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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94)  [창37:23-3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1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자기 마음에 어떤 결심을 굳힌 사람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듣는다 해도 겉으로만 듣는 척하지요. 속으로는 자기 입장이 서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계속 말을 해 보았자 변론만 하게 될 뿐이고, 그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에 있는 대로 행하고 말지요. 또한 사람이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감정에 치우치다 보면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권면을 해도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고 말지요.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결심을 굳히기까지도 심사숙고를 하게 되지만 일단 어떤 결정을 내렸다 해도 결코 주변의 말을 소홀히 넘기지 않지요. 그래서 자신의 결정이 ‘아니다’ 싶으면 이내 마음을 돌이키는 것도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번 결정한 것은 결코 변개할 수 없다’며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는 경우도 많지요.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도 동생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는 감정이 앞서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그처럼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큰 패배를 당하고 말지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사람이 한번 마음에 정한 바를 변개치 않고 행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리 안에서 가(可)한 것이지요. 자신의 결정이 진리를 벗어난 것이었다면 그것을 한시라도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또한 항상 ‘내가 옳다’ 할 것이 아니라,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들어서 그것이 진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자신의 뜻을 접고 그 말에 따라야 하지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고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상대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행해버리는 경우도 많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편입니까? 또 얼마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지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줄 알고 상대방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약 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말이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멀리서 오는 요셉을 보고 그동안에 쌓인 감정으로 인해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자마자 그의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원래 계획은 요셉을 죽여서 구덩이에 던져 넣으려는 것이었으나, 장자 르우벤의 말을 듣고 그냥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이었지요. 그렇다 하여 이처럼 산채로 구덩이에 던진 것이 요셉을 살려주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벗겨서 구덩이에 던져 넣어두면 어차피 얼마 못가서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굳이 자신들의 손에 피를 안 묻혀도 요셉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는데 ‘그 구덩이는 빈 것이었고 그 속에는 물이 없었다’ 했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의 목숨을 보존시키시려고 간섭해 주신 증거라 했지요.
만약 구덩이 속에 사나운 짐승이나 전갈, 뱀과 같은 것이 있었다면 요셉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물이 차 있었다고 하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빠져 죽을 만큼의 물은 없었다 해도 벗은 몸으로 물에 잠겨있게 되면 그 지역의 기후 특성상 오래 버틸 수가 없지요. 밤이 되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도 벗은 채로 물에 잠겨 있게 되면 체온이 떨어지면서 죽음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던져진 구덩이는 다행히 비어 있었고 물도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 편에서 죽일 마음이 있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니 이처럼 피할 길을 얻어 지킴 받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요셉을 마음에 품으시고 그를 연단하여 쓰시고자 섭리하셨기에 요셉이 죽도록 놔두실 리가 없지요.
그래서 요셉의 목숨을 지키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진행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연단의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지를 아시기에 그 과정에 필요한 상황들을 하나 하나 섭리해 가셨지요.

이어지는 25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해 가시는지가 더욱 확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했지요.
그때 마침,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요셉을 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처럼 정확한 때를 맞추어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가도록 하셨지요. 그것도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을 말입니다.
더욱이 그 상인들이 약대에 실은 것은 향품과 유향과 몰약이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흔한 물건을 거래하는 장사꾼이 아니라, 그래도 격이 있는 장사꾼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지요. 요셉은 바로 이러한 상인들에게 팔렸기에 애굽에 가서도 고위층인 시위대장의 집에 팔려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상인들이 흔한 보통 장사꾼이라면 그처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랬다면 요셉도 시위대장의 집이 아닌 험한 곳으로 팔려갈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상인들은 그래도 애굽의 고위층과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일반 노예와는 달리 시위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려감으로써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지요.
육으로 볼 때는 한낱 노예로 팔려간 것이지만 그것이 결국은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이들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을 보았다고 해서 요셉을 그들에게 노예로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 순간에 요셉이 그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기 위해서는 요셉의 형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계기가 필요했지요. 그 계기를 만드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26-27절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했지요.
