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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85)  [창35:1-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9.0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만약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일이 여러분의 나아갈 길을 지시하시며 인도해 가신다면 그 삶이 얼마나 형통하고 복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나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가시면 좋겠다.’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롬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고 있지요. 즉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는 분이시기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인도하심을 받는 것과 같지요.
따라서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아예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서부터 아주 밝히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가 ‘나는 매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받아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게 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 아직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란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낌으로 입력해 온 온갖 비진리가 뭉쳐져서 만들어진 여러분의 ‘자아’를 말하지요. 따라서 이처럼 비진리가 뭉쳐진 ‘자기’라는 것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는 결코 맞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동으로 가라’ 하셔도 그것이 ‘자기’와 맞지 않을 때는 순종하여 행할 수가 없지요. 아무리 성령께서 음성을 주셔도 듣지 못하며 설령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해도 무시하고 흘려버리며,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가 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요. 자기 생각, 자기 이론이 먼저 동원되지 않으며, 따라서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자기 생각과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라 해도 자기주장, 자기 방법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종만 해 나가게 되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 이제는 ‘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그 마음과 뜻까지도 깨달아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것이 정녕 주님과 하나 된 것이며 삶 속에서도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많은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지요.

오늘 본문에도 보면 ‘자기’가 철저히 깨어진 야곱에게 이후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하시고 보장하시며 인도해 가시는지가 잘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과 에서 사이의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진 상황에서 야곱에게 20년 전의 상황을 상기시키시며 야곱을 벧엘로 인도하고 계시지요. ‘벧엘’은 야곱이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던 장소이지요.
당시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해 어디 한 곳 의지할 데 없는 상황에서 막연히 외삼촌의 집을 향해 도망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 창 28:14-15 말씀이었지요.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당장 한치 앞의 상황도 확신할 수 없고 아무런 보장이나 미래도 없어 보이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그 언약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키셨고 그를 다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해 오셨으며 창대한 민족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도록 축복해 주셨지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20년 전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시므로 지금의 이 모든 축복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야곱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야곱 편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고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것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이처럼 처음 하나님을 만나 언약을 받았던 곳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단을 쌓게 하고 계십니다.
이는 다시 한 번 야곱에게 예전에 주셨던 언약을 굳게 정하시며 그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또 한 번 야곱에게 이와 같은 언약의 말씀으로 축복하시려는 것일까요? 이는 예전에 언약의 말씀을 주시며 축복하신 것과 지금 다시 한 번 언약의 말씀을 주시며 축복하시려는 것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예전에 언약의 말씀을 주실 때는 야곱이 아직 깨어지고 변화되기 전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이후입니다. 따라서 같은 언약의 말씀이라도 어느 시점에 주시느냐가 매우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아직 영으로 변화되기 전인데도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씀만 문자적으로 들어서는 마치 그 사람이 다 이룬 것 같고 금방이라도 축복이 쏟아질 것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주신 것은 그 사람이 이미 다 이루어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지예정하시는 가운데 그의 중심을 보시고 미리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이지요. 축복의 말씀을 주신 그때부터가 오히려 축복의 그릇을 만들기 위한 연단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연단을 통해 마침내 정금과 같이 나왔을 때, 그때부터가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이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고요. 이때 다시 한 번 주시는 축복의 말씀은 예전에 주셨던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지요. 이제는 그릇이 준비되어졌기에 정말 축복을 주시기 위해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야곱도 바로 이와 같았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주신 언약의 말씀은 장차 야곱이 어찌될 것을 아시고 미리 주신 말씀이었지요.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20년간 야곱을 연단해 가셨던 것이고요. 그래서 이제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어 축복받을 그릇으로 나와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야곱을 예전에 언약의 말씀을 주셨던 장소로 불러 그곳에서 축복해 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지요. ‘나를 왜 다시 그곳으로 오라 하시나.’ ‘왜 그곳에 또 단을 쌓으라 하시나.’ 더 이상 이런 생각을 동원할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마음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아야 할지를 생각했지요. 그냥 ‘이렇게 하라’ 하시니까 그대로만 행하는 차원이 아니라, 왜 ‘이렇게 하라’ 하시는지 그 마음을 헤아려서 그 마음에 맞추어 행하려는 차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마음이 2절부터 잘 나타나고 있지요. 먼저 2절에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요. 그것은 야곱이 지금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러 감에 있어서 자기 혼자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사람에게까지도 한 흐름을 타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은 야곱 개인에게 주신 것이었지만, 그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야곱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축복받고 하나님의 보장과 지키심을 받을 수 있지만,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선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도 야곱과 한 흐름 가운데 있어야 하지요. 즉,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라는 말입니다.
