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에서 쓰이는 용어 중에 배수진(背水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물을 등진 진지(陣地)라는 뜻으로써 강·호수·바다와 같은 큰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되면 적과 맞서 싸울 때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공격해 오는 적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법은 적군에 비해 아군의 힘이 상대적으로 열세일 때 또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일 때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하여 사용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꼭 전쟁에서만이 아니라도 어떤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처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어떤 사람과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장 미가엘과 씨름했던 것이 전쟁으로 말하자면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 있지요.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야곱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셨지요.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가 겉으로 볼 때는 비록 사람의 형상을 입고는 있었지만 야곱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야곱이 이러한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를 놓지 않았지요. 야곱의 곧은 중심과 끈질긴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번 목표한 것은 응답을 얻기까지 결코 중도에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곧은 중심을 가진 야곱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야곱의 중심 앞에 결국 미가엘 천사장도 손을 들고 맙니다. 육으로 보면 얼마든지 쉽게 야곱을 이길 수 있는 미가엘 천사장이었지만 곧고 변개함이 없는 야곱의 중심이 마침내는 미가엘 천사장을 이기고 응답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응답을 받으려고 한다면 야곱의 이러한 모습을 꼭 본받아야 하지요.
약 1:6-8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말씀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처음에는 믿음을 가지고 구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도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중도에 의심을 하거나 포기해 버리는 경우들이 있지요. 한번 믿음으로 구했으면 그리고 한번 응답을 받기 위해 작정했으면 이미 받은 줄로 믿고 응답이 오기까지 변함없는 마음으로 구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모습과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야곱과 같은 중심으로 야곱과 같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끝까지 하나님 앞에 간구했는지’ 말입니다.
혹여 자신 편에서 정한 만큼 기도해 보다가 안 되면 이내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반드시 응답받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이 중도에 변개하지는 않았는지… 신이 응답 받지 못한다고 해서 혹여 예전에 응답받은 것이나 다른 사람이 응답받은 것까지도 의심하지는 않았는지… 이러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즉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미가엘 천사장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응답을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게 되는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지요. 육으로 보자면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요. ‘왜 나에게 더 힘든 상황만 찾아오는 것인가’ 하며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았고 입술로 불평, 불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며 더 간절하게 매달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만약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했는데도 오히려 육적으로는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것같이 된다면 어찌하셨는지요? ‘왜 이렇게 기도하는데도 상황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어려워지는 것일까’ 혹여 이렇게 입술로 원망과 불평의 말을 내지는 않았는지요? 아니면 야곱처럼 ‘내가 응답을 받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더 힘차게 기도하고 간구하셨는지요? 야곱과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비교해 본다면 왜 여러분이 아직도 응답받지 못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만큼 믿음이 무엇인지 들었고 믿음으로는 무엇이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수없이 보고 들어 왔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믿음을 내보여야 하는 상황이 되면 정작 믿음을 내보이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지요. 머리에 지식으로는 아는데 정말 변함없는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매달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악을 벗고 성결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성결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어찌하든 악을 벗고 성결되고자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 달려가던 분들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미지근한 신앙으로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어떻게든 죄를 벗어 버리려 하던 사람이 이제는 안주해서 죄를 발견해도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것이지요. 심지어 간신히 주일만 지키며 교회에만 왔다 갔다 하고 마는 경우도 있고요.
성경에는 분명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죄를 싸워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여겨지다 보니 중도에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버린 것 같았는데, 또 나오고 이제는 없겠다 싶었는데 다시 발견되다 보니 ‘나는 안 되나 보다’ 하며 포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다시 세상의 육을 좇아가게 되고 점차 ‘영’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나 여러분이 정녕 악을 벗고 성결되며 온 집에 충성하여 새 예루살렘에 꼭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한결같이 뜨겁고 진실되다면 결코 중도에 포기하거나 변질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만은 않게 여겨질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러한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이 정녕 영을 사모하고 어찌하든 변함없는 모습으로 달려가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힘을 얻어 갈 수 있게 되지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중도에 어떤 어려움이 오고 힘든 순간이 온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를 않습니다. 사모한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정말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사모함이 없고 ‘안 되면 그만이지’ 하는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금의 어려움이나 장벽 앞에서도 포기하고 물러서고 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저를 붙좇기 위해 많은 난관을 뚫어 나오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가는 곳에는 워낙 많은 성도님들이 몰리다 보니 제 주변의 일꾼들 편에서는 때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제 주변을 통제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지요. 만약 한 사람에게 열어주기 시작하면 그것이 금방 열 사람, 백 사람 그 이상으로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주변에 가까이 나아와 저를 붙좇는다는 것이 육으로 보면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어떤 분들은 어떻게든 제지하는 일꾼들을 뚫고서라도 저를 붙좇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때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기도하고 민망한 일을 겪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그분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없이 제 앞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웃으면서 넘어가고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하면 저쪽으로 돌아오며 때로는 추운 바깥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해도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몇 번 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이 년 그 이상을 변함없이 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러니 그 변함없는 중심과 모습 앞에 주변의 일꾼들도 그만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통제에 잘 따라주겠다’는 조건 하에 질서를 좇아 제 곁에 나오는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혹여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다고 해서 여러분이 너나 나나 없이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시면 안 됩니다. 그분들은 이미 수년간 그렇게 쌓아온 결과로 인정을 받아 나오게 된 것이고 앞으로는 여러분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이상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요.
