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음료수의 병뚜껑이 ‘꼭’ 닫혀 있게 되면 아무래도 어린아이의 힘으로는 뚜껑을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목은 마르고 음료수는 너무 먹고 싶은데 자기 힘으로는 열리지 않는 병뚜껑을 쥔 채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힘을 쓰게 되지요.
그러다가 결국 아빠에게 가서 “아빠, 이것 좀 열어주세요”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아이는 마침내 아빠가 손쉽게 열어준 음료수 병을 들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 힘과 능력만 의지하려고 했을 때는 아이에게 너무나 커 보이던 문제가 아빠에게 의뢰했을 때는 이처럼 아주 간단히 해결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잠 3:5-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했고 잠 16:3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했습니다. 자기가 하려고 했을 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던 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뢰했을 때는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한다고 해서 무조건 형통한 길로 인도받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바로 자기를 철저히 깨뜨리고 변화되는 역사가 따라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정녕 ‘자기’가 온전히 깨어져서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오직 예와 아멘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깨어졌다는 증거가 바로 순종을 통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의 사람이라는 증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순종이지요. 자기 생각, 자기 의, 자기 틀 등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에도 이유나 변명이나 핑계가 없이 온전한 순종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지요.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올 것이다’ 해도 ‘아멘’ ‘지팡이를 바다로 내밀어 홍해를 갈라라’ 해도 ‘아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해도 ‘아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 해도 ‘아멘’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지식과 한계를 뛰어넘는 그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직 ‘아멘’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지요.
야곱도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나니 이제는 자기 생각이나 방법은 모두 접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맡기는 모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면 잠 16:7에 말씀하기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원수라도 더불어 화목케 하신다 하셨으니 하물며 다른 문제들은 그것이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능히 해결해 주시지 않겠는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과연 하나님께서 금방이라도 서로 간에 큰 불행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야곱과 에서 사이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에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은 천사장 미가엘과 밤새 씨름을 하여 마침내 미가엘 천사장으로부터 축복의 언약을 받아냈지요. 그러나 야곱이 눈을 들어보았을 때 그의 앞에는 여전히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 형 에서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분명 축복의 언약을 받고 난 이후인데도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만을 볼 때는 이전과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이 축복의 언약을 받기 전과 받은 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야곱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본문에 보면 야곱은 지금 자신의 가족들을 셋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을 다음에 두었으며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두었지요. 이 모습만 보면 마치 야곱이 다시 예전처럼 자기 지혜와 방법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해(害)하려고 오는 형에 맞서 대비책을 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야곱이 처음에 형 에서가 자신을 향해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은 자기 생각 가운데 대비책을 세웠었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면서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이는 어떻게든 자기 재산을 조금이라도 지켜보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며 자신도 살아보겠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야곱이 이번에는 자기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삼중(三重)으로 세우고 있지요.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이렇게 한 것이 형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에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자기의 소유를 지키며 생명을 구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을까요?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예전의 야곱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이 이처럼 자기 아내들과 자녀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세운 후에는 자기가 그들 앞 즉 제일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자기 아내들과 자녀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세운 것이 결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지요.
