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의 사람일수록 자기 것만을 주장하고 자신의 것은 조금도 내어주려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간섭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영역이나 권리를 침범해 들어온다고 생각하게 되면 즉시로 자신의 것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발동하지요.
예를 들어 자기 소유의 재산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자기가 누리던 권리든, 자기에게 속한 어떠한 것에 대해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유익에 해가 된다고 느끼게 되면 설령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해가 된다 해도 그저 자신의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게 되지요. 그러니 주변과도 화평이 깨어지게 되고 다른 사람을 품지도 포용하지도 못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도 필요하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지키려는 노력도 필요하지요. 하지만 자기 것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욕심과 자기적인 의와 틀까지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의 사람의 속성입니다.
예를 들어, 에서의 입장에서 장자권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였고 야곱이 장자권을 탐내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장자권을 지키려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장자권을 만홀히 여김으로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으면서도 그런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회개하지는 않은 채 야곱만을 탓하는 모습이나, 심지어 야곱을 미워하여 감정을 품고 죽이려고 했던 것까지도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또한 육의 속성은 비록 상대에게 무엇을 양보한다고 해도 자신이 생각한 한도까지는 내어주지만 그 이상을 요구해 들어올 때는 이내 방어막을 치려고 합니다. 결국 자기 보기에 옳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처럼 육의 속성은 조건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바로 오랜 세월의 연단을 통해 이러한 육의 사람의 속성을 깨달았지요. 형과 화해를 한 뒤, 형이 당장은 자신을 환대하고 함께하기를 원하기까지 했지만 그것이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형이 내어 줄 수 있는 한계 이상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야곱은 알았던 것이지요. 그 한계라는 것은 바로 형의 장자권에 대한 침범이었습니다. 아무리 형과 화해를 했다고는 하지만 만약 야곱이 지금 다시금 형의 장자권에 마음이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이는 곧바로 형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지요.
예전에 연단받기 전의 야곱은 이러한 것까지 생각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형을 속여서라도 어찌하든 자신이 장자권만 가지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을 좇아 원하는 대로 행해 나갔던 것이고요.
하지만 연단을 거친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앞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맡겼지요. 더욱이 이제는 연단을 거치면서 육의 사람의 속성까지도 파악하고 있으니 더 이상 예전처럼 자기 생각을 동원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한 후에 형이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해왔을 때도 이를 지혜롭게 거절했지요. 사람 보기에는 당장에라도 형을 쫓아가서 그리운 아버지 이삭도 만나고 가족이 다 함께 모여서 사는 것이 더 좋아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이 그렇게 했을 때 앞으로 오게 될 일의 결과까지도 내다 볼 수 있는 명철이 있었지요. 만약 형 에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버지 이삭이 야곱 자신을 환대하게 되면 그것이 형의 경계심을 자극하게 되리라는 점을 야곱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둘이 함께하게 되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보장을 받는 야곱이 아무래도 형 에서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아직은 에서의 마음에서 장자권의 문제로 쌓였던 감정이 완전히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처럼 야곱과의 사이에 경쟁심을 느끼게 되면 이는 또다시 에서로 하여금 장자권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게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러한 모든 상황까지도 마음에 주관을 받았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설명한 대로 아버지 이삭 앞에 나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는 때가 오기까지 참고 인내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에서의 마음은 점점 더 풀어지게 되었지요.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서 에서의 입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자신의 장자권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여겨지지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만약 여전히 장자권에 마음이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아버지 이삭에게로 달려와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했을 텐데, 야곱에게서 전혀 그러한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에서의 생각에는 ‘야곱이 이제는 더 이상 장자권에 대한 마음이 없나보다.’ 하고 안심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야곱에 대해 경계하던 에서의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을 때쯤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따라 아버지 이삭에게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이제는 모두가 화평한 가운데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이삭은 아들 에서와 야곱과 함께하는 가운데 임종을 맞을 수가 있었지요. 이 모든 일들이 정확히 때를 맞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야곱이 좀 더 늦게 이삭을 만나러 와서 이미 이삭이 임종한 후였다고 하면 야곱은 남은 일생 동안 얼마나 후회가 되었겠습니까? 아버지 이삭의 마음에 근심만 끼쳐 드렸는데 이처럼 자신이 성공한 모습도 보여 드리지 못하고 더욱이 아버지의 임종마저도 지켜보지 못했다면 야곱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지요. 또한 이삭의 입장에서도 아들 야곱을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때를 주관해 주시니 이처럼 야곱과 이삭이 다시 만나고 가족이 화평을 이룬 가운데 이삭은 임종을 맞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이삭 둘 모두의 마음에 어떠한 후회나 상처가 없도록 모든 것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후에 이삭은 세상을 떠났던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이 화평함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일들이 화평함 속에 순리를 좇아 이루어졌기에 에서는 자신이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긴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이 야곱에게 땅을 양보하고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찾아 떠날 수가 있었지요.