다만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도 이처럼 변함없는 중심을 가지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온다면 응답받지 못할 분이 없고 성결로 들어오지 못할 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분들은 그처럼 목자 앞에 나오는 것만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변화될 수 있으며 열매를 낼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기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고, 그러한 마음이 정말 중심에서부터 나온 것이었기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세상 말에도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정말 목자 앞에 나왔을 때 응답받고 열매를 거둔다고 하는 확신과 믿음이 있다면 어찌 목자 앞에 나오는 것을 주저하겠는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오직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만이 자신이 응답받는 길임을 믿었기에 담대히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응답을 받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응답받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기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셨을 때도 그 말씀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여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지극히 겸비한 자세로 끝까지 예수님 앞에 매달렸지요. 바로 이 여인의 이러한 중심이 예수님 앞에 인정을 받았기에 여인은 마침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응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과 비교해 볼 때 여러분의 중심과 행함은 어떠하십니까? 만약 어떤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제 앞에 나왔는데 제가 여러분을 외면한다면 어찌하시겠는지요? 또는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셨던 것처럼 좀 ‘모욕적인 말’이라도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물론 어린 소자에게도 결코 무례히 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그처럼 하신 것은 여인의 믿음을 보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러니 저도 만약 제 앞에 나온 분의 믿음을 한번 보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래도 정말 이 여인처럼 끝까지 오히려 더욱 겸비한 마음과 자세로 나오실 분이 과연 얼마나 되실는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을 받기 위해, 자존심도, 체면도, 자기 생각과 틀도 자아도 다 버렸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변함없는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 앞에 매달렸지요.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그의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 자부심, 자기 생각, 자기 지혜, 자기 틀 등 모든 것이 깨어졌다는 의미라 했지요. 하나님 앞에 여전히 자기 생각과 틀과 이론 등 자기적인 것을 가지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고 주장하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역사해 주실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적인 것들 즉 ‘자기’라는 것을 철저히 깨뜨리도록 연단을 허락하신 것이며 야곱은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리고 내려놓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바로 ‘자기’를 깨뜨리면 그때가 바로 응답의 순간인 것이며, 육을 벗고 영으로 ‘쏙’ 들어올 수 있는 축복의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을 깨뜨리기까지가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수년, 수십 년을 연단 받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이런 사람은 아직도 말씀을 들으면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거나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틀에 맞지 않는 일을 보게 되면, 어느새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지요. 어떤 일을 할 때면 먼저 자기 지식과 지혜가 동원되고, 자기 보기에 좋은 방법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러한 모습들이 없었습니다. 자기 보기에 아무리 이상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아멘’ 했지요. 아예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지혜와 방법을 주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랐으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무조건 순종해 갔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만약 아브라함에게 조금이라도 ‘자기’가 남아 있었다면 순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안 그래도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아합 왕 앞에 나가라고 하셨을 때 엘리야 선지자에게 ‘자기’가 남아 있었다면 먼저 변명이 나오고 핑계가 나왔겠지요.
밤새 단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던 베드로가 계속해서 자신이 어부로서 쌓아왔던 지식과 경험만을 고집했다면 끝내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는 두 배에 가득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자기의 생각과 지식과 이론과 틀 등을 철저히 깨뜨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야 한계가 없는 무한한 영의 세계로 들어올 수가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축복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대부분이 영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계실 텐데 영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육의 한계와 틀 안에 맞추어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영’ 안에 맞추어야 하지요. 그러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의 한계를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아주 커다란 수박이 있다고 합시다. 이 수박은 너무 커서 통째로는 냉장고 안에 넣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수박을 냉장고 안에 넣을 수 있을까요?수박을 넣겠다고 하며 냉장고를 부술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 큰 수박을 작게 몇 덩어리로 자르면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깨뜨리지는 않고 있으면서 ‘영으로 들어가기 너무 어려워요’하고 있지요. 여러분이 수박을 잘게 나누듯이 ‘자기’를 깨뜨리면 쉽게 영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를 깨뜨리지 않기 때문에 영으로 들어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 방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말씀들을 통해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듣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만 하면서 순종하는 것이지요.
내 뜻, 내 의, 내 생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오직 예와 아멘만 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깨뜨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러면서 이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기도이지요.
