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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91)  [창37:1-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10.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 에서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찾아 떠나자 야곱은 마침내 가나안 땅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신에게 언약하셨던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야곱이 예전처럼 욕심 가운데 자기의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지요. 자기가 앞서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는 대로 순종해 나온 결과입니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어떤 것에 욕심을 낸다거나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려는 마음이 아니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만 순종하기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야곱이 이처럼 그릇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실질적인 장자로 세우시고,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를 본격적으로 이루어 가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더 일찍 야곱을 통해 일을 이루어 가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신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지극히 낮고 겸비한 자로 나오기까지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시에 장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쓰이게 될 또 한 사람의 인물을 택하십니다. 그가 바로 야곱의 아들 요셉이었지요.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중심을 보신 것은 물론이고, 야곱에게 있어서는 요셉이 실질적인 장자였기 때문이지요.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야곱이 자원해서 아내로 얻고자 한 아내는 라헬 한 사람 뿐이었고,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일생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아내들을 통해서 여러 자녀들을 얻기는 했지만 야곱에게 있어서 장자의 의미는 라헬을 통해 얻은 첫아들 요셉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열두 아들들 중에 요셉의 중심이 가장 합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의 계보를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보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하여 야곱의 약전을 설명하시면서 곧바로 요셉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지요. (약전(略傳): 계보 혹은 족보) 이는 곧 야곱의 계보가 요셉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섭리의 초점이 야곱에게서 요셉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요셉이 어떤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나와지는지가 상세히 설명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일생에도 많은 역경이 있었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숱한 인생의 역경을 겪어 나갑니다. 어린 나이에 이방 나라에 노예로 팔려가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단의 세월을 보내지요.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그가 범사에 형통했다 말씀하십니다. 당장의 현실을 볼 때는 불통한 것 같은 상황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는 형통한 길로 인도받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요셉은 육적으로는 암흑과 같은 연단의 세월들을 보냈지만 갑자기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30세의 젊은 나이에 당대의 강대국인 애굽 전역을 통치하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요셉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처럼 영화로운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요셉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하여 요셉의 나이 십칠 세로부터 기록이 시작되는데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에는 대부분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삼(3)’은 ‘합한 수’로서 온전함을 이룬다는 의미가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도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분인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시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요나가 삼 일간 물고기의 뱃속에 있었던 것,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 차례 시험을 받으신 것 등이 다 ‘합한 수’인 3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칠(7)’은 ‘완전수’이지요. 이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서 하나님께서는 육일 동안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칠 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나아만이 병을 치료받을 때도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고 엘리야 선지자가 비를 내리도록 기도할 때도 일곱 번 기도하여 응답받았던 것을 볼 수 있지요.
다음으로 ‘십이(12)’는 ‘빛의 수’입니다. 요 11:9에 보면 예수님께서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말씀한 대로 빛이 가장 밝게 빛나는 것도 정오인 열두 시이지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 열두 진주문, 생명나무의 열두 가지 실과 등에 바로 빛의 수인 12가 사용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4)는 고난의 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연단받고 400년을 애굽의 포로로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지요.

그러면 요셉의 나이 십칠 세라 하실 때 17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7’에는 ‘하나님 편에서 친히 주관하시고 행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강해 100편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날짜와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이르러 머무른 날짜가 각각 2월 17일, 7월 17일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홍수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행하신 일이었다는 의미라 했지요.
요셉의 경우에도 17세 되던 해부터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본격적인 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고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사별하는 슬픔을 겪었지만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자라서 어느덧 열일곱 살의 소년이 되었습니다. 야곱을 닮아 지혜롭기도 하고, 용모도 준수했으며 아버지의 곁에서 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마음 깊이 심겨졌지요.
