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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81)  [창33:12-2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8.0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이란 썩어지고 변질되는 것으로서 참되고 변함없고 영원한 ‘영’과는 반대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육의 사람의 가장 큰 속성은 바로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처음에는 너무 뜨거운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식어지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섬김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는 것이고요.
지금은 아무리 뜨겁고 충만한 것 같으며, 마음에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해도 여전히 육의 속성이 남아 있는 한은 언젠가 변질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육이 남아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변질되는 것은 아니지요. 아직은 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해도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며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은혜를 입어 나가면 자신을 지키며 변함없는 모습으로 달려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쉬며 다시금 세상에 눈을 돌리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지키지 못하여 변질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육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서 늘 자신을 점검하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전 10:12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과 같이 온전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결코 교만해지거나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지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도 지난 20년간의 연단을 거치면서 육의 속성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삼촌 라반을 통해 받은 연단의 과정에서 ‘육의 사람이 어떠한지’를 깨달았던 것이지요. 더욱이 이제는 ‘자기’가 깨어지고 나니 육에 대한 분별력도 더 밝히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2절에 보면 형 에서가 야곱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형의 입장에서는 동생을 생각하고 위한다는 마음에서 이처럼 자신과 함께 집으로 갈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지요. 두 형제가 서로 화해하고 난 상황에서 형이 이렇게 제안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형의 제안을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중히 거절하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이때 왜 그랬을까요? 이는 바로 야곱이 형 에서의 마음 즉 육의 사람의 속성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형 에서가 한 말은 진심에서 동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육의 속성은 변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형의 마음이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라고는 장담을 못하지요.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야곱 편에서는 형의 마음에 어찌하든 맞추려고 노력을 한다 해도 어떤 말이나 행동이 형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게 되면 언제라도 형의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육의 속성을 알고 있는 야곱으로서는 형과 함께 거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차라리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도 좋은 것임을 알았기에 이처럼 형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지금 야곱에게는 많은 가축의 떼가 있는데 형 에서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가축들이 있지요. 따라서 형 에서와 야곱이 함께 거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가축 떼가 함께 거하기에는 곤란한 상황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축에게 먹일 풀도 그렇고 물도 부족해질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롯이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야곱과 에서도 다시 나뉘어져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자칫 형 에서와의 사이가 다시 안 좋아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전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그랬던 것처럼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때 가서 형에게 ‘형이 우하면 내가 좌하고 형이 좌하면 내가 우하겠다.’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가 생길 수 있지요.
만약 형이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선택해 갔다 해도 나중에 보니 자기가 선택한 곳보다 동생이 있는 쪽이 더 좋아 보이게 되면 그때 가서 얼마든지 또 마음이 변하여 다시 트집을 잡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육의 사람은 어차피 자기 유익, 자기 입장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말했다 해도 나중에 자기에게 불이익이나 해가 오게 되면 그 마음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울 왕이었지요. 다윗이 자신에게 유익이 될 때는 다윗을 군대의 장으로까지 삼았었으나 백성들이 그를 더 사랑하고 따르는 것 같자 이내 시기하고 질투하여 심지어는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살려주었을 때는 사울 왕도 이러한 다윗의 선(善)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요.
삼상 24:17-19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삼상 26:21에서는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말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이것도 잠시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이내 마음이 변개된 사울 왕은 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다윗의 뒤를 쫓았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육의 사람은 결국 자기 유익과 자기 욕심을 좇아 순간순간 변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외삼촌 라반을 통해 철저히 체험했기에 이제 와서 또다시 그러한 연단을 자초하는 길로 들어서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외삼촌 라반이 자신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자신을 대했는지를 야곱은 너무나 잘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지금 형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간교함 속에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은 서로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야곱이 이처럼 형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도 현실적으로 볼 때는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외삼촌의 집을 떠나 먼 길을 무리해서 왔기에 이미 야곱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가축 떼들도 많이 지쳐 있었지요. 더욱이 가축의 새끼들은 그만큼 더 약하다보니 지금 또다시 무리해서 가축을 몰게 되면 자칫 죽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서도 이러한 야곱의 이유가 타당하다고 여겼기에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에서 편에서는 다시 한 번 더 야곱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합니다.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이번에도 형 에서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대답하지요. 이에 결국 형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서 우릿간도 짓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이번에도 형 에서의 제안을 거절한 것일까요? 또한 왜 형의 집으로 가지 않고 ‘숙곳’이라는 곳으로 가서 정착을 한 것일까요? 먼저 야곱이 이번에도 형 에서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번에도 역시 육의 사람들의 속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형 에서가 야곱의 무리와 함께 남겨 놓으려는 사람들은 어차피 에서의 사람들이지요. 따라서 지금은 물론 야곱을 돕게 하겠다는 좋은 의도에서 이들을 남긴 것이지만 잘못하면 이들이 야곱과 형 에서 사이를 이간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역시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 있으면서 체험했던 일이었지요.