만약 야곱과 한 배를 탄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야곱을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과는 반대로 간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그만큼 훼방을 받게 되지요. 혹여 야곱과 함께 한 사람들 안에 하나님 앞에 불의한 사람이 있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라도 있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막는 것이 되는 것이고요. 야곱과 함께 한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축복을 주실 수가 없지요.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야곱이었기에 야곱은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러 가기에 앞서 먼저 자기 집사람은 물론이고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도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원하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명령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요.
이는 본 교회와 성도 여러분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축복의 언약은 저를 포함하여 주의 종, 레위족, 일꾼들은 물론이고 성도 여러분 모두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저를 야곱에 비유한다면 주의 종과 레위족을 비롯하여 그만큼 믿음 있고 일꾼 된 성도님들은 야곱의 집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외 모든 성도님들과 만민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은 야곱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교회적인 축복과 언약은 저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종과 레위족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성도님들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목자인 저와 주의 종, 레위족, 성도님들 그리고 지교회와 만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 삼박자가 맞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이 온전히 임하는 것이고요. 물론 이 삼박자가 아직 맞지 않았다 해도 야곱으로 인해 그 집안이 축복을 받음과 같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목자를 보시고 축복하시며 여러분 개개인적으로도 합당한 그릇을 만든 분에게는 얼마든지 축복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적인 축복과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하나님 앞에 축복받기 위해 단을 쌓으러 나가면서 자기와 자기 집 사람들과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라” 했습니다. 이는 곧 세상을 끊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 설령 하나님보다 덜 사랑한다 해도 하나님께 쏟아야 할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 바로 이러한 세상 것들을 끊어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그러한 세상 것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그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몸만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축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꼭 응답받아야할 문제가 있으신지요? 축복받기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는데도 아직 축복이 안 옵니까? 영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쥐고 있는 세상 것들을 한번 철저히 끊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도 응답이 없고 축복이 없는지 보십시오.
야곱의 집사람들과 야곱과 함께한 사람들조차도 그들 안에 이방 신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그것을 버리라고 명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각 속에, 눈과 귀와 몸속에 여전히 취하고 있는 세상 것들을 버리라 하십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은 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응답이 없고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이지요.
또한 은혜받은 순간에는 다 끊었다가도 다시 하나하나 받아들이며 취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 것들을 철저히 끊어 버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여러분 마음에도 담대함이 생기면서 믿음으로 구하여 응답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축복이 막혀있고 문제가 얽혀있으며 영적으로 정체되고 있다면, ‘내가 아직 쥐고 있는 세상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진지하게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로 야곱은 하나님 앞에 나감에 있어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말합니다.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적인 것을 의미하지요. 구약은 행위적인 신앙의 시대였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당연히 행위적인 모습에 있어서 정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행위적인 모습의 정결함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의 정결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야곱은 “의복을 바꾸라” 말하고 있지요. ‘의복’은 영적으로 ‘마음’을 뜻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는 먼저 그의 겉옷을 내어버렸다 했는데, 이 겉옷은 추악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겉옷을 내어버렸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온갖 더럽고 추한 죄악된 마음을 내어 버리고 마음 또한 정결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전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린 후에는 즉,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벗은 후에는 “의복을 바꾸라” 한 대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지요. 즉, 거룩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엡 4:22-24에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하지요. 이 말씀과 같이, 어둠 가운데 살던 옛사람의 모습은 철저히 벗어내고 이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거룩한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복을 바꿔 입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응답으로 역사해 주시지요.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진리로 옷 입은 사람일수록 아버지 하나님의 응답도 그만큼 빠르고 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 응답받지 못하고 있고, 어떤 문제 가운데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면 ‘혹여 나는 아직 의복을 바꿔 입지 않은 것이 아닌가.’ 자기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냄새나고 더러운 겉옷을 내어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아까워하며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눈앞에 너무나 빛나고 영광스러운 새 옷이 있는데 이전의 더럽고 추한 옷이 좋다고 하며 새 옷으로 갈아입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분이 정녕 하나님 앞에 나가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의복을 바꿔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세 번째로 야곱이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 했던 일은 사람들로부터 모은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신상은 옛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던 온갖 구습과 죄악된 모습을 의미하지요. 또한 귀고리는 영적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종이 되어있음을 나타내는 장식입니다.
