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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93)  [창37:12-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11.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야곱은 열두 아들들 중에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채색 옷도 지어 입혔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을 편애하는 야곱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나오고 있습니다.

12-13절에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 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이스라엘’ 하면 야곱을 말합니다.)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말씀하고 있지요.
형들은 모두가 세겜에 가서 아버지 야곱의 양 떼를 치고 있을 때도 요셉은 야곱 곁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요셉은 힘들고 험한 일에서는 이처럼 제외가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요셉이 어려서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요셉은 야곱의 지시에 따라 형들이 있는 곳으로 혼자서도 찾아갈 만큼 이미 성장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뭐 양을 치고 험한 이런 산들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17세라면 어리다고 볼 수는 없겠고요. 17세라는 나이가 결코 어린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한창 집안의 일을 도와야 하는 나이지요. 그럼에도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기에 그를 늘 곁에 두기 원했던 것이고 위험하거나 험한 일에서는 제외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에 대한 형들의 감정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야곱은 요셉에게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를 살펴보고 오라고 합니다.

14절에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했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왜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요셉에게 이러한 일을 시킨 것일까요? 여기에는 야곱 나름대로의 의중이 있었습니다. 야곱 편에서는 그래도 요셉이 상황을 정확히 살펴보고 와서 보고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요셉은 평소에도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잘 고하곤 했는데 이를 굳이 좋게 본다면 그만큼 정확하고 세세하게 보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낸 것이 꼭 형들의 동정을 살펴보라는 의미만은 아니었지요. 집을 떠나 멀리 가서 자신의 양 떼를 돌보고 있는 아들들의 고생함과 수고로움을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요셉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요셉과 요셉의 형들의 사이를 좀 좋게 만들어 보려는 의도도 있었지요. 야곱도 다른 아들들이 요셉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요셉을 보내어 자신을 대신하여 형들을 위로하게 하면 요셉의 형들의 마음이 좀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요셉의 마음은 좀 달랐지요. 아버지가 자신에게 형들과 양 떼를 살펴보고 오라고 하는 사명을 준 것으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더 우쭐하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던 요셉은 아버지가 이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을 준 것에 대해 스스로가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나서기 좋아하고 들레려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특별한 사명을 맡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로 인해 자신을 더 들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이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했을 때 형들은 그로 인해 요셉을 더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지만, 야곱은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 했습니다. 야곱은 앞으로 장차 하나님께서 요셉을 들어 쓰실 것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어떻게 연단해 가실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야곱 편에서는 어떻게든 요셉과 요셉의 형들의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계기로 삼아 보고자 요셉을 형들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그것이 결국은 요셉으로 하여금 연단의 길로 접어들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지요.
이렇게 해서 요셉은 드디어 형들이 있는 세겜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형들이 세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간다고는 하지만 요셉이 형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원래 양을 친다는 것이 풀과 물이 있는 곳을 늘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예상을 하고 찾아가도 그 사이에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도 형들을 찾는 데 있어서 헤매게 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5절에 “어떤 사람이 그를(즉 요셉을)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했지요.
요셉이 형들을 찾아 세겜으로 오기는 했지만 곧바로 형들을 만나지는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요셉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지요. 본문에는 ‘어떤 사람’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요셉에게 먼저 “네가 무엇을 찾느냐” 묻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결코 아는 사이는 아니지요.

그러자 요셉이 16절에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말했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둘 다 뭔가 알고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요셉을 보았을 때 요셉에게 “네가 무엇을 찾느냐” 물었는데 요셉이 지금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 리가 없지요. 오히려 “여기서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이렇게 묻는 것이 더 당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마치 요셉이 지금 누구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이 요셉에게 “무엇을 찾느냐” 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요셉의 대답도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 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했지요. 지금 요셉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그에게 너무나도 순순히 자신의 목적을 말하고 있고 더욱이 형들이 양 치는 곳을 알려 달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형들을 알 리도 없고 형들이 있는 곳을 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요셉은 그 사람에게 묻고 있지요. 그러자 그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형들이 그곳을 떠나 도단으로 갔다고 알려 줍니다.
모든 일들이 짜 맞춘 듯이 돌아가고 있지요. 만약 이때 요셉이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요셉은 그곳을 헤매다가 결국 형들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은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리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13년 간의 연단도 없었을 것이고요.
물론 이후에라도 또 다른 사건을 통해 요셉의 연단이 시작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지금 반드시 형들을 만나야 하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그냥 들을 헤매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놔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형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인데 그는 바로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였습니다. 물론 요셉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전에도 설명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천사라 할지라도 사람의 형상과 같은 육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내실 수가 있다 했지요.
이때도 바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가 사람의 형상으로 요셉 앞에 나타나 요셉이 형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 요셉이 연단의 길로 접어들 수가 있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길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그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는 것이며 찾다가 결국 못 찾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친히 받는 연단입니다. 연단은 죄로 인해 오는 연단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 허락된 연단, 이렇게 크게 둘로 나누어지지요. 그런데 축복을 주시기 위해 허락된 연단도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 마귀 사단의 손에 붙여져서 받는 연단이 있고, 다른 하나는 친히 하나님의 손에 붙여져서 받는 연단이 있지요.
욥과 같은 경우가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의 손에 의해 받는 연단이었습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욥을 축복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송사를 허락하신 것이었지만, 욥은 연단 중에는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연단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요. 물론 이러한 연단도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허락하신 경우입니다.
하지만 욥과 아브라함을 비교해 본다면 그 연단의 차원이 전혀 다르지요.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가 바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친히 연단받은 경우입니다. 연단 중에도 늘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으며 모든 연단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있었지요. 특히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한 마지막 과정으로서 친히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연단해 가시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그런데 요셉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친히 연단을 받은 경우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연단으로 접어드는 과정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관여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냥 놔두었으면 요셉은 들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요셉이 형들을 꼭 만나도록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과정들을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늘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연단 중에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지요.
이밖에도 엘리야 선지자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연단하신 경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선에 대한 말씀을 통해 들으셨듯이 그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 뽑아내야 할 악의 모양이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손에 의해 친히 연단받으며 다듬어졌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섭리하시고 간섭해 가시는 연단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옥토밭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면 바로 바로 열매를 맺어나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친히 연단받으며 귀한 그릇으로 나올 수가 있지요.

