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연단 중에 있게 되면 심령이 가난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뭔가 해보려고 해도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 마음이 겸비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육적으로는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해도 마음의 연단을 받게 되면 결국 이 땅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삶이 참으로 무익하고 허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이처럼 연단을 통해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오직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게 되지요.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욕심도 많았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까지 그처럼 원하던 장자권을 얻었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은 긴 연단의 세월이었지요. 그리고 연단을 통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겸비하고 낮아진 심령이 되어졌지만, 그렇다하여 야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얍복강 앞에서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질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제서야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내려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게 되자 그때는 마음 중심에서 형 에서 앞에도 무릎을 꿇을 수 있었지요. 또한 자기 뜻대로 뭔가를 해보려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아 나가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도 이제 변화된 야곱이 이 땅에서 겪게 되는 삶을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갔는지가 잘 나타나 있지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한 번 축복의 언약을 받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축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축복된 사건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에게는 슬프고 애통할 만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먼저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사별하게 된 것이었지요. 야곱에게 있어서 라헬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이라는 세월을 종과 같이 지내야 했지요. 라헬 외에도 세 명의 아내가 더 있기는 했지만, 야곱이 원해서 얻은 아내는 라헬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아내들이 있다 할지라도 야곱이 참으로 사랑한 사람은 라헬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랑이 변함없었지요. 라헬의 시기, 질투로 인해 가정의 화평이 깨어지고 마음에 심한 고통도 받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물론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을 온전한 영의 사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마음으로 라헬을 사랑했던 것은 야곱의 중심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지요.
비록 라헬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하여 야곱은 라헬이 싫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행하는 악이야 싫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사람까지 싫어져서는 안 되지요. 더욱이 한 번 사랑한 사람에 대해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하여 싫어져 버린다면 이것은 그만큼 육적인 사랑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줄 때, 거기에 진정한 가치와 행복이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이해하고 품으며 변함없는 마음을 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라헬을 진정 사랑했고 라헬은 야곱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라헬을 뜻하지 않게 잃은 것인데,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그만 심한 산고로 인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의학과 장비가 발달한 오늘날도 아이를 출산하는 일은 위험할 수가 있는데, 더욱이 고대에는 그런 경우가 더 많았지요. 라헬도 바로 난산 끝에 아이는 낳았지만, 본인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라헬이 이처럼 죽게 된 것이 단순히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흔히 일어날 수 있었던 많은 일들 중에 하나였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라헬의 죽음에는 영적인 이유가 있지요. 본 교회 여 성도님들 중에는 육으로 볼 때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기도받았을 때 짧은 시간에 순산했다는 간증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믿음이 좋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시는 분들은 해산의 고통도 별로 느끼지 않고 순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시대에 비록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라헬을 지켜만 주셨다면 얼마든지 순산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일찍 죽지는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라헬은 왜 그처럼 단명(短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라헬은 시기, 질투가 매우 심했습니다. 라헬이 태가 열리지 않아 잉태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처럼 심한 시기, 질투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여 그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물론 이때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셨다는 것도 결국은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시고 라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아들 요셉을 얻은 라헬의 입장에서는 이후로라도 마음을 선하게 변화시켜 나갔다면 복된 말년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많은 자녀들도 낳으며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으면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지요. 그러나 라헬은 아들을 낳은 후에도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아들의 이름을 ‘더한다’는 의미를 가진 요셉이라 지을 만큼 욕심이 여전했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더 쌓아만 갔지요.
결국 이렇게 쌓은 악으로 인해 라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킴을 받지 못한 채 단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야곱으로 인해 라헬이 자기 스스로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해도 결국 스스로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니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악으로 인해 일찍 죽을 수밖에 없었던 라헬이 과연 구원은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이 한번 라헬의 믿음의 분량을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라헬이 비록 마음에 할례를 한 것도 아니었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라헬은 남편을 따라 야곱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늘 있었습니다. 때를 좇아 야곱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 라헬도 함께 하나님을 경배했고, 야곱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지키는 규례를 따라 지켰던 것이지요.
그러니 순수한 자신의 의지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것은 아니라 해도 라헬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었고 규례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가 행위적인 신앙의 구약시대였던 점을 생각한다면 라헬은 최소한 구원은 받을 수 있는 신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만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을 가졌었지만, 그렇다하여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에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아내 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곁에서 아브라함을 지켜봄으로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구원은 결국 자신의 신앙에 달려 있으며, 천국의 처소도 자신이 이룬 만큼 침노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라의 경우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면서 그만큼 하나님의 역사도 많이 보고 더 많은 은혜의 기회를 가졌음에도 좋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인해 더 부끄럽고 민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에브랏이라는 곳에서 라헬을 장사하고 그곳에 묘비를 세워준 후에 길을 떠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라헬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기에 라헬을 잃은 야곱의 슬픔은 컸고, 더구나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젖먹이 베냐민과 아직 어린 요셉을 볼 때 그 마음의 안타까움은 더했지요. 바로 이러한 마음이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에 대한 애틋함과 사랑으로 나타나면서 훗날 형제간의 시기, 질투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사랑이 요셉과 베냐민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졌을까를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야곱의 마음도 이해가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처럼 라헬을 잃은 슬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너무나 어이없고 민망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레아가 낳은 아들 장자 르우벤이 라헬의 여종이었다가 야곱의 아내가 된 서모 빌하와 통간을 했다는 것이었지요. 레 20:11에 보면 이러한 범죄에 대해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여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해도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행해서는 안 되는 패륜적인 범죄라 할 수 있지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의 도리로서 도저히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이처럼 크나큰 죄악을 행한 것을 야곱이 알았을 때, 과연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그들의 소행대로라면, 사형에 해당할 만한 중한 징계를 내려도 그들은 아무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변화되기 이전의 야곱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들의 소행을 드러내어 벌을 내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야곱은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잠잠히 참고 인내하며 그들 스스로가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야곱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놓은 채 잠잠히 수습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자신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랐던 것이고요. 야곱은 오랜 연단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오직 온유와 자비와 오래 참음으로 허물을 덮어주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선과 사랑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러한 야곱의 행동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엄청난 죄악을 행한 사람들을 무조건 덮어주고 놔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집안의 질서를 바로 잡고 앞으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그들을 엄하게 다스려 본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물론 ‘공의’로만 볼 때는 그 말이 맞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한 범죄가 있을 때는 반드시 죄인들을 죽이라 했지요. 자칫 그러한 죄악을 용납했을 때는 그 같은 죄악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백성들을 바르게 치리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따른 엄격한 처벌이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18:15-17에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했지요.
