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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84)  [창34:1-3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8.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돔성의 심판 사건을 통해 의인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났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아브라함과 함께 했을 때는 둘의 소유가 너무 많아 함께하지 못할 만큼 큰 축복 가운데 있었지만,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는 소돔의 죄악 중에 거하며 고통받다가 결국 그들과 함께 멸망당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소돔성의 심판과 함께 멸망당할 뻔했던 롯은 다시 한 번 의인 아브라함으로 인해 가까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비록 롯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늘 그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아무리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 선택은 결국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 가운데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멸망하는 소돔성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 주셨지만, 롯의 아내는 그 마지막 기회의 끈마저도 끝내 스스로가 놓고 말았지요. 그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롯의 사위들 역시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장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가 소돔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고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딸 디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이방인의 땅에 거해야 했던 야곱은 딸 디나는 물론이고 아들들에게도, 이방인의 땅에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경계의 말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풍속을 좇지 말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에는 가까이 하지도 말며, 그들과 결혼해서도 안 된다는 것 등이었지요.
특별히 야곱은 자기에게 속한 아내들과 딸에게는 이방인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도, 아버지인 이삭도 모두가 이방인의 땅에 거할 때 이방인들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을 겪었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야곱은 더더욱 아내들과 딸 디나에 대해 신경을 써야 했지요.
또한 야곱은 아내를 구함에 있어서 가나안 땅 이방 여인들 중에서 구하지 않기 위해 아내를 구하러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까지 갈 정도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들들에게도 혹여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도록 당부를 했을 것이고요.
하물며 자신의 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던 야곱이었지요. 그런데도 디나는 그 땅 여자들을 보기 위해 나갔다가 즉 세상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호기심과 동경심, 그리고 미련으로 인해 결국 씻지 못할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34장을 통해 깨달아야 할 영적인 교훈 첫 번째로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동경심 또는 세상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요.
사실, 거의 모든 범죄의 시작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비롯되는데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좇아 온 곳이 바로 세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좇아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다보면 불의와 불법 등 온갖 죄악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약 4:4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혹여라도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 앞에 영적인 간음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음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교훈은 육의 사람의 마음에 대한 것이었지요. 육의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결국 자기 유익과 입장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육의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상대를 위해주는 것 같지만 그 마음에는 또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이지요.
세겜이 디나를 아내로 삼기 위해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세겜 성을 출입하는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모습만 보아서는 세겜이 디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이렇게까지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겜의 마음에는 이렇게 하여 디나를 아내로 삼음으로써 더 나아가 야곱의 집안과 자기 성 사람들이 서로 딸들을 아내로 주고받으므로 결국에는 야곱의 소유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지요.
또한 세겜이 지금 이처럼 디나를 아내로 삼겠다고 한다고 해서, 이전에 디나를 강제로 욕보인 행동이 정당화되거나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지켜 줘야 할 것이고 오히려 더욱 소중히 대해 주어야 하지요. 그런데 세겜은 디나에게 여자로서는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 주고도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용서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12절에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빙물과 예물을 청구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수응하리라” 하며 대신 큰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디나를 아내로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문제는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은혜를 입었을 경우에도 자신이 받은 것과 동일한 수준이나 아니면 그보다 좀 더 큰 것으로 돌려주고 나면 그것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은혜를 갚는 것만도 고마운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지요.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육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한 번 상대를 마음 아프게 했을 때, 다음번에 한 번 잘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지요. 철저히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뿐만 아니라 이후로 다시는 그러한 아픔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한 번 받은 은혜 역시 변함없는 마음으로 간직하며 갚아 나가지요. 한 번 은혜를 갚았다고 해서 예전의 은혜를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세 번째로 살펴본 영적인 교훈은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서로 간에 악순환만을 가져오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동생이 당한 수치를 복수한다는 의도에서 세겜 성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마는데, 이는 또다시 그곳 사람들에게 복수의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 되고 말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생각하사 그 주변 고을들로 하여금 크게 두려워하게 하여 더 이상 피의 보복은 없도록 하셨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지 않으셨다면 결국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은 복수의 칼날에 희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으려 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더 큰 해악으로 돌아오고 말았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을 계산해서가 아니라도 진리의 사람이라면 결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성경 상에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누가 악을 악으로 갚은 사람이 있던가요? 아무리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선으로 대해 주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원수라도 사랑하며 선대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나오고 있지요.