성도 여러분, 이제 이어지는 18-20절을 보면, 요셉이 마침내 형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면서 요셉과 형들 사이의 비극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했지요.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요셉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들에게 가까이 오기도 전에 즉 요셉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들을 찾아왔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형들을 대하는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이미 요셉을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요셉을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는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하자는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까지도 있었던 것입니다.
벌써 요셉을 죽이고 난 뒤의 상황까지도 생각해 놓았음을 알 수 있지요. 이는 평소에 요셉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며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이 하루, 이틀 사이에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임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 대해 ‘꿈꾸는 자’라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가장 큰 원인이 요셉의 꿈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즉, 요셉이 꾸었던 꿈의 내용 다시 말해 자신들과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요셉 앞에 꿇어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면, 그들이 요셉을 ‘꿈꾸는 자’라 하며 비꼬는 듯한 표현을 했겠냐는 말이지요.
그러니 요셉의 형들은 이러한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을 꾸미면서도 자신들의 입장과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형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아버지까지도 무시하며 자기를 높이고 들레려는 요셉에 대한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요셉은 꼼짝없이 죽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의 가장 큰 아들인 르우벤이 나서지요.

21-22절에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했습니다.
르우벤 역시 사실은 요셉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르우벤이 이처럼 나서서 요셉의 생명만은 구하려 했던 것은 자신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르우벤은 전에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통간을 했었지요.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 둘을 벌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의 범죄를 드러내어 극형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야곱은 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며 잠잠히 참고 인내하였지요. 이러한 사실을 르우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야곱 앞에 너무나 큰 은혜를 입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동생들에 의해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너무나 큰 은혜를 입은 르우벤은 이로 인해 아버지 야곱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을 생각하니 아버지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자로서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는 것이 양심상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요셉을 구원해 보고자 동생들에게 제안을 하게 되지요. 무조건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해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양 떼를 치는 자들로서 그곳의 지형에 대해 밝히 알고 있지요. 가끔 양들이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구덩이에 물이 있어서 빠져 죽기도 했기에 양을 치려면 어디에 어떤 구덩이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했고, 구덩이에 한 번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르우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요셉의 생명만은 살려보고자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다른 동생들이 볼 때 그럴 듯하게 보였지요. 그들의 목적은 눈엣가시와 같은 요셉을 아버지로부터 없애려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눈앞에서도 없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으로써 살인을 생각한 것이었지만, 지금 르우벤의 제안대로 요셉을 그냥 구덩이에 넣어놓기만 해도 자신들의 목적은 달성될 수가 있었지요.
그렇다 하여 요셉을 죽일 마음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굳이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단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두기만 해도 얼마가지 않아서 죽게 되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구덩이에는 가끔 물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고 거기다가 옷까지 벗겨서 던져 넣으면 광야의 기후 특성상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형 르우벤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자신들의 목적한 바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요셉의 목숨만은 살려주려는 의도에서 르우벤의 제안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을 따랐던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순간에 만약 형 르우벤이 나서지 않았다면 요셉은 꼼짝없이 형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해 구덩이에 던져질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요셉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친히 연단을 받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결코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죽이려 해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면 결코 그 생명에 손을 댈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사단에게 내어주어 연단케 하시면서도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셨기에 사단이 그의 생명은 어찌하지 못했던 것이고요.
요셉의 경우도, 이 모든 사건들이 연단으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 허락된 것이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친히 인도받고 있었기에 결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을 넘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을 던져 넣은 구덩이에 다행히 물이 없었던 것도 그의 생명을 지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는 증거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요셉을 온전케 만드시기 위한 연단의 모든 조건 하나 하나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음시간에는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앞으로 변화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많은 깨우침을 얻겠지만, 지금 변화되기 이전의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도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비록 악한 마음을 가지고 형들의 과실을 일부러 아버지에게 고한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랑과 덕보다는 자기의 의가 앞선 결과였지요.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옳아 보여도 그것을 주장하기에 앞서 정말 이것이 진리에 비추어 합당한가를 살펴야 하며, 설령 진리에 합당하다고 해도 상대의 믿음과 형편도 살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맞추어 자기 의만을 주장한다면 자신보다 믿음의 분량이 적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깃들이기가 쉽지 않지요.
머리가 되어 앞서서 인도해 가는 사람은 맡겨진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바르게 제시해 주어야 하는 책임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믿음이 연약하고 지친 영혼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 이끌어주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겸손으로 상대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지요. 잠 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겸손히 상대를 섬기는 사람은 모두와 화평을 이루면서 결국은 머리로도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덕과 사랑으로 상대를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상대를 섬김으로 사람 사이에도 늘 화평을 이루어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라” 칭찬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1-12 오후 8:39:42 Posted
2015-11-03 오후 5:53:3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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