바로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고 했던 말이 결국은 라반의 심기를 더욱 자극함으로써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도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에도 에서 수하의 사람들이 에서에게 어떻게 말을 전하느냐에 따라 에서와 야곱 사이에 큰 영향을 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야곱에 대해 좋게 전한다면 그것이 에서와 야곱 사이에 도움이 되겠지만, 만약 자기들 보기에 마음대로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안 좋게 전한다면 이는 어렵게 회복해 놓은 형 에서와의 관계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고 또한 자신이 체험했던 일 속에서 충분한 교훈을 얻은 야곱은 이러한 상황에서 형 에서의 제안을 극구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자기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주변 사람으로 인해 결국 자신에게 피해가 올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이간이 될 수도 있지요. 이런 저런 오해 가운데 판단하여 그것을 또 말로 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어야 하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아서 늘 거기에 대비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지금 또다시 형 에서의 제안을 거절한 것 역시 결코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에서 생각을 동원한 것이 아니며 간교한 꾀를 동원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에서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명철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지요.

다음으로 야곱이 형 에서에게는 마치 잠시 후면 곧 뒤따라 갈 것처럼 말해놓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삭의 뒤를 잇는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야곱입니다. 따라서 야곱과 에서가 함께 거한다 해도 결국 더 큰 축복을 받는 것은 야곱이며 형 에서가 야곱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지요. 그러니 만약 에서와 야곱이 함께 거하게 된다면 어차피 에서는 자신이 장자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다시금 상기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야곱에게 감정을 품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이제 와서 형 에서 아래로 들어가 그 밑에 거할 수도 없는 것이고요. 육적인 질서로는 야곱이 형 에서를 얼마든지 섬기고 받들 수 있지만, 영적인 질서 상으로는 야곱이 위이기 때문에 야곱이 에서 밑에 있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영적인 질서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도 여덟 아들 중에 막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기에 영적인 질서 상으로는 그가 제일 머리가 되듯이 육적인 질서와 영적인 질서와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지요. 따라서 눈에 보이는 육적인 질서도 당연히 존중하며 서로 간에 섬겨야겠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 영적인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 보게 되면 오늘 본문의 야곱의 모습이 다소 간교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형과 함께하지 않기 위해서 교묘하게 꾀를 쓴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예전의 야곱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전에는 자기 생각과 자기 지혜, 자기 경험이 먼저 동원된 것이었지만 지금은 자기가 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분별하여 주관을 받아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지혜를 받아 형통한 길로 인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세상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지혜로워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식이나 능력 면에서 뛰어나서가 아니지요. 바로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기 때문에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도 예전에 ‘자기’를 의지할 때는 그것이 마치 지혜로운 것 같아 보였지만 결과를 보면 형통이 아니라 불통이었지요. ‘자기’가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를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히려 ‘자기’를 다 내려놓고 나니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해 가시므로 형통한 길로만 인도받을 수가 있었지요. 여러분이 이 법칙을 잘 깨우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깨뜨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더 밝히 받을 수가 있지요.