이 순간에 유다가 나서서 형제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말을 함으로써 결국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유다가 나서지 않았다면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르우벤이 돌아와 어떻게든 요셉의 목숨을 살려서 야곱에게로 데려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끝내 요셉을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요셉을 연단하여 애굽의 총리로 세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려는 계획은 이루어질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 순간에 유다의 마음을 주관하시므로 그가 이처럼 나서서 형제들의 마음을 돌려놓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르우벤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요셉을 살리려는 좋은 마음에서 나선 것인데 이로 인해 요셉은 확실히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요.
성도 여러분, 시대마다 각각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쓰임받는 인물들이 있는데 결국은 자신의 마음과 중심과 그릇에 따라 쓰임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스마엘도 그렇고, 에서도 그러했으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형들도 그렇지요. 그들 역시 얼마든지 이삭이나 야곱, 요셉처럼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들이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지요. 스스로가 쌓은 선과 쌓은 악에 따라 자신들의 그릇대로 쓰임 받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는 좋은 일에 도구가 되고 누구에게는 나쁜 일에 도구가 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자신들의 마음과 중심과 그릇에 따라 스스로가 쓰이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마음과 중심과 그릇됨을 아시기에 거기에 맞게 섭리해 가신 것이고요. 그들이 어떻게 쓰임받을지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지하시고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래도 지금 르우벤이나 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그나마 덜 악한 도구가 된 셈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 중에서 그래도 누구의 마음이 덜 악한지를 아시기에 때에 맞추어 르우벤과 유다의 마음을 주관하시므로 그들이 요셉을 살려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도구로 쓰임받게 하신 것입니다. 살기등등한 형제들 앞에서 요셉을 살리자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나마 그들의 마음에 조금의 선이라도 있었기에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쓰이게 된 것이지요.
더욱이 요셉을 죽이려는 형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장자인 르우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서모 빌하와 통간한 사건을 아버지 야곱이 알고도 모른 채 넘어갔던 사건이지요. 바로 이 일을 통해 르우벤은 야곱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그 은혜를 생각하므로 요셉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르우벤이나 유다 본인들도 사실 요셉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는 조금의 선(善)이라도 남아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르우벤은 야곱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던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예비된 도구로 쓰였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과 중심과 그릇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각각에 맞게 쓰임받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생사화복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계획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사람들과 환경과 조건들이 있는데 그 각각을 사람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각의 변수들을 다 주관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잠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는 말씀처럼 사람이 마음에 경영할 수는 있지만 그 응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잠 16:3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의 말에 따라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사람 상고 즉,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게 되지요.

28절에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9-30절에 보면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했지요.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요셉이 구덩이에서 없어진 것을 안 르우벤은 자기 옷까지 찢으며 괴로워합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하는 머리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가 막막했던 것이지요.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았고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요셉을 살려보려 했던 것인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요셉이 없어져 버렸으니 앞일이 너무나 난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지요. 물론 르우벤은 나중에 동생들을 통해 요셉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들었겠지만 어차피 동생 요셉을 아버지 야곱 앞에 데려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선택은 두 가지 중에 하나였지요.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솔직히 말하거나 아니면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는다 해도 이미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렸으니 그것은 동생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직접 죽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들의 마음은 요셉을 죽일 마음이었고 노예로 팔면서도 요셉의 생사를 염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을 속이는 쪽을 택하지요.

31-32절에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했던 것입니다.
