다 하여 한 번도 그것을 ‘무겁다’, ‘힘들다’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저의 가족은 물론이고 제 개인적인 시간이나 개인적인 생활 등을 비롯한 사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버겁다’ 생각해 본적 없고 ‘이제는 그만 놓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지요.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생각한다면 어찌 제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라면 그토록 사모하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보다도 주님의 쓴 잔을 함께 마시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지요.
제가 피를 다 쏟고 숨을 거둔 순간 제가 주님 품에 안기는 쪽을 선택했다면 저는 얼마든지 새 예루살렘 영광중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선택하고 난 후에 우리 성도님들이 어떻게 될지를 주님께서 보여 주시자 저는 도저히 “지금 주님 품에 안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없었지요. “저를 다시 살려주시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주님 품에 안기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8, 99년도 연단 중에 육으로 보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저는 ‘너무 힘드니 이런 시험을 안 받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시험을 통과해 나왔을 때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이며, 이를 통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길이었기에 저는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요셉의 죽음으로 인해 이처럼 자신의 사명도 잊은 채 ‘죽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도 오히려 더 하지 못한 것을 죄송하고 민망해 하셨습니까? 아니면 수고하고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지만 ‘힘들다, 버겁다’ 하지는 않으셨는지요? 또는 ‘사명을 놓고 싶다’거나 사명주심을 감사하던 처음 마음을 잃지는 않으셨나요?
여러분의 신앙을 오늘 본문의 야곱의 신앙과 또한 아브라함의 신앙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그냥 평상시 여러분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그 상황에서 가졌던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입술의 고백과 비교해 보십시오. 평상시에는 가리워 있던 마음이 힘든 상황에서 드러나면서 그것이 입술로 나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 12:34절 후반절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는 말씀과 같이 여러분 입술의 고백이 결국은 여러분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나오는 여러분 입술의 고백 한 마디가 자신의 현재 이룬 만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여러분 자신도 모르고 있던 여러분의 깊은 속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도 모르고 있던 깊은 마음을 발견하고 깨달아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게 가장 적당한 환경과 조건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연단이지요. 연단이 없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없기에 여러분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맞는 연단의 과정들을 거치며 통과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관건은 ‘그 주어진 연단을 얼마나 신속히 통과하느냐’이지요. 주어진 연단을 통과하지 못하여 계속 같은 연단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통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야곱과 같이 한계에 부딪혀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연단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하여 신속히 무한한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들에 의해 미디안 사람에게 팔린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증거라 했지요. 사람이 억지로 이처럼 만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여 이와 같이 되어지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원한다고 해서 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허락하셨기에 이렇게 될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지금 당장의 현실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는, 이러한 어리석은 모습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 중심에서 변함없이 믿었기에 13년의 연단의 세월동안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지요.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꿈과 반대로 점점 더 잘못되어지는 상황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러한 현실의 상황이 요셉의 믿음을 흔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음에도 현실만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려 의심하고 결국 입술로 불평을 내어 놓으므로 주신 복을 차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온전히 믿고 맡겨드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조금의 의심이나 조금의 오해도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인도하심과 같이 친히 여러분의 삶의 인도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다음시간에는 창세기 38장을 살펴보겠습니다. 38장 전체를 미리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부 시간에 은사 집회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치료받기 위해 오신 분, 문제 해결받기 위해 오신 분, 여러 가지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기 위해 오신 분, 또한 은사를 사모하여 오신 분 등 많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떠한 경우든 이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없어야 하지요. 그러한 것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막힌 담을 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의 담을 헐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떤 드러나는 큰 허물이나 잘못이 있을 때는 그래도 그것을 발견하여 회개하기가 쉬운데, 어떤 분들은 왜 담이 되어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지요.
오늘은 바로 이와 같은 분야에 대해 여러분 자신을 조명해 보고 발견하여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입술로 내었던 말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되어 있는 것들은 깨닫기가 쉽지 않은 것을 봅니다. 예전에 자기가 말로 어떤 범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 보니 막힌 담을 허물지 못하고 여전히 응답받지 못한 채 자신도 답답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주셨음에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이내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입술은 아니었는지요? 현실을 바라봄으로 믿음 없는 고백을 하거나 의심하는 말을 내지는 않았습니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때로는 힘들고 버겁다 하며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한 적은 없으신가요?
또한 여러분이 육적인 정과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일이 먼저가 아니라 오히려 뒤로 한 적은 없었는지도 스스로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내 일이 먼저요, 내 가족의 일이 먼저였다면 이 역시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것이지요. 눅 9:6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셨는데 특히 주의 종이나 사명자들에게 이처럼 정과 욕심에 이끌려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있었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모습입니다.
또한 사사로운 개인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 못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를 끼친다거나 하나님 앞에 돌려져야 할 것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있었다면 이것에 대해서도 철저히 회개해야 하지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친분, 또는 육적인 정으로 인해 공평하지 못한 처사가 있었다면 이에 대해서도 깨달아 회개해야 합니다.
이밖에도 여러분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많은 말과 행동들이 하나님 앞에 담이 되어 있는 경우들도 있지요. 물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어떤 분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믿음이 있고 그만한 위치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라면 의미 없이 내었던 작은 말 하나라도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을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불평이라 생각 안하고 한 말이 하나님 앞에 불평이 될 수도 있고, 의심한다고 생각 안하고 한 말이 의심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말도 결국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나오기 때문에 ‘나는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만약 여러분 중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분이 있다면 깨닫고 회개하여 막힌 담을 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치료받고 문제해결 받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으며, 축복의 문 또한 활짝 열릴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1-27 오후 10:34:07 Posted
2015-11-03 오후 5:53:3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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