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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89)  [창35:27-36:4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10.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33장에 보면, 얍복강 앞에서 지난 20년간 동생 야곱에 대해 마음 깊이 품고 있던 묵은 감정을 다 털어버린 에서는 야곱에게 자신과 함께 갈 것을 권합니다. 동생과 화해도 한 상황에서 에서는 반가운 마음에, 야곱에게 이같이 권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형 에서의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자신의 종자를 붙여주겠다는 제안도 야곱은 거절했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왜 그런 것일까요?
사실 야곱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에서를 따라가서 아버지 이삭을 만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을 것입니다. 이삭도, 아들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야곱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야곱은 에서를 따라 나서기를 거절했고, 그 후로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오늘 본문 27절에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으로 가서 아버지 이삭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야곱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창세기 강해 181번에서 자세히 설명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육의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지금은 에서의 마음이 풀어져서 야곱을 환대하고 반기지만 그렇다하여 에서의 마음이 영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그 마음에 불편한 것이 생기면 또다시 야곱에 대한 감정이 불거져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있어서 가장 민감한 분야는 바로 장자권에 관한 것이었지요. 사실 에서가 야곱에게 감정을 품고 결국 죽이려고까지 했던 근본 원인은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것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 기도를 동생 야곱이 간교한 속임수로 가로채기까지 했으니 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야곱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야곱이 자신 앞에 완전히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관하시니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눈 녹듯 녹아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장자권을 둘러싼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요. 언제라도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올 수 있는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성도 여러분, 에서는 비록 장자권은 빼앗겼지만 그동안 야곱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장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것은 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장자권을 잃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실감하지를 못하고 살았지요.
아버지 이삭과 함께 살면서 이삭의 모든 소유를 자신의 것처럼 누릴 수 있었고 자신이 장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야곱으로 인해 어떠한 방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야곱이 다시 나타난 것이지요. 그러니 에서가 지금은 비록 야곱과 화해를 했다고는 하지만 만약 앞으로 야곱으로 인해 자신의 장자권이 조금이라도 위협받는다고 느끼게 되면 에서는 또다시 야곱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형과 화해를 한 후에 당장 서둘러서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면 야곱은 당연히 이삭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겠지요. 크게 잔치라도 벌여서 야곱의 귀환을 축하해 주려 했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이를 바라보는 에서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야곱을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청한 것은 에서 자신이었고 또한 당장은 동생을 다시 만나 화해한 기쁨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환대한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보는 에서의 마음이 바뀔 수가 있지요. 막상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반기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장자권에 대한 위기감을 느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한순간에도 마음이 바뀌는 것이 육의 사람이지요. 야곱은 바로 이러한 육의 사람의 마음을 알았기에 형 에서와의 화평함을 깨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삭에게 가는 때를 늦추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육의 사람의 마음에 대해 좀 더 느껴볼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미리 유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하고 만 둘째 아들은 결국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런데 이런 둘째아들을 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이 맞이합니다.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발에 신을 신겨주지요. 더욱이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성대하게 잔치를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장자는 이에 대해 심히도 불만을 토로하지요. 이에 아버지는 장자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장자는 지금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은 안중에도 없이 오히려 동생을 위해 주는 아버지의 태도가 불만이었던 것이고 동생이 돌아옴으로 인해 장차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이 오게 될지가 더 걱정이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육의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육의 마음을 가진 에서의 입장에서는 20년 만에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곧장 이삭에게 달려가 극진한 환대를 받게 되면 그 마음에서 장자권에 대한 경계심이 되살아나면서 자칫 야곱과의 화해가 깨질 수도 있지요. 야곱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미리 예상했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여 느긋하게 갔던 것입니다.