만약 에서가 생각할 때 야곱이 억지로 밀고 들어와서 자신이 밀려나는 것이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게 되었다면 에서가 그처럼 쉽게 자신이 살던 땅을 야곱에게 주고 떠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동생에게 땅을 주려던 마음이 있었다 해도 야곱이 만약 급하게 밀고 들어왔다면 막상 그 상황에서는 선뜻 땅을 내어주고 떠나는 것을 망설이게 될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지금 에서의 마음에는 동생 야곱이 자신의 장자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어떠한 의도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의 위협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순순히 땅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찾아 떠난 것이지요. 그러면서 일찍이 야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응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야곱을 머리로 세우시겠다는 축복, 곧 장자의 축복이 그대로 임하게 된 것이지요. 결국 야곱이 장자권을 가지게 된 것은 자기 생각과 방법을 써서 억지로 형으로부터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영혼이 잘 되어졌기에 그 결과로서 주어진 열매였지요. 자기가 살아있고 자기 생각과 방법에 의지할 때는 아무리 취하려고 해도 얻지 못하던 것을 이제는 자기가 철저히 깨어져서 자기 생각과 방법을 버리고 나니 하나님의 방법대로 형통하게 인도받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 비법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물질도 명예도 권세도 여러분이 아무리 원해서 얻으려고 쫓아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설령 얻었다 해도 그것은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혼이 잘된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그렇지가 않지요.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장해 주십니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이상 결코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요.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영혼이 잘되어진 결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졌을 때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명철의 길이 보이므로 모든 것에 형통하게 인도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신속히 ‘자기’를 깨뜨리고 만사형통의 길로 인도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그 마음에서 변함없이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상황과 현실이 어렵다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지요. 다만 연단받기 이전에는 그 말씀을 자기 방법대로 이루려 했던 것이고 이제 연단 후에는 그 방법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 맡겼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말씀을 마음에 의심 없이 믿고 바랐을 때 때가 되니 열매로 맺혀지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무리 대단한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 해도 만약 그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지 못했다면 결코 그 언약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떠했습니까? 에서는 원래 장자의 축복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 축복을 귀하게 여길 줄도 몰랐고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겠다고 쉽게 말을 낼 수가 있었고, 이방 여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는 행동도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장자라는 의식이 있었다면 마땅히 자기 민족 중에서 아내를 찾아 그 혈통을 계승했어야 할 것인데, 에서는 자기 보기에 좋고 아름다운 것을 따라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취했던 것입니다.
뒤늦게 자신이 이방 여인을 취한 것이 자신의 장자권 승계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자기 민족 중에서 또다시 아내를 취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인지가 드러나 버리고 난 후였지요.
그런데 에서는 이번에도 또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 곧 자기 아비 이삭이 거하던 땅을 떠나 자기 보기에 좋은 곳으로 옮겨갔던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에서와 야곱의 소유가 풍부하여 둘이 한 곳에 거할 수가 없으므로 에서가 야곱에게 양보한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야곱에게는 정당하게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되는 축복이었지요.
