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 5:17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성령의 소욕 즉 진리, 선, 영을 좇으려는 마음과 육체의 소욕 즉 비진리, 악, 육을 좇으려는 마음은 서로 가고자 원하는 방향이 다르지요.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 즉, 영을 추구하는 사람과 육체의 소욕을 좇는 사람 즉 육을 좇는 사람과는 똑같은 상황이나 문제 앞에서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영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기도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나가게 되지요.
반면에 육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악으로 인해 자기 생각에 따라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해 나갑니다. 오랜 세월 말씀을 들어서 무엇이 선이고, 영이며, 진리인지를 분명히 안다 해도 그보다는 자기감정과 자기 생각이 앞서므로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해 나가지요.
따라서 정말 마음을 영으로 일구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영의 지식을 안다고 해도 그것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들어서 아는 영의 지식으로 인해 어느 정도 겉모습은 포장할 수 있지만 결국은 자기가 마음에 영으로 일군만큼 그것이 행함으로도 나오게 되지요.
그러므로 육의 속성은 단지 눌러놓고 덮어놓는다고 해서 언제까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면 도리어 그렇게 눌러놓고 덮어놓은 육의 속성까지도 다 드러나도록 연단하셔서 결국은 깨어지고 변화되어 온전해지도록 만들어 가시지요.
오늘 본문 34장에서도 우리는 얍복강에서 ‘자기’가 깨어진 야곱이 어떻게 변화된 모습으로 나와졌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육과 영이 어떻게 다른지가 잘 대비되어 나오고 있지요.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가나안 땅 세겜 성 앞에 머물고 있을 때에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이며 그 땅의 추장인 세겜에게 그만 강간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므로 자기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디나를 아내로 삼고자 하지요. 이에 하몰은 야곱을 찾아와 디나를 자기 아들의 아내로 줄 것을 청합니다.
이때 이 소식을 듣고 온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요. 할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여인을 아내로 줄 수 없다고 하며 세겜 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면 디나를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을 속이기 위해 한 말이었지요.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이러한 속셈을 모르는 세겜과 하몰은 그들의 제안을 좋게 여기므로 돌아가서 그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도록 합니다. 이때 하몰과 세겜은 자기 성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들의 구미에도 당기는 말을 하지요. 즉, 자신들이 이처럼 할례를 하여 야곱의 아들들의 청을 들어주게 되면 서로가 딸들을 아내로 주어 한민족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함께 거하게 되면 결국 야곱이 가지고 있는 소유까지도 자신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 했던 것입니다.
세겜 성의 남자들은 이 제안에 이끌려 모두가 할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할례를 받은 지 삼일 째가 되어 가장 고통이 심할 때가 되자, 디나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동생 디나를 데려왔는데,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지요.
야곱의 여러 아들들은 그 성에 가서 모든 재물과 자녀와 아내까지도 사로잡아 집속의 물건을 다 노략해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누이가 당한 수치를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이와 같이 행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은 큰 고심을 하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의 사람들에게 행한 일을 가나안과 브리스 족속 사람들이 듣게 되어 그들이 연합하여 자신을 치게 되면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야곱과 야곱의 집은 그들에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야곱은 이 일을 주도한 시므온과 레위를 나무라며 걱정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오늘 본문에 담긴 영적인 교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절>에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했는데, 여기서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는 것은 디나의 마음에 세상 것을 보고자 하는 마음, 세상 것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아예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 또는 호기심이 없다면 굳이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갈 필요가 없었지요.
그런데 디나에게는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담아만 둔 것이 아니라 직접 세상을 보러 나가는 행함으로까지 나왔기에 결국 이와 같은 수치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롯의 아내도 멸망하는 소돔성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끝내 소돔성 즉,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지요.
