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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80)  [창33:4-1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7.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자 야곱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었던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야곱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느린 채 무서운 기세로 야곱을 향해 오고 있던 에서가 막상 야곱과 마주 대하는 순간에 이르자 그동안 마음에 쌓여있던 모든 감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면서 오히려 동생 야곱을 끌어안고 울며 입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순식간에 에서의 마음이 이처럼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역사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바로 야곱 자신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형이 나를 해치면 어떻게 하나’ 하며 불안에 떨던 야곱이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 앞에 나아갔지요. 예전에 행했던 자신의 행동을 마음 중심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형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설령 형이 자신을 해한다 할지라도 야곱의 마음에는 형 에서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의 감정이 전혀 없었고, 이제는 형의 입장을 이해하며 사랑의 마음까지 가졌던 것이지요. 그러니 야곱에게는 더 이상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나니 야곱은 이제 형 에서 앞에서도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교만함이나 자존심 그리고 형을 무시하는 마음과 간교한 속성 등을 다 내려놓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겸비함으로 형 앞에 몸을 굽힐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부터 나오는 겸비함이었기에 그 모습에 형 에서도 마음에 감동함을 입게 된 것이지요.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지만, 사람 사이에도 ‘진실’은 반드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야곱의 진실 앞에 에서는 그동안 야곱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과 분한 마음에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도 다 잊은 채, 이제는 오히려 동생 야곱에 대한 애틋함과 측은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성도 여러분, 야곱이 집을 떠나간 후 아버지 이삭의 집에 남아 실질적으로 장자로서의 삶을 산 것은 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에서는 자신이 동생에게 속아 장자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당시에는 분한 마음에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가졌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여전히 장자로서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해 갈 수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장자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한 감정이 누그러지게 된 것이지요.
장자권을 빼앗긴 피해가 곧바로 자신에게 왔다면 계속해서 감정을 쌓아갔겠지만 장자권을 빼앗긴 후에도 큰 변화 없이 여전히 장자처럼 살아간 것은 자신이었기에 동생 야곱에 대한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누그러질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오랜 만에 동생 야곱을 보게 되자 ‘자신은 편히 살아가고 있는 동안 동생은 그 오랜 세월을 얼마나 고생하며 지냈을까’를 생각하니 긍휼의 마음까지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마음 졸이며 살았을 동생 야곱의 마음이 느껴지며 동생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더 크게 대두되어져 나오게 된 것이고요.
물론 에서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로 간에 쌓인 미움과 감정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상대의 입장을 포용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야곱 자신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처럼 자신이 먼저 깨어지고 변화되어 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원수 되었던 사람과도 화목할 수 있도록 역사해 가십니다. 내 의와 내 자존심, 내 틀 등이 깨어지고 나면 아무리 걸림이 되었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지요. 그러니 ‘아,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이 되며, 예전에는 무조건 상대방의 탓으로만 돌렸던 것을 이제는 내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단지 머리로만 아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깨닫게 되므로 그것이 행함으로도 나와지게 되는 것이고요. 그럴 때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하며 포용할 수 있는 것이며 참된 섬김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상호간에 되어진다면 그런 관계 속에 어찌 화평이 깨어지겠고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나겠는지요? 사단이 역사할 틈도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해결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를 철저히 깨뜨리시므로 누구와도 걸림이 없이 서로 간에 이해하고 섬기며 화평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지는 5절에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말씀합니다.
