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20년 만에 마침내 그리운 고향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벅찬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이러한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족의 따뜻한 환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4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이끌고서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형 에서였지요.
이제 야곱은 자칫 하면 20년 동안이나 공들여 모아온 모든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이런 저런 궁리를 다 해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되지요. 야곱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하게 되지요. 이 순간에 야곱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천사장 미가엘이었습니다. 미가엘 천사장은 제 1하늘의 공간으로 나오기 위해 비록 사람과 같은 육의 형상을 입고는 있었지만 야곱은 이러한 미가엘 천사장을 보았을 때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았지요.
그래서 그가 확실한 응답을 줄 때까지 결코 그를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끝까지 붙잡는 것만이 자신이 응답받을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야곱은 더더욱 굳은 각오로 미가엘 천사장을 붙잡았던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는데 이는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깨뜨리고 내려놓았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자기 의, 자기 생각, 자기 틀, 자기 지혜와 방법 등 ‘자기’가 철저히 깨어진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자기가 깨어지고 난 야곱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얼마든지 자기 생각과 지혜를 동원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제 야곱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지요. 아직 ‘자기’가 살아있는 야곱이었다면 미가엘 천사장이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지금 이 사람이 왜 자기 이름을 묻고 있는지, 또한 이때 어떻게 대답을 해야 자기에게 유리할 지를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난 후의 야곱은 이제 더 이상 그러지를 않았지요. “야곱이니이다” 하며 너무나 순한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뭐가 어려운 일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 즉 자기 생각과 이론과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그 쉬운 답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며 늘 이유와 변명과 핑계를 대지요.
그래서 ‘자기’가 많이 살아 있는 사람, 즉 육이 그만큼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일수록 매사에 이유와 변명과 핑계가 많은 것을 봅니다. ‘이건 이래서 이렇고, 저건 저래서 저렇고’,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할 수 없다’는 등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상대의 말을 들을 때도 대부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거나 자기 생각에 맞추어 듣기 때문에 오해나 판단도 자주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없는 사람은 ‘왜 안 되는지 왜 못하는지’ 이런 이유나 변명과 핑계가 없습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 자기 의나 틀 등을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나오지요.
자기 입장에서 상대의 말을 오해하거나 자기 생각에 맞추어 판단하지도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진실되게 답하는 것입니다.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려고도 하지 않으며 ‘자기’를 주장하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자기’를 철저히 깨뜨린 야곱에게서 지금 이러한 모습이 나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의 지금 상태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라반의 집을 떠나 올 때부터 결코 순탄한 상황이 아니었지요. 외삼촌 몰래 집을 떠나와야 했고 그러다 결국 외삼촌에게 따라 잡혀서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지요.
그런데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해하려는 형 에서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또 한번 고뇌하며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요. 만약 심성이 유약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미가엘 천사장과 밤새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씨름을 벌였고 그 와중에 환도뼈까지 위골되었으니 위골된 환도뼈로 인해 절뚝거리며 온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이 모든 기가 다 소진되고 말았지요. 육으로 볼 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한계 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고요.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 야곱이 더 이상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겠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는 심정이지요. 순한 양과 같이 오직 예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깨뜨리고 변화되어 영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제 ‘자기’는 없고 진리 자체이신 주님의 마음만 남아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오직 예와 아멘만 하게 되지요.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차원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범사에 하나님의 보장하심과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비록 아직은 온전한 영의 차원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자기를 철저히 깨뜨리고 나자 바로 응답이 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본문 2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새롭게 바꿔주고 계신데 이는 곧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빌어주었던 장자의 축복을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했던 이삭의 축복기도가 그대로 임하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축복이 임하려면 에서가 야곱을 해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야곱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 앞에 닥친 위기상황을 면케 해 주신다는 뜻이 되며 결국 야곱이 에서의 위협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되지요. 야곱으로서는 당장 눈앞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자신을 통해 이루실 섭리에 대한 보장을 받는 언약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가엘 천사장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면서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말하고 있지요. 야곱이 씨름을 하여 응답의 약속을 받아낸 것은 미가엘 천사장인데 여기서는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었고 그래서 이긴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가엘 천사장은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야곱이 친히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었다는 의미도 아니고, 야곱이 하나님을 이기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겨룬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은 미가엘 천사장은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에게 응답을 주기 위해 온 사자였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고 온 미가엘 천사장과 겨룬 것은 미가엘 천사장을 대신 보내신 하나님과 겨룬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응답을 받기 위해 미가엘 천사장에게 끝까지 매어달린 것 역시 사실은 하나님 앞에 끝까지 매어 달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야곱에게 응답의 말을 주고 있는 것은 비록 미가엘 천사장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사자이기 때문에 결국 야곱에게 응답을 주고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다 말씀하신 것이고요. 더욱이 야곱이 미가엘 천사장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 말씀하신 것은 야곱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에 합당했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또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는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세우시기 위해 합당한 중심을 가진 야곱을 택하여 그를 들어 사용하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지요.
