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벧엘을 향해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에게는 한 가지 염려가 있었지요. 바로 자신의 아들들이 세겜 성에 행한 일로 인해 혹여라도 그 땅의 이방 족속들로부터 보복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세겜 성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그 성을 노략까지 한 소식이 주변에 퍼지게 되면 그 땅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되면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야곱의 집은 큰 화를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야곱이 “설령 그들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온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아무 염려할 것 없다.” 하며 믿음의 고백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도 여러분이 진리 안에 거할 때만이 그 고백이 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비진리와 어둠 가운데 거하면서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없지요. 그것은 단지 자기 고백일 뿐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고백대로 역사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야곱이 그와 같은 염려를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을 알기 때문이었지요. 먼저 악을 행한 것은 물론 세겜이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이 그것에 대해 너무나 큰 악으로 갚았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영계의 법칙을 아는 야곱으로서는 내심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염려했던 대로 야곱의 집 전체가 해를 당하는 일은 없었지요. 이것이 또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비록 자신의 딸이 큰 수치를 겪는 악을 당했다 해도 그것을 악으로 갚으려는 마음이 아니었지요. 하나님의 뜻에 맡기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더욱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을 칠 때, 그 사실을 야곱에게 알린 것이 아니었지요. 야곱의 동의나 협의 없이 아들들이 독자적으로 그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악으로 인해 사단이 야곱까지 송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을 보시고 결국 그의 온 집을 지켜 주시지요.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 주변에 있는 이방인 고을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셔서 그들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시고 보장하시므로 그의 집안 전체가 이와 같이 지킴을 받을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악에 대한 보응은 훗날 반드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던 대로, 그 일을 주도하여 행했던 시므온과 레위로 인해 그 후손들에게 저주가 임했던 것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행한 대로 갚아주는 공의의 법칙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반면에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킴받고 보장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풀무 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나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온전히 지킴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본문 6-7절에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지요. 첫째는 야곱과 함께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벧엘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처음 야곱과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 누구는 빠지고 누구만 함께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했다는 말이지요. 야곱은 이미 벧엘로 올라가기 전, 자기 집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명했습니다. 그들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의복을 바꿔 입으라 했지요. 그러니 이러한 야곱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당연히 야곱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낙오됨이 없이 모두가 함께 벧엘까지 올라갔던 것이지요. 저도 우리 만민의 모든 성도님들이 이와 같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제가 단에서 성도 여러분에게 ‘죄를 버려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육체의 일을 끊어 버려라, 회개하고 돌이켜라’ 이러한 말씀들을 늘 하게 되지요. 또한 칠년 환난의 참상과 지옥의 끔찍함 등 여러분 중에 결코 한 사람이라도 겪어서는 안 될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바로 딤전 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저는 여러분 모두가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저의 양떼로 있었던 분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제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은 단에서 이런 말씀을 하기가 저도 심히 민망하고 싫지만 그래도 또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저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할 것이고요. 그러나 열쇠는 여러분 자신이 쥐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단에서 외치고 외쳐도 여러분이 죄에서 떠나지 않고 악을 버리지 않으며 사망에 이르는 죄 가운데서 돌이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한 단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힘들다고 해서 혹여 생명의 제단을 멀리 하려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야곱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야곱이 그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행함과 마음을 정켤케 하도록 했을 때, 모두가 그 말에 순종함으로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다 함께 벧엘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자리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모두도 반드시 이와 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다음 두 번째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음에 있어서 본래의 목적에 충실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야곱을 벧엘로 다시 부르신 것은 예전에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그에게 나타나 언약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로 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지요.
야곱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정확히 맞추어 드렸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왜 단을 쌓으라고 하시는지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달아 그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왜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 앞에 어떤 예배나 행사를 드림에 있어서 본래의 목적과 취지를 벗어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는 물론이고 모든 행사나 모임은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나 목적이 변질되어 사람들이 자기만족이나 자신들의 즐거움 심지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사나 모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지요. 이처럼 행사나 모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고 영혼구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행사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고 자칫 육으로 빠지는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행사나 모임에 어찌 주님께서 함께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종 예배 특히 헌신예배나 절기예배는 물론이고 크고 작게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와 모임이 그 근본 취지와 목적에 맞게 드려지므로 정녕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행사와 모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에게도 상급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창대히 확장될 수 있지요.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에 맞추어 즉, 자신이 형의 낯을 피할 때 그곳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념하며 감사함으로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제 8절에서는 본문 내용의 흐름과 크게 상관없는 듯한 내용이 잠시 나오지요.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왜 성경에 이런 것까지 기록이 되었을까.’ 하며 의문을 품을 수가 있지요. 이밖에도 성경에 보면 어떤 때는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의 아들들은 누구 누구이고 하면서 계보를 ‘쭉’ 기록해 놓은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왜 기록했을까.’ 하며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은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일점일획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기록된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임의로 기록한 것도 아닌 것이고요.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말씀하고 있고, 벧후 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또한 사 34:16에는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즉, 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말씀하고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기록된 성경에 괜히 이유 없이 기록된 내용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의 내용을 기록해 놓으신 것도 바로 이것을 통해 당시의 풍습과 그때의 상황들을 알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지요. 유모(乳母) 두는 풍습이나, 죽은 사람을 나무 밑에 장사하기도 하는 풍습 등 당시의 풍습이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죽은 유모 드보라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의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했는데, 이처럼 구체적인 이름까지 명시함으로써 성경의 사실성을 한층 더 확증해 주고 있지요.