신 15:16-17에 보면, 귀를 뚫는 것에 대한 유래가 기록되어 있지요.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속한 종들에게 자유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때 만약 자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에도 종들 중에 계속해서 주인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송곳을 취하여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영영히 종이 된다 하셨지요. 그래서 이 말씀대로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귀를 뚫어 자신의 종 된 것을 나타내게 했습니다. 귀를 뚫는 것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물론 오늘 본문은 이러한 규례가 있기 이전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과 규례를 주시기 전에도 귀를 뚫는 것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동일했습니다. 다만 모세 때에 와서 그것이 비로소 성문화된 규례, 즉 문자로 기록된 형태의 규례로서 주어지게 된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귀를 뚫는다는 것은 스스로 누군가에게 종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를 뚫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모양의 귀고리를 하게 되었지요. 더욱이 야곱의 시대에 이방인들 사이에서 귀고리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형상이 새겨진 귀고리를 함으로써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 귀고리에 신비스러운 마력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지요. 또한 화려한 무늬의 각종 귀고리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퇴폐적이고 정욕적인 문화를 나타내는 하나의 대표적인 장신구가 되기도 하였고요.
그러므로 이러한 귀고리를 버린다는 것은 우상숭배에서 떠남과 동시에 영적으로 원수마귀사단에게 종 되었던 상태에서 놓임 받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아신다면 오늘날에도 귀를 뚫거나 귀고리를 하는 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분별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야곱은 바로 이러한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다 했는데, 이처럼 땅에 묻었다는 것은 완전히 없애 버린다는 의미이지요. 야곱 자신이 그것들을 보관하고 있거나 딴 장소에 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린 사람들이 다시 찾지 못하도록 땅에 묻어서 완전히 없앴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이제는 어둠에서 완전히 나아와 더 이상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빛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간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사람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나 기도드릴 때 과연 어떠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이신지요? 여러분의 예배와 기도를 또한 여러분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과 행함과 마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받으실지, 오늘 말씀을 통해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야곱이 벧엘로 발행하는 내용부터는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3절에서 야곱은 고백하기를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했습니다.
이 고백과 같이 야곱은 환난날에 자신에게 응답하셨고 자신을 지키시며 함께하신 하나님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그 문제가 해결되고 어려움에서 놓이면 이내 하나님을 찾던 마음이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은 잊은 채 마치 자신이 잘나서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방자히 구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시는데 사람 편에서 늘 변개하고 배신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기까지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처음 여러분을 만나 주시고 체험 주신 하나님,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던 문제 가운데서 여러분을 건져주신 하나님, 그러한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은 그 당시와 비교할 때 어떠하십니까? 설령 아무 응답도 없고, 주신 축복이 없다 해도 우리는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평생을 감사해야 할 텐데, 혹시 그 감사의 마음과 은혜 갚으려던 마음이 변하지 않으셨나요?
야곱은 20년 세월이 지났어도 처음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그 언약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야곱은 하나님만을 생각했지요.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으며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어찌 사랑해 주지 않으시겠고 어찌 축복해 주시지 않겠는지요? 그와 같은 여러분 모두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의 언약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온전히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9-05 오후 4:41:43 Posted
2015-09-24 오전 9:52:0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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