따라서 실제로는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겨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정녕 변함없는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간구하며 매달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중심과 행함 앞에 ‘오냐, 내가졌다. 내가 네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겠다’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눅 18:1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중심과 모습으로 기도하고 간구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셨지요.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 재판관이 얼마동안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과부가 계속 와서 청하자 나중에는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눅 18:7-8 전반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이어지는 8절 후반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했지요. 즉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해 주는 분이신데 인자가 올 때 곧 마지막 때에는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지요. 믿음이 없기 까닭에 중도에 낙망하게 되고 의심하거나 변개하여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의심하거나 낙망하지 않는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매달렸기에 마침내 응답을 받아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믿음 앞에서는 꼼짝 못하시고 반드시 응답을 주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 앞에 응답받기 위해 어떠한 믿음과 중심으로 기도하며 간구하셨는지요? 또한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간절한 중심으로 노력하셨는지요? 정녕 야곱이 얍복 강에서 미가엘 천사장과 씨름을 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그러한 중심과 행함으로 변함없이 달려오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중심을 가지고 믿음과 행함으로 나오시는 분이라면 그런 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도 예전과 다르게 부르십니다. 바로 “나의 사랑하는 누구야” 하시며 새롭게 불러주시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누구야” 해 주실 수도 있는 것이고요.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가엘 천사장으로부터 응답의 말씀을 받은 야곱은 이어지는 29절에서 미가엘 천사장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왜 이때 그 사람 즉 미가엘 천사장에게 이름을 물은 것일까요? 이는 지금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모든 언약의 말씀을 변치 않으시고 정확하고 온전하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보장받으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야곱이 그의 이름을 물은 것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확답을 한 번 더 받기 위한 확인의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약속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일 때는 마치 상대방의 입술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말을 듣고자 하는 것과 같지요. 바로 이러한 의도를 가진 야곱의 질문에 대해 미가엘 천사장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답합니다.
이 역시 정말로 자신의 이름을 묻는 야곱의 의도를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한 치의 오차가 있겠으며, 어찌 약속하신 바를 이루지 않으시겠느냐’는 확답의 의미가 담겨 있었지요. 마치 너무나 확실한 것을 상대방이 다시 물어올 때 ‘어찌 그렇게 당연한 것을 물으십니까?’ 하고 오히려 반문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엘 천사장도 야곱에게서 어떠한 대답 듣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곧바로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겠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을 받고 난 야곱은 30절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했지요.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는 것은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야곱이 정말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한 나라의 임금이 임금을 대신하여 사자를 보냈을 때 그 사자를 맞이하는 사람은 그를 마치 임금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지요. 임금의 권위와 권세를 위임받아 온 것이기에 그 사자의 말이 곧 임금의 말이 되는 것이며 그 사자의 명령이 곧 임금의 명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면하였다 말한 것이었고 이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였음에도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 내었다는 의미가 담겨있지요.
이는 왕후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갔던 상황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당시 그 나라의 법으로는 왕의 부르심이 없이 왕 앞에 나가는 것은 왕후라 해도 허용되지 않았지요. 만약 허락 없이 왕 앞에 나갔는데 왕이 금홀을 내밀어 주지 않으면 그가 누구라도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왕으로부터 응답을 얻기 위해 왕의 부르심이 없는 상황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갔지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에스더는 생명이 보존될 수가 있었습니다. 왕이 금홀을 내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에스더가 생명을 보존했다는 것은 결국 왕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의미와 같지요. 이런 것처럼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하였음에도 그의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것은 곧 그의 간구가 응답되었다는 의미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해 절었더라” 했는데 이는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 의와 자기 틀 등 자아가 살아 있어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던 예전 모습의 야곱이 아니라 이제는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연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야곱 즉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진 야곱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2절에 보면,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기억하며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시조 야곱이 정녕 어떠한 중심과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이루어냈는지를 철저히 명심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태동되었는지를 되새기며 기념하려는 것이고요. 그래서 실제로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짐승을 잡을 때 좌골 신경 즉 짐승의 엉덩이와 다리로 연결되는 부분의 힘줄은 끊어내고 먹음으로써 이 관습을 준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서는 이것을 율법으로 정하여 어기는 자는 체벌을 한다고까지 하지요. 이처럼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않는 것이 관습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만 보아도 야곱이 얍복 강에서 체험한 이 사건이 얼마나 사실인가를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성과 중심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고요.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여 지금도 그것을 관습으로 지킨다는 것은 다른 그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고유의 특성과 중심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민족을 얻으시고 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중심을 가진 야곱을 택하여 그를 이제까지 연단하시고 다듬어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은 야곱에게 이제부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태동되는 것이 그냥 단숨에 ‘뚝딱’ 하고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주변의 모든 상황과 조건을 갖추셨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합당한 사람 곧 야곱을 택하시고 연단하셨지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섭리 속에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급하다고 서두르셔서 야곱이 20년 동안 받아야 하는 연단을 몇 년으로 단축시키신 것도 아니었지요. 야곱이 얼마든지 순적하게 형 에서와 화평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이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인도해 가셨던 것이지요.