그냥 죽어서 어느 나무 아래 묻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지명과 그 나무의 이름까지 기록함으로써 생각이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러한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임을 더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보를 일일이 기록해 놓은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이유이지요. 우리나라에도 족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족보를 보면서 ‘이 집안이 이러한 내력을 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구나.’ 하며 그 가문에 대해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계보는 성경상의 내용과 인물들이 분명 사실에 기초한 것들이며, 그 인물들이 어떠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실존 인물인지를 확증해 주고 있지요.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계보나 지명 등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섭리들이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작은 사건 하나에서도 그것에 담긴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성경 한절 한절을 읽을 때마다 여러분의 믿음은 더해질 것이며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9절부터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10-12절에 나오지요. “그에게 이르시되 (즉,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므로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세우시며 그에게 예전에 약속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지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주셨다 해도 그것이 연단을 받기 이전인가 아니면 연단을 받고 변화된 이후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한 번 주시는 축복의 말씀은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이후이지요. 그러므로 이때부터는 이 축복의 말씀이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기에 본문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셨다”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13절에는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했지요. 그렇다면 이때 정말 하나님께서 야곱 앞에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는 다시금 하늘로 올라가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 내용이 시작되는 35:1에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했는데, 이때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두 경우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야곱 앞에 나타나시거나 직접 그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인지 지금부터 이 두 경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5: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었지요. 민 12:6-8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시지요. 모세와 같이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고 온 집에 충성된 사람에게 허락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직 이러한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여 말할 만큼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지요.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을 볼 만한 자격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요.
모세의 경우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뒷모습과 옷자락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야곱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직접 음성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의 마음으로부터 음성을 듣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령 시대로 말하자면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신 것인데, 구약시대에는 비록 성령님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 내주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이런 저런 형태로 사역을 하셨지요.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성신의 감동함을 입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상 12:18에 보면 “때에 성신이 삼십 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 가로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하리니 원컨대 평강하소서 당신도 평강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강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했지요. 바로 성신의 감동함을 입으니 그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예언이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상 28:12에는 “또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곧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식양을 주고” 했는데, 이는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할 때도 그 모든 식양을 성신께서 감동함 가운데 알려주셨음을 말하고 있지요. 이와 같이 성신의 감동함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감동함을 입히시므로 그가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철저히 깨어진 상태에서 이와 같이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들은 것이라도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셨다”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9절과 13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다시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 설명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일 5:18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같이 정녕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서 범죄치 않고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결코 악한 자 즉, 원수마귀사단이 만질 수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창 3:14에 하나님께서 뱀 즉, 사단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원수 마귀 사단은 흙 즉, 흙으로 지어진 사람 중에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을 먹고 살지요. 자신들에게 주어진 어둠의 권세를 가지고 비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갖 시험 환난과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어둠의 권세가 접근조차 할 수 없지요. 애굽의 열 재앙 중에서도 고센 땅만은 온전히 지킴을 받았던 것처럼,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주변의 어둠이 아무리 짙다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지킴받고 보호받으며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에 대해 행한 일이 자칫 야곱의 집안 전체에게 화(禍)를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경솔하면서도 커다란 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야곱을 보시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까지도 모두를 지켜주셨습니다. 물론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훗날 그 자손들에게까지 보응이 임하지만 당장에는 야곱으로 인해 지킴을 받을 수 있었지요.
성경에 보면 이런 예가 나옵니다. 왕상 11:11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하셨지요. 즉, 솔로몬 왕이 말년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말미암아 미혹되어,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므로 심지어 이방 신을 위해 산당을 짓고 이방인 아내들에게 분향하고 제사하도록까지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빼앗아 신복에게 주시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2-13절에 보니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13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행하시되 솔로몬 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비 다윗 왕을 생각해서 그 일을 솔로몬 왕 세대가 아닌 그의 아들의 세대에 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다윗을 생각해서 솔로몬 왕의 아들에게도 한 지파만은 남겨주시겠다는 것이었지요. 솔로몬 왕의 행함만을 봐서는, 당장에라도 그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고 그의 후손에게도 남겨줄 지파가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다윗을 생각하시므로 이와 같이 긍휼과 은총을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처럼, 야곱의 아들들도 당장에는 야곱으로 인해 지킴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다윗과 같이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후손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늘 지킴받고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주변까지도 늘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9-10 오전 4:35:02 Posted
2015-09-24 오전 9:52:0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