야곱이 만약 급하게 아버지를 만나서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거나 조금이라도 장자로서 인정받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에서의 경계심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보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야곱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전 3:1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했지요. 야곱은 바로 어떤 일을 행해야 하는 가장 적절한 때와 시기를 주관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단을 받기 전에는 당장 축복받기를 원했고,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장자권을 빼앗았던 야곱이지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형보다 자신을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을 알았지만, 야곱은 그러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는 연단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지요. 잠잠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렸다면 형제 사이의 갈등이나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연단을 마친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편에서 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 때를 마음에 주관받아 행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20년 동안이나 뵙지 못한 아버지가 아무리 그리워도, 당장 달려가고 싶어도, 자신의 성공을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며 그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나마 씻고 싶어도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지척에 둔 채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정확히 주관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때가 오기까지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지혜도 필요하지요. 사람 편에서는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 같아 보이고 지금 당장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 55:8-9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를 결코 사람의 생각 속에서 판단하거나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본 제단이 지금까지 세계 선교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루어가는 과정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본 제단이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를 창대하게 이루게 된 것도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불가능했습니다. 1998, 1999년도 세 차례의 시험을 통해 육적으로는 가장 힘든 것같이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세계 선교의 문을 여셨지요. 이때 현실을 보고 사람의 생각을 동원했다면 “지금은 좀 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좀 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때 사람의 생각에 따랐다면 지금 어떠한 결과가 나왔겠습니까? 오늘날 이와 같이 창대하게 세계를 이루며 명실공히 세계적인 교회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본 제단이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야할지를 가장 잘 아시고 섭리하셨기 때문에, 정확히 그때를 맞추어 세계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가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금번 창립 23주년 기념행사와 GCN개국 기념행사를 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깨달아지셨는지요? 하나님께서 올해를 영광의 해, 축복의 해라 하셨고 거둠의 해라 말씀하신대로 그동안 세계선교를 통해 얼마나 많은 열매들이 맺혀졌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본교회의 창립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민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는 증거이지요.
대성전을 이루는 때와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대성전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대성전 건축은 마지막 때의 섭리와 함께 맞물려 돌아가야 합니다. 대성전만 먼저 건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대성전 건축은 세계정세의 흐름, 국내 정세의 흐름, 본 교회의 흐름과도 맞물려서 정확한 때에 이루어져야 하지요. 그 정확한 때를 가장 잘 아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시구요.
그러므로 사람 편에서 더디다 생각할 것도 없고 억지로 때를 당기려 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사람편의 실수나 부족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도 안 되겠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떻게 차질이 생길 것까지 미리 아셔서 그에 맞춰 계획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아브라함을 좀 더 일찍 부르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셨으며, 모세 또한 좀 더 젊은 나이에 부르실 수 있으셨지만 80세가 돼서야 부르셨지요. 물론 그만큼 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가 그들을 불러야 할 가장 정확한 때인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 때에 맞추어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주의 종으로 부르신 것 역시 얼마든지 더 젊은 나이에 부르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가장 정확한 때에 맞추어 부르신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러한 때와 시를 읽을 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야 거기에 맞춰서 준비도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드러날 때, 그제서야 준비해야겠다고 서두른다면 그때는 이미 늦을 수밖에 없지요.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영의 흐름을 깨달아 준비해야만이, 정말 하나님께서 ‘이때다’ 하실 때에 준비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영광의 해, 축복의 해, 거두는 해를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는 때를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밝히 주관받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다 받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은 이와 같이 자기 생각대로 때를 정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랬을 때의 결과가 바로 오늘 본문 36:6-7에 나오고 있지요.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했습니다.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지금 에서가 자기 스스로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에서 스스로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는 뜻이 되지요. 당시 이삭과 에서가 거하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따라서 아버지 이삭의 뒤를 이은 장자가 그 땅에 거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에서는 바로 이러한 장자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아간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에서가 이제 와서 약속의 땅을 스스로가 순순히 포기하고 다른 땅을 찾아 떠났던 것이지요. 야곱을 머리로 세우고 그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이 순적히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이 사람의 생각과 계획 속에 장자권을 쟁취하려 했을 때의 결과와 지금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자연스럽게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로서의 위치를 얻게 하시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야곱이 잠잠히 기다린 결과입니다.