야곱이 미가엘 천사장과 날이 밝도록 밤새 씨름을 했다고 했는데 씨름을 했다는 것이 결국 영적으로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는 곧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비를 끌어내리기 위해 얼굴이 무릎 사이로 들어갈 만큼 기도했던 것과 같은 간절한 기도인 것이며 환도 뼈가 위골되기까지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올렸던 중심의 기도이지요.
여러분에게도 바로 이러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만이 여러분이 조상으로부터 타고난 기(氣)와 또한 여러분이 수십 년 동안 육의 세상에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여러 가지 틀들이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자기’를 온전히 깨뜨릴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자기를 발견하지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발견한다 해도 기도가 없이는 결코 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자기 힘과 능력만으로도 악을 버리고 자기를 깨뜨릴 수가 있다면 좋겠지만 자기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은 물론이고,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버리는 것도 결코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야곱과 같이 자기를 철저히 깨뜨리는 과정이 있어야함을 깨달으시기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야곱이 환도 뼈가 위골되기까지 미가엘 천사장과 씨름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간절한 중심의 기도를 쉬지 않고 올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해서 자기를 철저히 깨뜨린 야곱은 이제 이전과는 많은 것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예가 곧바로 오늘 본문 26-27절에 나오지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야곱에게 미가엘 천사장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야곱이니이다” 대답하지요.
그렇다면 이 간단한 대화 몇 마디가 야곱이 자기를 철저히 깨뜨린 것과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지금 미가엘 천사장이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은 것은 그가 정말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야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물었던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여 온 입장에서 야곱에게 응답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예수님 앞에 나온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 앞에 응답을 받기 위해 나온 소경이라면 당연히 ‘눈을 뜨고 보는 것’이 소원임을 아심에도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물으셨지요. 이를 통해 소경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구하는 바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공의에 맞추어 역사해 주시고자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을 때 만약 소경이 예수님께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더니 제가 당신 앞에 왜 나왔는지도 모르십니까? 제가 보시다시피 소경이니 당연히 보기를 원하지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다면 소경은 결코 응답을 받을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 소경은 예수님의 질문에 다른 어떠한 불필요한 말이 없이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는 응답과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경우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야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예전의 야곱이라고 하면 ‘왜 이 사람이 지금 내 이름을 묻는 것인가’ ‘내가 지금 어떻게 대답을 해야 내가 얻고자 하는 응답을 이 사람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까’ 이것을 먼저 생각했겠지요. 또는 ‘그렇게 묻는 당신은 누구요’ 하면서 먼저 상대방이 과연 나에게 응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부터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고요. 이처럼 사람의 생각을 동원해 나갔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철저히 깨어진 야곱은 그러지 않았지요. “야곱이니이다” 하며 묻는 말에 대해서만 정확하게 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 그렇게 쉬운 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생각할 분이 많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이러한 상황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묻는 말에 대해 한 번에 제대로 정확한 답을 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가 쉽지 않지요.
대부분 제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는 몇 차례 질문을 다시 해야 하고 그러다가 원하는 답 듣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야, 당연히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대부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기 때문에 엉뚱한 동문서답이 나오거나 진실하지 못한 거짓 대답이 나오고 마는 것이지요.
이것이 다 아직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질문을 들을 때도,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듣게 되며 자기에게 유리한 대답을 하게 되지요. 자기 생각의 틀과 한계 속에서 듣고 답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질문의 핵심을 벗어나게 되며 자기 생각과 느낌, 자기 의가 더해지면서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도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상대방보다 앞서서 먼저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었고, 상대방에게 속기 전에 먼저 상대를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말 한마디를 해도 그 안에는 숨은 의도가 담겨있을 때가 많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도 늘 뭔가 숨은 의도가 있지 않나를 살펴야 했지요.
그러던 야곱이 이제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난 후에는 이처럼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진실하게 정확한 답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보내심을 받은 미가엘 천사장으로부터 응답의 말을 확실히 듣게 되지요. 이 내용부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자기’를 깨뜨리고 영으로 들어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자기’를 깨뜨리기까지의 과정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180˚ 변화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주님을 만난 한 번의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틀을 깨뜨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찌 보면 깊은 수렁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사건 즉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한 번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며 변화되어 나올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여러분에게도 자신을 깨뜨리고 순간에 변화될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계기를 어떻게 잡아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축복의 기회로 삼느냐가 관건이지요. ‘내가 이번 기회만은 결코 놓치지 않고 반드시 깨어지고 부서지고 변화되어 영으로 나오겠다’는 굳은 각오와 다짐을 얼마나 행함으로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몇 주간에 걸쳐 ‘얍복강에서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는 내용’이 증거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너무나 좋은 축복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음으로 미루지 마시고 바로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이 그동안 깨뜨리지 못했던 ‘자기’를 온전히 깨뜨리고 부서지는 귀한 축복의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야곱이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신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여러분에게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딸아” 하시며 마음껏 축복의 말씀으로 부어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7-09 오전 4:21:44 Posted
2015-09-24 오전 9:50:2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