눅 6:27에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했고, 35절 전반절에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즉 빌려주라)” 했습니다. 또한 롬 12:20 전반절에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하셨지요.
분명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들이 수없이 있음에도 작은 일에 서로 미워하며 원수를 맺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한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겠습니까?
물론 디나가 당한 일이 큰 악이요, 수치였지만 야곱의 아들들도 정말 선했다면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큰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랐어야 했지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그것만이 온전한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영적인 교훈 네 번째는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을 보면 결국 자신들이 육으로 심은 대로 육으로 거두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의 딸 디나는 얼마든지 아버지 야곱의 품 안에서 지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자신이 육을 택하여 나갔기에 육의 것으로 거두게 되었지요. 또한 동생의 수치를 갚기 위해 세겜 성의 남자들을 앞장서서 죽였던 시므온과 레위도 훗날 그 대가를 치릅니다.
훗날, 죽음을 눈앞에 둔 야곱이 아들들을 모아놓고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하며 각각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내리게 되지요. 이때 창 49:5-7에 보면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유언하기를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지지요.
세월이 지나고 훗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해진 두 번째 인구 조사 때를 보면 유독 시므온 자손의 숫자가 다른 족속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했을 때, 다른 족속은 대부분 사만, 오만, 육만 이상이 되었는데 시므온 자손만 이만 이천 이백 명으로서 이스라엘 족속 중에 가장 적었지요.
더욱이 더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상 4: 27 후반절에 보면 시므온의 후손들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 형제에게는 자녀가 몇이 못 되니 그 온 족속이 유다 자손처럼 번성하지 못하였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 자손과 비교하시면서 시므온 자손이 크게 번성하지 못했음을 말씀하셨지요.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에 따라 시므온 자손은 그들의 조상 시므온이 행한 일로 인해 야곱의 유언대로 결국 후손 대대로까지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는 레위 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정복 후 레위 자손이 독자적으로 받은 기업은 하나도 없었지요. 그들의 형제들이 소유한 토지 안에서 단지 몇몇 성읍만을 분배받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중에 흩어지리라는 예언대로 레위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만 것이지요. 이처럼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이 행한 악에 대해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겜의 경우도 육으로 심으면 육으로 거두게 된다는 법칙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지요. 야곱의 딸 디나를 욕보이고 더 나아가 야곱의 재산까지 차지하려 했던 세겜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성의 남자들까지도 모두가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육의 사람은 육의 사람들끼리 서로가 속이고 속으면서 자기 유익을 구해 나가지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지킴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육의 사람들은 결국 지킴받지 못한 채 결국 자기가 행한 바대로 거두게 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만 육의 사람들끼리 육으로 주고받는 모든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였다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손해를 입게 되었다면 이를 보던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 벌 받았다’고 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셔서 속인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지요. 어차피 이 땅의 모든 것이 ‘공의’라고 하는 커다란 틀과 법칙 안에서 돌아가도록 해 놓으셨기에 육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육으로 심고 거두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때 만약 세겜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마음이 있었다면, 비록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열어 주실 수가 있으셨겠지요.
예를 들어 세겜이 디나를 욕보인 것은 너무나 큰 악이었지만 만약 세겜의 다음 행동만이라도 진실했다면 하나님께서 죽음만은 피할 길을 열어 주실 수가 있으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세겜이 디나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목적이 야곱의 소유까지 차지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목적만이었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세겜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동생 디나를 세겜에게 아내로 주는 조건으로 세겜과 그 성의 남자들 모두가 할례받아야 할 것을 제안했을 때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은 이 제안을 너무 쉽게 받아들입니다. 사실 세겜은 디나를 아내로 맞은 후에 자신들이 얻을 유익을 생각했기에 야곱의 아들들이 더 어렵고 힘든 제안을 해 왔어도 일단 들어줄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한 제안은 세겜의 입장에서 볼 때 의외로 쉽고 간단했습니다. 이처럼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쉬운 제안이다 보니 세겜은 그 제안에 담긴 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쉽게 승낙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본문 18-19절에서는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소년 즉 세겜이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지체하지 않고 행했다는 점이지요. 이것만 보면 ‘세겜이 디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렇게 지체 없이 즉각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 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육적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겜이 디나를 아내로 맞기 위해 이처럼 즉시로 자기 성의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도록 하는 것만 가지고서 세겜이 디나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오늘 본문에는 세겜이 디나를 사랑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이 있지요. 그런데 이때 세겜이 디나를 사랑한 것은 육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본인은 디나를 너무 사랑해서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디나를 빨리 취하려는 마음인 것이었고 이를 통해 결국에는 야곱의 재산까지도 취하려는 마음에서였던 것이지요.