만약 야곱이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급하게 서둘러서 아버지 이삭을 만나고 자신을 드러내려 했다면 이는 오히려 에서의 경계심을 자극하여 다시금 둘 사이는 긴장 상태가 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잠잠히 때를 기다렸기에 에서와의 사이에 화평도 깨지 않을 수 있었고 때가 되자 이처럼 에서 스스로 주관받아 약속의 땅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타처(他處)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비로소 실질적인 장자의 권한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 편에서 억지로 하려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일들은 모든 것이 화평함 가운데 순적히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반면에 사람이 억지로 자기 생각과 계획과 방법대로 추진하는 일은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생기고 일의 결과 또한 온전치 못한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으셔서 온전히 성령의 주관하심에 따라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물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주관되어갔던 일이었지만, 에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에서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아버지 이삭이 죽은 이후였지요. 아버지 이삭이 죽자 그동안 아버지와 살던 땅을 뒤로 하고 다른 땅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그동안은 아버지 이삭을 모시고 살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땅에 살았지만 이제 아버지 이삭이 죽은 상황에서 더 이상 그 땅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물론 소유가 많아져서 동생과 함께 머물 수가 없기에 스스로 그 땅을 양보하고 떠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에서의 마음 한편에는 자기 보기에 더 좋은 땅을 찾아 떠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정말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았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살던 땅을 떠날 수는 없었겠지요.
그렇다 하여 동생과 싸워서 그 땅을 지켰어야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에서가 그만큼 영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나 사모함이 적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마 11:12에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영적인 것 역시 사모함 가운데 침노하는 사람이 취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에서는 그러한 사모함이 없었고 장자권에 대한 소중함도 마음 중심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었기에 동생 야곱에게 죽 한 그릇에 그처럼 쉽게 장자권을 팔았던 것이며, 이번에도 약속된 땅을 떠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영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자권에 대한 소중함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장자권을 가지려 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 방법에 있어서 예전에 변화되기 전에는 자기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연단을 겪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자기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 맡기고 순종해 나가니 결국 장자권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이고요.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욕심을 버리고 놓았을 때, 도리어 얻게 되는 진리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바로 이러한 차이점을 이미 태중에서부터 아셨기에 야곱을 머리로 세우시고 결국 그에게 장자권이 돌아가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인도받을 때 얼마나 순적히 일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셔서 큰 능력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35:28-29에 보면 이삭이 180세의 나이로 기운이 진하여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창 25:7-8에 보면, 아브라함 역시 175세의 나이로 기운이 진하여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말씀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죽음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으로는 둘 다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각각의 죽음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전혀 다르지요.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때가 되어 몸에서 기운이 빠지면서 숨을 거둔 것이었지만, 29절에 보면 이삭의 경우는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리 “늙어”라는 표현이 더해져 있습니다. 이삭은 이미 오래전부터 눈이 흐려져서 에서와 야곱도 구분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눈만이 아니라, 몸의 이곳저곳도 나이가 들면서 함께 쇠약해졌고 말 그대로 늙어서 때가 되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것이 아니었지요. 눈이 흐려지거나 몸이 쇠약해 진 것도 아니었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강건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죽음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장차 음부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육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어디가 아플 리도 없지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오히려 이삭을 낳은 100세 때보다도 더 강건한 몸을 유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그의 영적인 수준이 아브라함과는 많은 차이가 났지요. 물론 이삭도 어디가 병들어 아프거나 몸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지만 육의 법칙에 따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결국 기운이 진하여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바로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지난날의 많은 것을 후회하였지요.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 자신의 부족된 것이 깨달아졌고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행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일들이 후회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더 많은 자녀들을 낳으며 평안한 말년을 보낸 것과 비교할 때, 이삭은 자신의 편애와 부족됨에서 비롯된 자녀들 간의 갈등, 20년간이나 아들 야곱과 이별해야했던 일 등을 겪으면서 마음에 고통을 받아야 했지요. 이것이 바로 영혼이 얼마나 잘되었는가에서 오는 차이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아서 더욱 열심히 주님의 마음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된 자녀에게 영육간에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10-15 오전 4:12:35 Posted
2015-09-24 오전 9:53:1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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