동생을 노예로 판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이처럼 아버지까지 속이고 있으니 요셉의 형들은 죄에 죄를 더한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미 살인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아버지 야곱까지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이려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 이처럼 악으로 심은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에 일말(一抹)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동생을 노예로 팔고 아버지까지도 속이고 나서 어찌 그 마음이 편안했겠습니까? ‘혹여라도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을까 누군가 자신들의 행동을 본 사람은 없을까 혹여라도 아버지가 나중에 모든 상황을 알게 돼서 자신들에게 벌이라도 내리지 않을까...’ 이런 걱정과 근심으로 인해 편히 잠 못 자는 날들도 많았을 것이고요. 그러니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죄를 짓고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 악이라는 것은 그 열매를 볼 때 결국 고통이며 불행이지요. 그런데 그 고통과 불행은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시기, 질투로 인해 동생 요셉을 없애려했던 형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온 가족이 다 같이 고통을 받게 되었지요. 요셉의 일로 인해 다른 자녀들이 아무리 위로를 해도 야곱은 위로를 받지 않고 오래도록 애통을 하고 있으니 어찌 다른 가족들인들 편안했겠습니까?

33-35절에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했지요.
그런데 이때 야곱의 행동을 보면 야곱의 신앙이 아직 온전치 못했음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야곱은 아들들이 피 묻은 요셉의 옷을 가지고 온 것을 보자, 아들들에게 자초지종도 묻기 전에 스스로가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말했지요.
물론 워낙 슬픔이 앞서다 보니 자초지종을 물을 겨를도 없었겠지만 야곱이 좀 더 선한 마음에서 지혜가 있었고 명철이 임해 있었다면 아들들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 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면 결국 아들들의 거짓말이 탄로 났겠지요. 아무리 서로 입을 맞추고 왔다고 해도 진실 앞에서는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지금까지 교회를 치리해 오면서 이런 경우들을 많이 겪어 보았지요. 어떤 사람은 당회장 앞에 와서도 속이려 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름대로는 그럴 듯하게 둘러대지만 제 편에서는 이미 그 마음속이 들여다보이지요. 더욱이 그 말을 하나 하나 들어보면 말을 하는 자신은 모르지만 듣는 제 편에서는 곳곳에 거짓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다 하여 제 편에서 일일이 그들의 거짓을 드러내지는 않지요. 다만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돌려서 언질(言質)을 주기는 하지만 대놓고 그 앞에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알아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는 경우도 있고요.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일부러 속아주는 것입니다. 어차피 밝히고 드러내서 치리할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가 깨우치고 돌이키기를 기도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잘 넘어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회장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알아도 그 사람의 위치나 입장을 생각해서 민망하지 않도록 모른 척 할 뿐이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셨던 것은 아니지만 끝까지 그를 놓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이 영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며 겉으로는 속는 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알면서도 상대를 생각하여 넘어가 주는 것뿐임을 알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야곱의 입술의 고백을 보면 요셉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라고는 하지만 믿음 있는 자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이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단지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이 슬퍼서 스스로 살 소망마저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지요.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순종을 했는데 그러한 아브라함에 비교해 본다면 지금 야곱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를 능히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믿음과 신앙이라는 것은 비록 평소에는 가리워져 있을 수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상황이 되면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영으로 이룬 만큼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 말과 행함으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보는 영의 사람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영의 사람과는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야곱의 신앙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창 38장을 미리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잠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셨지요. 그러므로 믿는 저와 여러분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들이 있지요.
이때 어떤 사람은 ‘왜 안 됐지....나는 왜 이렇게 불통하지....’ 이렇게 생각하며 지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을 수 없지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더 큰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당장은 불통한 것 같아도 그것이 결국은 더 큰 그릇을 만드셔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인 경우가 있지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느냐’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하거나 불평, 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데 하물며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더 세세히 주관해서 인도해 가시겠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당장 자신이 보기에 불통한 것 같다 해서, 그것으로 인해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믿음을 잃지도 않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도받아 나가지요.
요셉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육으로는 너무나 힘든 상황들에 놓였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나갔습니다. 그래서 허락하신 연단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셔서 여러분에게 지금의 연단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이제 통과했다” 말씀하실 수 있도록 신속히 자신을 깨트리고 변화시켜서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으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1-21 오후 1:15:39 Posted
2015-11-03 오후 5:53:3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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