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열두 아들들 중에 특별히 요셉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자녀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주게 되었지요.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 얻은 아들이었기에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이처럼 남달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요셉을 사랑해서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요셉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습니다. 형들로 하여금 동생 야곱을 시기, 질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4절에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즉, 요셉을)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마저도 형들로부터 미움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요. 그것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형들의 과실을 고했던 것이었습니다. 요셉 나름대로는 정당한 이유와 의로움 가운데 한 일이었지만 이러한 행동은 안 그래도 안 좋은 형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지요. 물론 형들이 요셉에 대한 일들을 선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지 못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모든 책임을 요셉의 형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야곱이 아브라함과 같은 온전한 마음이었다면 얼마든지 자녀들 간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요셉을 위해 줄 수가 있었지요.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인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이삭과 다른 형제들과의 사이에 조금의 시시비비나 불편한 감정이 없도록 공평하고 지혜롭게 처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른 아들들이 요셉에 대해 불평하고 시기, 질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주장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채 요셉만을 편애하는 마음을 드러냈지요.
그러니 이것이 요셉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고요. 야곱이 비록 연단을 통해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선으로 온전히 입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이 편벽된 모습이 나오더라는 사실입니다. 야곱 스스로는 자신이 편벽되게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주변을 두루 살피지 못했고 다른 아들들의 마음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편벽된 행동으로 나왔던 것이지요. 이는 야곱에게 정말 선한 마음 가운데서 나오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직 온전히 임해 있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약 3:17에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하여 위로부터 난 지혜, 곧 선의 지혜는 편벽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런데 야곱에게는 아직 편벽됨이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 야곱은 지혜롭게 자녀들 사이에 화평을 좇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꼭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혹여 편벽됨으로 인해 화평을 깨는 일은 없으신지요? 만약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다 하면서 늘 그를 편애하고 감싸만 준다면 그것은 그 자녀를 다른 자녀들이나 사람들로부터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며, 자녀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요셉도 이처럼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왔기에 형들로부터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마음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형들에게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자랑하듯 말하는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5절에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했지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받는 상대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말 상대를 위한 마음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의 가운데 한 것인지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질 수 있지요.
그런데 요셉의 말은 비록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라 해도 자기 의 가운데 한 것이었으며 자기를 들레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요셉이 만약 자기 의를 앞세우기 전에 먼저 선과 사랑을 생각했다면 형들의 과실을 굳이 아버지에게 고하지 않았겠지요. 형들의 과실을 드러내기에 앞서 허물을 덮어주려 했을 것이고, 어찌하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우선은 형들에게 선한 말로 권면했을 것이고 형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했겠지요. 물론 그렇다 하여 형제의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만이 선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옳지 못한 것을 보면서도 무조건 숨겨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정말 사랑한다면 권면도 해 주고 깨우치게 해서 어찌하든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정녕 사랑과 선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자기 의 가운데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사랑하는 선의 마음보다는 자기 의 가운데 형들의 불의한 모습을 참지 못해서 그것을 아버지에게 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결여된 공의는 자칫 상대를 찌르는 칼이 될 수 있고, 상대를 돌이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악으로 나가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물론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한 말로 권면하고 깨우쳐 줘도 그 말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악으로 인해 선한 말도 오히려 악으로 받고 도리어 악으로 반응해 나오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 여러분 편에서 자기 의로 인해 상대를 찌르므로 상대를 실족시키거나 악을 발하게 했다면, 이때는 전적으로 상대방만을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지적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기에 앞서 먼저는 선과 사랑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럼에도 권면하고 책망해야 할 경우에는 늘 선과 사랑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요셉은 아직 온전치 못한 가운데 자기 의가 먼저 앞섰던 것이고 이와 더불어 자기를 자랑하며 들레고자 하는 마음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는 이것을 자부심이라 생각했지만, 이러한 자부심으로 인해 자신이 형들보다 우월하다 생각하였고 자기를 높이고자 했던 것은 결국 교만이었지요. 요셉의 형들도 요셉으로부터 이와 같은 교만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된 것이고요.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요셉의 말투부터가 요셉의 높아진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요셉이 그들에게(즉, 형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했지요.