범죄한 믿음의 형제에 대해 몇 차례 권면하고 마지막으로는 교회가 말해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를 주어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이지요.
또 고전 5:13에서도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만약 외인 즉, 이방인이면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도록 놔두지만, 그 사람이 만약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그냥 두면 교회 안에 범죄를 용납하는 것이 되고, 그 범죄가 점차 퍼져서 더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으로 가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런 말씀들만을 생각하면 야곱은 당연히 르우벤과 빌하에 대해서도 엄한 조치를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둘 중에 하나는 내어 쫓아서 혹여라도 더 이상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둘을 불러서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도록 엄히 꾸짖어야 했겠고요.
성도 여러분, 물론 야곱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야곱이 그렇게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르우벤과 빌하에게 큰 벌을 내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내어 쫓아버린다면 그들의 범죄가 더 이상 계속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벌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끝나고 말지요.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고 그래서 더 이상의 범죄는 막을 수 있지만, 르우벤과 빌하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조차 없이 그대로 사망으로 가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야곱이 둘을 불러서 꾸짖는다고 했을 때도 물론 둘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둘이 야곱 앞에서만 회개하는 척하고 또다시 범죄를 행한다면 이 역시 결국은 둘 다 사망으로 가게 되지요. 마음 중심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아니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바로 르우벤과 빌하가 정녕 마음 중심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했지요. 단지 벌 받을 것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도 아니고, 야곱 앞에 자신들의 죄가 드러난 것을 순간 모면해 보기 위한 거짓 회개가 아닌 마음 중심의 참된 회개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의 범죄를 알면서도 그것을 드러내 벌하거나 둘을 불러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깨닫고 돌이키기를 기다렸지요. 그렇다하여 아무 조치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르우벤과 빌하 본인들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깨우쳐 주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 대해 율법대로라면 당연히 돌로 쳐서 죽여야 하지만, 돌로 치라 하지 않으시고 긍휼 가운데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요 8:11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지요. 공의에 따라 율법으로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승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이 여인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정녕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달았다면 다시는 범죄할 수가 없었겠지요.
이것이 곧 율법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영혼을 사랑으로써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율법의 참된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이 사랑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고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의에 따라 정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이러한 공의의 이면에는 공의를 초월하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하여 공의의 법칙을 어긴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공의가 녹아져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하지만, 모인 사람들의 믿음의 분량이 천차만별이기에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들이 때로 일어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들을 일일이 다 드러내고 그 죄값에 따라 치리해 나간다면 과연 누가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앞서 말씀드린 마태복음 18장이나 고린도전서 5장의 말씀과 같이 범죄한 사람을 내어 쫓거나 이방인처럼 여겨야하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교회를 치리해 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불의와 불법을 낱낱이 알고 있다 해도 단 한 번도 그 일을 성도들 앞에 드러내거나 누구 한 사람 이름을 거론해 본 적도 없지요. 얼마든지 교회 법에 따라 치리할 수 있는 경우도 그렇게 해본 적이 한 번도 없고요.
그로 인해 교회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하고 제가 대신 고통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단에서 끊임없이 권면하고 깨우쳐 주며 어찌하든 그들이 스스로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왔던 것입니다. 호통치고 책망하고 징계를 주어서 두려움 가운데 마지못해 하는 회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깨달아 스스로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돌이키는 온전한 회개를 원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이킨 것에 대해서는 기억지도 않으시지만, 회개치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의에 따라 대가를 받게 하십니다. 오늘 살펴본 대로 야곱의 그러한 깊은 선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르우벤은 끝내 온전한 회개를 하지 못했지요. 창 49:3-4에 보면 이러한 르우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이 나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하였지요.
그가 장자로서의 축복을 받아야 하지만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므로 그 축복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의 말이 아니라, 야곱의 입술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이처럼 자신이 지은 죗값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 편에서는 너무나 큰 선의 마음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르우벤 스스로가 그 기회를 잡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사건 앞에서도 야곱이 보여준 모습은 그가 연단을 통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닮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더욱이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지를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마음으로 더 굳혀져가는 계기가 되었지요. 육으로 보면, 너무나 통탄하고 분개할 일이지만 , 그것을 선으로 통과하고 나니 야곱에게는 영적으로 더 큰 축복의 계기가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여러 차례의 시험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오직 선과 사랑으로 감사하며 통과해왔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권능에 권능을 더해 주셨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시험과 연단이 왔을 때, 그것을 육으로 볼 때는 힘들게 여겨질 수 있지만, 통과 후에 와질 축복을 생각하시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약 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셨지요. 이 말씀처럼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믿음의 시련을 기쁨과 감사로 통과하게 되면 여러분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축복 가운데로 나오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9-24 오전 4:34:06 Posted
2015-09-24 오전 9:52:0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