만약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세운 것이었다면 당연히 자신이 제일 뒤에 있었을 텐데 야곱은 오히려 자신이 제일 앞에 나아감으로 만약 형이 자신을 죽이고자 할 때는 자신이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의 야곱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의 야곱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지요. 죽음을 각오한 채 자기가 가장 먼저 죽더라도 자기 뒤에 있는 아내들과 자녀들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형이 자신을 치게 되면 그 틈을 타서 아내들과 자녀들에게는 도망갈 길을 열어주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이렇게 한다고 해도 만약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는 모든 가족을 다 지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삼겹줄을 치게 된 것이었지요. 이렇게 삼겹줄을 침으로써 자신이 먼저 죽고 그 다음으로 여종들과 그의 자녀들이 죽으며 그 다음으로는 레아와 그의 자녀들이 죽더라도 마지막에 있는 라헬과 요셉만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야곱이 라헬과 요셉을 무리의 제일 뒤에 세운 것이 그들만을 편애해서였을까요? 육으로 보면 이때 야곱이 라헬과 요셉만을 편애해서 이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야곱이 이렇게 했던 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지요. 그것은 바로 영적인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 중에 야곱이 가장 사랑한 것은 라헬이었지요. 야곱이 처음부터 아내로 얻고자 했던 것도 라헬이었고 야곱이 14년간이나 외삼촌을 위해 봉사한 것도 결국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레아나 다른 두 여종을 아내로 얻은 것은 처음부터 야곱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었지요. 그러니 외삼촌 라반이 꾀를 써서 야곱에게 레아를 먼저 아내로 주지만 않았더라도 야곱에게 있어서 첫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은 바로 라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요셉이 비록 나이로는 제일 어리다 해도 그가 첫 번째 부인인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이니 당연히 야곱의 가문의 정통성을 잇는 장자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적인 질서로는 레아가 첫 번째 부인이고 그가 낳은 첫 번째 아들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영적으로는 라헬이 첫 번째 부인이며 요셉이 장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훗날에 보면 바로 이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으로 들어가 큰 민족으로 성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그 많은 아들들 중에 바로 요셉을 선택하여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야곱이 이 당시 굳이 이러한 영적인 섭리나 질서를 밝히 알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관을 받아 이처럼 행했던 것이지요.
또한 육적으로 볼 때도 야곱은 처음 라헬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그에 대한 마음이 변개하지 않았으며 이처럼 사랑하는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 요셉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야곱은 아무래도 라헬과 요셉을 제일 뒤에 두어 어떻게든 그들만은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야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잇는 후손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혹여 ‘아무리 그래도 야곱이 그렇게 한 것은 라헬과 요셉만을 너무 편애한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생각하실 분이 있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것을 꼭 편애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잠 8:17에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했지요. 이 말씀대로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도 사랑을 더 주시기도 하고 덜 주시기도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누구를 편애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이처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사랑을 더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은 편애가 아니라 바로 공의입니다.
이는 야곱이 라헬과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라헬이 비록 버리지 못한 육의 모습 가운데 레아와 다른 두 여종을 시기, 질투하였고 심지어 투기까지 함으로써 야곱의 마음을 심히도 아프게 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라헬이 야곱으로부터 그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사랑받을 만한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인성적인 면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야곱이 라헬을 특별히 더 사랑한 것이 단지 편애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편에서 사람을 보실 때도 더 사랑하실 만한 중심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중심도 있는 것처럼 라헬 역시 야곱에게 사랑받을 만한 면이 있었기에 야곱이 그를 그처럼 사랑했던 것이며 야곱은 그의 곧은 중심 가운데서 라헬에 대한 이러한 사랑이 변함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어찌하든 라헬과 요셉만은 살리고자 했던 것이 물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야곱이 마음에 주관을 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야곱이 그만큼 라헬과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는 열두 제자가 있었는데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특별히 더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들 수 있지요. 물론 그들이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 중심이 주님 앞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더 사랑을 받은 제자가 있지요. 그것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을 가리켜 굳이 ‘사랑하시는 제자’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물론 예수님의 수제자는 베드로였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를 너무나 사랑하셨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인성적인 사랑을 더 많이 받은 것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사랑을 주실 때도 공의라고 하는 신성적인 면과 함께 인성적인 면도 동시에 작용하여 사랑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가 철저히 깨어진 야곱에게는 즉시로 많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죽어지고자 하는 마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육적인 생명을 잃을 각오를 한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를 철저히 죽이고 낮추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 앞에 나아가 몸을 일곱 번 즉 완전수 일곱만큼 땅에 굽혔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낮춘다는 의미이지요. 이미 하나님 앞에 철저히 깨어지고 난 야곱은 이제 형 에서 앞에서도 이처럼 더 이상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 교만함 등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부요함이나 자신의 위치도 상관이 없었지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진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낮아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어린 소자라도 섬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야곱은 이제 상대방의 입장 즉 형 에서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내 행동으로 인해 형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었을까?’ ‘얼마나 화가 났었을까?