이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나 섬김의 자세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형들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꿈의 내용 역시 얼마든지 자신만 알고 마음에 품어 둘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요셉은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고 말았지요.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을 형들에게 말했을 때 형들로부터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능히 알 수 있음에도 요셉은 자기를 자랑하고 들레는 마음으로 인해 상대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였고 스스로 절제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잠 27:14에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는 말씀처럼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물론이고 때와 장소를 살펴야 하지요. 더욱이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는 말을 함에 있어서 더더욱 주변 상황이나 형들의 입장을 고려했어야 함에도 전혀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경우에 합당치 못한 말로 인해 도리어 형들의 미움을 더 사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때와 장소를 분별하여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시는지요? 성령의 주관하심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하십니까? 같은 말을 할지라도 상대의 입장과 상황까지 고려하는 명철도 필요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말을 했을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가 미리 보이며 상황에 따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보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잠 18:4 전반절에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다”는 말씀처럼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물과 같아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7절에서는 요셉이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형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했지요.
이에 형들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8절에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합니다. 그리고 형들이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요셉을 더욱 미워하였다 했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요셉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큰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꿈으로 인해 오히려 연단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형들의 미움을 더 크게 사게 되므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상황을 육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꿈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불평, 불만이 나올 수 있지요. ‘축복의 꿈을 주셨는데도 왜 이렇게 현실에는 드러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형통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적으로 눈에 보여지는 축복이 와야만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어서 그 결과로 와지는 열매가 정녕 참된 축복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려면 축복받을 만한 그릇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그 그릇은 바로 연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통해 원대한 비전을 받고나서 그 비전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그릇을 만드는 연단의 과정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꿈을 받는 편에서 믿음으로 받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꿈을 주실 때는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은 자기 육신의 생각 가운데 꿈을 꾸었음에도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꿈으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또는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이나 잠재되어 있던 마음이 꿈을 통해 표출된 것뿐인데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꿈으로 생각하기도 하지요.
어떤 경우는 자기가 꾼 꿈에 대해 자기 생각을 보태서 해석하기도 하고요.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항상 이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꾼 꿈인지를 잘 분별해야 하지요.
그리고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리 원대한 비전이 담긴 꿈을 꾸었다 해도 ‘내가 이러한 꿈을 꾸었다’ 하는 것보다, ‘내 마음에 얼마나 의를 이루고 있으며 내 마음에 얼마나 선이 임해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렇게 본다’ 하여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내 안에 얼마나 악이 없고 육신의 생각이 없으며 영으로 들어와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러므로 내가 아직 온전하지도 않고 늘 주변과 화평도 이루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이와 같이 본다, 내가 이렇게 꿈을 꾸었다. 나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아직 부족하여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꿈과 비전을 주시고 연단하셔서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시지만, 여러분 편에서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며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더욱이 드러나 있고, 앞서서 쓰임받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요셉도 자신이 더 사랑받고 드러나 있을 때 더욱 자신을 낮추고 겸비했었다면 형들로부터도 그렇게까지 미움을 사지는 않았겠지요. 사랑 받을수록, 드러날수록 형들을 더 섬기고 섬겼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일단 형들에 대한 말투부터가 그렇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지요. 앞서도 형들에게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했던 요셉은, 또다시 형들에 대해 “당신들”이라 하며 심히도 형들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요셉의 말투와 태도에 형들의 마음은 더 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의 질서가 우선이고 중요하지만 동시에 육의 질서 또한 무시해서는 안 되며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9절에 요셉은 다시 한 번 꿈을 꾸고 그 내용을 말합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했지요.
이번에는 11명의 형제들뿐만이 아니라, 부모까지도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이 꿈의 내용을 형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게도 말했지요. 형들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달갑게 듣지 않자 이번에는 자신을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에게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조용히 상의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는 의미였지요.
이처럼 요셉의 마음에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며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셉의 말을 들은 야곱이 이번에는 요셉을 꾸짖지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꿈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게 되면 아버지는 자기편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꾸지람을 들은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을 꾸짖으면서도 11절에 보면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했지요.
