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어떤 힘든 일이나 어려움을 만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곤 합니다. 지내온 세월들을 회상해 보면서 ‘왜 이러한 상황이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돌아보며 낮아진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주 안에서는 바로 이러한 경우를 연단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때에 사람들은 더욱 겸비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게 되지요. 세상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세상 그 누구도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도 바로 이러한 순간을 맞고 있었지요. 자신이 힘쓰고 애써서 모은 전 재산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야곱은 끝까지 자기 지혜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깨닫게 되지요. 시 121:1-2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 스스로는 자신이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 생각했겠지만 그러면서도 야곱은 여전히 자기 생각과 지혜에 따라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곤 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적인 인간의 지혜와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자 이제야 비로소 자기적인 것들을 다 내려놓으며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좀 더 일찍 ‘자기’를 깨뜨렸더라면 이러한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역(逆)으로 생각하면 이런 상황이 왔기 때문에 야곱은 지금이라도 ‘자기’를 철저히 깨뜨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지요.
만약 여전히 자기 지혜와 방법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들만 만났다면 야곱은 끝까지 ‘자기’를 깨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연단의 과정이 당장에는 쉬울 리가 없지요.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연단을 잘 받아서 통과하고 나면거기에는 반드시 축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야곱의 경우도 앞으로 그에게 주어질 축복과 장차 그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지금 받고 있는 연단의 아픔이 얼마나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야곱에게 이러한 연단의 과정이 없었다면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진 야곱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또한 이루어질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합당한 그릇을 택하여 이처럼 연단해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은 지금 앞으로도 나갈 수 없고 뒤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때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다면 사실 피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지요. 아비의 집으로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과의 약속 때문에 뒤로는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아비의 집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야곱은 얼마든지 다른 땅을 찾아 떠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비의 집으로 가려고 하면 분명 그 앞에는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형 에서가 있음을 알면서도 야곱은 계속해서 그 길을 가려고 했지요.
그렇다면 간교한 야곱이 왜 이 순간에는 다른 육적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비의 집으로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쓰임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이 비록 자신의 생각과 지혜 가운데 육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결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자기적인 지혜와 방법들을 동원했던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했지만 아직은 ‘자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일부러 불순종하거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을 때 야곱이 그 말씀에 대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다면 “하나님, 아직 형 에서와의 감정이 안 풀어 졌으니 일단은 다른 곳에 가서 정착한 후에 천천히 에서와의 감정을 풀고 나서 아비의 집으로 가겠습니다.” 이런 답을 하거나 “하나님, 적어도 형 에서가 지금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만이라도 먼저 확인한 후에 아비의 집으로 가면 안 될까요?” 이런 답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아비의 집으로 일단 출발은 하지만 형 에서가 자신을 해할 마음으로 자신을 향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우선 다른 곳으로 피하려 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야곱은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있다 해도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불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희 제단도 지금까지 오면서 이와 같은 상황들을 많이 겪어 왔지요. 이렇게 하면 핍박이 올 줄 알고 어려움이 찾아 올 것도 알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생각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육으로 볼 때는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있고 잠시 동안만 멈춰 있으면 수월하게 풀어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지금 이렇게 해라’ 하시면 조금의 망설임이나 지체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 왔지요.
저희 제단이 금년에 이루어야 할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을 동원하면 돌아갈 수도 있고 ‘지금’이 아니라 좀 기다릴 수도 있으며 더 좋아 보이는 것을 택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길이다’ 하시면 그 길을 갔고 ‘두드리라’ 하면 두드렸으며 당장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이것이 축복이라 하시면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야곱도 바로 ‘아비의 집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었기에 비록 생명의 위협이 앞에 놓여 있다 해도 ‘아비의 집으로 가야한다’는 이 목표 자체만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데도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자기’를 철저히 깨뜨리는 계기를 맞게 되지요.
야곱도 그 순간이 왔음을 주관받으므로 이제 더 이상 자기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는 일을 멈추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게 됩니다. 가족과 전 재산을 강 건너로 모두 보내고 자신만이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지요. 그때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올렸던 기도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정녕 나를 그곳으로부터 인도하셨고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셨던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 아비 이삭으로부터 내게 이와 같이 축복하셨고 장자의 축복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내 기도를 들으사 내 마음을 살피소서.
지금의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지난날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생각하나이다. 내게 있어 많은 것들이 축복됨을 믿었고 그 축복되어진 사실로 인하여 많은 것들이 내게 자부심이 되었으되 내가 라반의 집에 있어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지는 그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내가 쉬지 아니하였고 내가 먹기를 원치 아니하였나이다. 잠을 이룰 때에도 내 마음껏 마음을 놓아 자지 못하였고 내가 마음껏 먹지 못하였고 내가 마음껏 행하지 못하면서 늘 나를 묶어가며 오늘에 이 모든 소유를 이루기까지 있었나이다.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곧 나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분 앞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곳까지 나왔으나 모든 되어지는 상황 속에서 나를 보나이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왔으나 지금의 돌아가는 상황 가운데서 자신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지요. 그 입술에 불평이나 원망 섞인 말이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의 모든 정황 속에서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며 마음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 앞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했지요.