또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가르침들을 명심하였고, 가르침 받은 대로 행해 나가고자 자신의 마음을 다져 나갔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런 요셉을 볼 때 더더욱 사랑스러웠겠지만, 야곱의 다른 아들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지요. 오히려 눈엣가시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2절 후반절에 보면 요셉이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했습니다. 형제들이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하면 요셉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고했으니, 형제들이 이러한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렇게 행동했던 것일까요? 이는 요셉이 일부러 악한 마음을 가지고 그처럼 행동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온전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요셉은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졌고 중심도 좋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 나름대로의 의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즉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는 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옳은 일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가정에 자녀가 많이 있어서 부모로부터 똑같이 가르침을 받아도 어떤 자녀는 들은 대로 순종하는가 하면 어떤 자녀는 잘 순종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순종을 잘하는 자녀 편에서는 다른 형제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요. 자녀로서 당연히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순종을 하는데 왜 다른 형제들은 순종을 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로 자기 의가 발동하는 것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도 그런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막내 아들인 저를 유달리 사랑해주셨고 늘 곁에 두고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지요. 그중에는 “이런이런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는 행동이니 하지 말아라” “물건을 쓰고 나면 반드시 제자리에 두어라” “정리정돈을 잘하고 다 같이 쓰는 장소는 더 깨끗하게 사용해라” 이러한 말씀들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런 말씀들을 듣는 대로 그대로 마음에 새겨서 순종했지요.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고 더구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가족들 중에는 간혹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힘든 일도 아닌데 말씀대로 순종하면 얼마나 좋을까 참으로 이상하다’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자녀들에게 똑같이 가르쳐도 자녀들마다 순종하는 것이 다르고, 순종하는 자녀 편에서는 순종하지 않는 자녀를 볼 때 이해가 안 될 수가 있으며 더 나아가 다른 형제들도 자신처럼 순종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고 형제들과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요셉도 바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더 잘하기를 원하는 마음에 이처럼 아버지 야곱에게 형들의 잘못을 고했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의도는 악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이는 자신의 의속에서 행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것이 결국은 요셉 자신에게 큰 연단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요셉의 형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막내인 베냐민을 제외하면 모든 형제 중에 가장 어립니다. 서로 어머니가 다른 만큼 아무래도 어머니가 같은 형제보다는 덜 친밀했고 더구나 요셉의 어머니 라헬에 비해 자신들의 어머니가 덜 사랑받은 것도 알지요.
그런데 아버지마저 다른 모든 아들들보다도 어린 요셉을 더 사랑하여 늘 곁에 두었고, 요셉에게만 유독 채색 옷을 입힐 정도로 눈에 띄게 남다른 사랑을 주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늘 아버지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더욱 사랑받게 되는 것을 보았지요.
이것만으로도 육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시기, 질투가 생길 수 있는데, 여기다가 요셉의 행동은 더더욱 형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맙니다. 얄밉게도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까지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형제들은 요셉을 꺼리게 되고 그를 심히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지도 못했습니다. 야곱 나름대로는 다른 아들들에게도 최선을 다했고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었기에 자신이 특별히 요셉을 편애하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지요.
단지, 요셉이 더 사랑받을 만하게 행동했기에 그에게는 그만큼 더 사랑을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 낳은 첫아들이요, 그 중심이 가장 합당한 아들이었고 늘 순종하는 아들이었기에 이러한 요셉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을 더 인정해 주고 그에게 모든 기업을 물려주는 것이 오히려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고 그를 장자로 인정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선민 이스라엘의 계보를 이어감에 있어서 육적인 장자보다는 영적인 질서를 보셨지요. 그래서 야곱과 에서 중에서도 중심이 더 합당한 야곱을 택하신 것이었고,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도 어린 요셉을 통해 영적인 계보를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더 깊은 차원까지 생각하여 다른 아들들의 입장도 고려했다면 모든 것이 화평함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었겠지요. 물론 야곱의 아들들 입장에서도 모두가 영적인 마음을 가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영적인 마음이라면 범사에 선으로만 생각할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도 선으로 헤아렸겠지요. 그랬다면 모든 상황이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동생을 불쌍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동생 요셉에게 아버지가 사랑을 더 주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되었겠지요.
오히려 자신들도 더욱 긍휼의 마음으로 동생 요셉과 베냐민을 돌보아 주었을 것이고요. 또한 고자질하는 동생을 “얄밉다”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을 고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 요셉만을 더 인정하시는가”, “아버지가 편벽된 사랑을 베푸신다” 이렇게 불평할 것이 아니라 ‘왜 요셉은 더 사랑을 받는 것인가’ 궁구해 보아 자신들도 변화되어 ‘아버지의 마음에 맞추므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자’고 생각했겠지요.