세겜 스스로도 자신이 디나를 사랑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자기의 속마음은 자신도 모르더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세겜은 한 성의 머리인 추장으로서 당연히 성 전체 사람들의 안전과 유익을 구해야함에도 이처럼 자기 욕심과 유익만을 좇다가 결국 성 전체가 멸망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지요.
이처럼 육의 사랑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육의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보다도 ‘결국 변한다’는 것이지요. 당장에는 자신도 상대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 같고, 그래서 자기 생명까지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해도 육의 사랑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맙니다. ‘이제는 내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들게 되면 예전의 애틋함과 상대를 위해 주던 마음이 사라지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 하게 되지요.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육적인 사랑에 속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저 사람은 변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육적인 사랑에 빠져들지요. 자신 역시 상대를 영으로 보지 못하고 육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육의 사랑이 아닌 것 같고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아도 육을 버리고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육의 속성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 하여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모두가 변하는 육의 사랑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처음부터 온전한 영의 사랑은 아니라 해도 하나하나 육을 버리고 영으로 변화되어가면서 결국에는 영의 사랑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아직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는 지금 당장 보여지는 순간의 모습만 가지고 그것을 영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세겜이 디나를 사랑해서 디나를 아내로 얻기 위해 지체 없이 야곱의 아들들과의 약속을 이행한 것이, 겉으로 볼 때는 디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던 것처럼 보여질 수 있어도 실제 그 속마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육의 사랑은 자기 욕심이 있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변을 고려하거나 상황을 분별하지 못한 채 감정대로 행해 나가게 되지요. 세겜도 결국 이와 같은 육의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의 속임수도 알아채지 못하므로 마침내 자신이 심은 육의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오늘 본문의 교훈은 육의 흐름에 함께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세겜 성의 남자들을 죽이는데 앞장 선 것은 시므온과 레위였지만, 나중에 세겜 성을 노략할 때 보면 야곱의 다른 아들들 중에도 그들과 함께한 아들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27절에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했습니다. 그들이 이와 같이 세겜 성을 노략한 것이 그 누이를 더럽힌 것에 대한 복수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때 함께한 아들들 중에 어떤 아들은 정말 마음에서 분이 나서 당한 것만큼 갚아주려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떤 아들은 당시의 분위기와 흐름에 휩쓸려 그들과 함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약 이처럼 분위기나 흐름에 휩쓸렸던 사람에게 “왜 그러한 일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그냥 따라만 갔을 뿐이에요.” 이렇게 대답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요, 변명입니다. 정말 내 마음에서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함께 동조할 리가 없지요.
더욱이, 단지 마음에만 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함께 행함으로까지 동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마음 안에도 그와 같은 마음이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수군수군거리는 곳에 함께 입을 담고, 남의 험담하는 곳에 귀를 기울이며 악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육의 흐름에는 아예 발도 들여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단지 상대방의 말을 들어준 것뿐인데요.” “나는 그냥 구경만 한 것뿐인데요.”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전한 것뿐인데요.” 하는 이러한 이유나 변명 등은 소용이 없지요.
시 1:1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했습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육과는 흐름을 함께 하지 않지요. 육의 흐름이 있는 곳이라면 심지어 그 길에 서지도 않고 그 자리에 앉지도 않는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육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영의 흐름만 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서는 길은 늘 의의 길이며 여러분이 앉는 자리는 늘 겸손의 자리가 되셔서 참으로 복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8-29 오후 12:57:58 Posted
2015-09-24 오전 9:52:0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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