그러면 이때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2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는 말씀과 30절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는 말씀에 따라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라 말하지요.
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아무나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살 수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 4:19-20에 보면 “그들이 지성 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지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론과 그의 아들들 이외에는 지성 물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함부로 성소를 보는 것조차도 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있는 자격이 극히 몇 사람에게만 제한되었던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야곱은 아직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만큼 온전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었기에 이때 야곱이 씨름을 한 사람이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야곱이 씨름한 대상을 단지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본문에는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직접 씨름한 것처럼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이 씨름한 것이 정말 사람은 아니었지요.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은 사람과 같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사장이었고 천사장 중에서도 미가엘 천사장이었지요.
그렇다면 천사가 어떻게 사람의 모습을 입고 사람과 더불어 씨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에 창세기 강해를 통해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비록 천사와 같이 영으로만 된 존재라도 육의 형상을 입고 1하늘의 공간으로 나올 수가 있다 했지요.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셨던 세 사람 즉 성령 하나님과 두 분 천사장도 분명히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분들이지만 사람들이 볼 때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계셨고 아브라함이 대접한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밖에 신약에서도 행 5:18-19에 보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말씀하고 있지요.
또한 행 12:7-9에는 옥에 갇힌 베드로 앞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세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했습니다.
영의 존재인 천사가 1하늘의 육의 공간으로 나와 형체를 입고 활동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지요. 바로 이런 것처럼 미가엘 천사장도 하나님의 명을 받아 사람과 같은 육의 형체를 입고 1하늘의 공간으로 나와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에 보면 육으로 생각할 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했습니다. (위골(違骨): 뼈가 제자리에서 물러나 서로 맞지 않게 되는 것)
앞서 야곱이 씨름한 사람은 바로 육의 형체를 입고 있는 미가엘 천사장이라 했는데 미가엘 천사장은 천사장 중에서도 군대장관과 같은 천사장입니다. 그 위엄과 권세와 힘과 능력이 대단하지요.
이러한 미가엘 천사장이 지금 야곱과 씨름을 하면서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켰다”는 것은 육적으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미가엘 천사장은 야곱과 씨름을 할 때 이기지 못한 것일까요? 이 말씀은 실제로 미가엘 천사장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야곱이 어떠한 중심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어떤 것을 한번 마음먹었을 때 결코 중도에 포기하거나 놓지 않는 중심을 가졌지요. 한번 사모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며 한번 명심한 것 역시 절대 잊지 않는 성품입니다. 한번 정한 목표를 반드시 이루는 중심이지요.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간이나 봉사했던 것을 보아도 이러한 야곱의 중심과 성품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라반의 집에서 거부(巨富)가 되기까지 어떻게 행했는지를 보아도 잘 알 수 있고요.
야곱은 지금 바로 이러한 중심으로 미가엘 천사장과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씨름을 하고 있는 대상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응답을 주기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임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니 이제 의지할 데라고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인 급박한 상황에서 야곱은 이처럼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절대 놓칠 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 바로 야곱의 곧은 중심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고요. 야곱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육으로 보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미가엘 천사장을 상대로 하여 결코 포기하거나 놓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야곱의 중심을 보고 “미가엘 천사장이 야곱을 이기지 못한다” 표현했던 것이지요. 육적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볼 때 응답을 줄 수밖에 없을 만큼 야곱이 간절하고 곧은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끼리 싸움을 할 때도 보면 꼭 힘센 아이가 이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힘이 부족하고 어느 모로 보나 밀리는 아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잡고 늘어지게 되면 비록 힘이 센 아이라 해도 그 기세에 눌려서 먼저 포기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되지요.