또한 보통 사람 같았으면 얼마든지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야곱은 끝까지 그 연단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해 낼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과 같은 중심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만약 야곱이 중도에 포기할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요. 롬 11:29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중심을 보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후회하실 선택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본 제단을 향한 섭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쓰임받을 제단을 세우시기 위해 이미 만세 전부터 계획하고 섭리하셨지요. 또한 하루아침에 ‘뚝딱’ 하고 이와 같은 제단이 만들어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연단하며 다듬어 오셨습니다.
때로는 교회적인 시험들도 허락하시고 성도들 개개인에 대해서도 때로는 혹독한 연단을 허락하시며 제단과 제단에 속한 영혼들을 이끌어 오셨지요. 그냥 적당히 연단한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끌어 가신다면 이렇게까지 연단하실 필요도 없으시겠지만 그것은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법칙에 맞추어 정확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와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씨름했던 것과 같은 심정으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불같은 기도를 해 왔으며 오직 믿음의 행군만을 해왔지요. 연단의 세월을 겪어오며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이쯤 되었으면 이제 때가 다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때’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야곱도 좀 일찍 깨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할 수가 있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가서 얍복 강에 이르러야만 깨어진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셨지요.
그런 것처럼 본 제단을 향한 섭리에 대해서도 모든 시와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와 때에 맞추어 이끌어가고 계시지요.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지혜와 능력 가운데 역사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변함없는 중심으로 믿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지요.
설령 환도뼈가 위골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는다 해도 ‘하나님, 응답 주시라고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오히려 환도뼈까지 위골되었으니 어찌 나에게 이러한 일을 겪게 하시나이까’ 이렇게 불평하며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응답받을 때까지는 결코 놓치 않으리라’는 중심으로 끝까지 매달려야 하는 것이지요.
더욱이 지금은 모든 상황이 ‘때가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대성전을 이루는 것이나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본 제단이 세계선교를 이루며 이스라엘을 향한 복음의 회귀를 이루는 것 등 마지막 때의 모든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한 환경과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지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본 제단은 지금 마치 얍복 강에 이르러 마지막 씨름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이는 곧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 제단이 마지막 때에 우리 제단에 주신 모든 사명과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영의 사람들이 꼭 필요하지요. 그러므로 본 제단에 속한 많은 분들 역시 영으로 들어오기 위한 마지막 씨름의 관문을 통과해 나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개인과 본 제단과 본 제단에 주신 사명과 섭리는 결코 따로따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영으로, 온 영으로 나오는 것이 결국은 본 제단을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차질 없이 이루는 길이기도 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도 잘 달려왔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얍복 강 앞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린 것은 우리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 개개인은 물론이고 본 제단이 새로운 차원을 향해 힘차게 뚫어 들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시점에 있다는 의미이지요.
올해는 영광의 해요, 축복의 해이며 거두는 해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온전히 이루려면 반드시 얍복 강 앞에서 철저히 깨어진 야곱과 같이 다시 한 번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그때가 다 되었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때를 맞추어 지금 야곱의 얍복 강 사건을 말씀하시며 여러분에게 깨우침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는 분들마다 이제는 정녕 온전히 ‘자기’를 깨뜨리고 육을 벗어 영으로 변화되어 나오는 축복의 대열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미 너무나 많은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세세한 분야까지도 자신을 비추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말씀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철저히 깨뜨리고 변화되겠다는 굳은 다짐과 각오인 것이며 또한 그렇게 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힘차게 밀어줄 수 있는 영의 흐름의 세찬 물결입니다.
이러한 세찬 물결 가운데 너도 나도 모두가 이 흐름에 동참하게 되면 누가 자기만 혼자 손 놓고 가만히 앉아서 그 흐름을 지켜만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곱과 같은 철저한 변화의 노력을 통해 이번 기회에는 여러분이 각자 세워 놓은 ‘영’ 또는 ‘온 영’이라고 하는 목표를 꼭 달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와 본 제단과 제단에 속한 여러분들을 통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 가득히 덮어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7-18 오후 3:28:45 Posted
2015-09-24 오전 9:50:2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