그래, 그 입장이었다면 화도 났겠지…’ 바로 이렇게 형의 입장과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형 앞에 일곱 번 몸을 굽힌 데에는 자신이 과거에 행했던 일들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돌이킴의 의미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야곱의 행함을 보면서 에서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20여 년 전 자신이 야곱에게 철저히 속은 것을 안 에서는 그 분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동생이 아내를 구한다고 떠나고 난 뒤에도 동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그 마음 안에 감정을 쌓고 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지요. 야곱이 떠나고 난 뒤 비록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고는 해도 이제 실질적으로 아비의 집에 남아서 집안의 장자의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은 에서 자신이었습니다. 동생에게 장자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때는 당장에 그 분이 가라앉지를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이 실질적인 장자처럼 살아가게 되자 그 동안 쌓였던 분이 누그러지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생 야곱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누그러진 듯이 눌려있던 감정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지요. 그렇다하여 예전처럼 동생 야곱을 보면 당장 어떻게 해하려는 것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속은 것을 생각하면 분하고 화도 났지만 이제 동생 야곱을 만나게 되면 일단은 ‘그때 왜 그랬나’고 따져 물으려 했지요. 무조건 동생을 해하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단은 자초지종을 들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백 인을 거느리고 동생을 만나러 가는 중에 동생 야곱이 보내온 종과 예물을 만나게 되지요. 그러면서 에서의 마음은 다시 한 번 누그러집니다. 동생 야곱이 보내온 예물을 보면서 그래도 야곱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예전과는 달리 형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막상 동생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 앞에 몸을 일곱 번 굽히는 동생을 보자 그 동안에 쌓였던 감정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한 대로 에서가 야곱에게 달려와 안으며 눈물의 상봉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주관해 가시므로 에서가 감정을 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깨어진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이처럼 순간에 화목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었지요. 야곱과 에서의 극적인 상봉 장면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3절 중에 보면 형 앞에 일곱 번 몸을 굽힌 야곱은 그리고 나서 형 에서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이전까지는 형 에서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야곱이 지금은 그러한 형 앞에 더 가까이 나가고 있지요.
만약 이때 야곱에게 여전히 형 에서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면 야곱은 이처럼 선뜻 형 에서 앞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곱 번 땅에 몸을 구부린 후에 ‘이제 형이 나에게 어떻게 나올까’ 하며 그 자리에서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처럼 형 에서 앞으로 가까이 나갈 수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야곱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이때 또 한 가지 야곱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야곱의 마음에 형 에서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일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온전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지요.
야곱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고 형에게 했던 예전의 자신의 행동을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형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으며 형에 대한 어떠한 서운함이나 감정도 없었지요. 그러면서 이제는 마음에서부터 형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없고 ‘교만’도 없으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이지요.
예를 들어,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을 때 아이들의 행동이 어떠합니까? 아이들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정말 부모님을 사랑하고, 또한 마음에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녀들은 야단을 맞는다 해도 오히려 부모님의 품으로 더 안겨들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된 우리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히 12:6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들을 징계하시고 때로 호되게 책망하며 견책하시는 것은 그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정녕 자녀를 사랑한다면 막상 사망으로 가는 자녀를 보면서도 그냥 가만히 놔둘 부모가 어디 있겠는지요?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를 징계하실 때 자녀 된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자신을 징계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지요.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부족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을 일은 아예 하지도 말아야겠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그로 인해 자신에게 징계주심에 감사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더욱 겸비함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에녹이나 세례 요한과 같이 이 땅에 태어나 경작을 받으며 한 번도 하나님을 서운케 해드린 적이 없거나 하나님 앞에 한 번도 범죄 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란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아직 온전하지 못한 모습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민망한 이런 저런 모습들이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후의 모습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더 사랑하려고 노력해 가는 과정에서 아직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과 징계를 받을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사건을 계기로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후로는 새롭게 변화되어 나가지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생긴 담을 오랫동안 헐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하므로 점점 신앙의 침체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통해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찬송가 중에 보면 (찬송가 503장)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풍랑이란 여러분이 천성을 향해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런 저런 역경과 어려움이 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때로 여러분에게 허락된 연단이나 시험 또는 징계와 같은 ‘풍랑’ 앞에서 어찌하고 계십니까?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는 고백과 같이 오히려 그 풍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빨리 새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축복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7-24 오후 6:29:55 Posted
2015-09-24 오전 9:50:2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