육으로 보면 야곱도 이와 같았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워낙 굳은 결심을 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중심으로 매달리니 그 중심 앞에 미가엘 천사장이 손을 들어준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지금은 야곱이 적당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정말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구할 때라야 응답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는 미가엘 천사장을 보내실 때 공의의 법칙에 따라 어느 정도 선까지 야곱이 믿음과 중심을 내보여야 만이 응답해 줄 수 있는지를 정하셨지요. 지금 야곱이 바로 그 응답의 선(線)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정해놓은 응답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응답의 선(線)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어느 정도 하다가 ‘왜 아직도 응답이 안 오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믿고 하나님 앞에 맡겼으면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 선을 넘어 응답이 올 때까지 변함없는 중심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단지 하나님 앞에 생명을 다하기까지 매달린다고 해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함께 있어야 하지요. 곧 영혼이 잘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응답받을 그릇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요. 미가엘 천사장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말도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끝까지 버리지 않고,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기적인 생각과 지혜와 틀 그리고 자기적인 방법과 모든 이론 등이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자존심도, 자부심도, 간교한 성품도 하나님 앞에서 다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요. 이러한 것들이 깨어져야 영혼이 잘되는 것이며 영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환도뼈는 넙적 다리뼈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로 몸을 지탱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입니다. 몸이 흔들리지 않고 지탱하게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버팀이 되는 부분이지요. 그런데 환도뼈는 영적으로 곧은 것, 변개치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환도뼈는 사람의 깊은 속 중심이나 그 사람 고유의 존재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요. 아브라함이 그의 늙은 종으로 하여금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도록 할 때를 보아도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게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라 시킵니다. 그 맹세가 변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한다는 의미가 되지요.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 환도뼈를 미가엘 천사장이 쳐서 위골 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게 있어서는 ‘자기’라고 하는 것이 철저히 깨어지는 순간이었지요. 이처럼 자기를 깨뜨리는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있어서 이 순간은 바로 응답의 순간임과 동시에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기도 했지요.
성도 여러분, 육적으로 볼 때 야곱은 20년 동안이나 목동으로서 쉴 새 없이 일을 하면서 다져진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튼튼하고 강건한 몸을 가진 야곱이었지요. 이러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만큼 심한 연단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빠른 시간 안에도 영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이때도 반드시 연단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단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부인하며 깨뜨려 나가는 것이 때로는 쉽지만은 않지요.
‘욥’도 혹독한 연단을 통해 비로소 영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고 하나님을 그처럼 사랑했던 다윗도 혹독한 연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도 길게는 수십 년에 걸친 기나긴 연단의 세월을 통해 영으로 나와지곤 했지요. 바로 그러한 연단이 있었기에 자신을 철저히 깨뜨릴 수가 있었고 그렇게 깨뜨려서 영으로 들어왔기에 귀한 도구로 쓰임받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지금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기에 육으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러나 야곱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으며 하나님 앞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과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요.
그러고 나자 이제야 비로소 야곱에게 응답이 주어지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야곱은 응답을 손에 쥐기까지 마음을 놓지 않았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낸 미가엘 천사장을 통해 축복의 확답을 받게 되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고 나자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가 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음시간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나도 야곱처럼 철저히 깨어져야지’하고 마음에 결심들을 하셨는지요? 지난 시간의 창세기 강해 이후에 오늘 말씀을 사모함으로 기다리면서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니 자신을 깨뜨리고 영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보이셨나요? 예, 오늘 말씀을 통해 ‘나도 야곱처럼 나를 철저히 깨뜨리고 영으로 변화되어야지’ 하며 결심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야곱과 같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오늘 들은 한 편의 말씀을 온전히 여러분의 것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며 이와 함께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준비해 온 사모함과 이 시간 마음에 굳게 다짐한 결심이 변함없어야 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중요합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의 이 순간을 위해 앞서 20년이라는 연단의 세월을 겪었지요. 그러면서 이 순간을 맞을 준비를 해왔던 것이고 이와 함께 그의 변함없는 중심이 있었기에 자신을 철저히 깨뜨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자기’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야곱처럼 오랜 세월의 연단이 필요한 것일까요? 꼭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 동안이나 연단을 받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발견하지도 못했고 자신이 무엇을 깨뜨려야 하는지도 잘 몰랐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다릅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을 철저히 해부해서 낱낱이 자신에 대해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무수한 생명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보다도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들을 수없이 보고 듣고 체험하고 있지요.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으며 불같이 기도할 수 있는 환경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디게 더디게 변화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깨닫고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야곱과 같이 절박한 심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어찌 절박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절박한 심정이 되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지 못하겠으며, 깨닫고도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목자를 사랑한다 하는 고백이 그리고 영을 사모한다는 고백이 정녕 진실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미가엘 천사장과 씨름할 때에 결단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했던 것과 같이 또한 한번 목표하고 잡은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중도에 놓지 않았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이러한 마음과 중심으로 영을 향해 새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간다면 어찌 그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 밤이 바로 이러한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깨어지는 역사가 정녕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여러분이 버리지 못한 것, 깨뜨리지 못한 것, 아직 손에 쥐고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 등을 이 시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깨뜨리며 철저히 벗어내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곱과 같은 심정으로, 그의 마음 자세로 결단하고 행해 나간다면 이루지 못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빌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붙잡고 반드시 이루어 내실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사 41:14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는 말씀대로 야곱과 같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여러분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든든한 방패요, 도움이 되어주시므로 여러분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크게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7-02 오전 4:17:38 Posted
2015-09-24 오전 9:50:25 Updated