그러나 에서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모습이 장자권에 담긴 의미와 책임과 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명목상으로만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장자로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지키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에도 여러분에게 어떤 사명이나 직분이 주어졌을 때 결코 그것을 경홀히 여기거나 함부로 사람 편에서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명목상으로 가지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결국 자기 보기에 좋은 땅으로 떠났고, 그를 통해서도 큰 족속이 일어나게 되지요.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이미 야곱에게 간 상태였지만 에서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보를 잇는 후손으로서 번성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창 36:8-19에 보면 세일산지로 떠난 에서와 그 후손 에돔 족속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지요. 에서가 비록 자기 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방인들의 지역으로 떠났지만, 그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하나의 족속을 이루고 많은 족장들을 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삭과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께서 에서를 기억하셨기 때문이지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에서의 마음이 온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줄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번성하게 하신 것처럼 에서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후손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적인 축복에 그치고 말았지요. 에서의 후손, 곧 에돔 족속은 세일산의 원래 거민들과 혼합되면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하나의 이방 족속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에 서는 선민이 아니라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 이방 족속으로서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되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장자의 축복은 야곱에게 갔고, 선민으로서의 섭리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있었지만 만약 에서와 그 후손들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은총도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과 더불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의 나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떠나 육으로 빠져 버렸기에 하나의 족속을 이루기는 했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족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서를 비롯하여 그 후손들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므로 축복을 저버리고 만 것이었지요. 그러니 그 중심과 앞일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민의 조상으로 택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정녕 사모한다는 것은 어떤 육적인 축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축복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 누리는 영적인 축복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지요. 영적인 축복을 받아 영혼이 잘될 때 가정, 일터, 사업터의 육적인 축복은 겸하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영적인 축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육적인 축복을 먼저 구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육적인 것을 구하는 데 급급하지요.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 가운데 사업도 벌여 보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해 보다가 축복이 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정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에서와 같이 ‘망령된 사람’이라 책망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어떤 경우는 육적인 축복을 받은 후에 오히려 심령이 부유해져 버려서 더 이상 영적인 축복을 사모하지 못하고 나태해져 버리는 것도 볼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 부요케 되었다 해도 늘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되셔서 영육간에 많은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지는 36장 20절 이하에는 세일의 자손과 에돔의 왕들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성도님들이 읽어 보시면 되겠고, 이제 창세기 37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창세기 37장부터는 요셉이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성경은 이 요셉에 대해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요. 창세기 37장부터 마지막 장인 창세기 50장까지 38장의 유다와 다말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든 내용이 요셉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에 요셉에 대해 이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자세히 기록하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을 통해 깨닫고 배울 점이 많으며 여러분의 삶에 적용할 분야가 많은 중요한 인물이요,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13년이 지난 30세에 애굽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바로 요셉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는지가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요셉이 어렸을 때는 어떠했고 그가 왜 연단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연단 후에 총리가 되고 나서 선민 이스라엘이 나오기까지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앞으로 증거되는 요셉에 대한 내용들을 통해 요셉이 어떻게 그처럼 축복된 길로 인도받을 수 있었는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셉이 연단을 어떻게 받았고 연단 중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연단 후에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잘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요셉과 같이 행해 나간다면 여러분도 요셉처럼 축복받을 수 있고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7:1-2에 보면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했습니다.
연단을 마친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또한 이삭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와 그곳에 정착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연단하시고 그릇을 만드신 후에 이제 비로소 그를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를 펼쳐나가시지요. 바로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을 통해 낳은 열두 아들들을 통해 장차 선민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차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 땅에 들어가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먼저 애굽에 들어가 필요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놓을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으로 바로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요셉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 것이었지요.
그런데 요셉은 자기 형제들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2절에 나오지요.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과실을 그의 아비 야곱에게 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형들의 잘못이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사람이었지요. 물론 이것이 악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자기 의 가운데 나온 행동이었지만 이러한 요셉을 형제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은 형제들의 손에 의해 요셉이 노예로 팔려 애굽 땅으로 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고요. 야곱에 이어 계속되는 요셉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음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기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 때문에 때를 기다리지도 못하며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하고 마는 것이지요.
자기 유익을 구하며 조급했던 모습의 야곱과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 야곱과는 그 결과가 전혀 달랐던 것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영적인 축복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에서의 결국이 어떠했는지도 살펴보았지요. 이것은 단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과연 야곱과 에서 중에 어떤 모습에 더 가까우신지요? 또는 야곱 중에서도 연단받기 이전의 야곱, 아니면 연단을 받은 후의 야곱, 어느 쪽에 더 가까우십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많은 시간에 걸쳐 들으신 야곱의 연단의 과정과 변화된 모습, 그리고 축복에 대한 결과가 여러분 모두에게 큰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신속히 야곱과 같이 ‘자기’를 깨뜨리고 변화되어 영육간에 마음껏 축복받으시기 바라며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지는 귀한 도구들로 쓰임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0-24 오후 7:50:30 Posted
2018-05-07 오후 12:00:33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