상대의 좋은 것은 배우면 되고,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상대가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해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영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처럼 야곱의 집안에 화평이 깨지고 형제들 사이에 비극의 씨앗이 싹트게 된 것은 어느 한 쪽만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었지요.
물론 시기, 질투하는 마음 가운데 나중에는 동생을 이방나라에 노예로 팔기까지 했던 형들의 악한 마음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야곱이나 요셉에게도 책임은 있었습니다. 야곱은 부모의 편애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으로서 자신 또한 그러한 편애에 빠지고 말았지요.
아버지 이삭과 비교해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를 잘 아는 야곱으로서 당연히 아브라함의 교훈을 좇았어야 했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 스스로는 정당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자녀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되고 말았지요. 또한 그것이 결국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형제들로부터 심히 미움을 받아 요셉으로 하여금 심한 연단으로 들어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누구를 편애해 보지도 않았지만, 혹여 아무라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늘 주변을 두루 살피며 조심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어릴 때 용돈을 주어도 언니, 동생 구분 없이 똑같이 용돈을 주었지요. 자녀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제 편에서는 늘 공평하게 대하려 했습니다.
일꾼 여러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 때 뛰어나게 잘한 한 사람의 공로를 칭찬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혹여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에게도 힘을 주려고 했지요. ‘잘한 사람을 잘했다고 칭찬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왜 시기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제 편에서는 늘 한 번 더 마음을 써서 누구 한사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예를 들어 여러 자녀가 있는데 어떤 한 자녀가 병약하다면 부모의 마음은 오히려 그 자녀에게 더 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누구만 사랑하신다.” 하며 다른 자녀들에게서 불평이 나오는 경우가 있지요. 이럴 때 부모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약한 자녀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당연한데 왜 저렇게 부모 마음을 몰라주나’ 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부모의 마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럴 때도 자신의 정당함을 알아주지 못하는 자녀들에게 탓을 돌리기에 앞서 ‘왜 자녀들이 저런 말을 하는가’ 그들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부모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도 ‘내가 옳다’ 생각하기보다는 그런 말을 하는 자녀에게 이후로는 한 번 더 사랑을 주고 한 번 더 관심을 주는 것이 더 큰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설령 내가 편벽되게 행하지 않았다 해도 혹여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까지도 품어서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모든 사람과 화평을 좇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야곱, 요셉, 요셉의 형제들 이렇게 각각의 입장에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두루 살펴 덕과 사랑으로 품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마음에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매사에 선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또한 나에게는 혹여 편벽된 모습은 없는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이 특별히 자신을 점검할 분야는 바로 요셉의 마음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은 의롭고 정당한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좋았지만, 반면에 자신의 의 가운데 형들의 잘못을 덕과 사랑으로 덮어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진리가 오히려 형제들을 찌르고 힘들게 하는 자기적인 틀과 의로 나왔던 것이지요. 자신은 옳은 것을 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형제들을 불편하게 하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이간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 해서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무조건 덮어만 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을 보면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그 영혼을 위해서도 바르게 가르쳐 주고 바로잡아 나가야 하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자신이 의를 행하는 것은 좋지만 의롭게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볼 때 판단하거나 즉각 그것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은 사랑과 덕이 부족한 마음에서 비롯되지요.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정말 상대를 위하고 상대가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온유한 방법으로 상대를 깨우쳐 줄 수 있는 것이고,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변화될 수 있는 힘을 줄 수가 있지요. 또한 상대의 믿음이 젖 먹는 수준밖에 안 되는데 밥과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틀과 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고전 8:13에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내 믿음으로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 해도 혹시 그로 인해 상대가 실족한다면 믿음이 연약한 상대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지요.
‘내가 옳으니까 내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를 위해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이 더 크고 넓은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너무나 악한 사람들은 아무리 내편에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선으로 품어주려고 해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과 덕으로 권면해도 오히려 권면하는 사람을 악으로 찌르고 해를 입히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정녕 온전한 마음으로 행한 것이라면 비록 상대가 악한 마음으로 해코자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지켜 주시므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혹여라도 상대를 위해 권면한다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의 가운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적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화평을 깨는 경우들이 없었는지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잠 17:9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여러분 자신은 얼마나 사랑을 구하는 사람인지도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한 분야들을 깨닫고 신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선의 차원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0-29 오전 5:01:02 Posted
2016-03-23 오전 9:38:5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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