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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87)  [창35:13-1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9.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동생 디나가 당한 수치를 갚겠다는 이유로 세겜 성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는 큰 악을 앞장서서 행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야곱의 입술을 통해 저주의 유언이 나가게 되었고 이는 그 후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만약 나중에라도 시므온이나 레위가 자신들의 행함이 얼마나 악한 것이었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 선 가운데로 나왔다면 야곱의 입술을 통한 저주의 유언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를 못했지요. 결국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이 행한 악으로 인해 그 보응을 고스란히 자신들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가 똑같이 저주를 받았음에도 각각의 후손들에게 임한 보응의 결과가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레위 자손은 훗날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거룩한 직무를 맡는 지파가 되지요. 물론 육적으로 볼 때 레위 자손은 야곱이 레위에 대해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리라”했던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 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다른 지파처럼 그들만의 땅을 분배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지파들의 땅 안에 조금씩 성을 얻어 그곳에 거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요. 그럼에도 영적으로 볼 때 레위지파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거룩한 직무를 맡게 되었으니 이는 오히려 그들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의 유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똑같이 저주를 받은 시므온 지파와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레위 지파에게는 어떻게 이러한 은혜가 임하게 된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가지고는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하며 섬겼지요.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진노를 사게 됩니다. 이때 모세가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하는 지극히 선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므로 다행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멸절 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행한 죄악이 너무나 컸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바로 이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심판을 집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받을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출 32:26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지요.
바로 이러한 때에,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앞으로 나온 사람들이 레위 자손이었습니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즉, 모세에게로) 오는지라” 말씀하고 있지요. 이처럼 레위 자손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택한 지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행함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짐으로 레위 지파는 그들의 조상으로 인해 저주를 받을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거룩한 직무를 감당할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으로 인해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본인이 믿음 안에 굳건히 서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킴받을 수가 있습니다. 겔 18:19-20에 보면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했지요.
부모와 자녀라는 영적인 끈으로 인해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 해도 자녀가 법과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면 그는 정녕 살리라 말씀하셨지요. 결국 본인 자신이 영으로 들어가게 되면 조상이나 가족의 끈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가족과 끈으로 묶은 경우는 상황이 좀 다르지요. 이런 경우는 스스로가 묶은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어떤 문제가 왔을 때 그렇게 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해도 본인의 믿음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끈으로 묶인 가족이 함께 믿음을 내보이며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려야 하지요. 당장은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그 순간만 하나님 앞에 나오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마음과 정성과 행함이 있을 때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끈으로 묶은 것이 아니라면 조상이나 가족과 묶여진 영적인 끈이 있다 해도 본인이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주 안에서 보장받고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 본문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올라 가시는지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9절에서 야곱에게 나타나 그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곳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들만 문자적으로 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친히 대면하고 대화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 집에 충성하였기에 출 33:11에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기록할 정도였지만, 그런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지요. 출 33:20-23에 “또 가라사대 네가 (즉, 모세가) 내 얼굴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다가 올라가신 것도 직접 하나님의 본체가 야곱 앞에 나타나셨던 것이 아니었지요. 출 34:5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하여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로 임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 본문의 경우도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로 임하셔서 그곳으로부터 음성이 나와 말씀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때 들려온 음성이 영의 소리로 발하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음성도 원래는 영의 소리로 발하시지요. 이러한 영의 음성은 영적인 귀가 열려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영의 근본의 소리로 말씀하시게 되면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만 듣게 되지요.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영의 근본의 소리로 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구름 속으로부터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즉, 육의 소리의 형태로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때는 비록 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 출 19:9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원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로 임하셨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는 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듣게 하신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근본의 영의 음성으로 모세와만 대화를 하신다면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를 하시는지 아닌지’ 모를 것이고 의심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를 믿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그들에게도 소리를 들려주신 것이지요.
그렇다하여 이때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을 정확히 알아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금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만 알 수 있도록 소리를 들려주셨지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요 12:28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기도의 고백이 나오는데,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지요.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고백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대답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소리를 곁에 있는 사람들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요. 29절에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하셨고요.
즉 곁에 있던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께서 발하신 음성의 내용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하늘로서 소리가 나서 답하였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육의 사람도 들을 수 있는 육의 소리로서 음성을 발해주시면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 곁에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도 소리는 들었지만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고 천사가 말하였다고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지요.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며 소리가 발하여 집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였지요. 사울은 이 소리를 분명히 들었기에 “주여 뉘시오니까”하며 여쭙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과 주님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지만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사울이 지금 누구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행 9:7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했지요.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영안이 열린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사울과 주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를 그들에게도 듣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었기에 단지 소리가 난다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나 주님의 음성을 육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육의 소리로 나타내 주실 수가 있는 것인데 그렇다 해서 그 소리도 누구나 다 알아 듣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사도행전을 읽으시면서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장면이 좀 다르게 기록된 것처럼 보이는 곳을 발견하신 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행 22:9이지요. 사도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던 동일한 사건을 설명함에 있어서 행 9장의 기록과는 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설명하고 있지요. 행 9:7에서는 같이 있던 사람들이 비록 그 내용은 몰라도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했는데 행 22:9에서는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 즉 주님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이 결코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영안이 열려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지요. 또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정작 그 소리가 주님의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고 무슨 내용인지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요. 그러니 그들은 지금 분명히 뭔가 희한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느끼면서도 그 정확한 상황이나 내용은 몰랐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훗날 설명하기를 빛은 보면서도 주님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체험은 영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설명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결코 아니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육의 사람도 들을 수 있는 육의 소리의 형태로 들려주실 수가 있는데, 원래 하나님의 음성은 영의 소리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그대로 발하시면 이때는 정말로 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야만 들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근본의 영의 소리로 발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합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의 소리로 음성을 들려주실 때는 주변의 사람들이 영감 가운데 그 분위기를 느낄 수는 있어도 영적 귀가 열리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듣지를 못하지요.