성령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시므로 사람이 알 수 없는 앞일에 대해서도 능히 알려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능히 형통한 길로 인도받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하여 그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지식과 경험을 앞세워서는 안 되지만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지식과 경험을 성령의 주관하심 가운데 활용해 나가는 것은 필요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쌓고 나름대로 많은 경험과 연륜을 쌓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런 분이 이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래서 그동안 자신이 배운 지식과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일이 잘 될까요? 본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지만 자기 지식과 경험을 내세우는 이상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다가도 어디쯤 가면 막히고, 이런 저런 문제에 부딪히지요. 이처럼 자기 생각과 이론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깨뜨리라 하시는 것이며 모든 이론을 파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자기를 깨뜨리고 모든 자기적인 지식이나 이론을 깨뜨리라 하니까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쌓은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세상에서 배운 자기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방법과 맞지 않아서 그로 인해 하나님께 불순종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철저히 무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경험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과감하게 버려야 하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경험 중에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얼마든지 좋게 쓰일 수가 있는데 문제는 ‘자기’가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칫 자기 생각과 지식이 앞설 수 있다는 데에 있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기 생각과 지식이 먼저 앞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되어야 하며 그럴 때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전의 야곱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자기 지혜와 경험을 동원했겠지요. 그런데 예전에는 그 마음이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익이 될까’ 하며 ‘어떻게 하면 어려움을 피해볼까’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똑같이 지혜와 경험을 동원하더라도 예전과는 근본 마음이 달라졌지요.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아니고 당장 눈앞의 어려움을 피해 보려는 마음도 아닙니다. 자기 지혜와 경험을 먼저 동원하려는 마음도 아니며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인도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지요. 이처럼 ‘자기’를 깨뜨리고 사심과 욕심도 버리고 나니 똑같이 지혜와 경험을 동원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인도받아 나가더라는 말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도 여러분이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과 경륜이 물론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 지식과 경험이 앞서고 그것만을 의지해서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만 해 나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열매를 얻더라도 결국 ‘자기’가 한 만큼만 얻게 되는 것이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문제와 어려움 앞에 좌절을 맞게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아무리 자기 지식과 경험이 많다 해도 그것을 먼저 앞세우지 않습니다. 성령의 주관하심을 좇아 인도받으며 다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은 하나님의 뜻과 방법 안에서만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제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기 위해 뉴스를 본다고 해서 거기서 부터 얻은 지식에 의존하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참고 자료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전문가들이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주장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항상 참이고 우선이지요.
예를 들어 유가(油價)나 미국을 비롯한 세계정세의 흐름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예측을 내놓았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설령 많은 육의 지식을 입력한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내 생각이나 지식이 먼저 동원되는 일은 결코 없으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인도받는 데 있어서도 결코 지장을 받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러한 지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좋은 방향으로 활용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깨뜨릴 때만이 분별의 눈이 열릴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사심, 자기 욕심과 유익을 구하는 마음,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려는 마음 등이 남아있다는 의미이지요. 이런 마음이 있게 되면 약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처럼 결국 미혹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분별의 눈이 어두워져서 무엇이 정도이고, 무엇이 옳고 형통한 길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의 길인지를 못 본다는 말이지요. ‘내가 저 사람은 잘 아니까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면서 이렇게 자기 생각과 경험에 비추어 일을 이루어 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물론 선한 마음에서 상대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으므로 분별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조건 믿어 준다고 했다가 둘 모두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보다는 야곱이 형 에서에게 했던 것처럼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 때도 있지요.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은 이점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밝히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느냐에 따라 그 축복은 전혀 달라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처럼 자기를 깨뜨리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는 경우이지요.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왜 축복받지 못하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드릴 텐데, 사모함으로 준비하셔서 이 말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축복의 길로 나오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련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도 많은 다짐과 각오를 하셨을 것입니다. 또 다음 주에 수련회를 가시는 분들도 그러실 것이고요.
그런데 오늘 말씀의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육의 사람은 그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회개하는 순간에 흘리는 눈물, 콧물보다도 그 후에 변화된 마음과 행함이지요. 또한 결심하는 순간에 흘리는 결단의 눈물보다도 그 후에 나타나는 변화된 모습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에서 씨름하는 그 순간에만 애쓰고 힘쓰며 간절히 매달렸던 것이 아니지요. 그 후부터 곧바로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모습이 되어야 하지요. 회개하는 순간에만 결단하는 순간에만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백이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마음과 행함으로도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인정하시며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 관계가 쌓여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 했습니다. 결코 세상 육의 것에 다시 눈 돌리지 마시고 오직 영의 것만을 사모하고 바라보며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뜨거울 때만 기도하고 충만할 때만 영의 것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오직 천성 문만을 향해 달려가야 할 때이지요.
이제는 또다시 죄악 가운데 옷을 더럽혔다가 다시 빨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난 회개 예배와 이번 수련회를 통해 부어주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이번에는 기필코 영을 향해 온 영을 향해 달려가되 그 고지에 이를 때까지 쉼 없이 달려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2005년 영광과 축복과 거둠의 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언약 이 본교회의 모든 분야에는 물론이고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사업터, 일터를 비롯하여 여러분이 가는 모든 곳 위에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8-08 오후 1:52:52 Posted
2018-05-07 오후 12:00:3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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