에서는 야곱이 20년 전 집을 떠날 때 아내를 구하러 간다고 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내와 자녀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습니다. 따라서 야곱과 함께한 여인과 아이들이 야곱의 아내와 자녀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물어서 확인하고 있는 것은 에서가 진심에서 기쁜 마음으로 물은 것이었지요.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라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려는 의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의 대답이 참으로 지혜로웠지요.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했던 것입니다. 이는 에서의 마음에도 합한 대답이었지요. 사실 지금 당장은 에서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야곱을 맞아주고 있고 대화하고 있다 해도 에서는 여전히 육의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은 은혜가 임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아주 심하지요.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쉽게 마음이 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임했을 때는 누구라도 다 이해하고 용서할 것처럼 말하다가도 은혜가 떨어지고 심사가 꼬이게 되면 이내 사람들과 다투고 걸리며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은 에서가 기분이 좋은 상태라 해도 야곱이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는 이내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에서가 좋은 마음으로 야곱에게 함께한 사람들이 누구냐 물었지만 이때 만약 야곱이 조금이라도 에서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대답을 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예를 들어 야곱에게 아직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나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대답하지는 않았겠지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으며 자식들도 이렇게 많이 낳았다고 하면서 자랑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그렇게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이내 에서의 마음이 상하여 변했겠지요.
비록 자신이 장자권은 빼앗겼어도 지금까지 장자로서 부족됨이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동생의 말을 들어보니 동생이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동생이 그렇게 축복을 받은 것이 자신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 수가 있지요.
즉, 자신이 받아야할 축복을 동생 야곱이 가로챈 것이라 느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 깊은 곳에 눌러놓았던 감정이 다시 일어나게 되지요.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비롯하여 여전히 동생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보다 위에 있으려 한다는 생각에 동생에 대한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에서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을 만한 말을 하지 않았지요. 형 앞에 자신을 ‘주의 종’이라 낮추어 표현하며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합니다. 자신은 형 에서의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 형 앞에 철저히 낮은 사람임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떠한 식으로든 형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려 하지 않았지요. 자신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형이 다시 상기하게 되거나 자극받지 않도록 지극히 겸비한 말로서 대답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차피 육의 사람들과 대하다 보면 육의 속성을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하지요. ‘내 마음이 이러니까, 상대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며 상대를 무조건 믿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믿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육’이라는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서 굳이 어려움이나 시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잠 25:11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는 말씀과 같이 합당한 말 한 마디로 인해 화가 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 한 마디로 인해 복이 화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어떤 분들은 자신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해 놓고도 ‘상대가 왜 저러나’ 하며 이유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분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라면 과연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어떠할까’를 먼저 헤아려 보라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물질의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이렇게 크게 축복을 받고 있다’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이 은혜가 되고 자신을 돌아보며 도전받는 기회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믿음이 여린 사람이라면 그런 말이 오히려 그 사람을 낙심케 만들며 시기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축복받은 간증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이 축복받은 간증을 해도 상대에게 믿음이 되고 소망이 되도록 하는 것과,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또한 똑같이 진리를 가르친다 해도 단지 지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로 가르치는 것과 정말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꼴을 먹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진리의 꼴을 먹일 때도 받을 만한 그릇과 그렇지 않은 그릇을 잘 분별해서 먹여야 하는 것도 중요하구요. 바로 야곱의 경우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겸비함으로 인해 형 에서의 마음에도 흡족한 답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6-9절에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말씀합니다.
야곱이 아내들과 자녀들로 하여금 형 에서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도록 한 것인데, 이때도 야곱은 요셉와 라헬로 하여금 마지막에 나와 절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지요. 야곱에게 있어서 영적으로는 라헬이 첫번째 부인이었고 그가 낳은 요셉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기에 이렇게 가장 윗사람처럼 대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은 말로만 자신을 낮추며 형 앞에 절을 한 것이 아니었지요. 마 6:21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진심에서 나오는 행함이라면 이처럼 눈에 보여지는 정성도 함께 내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 역시 자신이 20여 년 동안 고생하며 어렵게 모아온 재산이었지만 형 앞에 정성을 다한 예물로 자신의 마음을 내 보이고 있지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하는 형의 질문에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했는데 야곱이 이렇게 형으로부터 은혜를 입기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된 모습들을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이처럼 정성된 예물로 내보였던 것이지요.