제가 예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때가 바로 그랬습니다. 하루는 기도원 원장과 함께 가게에서 철야를 하고 있었는데 하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지요. 너무나 맑고 청아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권세와 위엄이 느껴지는 힘 있고 우렁찬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제 바로 옆에 있던 기도원 원장은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요. 물론 기도원 원장도 영감 가운데 제가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느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영적 귀가 열리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근본의 영의 소리로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으로 들을 수도 있고 육적인 소리의 형태로 들을 수도 있으며 근본의 영의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영적인 귀가 열려서 근본의 영의 소리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은 경우라야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육적인 소리로 듣는 것 역시 특별한 경우이기는 합니다. 이때는 물론 육의 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영적 귀가 열리지 않아도 들을 수는 있지만 이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음으로 마음으로부터 음성을 듣는 것은 오늘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음성은 우리가 언제든지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되어야 하지요. 성령의 음성과는 엄밀히 구분이 되며 마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의 확신 가운데 실제 음성과 같이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의 자녀가 병원에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아사 왕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 대하 16:12-13 말씀구절을 알려주실 때

자 이렇게 해서 구름 가운데 임하사 육의 소리로서 음성을 발하여 야곱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야곱은 그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 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지요. 이는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온전한 언약의 증표로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가지로만 언약의 증표를 삼은 것이 아니라 세 가지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돌기둥을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함이 없어서 말씀하신대로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의 기초를 세우신다는 의미이지요. 그 위에 전 제물을 붓고 또 기름을 부은 것은 야곱을 통해 이루시려는 모든 것을 이제 다시금 번복할 수 없고 약속하신 바대로 굳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실상으로 드러난바 되기 전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러한 믿음의 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사이의 언약을 굳게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믿음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와의 약속을 온전히 이행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물론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기에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야곱의 이와 같은 믿음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더욱 굳게 하며 결국은 더 온전한 보장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은 항상 상대와의 약속을 지킬 마음이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할 때 그렇다 해도 상대방 역시 여러분에게 신뢰할 만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그 사람과의 신뢰관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중심을 다 아시지만 여러분이 믿음의 행함을 먼저 내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는다면 꼭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야만 그때 가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어 주신 후에 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며, 누구나 할 수가 있지요. 분명히 말씀대로 이루어 주심을 믿으면 미리 감사로 기도하며 때를 좇아 금식과 예물로 정성껏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을 보시고 더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해 주시지요. 곧 다가올 창립기념일에 맞추어 이제 시험방송을 마치고 정식으로 방송을 시작하게 될 GCN이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GCN에 대한 말씀을 주셨을 때, 우리에게는 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엄청난 방송을 제작하고 운영해 나갈 기술과 장비, 인력 등이 있었던 게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그때 제가 “앞으로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고 필요한 사람과 기술이 준비되면 우리 그때 생각해 봅시다.” 하던가요? 아닙니다. 비록 당장 눈에 보여지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저는 먼저 믿음으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면서 아끼고 아껴 그 물질을 GCN을 위해 심었고 필요한 인력이나 장비가 있다고 하면 ‘어디에 왜 써야 하는지’ 한 번 묻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었지요.
이런 저런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한 번도 책임을 묻지 않았고, 책망 한 번 하지 않았으며 오직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믿고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믿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먼저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기 시작했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낙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지금 그 열매가 어떻게 나왔나요?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지금도 이미 창대히 이루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창대하게 이루게 될지가 눈앞에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믿음을 보시고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역사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고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주신 그 놀라운 언약을 함께 이루어갈 영적장수를 찾으십니다. 야곱이 오랜 세월의 연단 속에서도 20년 전에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었기에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이후 그 언약이 창대히 이루어져 가고 있듯이, 본 제단도 개척 때부터 주신 모든 말씀을 온전히 믿고 기도해 왔기에 여러분이 영으로 변화되며 그릇 준비되는 만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주신 말씀들을 하나하나 온전히 이루어가고 계시지요.
이러한 때에, 정녕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굳건하여져서 야곱과 같이 돌기둥을 세우고 전 제물을 부으며 그 위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놀라운 축복과소망의 모든 말씀들을 신속히 아름다운 열매로 거두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9-18 오전 10:19:12 Posted
2015-09-24 오전 9:52:0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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