이처럼 야곱의 딸 디나 역시 세상의 것을 보기 원하고 취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세상으로 나갔다가, 결과적으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게까지 커다란 고통과 위험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히 12:4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번 버린 것을 다시 쳐다봐서도 안 되지요. 죄악이 정말 너무나 싫고 더럽고 추해서 버린 것이라면 어찌 다시 미련을 가지고 쳐다보겠습니까? 골 2:21에도 보면 세상에 있을 때 취하던 것을 다시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나름대로 기도도 하고 열심히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세상의 것을 다시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열심히 죄를 버리고 또 버리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변화가 더딘가, 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이렇게 많은가’ 이런 생각이 드시는 분이 있다면, ‘혹여 나는 버리고 버린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세상의 것을 바라보거나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회개하고 돌이켰으면, 또한 한 번 육의 것을 끊고 버렸으면, 그것을 다시 바라보거나 취하려는 어리석은 모습은 없어야 하지요. 그럴 때 온전히 육을 버리고 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여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온갖 향락을 즐겼던 솔로몬왕의 고백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말년에 고백하기를 전 1:2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취해 보았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얼마나 철저히 깨달았으면 이처럼 ‘헛되다’는 고백을 또 하고 또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결론짓기를 전 12:13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고백하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헛된 세상의 것을 취하다가 결국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 안에 들어왔다 해도 다시금 세상을 취하다가 사망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요.
야곱의 딸 디나 역시 호기심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세상을 취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자신은 커다란 수치를 당해야 했고 가족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말게 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는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에, 갈 3:3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말씀과 같이,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며 취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분이 한분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 두 번째는 육의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입니다.
우리는 세겜이라는 사람을 통해 육의 사람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지요.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여 욕보인 세겜은 <3-4절>에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합니다. 이 모습을 놓고 보면, 마치 세겜이 디나를 정말 사랑하여 아내로 얻기 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물론 세겜이 디나를 욕보인 후에 그냥 멀리하고 버린 것이 아니라, 이처럼 아내로 맞이하려는 것은 그나마 덜 악한 모습이라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하여 세겜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만약 세겜의 행동이 정당화 된다면 이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세겜이 정말 디나를 사랑해서 아내로 얻기 원했다면 어찌 이처럼 상대를 욕보이고 수치를 주는 행동을 했겠는지요?
오히려 더 지켜주기 원할 것이고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서 아내로 얻기까지 소중히 여기며 기다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컷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난 후에 “내가 이렇게 보상해 주겠다.” 한다고 해서 이전의 잘못이 다 용납되는 것이 아니지요. 정말 상대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아예 상처 주거나 고통 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그러한 일이 생겼다면, 다른 것으로 보상해 주면서 “앞으로 잘할게.”라는 말 한마디로 끝낼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이전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디나를 욕보인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은 디나를 세겜의 아내로 삼겠다는 제안을 하러 야곱 앞에 나왔을 때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사과는 한 마디도 없었지요.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의 딸을 세겜의 아내로 달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선을 알고 진리를 알며 도리를 아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은 디나를 세겜의 아내로 삼고자 하는 목적이 단지 세겜이 디나를 사랑해서만은 아니었지요.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은 디나를 세겜의 아내로 데리고 오기 위해 야곱의 아들들과 약속을 합니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세겜과 하몰은 자기 성의 남자들이 이러한 제안을 수락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요.
21-23절에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 것은 세겜 성의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렇다 해도 이 말 안에는 세겜과 하몰의 숨은 속셈이 담겨 있지요. 단지 좋은 목적에서 디나를 세겜의 아내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결국에는 야곱의 소유까지도 전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불의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겉으로는 상대를 위해 주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순수한 의도나 목적보다는 결국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육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상처 주고 고통 주는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그럴 수도 있으며 ‘다른 것으로 보상해 주면 되지 않나’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세 번째로 깨달을 영적 교훈은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했지요. 반면에 <7절 전반절>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했습니다.