즉 야곱이 요셉을 꾸짖은 이유는 그 꿈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드러내서 말하는 요셉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이 생각할 때도 좀 정도가 지나치다 싶었던 것이지요. 얼마든지 아버지에게만 와서 조용히 상의할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요셉이 경솔하게 드러내어 말함으로 오히려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된 것에 대해 야곱은 요셉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과 자기 형들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깨우쳐 주려 했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야곱은 요셉의 꿈의 내용을 경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야곱이 볼 때도 요셉의 행동이 자칫 형들로부터 더 큰 미움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자신이 요셉을 꾸짖음으로 조금이나마 형들의 감정을 잠재워볼까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해 온 세월은 하루 이틀도 아닌 오랜 세월이었기에 이미 형들의 마음에는 요셉에 대한 감정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지요. 거기다 요셉의 꿈 이야기까지 들으면서 형들의 감정은 더욱 깊이 쌓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야곱이 요셉을 꾸짖었다고 하여 그것으로 형들의 쌓인 감정이 풀어질 상황이 아니었지요.
성도 여러분, 요셉의 꿈 내용대로라면 야곱도 아들 요셉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것 때문에 요셉을 꾸짖은 것은 아니라 했지요. 그러므로 야곱의 마음에는 설령 자신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해도 그로인해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을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요,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형들은 그런 마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마음에 쌓인 감정도 있었지만, 동생 요셉이 자신들보다 앞서고 자신들의 머리가 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야곱의 편벽됨과 형들의 시기하고 질투하는 악이 합해져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 제단에서는 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어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만큼 쓰임받고 있으며, 성도들로부터도 사랑받고 인정받는 만큼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잠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므로 사랑받는 증거가 나타나고 보장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적인 질서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영적인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인 질서 속에서 혹여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은 야곱의 편애로 인해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은 것이지만, 영적인 질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므로 결코 편벽이나 편애라는 것이 없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그래서 여러분이 영으로 일군만큼 정확하게 세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드러나게 쓰임받고 머리로 세워졌다 해서 무조건 영적으로 앞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반드시 하나님의 보장하심과 사랑받는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영적으로 분별해야 하지요. 이제 다음시간에는 요셉이 형들의 시기, 질투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까지 놓이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입장에서도 형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자신의 꿈 이야기까지 형들에게 하고 말지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꿈 이야기를 했을 때 형들의 반응이 ‘아니다’ 싶으면 다음에는 하지 않아야 했을 텐데, 요셉은 또다시 꿈 이야기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형들의 반응이 ‘아니다’ 싶으면 당연히 그쯤에서 그만했어야 하지만 요셉은 오히려 아버지 앞에서까지 꿈 이야기를 하지요.
이러한 요셉의 모습이 결국은 자신을 오랜 세월의 연단으로 들어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연단은 요셉에게 필요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은, 자신을 들레고자 하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변과의 화평이 깨어짐은 물론이고 스스로가 핍박을 자초하게 되지요.
혹여 여러분 중에도 주변으로부터 시기, 질투나 핍박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중에는 의를 위해 주님의 이름을 위해 받는 핍박도 있겠지만 스스로가 지혜롭지 못하게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 인해 자초하는 핍박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가 자초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는 ‘내가 지금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다’ 생각하게 된다면 결코 거기서 헤어 나올 수가 없지요.
여러분이 설령 의를 위해, 주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해도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단계에 들어가면 즉 선의 4단계 중에 적어도 2단계 이상에 들어가면 자연히 핍박은 물러가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의 차원에 이르면 결코 어둠이 역사할 수가 없지요. 즉 영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도 만약 깊은 선의 차원에 들어가서 형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면 그와 같은 형제간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처럼 오랜 연단도 필요 없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은 바로 그 연단의 과정을 통해 나중에는 깊은 선의 차원에까지 이르렀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변화될 요셉을 아시기에 그를 연단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고, 따라서 요셉에게는 연단이 곧 축복이요 형통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연단은 곧 축복임을 깨달으시되 연단을 그냥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연단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신속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또한 더 깊은 선의 차원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된 요셉에게 부와 권세와 명예가 주어졌던 것처럼 여러분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1-05 오후 8:47:57 Posted
2015-11-03 오후 5:53:3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