이에 형 에서 역시 동생의 마음을 받았으므로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말합니다. 에서는 그동안 장자와 같은 삶을 살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도 있었지요. 충분히 누릴 만큼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동생의 소유까지 받을 필요가 없었고, 이미 동생이 자신 앞에 철저히 낮아지는 것을 보았기에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이와 같은 아량을 베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때 야곱은 어찌해야 했을까요? ‘이제 내 마음은 충분히 표현했으니 그냥 내가 도로 가져도 되겠지’ 하며 형에게 주려던 예물을 다시 거두어도 될까요?
그런데 야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번 마음에 정한 것이었기에 형이 그렇게 말을 한다 해서 다시 거둘 마음이 아니었지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었거나 형에 대한 모습이 형식적인 것이었다면 이쯤에서 드리려던 예물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한번 드리려던 것이었기에 결코 변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끝까지 표현했던 것이지요.
또한 이렇게 예물을 심음으로써 자신이 형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고요. 일부러 그것을 노리고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법칙을 정확히 아는 야곱으로서는 이후에 어떠한 시시비비도 없도록 하기 위해 이번 기회를 통해 형 에서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해 놓고자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 5:23-24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화목한 가운데 드리는 예물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신다는 의미도 되지만 사람이 정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한번 드리기로 했던 예물도 이런 일, 저런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드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처음 정한대로 드리지 못하기도 하며 아예 없던 일로 하는 경우도 있지요. 뜨겁고 은혜받았을 때의 마음과 그 은혜가 식어지고 난 후의 마음이 이렇게 다르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후 9:7에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결코 변개함이 없이 정한 마음으로 행했던 야곱과 비교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야곱이 에서에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같다” 했는데 이는 단순히 아첨하기 위한 말이 아니지요. 예전의 간교한 야곱이었다면 이 순간 얼마든지 아첨하는 말로 형의 마음을 녹이려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야곱은 예전의 야곱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정말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섬김과 겸비함의 표현인 것이며, 굳이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 한 것은 이 모든 응답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전에 간교한 속성을 가지고 있던 야곱과 지금 그러한 것이 철저히 깨어지고 난 후의 야곱과는 설령 똑같은 말을 한다 해도 그 말 속에 담긴 진실함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화려하고 유창한 말보다는 그 말에 담긴 진실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듣기 좋은 말을 해야 상대방의 마음에 맞출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녕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섬김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고백한다면 그것이 곧 상대의 마음에 감동함을 주어 움직이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야곱과 에서가 이렇게 화해하고 난 이후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고 저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 보기에 좋은 방법대로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을 깨뜨리라 하시지요.
그 생각이 깨어지기 위해 연단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깨어졌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사람의 방법이 당장에는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 결과를 보면 화평이 깨어지고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경우들을 보게 되지요.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방법은 모든 것을 화평 가운데 풀어 가십니다. 설령 일이 좀 더디고 지체되는 것 같아도 모두가 화평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끄시지요. ‘자기’가 깨어진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화평으로 이끄실 때 순종하여 순적이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지기 전에는 너무나 고민이 되어 ‘내가 이와 같이 죽겠다’ 하던 것도 자기가 깨어지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순종해 나가면 너무나 순식간에 해결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결론은 바로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고, 열매가 없으며 서로 간에 불편하고 화평이 깨어질 때. 그로 인해 마음에 고민이 되고 힘이 들 때,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자기 의와 틀과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보셨듯이 야곱도 ‘자기’가 깨어지고 나니 모든 것이 얼마나 기쁨과 평안 속에 풀어져 나가고 있습니까? 예전처럼 아웅다웅하며 마음에 감정을 품고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모습을 버리니 마음 중심에서 섬김이 나오게 되었고 입술의 고백 하나 하나가 상대를 감동시키는 선의 고백이 나오고 있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모습만 되어 보십시오. 사업터, 일터를 비롯하여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이 순간에라도 해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열매 없이 귀중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으로 부어주시는 이때에 모두가 ‘자기’를 깨뜨리고 변화되어 순적하고 형통한 길로만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8-01 오전 2:15:57 Posted
2015-09-24 오전 9:50:2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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