같은 상황과 문제 앞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하고 있지요. 야곱은 잠잠하였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만약 예전의 야곱이라면 어찌했을까요? 야곱도 분명히 심히 노하여 당장 어떻게 해볼 방법을 찾았겠지요. 아들들이 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당장 사람을 보내어 아들들을 불러왔을 것이고요.
그러나 지금의 야곱은 아들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금 당장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기에 아들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야곱은 설령 자신의 딸이 큰 수치를 당했다 해도 그것에 대해 자신도 똑같이 악으로 갚으려는 마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의 야곱이라면 분명히 꾀를 내어 어떻게든 보복을 하려 했겠지만, 지금의 야곱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말이지요. 또한 야곱은 주변의 상황이나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한 채, 당장의 기분이나 감정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20년간의 연단을 겪으면서, 이제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해서도 미리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더욱이 야곱은 홀로가 아니라, 가족과 종들과 많은 재산을 책임지는 머리 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기 혼자만의 기분이나 감정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육의 사람들은 당장의 기분이나 감정에 이끌리기 쉬우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파생되어질 문제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으로 인해 주변사람들까지 겪게 될 고통도 생각하지 못하지요. 더욱이 무엇보다도 육의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당한 손해나 자신에게 해를 준 사람에 대해 반드시 갚아주어야 분이 풀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롬 12:21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결코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의 악을 선으로 갚아 줄 때 이것이 진정한 승리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자신에게 그처럼 악을 행하며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오직 선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기 원하셨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지요. 또한 주님의 제자들도, 사도들도 믿음의 선진들도 한결같이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의 누이 디나가 당한 수치를 엄청난 악으로 갚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자신들은 누이가 당한 수치를 갚았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 성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노략질까지 한 것은 너무나 큰 악입니다.
그러면 혹여 어떤 사람은 ‘구약시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 주던 때이지 않습니까?’ 하고 물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도록 허락하셨는지, 그 원래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자칫 악을 방관하여 놔두므로 그러한 악들이 백성 가운데 퍼지는 것을 경계하시려는 것이지, 결코 자신이 손해 본 만큼 되돌려 주고 복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레 19:18에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야곱이 살던 시대는 이러한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이지만, 정녕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도 선한 양심대로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악이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 가운데 심판하시지요.
롬 12:19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을 좇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는 상대를 용서하게 되지요.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며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시 37:1-2에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했지요. 행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3절 전반절에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말씀하고 있지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선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믿고 의뢰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은 형통함의 길이며 축복의 길임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도 계속해서 34장에 담긴 영적인 교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고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럴 때,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지요. 평상시에는 온유하고 차분해 보이던 사람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막상 자기의 유익에 크게 관련된 일 앞에서는 그동안 눌러 놓았던 육의 속성이 그만 드러나고 마는 경우들이 있지요.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이처럼 극한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자기’가 철저히 깨어진 야곱은 사실 육으로 보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지요. 딸 디나가 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은 ‘잠잠했다’ 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 나올지를 야곱은 알았기에 아들들이 들에서 돌아오면 그들을 설득하여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맡기려고 하였지요.
예전처럼 육의 지혜와 방법과 꾀를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려 했던 것이지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여러 시간에 걸쳐서 야곱이 깨어지고 변화되는 과정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도 어떤 변화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지요?
<롬 2: 13>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마음에 영으로 일구어 행해 나갈 때라야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예전과는 다른 변화된 모습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이고요.
일 년, 이 년, 오 년, 십 년을 신앙생활 해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모습이고, 여전히 마음 안에 있는 시기, 질투, 판단, 정죄, 미움, 간음, 혈기, 이러한 악 하나 버리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은 비진리로 뭉쳐진 ‘자기’가 얼마나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 16:24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녕 주님을 따르기 원하고 주님 계신 그곳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면 신속히 ‘자기’를 부인하고 깨트려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에는 오직 주님만이 계시므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8-22 오후 1:40:19 Posted
2015-09-24 오전 9:50:2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